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른베르크의 소련 수석검사, 소련 검찰을 28년간 이끈 최장수 검찰총장
1946년 2월 8일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루덴코는 나치 지도부를 향해 그들이 '식인종의 도덕과 강도의 탐욕'을 독일 민족에게 주입했다고 규탄하며 소련 검찰의 개시 진술을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코사크 가문 출신으로 1926년 입당, 1944년 우크라이나 검사장이 되었다. 1945~1946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소련 수석검사로 괴링을 신문하며 나치 전쟁범죄의 실체를 법정에 세웠다. 1953년부터 사망 시까지 28년간 소련 검찰총장으로 재임하며 베리야 재판을 주도하고 정치범 재활위원회를 이끌어 흐루쇼프 해빙기의 사법 복권을 추진했다. 브레즈네프 시기에는 안드로포프와 함께 반체제 인사에 대한 '예방적 경고' 제도를 도입하고 1979년 소련 검찰법 제정으로 검찰 제도의 법적 기반을 완성했다.
경력 연표
- 1929체르니고프 지역 검찰청 수사관
- 1937–1938도네츠크 주 검사
- 1938–1940스탈리노 주 검사
- 1942–1944우크라이나 SSR 부검사장
- 1944–1953우크라이나 SSR 검사장
- 1945–1946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소련 수석검사
- 1953–1981소련 검찰총장
- 1961–1981CPSU 중앙위원회 위원
관련 역사 사건
대숙청 시기: 트로이카와 집단 처형
루덴코의 경력에서 가장 어두운 장은 1937~1938년 대숙청 시기 도네츠크(이후 스탈리노) 주 검사로 재직하며 NKVD 특별트로이카 위원으로 활동한 시기다. NKVD 명령 제00447호에 따라 구성된 이 트로이카는 '반소비에트 분자'에 대한 신속한 약식 재판을 수행했으며, 검사·당서기·NKVD 국장 3인으로 구성되었다. 전 우크라이나 KGB 문서보관소 연구자 콘스탄틴 보구슬랍스키의 기록에 따르면, 루덴코는 '쿨라크 작전'으로 사형 판결을 받은 9,801명과 '민족 작전'(독일인·폴란드인·라트비아인·핀란드인 등)으로 추가 2,500여 명의 사형 판결에 직접 관여했다. 일부 처형 현장에는 루덴코가 직접 참관하기도 했다.
냉혹한 통계 너머에는 전시 책임의 아이러니가 놓여 있다. 나치 전범을 법정에 세운 지 10년도 채 되지 않아 자신도 전범과 동일한 죄목(민간인에 대한 집단 살인)을 저지른 셈이다. 1954년, 스탈린 사후 루덴코는 흐루쇼프에게 1921~1954년 사이 억압된 인원 통계를 제출하며 "법적 규범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사람들을 유죄 판결할 어떤 자료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개인의 자백에 근거했을 뿐이며, 신체적·정신적 고문으로 얻어낸 자백은 유죄 판결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인정했다. 흐루쇼프가 피고인들이 직접 자백하는 것을 들었다고 반박하자 루덴코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것이 바로 수사와 재판을 진행한 자들의 기술입니다. 사람들을 고통과 모욕을 끝낼 유일한 방법이 자백이고 그 다음은 죽음뿐인 상태로 몰아넣은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