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무랄로프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Муралов

레닌 묘역 1번 초소를 세운 혁명 군인

1928년 6월 6일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트로츠키에게 보낸 편지: "고백서를 쓰느니 차라리 사지를 찢기는 편을 택하겠다. 나 홀로 남는다 해도 쓰지 않을 것이다."

농장 그레체스키에 로티에서 태어나 17세에 농업학교로 떠났고, 1903년 포돌스크에서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7년 10월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에 참여한 뒤 초대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이 되었고, 내전기에는 동부전선과 제12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을 지냈다. 1923년 46인 성명에 서명해 좌익 반대파에 합류했고, 1927년 제15차 당대회에서 옹호 연설을 한 뒤 제명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으며, 1924년에는 레닌 묘역의 1번 초소를 창설했다. 1936년 4월 17일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체포되어 1937년 1월 30일 사형을 선고받고 2월 1일 처형되었으며, 1986년 4월 대법원이 판결을 취소하고 사후 복권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제15차 당대회 연설과 좌익 반대파 활동

무랄로프는 1923년 10월 당내 민주주의의 쇠퇴와 관료주의화를 비판한 〈46인 성명〉에 서명하며 좌익 반대파에 합류했다. 동료들이 반대파에서 떠나라고 권하자 그는 "나는 트로츠키가 아니라 볼셰비키 노병들을 지지한다. 스탈린은 레닌주의자답게 행동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트로츠키는 회고록에서 무랄로프를 "공포를 모르는 혁명전쟁의 원수…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평온과 확신을 발산했다"고 기록했다.

1927년 12월 제15차 당대회에서 무랄로프는 좌익 반대파를 대표해 발언대에 섰으나, "그만 내려와라!"라는 고함과 야유로 연설이 중단되었다. 그는 "반대 의견을 가진 이들에 대해 우리 당 역사상 전례 없는 조치들이 취해졌다"며 "노련한 당원들이 체임벌린의 앞잡이로 몰리고 있다"고 항변했다. 대회는 그를 당에서 제명했다. 제명 직후 라콥스키와 함께 낸 성명에서 그는 "우리의 견해를 포기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그 견해가 틀렸다고 확신할 때에만 의무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당과 노동계급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1928년 6월 트로츠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랄로프는 "고백서를 쓰느니 차라리 사지를 찢기는 편을 택하겠다"고 썼다. 1930년에는 라콥스키 등과 함께 중앙위원회에 강제 집단화를 비판하는 성명을 제출하여, "완전 집단화라는 구호 자체가 사회주의로부터의 가장 기괴한 일탈"이며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기본적 원칙들과 레닌의 경고들을 위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수년간 견해 철회를 거부해온 무랄로프는 1936년 1월 마지못해 당 복귀를 청원했으나, 3개월 만에 체포되었다.

체포, 제2차 모스크바 재판, 사후 복권

무랄로프는 1936년 4월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당시 쿠즈바스스트로이 공급관리국 농업부서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고, 체포 기록에는 날짜가 4월 17일로 적혀 있으나 4월 18일로 전하는 기록도 있으며 그 기록 자체가 17일설을 이본으로 함께 밝히고 있다. 한 자료는 그가 당 복귀를 청원한 뒤 심사에 필요한 6개월이 지나기 전에 체포되었고, 이 체포가 모스크바 재판을 준비하기 위한 내무인민위원부의 조치였다고 서술한다. 수사 과정에서 그는 고문을 당했고, 1936년 11월 6일 열여섯 살 아들이 체포된 뒤인 12월 5일에야 거짓 자백서에 서명했다. 이 자백은 재판정에 그를 세운 강압의 연쇄를 보여준다.

기소 내용은 그를 보구슬라프스키, 드로브니스와 함께 노보시비르스크의 서시베리아 반소비에트 트로츠키스트 센터를 조직하고 파괴활동과 간첩, 테러 활동을 지도한 인물로 규정했다. 재판은 1937년 1월 23일부터 30일까지 소련 대법원 군사재판소에서 열린 제2차 모스크바 재판, 즉 '평행 반소비에트 트로츠키스트 센터' 사건이었고, 피고 17명 전원에게 유죄가 선고되어 13명이 사형을 받았다. 판결문은 무랄로프를 퍄타코프, 세레브랴코프, 드로브니스, 리프시츠, 보구슬라프스키와 함께 조직 활동을 '조직하고 직접 지도한' 집단에 넣었고, 공표된 형량 명단은 그를 사형 선고자 가운데 세 번째로 올렸다. 그는 다른 피고들과 함께 1937년 1월 30일 사형을 선고받고 2월 1일 총살되었다. 사형을 면한 네 명은 1939년에서 1941년 사이 구금 중에 죽었다.

복권 시점에 대해서는 기록이 갈린다. 다수 기록에 따르면 소련 대법원 전원합의부가 1986년 4월 판결을 취소하고 그를 사후 복권했으며, 1986년 4월 17일이라는 더 구체적인 날짜를 제시하는 자료도 있다. 반면 한 트로츠키주의 계열 자료는 복권을 페레스트로이카 후기로 잡아 형사상으로는 1987년, 당적 차원에서는 1990년에 이루어졌다고 서술하고, 나머지 가족은 1956년 제20차 당대회 이후 흐루쇼프 아래에서 복권되었다고 덧붙인다. 사형 집행과 안장에 관해서는 모스크바에서 처형되어 돈스코이 묘지에 묻혔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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