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용어 사전소련공산당·볼셰비키

니콜라이 야코블레비치 마르

Николай Яковлевич Марр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그루지야 1865–1934 ○ 뇌졸중

제국 학술원 출신으로 유일하게 공산당에 입당해 소비에트 언어학을 지배한 야페트 이론의 창시자

'언어학의 세계 규모적 정립' — 마르가 자신의 이론을 일컫던 표현이다. 그에게 모든 언어는 네 원시음에서 비롯되었으며, 언어는 계급적 상부구조였다.

그루지야 쿠타이시에서 태어난 마르는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카프카스 언어·고고학으로 명성을 쌓아 1912년 제국 학술원 정회원이 되었다. 혁명 후 언어를 계급적 상부구조로 보며 모든 언어가 네 원시음(sal, ber, yon, rosh)에서 비롯되었다는 '야페트 이론'을 주창, 1930년 공산당 입당과 함께 학술원 부원장이 되어 사망 시까지 소비에트 언어학을 지배했다. 그의 유사과학적 이론은 1950년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의 제문제」로 공식 폐기되었으며, 그 행로는 혁명기 과학과 권력의 길항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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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페테르부르크 대학 동양학부 졸업 및 강사
  • 1912제국 학술원 정회원
  • 1921야페트 연구소(후일 언어·사고 연구소) 설립
  • 1926–1930레닌그라드 공공도서관 관장
  • 1930공산당 입당 (제국 학술원 출신 최초·유일)
  • 1930–1934소련 학술원 부원장

필리프 이에세예비치 마하라제

ფილიპე იესეს ძე მახარაძ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868–1941 ○ 자연사

그루지야를 온건하게 소비에트화하려다 스탈린에게 쫓겨난 볼셰비키 원로

「그루지야에서 소비에트 권력의 수립은 외국 점령의 외양을 띠었다, 나라 안에는 혁명에 가담할 준비가 된 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1921년 12월, 모스크바 중앙위원회 보고

그루지야 구리아 출신으로 트빌리시 신학교와 바르샤바 수의학연구소에서 수학했다. 1891년 사회민주주의에 합류해 멘셰비키 우세 지역에서 드문 볼셰비키 지도자로 활동했고, 1921년 2월 혁명위원회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반대파에 대한 온건 노선과 그루지야 주권 유지를 주장하다 7월 스탈린에게 해임되고 므디바니로 교체되었다. 이 사건은 1922년 '그루지야 사건'의 직접적 전사이며, 이후 고스플란·인민위원회·최고소비에트 의장을 거쳐 대숙청을 생존한 몇 안 되는 구볼셰비키 원로로 194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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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사회민주주의 운동에 합류
  • 1903캅카스 연합위원회 RSDLP 위원, 1905년 혁명 참여
  • 1907–1915자캅카스에서 볼셰비키 지하운동 지도
  • 1917『캅카스 노동자』 편집자, RSDLP(b) 캅카스 지역위원회 위원
  • 1918–1920멘셰비키 정부하 그루지야에서 지하활동
  • 1921.02–07그루지야 혁명위원회 의장, 온건 노선으로 스탈린에게 해임
  • 1922–1938그루지야 중앙집행위 의장, 인민위원회 의장, 자캅카스 고스플란 의장, 자캅카스 중앙집행위 의장
  • 1938–1941그루지야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소련 최고소비에트 부의장

폴리카르프 구르게노비치 므디바니

Поликарп Гургенович Мдивани

레닌의 마지막 싸움에서 스탈린의 중앙집권화에 맞선 그루지야 공산주의자

「나를 총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사지를 찢겨야 한다! 11군을 이곳으로 끌어들인 것은 나였다. 나는 내 민족을 배신했고, 스탈린과 베리야라는 이 변종들이 그루지야를 노예로 만들고 레닌의 당을 무릎 꿇리는 것을 도왔다」 — 1937년 NKVD 재판에서

그루지야 귀족 출신으로 1903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캅카스 혁명운동과 내전에서 활동했다. 1922년 그루지야 소비에트 인민위원회 의장으로서 스탈린의 '자치화' 계획에 반대하며 그루지야 공화국의 연방 내 주권을 주장했고, 이 갈등은 레닌이 스탈린과 오르조니키제를 비판하며 므디바니 측을 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3년 좌익 반대파에 합류했고, 1928년 출당·유배 후 복당했으나 대숙청 와중인 1937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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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캅카스에서 혁명활동
  • 1918–1919제11군 혁명군사위원회 위원
  • 1920북페르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 임무 수행
  • 1921주터키 RSFSR 전권대표, 그루지야 혁명위원회 의장
  • 1922그루지야 소비에트 인민위원회 의장, 자캅카스 연방 동의회 의장 — '그루지야 사건'에서 스탈린에 반대
  • 1923좌익 반대파 합류, 소비에트 최고경제회의 양보위원회 위원
  • 1924–1928소비에트 연방 주프랑스 무역대표
  • 1928–1931반대파 활동으로 출당·유배, 1931년 복당 신청 후 복권
  • 1931–1936그루지야 국민경제최고회의 의장·경공업인민위원·인민위원회 제1부의장
  • 1937체포, '트로츠키주의 첩보-파괴 센터' 혐의로 사형, 7월 10일 총살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878–1953 ○ 자연사

