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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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사전소련공산당·볼셰비키

나리만 나자프 오글루 나리마노프

Нариман Наджаф оглы Нарима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제르바이잔 1870–1925 ○ 심장마비

계몽 문학에서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의 수장으로

1906년 교사 대회에서 석유왕 타기예프가 장학금을 들먹이며 입을 막으려 하자, 나리마노프는 즉석에서 장학금을 포기하며 말했다. "비열한 금속 때문에 침묵하지 않겠다. 동지들이 차르의 압제에서 해방되려 피를 흘리는 이때에."

교사이자 의사, 작가였던 나리마노프는 바쿠에 공공 독서실을 열고 아제르바이잔 사실주의 문학의 초기 작품들을 남겼다. 1905년 훔메트에 합류해 혁명운동에 뛰어들었고, 1920년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 정부를 이끈 뒤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공동의장이 되었다. 민족해방과 사회주의를 결합하려 했지만 중앙집권적 민족정책과 충돌했으며, 1925년 사망 후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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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보르찰리현 키질-아질리 마을 교사
  • 1891–1902바쿠 사립 김나지움 교사, '나리마노프 독서실' 설립·운영 (1894)
  • 1895–1899희곡 「무지」(1895), 소설 「바하두르와 소나」(1896), 비극 「나디르 샤」(1899) 발표, 고골의 「검찰관」 번역·공연 (1896)
  • 1905무슬림 사회민주주의 조직 '훔메트' 가입
  • 1908노보로시스크 대학 의학부 졸업, 의사 면허 취득
  • 1909–1914체포되어 아스트라한으로 5년 유배, 그곳에서 의사·연극인·민중대학 평의회 의장으로 활동
  • 1917바쿠 볼셰비키 위원회 위원, 신문 「훔메트」 편집자
  • 1918바쿠 인민위원회 도시경제 담당 인민위원
  • 1919러시아 SFSR 외무인민위원부 근동부장
  • 1920–1922아제르바이잔 혁명위원회 의장 겸 인민위원회의 의장, 외무인민위원 겸임 (1920–1921)
  • 1922자카프카스 SFSR 연방평의회 의장 (3월~12월), 제노바 국제회의 소비에트 대표단 참가
  • 1922–1925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소비에트 연방의 공식 국가원수 중 1인
  • 1923–1925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빅토르 리보비치 세르주

Виктор Львович Серж

혁명과 스탈린주의의 부상을 문학으로 증언한 코민테른의 작가-혁명가

1936년 소련을 떠나는 순간, 오렌부르크 유형지에서 써내려간 소설 두 편과 시집 한 권의 원고 전부가 압수당했다. 그는 시집만을 기억으로 복원할 수 있었다. “내가 건네는 것은 진실 자체가 아니라 진실을 향한 증언이다"라고 그는 훗날 말했다.

브뤼셀에서 러시아 망명 나로드니키 집안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프랑스 아나키스트 운동에서 활동하다가 5년간 수감되었다. 1919년 소비에트 러시아에 도착해 볼셰비키에 입당, 코민테른에서 언론인·편집자·번역가로 일했으며, 내전기 페트로그라드 방어전에 참가했다. 1923년 좌익 반대파에 합류했고, 1928년 제명·투옥 후 문학으로 전향해 『어느 혁명가의 회고록』, 『러시아 혁명 1년』, 걸작 『툴라예프 사건』을 남겼다. 1936년 국제적 구명 운동으로 소련을 탈출, 프랑스와 멕시코 망명 중에도 저술을 이어가며 20세기 혁명문학의 거장으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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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913파리에서 아나키스트 신문 《L'Anarchie》 필자 및 편집자, 보노 갱 사건 연루로 5년형
  • 1917바르셀로나에서 CNT 활동, 《Tierra y Libertad》 기고; 러시아行 시도 중 프랑스 수용소 억류
  • 1919–1923볼셰비키 입당, 코민테른에서 로망스어 출판 담당, 《인프레코르》 프랑스어판 편집
  • 1923–1927좌익 반대파 합류, 빈·베를린·레닌그라드에서 반스탈린 활동
  • 1928–1933당 제명·투옥 후 작가로 전향, 『감옥의 사람들』 『우리 힘의 탄생』 집필
  • 1933–1936오렌부르크 유형, 국제 구명운동으로 1936년 소련 탈출
  • 1936–1940파리 망명, 모스크바 재판 규탄 저술, 트로츠키와 논쟁적 서신 교환
  • 1941–1947멕시코 망명, 『툴라예프 사건』 『회고록』 완성, 1947년 심장마비로 사망

콘스탄틴 알렉산드로비치 페딘

Константи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Фед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2–1977 ○ 자연사

세라피온 형제단에서 출발해 18년간 소비에트 문학의 최고 문지기가 된 소설가

20년간 친구이자 이웃이었던 페딘이 처음으로 친구가 아니라 '관리'로서 찾아왔을 때, 파스테르나크는 충격을 받았다 — 그날 페딘은 그에게 노벨상 거부를 요구하러 왔던 것이다.

