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라스노스트의 설계자: 이념 담당이 이념을 해체하다
1983년 5월 19일, 온타리오 주 애머스트버그의 유진 웰런 농장. 옥수수와 콩밭 사이 길을 걸으며 야코블레프는 훗날 "조심을 내던졌다"고 말했고, 외교의 어처구니없는 실책들을 털어놓았다. 그 산책 끝에 둘은 개혁의 동지가 되었다.
1923년 12월 2일 야로슬라블현 코롤료보 마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41년 징집되어 해병여단 소대장으로 볼호프 전선에서 싸우다 1942년 8월 양다리에 중상을 입고 1943년 2월 제대했다. 1944년 당에 입당했고, 1953년 중앙위 기구로 옮겨 1958~59년 컬럼비아대학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다녀왔다. 1972년 11월 국수주의를 비판한 논설로 당 기구에서 밀려나 1973년부터 10년간 캐나다 대사로 있었다. 1983년 8월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 소장이 되었고, 1985년 선전부장, 1987년 정치국원으로서 글라스노스트를 밀어붙였다. 2005년 10월 18일 오랜 지병 끝에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53 이념·선전 · 소련 · 이념 · 선전
경력 연표
- 1941–43해병여단 소대장; 1942년 8월 중상, 1943년 2월 제대
- 1953–72중앙위 기구에서 성장, 선전부 부부장 대행
- 1973–83캐나다 대사 10년
- 1983–85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 소장
- 1985–90선전부장, 정치국원: 글라스노스트 설계
- 1989–비밀의정서 조사위원장, 이후 복권위원회 위원장
소련 정치국
- 정위원 1987.06–1990.07
1990.07 미재선
관련 역사 사건
- 1941–1945대조국전쟁전선 복무 중 중상, 해병대 자원입대
- 1985–1991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글라스노스트의 설계자이념 담당으로서 검열을 풀고 개방을 설계했다.
- 1985–1989신사고 외교와 냉전의 종식신사고의 이념적 설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 1988–1990제19차 당협의회와 최초의 경쟁 선거정치개혁 구상의 이론적 뒷받침을 맡았다.
- 1988–1991민족위기와 중앙권력의 붕괴개혁파 · 발트 정책개혁파의 이론가로 독소불가침조약 비밀의정서 조사를 이끌어 발트의 주권 주장에 근거를 열었다.
- 1987–1991발트 독립운동과 「발트의 길」비밀의정서 조사위원회를 이끌어 병합 무효론에 소련 스스로의 근거를 만들어 주었다.
- 19891989년 동유럽 혁명글라스노스트 설계자, 이념적 해체 주도
- 19918월 쿠데타와 소련의 해체쿠데타를 경고글라스노스트의 설계자로 쿠데타 직전 당을 떠나며 다가오는 반동을 경고했다.
상이군인, 컬럼비아 유학생, 그리고 1972년의 필화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는 1923년 야로슬라블의 농촌에서 태어났다. 열여덟에 해군 보병 소대장으로 전선에 나가 1943년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중상을 입고 평생 다리를 절었다. 전후 당 선전 기구에서 경력을 쌓던 그는 1958년 소련과 미국의 첫 교환학생 교류로 컬럼비아대학에서 1년을 보냈다. 적성국의 심장에서 보낸 이 한 해는 훗날 보수파가 그를 「미국의 간첩」으로 모는 근거가 되었고, 본인에게는 바깥세상의 척도를 얻은 시간이 되었다.
1972년 중앙위 선전부 부부장 대행이던 그는 「반역사주의에 반대한다」라는 장문의 논설로 러시아 민족주의와 국수주의의 대두를 정면 비판했다. 논설은 브레즈네프 지도부의 심기를 건드렸고, 그는 캐나다 대사로 사실상 유배되었다. 유배는 10년간 이어졌다.
1983년 5월, 농업 시찰차 캐나다를 방문한 정치국원 고르바초프와 대사 야코블레프는 앨버타의 농장 사이를 걸으며 흉금을 터놓았다. 두 사람 모두 훗날 이 대화를 「모든 것을 말해 버린」 순간으로 회고했다. 그해 야코블레프는 10년 만에 모스크바로 돌아와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 소장이 되었고, 고르바초프의 집권과 함께 당 기구의 심장부로 복귀했다.
고르바초프의 오른편, 2년 만에 정치국까지
1985년 야코블레프는 중앙위 선전부장이 되었고, 1986년 서기, 1987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다. 예순을 넘긴 나이에 2년 만에 당의 정점까지 오른 이 속도는 고르바초프가 그를 얼마나 필요로 했는지 보여 준다. 그는 언론사 편집인 인사를 통해 글라스노스트의 진지를 구축했고, 신사고 외교의 문서들을 다듬었으며, 스탈린 시대 탄압 희생자 복권 위원회를 이끌었다.
정치국 안에서 그는 리가초프와 대척점에 섰다. 한쪽에 규율의 사회주의가 있었다면 다른 쪽에는 자유의 사회주의가 있었고, 1988년 니나 안드레예바 사건에서 프라우다의 반박문을 집필해 개혁 노선을 지켜 낸 것도 그였다. 보수파에게 그는 「페레스트로이카의 악마」였고, 크류치코프의 KGB는 그를 서방 정보기관의 영향권 인물로 모는 보고서까지 만들었다.
만년의 그는 마르크스주의 자체와 결별했다고 공언한 드문 전직 정치국원이 되었다. 그의 사상적 여정이 확신의 진화였는지 배교였는지를 두고 논쟁은 계속되지만, 소련 언론사에서 1985년부터 1988년 사이의 개방이 그의 손을 거쳐 제도화되었다는 사실에는 이론이 없다.