그루지야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당과 국가를 장악한 지도자

1941년 6월 22일 새벽 4시 30분, 주코프가 독일 침공을 알리러 크렘린에 왔다. 주코프의 회고에 따르면 스탈린은 창백한 얼굴로 빈 담배 파이프를 쥐고 있었다. 몰로토프가 독일의 선전포고를 전하자 그는 말없이 의자에 주저앉아 길게 침묵했다.

1878년 12월 18일(구력 12월 6일) 그루지야 고리에서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다. 청년기에 마르크스주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들어가 『프라우다』를 편집했고, 강탈과 납치로 볼셰비키 자금을 조달하며 체포와 국내 유형을 거듭했다. 1917년 10월 혁명 뒤 정치국에 들어가 1922년 소련 성립을 함께 이끌었고, 같은 해 서기장에 올랐다. 이후 집단화와 급속한 공업화, 1932∼33년 기근과 대숙청,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거쳤다. 1953년 3월 5일 쿤체보 다차에서 사망했다. 일생 동안에는 1879년 출생으로도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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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1917지하활동, 체포·유형을 거듭하다 1917년 프라우다로
  • 1913논문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 발표
  • 1917–1922민족인민위원, 내전기 차리친 전선
  • 1922서기장 취임, 인사권 장악
  • 1924강연집 《레닌주의의 기초》 출간
  • 1928–1933대전환, 집단화·5개년 계획
  • 1936–1938대숙청
  • 1941–1945국가방위위원회 의장·최고사령관
  • 1945–1953전후 재건과 냉전, 1953년 3월 사망
  • 1952《소련 사회주의의 경제문제》 출간

카모

Симон Тер-Петросян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882–1922 ✕ 교통사고

볼셰비키의 전설적 무장약탈자, 광기를 연기해 사형을 네 번 피한 혁명가

레닌이 그를 평했다: 「완전히 예외적인 충성심, 용기, 그리고 에너지를 지닌 사람」. 막심 고리키는 그를 「혁명의 예술가」라 불렀다.

본명 시몬 테르-페트로샨. 고리 출신으로 스탈린과 어린 시절부터 인연을 맺었고, 그에게 러시아어를 배우며 마르크스주의에 눈떴다. 1907년 트빌리시 은행 마차 습격을 지휘해 34만 루블을 볼셰비키 금고에 쥐여준 조직자였다. 베를린에서 체포되어 독일 정신과 의사들조차 속인 치밀한 광기 연기로 사형을 면했고, 트빌리시 정신병원 탈출 후 파리에서 레닌의 환대를 받았다. 내전기에는 캅카스 지하조직을 재건했으나, 그 모든 파괴적 용기는 평화로운 일상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1922년 트빌리시 거리에서 자전거를 타다 트럭에 치여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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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3RSDLP 입당, 트빌리시 위원회 청년조직 지도, 지하인쇄소 조직
  • 1903–1905첫 체포 후 탈옥, 1905년 혁명 참가, 무기 밀반입
  • 1907트빌리시 은행마차 습격 지휘 — 34만 루블 탈취, 레닌에게 전달
  • 1907–1911베를린 체포, 3년간 광기 연기로 사형 면함, 트빌리시 정신병원 탈출
  • 1912–1917코조리 습격 실패 후 체포, 4건 사형선고 → 로마노프 300주년 사면으로 20년형
  • 1918–1920캅카스·남러시아 볼셰비키 지하조직 재건, 바쿠 봉기 준비
  • 1920–1922참모아카데미 수학, 대외무역·그루지야 재무인민위원부 근무

그리고리 콘스탄티노비치 오르조니키제

Григор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Серго) Орджоникидзе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제국 → 소련 그루지야 1886–1937 ✕ 총상 사망, 자살로 추정