『도시와 해』(1924), 『형제들』(1928)로 혁명기 지식인의 운명을 형식적 실험과 함께 그려낸 초기 소비에트 문학의 대표적 소설가였다. 1940년대에는 스탈린상 수상작인 3부작 『첫 기쁨』·『이상한 여름』·『모닥불』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전을 구축했다. 1959년 작가동맹 제1서기가 된 이후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기를 관통하며 파스테르나크의 노벨상 거부 설득, 솔제니친의 『암병동』 출판 저지 등 당의 문학 정책을 집행하는 최고 행정가로 군림했다. 젊은 날 '세라피온 형제단'에서 예술의 자유를 주창했던 작가가 소비에트 문학 제도의 수문장이 된 궤적은 해빙기 문화 정치의 모순을 응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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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노비 사티리콘』에 첫 풍자 소품 발표
  • 1914–1918독일에서 민간인 억류자로 1차대전 기간 체류
  • 1919–1921적군 복무, 입당 후 전업 작가를 위해 탈당
  • 1924『도시와 해』 발표 — 초기 소비에트 문학의 기념비적 장편
  • 1934소비에트 작가동맹 이사로 선출
  • 1949『첫 기쁨』과 『이상한 여름』으로 스탈린상 1등급 수상
  • 1959–1971소비에트 작가동맹 제1서기
  • 1971–1977소비에트 작가동맹 이사회 의장

페레츠 다비도비치 마르키시

Перец Давидович Маркиш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계 유대인 1895–1952 ✕ 처형

소비에트 이디시 문학의 급진적 서정시인

1952년 8월 12일, 그는 다른 이디시 문인들과 함께 처형되어 ‘살해된 시인들의 밤’의 상징이 되었다.

페레츠 마르키시는 혁명 이후 소비에트 이디시 문학의 중심에 선 시인이자 작가, 극작가였다. 그의 시는 전쟁과 혁명, 유대인의 경험을 이디시어로 엮었고, 그는 소비에트 문화 건설에 참여하면서도 유대인 문화와 자치의 문제를 독자적으로 제기했다. 유대인 반파시스트위원회 활동은 그를 전후 국가 탄압의 표적으로 만들었으며, 1952년 다른 이디시 문인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의 죽음은 정치적 숙청이 문학과 언어의 제도까지 파괴한 사건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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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917볼린에서 성장, 제정 러시아군 복무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17–1921키이우에서 이디시 시인으로 활동 시작
  • 1921–1926바르샤바·베를린·파리 등지에서 집필·출판
  • 1926–1941소련 귀환, 시·소설·희곡 집필과 작가 활동
  • 1939레닌훈장 수훈
  • 1941–1945전쟁 시기 반나치 시와 문화 활동 전개
  • 1942–1949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유대인 반파시스트위원회 간부로 활동
  • 1949–1955체포·처형, 사후 복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수르코프

Алекс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ур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9–1983 ○ 자연사

〈젬랸카〉를 썼고 파스테르나크 탄압을 지휘한 작가동맹 집행자

1941년 11월 이스트라 전선에서 포화 속 외투가 파편에 찢긴 채 탈출한 수르코프는 말했다. '연대 본부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죽음까지는 네 걸음.' 그 말이 〈젬랸카〉가 되었다.

러시아 소비에트 시인이자 문학 관료로, 소비에트 작가동맹 제1서기(1953–1959)를 지냈다. 2차대전의 상징적 노래 〈젬랸카〉의 작가이자 두 차례 스탈린상 수상자로서, 《닥터 지바고》 사건 당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에 대한 공식 탄압을 주도하고 1957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출판사 펠트리넬리에게 출판 중단을 압박했다. 경직된 문학정치의 집행자이면서도 1937년 빈곤에 시달리던 오시프 만델슈탐의 주머니에 몰래 300루블을 넣어주고, 즈다노프 시기 안나 아흐마토바를 은밀히 후원했던 모순적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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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2붉은 군대 복무, 내전 참전
  • 1926–1928『세베르니 콤소몰레츠』 편집장
  • 1934–1939『리테라투르나야 우초바』 부편집장, 문학대학 강사
  • 1940–1941『노비 미르』 편집장
  • 1941–1945종군기자, 전선 신문 특파원
  • 1944–1946『리테라투르나야 가제타』 편집장
  • 1949–1953『오고뇨크』 편집장
  • 1953–1959소비에트 작가동맹 제1서기
  • 1956–1966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파데예프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Фаде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1–1956 ✕ 자살

