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앙리 드 생시몽

Henri de Saint-Simon
초기 사회주의 프랑스 프랑스 1760–1825

생산하는 ‘산업가’가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본 프랑스 사상가

『공산당 선언』 제3장은 그를 푸리에·오언과 함께 계급 투쟁이 덜 발전한 시기에 나온 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 체계의 창시자로 꼽는다.

파리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해 요크타운 포위전에 참여했다. 혁명기에 국유재산 투기로 돈을 모았고 공포정치 시기에 투옥되었다. 『산업』, 『조직자』, 『산업가의 교리문답』 등에서 과학자·기업가·노동자를 아우르는 생산적 ‘산업가’가 무위도식하는 계급 대신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만년의 『새 그리스도교』에서는 가장 가난한 계급의 처지 개선을 내세웠다. 『공산당 선언』이 그를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자적 정치 운동을 보지 못한 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자로 분류한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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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79–1783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해 요크타운 포위전에 참여했다.
  • 1793–1794공포정치 시기 생트펠라지와 뤽상부르에 갇혔다가 테르미도르 9일 뒤 풀려났다.
  • 1803첫 저작 『제네바 주민의 편지』를 펴냈다.
  • 1816–1817『산업』을 펴냈고, 1817년부터 오귀스트 콩트가 비서로 함께 일했다.
  • 1823–1824『산업가의 교리문답』을 펴냈다.
  • 1825『새 그리스도교』를 펴내고 그해 파리에서 사망했다.

샤를 푸리에

Charles Fourier
초기 사회주의 프랑스 프랑스 1772–1837

협동 공동체 팔랑스테르를 구상한 프랑스 사회사상가

상업 문명을 비판하고, 사람들이 저마다의 정념에 맞게 일하는 협동 공동체 ‘팔랑스테르’를 구상했다. 『공산당 선언』은 그를 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자로 꼽는다.

브장송의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1791년부터 1816년까지 여러 도시에서 외판원·서신 담당 사무원으로 일했다. 1808년 『네 운동의 이론』을 익명으로 낸 뒤, 상업이 사기와 비참을 낳는다고 비판하고, 협동 공동체 ‘팔랑스테르’에서 각자의 정념에 맞게 일하는 ‘매력 있는 노동’을 구상했다. 빅토르 콩시데랑 등 제자들이 그의 사상을 퍼뜨렸고 여러 나라에서 공동체 실험이 있었다. 『공산당 선언』 제3장은 그를 생시몽·오언과 함께 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의 창시자로 꼽고, 제자들이 팔랑스테르 같은 실험에 매달려 노동자의 정치 운동에 반대한다고 비판했는데, 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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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91–1816파리·루앙·리옹·마르세유·보르도에서 외판원·서신 담당 사무원으로 일했다.
  • 1808『네 운동의 이론』을 리옹에서 익명으로 펴냈다.
  • 1822협동 공동체 구상을 정리한 대작 『가정·농업 협동체론』을 펴냈다.
  • 1829이론의 요약본 『산업적·협동적 새 세계』를 펴냈다.
  • 1837파리에서 사망했다.

에티엔 카베

Étienne Cabet
초기 사회주의 프랑스 프랑스 1788–1856 ○ 뇌졸중

'공산주의'라는 말을 만든 이카리아 운동의 창시자

1848년 2월 3일, 카베의 추종자 69명이 르아브르 항구에서 배에 올랐다. '이카리아로 가자!' 그들은 신대륙에 지상의 공산낙원을 세우러 떠났다.

프랑스의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이자 이카리아 운동의 창시자. 1840년 『이카리아 여행』을 출판하여 노동자 협동조합에 기반한 공산사회의 청사진을 제시했고, '공산주의(communisme)'라는 말을 처음 정치적 용어로 정립했다. 약 40만 추종자를 거느린 당대 가장 대중적인 사회주의 옹호자로, 『진정한 기독교』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사회 평등의 복음으로 재해석했다. 1848년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와 일리노이에 이카리아 공동체를 세웠고, 1898년까지 이어진 미국 최장수 비종교 공동체 실험이 되었다. 계몽주의 유토피아 사상과 노동자 운동을 잇는 교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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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8디종 출생. 변호사 자격 취득
  • 1830–18317월혁명 참여 후 바스티아 검찰총장. 코트도르 하원의원 당선
  • 1833–1834『르 포퓰레르』 창간. 반정부 논설로 반역죄 유죄 판결, 영국 망명
  • 1834–1839영국에서 로버트 오웬과 교류하며 공산주의 사상 구상
  • 1840『이카리아 여행』 출판. 스스로 '공산주의자'라고 부른 최초의 인물
  • 1841–1847『르 포퓰레르』 복간. 약 40만 명 독자층 확보, 『진정한 기독교』 출간
  • 1848추종자들과 미국으로 이주. 텍사스·일리노이에 이카리아 공동체 설립
  • 1849–1856노부 이카리아 공동체 지도자. 내부 갈등 속 1856년 세인트루이스에서 사망

