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레스트로이카 경제개혁기의 총리
1990년 5월 24일, 전국에 생중계된 최고회의에서 "빵과 식료품 가격이 터무니없이 낮으며 인상되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상품 부족과 배급제가 일상이 된 시점에서 이 장면은 리시코프 내각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결정적으로 무너뜨렸다.
우랄 공업 관리자 출신으로 고르바초프의 총리가 되어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경제를 이끌었지만, 시장개혁과 계획경제 보존 사이에서 흔들렸다. 체르노빌 사고 수습과 아르메니아 지진 복구를 진두지휘했으나, 재임 말기 공산품 부족과 배급제가 도입되는 경제 위기를 맞았다. 1991년 초 심장발작으로 물러난 뒤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옐친에 이어 2위를 기록했고, 이후 20년간 연방평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2024년 94세로 사망했다.
경력 연표
- 1985–1991.1각료회의 의장
관련 역사 사건
- 1985–1991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경제개혁 총리총리로서 경제개혁의 실무를 맡았다.
- 1985–1988반알코올 캠페인총리로서 재정 수입 감소를 들어 감산의 속도에 제동을 걸려 했다.
- 1986체르노빌 참사정부위원회 위원장총리로서 사고 수습을 지휘한 정부위원회를 이끌었다.
- 1988–1990제19차 당협의회와 최초의 경쟁 선거소련 각료회의 의장2월 플레넘에서 대통령제 도입에 반대했고, 3월 대의원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사퇴해 고르바초프의 무경쟁 당선을 가능케 했다.
- 1987–1991경제 개혁 논쟁과 500일 계획총리로서 「규제된 시장」의 온건 노선을 지켰다.
우랄마시의 지배인, 기술관료가 총리가 되기까지
니콜라이 리시코프는 1929년 돈바스의 광부 집안에서 태어나 우랄로 가서 기계 제작을 배웠다. 그의 학교는 소련 중공업의 상징인 우랄마시(우랄중기계공장)였다. 현장 기사에서 시작해 1970년 마흔한 살에 이 거대 공장의 총지배인이 되었고, 이후 중기계건설부 차관과 고스플란 제1부의장을 지냈다. 당 경력이 아니라 공장 경력으로 정상에 접근한, 소련 후기 기술관료의 전형이었다.
1982년 안드로포프는 그를 중앙위원회 경제부장으로 발탁해 고르바초프, 돌기흐와 함께 경제 현황을 진단하는 작업을 맡겼다. 이때의 보고서들은 훗날 페레스트로이카의 밑그림이 되었다. 1985년 9월 그는 여든 살의 티호노프를 대신해 각료회의 의장(총리)이 되었다. 쉰여섯의 총리는 새 지도부의 젊음을 상징했다.
그는 근대화된 계획경제, 질서 있는 개혁을 믿었다. 공장을 다뤄 본 사람답게 생산 현장의 사정에 밝았고, 관료적 냉담과는 거리가 먼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 감정은 1988년 12월 아르메니아 대지진의 폐허에서 온 나라가 보는 앞에 드러나게 된다.
체르노빌 참사 대응, 1986년 5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4호기가 폭발한 것은 1986년 4월 26일이었다. 사고 일주일 후인 5월 2일부터 3일까지, 각료회의 의장이었던 리시코프는 예고르 리가초프와 함께 체르노빌 현장을 직접 방문했다. 이는 소련 최고 지도부의 첫 현장 확인이었다. 방문 직후 리시코프는 발전소 반경 30킬로미터 이내의 모든 주민을 대피시키라고 정부에 명령했다. 30킬로미터라는 수치는 과학적 계산보다는 사실상의 추정에 가까웠고, 이후 방사능 오염 지역 일부가 대피 구역 밖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원자력학자 발레리 레가소프는 리시코프가 사고 수습 작업의 조직화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리시코프는 훗날 체르노빌이 총리 재임 중 가장 무거운 시련이었다고 회고했다.
1988년 12월, 아르메니아의 폐허에서 운 총리
1988년 12월 7일 아르메니아 북부를 강타한 지진은 2만 5천 명이 넘는 목숨을 앗아 갔다. 리시코프는 구호 작업의 총책임을 맡아 몇 주간 현장에 살다시피 했다. 폐허 앞에서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총리의 모습은 전국에 방영되었고, 인정 많은 관료라는 그의 대중적 이미지는 이때 만들어졌다. 아르메니아는 이를 잊지 않아 2008년 그에게 아르메니아 민족영웅 칭호를 주었다. 소련 해체 후 외국 정상급 인사에게 주어진 드문 예우였다.
총리로서 그의 성적표는 그보다 어두웠다. 국영기업법과 협동조합법이 그의 정부에서 나왔지만, 가격 개혁이 미뤄진 부분 개혁은 재정 적자와 물자 부족을 함께 키웠다. 1990년 5월 그가 빵값 인상 계획을 발표하자 전국의 상점에서 사재기가 벌어졌고, 그의 정치적 위신은 회복되지 못했다.
실각 이후의 긴 두 번째 삶
1990년 가을 500일 계획 논쟁에서 리시코프의 「규제된 시장」 노선은 급진파의 표적이 되었다. 시장으로 가자니 계획을 버려야 했고 계획을 지키자니 상점이 비어 갔다. 양쪽에서 두들겨 맞던 그는 12월 심장발작으로 쓰러졌고, 이듬해 초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소련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총리였다.
1991년 6월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공산당의 사실상 후보로 나서 16.8%로 2위를 했다. 옐친의 시대에 그는 패자였지만, 퇴장하지는 않았다. 두마 의원을 거쳐 2003년부터는 벨고로드주를 대표하는 연방회의(상원) 의원으로 20년을 더 일했고, 2023년에야 의석을 내려놓았다. 2024년 그는 94세로 죽었다.
소련 총리 가운데 가장 오래 산 그는 회고록에서 페레스트로이카를 「배신의 역사」라 불렀다. 자신이 지키려 한 것은 사회주의적 계획의 합리적 핵심이었다는 것이다. 경제사가들은 그의 정부를 두고, 개혁의 필요를 알았으나 가격이라는 심장부에 손대지 못한 채 최악의 중간지대에 머문 사례로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