대전환의 공업 사령관, 스스로 방아쇠를 당기다

1936년 10월 50세 생일 무렵, 퍄티고르스크에서 열린 기념 행사에 그는 형 파풀리아의 체포 소식에 충격을 받아 참석하지 않았고 아내 지나이다만 홀로 자리를 지켰다.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볼셰비키 원로로, 1912년 프라하 회의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고 1930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다. 캅카스 소비에트화와 트랜스캅카스 연방 수립을 이끌었으며, 1926~30년 중앙통제위원회와 노농검열인민위원회를 이끌고 1930~32년 국민경제최고회의를 거쳐 1932년부터 중공업인민위원으로 제1·2차 5개년계획을 지휘했다. 중공업인민위원으로서 자기 부문의 대량 탄압에 반대해 간부들을 감쌌고, 1937년 2월 18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으며 공식 발표는 심장마비였다. 숙청된 측근과 가족, 죽음의 정황은 사망 원인을 둘러싼 이견과 함께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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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프라하 협의회에서 중앙위원 선출
  • 1921캅카스 소비에트화 지휘, 「그루지야 사건」 논란
  • 1926–1930중앙통제위원회 의장
  • 1930–1932국민경제최고회의 의장
  • 1932–1937중공업인민위원: 5개년 계획의 공업 총괄
  • 1924–1926트랜스캅카스 지역위원회 제1서기
  • 1926북캅카스 지역위원회 제1서기
  • 1926–1930노농검열인민위원, 소련 인민위원회 부의장
  • 1930–1937정치국 정위원
  • 1935스타하노프 운동을 전국적 캠페인으로 전환

아카키 비사리오노비치 코바히제

Акакий Виссарионович Кабахидзе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889–1937 ✕ 처형됨

그루지야 문제의 옛 볼셰비키

1922년 그는 오르조니키제를 ‘스탈린의 당나귀’라 부른 뒤 오르조니키제가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다. 시점은 다투어진다. 한 보도는 10월 20일로 적고, 영문 서술은 11월로 본다.

아카키 코바히제는 1904년 당에 가입하고 구볼셰비키협회 회원이었던 그루지야의 옛 볼셰비키다. 억압 명부는 1889년 그루지야 암브롤라우리 출생, 민족 грузин, 거주지 트빌리시로 적는다. 1922년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으로서 자캅카스 통합에 반대하는 편에 섰고, 그해 오르조니키제를 ‘스탈린의 당나귀’라 부른 뒤 주먹으로 얼굴을 얻어맞았다. 사건 시점은 10월설과 11월설로 갈린다. 1936년 12월 22일 체포되어 1937년 6월 24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튿날 처형되었으며, 1957년 4월 2일 복권되었다. 1922년 인물과 처형자를 동일 인물로 보는 것은 출처에 근거한 추정이며 동명이인 가능성은 배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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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0 또는 11오르조니키제와 충돌해 주먹으로 얼굴을 얻어맞음
  • 1922.12레닌의 민족문제 비판과 연결된 인물
  • 1904당 입당, 구볼셰비키협회 회원
  • 1922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
  • 1936–1937체포(1936)되어 사형 선고 후 처형(1937)
  • 1957복권됨

네스토르 아폴로노비치 라코바

Нестор Аполлонович Лакоба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893–1936 ✕ 독살

스탈린의 절친에서 베리야의 첫 희생자로: 압하지야의 붉은 군주

스탈린이 라코바에게 했다는 말 — '나는 코바, 너는 라코바.' 1936년 12월 27일 밤, 베리야의 저택에서 저녁 식사 후 극심한 구토와 함께 의식을 잃었다. 운전기사는 그가 마지막으로 '베리야가 나를 죽였다'고 속삭였다고 증언한다.

압하지야 볼셰비키 지도자로, 1922년부터 1936년까지 압하지야를 통치하며 농업과 흑해 휴양지 개발을 추진했다. 스탈린의 절친이었으나 베리야에게 독살되었고,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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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트빌리시 신학교에서 혁명 선동으로 제적, 바투미에서 RSDLP(b) 입당
  • 1917–1918압하지야 농민 무장대 '키아라즈' 조직, 수후미 군사혁명위 부의장
  • 1920–1921바투미 지하 볼셰비키 조직 지도, RSFSR-터키 모스크바 조약 협상 참여
  • 1922–1930압하지야 SSR 인민위원평의회 의장
  • 1930–1936압하지야 ASSR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비사리온 비사리오노비치 로미나제

Виссарион Виссарионович Ломинадзе

광주 봉기의 코민테른 설계자, 스탈린 집단화에 맞선 첫 당내 반대파

1930년 제16차 당대회 연단에서 그는 스탈린의 강제 집단화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연설을 마치자 강당은 침묵—박수는 터지지 않았다.