작가동맹의 관리자, 해빙 앞에서 자살하다

20차 당대회 직후, 파데예프는 오랜 친구 유리 리베딘스키에게 털어놓았다. "양심이 나를 괴롭힌다. 피 묻은 손으로 살기란 힘들구나, 유라."

내전 소설 《괴멸》로 1920년대 소비에트 문학의 정점을 찍은 소설가이자, RAPP 조직을 거쳐 작가동맹을 20년 가까이 이끈 문학 행정가였다. 대조국전쟁 직후 집필한 《젊은 근위대》는 전후 세대의 교과서가 되었다. 당의 문학 통제를 집행하면서도 몰락한 작가들을 개인적으로 도왔고, 스탈린 사후 이중적 역할이 낳은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1956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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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소설 《괴멸》 출간
  • 1946–1954작가동맹 서기장 · 의장
  • 1946소설 《젊은 근위대》 초판 출간
  • 1951당의 비판 뒤 《젊은 근위대》 개정판 출간

알렉산드르 트리포노비치 트바르돕스키

Александр Трифонович Твардовский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0–1971 ○ 자연사

해빙기 문학의 문을 연 『신세계』 편집장이자 『바실리 죠르킨』의 국민 시인

솔제니친의 부고: 「시인을 죽이는 방법은 많다. 트바르돕스키에게 선택된 방법은 그의 자식이자 열정이던 잡지를 빼앗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여섯 달 뒤, 그는 임종의 자리로 들어갔다.」

『바실리 죠르킨』으로 전시 국민 시인이 된 작가. 『신세계』 편집장으로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출판해 해빙기 문학의 상징이 되었으나, 브레즈네프 체제 아래 축출된 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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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첫 장시 『사회주의로의 길』 발표
  • 1936장시 『무라비아의 나라』 발표, 스탈린상 2급 수상 (1941)
  • 1939–1940소련-핀란드 전쟁에서 군사특파원 복무
  • 1942–1945『바실리 죠르킨』 연재 — 스탈린상 1급 (1946)
  • 1950–1954『신세계』 편집장 첫 임기 — 해빙 논쟁으로 해임
  • 1958–1970『신세계』 편집장 두 번째 임기 —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1962) 출판
  • 1961장시 『저 멀리 — 저 멀리』로 레닌상 수상; CPSU 중앙위원 후보
  • 1970『신세계』 편집장에서 강제 퇴진; 이듬해 사망

게오르기 모케예비치 마르코프

Георгий Мокеевич Мар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911–1991 ○ 자연사

시베리아를 노래하며 문학적 정통을 수호한 브레즈네프 시대의 문학 총감독

1976년 당 대회에서: “브레즈네프 동지의 심오하고 지혜로운 보고서는, 마치 전선을 타고 흐르듯 사람들의 가슴에 뛰어들어 노동과 위대한 성취로 이끄는 거대하고 헤아릴 수 없는 영감의 에너지를 담고 있습니다.”

톰스크 근교 사냥꾼 집안의 13번째 아이로 태어나 13세에 콤소몰에 가입, 신문기사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스트로고프 일가』 『소금의 땅』 『시베리아』 등 시베리아 농민과 자연을 서사화한 대하소설로 스탈린상과 레닌상을 받았다. 1971년 작가동맹 제1서기가 되어 15년간 소련 문학정책을 총괄하며 솔제니친·파스테르나크 탄압을 주도했고 브레즈네프 회고록에 레닌상을 수여할 정도로 체제와 밀착했다. 그의 책은 수백만 부 발행되고 TV 드라마로 각색됐지만 지식인들 사이에선 아무도 읽지 않는 책으로 조롱받았으며, 페레스트로이카에 반대하다 1989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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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1931톰스크 콤소몰 활동
  • 1931–1941노보시비르스크·옴스크 신문·잡지 편집자
  • 1941–1945자바이칼 전선군 신문 《전투 초소에서》 종군기자
  • 1956–1971소비에트 작가동맹 이사회 서기
  • 1959–1965RSFSR 작가동맹 모스크바 지부 이사회 의장
  • 1971–1986소비에트 작가동맹 이사회 제1서기
  • 1971–1990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86–1989소비에트 작가동맹 이사회 의장

