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파리 강화회의에서 헝가리 대표단을 이끌고 국제연맹에서 트리아농 국경 수정을 호소한 귀족 정치인
빈에서 태어난 백작으로, 1877년 의회에 들어가 반세기 동안 활동한 웅변가였다. 1906~1910년 교육장관으로 비헝가리계 학교에 헝가리어 교육을 강제한 1907년의 「어포니법」을 만들었다. 1920년 1월 파리 강화회의에서 헝가리 대표단을 이끌어 1월 16일 연설했으나 조건은 바뀌지 않았고, 3월 섭정 선거에서 호르티에게 졌다. 이후 합스부르크 정통주의 야당 의원이자 국제연맹 대표로 트리아농 국경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1933년 군축회의 참석차 머물던 제네바에서 죽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헝가리 총리를 지내고 과꽃 혁명 날 병사들에게 살해된 이중군주국 옹호자
1875~1890년 총리를 지낸 티서 칼만의 아들로, 칼뱅파 하급 귀족 가문에서 자라 부다페스트와 하이델베르크, 베를린에서 공부했다. 1886년 자유당 의원으로 정계에 들어섰고, 1903~1905년과 1913~1917년 두 차례 헝가리 총리를 지냈으며 1912~1913년에는 하원의장이었다. 오스트리아와의 이중군주국 체제를 누구보다 열렬히 지지했고, 보통선거권과 대토지 분할에 반대했다. 1914년 7월 세르비아와의 전쟁에 처음에는 홀로 반대했으나 결국 지지로 돌아섰다. 개혁을 내건 카를 왕의 요구로 1917년 5월 사임했다. 1918년 10월 31일 과꽃 혁명 중 부다페스트의 집에 들이닥친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교사 출신으로 1903년부터 『네프서버』에 글을 쓰며 교사 조직 운동을 이끌었고, 1906년 헝가리 교사자유연합의 회장이 되었다. 카로이 미하이 연립정부에서 교육 담당 차관을 지냈으나, 평의회 공화국 때는 원칙적 이견 때문에 역할을 맡지 않고 평의회 전국대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비판했다. 1919년 9월 『네프서버』의 책임 편집인이 되어 백색테러를 폭로하는 기사를 썼다. 1920년 2월 17일 오스텐부르크 부대의 장교들에게 동료 버초 벨러와 함께 끌려가 살해되었고 시신은 도나우강에 버려졌다. 1921년 호르티의 사면으로 가해자들은 끝내 처벌받지 않았다.
1920년 섭정이 된 호르티는 반유대주의 법률을 시행한 헝가리를 나치 독일과 동맹시켜 소련 침공에 가담시켰다. 1944년 독일 점령 뒤 유대인 43만 7천 명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고, 10월 휴전 시도 뒤 권좌에서 쫓겨났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장교로 1918년 해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1919년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지자 반혁명 국민군을 이끌고 부다페스트에 들어갔고, 1920년 3월 의회가 그를 섭정으로 선출했다. 민족 보수주의와 반유대주의를 내건 통치 아래 공산당과 화살십자당을 금지하고 트리아농 조약의 영토 회복을 추구했다. 나치 독일과 손잡고 1941년 6월 소련 침공에 가담했으며, 1944년 3월 독일의 점령 뒤 43만 7천 명의 유대인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1944년 10월 소련과의 휴전을 발표했다가 독일군에게 퇴위를 강요당해 권력이 화살십자당으로 넘어갔다. 전후 포르투갈로 망명해 1957년 에스토릴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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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의회가 호르티를 헝가리 왕국의 섭정으로 선출했다.
1940헝가리가 추축 동맹에 가입했다. 호르티 정권은 반유대주의 법률과 강제노동 제도를 운영했다.
1941헝가리가 추축국의 소련 침공에 가담했고, 정부는 유대인 2만 명 이상을 점령지 갈리치아로 강제 이송했다.
1944독일 점령 뒤 헝가리 당국은 5월부터 7월까지 유대인 약 43만 7천 명을 이송했다. 호르티는 7월 이송 중단을 명령하고 10월 소련과 휴전을 선언했으나 독일에 구금되고 퇴위를 강요당했다.