아돌프 티에르

Adolphe Thiers
독립 활동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797–1877 ○ 뇌졸중

7월 왕정의 총리로, 1871년 파리 코뮌을 진압하고 제3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된 정치가

1871년 5월 파리 코뮌을 진압한 티에르는 1873년 독일군의 프랑스 영토 철수를 앞당긴 뒤 왕당파 의회의 반대 속에 사임했다.

마르세유 출신 변호사·언론인으로 『프랑스 혁명사』를 써 이름을 알렸고, 1830년 7월 혁명에서 루이 필리프를 옹립한 뒤 7월 왕정의 내무장관과 총리를 지냈다. 1834년 리옹 견직공 봉기와 파리 봉기를 진압했다. 제2제정기에는 자유주의 야당의 지도자였다. 1871년 2월 국민의회가 그를 행정 수반으로 세웠고, 3월 18일 몽마르트르의 대포 회수가 실패하자 정부를 베르사유로 옮겨 5월 피의 주간에 코뮌을 진압했다. 1871년 8월 대통령이 되었고 독일 배상금을 조기에 갚았으나 1873년 왕당파 의회에 밀려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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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3–1827『프랑스 혁명사』 10권을 출간해 역사가로 이름을 알렸다.
  • 18367월 왕정에서 총리를 지냈다.
  • 18407월 왕정에서 총리를 지냈다.
  • 1871–1873프랑스 제3공화국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혁명적 사회주의 프랑스 프랑스 1805–1881 ○ 뇌졸중

37년을 감옥에서 보낸 봉기의 전략가, '블랑키즘'으로 레닌주의에 길을 열다

"나는 3천만 프랑스인, 나와 같은 프롤레타리아들에게 그들이 살 권리가 있다고 말한 죄로 고발되었습니다." — 1832년 '15인 재판' 최후진술

프랑스 혁명적 사회주의자. 소수 전위의 무장봉기와 혁명적 독재를 주장하는 블랑키즘을 체계화해 마르크스주의와 볼셰비키 전위당론에 영향을 미쳤다. 37년을 감옥에서 보내 '유폐된 자'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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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4카르보나리 가입 — 군주제 전복을 위한 비밀결사
  • 1827샤를 10세 반대 시위 참여 — 세 차례 부상, 목에 총상
  • 18307월 혁명 참전 — 루이 필리프 입헌군주제에 환멸, 공화주의로 전환
  • 1832'민중의 벗(Amis du peuple)' 결성, 체포 — 재판에서 직업을 '프롤레타리아'라 밝힘
  • 1837바르베스·베르나르와 함께 비밀결사 '계절의 모임(Société des Saisons)' 창설
  • 1839.05파리 봉기 주도 — 실패, 사형 선고 후 종신형으로 감형
  • 18482월 혁명으로 석방, '공화주의 중앙협회' 설립 — 적기 채택과 선거 연기 요구
  • 1849–18595월 봉기 실패로 10년형 — 여러 교도소에서 복역
  • 1865–1870브뤼셀 망명 — 『무장봉기 지침』 등 주요 저술 집필
  • 1870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 라빌레트 봉기 지도, 신문 '조국의 위기' 창설
  • 1871.03.17파리 코뮌 직전 체포 — 부재중 코뮌 위원 선출, 베르사유는 대주교와의 맞교환 거부
  • 1872클레르보 감옥에서 『별을 통한 영원』 집필
  • 1879보르도에서 하원의원 당선(무효화), 사면 석방
  • 1880신문 'Ni Dieu ni maître' 창간, 프랑스 전역 순회 연설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

Patrice de Mac Mahon
프랑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08–1893 ○ 자연사

스당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베르사유군을 이끌고 파리 코뮌을 진압했으며, 「도덕 질서」의 대통령이 된 원수

1871년 5월 베르사유군 사령관으로 파리 코뮌을 진압했다. 1873년 대통령이 된 뒤 「도덕 질서」 정부를 이끌었고, 1877년 공화파가 의회 다수당이 되자 1879년 사임했다.

