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기능·활동
국가·세력
정치적 입장
국적(선택됨)
출신 배경
시대(선택됨)

더글러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80–1964 ○ 자연사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고 합참의 만장일치 반대를 꺾은 유엔군 사령관

「전쟁에서 승리를 대신할 것은 없다.」 1951년 4월 19일 의회 고별연설에서 한 말.

더글러스 맥아더는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고, 일본 점령을 사실상 통치한 미국의 5성 원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합동참모본부의 만장일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을 밀어붙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러나 중공군 개입 이후 만주 폭격과 확전을 주장하며 트루먼 행정부와 충돌했고, 1951년 4월 해임되었다. 그의 해임은 민간 통제와 군부의 관계를 둘러싼 냉전기 가장 첨예한 헌정적 논쟁으로 남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30–1935미국 육군 참모총장
  • 1935–1941필리핀군 원수 겸 군사고문
  • 1941–1945미 극동군 사령관 / 남서태평양방면 연합군 최고사령관
  • 1945–1951연합군 최고사령관, 일본 점령통치
  • 1950–1951유엔군 사령관, 한국전쟁
  • 1952–1964레밍턴 랜드 이사회 의장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80–1966 ○ 자연사

세계 최대 면화상을 일군 자유무역론자, 유럽 붕괴를 경고한 메모로 마셜 플랜을 촉발한 국무차관

1947년 5월 27일 마셜 국무장관에게 보낸 메모에서 클레이턴은 이렇게 썼다: '즉각적이고 대규모인 미국의 원조 없이는 경제·사회·정치적 붕괴가 유럽을 뒤덮을 것입니다.'

클레이턴은 13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속기사로 출발해 앤더슨·클레이턴 사를 세계 최대 면화 무역회사로 키운 사업가였다. 자유무역을 신봉한 민주당원으로서 1944년 국무부 경제담당 차관보, 1946년 경제담당 차관에 임명되었고, 1947년 5월 전후 유럽의 참상을 목격한 후 조지 마셜에게 보낸 「유럽의 위기」 메모에서 '즉각적이고 대규모인 미국의 원조 없이는 경제·사회·정치적 붕괴가 유럽을 뒤덮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메모는 마셜 플랜 발표의 직접적 촉매가 되었고, 찰스 볼런은 연설문 초안을 쓸 때 클레이턴의 문장을 대거 인용했다. 퇴임 후에도 자유무역과 대서양 동맹을 옹호하며 1961년 크리스천 허터와 애틀랜틱 카운슬을 공동 설립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0미시시피주 투펄로 인근 면화 농장에서 출생
  • 1904앤더슨·클레이턴 사 공동 창업,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면화 중개 시작
  • 1916본사를 휴스턴으로 이전, 이후 세계 최대 면화 무역회사로 성장
  • 1918전시산업위원회 면화분배위원으로 제1차 세계대전 정부 봉사
  • 1940–1944재건금융공사·수출입은행·잉여전쟁자산청에서 연이어 근무
  • 1944–1946국무부 경제담당 차관보, 포츠담 회담 경제 고문
  • 1946–1947국무부 경제담당 차관, 「유럽의 위기」 메모로 마셜 플랜 촉발
  • 1961크리스천 허터와 애틀랜틱 카운슬 공동 설립

루스벨트의 '보조 대통령'이자 포츠담 배상안을 설계한 국무장관

번스의 국무장관 취임 선서 직후, 트루먼이 말했다. "지미, 성경에 입 맞춰." 번스가 그러고 나서 성경을 트루먼에게 건네며 말했다. "대통령님도 입 맞추시죠." 트루먼이 그렇게 하자 자리 전체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제임스 F. 번스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의 민주당 정치인으로, 뉴딜 입법을 주도한 상원의원, 전시 동원을 총괄하며 '보조 대통령'으로 불린 루스벨트의 오른팔, 그리고 트루먼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포츠담 회담에서 독일 배상의 틀을 설계한 인물이다. 포츠담에서 번스는 각 점령국이 자국 점령지역에서 배상을 취하되 소련에는 서방 지역 산업설비의 15%를 식량·원자재와 교환하고 10%를 무상 제공하는 절충안을 몰로토프와 협상해 타결시켰다. 루스벨트의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뒤 트루먼과의 관계도 점차 냉각되었으나, 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로 당선되어 인종 분리 교육 체제를 고수하며 '분리하되 평등하게' 노선을 추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1–1925사우스캐롤라이나주 하원의원
  • 1931–1941사우스캐롤라이나주 상원의원
  • 1941–1942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 1942–1943경제안정국 국장
  • 1943–1945전시동원국 국장
  • 1945–1947미국 국무장관
  • 1951–1955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해리 S. 트루먼

Harry S. Truman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884–1972 ○ 자연사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으로 냉전의 미국 틀을 세운 33대 대통령

트루먼의 집무실 책상에는 '책임은 여기서 끝난다(The buck stops here)'라는 문구가 놓여 있었고, 원자폭탄에서 맥아더 해임까지 그는 그대로 살았다.

