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교사 대회에서 석유왕 타기예프가 장학금을 들먹이며 입을 막으려 하자, 나리마노프는 즉석에서 장학금을 포기하며 말했다. "비열한 금속 때문에 침묵하지 않겠다. 동지들이 차르의 압제에서 해방되려 피를 흘리는 이때에."
교사이자 의사, 작가였던 나리마노프는 바쿠에 공공 독서실을 열고 아제르바이잔 사실주의 문학의 초기 작품들을 남겼다. 1905년 훔메트에 합류해 혁명운동에 뛰어들었고, 1920년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 정부를 이끈 뒤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공동의장이 되었다. 민족해방과 사회주의를 결합하려 했지만 중앙집권적 민족정책과 충돌했으며, 1925년 사망 후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1936년 소련을 떠나는 순간, 오렌부르크 유형지에서 써내려간 소설 두 편과 시집 한 권의 원고 전부가 압수당했다. 그는 시집만을 기억으로 복원할 수 있었다. “내가 건네는 것은 진실 자체가 아니라 진실을 향한 증언이다"라고 그는 훗날 말했다.
브뤼셀에서 러시아 망명 나로드니키 집안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프랑스 아나키스트 운동에서 활동하다가 5년간 수감되었다. 1919년 소비에트 러시아에 도착해 볼셰비키에 입당, 코민테른에서 언론인·편집자·번역가로 일했으며, 내전기 페트로그라드 방어전에 참가했다. 1923년 좌익 반대파에 합류했고, 1928년 제명·투옥 후 문학으로 전향해 『어느 혁명가의 회고록』, 『러시아 혁명 1년』, 걸작 『툴라예프 사건』을 남겼다. 1936년 국제적 구명 운동으로 소련을 탈출, 프랑스와 멕시코 망명 중에도 저술을 이어가며 20세기 혁명문학의 거장으로 자리잡았다.
상세 이력 보기
1909–1913파리에서 아나키스트 신문 《L'Anarchie》 필자 및 편집자, 보노 갱 사건 연루로 5년형
1917바르셀로나에서 CNT 활동, 《Tierra y Libertad》 기고; 러시아行 시도 중 프랑스 수용소 억류
1919–1923볼셰비키 입당, 코민테른에서 로망스어 출판 담당, 《인프레코르》 프랑스어판 편집
1923–1927좌익 반대파 합류, 빈·베를린·레닌그라드에서 반스탈린 활동
1928–1933당 제명·투옥 후 작가로 전향, 『감옥의 사람들』 『우리 힘의 탄생』 집필
1933–1936오렌부르크 유형, 국제 구명운동으로 1936년 소련 탈출
1936–1940파리 망명, 모스크바 재판 규탄 저술, 트로츠키와 논쟁적 서신 교환
1941–1947멕시코 망명, 『툴라예프 사건』 『회고록』 완성, 1947년 심장마비로 사망
20년간 친구이자 이웃이었던 페딘이 처음으로 친구가 아니라 '관리'로서 찾아왔을 때, 파스테르나크는 충격을 받았다 — 그날 페딘은 그에게 노벨상 거부를 요구하러 왔던 것이다.
『도시와 해』(1924), 『형제들』(1928)로 혁명기 지식인의 운명을 형식적 실험과 함께 그려낸 초기 소비에트 문학의 대표적 소설가였다. 1940년대에는 스탈린상 수상작인 3부작 『첫 기쁨』·『이상한 여름』·『모닥불』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전을 구축했다. 1959년 작가동맹 제1서기가 된 이후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기를 관통하며 파스테르나크의 노벨상 거부 설득, 솔제니친의 『암병동』 출판 저지 등 당의 문학 정책을 집행하는 최고 행정가로 군림했다. 젊은 날 '세라피온 형제단'에서 예술의 자유를 주창했던 작가가 소비에트 문학 제도의 수문장이 된 궤적은 해빙기 문화 정치의 모순을 응축한다.
1952년 8월 12일, 그는 다른 이디시 문인들과 함께 처형되어 ‘살해된 시인들의 밤’의 상징이 되었다.