아일랜드계 귀족 가문 출신 군인으로 알제리 정복과 크림 전쟁의 말라코프 공격, 1859년 마젠타 전투로 원수와 공작이 되었다. 1870년 샬롱군을 이끌고 메스를 구하러 가다 스당에서 부상당해 황제와 함께 포로가 되었다. 독일에서 풀려난 뒤 티에르의 베르사유군 사령관이 되어 1871년 5월 파리에 진입했고, 피의 주간의 진압과 대량 처형이 그의 지휘 아래 벌어졌다. 1873년 티에르를 이어 대통령이 되어 왕정복고를 기다리는 「도덕 질서」 정부를 이끌었고, 1877년 의회와의 충돌에서 패한 뒤 1879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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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7프랑스군에 입대했다.
  • 1855크림 전쟁 중 세바스토폴 공방전의 말라코프 전투에서 승리했다.
  • 1859마젠타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승리에 기여해 원수와 마젠타 공작 작위를 받았다.
  • 1864알제리 총독으로 임명됐다.
  • 1870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하다 스당 전투에서 부상당해 나폴레옹 3세와 함께 포로가 됐다.
  • 1871티에르 대통령 아래 베르사유군 사령관이 되어 5월 파리 코뮌 진압을 지휘했다.
  • 1873프랑스 제3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돼 「도덕 질서」 정책을 추진했다.
  • 1877–1879의회와의 대립 뒤 공화파가 선거에서 승리하자 1879년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샤를 들레클뤼즈

Charles Delescluze

1830·1848년 혁명을 거쳐 코뮌의 전쟁 대표가 되고 바리케이드에서 죽음을 택한 자코뱅 언론인

1871년 파리 코뮌의 전쟁 대표 들레클뤼즈는 피의 주간 마지막 날인 5월 25일, 무장하지 않은 채 샤토도 광장의 바리케이드로 걸어가 전투 중 총에 맞아 숨졌다.

드뢰 출신으로 1830년 7월 혁명에 가담했고, 1848년 2월 혁명 뒤 공화파 신문을 내며 활동하다 망명했다. 제2제정기에 체포되어 기아나 유형지 카옌에서 복역했고, 1868년 신문 『르 레베유』를 창간했다. 1871년 2월 국민의회 의원으로 뽑혔으나 코뮌에 참여하려고 사퇴했다. 자코뱅계 「독립 혁명가」로 공안위원이 되었고 5월 11일 민간인으로서 전쟁 대표를 맡았다. 5월 25일 패배가 분명해지자 샤토도 광장의 바리케이드 위로 걸어 올라가 총에 맞아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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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07월 혁명에 참여했다.
  • 18482월 혁명 뒤 공화파 언론인으로 활동했고, 이후 망명했다.
  • 1868신문 『르 레베유』를 창간했다.
  • 1871국민의회 의원으로 선출된 뒤 사퇴하고 파리 코뮌에 합류해 공안위원과 전쟁 대표를 맡았다.

외젠 포티에

Eugène Pottier

파리 코뮌 의원으로 피의 주간 뒤 숨어서 「인터내셔널가」의 가사를 쓴 직물 도안공·시인

1871년 6월 파리 코뮌이 진압된 뒤, 파리 은신 중에 「인터내셔널가」의 가사를 썼다. 미국 망명 중 추방된 코뮌원들과의 연대를 조직했다.