코마롬 주의 개혁교회 집안에서 태어난 법률가로, 1918년까지 법무부 국제국장을 지냈고 사회과학지 『후서디크 사저드』의 창간 회원이었다. 과꽃 혁명 뒤 1918년 11월부터 카로이 정부의 법무장관을 지냈고, 1919년 1월 총리가 되었다. 3월 20일 프랑스의 페르낭 빅스 중령이 협상국 각서를 건네자 영토 보전을 해치는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내각과 함께 사임했고, 이로써 평의회 공화국 수립의 길이 열렸다. 그 뒤 정계에서 물러나 1920년부터 변호사로 일하며 국제법·형법·민법에 관한 연구를 냈다. 1944년 부다페스트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니르바크터의 오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고, 카로이 미하이의 사촌이다. 상원 의원이 되었고 1906~1910년 아라드 주지사를 지냈다. 1919년 5월 평의회 공화국에 맞서 아라드에서 반혁명 정부를 세웠으나 루마니아군에 억류되었고, 풀려난 뒤 5월 30일 프랑스군이 점령한 세게드에서 정부를 다시 꾸렸다. 이때 호르티 미클로시에게 국방장관으로서 국민군을 세워 달라고 청했고, 두 사람은 평생의 벗이 되었다. 1930~1931년 베틀렌 정부의 외무장관을 거쳐 1931년 8월 총리가 되었고, 비어토르바지 고가교 폭파 뒤 계엄을 선포해 공산주의자를 가두었다. 1932년 9월 사임했고, 1939년 제2차 유대인법에 항의해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다. 1947년 부다페스트에서 죽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마지막 원수로, 1919년 8월 잠시 헝가리 섭정을 자처한 합스부르크 대공
헝가리의 얼추트에서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헝가리(팔라틴) 분가에서 태어났다. 1890년 군에 들어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군단과 군, 집단군을 지휘했고, 1918년 10월 24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마지막 원수가 되었다. 10월 27일 카를 황제가 그를 헝가리의 전권 대리인(호모 레기우스)으로 삼았으나 과꽃 혁명으로 계획이 무산되었다.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진 뒤 1919년 8월 카를을 대신하는 섭정으로서 국가원수가 되어 프리드리히 이슈트반을 총리로 임명했지만, 협상국이 합스부르크가의 국가원수를 인정하지 않아 8월 23일 물러났다. 호르티 시대에는 1936~1944년 헝가리 과학아카데미 원장을 지냈다. 1944년 헝가리를 떠났고 1962년 서독의 라인에서 죽었다.
죄르 주 러버즈드의 정육점 집안에서 태어난 식자공으로, 인쇄노동자 조합과 소비협동조합을 이끌고 1909년 사회민주당 지도부에 들어갔다. 1919년 베린케이 정부의 노동·복지장관을 지냈고, 공산당과의 합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선포에 반대해 당직에서 물러났다. 1919년 8월 1일 평의회 정부가 사퇴하자 총리가 되어 평의회 공화국을 폐지하고 그 법령을 철회했지만, 8월 6일 루마니아군의 지원을 받은 프리드리히 이슈트반에게 쫓겨났다. 그 뒤 사회민주당 재건에 참여했고 1922~1931년 국회의원을 지냈다.
1921~1931년 총리로서 제한 선거와 국제연맹 차관으로 호르티 체제를 안정시킨 트란실바니아 귀족
트란실바니아의 오랜 귀족 가문 출신으로 1901년 자유주의자로 의회에 들어갔다. 1919년 세게드의 반혁명 세력에 합류했고, 1921년 4월 카를 왕의 첫 복귀 시도 뒤 총리가 되었다. 통일당을 세우고 1922년 선거법으로 농촌에 공개투표를 되살려 집권당의 승리를 굳혔으며, 사회민주당과 협정을 맺고 국제연맹 가입과 차관으로 경제를 안정시켰다. 1931년 대공황 속에 물러났고, 1941년 소련과의 전쟁에 반대했다. 1945년 소련군에 체포되어 1946년 모스크바의 감옥에서 죽었다.
