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용어 사전중국국민당

쑨원

孙中山
중국국민당 민족주의 중국 중국 1866–1925 ○ 간암

중화민국의 「국부」, 삼민주의와 제1차 국공합작을 설계한 혁명가

청조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운 1911년 신해혁명을 이끈 인물로 평가받는다. 임종에서 직접 구술한 유언에서도 소련과의 우호를 거듭 밝혔다.

광둥 출신으로 하와이와 홍콩에서 교육받고 의사가 되었다. 1894년 흥중회, 1905년 도쿄에서 동맹회를 조직해 청 타도와 공화국 수립을 내걸었고, 1911년 신해혁명 뒤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었으나 곧 위안스카이에게 자리를 넘겼다. 민족·민권·민생의 삼민주의를 제창했으며 1923년 소련의 요페와 공동선언을 내고 소련의 원조와 공산당원의 개인 자격 입당을 받아들여 제1차 국공합작을 열었다. 1925년 베이징에서 간암으로 사망했고, 국민당과 공산당이 모두 그의 유산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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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2중국동맹회 총리
  • 1912.01–03중화민국 임시대총통
  • 1919–1925중국국민당 총리

왕징웨이

汪精卫
중국국민당 중국 중국 1883–1944 ○ 병사 · 나고야

쑨원의 후계자에서 일본 점령하 난징 정권의 수반이 된 국민당 좌파

1927년 우한 국민정부를 이끌며 7월 공산당을 숙청했고, 1940년 일본이 세운 난징 정권의 수반이 되었다. 1910년 체포되어 연(燕)의 저자에서 노래하리라 적었다.

청 섭정왕 암살 미수로 이름을 얻은 동맹회 혁명가로, 쑨원의 유촉을 받아쓴 측근이었다. 1927년 우한 국민정부를 이끌며 한때 공산당과의 합작을 유지했으나 그해 7월 분공(分共)으로 돌아섰다. 이후 장제스와 경쟁·협력을 반복하다 1938년 충칭을 떠나 일본과의 「평화」를 주장했고, 1940년 일본이 세운 난징 국민정부의 주석이 되었다. 1944년 나고야에서 병사했으며 중국에서는 대표적 한간(漢奸)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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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우한 국민정부 주석
  • 1932–1935국민정부 행정원장
  • 1940–1944난징 국민정부(일본 후원) 주석

장제스

蔣介石
중국국민당 반혁명 세력 중국 중국계 1887–1975 ○ 자연사

항일전쟁과 반공 통치를 함께 이끈 국민당 지도자

1937년 소련과 조약을 맺은 뒤에도 그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일본과 공산당을 동시에 상대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장제스는 중국 국민당의 군사·정치 지도자로서 1920년대 북벌을 이끌어 난립한 중국을 국민정부 아래 통합했다. 그는 공산당과의 내전을 우선시했지만, 1936년 서안사변 뒤 일본에 맞선 제2차 국공합작을 받아들였고 1937년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바탕으로 무기와 항공기 지원을 확보했다. 항일전쟁에서 중국의 저항을 지휘한 뒤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대만으로 정부를 옮겼으며, 그곳에서 장기간의 계엄과 권위주의 통치를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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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중국동맹회 가입
  • 1924–1927황푸군관학교 교장
  • 1926–1928국민혁명군 총사령관, 북벌 지휘
  • 1928–1931국민정부 주석, 행정원장
  • 1937–1945중국 전구 항일전쟁 최고지휘관
  • 1948–1975중화민국 총통
  • 1950–1975대만에서 국민정부 통치

마오쩌둥

毛泽东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 중국 공산주의 중국(청 제국 출생, 중화민국 시기 활동, 중화인민공화국 사망) 중국 1893–1976 ○ 자연사

농민의 나라에 맞게 혁명의 문법을 다시 쓴 중국 혁명의 지도자

1930년 1월 5일 린뱌오에게 보낸 서신에서 옛 중국 속담 “별불꽃 하나가 들판을 태운다(星星之火,可以燎原)”를 인용하며 홍군의 전망을 둘러싼 비관론에 답했다.