그루지야 출신 볼셰비키로, 코민테른 시절 중국 혁명에 깊이 개입했다. 1927년 8·7 긴급회의를 주재해 천두슈를 경질하고 마오쩌둥을 정치국으로 끌어올렸으며, 광저우 봉기를 승인했다. 중국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근거로 자본주의 단계를 건너뛸 수 있다는 이론을 폈다. 1930년 시르초프와 함께 스탈린의 강제 집단화에 맞선 첫 당내 반대파를 결성했다가 좌천되었고, 1935년 체포 위협 속에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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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페트로그라드 군사조직에서 활동, 쿠타이시 당비서
  • 1918–1920트빌리시·바쿠 위원회, 아제르바이잔 당 중앙위 간부
  • 1921–1922크론슈타트 반란 진압 참여, 페트로그라드 비보르크구 당 조직자
  • 1922–1924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25–1929코민테른 청년인터내셔널 서기, 1927년 중국 대표로 8·7 긴급회의 및 광저우 봉기 주도
  • 1930자캅카스 당 제1서기, 시르초프와 함께 '좌우 블록' 결성 — 중앙위원에서 해임
  • 1933–1935마그니토고르스크 시당 서기

블라디미르 게오르기예비치 데카노조프

Владимир Георгиевич Деканоз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898–1953 ✕ 처형

리투아니아 병합을 연출하고 베를린에서 선전포고를 받은 자

1941년 6월 22일 새벽 4시 베를린에서 리벤트로프가 데카노조프에게 독일의 대소 선전포고를 전달했고, 통역 에리히 좀머에 따르면 그는 침착하게 '히틀러와 스탈린이 직접 만났더라면 인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1898년 6월 바쿠에서 태어나 1953년 12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처형되었으며, 공식 전기는 그를 그루지야인으로 적는다. 1938년 12월부터 1939년 5월까지 NKVD 국가보안총국 부국장으로 대외정보부와 방첩부를 함께 맡아 대숙청 후반기 숙정을 집행했다. 1940년 리투아니아 전권대표로 파견되어 펄레츠키스를 총리로 세우고 7월 14일 인민세이마스 선거를 조직하는 등 한 달여 만에 병합을 완수했다. 전후 외무 차관과 재산총국 부국장 등 한직을 거쳐 1953년 4월 그루지야 내무장관이 되었으나 6월 30일 체포되어 12월 23일 베리야 일당으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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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31아제르바이잔·그루지야 체카·GPU 근무
  • 1936–1938그루지야 식품공업인민위원, 이어 고스플란 의장
  • 1938–1939NKVD 국가보안총국 제5부장(대외정보)
  • 1939–1947외무 부인민위원(부장관)
  • 1940리투아니아 주재 전권대표, 병합 감독
  • 1940–1941독일 주재 소련 대사
  • 1953그루지야 내무장관
  • 1953체포, 재판과 처형

라브렌티 파블로비치 베리야

Лаврентий Павлович Берия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899–1953 ✕ 처형

개혁안을 든 비밀경찰 총수

폭발 직전 '아무것도 안 될 거야, 이고르'라던 베리야는, 섬광이 솟아오르자 쿠르차토프와 하리톤을 달려가 껴안고서도, 곧 의심에 사로잡혀 비키니 실험 관측자에게 '혹시 쿠르차토프가 우릴 속이려는 게 아닌가?'라고 물었다.

스탈린의 비밀경찰 총수이자 원폭 계획의 감독자. 그루지야 메르헤울리에서 가난한 농민 가정에 태어나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캅카스 지역 보안기관을 거쳐 1938년 11월 NKVD 내무인민위원이 된 뒤 대숙청의 대량 탄압을 축소했다. 1940년 트로츠키 암살을 감독하고, 같은 해 3월 5일 정치국 결정에 따라 폴란드 장교·지식인 2만여 명의 카틴 학살을 집행했다. 1944년에는 체첸·잉구시인 등 민족 강제이주를 직접 지휘했고, 1945년부터 특별위원회 의장으로 원폭 계획을 총괄해 1949년 첫 핵실험을 성공시켰다. 스탈린 사후 1953년 제1부총리 겸 내무장관으로 사면·복권 등 개혁을 밀어붙였으나 6월 26일 체포되었고, 12월 23일 사형 선고와 처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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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31캅카스 체카·GPU
  • 1931–1938그루지야 당 제1서기
  • 1938–1945내무인민위원, 예조프 숙청 마무리와 굴라크 관리, 1944년 민족 강제이주 집행
  • 1945–1953원폭 계획 총괄(특별위원회 의장)
  • 1953.03–06제1부총리, 사면·복권 등 개혁안 연발
  • 1953.06체포
  • 1953.12처형

압크센티 나리키예비치 라파바

Авксентий Нарикиевич Рапава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899–1955 ✕ 처형

십 년간 그루지야 경찰기구를 운영한 자

1951년 밍그렐리아 사건으로 체포된 라파바는 자신이 10년간 지휘했던 내부감옥에 갇혀 160일간 잠을 빼앗겼고, 얼음처럼 찬 독방에 수갑을 찬 채 벌거벗겨진 채 버려졌다 — 그가 수하들에게 지시했던 바로 그 고문 수법이었다.

