러시아 혁명가·초대 계몽인민위원·문예비평가
1917년 11월 15일(구력 2일), 취임 8일 만에 루나차르스키는 크렘린 공격 중 성 바실리 대성당이 포격으로 파괴된다는 소문에 사임을 발표했다. 다음 날 인민위원회가 부적절하다고 판단하자 철회하고 1929년까지 재임했다.
1875년 폴타바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당시 혼인한 바실리 루나차르스키는 폴란드계 귀족 출신으로, 성과 부칭이 여기서 왔다는 기록이 전하나 그를 폴란드 민족으로 단정할 근거는 없다. 1895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들어가 1903년 볼셰비키에 합류했고, 1909년 전진파 결성으로 분파에서 제명되어 카프리·볼로냐의 당 학교를 운영했다. 1917년 메즈라욘치를 거쳐 10월 혁명 뒤 초대 계몽인민위원이 되어 1929년까지 재임했다. 1930년 소련과학원 회원이 되었고, 스페인 대사 부임을 준비하던 1933년 프랑스 망통에서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890s–19041895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취리히에서 아베나리우스에게 사사, 문예비평가로 성장
- 1905–1914볼셰비키 합류와 전진파(Vpered) 논쟁, 혁명문화와 예술정책 구상
- 1908–1911전2권 《종교와 사회주의》 출간
- 1914–171차대전 반대 국제주의 입장, 망명 중 반전 활동
- 1917.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후 7~8월 볼셰비키와 통합
- 1917.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에 합류
- 1917–1929계몽인민위원, 학교·박물관·극장·출판 행정 총괄
- 1918–1921전위예술 후원과 문화유산 보존 사이에서 초기 소비에트 문화정책 조정
- 1923인물평 모음 《혁명적 실루엣》 출간
- 1929–19331929년 가을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학술위원회 의장으로 이동, 이듬해 학술원 회원, 1933년 스페인 대사 임명 뒤 사망
- 1930소련과학원 회원 선출(2월 1일)
관련 역사 사건
- 1905–19071905년 혁명선전가1905년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합법 볼셰비키 일간지 「노바야 지즌」에서 혁명의 선전을 맡았다.
- 1914–19181차 세계대전반전 국제주의자망명 중 반전 활동을 했다.
- 1917.02–072월 혁명메즈라이온치 연설가메즈라이온치의 대중 연설가로 활동했고, 7월 사태 뒤 트로츠키와 함께 체포되었다.
- 1917.10–1918.0110월 혁명교육 인민위원초대 교육 인민위원으로 문화·교육 정책을 맡아 새 정부의 계몽 사업을 시작했다.
- 1921–1928신경제정책(네프)계몽인민위원
- 1928–19375개년 계획과 소련의 대전환계몽 인민위원1929년까지 교육 인민위원으로 재직하며 리크베즈와 보편 교육 체계의 기초를 놓았다.
신건설(보고스트로이첼스트보) — 혁명적 종교의 유혹
루나차르스키의 가장 논쟁적인 지적 모험은 '신건설'(богостроительство)이었다. 1908년과 1911년 사이 출간된 2권의 《종교와 사회주의》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일종의 '종교적' 감수성(우주적 연대감, 집단적 인간의 신격화)을 품고 있으며, 프롤레타리아트는 낡은 신을 파괴하는 대신 인류 집단의 힘 자체를 숭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막스 슈티르너와 니체, 그리고 아베나리우스의 경험비판론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에서 루나차르스키의 입장을 '반동적'이고 관념론적이라 맹렬히 비판했으며, 이 철학적 충돌은 곧 정치적 결별로 이어졌다. 1909년 루나차르스키는 보그다노프, 바자로프와 함께 '전진파(프페료트)' 그룹을 조직해 볼셰비키 분파에서 제명당했고, 카프리 섬과 볼로냐에서 노동자당 학교를 운영하며 독자적인 혁명문화 교육을 시도했다. 1차 세계대전 무렵 그는 점차 신건설에서 물러났고, 1917년 이후에는 자신의 과거 철학을 공개적으로 버렸다. 그러나 신건설 시절의 핵심 통찰(혁명은 단순한 정치·경제 변혁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재탄생이며 문화가 그 매개라는 생각)은 계몽인민위원 시절 그의 문화정책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계몽인민위원 — 문화혁명의 설계자
루나차르스키는 1917년부터 1929년까지 계몽인민위원으로서 소비에트 문화·교육 정책의 기초를 놓았다. 문맹 퇴치 운동(리크베즈), 학교 체계 재편, 박물관·극장·출판의 국유화를 총괄했으며, 옛 문화유산 보존과 전위예술 지원 사이에서 폭넓은 실험을 허용했다. '문화는 모든 노동자의 것'이라는 원칙 아래, 그는 말레비치·마야콥스키 같은 전위예술가들을 국가 예산으로 지원하면서도 차르 시대 미술관의 컬렉션을 한 점도 팔지 않았다. 당내 논쟁에서는 보그다노프의 '전진파'에 가까웠지만 레닌의 신뢰를 잃지 않았고, 1933년 스페인 대사로 임명된 직후 사망했다.
