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경제회의 첫 의장, 좌파 공산주의와 민주집중제의 이론가
국가은행 관료들의 태업을 진압하라는 임무를 맡아 1917년 11월 은행의 초대 관리자가 되었고 금고 열쇠와 인민위원회 자금을 넘겨받았으며, 12월 23일에는 최고경제회의 초대 의장으로 옮겼다.
쿠르스크현의 소지주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모스크바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7년 11월 국가은행 관리자로 임명되어 은행 금고 열쇠와 자금을 확보했고, 그해 12월 최고경제회의(VSNKh) 초대 의장에 올랐다.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반대한 좌파 공산주의자 그룹의 이론적 지도자였으며, 1920~21년에는 소수파의 의견 개진과 공개 토론을 요구한 민주집중제 그룹을 공동 지도했다. 이후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과 중앙통계국장을 지냈고,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9월 1일 처형되었으며 1957년 복권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17–1918 경제·재정·계획 · 소련 · 경제 운영
경력 연표
- 1907볼셰비키 입당, 모스크바·트베리·하리코프에서 활동
- 1911모스크바대학 법학부 졸업
- 1917.12–1918.3최고경제회의(VSNKh) 초대 의장 겸 국가은행 초대 관리자
- 1918좌파 공산주의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반대 플랫폼 공동 집필
- 1920–21민주집중제 그룹 공동 지도자
- 1921–23농업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23–24스웨덴 주재 소련 전권대표
- 1925고스플란 간부회 위원
- 1926–28소련 중앙통계국(CSO) 국장
- 1929–30최고경제회의 부의장
- 1932–37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겸 수확고·총수확량 산정 국가위원회 의장
- 1932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35전연방농업과학아카데미(VASKhNIL) 정회원
- 1935–37과학기술사연구소 소장
- 1937.10체포
- 1938.9.1처형; 1957년 복권
관련 역사 사건
- 1918–1922내전과 열강의 개입최고경제회의 의장 및 좌파 공산주의자
- 1921–1928신경제정책(네프)민주중앙집권파 지도자
- 1923–1927레닌 사후 권력투쟁과 좌익 반대파좌익 반대파 인사이자 선언 서명자1923년 「46인의 선언」에 서명하고 1924년 트로츠키를 지지했다.
- 1928–19375개년 계획과 소련의 대전환최고경제회의 초대 의장최고경제회의(VSNKh)를 처음 이끈 경제 행정가로 계획 논쟁에 참여했다.
- 1937–1938대숙청구볼셰비키 경제학자·통계학자, 대숙청의 표적1937년 10월 14일 체포되어 1938년 3월 부하린-리코프 재판에 증인으로 소환되었고, 1938년 9월 1일 사형 선고 후 당일 총살되었다. 1957년 복권.
좌파 공산주의자와 『코무니스트』 (1918)
1918년 봄, 오볼렌스키(오신스키)는 니콜라이 부하린, 카를 라데크 등과 함께 좌파 공산주의자 그룹의 이론적 지도자로 활동하며 기관지 『코무니스트』의 주요 필진으로 참여했다. 이 그룹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반대했을 뿐 아니라, 혁명의 사회적 방향에 대한 근본적 우려를 제기했다. 오신스키는 이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구 자본가와 차르 장교에 대한 의존이 국가자본주의로의 퇴행을 초래할 위험을 경고하며, 관료적 관리가 노동자 통제를 대체하는 현실을 비판했다. 그에게 사회주의는 위로부터 포고될 수 없으며 노동계급 자신의 주도에 의해서만 건설될 수 있는 것이었다. 「사회주의는 소수, 즉 당에 의해 실현될 수 없다. 그것은 수천만 대중이 스스로 실천하는 법을 배울 때 비로소 실현된다」는 레닌의 초기 입장을 옹호하면서도, 오신스키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문제와 생산 조직 문제를 결부시킴으로써 레닌에게 「혁명적 구호주의자」로 공격받을 빌미를 주었다. 1918년 3월 조약 체결 후 그는 부하린, 블라디미르 스미르노프 등과 함께 모든 관직에서 사임했다. 좌파 공산주의자 그룹은 패배했지만, 국가자본주의의 위험에 대한 오신스키의 분석은 소비에트 관료제 국가의 궤적을 선구적으로 예견한 통찰로 평가된다.