파리의 포장공 가정에서 태어나 직물 도안공으로 일하며 1830년대부터 노래와 시를 썼고, 1848년 6월 봉기에 가담했다. 도안공 조합을 세우고 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했다. 1871년 4월 2구 보궐선거로 코뮌 의원이 되었고, 피의 주간 뒤인 6월 숨어 지내며 「인터내셔널가」를 썼다. 궐석 사형 선고를 받고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880년 사면으로 돌아왔다. 1887년 가난 속에 숨졌고, 이듬해 피에르 드제이테르가 곡을 붙인 「인터내셔널가」는 세계 노동운동의 노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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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0첫 노래 「자유 만세」를 지었다.
  • 18481848년 혁명에 참여했다.
  • 1864직물 도안공 조합의 창설을 주도했고, 조합은 이후 제1인터내셔널에 가입했다.
  • 1871파리 코뮌 의원으로 선출되어 공공서비스위원회에서 일했고, 피의 주간 전투에도 참여했다.
  • 1880사면 뒤 프랑스로 돌아왔다.
  • 1887「인터내셔널가」 가사가 처음 실린 『혁명가요집』이 출간되었다.

귀스타브 쿠르베

Gustave Courbet
독립 활동 프랑스 프랑스 1819–1877 → 망명지에서 사망

코뮌의 예술가 연맹을 이끌고 방돔 원주 철거의 책임을 지고 스위스로 망명한 사실주의 화가

1871년 파리 코뮌에서 예술가 연맹 의장과 의원을 맡아 박물관 개방을 추진했다. 코뮌 패배 뒤 방돔 원주 파괴 책임으로 6개월 수감됐고, 재건 비용 판결 후 스위스로 망명했다.

쥐라 지방 오르낭의 부농 가정에서 태어나 「오르낭의 매장」과 「돌 깨는 사람들」로 사실주의를 열었고, 프루동과 가까웠다. 1870년 레지옹 도뇌르를 거절했다. 1871년 코뮌의 예술가 연맹 의장으로 미술관의 자치와 검열 폐지를 요구했고, 6구 보궐선거에서 코뮌 의원이 되어 코뮌 공안위원회에 반대한 소수파에 섰다. 방돔 원주를 옮기자고 제안한 일 때문에 피의 주간 뒤 6개월 금고를 선고받았고, 1873년 원주 재건 비용을 물라는 판결이 나자 스위스로 망명해 라투르드페이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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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9–1851「돌 깨는 사람들」과 「오르낭의 매장」 등 일상 장면을 대형 화폭의 사실주의 양식으로 그려 파리 살롱의 관습에 도전했다.
  • 1870정부의 권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공개적으로 거절했다.
  • 1871파리 코뮌에서 예술가 연맹 의장을 맡고 박물관 개방과 전시회 조직을 추진했으며, 의원으로 활동했다.
  • 1873방돔 원주 재건 비용 32만 3천 프랑을 부담하라는 판결 뒤 스위스로 떠나 라투르드페이에 정착했다.

귀스타브 폴 클뤼세레

Gustave Paul Cluseret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823–1900 ○ 자연사

프랑스 군인으로 파리 코뮌의 전쟁대표를 지냈다

파리 코뮌의 전쟁대표로 국민방위군 재편을 추진했으나 지도부와 충돌해 체포되었다.

클뤼세레는 1848년 프랑스군 장교로 6월 봉기 진압에 참여했고, 이후 이탈리아 통일전쟁과 미국 남북전쟁에서 복무했다. 1871년 파리 코뮌에서 전쟁대표로 국민방위군 재편을 추진했으나 지도부와의 갈등 속에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코뮌 진압 뒤 해외로 피신했다. 사면 후 귀국해 툴롱에서 사회주의자로 하원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이후 사회주의에서 멀어져 반드레퓌스파에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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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3프랑스 쉬렌에서 태어났다.
  • 1848프랑스군 장교로 6월 봉기 진압에 참여했다.
  • 1860가리발디 의용군에 합류해 이탈리아 통일전쟁에 참여했다.
  • 1861–1863미국 남북전쟁에서 북군에 복무하고 준장 계급에 올랐다.
  • 1871파리 코뮌의 전쟁대표로 국민방위군 재편을 추진했다. 지도부와 충돌해 5월 1일 체포됐고, 5월 21일 특별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 1880코뮌 참여자 사면으로 프랑스에 돌아왔다.
  • 1888–1898툴롱에서 사회주의자로 네 차례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 1900사망했다.