계몽인민위원 이후, 학술원·외교·마지막 나날
1929년 가을 루나차르스키는 계몽인민위원(러시아 연방, 1917년 10월/11월 8일부터 1929년 9월 12일까지)에서 물러나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산하 학술위원회 의장으로 옮겨졌다. 이는 그가 12년간 쌓아온 문화정책의 중심 지위에서 밀려난 것을 뜻했다. 1930년 2월 1일 소련과학원 회원(아카데미크)으로 선출되었고, 1930년대 초에는 코무니다체스카야 아카데미 문학·언어연구소와 소련과학원 러시아문학연구소(ИРЛИ) 소장, 《문학백과사전》 편집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일했다.
이 시기의 저작으로는 《혁신자 마야콥스키》(1931), 《조지 버나드 쇼》(1931), 《막심 고리키》(1932) 등이 있으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레닌·트로츠키를 비롯한 10명의 혁명가를 그린 인물평 모음 《혁명적 실루엣》(1923)이다. 1925년부터 1933년까지 그는 음악과 문학에 관한 수십 편의 글을 꾸준히 썼으나, 시력 완전 상실이 우려될 정도로 병이 악화된 1932년에는 음악에 관한 글을 한 편도 쓰지 못했다.
레닌 사후의 당 분열에서 그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다. 1923년 《혁명적 실루엣》에 트로츠키·지노비예프·마르토프를 그리면서 스탈린은 언급하지 않아 무관하게 휘말릴 뻔했고, 볼쇼이 극장에서 한 발언으로 트로츠키의 심기를 건드리기도 했다. 1927년 무렵부터는 레오폴트 아베르바흐 등 스탈린주의자들에게 문화정책의 통제권을 빼앗기고 있었다. 1933년 9월 그는 스페인 주재 소련 전권대사(폴프레드)로 임명되었으나 건강 악화로 부임지에 도착하지 못했고, 제네바 국제연맹 군축회의 소련 대표단 부단장으로도 활동했다. 그해 12월 스페인으로 가던 길에 프랑스 망통에서 협심증으로 사망했으며, 유해는 화장되어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러시아 사료는 스페인 부임 시기를 1933년 8월 20일~12월 26일로 기록한다.
죽음의 정확한 날짜에는 이견이 있다. 러시아·영어 사료는 1933년 12월 26일로 일치하지만, 우크라이나어 위키백과 정보상자는 같은 문서 본문에서 '그해 12월'이라고 밝히면서도 사망일을 1933년 1월 26일로 적고 있다. 12월 사망이 사료의 지지를 받는 날짜이고, 1월 설은 문서화된 이설·오기로 남긴다.
사후의 운명도 굴곡이 있었다. 크렘린 벽 안장은 당시 드문 예우였다. 그러나 1936~1938년 대숙청기에 그의 이름은 당 역사에서 지워지고 회고록은 출판 금지되었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에 이르러 회고록이 다시 쏟아져 나오고 많은 거리와 기관이 그의 이름을 얻는 재평가가 이루어졌으며, 소련 지식인층은 그를 교양 있고 관용적인 소련 정치가로 기억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