아흐마토바를 옹호하다
야당과의 결별과 순응의 시기 (1924~1930)
1923년 10월 오신스키는 당내 민주주의를 요구한 「46인의 선언」에 서명했고, 1924년 초 레닌 사후의 권력 투쟁에서 트로츠키를 지지한 좌파 야당의 주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곧 이 야당과 결별하고 당의 노선에 순응하는 길로 돌아섰다. 러시아 측 자료는 그가 1923~24년 트로츠키를 따르다가 그와 결별하고 자신의 입장을 철회해 사죄했다고 적는다. 다른 야당 인사들처럼 해외로 나간 그는 1924년 3월부터 10월까지 스웨덴 주재 소련 전권대표를 지냈고, 이어 미국에 장기 무역 사절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자동차 산업에 매료된 그는 자동차 운송을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극복할 수단으로 보았으며, 이후 고리키 자동차 공장의 창립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귀국 후 그는 야당과 완전히 결별했고 1925년 12월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어 통치 기구에 들어섰다. 1928년 스탈린이 강제 집단화를 시작하자 그는 부하린의 우파 야당과 일시적으로 다시 손을 잡았다. 그는 농산물 가격을 올려 농촌의 생활 수준을 개선하고 곡물의 자발적 매도를 촉진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 제안은 1928년 7월 중앙위원회에서 스탈린의 반대에도 채택되었다. 대규모 집단농장의 수익성을 확인하기 전에 창설하는 데 반대한 주장은 관철되지 못했다.
1929년 12월부터 1930년 12월까지 그는 최고경제회의 부의장을 지냈다. 1930년 여름 그는 인민위원 보로실로프가 항공 산업에 대한 통제권을 최고경제회의로부터 넘겨받으려는 시도를 저지하려 했으나, 스탈린은 보로실로프의 편을 들어 그를 「뻔뻔하다」고 비난했고 그는 넉 달 뒤 직위에서 물러났다. 1932년 12월부터 1937년 3월까지는 수확고와 총수확량 산정 국가위원회 위원으로서 여러 주에서 파종 목표를 정했는데, 당 결정에 따라 지역의 전통과 토양 적합성을 자주 무시한 규범을 지시했다. 이는 강제 집단화와 중앙집권적 농업 통제가 우크라이나의 홀로도모르 같은 참변을 낳은 시기와 겹친다.
세계경제 분석과 위기 이론
오신스키는 1920년대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세계경제 분석의 선구자였다. 1923년 독일 루르 위기와 자본주의 안정화 논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세계적 농업위기》(1923)를 발표하고, 이듬해 《세계경제와 위기》(1924)에서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론을 체계적으로 검토했다. 이 저작들은 코민테른의 세계자본주의 분석에서도 폭넓게 참조되었다. 1925년 출간한 《세계농업시장 개관》은 곡물·면화·육류 등 주요 상품 시장을 실증적으로 비교한 방대한 연구였고, 같은 해 발표한 《미국 농업의 최신 연구》 및 이듬해의 북미 농업 답사 보고서는 소련에서 미국식 농업 경영과 기술을 이해하는 기초 문헌이 되었다. 1926년 공산주의아카데미 산하 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 소장에 취임하여 국제경제 분석을 제도화했으며, 1928년에는 국제적·대륙간 인구 이동에 관한 실증 연구도 발표했다. 그의 세계경제 연구는 추상적 도식이 아니라 통계와 현장 조사에 기반한 구체적 분석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독창적이었으며, 이후 소련의 경제학 및 계획 실무에 실증적 방법론을 정착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