밍그렐리아 출신으로 1920년대 체카에 들어가 1938년부터 10년간 그루지야 NKVD와 국가보안부를 이끌며 대숙청 시기 공화국 보안기구의 핵심 책임자로 활약했다. 베리야의 측근으로서 전간기 그루지야 공안 체제를 구축했으나, 1951년 스탈린의 '밍그렐리아 사건'에 연루됐다가 스탈린 사후 풀려났고, 베리야 몰락 직후인 1953년 7월 재체포되어 1955년 공개 재판 끝에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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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1아자리야 GPU 책임자
  • 1931–1933그루지야 GPU 부의장
  • 1936–1937자캅카스·그루지야 부내무인민위원
  • 1937–1938압하지야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이어 인민위원회의 의장
  • 1938–1943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 1943–1948그루지야 국가보안인민위원, 이어 장관
  • 1948–1951그루지야 법무장관
  • 1953그루지야 국가통제장관
  • 1953–1955체포, 트빌리시 재판과 처형

라브렌티 포미치 차나바

Лаврентий Фомич Цанава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900–1955 ○ 옥사

‘두 번째 라브렌티’, 미호엘스 살해를 주관한 베리야의 사람

1948년 1월 12일 밤 솔로몬 미호엘스와 골루보프는 민스크 외곽 차나바의 다차로 유인되어 그곳에서 살해되었고, 사망은 교통사고로 위장되었다.

본명 라브렌티 잔즈가바로, 1900년 쿠타이시 현 나후나보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고 1920년 8월 당에 입당했다. 1938년부터 1951년까지 벨로루시 국가보안기관을 이끌며 서부 벨로루시의 대규모 총살과 추방을 조직했고, 이 시기 체포자에 대한 구타에 직접 가담했다는 사건 기록이 남아 있다. 스탈린의 지시로 미호엘스 암살이 결정되자 그의 다차가 작전 거점이 되었고, 1948년 1월 12일 밤 극장 배우 솔로몬 미호엘스와 골루보프가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1951년 말 소련 MGB 부장관이 되었다가 이듬해 실각했고, 1953년 4월 체포되어 1955년 10월 부티르카 감옥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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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1벨로루시 내무인민위원
  • 1941벨로루시 국가보안인민위원
  • 1941–1943벨로루시 NKVD, 서부·중부전선 특별부장
  • 1942–1943파르티잔운동 중앙참모부 부장
  • 1943–1951벨로루시 국가보안인민위원, 이어 장관
  • 1951–1952소련 국가보안 부장관, 제2총국장(방첩)
  • 1953–1955체포, 재판 없이 옥중 사망

그리고리 아르테모비치 아루티노프

Григорий Артемьевич Арутино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900–1957 ○ 심장마비

16년간 스탈린 시대 아르메니아를 이끌며 산업 건설과 문화 부흥을 주도한 '그리고리 건설자'

요양 제안을 거절하며: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치료받으면 우리 제르무크는 누가 짓나?' 진흙 속을 걸으며 직접 부지를 정한 끝에 제르무크는 아르메니아 대표 온천도시가 되었다.

1937년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로 발탁돼 16년간 공화국을 이끌며 중공업·도시계획과 '다비드 사순스키' 서사시 기념 등 문화 부흥을 주도했다. 1953년 해임 후 국영농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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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22그루지야 공산당 테라비 현위원회 선전부장 · 서기
  • 1922–1924모스크바 마르크스 국민경제연구소 수학 (중퇴)
  • 1927–1930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농촌 담당
  • 1931–1934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부장 · 서기국원
  • 1934–1937트빌리시 시당위원회 서기 (제1서기 → 제2서기)
  • 1937–1953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41–1945자캅카스 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 1953–1955예레반 근교 국영농장(소프호스) 의장

세르고 아르세니예비치 고글리제

Сергей Арсеньевич Гоглидзе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901–1953 ✕ 처형