1919~1921년 헝가리 백색테러에서 가장 잔혹한 장교 부대를 이끈 반혁명 준군사 지휘관
노그라드주 롬하니의 오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직업 장교로, 1919년 세게드에서 호르티의 경호대를 맡고 첫 장교 부대를 만들었다. 그의 부대는 공산당원·사회민주당원·농민·유대인을 고문하고 살해해 헝가리 백색테러에서 가장 잔혹한 부대로 꼽힌다. 1921년 갈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아 지휘권을 잃었고 카를 왕의 두 번째 복귀 시도에 가담했으며, 부대는 1922년 1월 해산되었다. 1930년대에 파시스트 대중운동을 꾸미다 실패했고, 1944년 10월 다시 유대인을 사냥하는 부대를 꾸렸다. 1945년 소련군에 붙잡혀 수용소에서 죽었다.
겔세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변호사로, 철도노동자 연맹의 법률고문으로서 1904년 전국 철도 파업 지도자들을 변호했다. 1908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고 점차 좌경화해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1919년 3월 감옥에서 쿤 벨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도입에 합의했고, 평의회 공화국에서 내무·상업 인민위원을 지낸 뒤 붉은군대 제3군단장으로 북부 원정을 지휘했으며 7월에는 총사령관이 되었다. 붕괴 뒤 오스트리아로 망명해 망명 공산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1928년 칸에서 죽었고 유골은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부유한 가톨릭 대귀족 가문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 중 즉각 강화를 요구한 의회 반전파를 이끌었다. 1918년 10월 과꽃 혁명으로 총리가 되었고, 11월 16일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자 임시 국가원수를 겸했으며 1919년 1월 대통령으로 인정되었다. 토지개혁의 본보기로 자기 가문의 영지를 소작인들에게 내주었다. 1919년 3월 빅스 각서로 정부가 무너진 뒤 평의회 공화국이 선포되었고, 7월 망명했다. 1946년 귀국해 1947~1949년 주프랑스 대사를 지냈으나 러이크 재판에 항의해 사임했고, 1955년 프랑스 방스에서 죽었다.
너지카로이의 유대계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고, 1881년 가족이 성을 야시로 바꾸고 개혁교회로 개종했다. 1900년 사회과학지 『후서디크 사저드』(20세기)를 함께 창간해 20년 동안 이끈 편집자가 되었고, 보통·비밀 선거권과 토지개혁을 주장했다. 1914년 6월 전국 시민급진당을 창당했다. 1918년 10월 과꽃 혁명 뒤 카로이 정부의 민족 담당 장관으로서 소수민족에게 최대한의 자치를 제시해 헝가리 국경 안에 붙잡아 두려 했으나 실패했고, 12월 사임했다. 평의회 공화국이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부정한다며 1919년 5월 1일 망명했다. 1925년 미국 오벌린 칼리지의 역사학 교수가 되어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해체』(1929)를 썼고, 1957년 오벌린에서 죽었다.
서헝가리에서 반혁명 부대를 이끌고 1921년 카를 왕의 두 차례 복귀 시도에 가담한 왕정주의 장군
쇼프론에서 태어나 빈의 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나온 직업 장교로, 작곡가 레하르 페렌츠의 동생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공으로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 기사십자장과 남작 작위를 받았다. 평의회 공화국 시기 그라츠에서 약 2,000명의 부대를 모았고, 1919년 8월 서헝가리 군 사령관이 되어 공산당원과 사회민주당원에 대한 보복을 벌였다. 왕정주의자로서 1921년 3월 카를 왕 곁에 섰고, 10월 두 번째 시도에서는 국방장관으로 지명되었으나 실패한 뒤 체코슬로바키아를 거쳐 독일로 도피했다. 이후 베를린과 빈에서 살며 형의 유산을 관리하다 1962년 빈에서 죽었다.