페레츠 마르키시는 혁명 이후 소비에트 이디시 문학의 중심에 선 시인이자 작가, 극작가였다. 그의 시는 전쟁과 혁명, 유대인의 경험을 이디시어로 엮었고, 그는 소비에트 문화 건설에 참여하면서도 유대인 문화와 자치의 문제를 독자적으로 제기했다. 유대인 반파시스트위원회 활동은 그를 전후 국가 탄압의 표적으로 만들었으며, 1952년 다른 이디시 문인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의 죽음은 정치적 숙청이 문학과 언어의 제도까지 파괴한 사건으로 기억된다.
1941년 11월 이스트라 전선에서 포화 속 외투가 파편에 찢긴 채 탈출한 수르코프는 말했다. '연대 본부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죽음까지는 네 걸음.' 그 말이 〈젬랸카〉가 되었다.
러시아 소비에트 시인이자 문학 관료로, 소비에트 작가동맹 제1서기(1953–1959)를 지냈다. 2차대전의 상징적 노래 〈젬랸카〉의 작가이자 두 차례 스탈린상 수상자로서, 《닥터 지바고》 사건 당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에 대한 공식 탄압을 주도하고 1957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출판사 펠트리넬리에게 출판 중단을 압박했다. 경직된 문학정치의 집행자이면서도 1937년 빈곤에 시달리던 오시프 만델슈탐의 주머니에 몰래 300루블을 넣어주고, 즈다노프 시기 안나 아흐마토바를 은밀히 후원했던 모순적 인물이었다.
20차 당대회 직후, 파데예프는 오랜 친구 유리 리베딘스키에게 털어놓았다. "양심이 나를 괴롭힌다. 피 묻은 손으로 살기란 힘들구나, 유라."
내전 소설 《괴멸》로 1920년대 소비에트 문학의 정점을 찍은 소설가이자, RAPP 조직을 거쳐 작가동맹을 20년 가까이 이끈 문학 행정가였다. 대조국전쟁 직후 집필한 《젊은 근위대》는 전후 세대의 교과서가 되었다. 당의 문학 통제를 집행하면서도 몰락한 작가들을 개인적으로 도왔고, 스탈린 사후 이중적 역할이 낳은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1956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76년 당 대회에서: “브레즈네프 동지의 심오하고 지혜로운 보고서는, 마치 전선을 타고 흐르듯 사람들의 가슴에 뛰어들어 노동과 위대한 성취로 이끄는 거대하고 헤아릴 수 없는 영감의 에너지를 담고 있습니다.”
톰스크 근교 사냥꾼 집안의 13번째 아이로 태어나 13세에 콤소몰에 가입, 신문기사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스트로고프 일가』 『소금의 땅』 『시베리아』 등 시베리아 농민과 자연을 서사화한 대하소설로 스탈린상과 레닌상을 받았다. 1971년 작가동맹 제1서기가 되어 15년간 소련 문학정책을 총괄하며 솔제니친·파스테르나크 탄압을 주도했고 브레즈네프 회고록에 레닌상을 수여할 정도로 체제와 밀착했다. 그의 책은 수백만 부 발행되고 TV 드라마로 각색됐지만 지식인들 사이에선 아무도 읽지 않는 책으로 조롱받았으며, 페레스트로이카에 반대하다 1989년 사임했다.
BBC와의 인터뷰에서 외쳤다: "나는 스탈린의 인민위원이었다. 내가 '안 돼!'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작곡가 동맹 서기장(1948–1991)으로 43년간 소련 음악계를 통제한 작곡가. 1948년 지하노프의 '형식주의 반대' 캠페인에서 프로코피예프·쇼스타코비치를 비판하는 연설로 스탈린의 신임을 얻어 발탁되었다. 흐루쇼프 시기 1948년 결정을 철회시키는 한편 젊은 음악가들을 후원한 이중적 인물로, 만년에는 페레스트로이카를 '배신'으로 규탄했다. 오페라 8편·교향곡 3편·영화음악 30편과 유행가 '모스크바의 창가'를 남겼으며, 사회주의 노동 영웅·레닌상·스탈린상 3회를 수상했다.
2009년 임종을 앞두고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 "이제 됐다. 안녕." 그리고 눈을 감았다.