트루먼은 루스벨트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명령한 미국의 33대 대통령이다. 1947년 3월 '무장 소수파나 외부 압력에 저항하는 자유민을 지원한다'는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했고, 1948년 4월 마셜 플랜에 서명해 서유럽 재건과 소련 봉쇄의 제도적 기반을 구축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 파병을 주도했고 중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해 맥아더를 해임함으로써 민간 통제 원칙을 재확인했다. 퇴임 당시 역대 최저 지지율로 떠났으나 냉전 승리와 함께 '위대에 가까운' 대통령으로 사후 재평가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4미주리주 라마에서 농부의 아들로 출생
  • 1917–1918제1차 세계대전, 프랑스 전선 포병대 대위로 참전
  • 1935–1945미주리주 상원의원, 트루먼 위원회로 전시 계약 부패 조사
  • 1945.01–04부통령, 루스벨트 사망으로 4월 12일 대통령 승계
  • 1945–1953제33대 대통령, 원자폭탄 투하·트루먼 독트린·마셜 플랜·NATO 창설·한국전쟁
  • 1947.03.12트루먼 독트린 선언, 그리스·터키 군사원조 요청
  • 1948.04.03마셜 플랜(경제협력법) 서명
  • 1951.04.11맥아더 극동사령관 해임

존 포스터 덜레스

John Foster Dulles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인 1888–1959 ○ 자연사

동맹망으로 냉전을 밀어붙인 미국 외교가

1954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자유선거 없는 전독일 정부 구상을 거부하고 서방의 선거 절차를 내세웠다.

존 포스터 덜레스는 변호사 출신의 미국 외교가로, 전후 국제질서를 동맹과 군사적 억지의 틀로 재편하려 했다. 그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대소 봉쇄를 넘어 공산주의 세력의 후퇴를 압박하는 노선을 폈고, NATO를 중심으로 서방의 결속을 강화했다. 1954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몰로토프의 집단안보 구상과 전독일 정부 제안에 맞서 자유선거를 거친 통일을 주장했으며, 그해 서독의 NATO 가입을 관철해 유럽 분단의 제도화를 선택했다. 이 노선은 서방 진영의 안정과 미국의 영향력을 넓혔지만, 이란·과테말라 정권 전복 지원과 핵 위협을 포함한 개입주의라는 책임도 남겼다.

상세 이력 보기
  • 1908프린스턴대학교 졸업
  • 1911설리번 앤드 크롬웰 국제변호사
  • 1919파리 강화회의 미국 대표단 법률고문
  • 1945–1950유엔 회의·총회 미국 대표 및 외교 고문
  • 1950–1952트루먼 대통령 대일 강화조약 특별고문
  • 1953–1959미국 국무장관
  • 1954베를린 회의 참가, 서독 NATO 가입 협상 주도
  • 1959국무장관 사임, 5월 24일 사망

에드워드 맬러리 알몬드

Edward Mallory Almond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892–1979 ○ 자연사

공세적 지휘와 인종주의가 얽힌 미군 장성

“중국인 세탁부대 따위가 우리를 막게 두지 마라.”

에드워드 알몬드는 두 차례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친 미국 육군 장성으로, 공격적 지휘관이라는 명성과 인종주의적 편견이 함께 남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흑인 병사들로 구성된 제92보병사단을 지휘했으며, 사단의 전투 성과를 병사들의 인종적 능력 탓으로 돌려 군의 흑인 전투부대 운용에 반대했다. 한국전쟁에서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참모총장으로서 인천상륙 뒤 창설된 X군단을 지휘했고, 인천과 서울 탈환에 기여했다. 그러나 동북부 진격에서 병력을 넓게 분산하고 중국군의 규모를 과소평가해 X군단의 위기를 키웠다.

