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손초강의 정면 공격을 되풀이하고 가혹한 군기로 다스리다 카포레토 패전 뒤 해임된 참모총장
피에몬테에서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포병 장교가 되었고, 엄격한 군기와 공세 교리로 이름이 났다. 1914~1917년 이탈리아군 참모총장으로 이손초강을 따라 공세를 거듭했다. 고리치아 점령 같은 성과도 있었으나 「소모전만이 전쟁을 끝낸다」며 큰 희생을 감수했다. 장교 217명을 해임하고 후퇴한 부대의 장교를 즉결 처형하게 했으며, 그의 휘하에서 약 750명이 처형되어 1차 세계대전 군대 가운데 가장 많았다. 1917년 10월 카포레토에서 독일-오스트리아군에 대패해 27만 5천 명이 포로가 되었고, 11월 7일 해임되었다. 1924년 무솔리니 정권 아래 원수가 되었고 1928년 죽었다.
팔레르모에서 태어나 이름난 법학 교수가 되었고, 1897년부터 하원의원으로 활동한 자유주의자였다. 1917년 10월 카포레토 패전으로 정부가 무너지자 총리가 되어 카도르나를 해임하고 군을 재정비했으며, 1918년 비토리오 베네토 승리로 「승리의 총리」라 불렸다. 강화회의에서 런던 조약이 약속한 달마티아와 피우메를 요구했으나 얻지 못해 1919년 4월 회의를 떠났고 6월 사임했다. 「불구의 승리」는 무솔리니가 일어선 배경이 되었다. 처음엔 무솔리니를 지지했으나 1924년 마테오티 살해 뒤 결별했다. 1952년 로마에서 죽었다.
1943년 7월 25일, 그는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체포하게 한 뒤 바돌리오를 새 정부 수반으로 임명했다.
이탈리아 국왕으로서 자유주의 헌정의 쇠퇴, 파시스트 국가의 성립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그는 무솔리니의 권력 장악과 식민 전쟁, 인종법, 참전을 승인해 왕정의 책임을 키웠지만, 1943년 7월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피에트로 바돌리오를 임명해 체제 전환의 헌정 통로를 열었다. 그러나 9월 휴전 뒤 로마를 떠난 그의 선택은 군과 국가를 혼란에 빠뜨렸고, 전후 왕정의 정당성을 회복하지 못한 채 1946년 퇴위했다.
1943년 9월 8일 휴전이 발표됐을 때, 바돌리오 정부는 로마를 떠나 연합군의 보호를 찾아 남쪽으로 향했다.
피에트로 바돌리오는 이탈리아 왕국의 군인이자 식민지 전쟁의 지휘관으로, 리비아와 에티오피아에서 제국의 폭력을 집행했다. 그는 무솔리니 체제의 핵심 군사 관료였지만, 1940년 그리스 전역의 실패 뒤 사임하고 왕실의 정권 교체에 참여했다. 1943년 무솔리니 축출 뒤 총리가 되어 연합국과 휴전협정을 체결했으나, 발표와 군 지휘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독일군의 무장해제와 이탈리아 국가의 붕괴를 막지 못했다.
이탈리아 사회당을 코민테른에 가입시켰으나 개량주의파 축출을 거부해 1921년 리보르노 분열을 낳은 지도자
전쟁 중 사회당을 좌파로 이끌고 코민테른 가입을 주도했으나, 1921년 개량주의자와의 단절을 거부해 공산당 분립을 낳았다.
스포토르노 출신으로 이탈리아 사회당의 중심 지도자가 되었고, 1914년 참전론으로 쫓겨난 무솔리니의 뒤를 이어 『아반티!』 편집장을 맡았다. 전쟁 중 당을 왼쪽으로 이끌며 치머발트 운동에 참여했고, 10월 혁명 뒤 사회당을 코민테른에 가입시켰다. 1920년 제2차 대회에서 의장단과 집행위원회에 들었지만, 1921년 개량주의자와 절연하라는 원칙을 거부하고 공산당이 떨어져 나간 뒤에도 사회당을 이끌었다. 1924년 사회당 좌파를 이끌고 공산당에 합류했고, 1926년 지하 당 회의로 가던 길에 심부전으로 숨졌다.