후난성 샤오산 부근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창사에서 공부했고, 1911년 혁명과 반제국주의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베이징대학 도서관 직원으로 일하며 마르크스주의를 접했고 1919년 5·4 운동에 참여했으며, 1921년 상하이 제1차 전국대회에 13명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해 중국공산당 창립에 가담했다. 농촌 근거지와 게릴라전, 인민전쟁 전략을 발전시켰고 1935년 1월 쭌이 회의에서 지도부에 선출되었으며 그해 11월 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었고, 당 주석직은 1943년에 맡았다. 토지개혁과 공업화를 이끌었고 1950년 10월 한국전쟁에 인민지원군을 파병했으며, 반대파를 탄압하고 대약진 운동(1958~1962)과 1966년 문화대혁명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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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중국공산당 창립 참여
  • 1927후난 농민운동 시찰 보고 — 농민 혁명론
  • 1934–1935대장정 — 쭌이 회의에서 실권 장악
  • 1937철학논문 《실천론》·《모순론》 발표
  • 1940《신민주주의론》 발표
  • 1949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선포
  • 1958–1961대약진 운동 — 파국적 기근
  • 1966–1976문화대혁명

쑹칭링

宋庆龄
중국공산당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893–1981 ○ 자연사

쑨원의 부인으로 국민당 좌파에 남아 인민공화국의 국가부주석이 된 인물

1922년 반란 때 남아 쑨원의 탈출을 엄호하며 '중국은 나 없이도 되지만 당신 없이는 안 된다'고 말했다. 1981년 5월 16일, 죽기 몇 주 전 공산당에 입당해 명예주석이 되었다.

상하이의 부유한 기독교 집안 쑹씨 세 자매의 둘째로, 1915년 쑨원과 결혼했다. 1927년 장제스의 반공 정변에 반대해 국민당 좌파의 상징이 되었고 모스크바로 갔다가 1930년대 상하이에서 민권보장동맹을 이끌었다. 항일전쟁기 홍콩에서 보위중국동맹을 조직해 공산당 근거지에 물자를 보냈다. 1949년 인민공화국의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이 되었고 1981년 사망 직전 공산당에 입당해 명예국가주석 칭호를 받았다. 동생 쑹메이링은 장제스의 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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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4중앙인민정부 부주석
  • 1959–1975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쑹쯔원

宋子文
중국국민당 중국 중국인 1894–1971 ○ 자연사

재정과 외교를 잇댄 국민정부 실무가

1945년 8월 7일, 쑹쯔원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중소 협상을 재개했다.

쑹쯔원은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재정가이자 외교관으로, 국가 재정과 대외 원조를 연결해 전쟁기 국민당 국가의 운영을 뒷받침했다. 그는 재정 통합과 관세 자주권을 추진했지만, 중앙집권적 전쟁 재정과 가족·금융 네트워크의 결합이라는 긴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1945년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중소조약을 협상하며 만주 철도와 뤼순의 처리, 외몽골의 지위를 둘러싼 중국의 양보를 조율했고, 그 합의는 일본 패전 뒤 동북아 질서를 규정했다. 전후 행정원장으로서 인플레이션과 내전 재정 위기를 수습하지 못한 뒤 미국으로 이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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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하버드대학교 경제학 졸업
  • 1923–1924광저우 중앙은행 설립 실무, 쑨원의 영어 비서·세무국장
  • 1925–1927광둥 혁명정부 재정부장
  • 1928–1933국민정부 재정부장, 중앙은행 총재
  • 1940–1942워싱턴 주재 장제스 특사, 대미 전시 원조 교섭
  • 1942–1945중화민국 외교부장
  • 1945–1947행정원장, 1945년 모스크바 중소조약 협상 대표
  • 1947–1949광둥성 정부 주석·광저우 행영 주임

장팅푸

蒋廷黻
중국국민당 중화민국 중국 (한족) 1895–1965 ○ 자연사

소련 대표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게 만든, 안보리 의장석의 국민당 외교관

1950년 1월, 의장석에 앉은 장팅푸를 향해 말리크가 '이것은 회의가 아니라 회의의 패러디'라고 외치고 퇴장했다.