나탈리 르멜

Nathalie Le Mel

프랑스 제본공이자 파리 코뮌의 여성 연합 활동가

브르타뉴 브레스트 출신인 르멜은 파리에서 제본공으로 일하며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1865년 제본공 노동자들의 남녀 동일임금 쟁취에 기여했고, 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해 외젠 바를랭과 협동조합 식당 라 마르미트를 운영했다. 1871년 파리 코뮌 때 여성 연합의 지도적 활동가로 바리케이드에서 싸웠다. 체포된 뒤 루이즈 미셸과 함께 누벨칼레도니로 유형되었으며 1880년 사면으로 파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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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5제본공들의 남녀 동일임금 쟁취에 기여하고 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했다.
  • 1860년대–1871외젠 바를랭과 협동조합 식당 라 마르미트를 운영했다.
  • 1871파리 코뮌의 여성 연합에서 활동하고 바리케이드에서 싸웠다.
  • 1871–1880체포·뉴칼레도니아 유형 뒤 1880년 사면으로 파리로 돌아왔다.

루이즈 미셸

Louise Michel
아나키스트 프랑스 프랑스 1830–1905 ○ 폐렴

코뮌의 바리케이드에서 싸우고 뉴칼레도니아로 유형된 뒤 아나키즘의 상징이 된 「붉은 처녀」

파리 코뮌에서 몽마르트르 여성감시위원회를 이끌고 바리케이드에서 싸운 루이즈 미셸은 패배 뒤 뉴칼레도니아로 유형되었으며, 귀환 후 노동자 집회와 아나키스트 운동에 헌신했다.

오트마른의 성에서 하녀의 딸로 태어나 교사가 되었고, 1850년대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학교를 열며 공화파·사회주의 클럽에 드나들었다. 1871년 3월 18일 몽마르트르에서 대포를 지키러 나섰고, 코뮌 기간 감시위원회와 구급 활동, 방위군 대대에서 활동했다. 피의 주간 뒤 어머니 대신 자수해 법정에서 사형을 요구했으나 뉴칼레도니아 유형을 선고받았다. 그곳에서 카나크인의 1878년 봉기를 지지했다. 1880년 사면으로 돌아와 아나키스트로서 연설과 투옥을 거듭했고 1905년 마르세유에서 강연 여행 중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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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50년대–1860년대마을에서 교사로 일한 뒤 1856년 파리로 옮겼다. 1865년 파리에 학교를 열고 시를 발표했으며, 블랑키주의 혁명가들과 교류하고 여성의 시민권과 여학생 교육을 위한 활동에 참여했다.
  • 1871파리 코뮌에서 몽마르트르 여성감시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제61 몽마르트르 대대에서 싸우며 구급소를 조직했다. 피의 주간에 어머니를 지키려 프랑스군에 자수했다.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요구했지만 태평양의 프랑스 유형지 뉴칼레도니아로 이송형을 선고받았다.
  • 1873–1880뉴칼레도니아로 유형되어 카나크인과 교류하고 프랑스어를 가르쳤으며 1878년 카나크 봉기를 지지했다. 1880년 코뮌 참여자 사면으로 프랑스로 돌아왔다.
  • 1880–1905프랑스로 돌아온 뒤 노동자 집회와 시위에서 연설했고, 아나키스트로서 여러 차례 투옥되면서도 프랑스와 유럽에서 활동했다. 1883년 실업 노동자 시위를 이끌었고, 세바스티앵 포르와 함께 1895년 아나키스트 잡지 《르 리베르테르》를 창간했다. 1905년 마르세유에서 사망했다.

프로스페르올리비에 리사가레

Prosper-Olivier Lissagaray
독립 활동 혁명적 사회주의 프랑스 프랑스 1838–1901 ○ 자연사

파리 코뮌의 마지막 바리케이드에서 싸우고 망명지에서 『1871년 파리 코뮌의 역사』를 쓴 언론인

프랑스 혁명적 사회주의 언론인 프로스페르올리비에 리사가레는 파리 코뮌에 참여하고, 생존자 증언과 문서를 모아 『1871년 파리 코뮌의 역사』를 썼다.

툴루즈의 바스크계 가정에서 태어나 제2제정기 공화파 강연가·언론인으로 활동하다 여러 차례 기소되었다. 1870년 전쟁 중 지방 국민방위정부의 군사 조직에 참여했고, 1871년 코뮌 기간 파리에서 신문 『악시옹』과 『트리뷴 뒤 푀플』을 냈다. 피의 주간에는 벨빌의 마지막 바리케이드까지 싸운 뒤 런던으로 탈출해 마르크스 가족과 가까워졌고 엘리너 마르크스와 약혼했다. 1876년 브뤼셀에서 『1871년 파리 코뮌의 역사』를 펴냈다. 1880년 사면 뒤 돌아와 신문 『라 바타유』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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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1파리 코뮌에 참여하고 『악시옹』과 『트리뷴 뒤 푀플』을 창간·편집했다.
  • 1876코뮌 생존자들의 증언과 당시 문서를 바탕으로 『1871년 파리 코뮌의 역사』를 처음 출간했다.
  • 1881–1889『라 바타유』의 편집장을 맡았다.