우이페슈트의 독일계 개신교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896년 루도비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빈 군사대학을 마쳤으며, 1913년 헝가리군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빈 군사대학 교수가 되었다. 1919년 1월 사회민주당에 입당했고 국방차관으로 군 조직을 맡았다. 평의회 공화국 시기인 4월 21일 붉은군대 참모장이 되어 미슈콜츠 부근에서 승리하고 북부 원정을 이끌었으나, 7월 3일 클레망소 각서 수락과 철수 명령에 항의해 사임했다. 붕괴 뒤 체포되어 1920년 반역죄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고, 1925년부터 불법 공산당원이었다. 1927년 죽었고 1945년 사후 상급대장으로 추서되었다.
「붉은 지도」를 만든 지리학자로 두 차례 총리를 지내고 1941년 독일군 통과에 항의하듯 자살한 정치인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트란실바니아 귀족 가문 출신의 지리학자로, 대학 교수이자 학술원 회원, 헝가리 스카우트 연맹 수장이었다. 1918~1919년 1910년 인구조사에 바탕한 민족 분포도 「붉은 지도」를 만들었다. 1920년 외무장관으로 트리아농 조약 조인을 지켜보았고, 7월 총리가 되어 누메루스 클라우수스법 시기의 정부를 이끌다 1921년 4월 물러났다. 1939년 다시 총리가 되어 제2차 유대인법의 전문을 쓰고 제3차 유대인법을 준비했다. 1941년 4월 3일 독일군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통과가 확실해지자 자살했다.
키슈쿤할러스의 개신교 집안에서 자라 벽돌공으로 일하며 노동운동에 들어섰고, 1901년 사회민주당에 입당해 건설노동자 조합과 노동자보험기금을 이끌었다. 1919년 3월 21일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합당을 지지했고, 혁명통치평의회 의장으로서 평의회 공화국의 법적 국가원수 겸 총리가 되었으나 실권은 쿤 벨러에게 있었다. 붕괴 뒤 페이들 정부의 교육장관을 지냈고, 루마니아군에 붙잡혔다가 클루지에서 탈출해 브라티슬라바, 빈,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전후 귀국이 허락되지 않은 채 1947년 파리에서 죽었다.
부다페스트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기계공으로, 금속노동자 조합 서기를 거쳐 사회민주당 지도부에 들어갔다. 1919년 1월 베린케이 정부의 국방장관이 되었고, 공산당과의 합당 협상에 참여했다. 평의회 공화국에서 국방 인민위원과 붉은군대 총사령관을 지냈고, 7월 빈 주재 공사로 가서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위임으로 협상국 사절단과 평의회 정부의 퇴진을 합의했다. 망명 뒤 빈, 체코슬로바키아, 스웨덴에서 살았고, 1946~1948년 스웨덴 주재 헝가리 공사를 지내다 사회민주당이 공산당에 통합되자 사임했다. 1949년 스톡홀름에서 죽었다.
1920년 종교·교육장관으로서 누메루스 클라우수스 법안을 준비해 국민의회에 제출한 기독교사회주의 정치인
메죄페트리에서 태어나 서트마르 신학교를 4년 다니다 나와 기자가 되었고, 기독교사회주의 신문 『이거즈 소』와 일간지 『우이 러프』를 편집했으며 1908~1918년 가톨릭 인민연맹 사무총장을 지냈다.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진 뒤 프리드리히 정부의 선전장관을 거쳐 1919년 11월부터 1920년 12월까지 종교·교육장관을 지냈다. 누메루스 클라우수스 법안을 준비해 국민의회에 제출했으며, 이 법은 20세기 유럽 최초의 반유대법으로 흔히 일컬어진다. 1920년 기독교민족연합당 대표가 되었으나 곧 의석을 잃었고, 1945년 체포될 무렵에는 직물상이었다.