청나라 외교문서를 실증적으로 연구한 역사가에서 중화민국 외교관으로 전환한 인물이다. 컬럼비아대에서 박사를 마치고 난카이·칭화대에서 중국 근대외교사 연구를 개척했으며, 1935년 학계를 떠나 국민정부에 합류해 주소대사와 상임 유엔대표를 지냈다. 1950년 1월 안보리 의장으로 회의를 주재할 때 소련 대표 말리크가 중공이 아닌 국민당 대표와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없다며 퇴장했고, 이 공백은 6월 한국전쟁 유엔군 결의가 거부권 없이 통과되는 결정적 조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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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9난카이대학 역사학과 교수·주임
  • 1929–1935칭화대학 역사학과 주임·문학원장
  • 1935–1936국민정부 행정원 정무처장
  • 1936–1938주소 중화민국 대사
  • 1944–1946UNRRA 중국 대표·행정원 선후구제총서 서장
  • 1947–1962중화민국 상임 유엔대표·안보리 대표
  • 1961–1965주미 중화민국 대사 (유엔대표 겸임)

장궈타오

张国焘
중국공산당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897–1979 ↓ 실각 1938 · 자연사

창당 대회 의장에서 대장정 중 마오와 결별해 국민당으로 간 홍군 지도자

1935년 대장정 중 마오와 합류한 뒤 북상 대신 쓰촨 남하를 고집했다. 8만여 병력의 75% 이상을 잃고 자기 군대와 코민테른의 신뢰를 상실했다.

베이징대 학생으로 5·4 운동에 앞장섰고 1921년 제1차 당대회를 주재했다. 노동운동을 조직하다 1931년 어위완 소비에트로 가 제4방면군의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고, 1935년 대장정 중 쓰촨에서 마오의 중앙홍군과 합류했다. 북상 대 서진을 놓고 마오와 대립해 별도의 「중앙」을 세우고 남하했으나 병력을 잃고 1936년 옌안에 합류했다. 1937년 비판을 받은 뒤 1938년 국민당 지역으로 탈출해 당에서 제명되었고, 만년에 홍콩과 캐나다에서 회고록을 썼다. 토론토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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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의장
  • 1931–1935어위완 소비에트 · 제4방면군 지도자

예젠잉

叶剑英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897–1986 ○ 자연사

황푸의 교관에서 원수까지, 1976년 4인방 체포를 조직해 문화대혁명을 끝낸 군인

1976년 10월 6일, 원로 장군들을 이끌고 4인방 체포를 명령해 문화대혁명을 끝냈다.

광둥 하카 출신으로 황푸군관학교 교관을 지내고 1927년 입당해 광저우 봉기에 참여했다. 대장정에서 참모장으로 장궈타오의 분열 기도를 마오에게 알렸고, 항일전쟁기와 국공내전기 참모장·베이핑 접수 책임자였다. 1955년 원수가 되었고 문화대혁명 중 「2월 역류」로 비판받았으나 살아남아 린뱌오 사후 군을 맡았다. 마오 사후 1976년 10월 화궈펑·왕둥싱과 함께 4인방 체포를 결정·집행했고, 1978년 덩샤오핑 복권을 지지했다. 1978~1983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으로 국가원수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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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중화인민공화국 원수
  • 1975–1978국방부장
  • 1978–1983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저우언라이

周恩来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898–1976 ○ 자연사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총리이자 외교의 설계자

1971년 키신저와의 비밀 회담으로 길을 열어 1972년 2월 21일 닉슨을 베이징에서 맞이했고, 같은 해 2월 28일 상하이 공동성명으로 냉전의 삼각구도를 뒤바꾸었다.

1898년 장쑤성 화이안에서 태어나 1976년 베이징에서 사망한 중국의 정치가다. 중국공산당 초기 지도부의 한 사람으로서 파리 공산주의 조직 가입, 황푸군관학교 정치부 근무, 시안 사건과 충칭 협상의 수석 협상자 활동을 거쳤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과 함께 국무원 총리(초기에는 정무원 총리)에 임명되어 1976년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고, 1949~1958년에는 외교부장을 겸임하며 초기 대외정책의 설계자로 활동했다. 쭌이 회의 이후 마오쩌둥의 지도 아래에 있었고, 문화대혁명기의 격동 속에서도 국가 행정을 유지하며 권력 균형을 관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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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76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 1949–1958외교부장
  • 1971–1972키신저 비밀 회담과 미중 정상회담으로 가는 외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