그루지야 대숙청의 실무 총괄에서 극동의 총독으로

동독에서 소콜롭스키 원수의 사무실로 소환된 고글리제는, 뒤따라 들어온 두 장교가 권총을 겨누자 1953년 7월 3일 체포되었다. '그의 눈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고 목격자가 기록했다. 베리야 측근들의 몰락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그루지야 출신 국경경비대 정치장교로, 캅카스에서 베리야의 눈에 띄어 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이 되었고 NKVD 트로이카를 주재하며 대숙청을 실무 총괄했다. 베리야의 후원으로 레닌그라드 NKVD에서 예조프 잔당을 정리했고, 1941년 4월 몰다비아 전권대표로서 새로 병합된 베사라비아에서 3만 명 이상의 추방을 지휘했다. 1941년 7월부터 하바롭스크변경주 NKVD·MGB 책임자를 지냈다. 1953년 7월 3일 동독 출장 중 체포되어 그해 12월 23일 베리야 등과 함께 총살됐다. 2002년 러시아 연방 대법원 군사재판부는 그를 대규모 탄압의 조직자로 지목해 복권 대상이 아닌 자로 결정했고, 일부 2차 자료가 주장하는 2004년 복권은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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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38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그루지야 NKVD 트로이카 의장
  • 1938–1941레닌그라드주 NKVD 관리국장
  • 1941몰다비아 주재 NKVD 전권대표
  • 1941–1951하바롭스크변경주 NKVD·MGB 책임자, 극동 MGB 전권대표
  • 1951–1952국가보안 제1부장관
  • 1951–1952우즈베크 국가보안장관
  • 1952–1953MGB 제3총국장(군 방첩), 국가보안 제1부장관
  • 1953구금, 재판과 처형

그리고리 테오필로비치 카라나제

Григорий Теофилович Каранадзе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902–1970 ○ 자연사

숙청을 넘기고 살아남은 그루지야 내무장관

1952년 4월 베리야를 겨냥한 '밍그렐리아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스탈린 사후 베리야의 손으로 풀려났다. 이듬해 베리야가 실각하자 측근들은 대부분 총살당했지만, 카라나제는 해임에 그치고 1970년 자연사했다.

베리야의 그루지야 출신 측근으로, 크림·다게스탄 내무인민위원을 거쳐 그루지야 내무장관(1943~1952)을 지냈다. 밍그렐리아 사건으로 체포됐다가 스탈린 사후 복권되었고, 베리야 측근 중 유일하게 처형을 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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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937트빌리시·시그나기 지구당 제1서기
  • 1938–1941크림 자치공화국 내무인민위원
  • 1942–1943다게스탄 자치공화국 내무인민위원
  • 1943–1952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이어 장관
  • 1952–1953‘밍그렐리아 사건’으로 체포, 이후 복권
  • 1953그루지야 내무 부장관
  • 1957–1970그루지야 각료회의 국가산림위원회 부의장

스테판 솔로모노비치 마물로프

Степан Соломонович Мамул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902–1976 ○ 자연사

NKVD 서기국을 쥔 문서의 관문

1938년 12월 베리야의 부름으로 트빌리시에서 모스크바로 올라왔다. 한 달 뒤 NKVD 서기국 제1부국장에 임명되어, 14년간 비밀경찰의 모든 문서가 그의 책상을 통과했다.

베리야 측근 당 관료. NKVD 서기국장으로 문서 흐름 전체를 통제했고, 내무 부장관으로 수용소 체계를 관장했다. 베리야 숙청 후 별도 재판으로 15년형을 살고 1968년 석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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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38압하지야·그루지야·카자흐스탄 당 사업, 트빌리시 시당 서기
  • 1939–1946NKVD·MVD 서기국장
  • 1946–1953내무 부장관(수용소·보급 관장)
  • 1953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장
  • 1953–1968체포, 십오 년형 복역

아마야크 자하로비치 코불로프

Амаяк Захарович Кобул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906–1955 ✕ 처형

나치의 역정보를 모스크바로 흘려보낸 베를린 레지덴트

베를린에서 코불로프가 심은 첩자 '리체이스트'는 실제로는 게슈타포가 조종하는 이중간첩이었다. 그의 보고는 NKVD 정보분석관을 건너뛰고 베리야를 거쳐 스탈린의 책상에 직행했고, "독일의 침공 위험은 없다"는 확신을 강화시켰다.

보그단 코불로프의 동생으로, 형과 베리야의 후원에 힘입어 NKVD에서 출세했다. 1938년 서른둘에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대행, 이듬해 베를린 NKVD 레지덴트로 파견되었으나 독일어도 작전 훈련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의 주력 첩자 '리체이스트'는 실제로는 독일이 심은 이중간첩으로, 1940~1941년 나치의 역정보가 코불로프를 통해 모스크바로 흘러들어갔다. 전쟁기에는 우즈베키스탄 보안 총수, 전후에는 포로관리총국과 굴라크 부수장을 지냈으며, 1953년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1955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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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8가그라 시 NKVD 부장, 이어 압하지야 자치공화국 NKVD
  • 1938–1939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대행
  • 1939–1941베를린 주재 대사관 참사관, NKVD 합법 레지덴트
  • 1941–1945우즈베크 국가보안인민위원, 이어 내무인민위원
  • 1945–1951포로·억류자 관리총국 부국장, 이어 제1부국장
  • 1951–1953포로관리국장 겸 굴라크 제1부수장
  • 1953–1955체포, 별도 재판과 처형

미하일 포르피리예비치 게오르가제

Михаил Порфирьевич Георгадзе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그루지야 1912–1982 ○ 자연사

네 국가원수 아래 25년간 모든 소비에트 법령에 공동 서명한 제도적 닻

1982년 11월 23일, 브레즈네프 사망 13일 만에 최고회의 회의장에 참석했다가 자리에서 쓰러져 사망했다. 25년의 행정적 연속성이 한 순간에 끊어졌다.