상세 이력 보기
  • 1915버지니아 군사학교 졸업
  • 1918제4사단 제12기관총대대 지휘, 프랑스 전선 참전
  • 1942–1945제92보병사단 사단장, 이탈리아 전선 지휘
  • 1946–1949도쿄 극동사령부 인사참모, 이어 맥아더의 참모총장
  • 1950–1951X군단 사령관, 인천상륙과 동북부 작전 지휘
  • 1951–1953육군전쟁대학 교장, 1953년 퇴역

앨런 덜레스

Allen Dulles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계 1893–1969 ○ 자연사

비밀전쟁을 제도화한 미국 정보 관료

1945년 북이탈리아 항복 협상은 전쟁을 앞당겼지만, 소련 대표와 이탈리아 파르티잔을 배제한 채 진행됐다.

앨런 덜레스는 미국의 외교관·변호사이자 정보기관 지도자로, 제2차 세계대전의 비밀협상과 냉전의 은밀한 개입을 하나의 경력으로 연결했다. OSS 베른 지국장으로 독일군의 북이탈리아 항복을 협상한 작전 선라이즈를 추진했지만, 그 과정은 소련과의 연합 전선 및 이탈리아 파르티잔의 전후 주권 문제를 낳았다. 뒤이어 CIA를 이끌며 이란과 과테말라의 정권 전복, 쿠바 피그스만 침공 같은 비밀공작을 감독해 미국 정보국가의 범위와 책임을 확대했다. 실패한 쿠바 침공 뒤 사임하면서도, 그의 유산은 정보 수집과 제국적 개입이 결합한 냉전 정치의 전형으로 남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16–1926미 국무부 외교관, 유럽·근동 담당
  • 1927–1944외교·군축 협상 법률고문, 외교협회 간사·회장
  • 1942–1945OSS 베른 지국장, 작전 선라이즈 협상 담당
  • 1945OSS 베를린 지국장
  • 1951–1953CIA 계획 담당 부국장, 중앙정보국 부국장
  • 1953–1961중앙정보국장
  • 1963–1964케네디 암살 진상조사 워런위원회 위원

올리버 P. 스미스

Oliver Prince Smith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계 1893–1977 ○ 자연사

신중함으로 포위된 사단을 구한 해병 지휘관

“후퇴라니, 지옥에나 가라! 우리는 그저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는 중이다.”

올리버 P. 스미스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복무한 미국 해병대 장군으로, 상륙작전 전문성과 신중한 판단으로 알려졌다. 제1해병사단장으로서 1950년 인천 상륙과 서울 진격을 지휘했으며, 이후 장진호에서 중국군에 포위된 병력을 조직적으로 돌파시켰다. 그는 맥아더와 앨먼드의 속도 중심 명령에 맞서 보급선과 철수로를 준비했고, 그 선택은 병력 보존과 작전 지속에 기여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7미 해병대 소위 임관
  • 1934–1936프랑스 육군 고등전쟁학교 수학
  • 1944제5해병연대장, 뉴브리튼 작전 지휘
  • 1944–1945제1해병사단 부사단장, 펠렐리우·오키나와 작전
  • 1950–1951제1해병사단장, 인천·서울·장진호 작전
  • 1953–1955대서양 함대 해병대 사령관
  • 1955대장으로 퇴역

윌리엄 K. 해리슨 주니어

William K. Harrison Jr.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95–1987 ○ 자연사

158차례 정전회담 끝에 판문점에서 유엔군 대표로 정전협정에 서명한 미 육군 중장

1952년 6월, 회담이 성과 없이 끝날 것이 분명하자 해리슨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을 나갔고, 남일 장군은 어안이 벙벙한 채 남겨졌다.

서부전선과 벌지 전투에서 무공을 세운 기병 장교 출신으로, 1952년 5월 유엔군 정전대표단 수석대표가 되어 1년 넘게 판문점 회담을 이끌었다. 1953년 7월 27일, 남일 장군과 서로 눈길 한 번 마주치지 않고 18부의 정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3년간의 한국전쟁 교전을 멈추었다. 독실한 복음주의 신자이자 장교기독교친목회 회장을 지낸 그는, 퇴역 후에도 '명령 아래 사는 사람'이라는 신앙의 규율을 평생 지켰다.

상세 이력 보기
  • 1917웨스트포인트 졸업, 기병 소위 임관
  • 1944제30보병사단 부사단장, 노르망디·벌지 전투 참전
  • 1946–1949연합국 최고사령부(GHQ) 배상과장, 일본 점령
  • 1950–1951제9보병사단장, 포트 딕스
  • 1951.12제8군 부사령관, 한국
  • 1952.05–1953.07유엔군 정전대표단 수석대표
  • 1953.09극동군 부사령관 겸 참모장
  • 1954–1957카리브군 사령관, 퇴역

존 J. 매클로이

John Jay McCloy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95–1989 ○ 자연사

전후 미국 국제질서를 설계한 실무가

흐루쇼프는 미국의 군비 증강이 전쟁 위협이라고 경고했다.