소련 아동문학의 거장이자, 1944년판·1977년판 소련 국가와 2000년 러시아 국가 가사를 쓴 시인이다. 장편시 〈스표파 아저씨〉로 수십 년간 소련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았고, 풍자 뉴스릴 《피틸》의 창간자 겸 편집장으로도 이름을 남겼다. 1970년부터 1990년까지 러시아공화국 작가동맹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문학 행정의 정점에 서 있었으며, 사회주의노동영웅·레닌상·세 차례 스탈린상을 받았다. 파스테르나크와 솔제니친 배척 운동에 가담한 문학 관료로서 비판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수많은 작가의 주거·구직·의료·구금 문제를 뒤에서 해결해 준 후원자이기도 했다.
아우슈비츠 해방 직후, 보론초프가 촬영한 생존자와 수용소의 영상은 현장을 국제적 증거로 바꾸었다.
알렉산드르 보론초프는 소련의 다큐멘터리 영화 촬영기사이자 감독으로, 전쟁의 현장을 기록 영상으로 남긴 인물이다. 1945년 1월 말 제1우크라이나 전선 촬영팀과 함께 해방 직후의 아우슈비츠를 촬영했고, 그 영상은 영화 《아우슈비츠》와 뉘른베르크 재판에 제출된 소련 측 증거에 포함되었다. 전쟁 뒤에는 중앙 다큐멘터리 영화 스튜디오에서 촬영과 연출을 이어 가며 전선 기록을 평시의 국가 영화 제작으로 연결했다.
소설 속 '만쿠르트' — 기억과 정체성을 빼앗긴 채 어머니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노예 — 는 소비에트 지식인들 사이에서 역사적 기억상실의 대명사가 되었다.
칭기즈 아이트마토프는 키르기스인으로 러시아어로 주로 쓴 소비에트 대표 작가로, 중앙아시아 민속과 구전 전통을 현대적 서사에 녹여냈다. 중편 『자밀라』(1958)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굴사리여 안녕』 『하얀 배』로 레닌상(1963)과 세 차례 소련 국가상을 받았다. 대표작 『백 년보다 긴 하루』(1980)는 초원의 외딴 역을 배경으로 전설과 SF를 엮어, 기억을 빼앗긴 '만쿠르트'를 소비에트 지성사의 상징적 개념으로 만들었다. 고르바초프의 문화 고문으로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했고, 룩셈부르크 대사(1990~1993)와 키르기스스탄의 EU·NATO·유네스코 대사(2000~2008)를 지냈다. 175개 언어로 번역된 그의 작품은 중앙아시아의 목소리를 세계문학에 각인시켰다.
「70년 동안 우리는 아버지를 배신한 아들이, 교회를 불태운 자가 영웅이라고 배워왔다. 사람들은 철저한 거짓말 속에서 살아왔다」
키이우 출신 시인이자 의사로, 1985년 반미 소설로 국가상을 받을 만큼 체제 순응적 작가였으나, 1986년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의 추천으로 『오고뇨크』 편집장에 임명되자 잡지를 글라스노스트의 선봉으로 돌변시켰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실상, 스탈린 시대 대숙청, 노멘클라투라의 특권을 최초로 폭로하며 구독 부수를 26만에서 460만으로 끌어올렸고, 파스테르나크와 나보코프의 작품을 최초로 게재했다. 1989년 인민대표로 당선되어 지역간그룹에 가담했고, 1991년 쿠데타 당시 미국 체류 중 귀국을 거부해 편집장직에서 해임된 후 보스턴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말년에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공개 지지해 고국에서 배척당했다.
히틀러 역을 맡은 졸업 공연에서, 구벤코는 부모를 죽인 자를 향한 모든 증오를 배역에 쏟아부었다. 공연을 본 류비모프는 곧바로 그를 타간카 극장으로 영입했다.
전쟁 고아에서 인민예술가로 성장한 배우·영화감독. 루나차르스키 이래 처음으로 현역 예술인이 소련 문화장관(1989–1991)에 오른 인물이다. 소련 붕괴 후에는 좌파 정치인으로 전향하여 국가두마 문화위원장과 모스크바 시의회 부의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문화유산 수호에 앞장섰다. 타간카 극장 분열 후에는 「타간카 배우 동지회」를 창설해 2020년까지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