소비에트 최고회의 상무회 서기(1957–1982)로서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시대 네 명의 국가원수 아래 모든 법령에 공동 서명한 행정 중심축이다. 그루지야 농민 가정 출신으로 농업 공학을 전공했고, 조국전쟁에서 중상을 입었다. 그루지야 공산당 제2서기와 각료회의 제1부의장을 거쳐 모스크바로 올라가 25년간 최고회의 상무회의 제도적 연속성을 체현했다. CPSU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1961–1982)로서 당과 국가 기구 사이의 조용하지만 필수적인 고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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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51소련 농업부, 기술자에서 부서장까지 승진
  • 1941–1942위대한 조국전쟁 참전, 중상으로 퇴역, 적성훈장 수훈
  • 1951–1953그루지야 SSR 농업차관
  • 1953–1954그루지야 SSR 농업장관
  • 1954–1956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
  • 1956–1957그루지야 SSR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57–1982소련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서기
  • 1961–1982CPSU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알렉산드르 다비도비치 나디라제

Александр Давидович Надирадзе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914–1987 ○ 심장마비

소련 이동식 ICBM 전력의 창시자, 그루지야 태생의 비밀 설계자

1987년 12월 8일 고르바초프와 레이건이 INF 조약으로 그의 RSD-10 Pioneer(SS-20) 728기를 폐기했을 때, 나디라제는 9월 3일 이미 사망해 이를 알지 못했다. 그가 설계한 Topol(SS-25)은 2023년 퇴역했다.

그루지야 고리에서 태어나 1938년부터 사망 때까지 모스크바의 방위 연구기관에서 일한 로켓 설계자. 1944년 당에 입당해 소련 시민으로 살았다.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추천으로 1958년 NII-1로 옮겨 특별설계국장을 맡았고, 1965년 MITT로 개칭된 연구소의 소장 겸 총설계자를 1987년까지 지냈다(사료에 따라 1961년부터). RT-21 Temp-2S(SS-16), RSD-10 Pioneer(SS-20), RT-2PM Topol(SS-25)을 설계해 전략로켓군에 이동식 고체연료 전력을 세웠다. 220건 이상의 발명과 100편 이상의 논문을 남겼고, 1987년 9월 3일 심장마비로 사망해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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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41TsAGI에서 항공기 착륙장치 연구, Tu-2 개발 참여
  • 1941–1945대전차탄 개발, 로켓 설계로 전환
  • 1945–1953OKB 수석설계자: 소련 최초 기상로켓 MR-1, 유도폭탄 '차이카'
  • 1958–1961NII-1 수석설계자, 고체연료 전술미사일 Temp-S
  • 1961–1987MITT 소장 겸 총설계자(사료에 따라 1965년부터로도 기록): Temp-2S(SS-16), Pioneer(SS-20) 실전 배치, Topol(SS-25) 개발
  • 1976–1982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수훈(1976, 1982), Pioneer-UTTH 배치, 1981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77–1987Topol(SS-25) 설계, 국가상 수상(1987), 심장마비로 사망

텡기즈 예브게니예비치 아불라제

თენგიზ ევგენის ძე აბულაძე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그루지야 1924–1994 ○ 자연사

글라스노스트의 문화적 신호탄을 쏘아올린 그루지야의 영화감독

「참회」가 봉쇄되었을 때 아불라제는 필름이 파기될까 두려워 유일한 비디오 사본을 자신의 침대 밑에 보관했다.