외젠 바를랭

Eugène Varlin
아나키스트 프랑스 프랑스 1839–1871 ✕ 총살

인터내셔널 파리 지부를 이끌고 코뮌의 재정을 맡았다가 피의 주간 마지막 날 총살된 제본공

제본공 노동조합을 국제노동자협회와 파리 노동자협회 연맹으로 연결하고, 파리 코뮌의 재정과 노동 관계를 맡아 조직했다. 1871년 5월 28일 베르사유군에 붙잡혀 몽마르트르에서 다른 포로들과 총살되었다.

농가 출신으로 파리에서 제본공이 되어 1864년 제본공 파업을 이끌었고, 상호부조 조합과 협동 식당 「라 마르미트」를 세웠다. 국제노동자협회 파리 지부의 중심인물로 1868년 두 차례 재판을 받았고, 노동조합 연합회를 조직했다. 1871년 국민방위군 중앙위원회에 들어갔고 코뮌 의원으로 재정과 식량 공급을 맡았다. 코뮌 공안위원회 설치에 반대한 소수파에 속했다. 5월 28일 붙잡혀 몽마르트르로 끌려가 군중에게 구타당한 뒤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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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57제본공 상호부조회를 세우는 데 참여했다.
  • 1864파리 제본공들의 첫 파업을 주도적으로 조직했다.
  • 1869파리 노동자협회 연맹 창립을 도왔다.
  • 1871파리 코뮌 의원으로 선출되어 재정 담당관과 노동 관계 책임을 맡았다.

폴 라파르그

Paul Lafargue

『게으를 권리』를 쓴 마르크스의 사위, 프랑스 최초의 사회주의 국회의원

「건강한 육체와 정신으로, 나는 무자비한 노년이 내게서 모든 즐거움을 하나씩 빼앗아 가기 전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 유서, 1911년 11월 25일

쿠바 출생의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쥘 게드와 프랑스 노동자당(POF)을 창당했으며, 경제결정론을 역사적 방법론으로 체계화했다. 말년에는 장 조레스의 개혁주의에 맞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수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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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4–1865파리에서 의학 공부, 프루동주의 무정부주의자로 제1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 가입
  • 1866–1868런던으로 이주, 마르크스 가문과 교류; 제1인터내셔널 총평의회 위원, 스페인 담당 서기
  • 1868카를 마르크스의 둘째 딸 라우라 마르크스와 결혼
  • 1871–1872파리코뮌 탄압 후 스페인 마드리드로 망명, 『라 에만시파시온』으로 마르크스주의 선전, 아나키스트와 투쟁
  • 1880쥘 게드와 프랑스 노동자당(POF) 공동 창당; 『게으를 권리』 초고를 『레갈리테』에 연재
  • 1882–1891파리로 귀환, POF 이론가로 활동; 파업·선거 투쟁 주도하며 수차례 투옥
  • 1891릴 선거구에서 프랑스 최초의 사회주의 하원의원 당선 — 수감 중 선거운동
  • 1890년대–1905조레스의 개혁주의와 논쟁하며 정통 마르크스주의 수호; 『경제결정론』, 『소유의 기원』 등 주요 저작 출간
  • 1908–1911툴루즈 통일대회 참석 후 정계 은퇴; 회고록 『카를 마르크스에 대한 나의 추억』 집필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계·스코틀랜드계 1844–1871 ✕ 처형

파리 코뮌의 전쟁 대표를 지낸 프랑스군 장교

코뮌의 방어를 재편하려 했으나 국민위병 부대들은 자신들의 구역 밖에서 복무하기를 대체로 거부했다.