존 J. 매클로이는 법률가 출신의 미국 외교·안보 관료이자 금융가로, 전쟁 수행과 전후 국제질서 구축을 잇는 통로였다. 그는 일본계 미국인 강제수용과 독일 전범 사면·감형 같은 결정에 관여하며 미국 권력의 폭넓은 책임과 그 모순을 드러냈다. 1961년 존 F. 케네디의 군비축소 고문으로서 소련과 시험금지 및 군비축소를 협상했고, 7월 모스크바 회담에서 베를린 위기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을 직접 다뤘다.

상세 이력 보기
  • 1917–1919미 육군 포병 장교, 프랑스 전선 복무
  • 1921–1940뉴욕 변호사, 월스트리트 법률가
  • 1941–1945전쟁부 차관보, 전시 동원·정보·안보 정책 담당
  • 1947–1949세계은행 제2대 총재
  • 1949–1952미국 독일 고등판무관
  • 1953–1960체이스맨해튼은행 회장
  • 1953–1970외교협회 이사회 의장
  • 1961케네디 대통령 군비축소 고문

루시우스 D. 클레이

Lucius D. Clay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97–1978 ○ 폐기종

서베를린 봉쇄에 공수로 맞서 324일을 버텨낸 미군 지구 군정장관

봉쇄 하루 만인 1948년 6월 25일, 클레이는 트루먼의 공식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공수 작전을 스스로 명령했고, 살아남은 베를린 시민들은 그를 '도시의 아버지'라 부르며 무덤에 '우리 자유의 수호자'라는 감사 비문을 새겼다.

그루지야 출신의 공병 장교로, 전시 보급 지휘로 두각을 나타낸 뒤 1947년 점령 독일 미군 지구 군정장관이 되었다. 1948년 소련이 서베를린을 봉쇄하자 무력 호송대 대신 공수를 택해 직접 명령을 내렸고, 베를린 방위가 곧 미국의 명예이자 서유럽의 운명이라고 주장하며 324일의 공수를 끝까지 이끌었다. 1949년 퇴역한 뒤 사업가와 역대 대통령의 고문을 지냈고, 1961년 베를린 장벽 위기 때 케네디의 특사로 돌아와 체크포인트 찰리의 미군 전차를 소련 전차와 대치시켰다.

상세 이력 보기
  • 1897그루지야주 메리에타에서 알렉산더 스티븐스 클레이 상원의원의 아들로 출생
  • 1918웨스트포인트 졸업, 공병 장교로 임관
  • 1942최연소 준장으로 승진, 아이젠하워 휘하 물자국장
  • 1945–1946아이젠하워 부관, 독일 연합군 정부 부군정장관
  • 1947–1949미군 지구 군정장관 겸 유럽 주둔 미군 사령관
  • 1948.06.25베를린 공수 작전 개시 명령
  • 1949–1962퇴역, 컨티넨털 캔 사 회장
  • 1961–1962케네디의 베를린 특사, 체크포인트 찰리 미소 전차 대치

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자이자 1960년대 신좌파의 대표적 이론가

'그것은 가장 진전된 위치에서 위대한 거부, 즉 존재하는 것에 대한 항의다' — 《일차원적 인간》(1964)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핵심 철학자로,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 정신분석을 결합하여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 이론을 전개했다. 《에로스와 문명》(1955)에서 자본주의의 억압 구조를 분석하고 해방된 에로스의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탐구했으며, 《일차원적 인간》(1964)에서는 기술적 풍요가 비판 의식을 잠식하는 현대 산업사회를 '일차원적 사회'로 규정하며 억압적 탈승화 개념을 제시했다. 독일계 유대인으로 나치를 피해 미국에 망명, 전시 OSS에서 근무하고 브랜다이스대와 UC샌디에이고에서 가르치며 1960년대 학생 운동과 신좌파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위대한 거부'로 상징되는 그의 급진적 사유는 비판 이론과 해방 정치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상세 이력 보기
  • 1932제네바 사회연구소(프랑크푸르트학파) 합류
  • 1934–1942컬럼비아대학교 사회연구소 연구원, 뉴욕
  • 1942–1951OSS 및 국무부 분석관, 중앙유럽과장
  • 1954–1965브랜다이스대학교 정치이론 교수
  • 1965–1970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 철학 교수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계 1900–1949 ○ 자연사

기업 권력에서 국제질서의 설계자로 이동한 외교가

얄타 회담 의정서에는 미국 대표로 ‘E. R. 스테티니우스 주니어’의 서명이 남았다.

