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야코블레프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Яковлев
소련 러시아 1923–2005 ○ 자연사

글라스노스트의 설계자: 이념 담당이 이념을 해체하다

1983년 5월 19일, 온타리오 주 애머스트버그의 유진 웰런 농장. 옥수수와 콩밭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며 야코블레프는 캐나다 대사 10년차의 주의를 내던졌다. "어째서인지 나는 조심을 집어던지고 그에게 외교 문제의 어처구니없는 실책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산책이 끝날 무렵, 두 사람은 체제 개혁의 동지가 되어 있었다.

전쟁에서 다리를 다친 상이군인이자 당 선전부의 엘리트. 러시아 민족주의를 비판한 논문으로 캐나다 대사 10년의 「유배」를 살았고, 그곳에서 시찰 온 고르바초프를 만났다. 정치국의 이념 담당으로 글라스노스트와 역사 재심을 밀어붙였고, 말년에는 비밀 의정서와 숙청 문서의 공개·복권 작업을 이끌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상이군인, 컬럼비아 유학생, 그리고 1972년의 필화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는 1923년 야로슬라블의 농촌에서 태어났다. 열여덟에 해군 보병 소대장으로 전선에 나가 1943년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중상을 입고 평생 다리를 절었다. 전후 당 선전 기구에서 경력을 쌓던 그는 1958년 소련과 미국의 첫 교환학생 교류로 컬럼비아대학에서 1년을 보냈다. 적성국의 심장에서 보낸 이 한 해는 훗날 보수파가 그를 「미국의 간첩」으로 모는 근거가 되었고, 본인에게는 바깥세상의 척도를 얻은 시간이 되었다.

1972년 중앙위 선전부 부부장 대행이던 그는 「반역사주의에 반대한다」라는 장문의 논설로 러시아 민족주의와 국수주의의 대두를 정면 비판했다. 논설은 브레즈네프 지도부의 심기를 건드렸고, 그는 캐나다 대사로 사실상 유배되었다. 유배는 10년간 이어졌다.

1983년 5월, 농업 시찰차 캐나다를 방문한 정치국원 고르바초프와 대사 야코블레프는 앨버타의 농장 사이를 걸으며 흉금을 터놓았다. 두 사람 모두 훗날 이 대화를 「모든 것을 말해 버린」 순간으로 회고했다. 그해 야코블레프는 10년 만에 모스크바로 돌아와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 소장이 되었고, 고르바초프의 집권과 함께 당 기구의 심장부로 복귀했다.

고르바초프의 오른편, 2년 만에 정치국까지

1985년 야코블레프는 중앙위 선전부장이 되었고, 1986년 서기, 1987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다. 예순을 넘긴 나이에 2년 만에 당의 정점까지 오른 이 속도는 고르바초프가 그를 얼마나 필요로 했는지 보여 준다. 그는 언론사 편집인 인사를 통해 글라스노스트의 진지를 구축했고, 신사고 외교의 문서들을 다듬었으며, 스탈린 시대 탄압 희생자 복권 위원회를 이끌었다.

정치국 안에서 그는 리가초프와 대척점에 섰다. 한쪽에 규율의 사회주의가 있었다면 다른 쪽에는 자유의 사회주의가 있었고, 1988년 니나 안드레예바 사건에서 프라우다의 반박문을 집필해 개혁 노선을 지켜 낸 것도 그였다. 보수파에게 그는 「페레스트로이카의 악마」였고, 크류치코프KGB는 그를 서방 정보기관의 영향권 인물로 모는 보고서까지 만들었다.

만년의 그는 마르크스주의 자체와 결별했다고 공언한 드문 전직 정치국원이 되었다. 그의 사상적 여정이 확신의 진화였는지 배교였는지를 두고 논쟁은 계속되지만, 소련 언론사에서 1985년부터 1988년 사이의 개방이 그의 손을 거쳐 제도화되었다는 사실에는 이론이 없다.

1985–1988년, 글라스노스트의 설계자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는 전쟁 세대였다. 1941년 열여덟 살에 해병여단 소대장으로 참전한 그는 볼호프 전선에서 중상을 입고 평생 다리를 절었다. 전후 당 선전 기구에서 경력을 쌓았으나, 1972년 러시아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논문으로 보수파의 반발을 사 캐나다 대사로 사실상 좌천되었다. 10년의 명예 유배 동안 그는 서방 사회를 관찰했고, 1983년 캐나다를 방문한 고르바초프와 사흘간 나눈 대화에서 개혁의 동지를 발견했다.

고르바초프는 그를 모스크바로 불러들여 1985년 당 선전부장으로, 1987년 정치국원으로 초고속 승진시켰다. 야코블레프는 글라스노스트의 실무 설계자였다. 그는 『오고뇨크』와 『모스크바 뉴스』 등에 개혁파 편집장들을 앉혔고, 금지되었던 영화들을 개봉시켰으며, 스탈린 시대 탄압 희생자 복권을 심의하는 정치국 위원회를 이끌었다. 1989년에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비밀의정서의 존재를 공식 인정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보수파에게 그는 「페레스트로이카의 악령」이었고, 개혁파에게는 「글라스노스트의 아버지」였다. 어느 쪽이든, 1980년대 후반 소련의 정신적 풍경을 그만큼 바꾼 인물이 드물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탈소비에트화의 이데올로그, 그리고 문서고

소련 해체 후 야코블레프의 사상적 여정은 마르크스주의와의 전면 결별로 끝났다. 그는 만년의 저작들에서 소비에트 체제를 개혁 불가능한 범죄적 체제로 규정했고, 자신이 오래전부터 체제를 안에서부터 허물기 위해 「스탈린을 때려 레닌을 치는」 우회 전술을 썼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회고적 주장에 대해 아치 브라운을 비롯한 연구자들은 신중하다. 동시대 기록 속의 야코블레프는 파괴자가 아니라, 사회주의의 민주적 갱신을 진지하게 믿었던 개혁 공산주의자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의 만년에서 가장 논쟁적인 유산은 이데올로기였고, 가장 값진 유산은 문서였다. 그는 옐친 정부에서 정치탄압 희생자 복권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국제민주주의재단을 세워 「러시아 20세기」 문서집 총서로 방대한 당·국가 기밀문서를 공간했다. 오늘날 역사가들이 소비에트사를 문서로 검증할 수 있게 된 데에는 그의 몫이 있다.

그는 2005년 10월 18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사회주의의 깃발 아래 전쟁에서 피를 흘린 청년이 그 체제의 가장 철저한 부정자로 생을 마친 궤적은, 페레스트로이카 세대가 겪은 환멸의 깊이를 보여주는 초상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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