그루지야 출신의 소련 영화감독. 1955년 레조 치헤이제와 공동 연출한 데뷔작 「마그다나의 당나귀」로 칸 단편상을 수상했고, 「기도」(1967)·「소망의 나무」(1976)·「참회」(1984)로 이어지는 삼부작을 완성했다. 1984년 완성 후 2년간 봉쇄되었던 「참회」는 1986년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 속에서 공개되어 스탈린 시기 테러를 우화적으로 고발한 최초의 소련 영화가 되었고, 그 공개 자체가 글라스노스트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문화적 신호탄이었다. 1987년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고 소련 인민대의원(1989~1991)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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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트빌리시 연극학교 입학, 1946년 졸업
  • 1953VGIK 졸업, 그루지야필름 입사
  • 1955「마그다나의 당나귀」 공동 연출, 칸영화제 단편상(1956)
  • 1967삼부작 첫 영화 「기도」 완성
  • 1976「소망의 나무」 완성, 트빌리시 연극학교 교수
  • 1984「참회」 완성, 2년간 상영 금지
  • 1986「참회」 공개, 글라스노스트의 상징이 되다
  • 1989소련 인민대의원 선출

로이 알렉산드로비치 메드베데프

Ро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едведев

스탈린주의를 마르크스주의자로 심판한 역사가

《역사의 심판대에》 서문에서: "나는 젊은 시절의 신념과 이상을 결코 배반한 적이 없다. 그것이 아버지의 영향이며, 사회주의에 대한 나의 생각은 물론 변했지만, 깊은 확신 없이는 이 책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소련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자 공산주의자 출판인. 1960년대부터 반체제 운동에 참여하며 사미즈다트 저널 《정치일기》를 편집했고, 20년 가까이 집필한 대작 《역사의 심판대에》에서 스탈린주의의 기원과 결과를 방대한 사료로 분석했다. 이 책으로 1969년 제명되었으나 사회주의적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고, 1989년 복당 후 인민대표·최고회의 의원·중앙위원을 지냈다. 평생 35권 이상의 저작을 남기며 사회주의 내부에서의 자기비판적 역사학을 개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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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트빌리시 출생, 인도 공산주의자 M. N. 로이의 이름을 따서 명명
  • 1946–1951레닌그라드대 철학부 우등 졸업, 콤소몰 서기 활동
  • 1958교육학 후보학위 취득 (모스크바 국립사범대)
  • 1960년대사미즈다트 저널 《정치일기》 편집, 반체제 운동 참여
  • 1969《역사의 심판대에》 집필로 공산당 제명
  • 1970사하로프·투르친과 브레즈네프 지도부에 개방서한 발표
  • 1989–1991소련 인민대표·최고회의 의원, 복당 후 중앙위원
  • 1991–2002러시아연방 노동자사회당 공동의장

제르멘 미하일로비치 그비시아니

Джермен Михайлович Гвишиани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928–2003 ○ 자연사

소련 계획과학과 서구 시스템 분석을 연결한 철학자

그의 이름 '제르멘'은 아버지가 근무했던 국가정치보안부(OGPU)의 두 수장 —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뱌체슬라프 멘진스키 — 의 이름 첫 음절을 조합한 것이다.

소련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경영 이론가. 알렉세이 코시긴의 사위로, 1965년부터 1985년까지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부의장을 지내며 소련의 과학기술 정책을 조율했다. 로마 클럽 회원이자 오스트리아 국제응용시스템분석연구소(IIASA)의 공동 설립자로서, 냉전기 소련 계획과학과 서구 시스템 분석 사이의 드문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1976년 전연방시스템연구소(VNIISI)를 설립하여 소장을 맡았으며, 이 연구소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 속에서 시장 지향적 개혁 아이디어를 배양하여 페레스트로이카 시대 경제 논쟁의 산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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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MGIMO) 졸업
  • 1951–1955소련 해군 복무
  • 1955–1965국가신기술위원회(이후 GKNT) 근무
  • 1965–1985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부의장
  • 1976–1992전연방시스템연구소(VNIISI) 소장
  • 1985–1986소련 국가계획위원회(Gosplan) 부의장
  • 1979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메라브 콘스탄티노비치 마마르다슈빌리

Мераб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Мамардашвили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930–1990 ○ 심장마비

의식을 소리내어 말한 철학자

「영웅적 의식은, 우리가 정확히 사유하지 않을 때 악마가 우리를 가지고 논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정확히 사유하라.」

소비에트 그루지야의 철학자. 마르크스에서 칸트·프루스트로 나아가며 의식과 자유를 비도그마적으로 탐구했다. 모스크바 논리학 서클을 공동 창립했고, 강의로 철학했으며 작업 대부분이 녹음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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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4모스크바 국립대 철학과 수학, 졸업
  • 1954–1957모스크바 국립대 철학과 대학원
  • 1958–1961『보프로시 필로소피』 편집자문위원, 철학 후보학위 취득
  • 1961–1966『평화와 사회주의의 제 문제』 비평·서지부장 (프라하)
  • 1966–1974국제노동운동연구소 부문장, 『보프로시 필로소피』 부편집장
  • 1968–1980모스크바 국립대·VGIK·심리학연구소 강의; 철학박사(1970), 교수(1972)
  • 1980–1990그루지야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주임연구원, 트빌리시 국립대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