티혼 니콜라예비치 흐레니코프

Тихон Николаевич Хренни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13–2007 ○ 자연사

43년간 소비에트 음악의 문지기

BBC와의 인터뷰에서 외쳤다: "나는 스탈린의 인민위원이었다. 내가 '안 돼!'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작곡가 동맹 서기장(1948–1991)으로 43년간 소련 음악계를 통제한 작곡가. 1948년 지하노프의 '형식주의 반대' 캠페인에서 프로코피예프·쇼스타코비치를 비판하는 연설로 스탈린의 신임을 얻어 발탁되었다. 흐루쇼프 시기 1948년 결정을 철회시키는 한편 젊은 음악가들을 후원한 이중적 인물로, 만년에는 페레스트로이카를 '배신'으로 규탄했다. 오페라 8편·교향곡 3편·영화음악 30편과 유행가 '모스크바의 창가'를 남겼으며, 사회주의 노동 영웅·레닌상·스탈린상 3회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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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1932그네신 음악전문학교 작곡·피아노 전공
  • 1932–1936모스크바 음악원 셰발린(작곡)·네이가우스(피아노) 사사
  • 1935교향곡 1번 초연, 스토코프스키·토스카니니 해외 연주
  • 1941–1967붉은군대 중앙극장 음악감독
  • 1948–1991소비에트 작곡가 동맹 서기장 (1957년까지 총서기, 이후 제1서기)
  • 1961–2007모스크바 음악원 교수 (1966년부터 정교수)
  • 1962–1989소비에트 최고회의 대의원
  • 1976–1990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세르게이 블라디미로비치 미할코프

Серг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Михал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3–2009 ○ 자연사

스탈린부터 푸틴까지 국가를 쓴 시인

2009년 임종을 앞두고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 "이제 됐다. 안녕." 그리고 눈을 감았다.

소련 아동문학의 거장이자, 1944년판·1977년판 소련 국가와 2000년 러시아 국가 가사를 쓴 시인이다. 장편시 〈스표파 아저씨〉로 수십 년간 소련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았고, 풍자 뉴스릴 《피틸》의 창간자 겸 편집장으로도 이름을 남겼다. 1970년부터 1990년까지 러시아공화국 작가동맹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문학 행정의 정점에 서 있었으며, 사회주의노동영웅·레닌상·세 차례 스탈린상을 받았다. 파스테르나크와 솔제니친 배척 운동에 가담한 문학 관료로서 비판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수많은 작가의 주거·구직·의료·구금 문제를 뒤에서 해결해 준 후원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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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장편시 〈스표파 아저씨〉 발표
  • 1937소련 작가동맹 가입
  • 1941–1945군사통신원으로 복무, 오데사·세바스토폴 방어전 참전
  • 1944엘레기스탄과 공동으로 소련 국가 가사 집필 (스탈린판)
  • 1950CPSU 입당
  • 1962–2008풍자 뉴스릴 《피틸》 창간·편집장
  • 1965–1970소련 작가동맹 모스크바 지부 제1서기 · 소련 작가동맹 이사회 서기
  • 1970–1990러시아공화국(RSFSR) 작가동맹 의장
  • 1977소련 국가 가사 개정판 집필 (스탈린 언급 삭제)
  • 2000러시아 연방 국가 가사 집필 (푸틴판)

알렉산드르 예피모비치 보론초프

Александр Ефимович Воронцо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계 1919–1991 ○ 자연사

해방의 현장을 증언한 전선 촬영기사

아우슈비츠 해방 직후, 보론초프가 촬영한 생존자와 수용소의 영상은 현장을 국제적 증거로 바꾸었다.

알렉산드르 보론초프는 소련의 다큐멘터리 영화 촬영기사이자 감독으로, 전쟁의 현장을 기록 영상으로 남긴 인물이다. 1945년 1월 말 제1우크라이나 전선 촬영팀과 함께 해방 직후의 아우슈비츠를 촬영했고, 그 영상은 영화 《아우슈비츠》와 뉘른베르크 재판에 제출된 소련 측 증거에 포함되었다. 전쟁 뒤에는 중앙 다큐멘터리 영화 스튜디오에서 촬영과 연출을 이어 가며 전선 기록을 평시의 국가 영화 제작으로 연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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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1모스필름 촬영부 기계공·촬영 조수
  • 1942전러시아국립영화대학교 촬영학부 졸업
  • 1942붉은군대 입대, 노보시비르스크 영화 뉴스릴 스튜디오 촬영기사
  • 1943–1945제1우크라이나 전선 촬영팀 전선 촬영기사
  • 1945영화 《아우슈비츠》 촬영
  • 1945–1989중앙 다큐멘터리 영화 스튜디오 촬영기사·감독
  • 1988러시아공화국 명예 예술가 칭호 수훈