루이 나타니엘 로셀은 프랑스군 장교로, 1871년 파리 코뮌에 합류한 유일한 고위 장교였다. 전쟁 대표가 된 뒤 방어선과 포병을 재편하려 했지만 국민위병의 중앙 지휘 불신 등으로 계획을 실행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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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4–1871프랑스군에서 복무했다.
  • 1871파리 코뮌에 합류해 전쟁 대표를 맡았고, 9일 뒤 사임했다.
  • 1871코뮌 진압 뒤 체포되어 11월 28일 베르사유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쥘 게드

Jules Guesde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정당을 세운 원로로, 1914년 「신성 연합」 정부에 입각한 사회주의자

1914년 전쟁 발발 뒤 게드는 사회주의자의 반전 노선에서 이탈해 무임소 장관으로 프랑스 정부에 들어갔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에서 그는 사회주의 투쟁 외의 별도 반전 행동을 거부했지만, 전쟁기 정부 참여는 그 선택을 현실 정치로 옮겼다.

파리코뮌을 지지했다가 망명한 언론인으로, 1880년 마르크스와 함께 프랑스 노동자당 강령을 작성하며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의 대표가 되었다. 개혁주의자 조레스와 오랫동안 맞섰고, 1905년 통합 사회당(SFIO) 창당에 참여했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는 계급투쟁이 전쟁을 없앨 것이라며 특별한 반전 행동이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1914년 8월 조국이 위협받는다고 보고 무임소 장관으로 입각해 1916년까지 「신성 연합」 정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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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0카를 마르크스와 프랑스 노동자당 강령을 작성했다. 강령은 그해 11월 당 창립 대회에서 채택되었다.
  • 1907제2인터내셔널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프랑스 소수파를 대표해 사회주의 투쟁 외의 특별한 반전 조치를 거부하는 결의안을 냈다.
  • 1914–1916전쟁 발발 뒤 무임소 장관으로 프랑스 정부에 참여해 1916년까지 재임했다.

라울 리고

Raoul Rigault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846–1871 ✕ 처형

파리 코뮌의 경찰 책임자이자 블랑키주의 혁명가

“코뮌 만세! 암살자들에게 죽음을!”

제2제정기 블랑키주의자로 활동하며 공화주의·무신론 신문에 글을 쓰고 정치 활동으로 여러 차례 투옥됐다. 1870년 9월 공화정 선포 뒤 파리 경찰청에서 정치 업무를 맡았고, 1871년 3월 코뮌 봉기 후 경찰청장이 됐다. 코뮌 평의원과 코뮌 보안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4월 말 검사로 임명돼 인질 정책 집행과 반대파 체포에 관여했다. 피의 주간에 구금 중이던 변호사 귀스타브 쇼데를 처형하게 했고, 1871년 5월 24일 베르사유 정부군에 붙잡혀 재판 없이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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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0년대블랑키주의·공화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신문에 기고했다. 정치 활동으로 여러 차례 투옥됐다.
  • 18709월 공화정 선포 뒤 파리 경찰청에서 정치 담당 관리로 일했다.
  • 18713월 20일 파리 경찰청장에 임명됐고, 26일 코뮌 평의원으로 선출됐다. 공안위원회를 거쳐 4월 말 코뮌 검사로 임명됐다.
  • 1871피의 주간에 귀스타브 쇼데 처형을 명령했다. 5월 24일 베르사유 정부군에 붙잡혀 재판 없이 총살됐다.

로베르 니벨

Robert Nivelle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어머니는 영국인) 1856–1924 ○ 자연사

1917년 니벨 공세가 실패해 프랑스군 항명 사태를 부르고 경질된 총사령관

코레즈의 튈에서 프랑스인 아버지와 영국인 개신교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포병 장교가 되었고, 의화단 진압에도 참전했다. 1916년 5월 베르됭에서 페탱의 뒤를 이어 제2군 사령관이 되어 반격을 이끌었으나, 병사들의 목숨을 낭비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1916년 12월 서부전선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1917년 4월 16일 슈맹 데 담에서 결정적 돌파를 장담하며 니벨 공세를 열었다. 예상한 1만 명과 달리 열흘 만에 13만 4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도 공격을 이어 갔으나 돌파에 실패했다. 프랑스군 절반가량이 항명에 휩싸였고, 5월 15일 페탱에게 자리를 넘겼다. 북아프리카 사령관으로 밀려났고 1924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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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05베르됭 제2군 사령관
  • 1916.12서부전선 프랑스군 총사령관
  • 1917.04니벨 공세
  • 1917.12북아프리카 프랑스군 사령관

