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에서 전후 외교로 나아간 현실주의자
1946년 모스크바 회담에서 몰로토프의 공세가 이어지자 그는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니스트 베빈은 가난한 노동자에서 영국 최대 노동조합의 지도자로 성장한 노동운동가이자 노동당 정치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노동력 동원을 조직한 경험은 전후 영국의 외교와 유럽 재건을 노동과 국가 역량의 문제로 보게 했다. 외무장관으로서 그는 조르주 비도와 함께 마셜의 하버드 연설에 대한 유럽의 대응을 조직하고, 영국의 안보와 서유럽 협력을 미국의 원조 및 대서양 동맹과 결합했다. 동시에 그의 강한 반공주의와 제국적 이해관계는 전후 질서의 국제주의가 해방과 지배를 함께 품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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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브리스틀 항만·부두·강변 노동자노조 브리스틀 지부 서기
- 1914항만·부두·강변 노동자노조 전국 조직가
- 1922–1940운수·일반노동자노조 초대 전국서기장
- 1940–1945전시 연립정부 노동·국민역무부 장관
- 1945–1951애틀리 내각 외무장관
- 1947조르주 비도와 유럽경제협력위원회 조직, 마셜 원조 대응 주도
- 1949북대서양조약기구 창설에 기여
포츠담 회담 도중에 처칠을 대체해 등장한, 말수 적은 전후 개혁의 설계자
1945년 선거 승리 후 버킹엄궁에서 조지 6세를 만난 애틀리는 침묵을 깨며 "제가 선거에서 이겼습니다"라고 말했고, 왕은 "압니다. 6시 뉴스에서 들었습니다"라고 답했다.
클레멘트 애틀리는 1945년 포츠담 회담 도중 노동당의 압승으로 윈스턴 처칠을 대신해 영국 총리가 된 인물이다. 전시 연립내각에서 부총리로 처칠을 보좌했으나, 유권자들은 전쟁 영웅 대신 복지국가를 약속한 무채색의 그를 선택했다. 그의 정부는 국민보건서비스(NHS)를 창설하고 주요 산업을 국유화했으며 인도와 파키스탄의 독립을 단행해 대영제국의 해체를 시작했다. 대외적으로는 마셜 플랜과 NATO 창설을 주도하며 미국 편에 서서 냉전의 초기 윤곽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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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1955노동당 당수
- 1940–1942국새상서 (전시 연립내각)
- 1942–1945부총리 (전시 연립내각)
- 1945–1951영국 총리
- 1951–1955야당 당수
샌프란시스코에서 강대국 거부권에 맞서 중소국 연대를 이끈 오스트레일리아 외무장관
스테티니어스·그로미코와 함께 긴급소위원회를 구성한 에바트는 '화해적 태도'로 초안을 제시했고, 6월 20일 총회 토론권 교착이 해소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정치인이자 법률가로, 36세에 고등법원 최연소 판사가 되었고 이후 커틴·치플리 정부에서 검찰총장 겸 외무장관을 지냈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5대 강국의 안보리 거부권에 맞서 중소국 대표로 38건의 수정안을 제출했고, 스테티니어스·그로미코와 함께 긴급소위원회를 구성해 총회 토론권을 둘러싼 교착을 해소했다. 1948년 유엔 총회 의장으로 세계인권선언 초안을 주도했으며, 이스라엘 건국을 심의한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 의장도 맡았다. 1951년 노동당 대표가 되었으나 반공 이슈를 둘러싼 당내 분열과 세 차례 연속 총선 패배 끝에 1960년 정계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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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5–1930뉴사우스웨일스 주의회 의원
- 1930–1940오스트레일리아 고등법원 판사
- 1941–1949검찰총장 겸 외무장관
- 1948–1949유엔 총회 의장
- 1951–1960노동당 대표·야당 지도자
- 1960–1962뉴사우스웨일스 대법원장
전쟁과 탈식민화의 영국 외교가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네 연합국 외무장관이 본회의 의장을 교대로 맡았고, 이든도 그 의장단에 포함됐다.
앤서니 이든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연맹과 집단안보를 중시한 영국 보수 정치가였다. 그는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부상 속에서 세 차례 외무장관을 지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윈스턴 처칠의 핵심 외교 보좌역으로 소련 및 연합국과의 전후 질서를 협상했다. 1945년 얄타 회담과 샌프란시스코 국제기구회의에서 영국을 대표하며 전후 국제기구 형성에 참여했지만, 총리 재임 중 수에즈 침공을 추진해 영국 제국의 한계와 미국 의존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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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1919영국 육군 장교, 서부전선 복무
- 1923–1957워릭·리밍턴 지역 하원의원
- 1931–1934외무차관
- 1935–1938외무장관
- 1940–1945외무장관, 전쟁내각 각료
- 1945얄타 회담 및 샌프란시스코 회의 영국 대표
- 1951–1955외무장관
- 1955–1957영국 총리, 보수당 당수
핵무기 외교의 실무 설계자
키신저와 함께 소련의 초안을 동맹 의무를 보존하는 반대안으로 돌려세웠다.
토머스 브리멜로는 영국 외교관이자 소련 문제 전문가로, 냉전의 동맹정치와 군비외교 사이에서 활동했다. 그는 1973년 핵전쟁 방지 협정 협상에서 헨리 키신저와 초안을 함께 다듬어, 소련의 무조건적 핵무기 선제사용 포기 구상을 동맹 의무와 제3국을 포함한 보다 제한적인 문안으로 바꾸는 데 기여했다. 이 역할은 영국 외무부 전문성이 미국의 대소 전략에 직접 결합한 사례였지만, 동시에 긴장 완화의 언어가 핵억지와 세력정치를 보존하는 방식으로 작동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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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외무부 입부
- 1966–1969주폴란드 영국 대사
- 1969–1973외무부 차관보급, 상임차관 대리
- 1972키신저와 핵전쟁 방지 협정 반대제안 공동 작성
- 1973–1975외무부 상임차관
- 1976브리멜로 남작 작위 수여
- 1977–1978유럽의회 의원
소련을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고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을 세운 트로츠키주의 이론가
1950년, 한 줌의 지지자와 함께 《소셜리스트 리뷰》를 내면서 클리프 그룹이 내건 구호: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닌, 국제 사회주의를.」 냉전의 두 진영을 모두 거부하겠다는 선언이자, 이후 반세기 동안 이 조류를 규정한 문장이었다.