칭기즈 토레쿨로비치 아이트마토프

Чингиз Торекулович Айтмат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키르기스 1928–2008 ○ 자연사

중앙아시아의 목소리를 세계문학에 새긴 소비에트 키르기스 작가이자 외교관

소설 속 '만쿠르트' — 기억과 정체성을 빼앗긴 채 어머니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노예 — 는 소비에트 지식인들 사이에서 역사적 기억상실의 대명사가 되었다.

칭기즈 아이트마토프는 키르기스인으로 러시아어로 주로 쓴 소비에트 대표 작가로, 중앙아시아 민속과 구전 전통을 현대적 서사에 녹여냈다. 중편 『자밀라』(1958)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굴사리여 안녕』 『하얀 배』로 레닌상(1963)과 세 차례 소련 국가상을 받았다. 대표작 『백 년보다 긴 하루』(1980)는 초원의 외딴 역을 배경으로 전설과 SF를 엮어, 기억을 빼앗긴 '만쿠르트'를 소비에트 지성사의 상징적 개념으로 만들었다. 고르바초프의 문화 고문으로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했고, 룩셈부르크 대사(1990~1993)와 키르기스스탄의 EU·NATO·유네스코 대사(2000~2008)를 지냈다. 175개 언어로 번역된 그의 작품은 중앙아시아의 목소리를 세계문학에 각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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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6수의사로 일하며 첫 작품 발표
  • 1956–1958모스크바 고리키 문학대학 수료
  • 1959–1967『프라우다』 키르기스 특파원
  • 1966–1989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제7~11기)
  • 1985–1991고르바초프 문화 고문, 소련 대통령자문위원
  • 1986–1991키르기스 작가동맹 제1서기
  • 1990–1993소련·러시아 룩셈부르크 대사
  • 2000–2008키르기스스탄 EU·NATO·유네스코 대사

비탈리 알렉세예비치 코로티치

Виталий Алексеевич Коротич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36–2025 ○ 자연사

『오고뇨크』를 글라스노스트의 충격파로 바꾸어, 70년간 억압된 진실을 쏟아부은 편집자

「70년 동안 우리는 아버지를 배신한 아들이, 교회를 불태운 자가 영웅이라고 배워왔다. 사람들은 철저한 거짓말 속에서 살아왔다」

키이우 출신 시인이자 의사로, 1985년 반미 소설로 국가상을 받을 만큼 체제 순응적 작가였으나, 1986년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의 추천으로 『오고뇨크』 편집장에 임명되자 잡지를 글라스노스트의 선봉으로 돌변시켰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실상, 스탈린 시대 대숙청, 노멘클라투라의 특권을 최초로 폭로하며 구독 부수를 26만에서 460만으로 끌어올렸고, 파스테르나크와 나보코프의 작품을 최초로 게재했다. 1989년 인민대표로 당선되어 지역간그룹에 가담했고, 1991년 쿠데타 당시 미국 체류 중 귀국을 거부해 편집장직에서 해임된 후 보스턴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말년에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공개 지지해 고국에서 배척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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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6의사, 키이우
  • 1966–1967『라노크』 편집장
  • 1967–1969우크라이나작가동맹 서기
  • 1978–1986『프세스비트』 편집장
  • 1986–1991『오고뇨크』 편집장
  • 1989–1991소련 인민대표
  • 1992–1998보스턴대학 교수
  • 1999–2014『불바르 고르도나』 편집위원장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구벤코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Губенк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41–2020 ○ 자연사

소련의 마지막 문화장관

히틀러 역을 맡은 졸업 공연에서, 구벤코는 부모를 죽인 자를 향한 모든 증오를 배역에 쏟아부었다. 공연을 본 류비모프는 곧바로 그를 타간카 극장으로 영입했다.

전쟁 고아에서 인민예술가로 성장한 배우·영화감독. 루나차르스키 이래 처음으로 현역 예술인이 소련 문화장관(1989–1991)에 오른 인물이다. 소련 붕괴 후에는 좌파 정치인으로 전향하여 국가두마 문화위원장과 모스크바 시의회 부의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문화유산 수호에 앞장섰다. 타간카 극장 분열 후에는 「타간카 배우 동지회」를 창설해 2020년까지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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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1991문화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