상세 이력 보기
1914베니토 무솔리니의 뒤를 이어 사회당 기관지 『아반티!』 편집장이 되었다.
1920코민테른 제2차 대회 의장단에서 활동하고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1개량주의자와의 단절을 거부하고 이탈리아 사회당 지도자로 남아 공산당 분립을 맞았다.
1943년 6월 그는 국왕에게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바돌리오를 임명하며 독일과의 동맹을 끊으라고 비밀리에 요구했다.
이반오에 보노미는 사회주의 개혁파에서 출발해 이탈리아 자유주의 의회정치의 핵심 인물로 이동한 정치가였다. 파시즘의 부상기에 충분히 단호하게 저항하지 못했고 무솔리니 정부를 지지한 전력이 있었지만, 1942년부터 반파시스트 세력을 다시 연결하며 정권 교체를 모색했다. 그는 1943년 국왕에게 무솔리니 해임과 피에트로 바돌리오 기용을 비밀리에 요구했고, 9월에는 6개 정당으로 구성된 민족해방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이후 왕정과 저항운동, 연합국 사이의 타협을 이끌며 전후 이탈리아의 제도적 이행을 관리했다.
비토리오 암브로시오는 이탈리아 왕국의 기병 장교 출신 장군으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이탈리아의 유고슬라비아 침공에서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1943년 이탈리아군 최고사령관이 된 그는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의 패배 뒤 독일과의 동맹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왕과 군부를 중심으로 무솔리니의 실각과 연합국과의 휴전을 추진했다. 그의 선택은 파시즘을 넘어선 민주적 단절이라기보다 왕정과 군 지휘부가 국가의 전쟁 이탈을 관리하려 한 것이었으며, 9월 휴전은 독일군의 이탈리아 점령과 이탈리아군의 혼란을 막지 못했다.
이탈리아 사회주의 언론인에서 출발한 무솔리니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계기로 민족주의 혁명으로 전향해 파시즘을 창시했다. 그는 1922년 로마 진군 뒤 총리가 되었고, 폭력과 제도 개편으로 자유주의 체제를 일당 독재로 바꾸었다. 식민 전쟁과 나치 독일과의 동맹,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은 이탈리아를 심각한 군사적·정치적 위기로 몰아넣었다. 1943년 실각한 뒤 독일 점령지의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을 이끌었으나, 1945년 파르티잔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943년 9월 3일 카시빌레의 올리브나무 아래에서 그는 이탈리아를 대표해 휴전 문서에 서명했다.
주세페 카스텔라노는 제1차 세계대전부터 이탈리아 왕국군의 참모 장교로 활동한 장군이었다. 1943년 무솔리니 축출 과정에 관여한 그는 바돌리오 정부의 특사로 연합군과 휴전 조건을 협상했다. 카시빌레 휴전은 이탈리아의 대독 전쟁을 끝냈지만, 비밀 협상과 지휘부의 혼선 속에 체결되어 군대에 명확한 명령을 남기지 못했다. 전후 그는 시칠리아 군사 지휘관을 거쳐 회고록으로 자신의 역할을 설명했다.
1943년 7월 25일 새벽, 그란디 결의안은 19 대 8로 통과되어 무솔리니의 권력 기반을 무너뜨렸다.
디노 그란디는 이탈리아 파시스트 운동의 지도자이자 외교관으로, 정권의 핵심에서 권력을 행사했다. 그는 외무장관과 런던 대사를 지내며 전쟁 확대에 신중한 외교 노선을 추구했지만 파시스트 국가의 제도와 정책을 집행한 책임도 지녔다. 1943년 7월 시칠리아 침공 뒤 파시스트 대평의회에서 국왕에게 헌정상 군 통수권을 돌려주자는 결의안을 작성하고 표결을 조직해 베니토 무솔리니의 축출을 이끌었다. 이후 망명했고, 이탈리아 사회공화국 법정에서 궐석 사형을 선고받았다.
스페인 내전과 레지스탕스의 지휘관 '갈로', 코민포름의 자아비판을 겪고 톨리아티의 뒤를 이은 PCI 사무총장
1964년 톨리아티의 뒤를 이어 PCI 사무총장이 되었을 때, 론고는 '나는 두목이 아니라 서기다'라고 선언했다.