본명 이가엘 글룩슈타인. 팔레스타인의 폴란드계 유대인 이민 가정에서 태어나 십대에 시온주의 좌파를 떠나 트로츠키주의자가 되었고, 반전 활동으로 영국 위임통치 당국에 1년간 수감된 뒤 1947년 영국으로 건너갔다. 1948년 「스탈린주의 러시아의 성격」에서 소련을 「타락한 노동자국가」가 아니라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며 제4인터내셔널의 정통과 갈라섰고, 이 분석 위에 서방과 소련의 군비 지출이 전후 호황을 떠받쳤다는 「상시 군비경제」론과, 부르주아지도 노동계급도 아닌 지식인·군부가 혁명을 대행한다는 「빗나간 연속혁명」론을 얹었다. 1950년 《소셜리스트 리뷰》 그룹에서 출발한 그의 조직은 국제사회주의자들(IS)을 거쳐 1977년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네 권짜리 『레닌』, 네 권짜리 『트로츠키』를 남겼고, 영국 시민권을 끝내 얻지 못해 평생 무국적자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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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오스만령 팔레스타인 지크론야코브에서 폴란드계 유대인 이민 가정의 이가엘 글룩슈타인으로 출생
- 1931–1933마파이 청년조직을 거쳐 포알레 시온으로, 시온주의 좌파 안에서 정치를 시작
- 1930년대 후반트로츠키주의·반시온주의로 전향, 팔레스타인의 소규모 트로츠키주의 그룹에서 활동
- 1939영국 위임통치 당국에 체포되어 아크레 감옥에서 12개월 복역
- 1945남아프리카 출신 사회주의자 하니 로젠버그와 결혼
- 1947영국으로 이주했으나 체류 허가를 얻지 못해 아일랜드로 밀려나 더블린에서 활동
- 1948「스탈린주의 러시아의 성격」 발표, 소련을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규정
- 1950《소셜리스트 리뷰》 그룹 창립: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닌」
- 1952영국 재입국 허가를 받아 런던에 정착
- 1959『로자 룩셈부르크』 출간, 토니 클리프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
- 1962–1963그룹을 국제사회주의자들(IS)로 개편, 「빗나간 연속혁명」론 정식화
- 1977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창당
- 1975–1993네 권짜리 『레닌』과 네 권짜리 『트로츠키』 집필
- 2000.04.09런던에서 심장 수술 뒤 사망, 무국적자로 생을 마침
당의 침묵과 현장을 맞바꾼 공산주의 저널리스트
노동자평의회 선거에서 “인민민주주의를 위해 우리는 사람을 뽑아 본 경험이 전혀 없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그는 돌아섰다.
피터 프라이어는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저술가이자 기자로, 공산주의 운동 내부의 진실과 국제적 연대를 함께 추구했다. 1956년 헝가리에서 노동자와 학생의 봉기를 취재했지만 Daily Worker에 보낸 기사는 검열되거나 묵살되었고, 그는 『헝가리의 비극』으로 공식 노선에 맞섰다. 이 충돌은 그의 공산당 제명과 영국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에 기여했으며, 이후 그는 흑인 영국사의 중요한 저술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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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청년공산주의자동맹 가입
- 1943–1947Yorkshire Post 기자
- 1945영국 공산당 입당
- 1948–1956Daily Worker 의회·외신 특파원
- 1956헝가리 혁명 취재, 『헝가리의 비극』 집필
- 1957–1959The Newsletter 편집자, Socialist Labour League 창립 참여
- 1984『Staying Power』 출간
- 2006런던에서 사망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주소 대사에서 『아프간츠이』의 저자까지, 소련을 가장 깊이 이해한 영국 외교관
「우리가 여전히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쓰고 민스 파이를 먹고 있을 때, 고르바초프가 텔레비전에 나와 자신이 소련 대통령직을 사임했다고 세계에 알렸다」, 1991년 크리스마스 모스크바에서.
영국 외교관이자 작가로, 페레스트로이카와 소련 붕괴의 결정적 시기인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주소 영국 대사를 지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개인적 신뢰를 쌓으며 1991년 8월 쿠데타와 옐친의 부상, 소련 해체를 현장에서 목격했고, 이후 존 메이저 총리의 외교정책 보좌관과 합동정보위원회 의장을 역임했다. 2011년 출간한 『아프간츠이』(Afgantsy)는 소련군이 전장에서 패배하지 않고 질서 있게 철수했으며,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군사적 실패가 아니라 정치적·정보적 실패였다고 주장해 '소련판 베트남'이라는 서방의 통념을 근본적으로 뒤흔든 대표적 수정주의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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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1952군 정보부 복무, 비엔나 주둔
- 1955영국 외교부 입부
- 1963–1966주소 영국대사관 근무 (모스크바 첫 부임)
- 1975–1978주유럽공동체 영국대표부, 브뤼셀
- 1982–1984주미 영국대사관 무역 공사
- 1984–1988외무부 사무차관보, G7 셰르파팀
- 1988–1992주소련·러시아 영국 대사
- 1992–1993총리 외교정책 보좌관, 합동정보위원회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