베틀렌의 측근으로 두 차례 내무장관을 지내며 좌우 급진 운동을 경찰력으로 억누른 보수파 정치인
페치의 가톨릭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난 변호사로, 1921년부터 버러녀주, 1925년부터 쇼모지주의 주지사를 지냈다. 베틀렌의 가까운 친구이자 동맹으로 1931~1935년과 1938~1944년 내무장관을 맡아 좌우 양쪽의 급진 운동에 대한 경찰 탄압을 지휘했고, 1939년 헝가리주의 운동을 금지했다. 1941년 소련에 대한 선전포고에 홀로 반대했고, 텔레키 자살 뒤와 바르도시 사임 뒤 잠시 총리 직무를 대행했다. 1944년 독일 점령 때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마우트하우젠 수용소로 끌려갔으며, 1948년 빈에서 폐암으로 죽었다.
바나트의 레죄하저(오늘날 세르비아의 크니차닌)에서 슈바벤 독일계 가정에 태어나 1897년 빈에서 사관생도가 되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을 치렀다. 1919년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적군의 제1군단을 지휘하다가 6월 호르티의 국민군으로 넘어갔다. 1936년 정년 퇴역했으나 1938년 복귀해 참모총장이 되었고, 국방장관 버르터 카로이와 함께 독일과의 동맹을 가장 앞장서 주장했다. 1939년 3월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 침공과 병합을 지휘했고, 1941년 6월 커셔 폭격 뒤 곧바로 소련을 범인으로 지목하며 즉시 선전포고를 건의했다. 1941년 9월 참모총장에서 물러났고, 1945년 2월 소련군에 체포되어 소련으로 끌려가 1952년 그곳에서 숨졌다.
1921년 베틀렌–페이에르 협정으로 사회민주당의 합법 활동을 얻어 낸 헝가리 사회민주주의·노동조합 지도자
베스프렘주 바로실뢰드에서 태어난 기계공 출신으로 금속·광산 노동조합을 이끌었다. 1919년 평의회 공화국에서 광업 부문을 맡았고, 붕괴 뒤 페이들 정부의 내무장관과 후사르 정부의 노동·복지장관을 지냈다. 테러로 사회민주당이 선거를 거부하자 1920년 1월 사임하고 오스트리아로 피신했다. 1921년 귀국해 베틀렌 정부와 협정을 맺었고 1922~1944년 의원, 1927년부터 노동조합 평의회 서기장을 지냈다. 1944년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 갇혔다. 전후 공산당과의 합당에 반대해 1947년 제명된 뒤 미국으로 망명했고 1956년 뉴욕에서 죽었다.
베를린 주재 대사로 독일과의 동맹을 밀어붙이고 점령 뒤 총리로서 유대인 이송을 앞당긴 군인 외교관
베르셰츠(브르샤츠)의 세르비아계 가정에서 디미트리예 스토야코비치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참모본부의 정보장교로 일했다. 전쟁 뒤 호르티의 반혁명 군대에서 방첩을 맡았고, 1927~1933년 베를린 주재 무관을 지낸 뒤 1935년부터 1944년까지 베를린 주재 대사로 있으며 독일과의 동맹을 밀어붙였다. 1944년 3월 독일 점령 뒤 총리 겸 외무장관이 되어 화살십자당을 합법화하고 노동조합을 해산하고 정적을 투옥했으며, 유대인 강제 이송의 속도를 크게 높였다. 8월 호르티의 압력으로 물러났고, 전후 미군에 붙잡혀 헝가리로 넘겨진 뒤 인민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46년 총살되었다.
하우칭거라는 성으로 태어나 루도비카 사관학교와 빈 군사대학을 나왔고, 제1차 세계대전 때 참모 장교로 복무했다. 1924년 비테즈 기사단에 들어가며 어머니의 성 야니를 택했고, 1931~1936년 루도비카 사관학교를 이끌었다. 1940년 3월 제2군 사령관이 되었고, 1942년 군을 이끌고 돈강으로 갔다. 1943년 1월 소련 공세 때 후퇴 금지 명령을 고수하다 군이 무너지자 병사들을 비겁하다고 비난하는 군령을 내렸다. 전후 스스로 귀국해 1947년 인민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되었고, 1993년 대법원에서 무죄로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