1985–1988년, 글라스노스트의 설계자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는 전쟁 세대였다. 1941년 열여덟 살에 해병여단 소대장으로 참전한 그는 볼호프 전선에서 중상을 입고 평생 다리를 절었다. 전후 당 선전 기구에서 경력을 쌓았으나, 1972년 러시아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논문으로 보수파의 반발을 사 캐나다 대사로 사실상 좌천되었다. 10년의 명예 유배 동안 그는 서방 사회를 관찰했고, 1983년 캐나다를 방문한 고르바초프와 사흘간 나눈 대화에서 개혁의 동지를 발견했다.
고르바초프는 그를 모스크바로 불러들여 1985년 당 선전부장으로, 1987년 정치국원으로 초고속 승진시켰다. 야코블레프는 글라스노스트의 실무 설계자였다. 그는 『오고뇨크』와 『모스크바 뉴스』 등에 개혁파 편집장들을 앉혔고, 금지되었던 영화들을 개봉시켰으며, 스탈린 시대 탄압 희생자 복권을 심의하는 정치국 위원회를 이끌었다. 1989년에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비밀의정서의 존재를 공식 인정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보수파에게 그는 「페레스트로이카의 악령」이었고, 개혁파에게는 「글라스노스트의 아버지」였다. 어느 쪽이든, 1980년대 후반 소련의 정신적 풍경을 그만큼 바꾼 인물이 드물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1990~1992년, 기구에서 민주개혁운동으로
1988년 10월부터 야코블레프는 1930~40년대 탄압을 조사하는 정치국 위원회를 이끌었고, 1989년 인민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12월 제2차 인민대의원대회에서 그는 1939년 불가침조약과 그 비밀의정서가 낳은 결과에 대한 보고를 행했다.
1990년 3월부터 1991년 1월까지 그는 소련 대통령위원회 위원이었다. 이 기구에 임명된 다음 날 그는 정치국에서 물러나겠다는 요청과 중앙위 서기 직무를 내려놓겠다는 요청을 제출했다(정치국원직은 1990년 7월 13일까지 유지되었다). 1990년 제28차 당대회에서 그는 서기장 후보 지명을 사퇴했다. 대통령위원회가 해산된 뒤에는 소련 대통령 선임고문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91년 7월 29일 소련 대통령 선임고문직에서 물러났다. 소련의 장래를 두고 고르바초프와 갈라섰기 때문이며, 야코블레프는 연방(콘페데라치야) 구상을 주장했다. 같은 달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와 함께 당의 대안으로 민주개혁운동을 창설했다.
당 탈퇴를 두고는 기록이 갈린다. 1991년 8월 15일 그가 당에서 제명되었다는 설명과, 같은 해 8월 17일 그가 스스로 탈당했다는 설명이 함께 전해진다. 8월 쿠데타 기간에 그는 국가비상위원회에 맞서 러시아 정부와 보리스 옐친을 지지했다. 1991년 9월 말에는 소련 대통령 밑 특별임무 담당 국가고문 및 정치협의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여기에는 출처 간 시점 차이도 있다. 영어권 서술은 그가 제28차 당대회가 끝난 다음 날 정치국을 떠났고, 1991년 5월 옛 후배 겐나디 주가노프의 거센 공격을 받은 뒤 8월 쿠데타 이틀 전에 당을 떠나 민주 야당에 합류했다고 전하며, 쿠데타 진압 후 그가 고르바초프의 순진함, 곧 쿠데타 주모자들을 측근으로 끌어들인 것을 비판했다고 적는다.
1991년 리투아니아 사건은 이 전환기의 곁에 놓인다. 독립을 요구하는 리투아니아 군중 앞에서 고르바초프가 무력 진압을 두고 야코블레프에게 "쏴야 합니까"라고 물었고, 야코블레프는 무장하지 않은 군중을 향해 소련 병사 한 명이 총알 한 발을 쏘는 순간 소련 권력도 끝장이라고 답했다고 조너선 브렌트의 『스탈린 문서고 안에서』(2008)는 전한다.
탈소비에트화의 이데올로그, 그리고 문서고
소련 해체 후 야코블레프의 사상적 여정은 마르크스주의와의 전면 결별로 끝났다. 그는 만년의 저작들에서 소비에트 체제를 개혁 불가능한 범죄적 체제로 규정했고, 자신이 오래전부터 체제를 안에서부터 허물기 위해 「스탈린을 때려 레닌을 치는」 우회 전술을 썼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회고적 주장에 대해 아치 브라운을 비롯한 연구자들은 신중하다. 동시대 기록 속의 야코블레프는 파괴자가 아니라, 사회주의의 민주적 갱신을 진지하게 믿었던 개혁 공산주의자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의 만년에서 가장 논쟁적인 유산은 이데올로기였고, 가장 값진 유산은 문서였다. 그는 옐친 정부에서 정치탄압 희생자 복권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국제민주주의재단을 세워 「러시아 20세기」 문서집 총서로 방대한 당·국가 기밀문서를 공간했다. 오늘날 역사가들이 소비에트사를 문서로 검증할 수 있게 된 데에는 그의 몫이 있다.
그는 2005년 10월 18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사회주의의 깃발 아래 전쟁에서 피를 흘린 청년이 그 체제의 가장 철저한 부정자로 생을 마친 궤적은, 페레스트로이카 세대가 겪은 환멸의 깊이를 보여주는 초상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