1921년 리보르노 대회에서 이탈리아 공산당(PCI) 창당에 참여했고, 스페인 내전에서는 '갈로'라는 이름으로 국제여단 총감독으로 싸웠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가리발디 여단을 지휘하며 이탈리아 레지스탕스를 이끌었고, 전후 PCI 부서기로 톨리아티를 보좌했다. 1947년 코민포름 창립 회의(슈클라르스카 포렝바)에 에우제니오 레알레와 함께 PCI 대표로 참석해 프랑스 공산당과 함께 격렬한 자아비판을 받았으며, 이후 PCI의 노선을 강경 투쟁으로 전환시켰다. 1964년 톨리아티 사후 사무총장이 되어 '이탈리아식 사회주의' 노선과 모스크바에 대한 자율성을 추구했고,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지지하며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정식 반대했다.
1943년 7월 25일, 치아노는 장인 무솔리니의 축출을 뜻하는 그란디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갈레아초 치아노는 무솔리니의 사위이자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핵심 외교관으로, 정권의 팽창과 독일 의존을 추진하면서도 전쟁의 파국이 다가오자 그 노선에서 이탈했다. 그는 에티오피아 전쟁과 알바니아 침공, 그리스 공격을 지지했으며 외무장관 재임 중 외교 기록과 일기를 남겼다. 1943년 7월 파시스트 대평의회에서 디노 그란디 결의안에 찬성해 무솔리니 축출에 가담했지만, 자신의 특권적 지위가 보존될 것이라는 계산은 빗나갔다. 독일로 달아났다가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에 넘겨진 그는 베로나 재판 뒤 처형되었고, 그의 일기는 파시즘 내부의 책임과 붕괴를 보여 주는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
코민포름 창립 회의의 이탈리아 대표로, 스탈린의 전화선을 목격한 공산주의자에서 반공 비판자로 전향한 인물
“스탈린은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으면서 회의의 절대적 지배자였다. 토론 중에 우리가 이 사실을 의식하게 된 것은 슈클라르스카 포렝바 성과 크렘린 사이에 직통 전화선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1966년 회고록)
이탈리아의 공산주의 정치인이자 의사로, 전후 연립정부에서 외무차관을 지냈고 폴란드 대사를 역임했다. 1947년 코민포름을 창립한 슈클라르스카 포렝바 회의에 이탈리아 대표로 참석했으며, 1966년 회고록은 크렘린으로 직통된 스탈린의 전화선과 프랑스·이탈리아 공산당에 대한 즈다노프의 사전 계획된 공격을 포함한 회의의 가장 상세한 목격 증언이 되었다.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계기로 이탈리아 공산당과 결별했고, 이후 반공 비판자로 활동하며 『사회주의 통신』을 창간했다.
클라우디오 파보네는 이탈리아의 역사가이자 기록관리자로, 파시즘과 저항, 국가기구의 연속성을 연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레지스탕스에 참여한 경험은 그의 역사 인식과 연구 주제에 깊이 반영되었다. 대표작 『내전』은 1943~1945년의 투쟁을 애국전쟁, 이탈리아인 사이의 내전, 계급전쟁이 겹친 과정으로 분석해 저항의 정치적 선택과 도덕적 긴장을 학술 논쟁의 중심에 놓았다. 그는 국가중앙기록보존소의 정비와 이탈리아 국가기록보존소 안내서 편찬에도 기여했다.
『라 레푸블리카』와의 인터뷰(1981년 7월 28일)에서 이탈리아 정당 체제의 구조적 부패를 '도덕적 문제(questione morale)'로 명명하며: "오늘날 정당들은 무엇보다 권력과 후견주의의 기계다. 사회와 사람들의 삶에 대한 지식은 빈약하거나 왜곡되어 있고, 사상·이상·정책은 거의 없거나 모호하며, 감정과 시민적 열정은 제로다." 이 표현은 이후 수십 년간 이탈리아 정치 담론의 기준점이 되었다.
이탈리아 공산당(PCI) 서기장(1972–1984). 소련 지도를 거부하는 민주적 사회주의 노선인 유로코뮤니즘을 주창했으며, 1976년 총선에서 PCI 사상 최고인 34.4% 득표율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