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세이 리보비치 루히모비치

Моисей Львович Рухимович
소련 러시아 1889–1938 ✕ 처형

레닌이 신뢰한 산업 건설자, 국방공업 초대 인민위원

1921년 10월, 레닌의 편지: '내가 욕한 것은 당신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위원회에서 싸우는 법을 배우고, 표결에서 지면 당신의 소수의견을 명확히 정리해 내게 보내주십시오.'

빈트 출신으로 1913년 볼셰비키에 합류한 산업 행정가. 1920년대 초 돈바스 주집행위원장과 도누골 트러스트 책임자로서 파괴된 석탄 산업을 재건했고, 레닌이 직접 편지로 독려했다. 쿠즈바스 석탄 개발로 동부 야금 기지를 확충했으며, 중공업 부인민위원을 거쳐 1936년 12월 신설 국방공업인민위원부의 초대 인민위원이 되었다. 취임 10개월 만에 허위 혐의로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체포, 심문, 처형

루히모비치는 1936년 12월 8일 신설 국방공업인민위원회의 초대 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 10개월 만인 1937년 10월 15일 해임되고 10월 18일 NKVD에 체포되었다. 그해 12월 중앙위원회 위원 자리에서도 축출되었다.

NKVD는 루히모비치에게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 혐의를 씌웠다. 1938년 1월 31일과 2월 8일 두 차례의 심문에서 수사관들은 그가 퍄타코프, 리코프, 크루글리코프 등과 연결된 '우익-트로츠키주의 블록'의 일원으로서 국방공업 전반에 걸쳐 조직적 파괴공작을 지휘했다고 자백할 것을 압박했다. 예조프는 1938년 2월 8일 루히모비치의 심문조서를 스탈린에게 직접 보고했다.

심문조서에 따르면 루히모비치는 결국 자신이 동원계획을 고의로 방치하고, 포탄·화약·독가스·전차·무선통신 등 거의 모든 방위산업 분야에서 '패배를 위한 파괴공작'을 수행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 조서는 NKVD 심문 특유의 유도 신문과 반복 압박, 타인의 '자백'을 들이미는 수법으로 작성된 전형적인 강요 자백 문서였다.

1938년 7월 28일 소련 대법원 군사합의부는 루히모비치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다음날인 7월 29일 총살되었다. 시신은 모스크바 교외의 NKVD 사격장 콤무나르카에 매장되었다. 흐루쇼프 시기인 1956년 3월 14일 군사합의부에 의해 사후 복권되었고, 3월 3일 당 통제위원회에 의해 당적도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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