장 조레스

Jean Jaurès

노동자 국제 연대와 반전 평화를 위해 싸우다 암살당한 프랑스 사회당 지도자

「공화국의 포도주 통 속에 사회혁명의 포도주를 준비하십시오!」 — 1905년 5월 1일, 마로생의 포도 재배 협동조합을 방문한 자리에서

장 조레스는 프랑스 사회주의 통합의 중심 인물로, 1902년 프랑스 사회당을 이끌고 1905년 쥘 게드의 혁명적 사회당과 통합해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를 출범시켰다. 1904년 창간한 《뤼마니테》를 통해 개혁적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했고, 드레퓌스 사건에서는 반유대주의와 군국주의에 맞서 공화국의 양심을 대변했다. 마르크스주의 계급 분석에 기초한 《프랑스 혁명의 사회주의적 역사》(1900~1903)를 저술해 프랑스 혁명사학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14년 7월, 독일 사민당과의 국제적 총파업으로 세계대전을 막으려 했으나 개전 사흘 전 민족주의자 라울 비용의 총탄에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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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타른주 공화파 의원으로 국민의회 진출
  • 1892–1893카르모 광부 총파업 지지, 독립 사회당 의원으로 재선
  • 1898–1902드레퓌스 사건에서 진보 진영의 양심으로 활동, 《라 프티트 레퓌블리크》 편집
  • 1902프랑스 사회당 창당 및 지도
  • 1904《뤼마니테》 창간
  • 1905SFIO 출범 — 프랑스 사회주의 정당 통합 주도
  • 1900–1903《프랑스 혁명의 사회주의적 역사》 저술
  • 1914반전 총파업 운동 전개 중 암살당함

마르셀 상바

Marcel Sembat

1914년 신성 연합 정부에 공공사업부 장관으로 들어간 프랑스 사회당 의원

센에우아즈의 보니에르쉬르센에서 태어나 법학 박사가 되어 변호사로 일했고, 언론인으로 《라 프티트 레퓌블리크》를 이끌었다. 블랑키주의 경향의 중앙혁명위원회에 들어가 그 후신 정당들을 거쳐 1905년 SFIO에 합류했다. 1893년부터 죽을 때까지 파리 18구의 노동자 지역에서 사회주의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11년 평화주의 소책자 『왕을 세우라, 아니면 평화를 맺으라』를 썼지만, 1914년 8월 비비아니의 신성 연합 정부에 공공사업부 장관으로 들어가 브리앙 내각에서 1916년 12월까지 자리를 지켰다. 1920년 투르 대회에서 제3인터내셔널 가입에 반대표를 던졌다. 1922년 샤모니에서 뇌출혈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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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1897《라 프티트 레퓌블리크》 편집인
  • 1893센 도 하원의원 당선
  • 1905SFIO 합류
  • 1914–1916공공사업부 장관(신성 연합 정부)
  • 1920투르 대회에서 제3인터내셔널 가입 반대

귀스타브 에르베

Gustave Hervé
독립 활동 비볼셰비키 사회주의자 프랑스 프랑스 1871–1944

반군국주의 사회주의자에서 민족주의 권위주의 정치로 이동한 프랑스 언론인이다.

전쟁이 닥치면 총을 들고 형제에게 쏘지 말라. 자본가들의 금고를 지키는 전쟁에도 나가지 말라.

역사 교사 출신으로, 에르베는 1901년 반군국주의 기사로 교직에서 해임된 뒤 사회주의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05년 SFIO 창당에 참여하고 CGT에서도 활동했으며, 《사회전쟁》을 창간해 반군국주의와 전쟁 시 봉기를 주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애국주의와 전쟁 지지로 돌아섰고, 1919년 민족사회당 창당을 추진했다. 전간기에는 의회주의를 비판하고 권위주의적 공화국과 페탱의 집권을 주장했으며, 1930년대에는 독일 나치즘을 한때 지지했지만 반유대인 박해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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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반군국주의 기사로 교직에서 해임되다.
  • 1905SFIO 창당에 참여하고 CGT에서 활동하다.
  • 1907《사회전쟁》을 창간하고 편집하다.
  • 1914전쟁 지지로 전향하다.
  • 1919민족사회당 창당을 추진하다.
  • 1935《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페탱》을 출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