에드워드 스테티니우스는 대기업 경영과 국가 동원 행정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 말 미국 외교의 중심에 선 정치가였다. 무기대여 원조를 관리하며 동맹국의 전쟁 수행을 뒷받침했고, 얄타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함께 전후 유럽과 국제기구의 틀을 협의했다. 그는 얄타 의정서에 미국 대표로 서명한 뒤 유엔 창설회의를 이끌었지만, 소련과의 긴장을 유엔을 통한 협력으로 풀려 한 구상은 트루먼 행정부와 충돌했다. 이 경력은 기업과 국가의 전시 동원이 전후 다자주의로 이어지는 동시에 냉전의 문턱에서 제약받은 과정을 보여 준다.

상세 이력 보기
  • 1926제너럴 모터스 입사, 존 리 프랫의 보좌역
  • 1931제너럴 모터스 공공·산업관계 담당 부사장
  • 1934–1938US스틸 이사, 1938년 이사회 의장
  • 1939–1941전쟁자원위원회와 생산우선순위 기관에서 전시 동원 담당
  • 1941–1943무기대여 원조 행정관
  • 1943–1944미국 국무부 차관
  • 1944–1945미국 국무장관, 얄타 회담 미국 대표
  • 1945–1946초대 미국 유엔대사

애들레이 유잉 스티븐슨

Adlai Ewing Stevenson

유엔 안보리에서 소련의 쿠바 미사일 배치를 추궁한 두 번의 대선 후보

1962년 10월 25일 유엔 안보리에서 소련 대표 발레리안 조린에게 "통역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예입니까, 아니오입니까?"라고 몰아붙였고, 그가 답변을 거부하자 "지옥이 얼어붙을 때까지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미사일 사진을 공개했다.

애들레이 유잉 스티븐슨 2세(1900~1965)는 미국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일리노이 주의 정치 명가 출신이며 1952년과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두 번 패했다. 일리노이 주지사(1949~1953년, 관행에 따라 31대 또는 33대로 계산)로는 주 경찰 인사에서 정치적 고려를 없애고 실적제를 도입했으며, 적색 공포기에 공직자의 충성서약을 요구하는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1949년 앨저 히스의 인품 증인으로 선서 진술을 했고, 이는 1952년 선거에서 매카시와 닉슨이 그를 공산주의에 무르다며 공격하는 데 쓰였다. 1961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유엔 대사로 재임했으며, 1965년 7월 14일 런던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0–1944해군장관실 수석 법률보좌관
  • 1945국무장관 특별보좌관 · 유엔 준비위원회 미국 부대표
  • 1948–1953제31대 일리노이 주지사
  • 1952민주당 대통령 후보
  • 1956민주당 대통령 후보 (재지명)
  • 1961–1965유엔 주재 미국 대사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인 1901–1987 ○ 자연사

핵시대의 군사 전략가

쿠바 미사일 위기 때 그는 군사 선택지를 설명한 뒤 대통령의 봉쇄 결정을 군에 전달했다.

맥스웰 테일러는 제2차 세계대전의 공수부대 지휘관에서 냉전기의 미국 군사·외교 정책가로 변모한 장교였다. 그는 핵무기에 과도하게 의존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뉴 룩’을 비판하고 재래식 전력과 유연한 대응을 강조했다. 케네디의 신임을 얻어 합동참모본부 의장과 대통령 군사대표를 지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EXCOMM에 참여해 군사 선택지를 제시하는 동시에 대통령의 봉쇄 결정을 군에 전달했다. 이후 베트남 개입 확대를 지지하며 냉전 군사주의의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드러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2미 육군 공병 소위
  • 1942–1945제82공수사단 포병 지휘관, 제101공수사단장
  • 1949–1951서베를린 주둔 연합군 사령관
  • 1953–1955제8군 사령관, 육군참모차장
  • 1955–1959미 육군참모총장
  • 1961–1962대통령 군사대표
  • 1962–1964합동참모본부 의장, EXCOMM 위원
  • 1964–1965주베트남 미국 대사

존 알렉산더 매콘

John Alexander McCone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02–1991 ○ 자연사

쿠바에 소련 미사일이 올 것이라 홀로 경고한 CIA 국장

기습 공격은 미국에 '진주만 오명'을 남길 것이라고 경고하며, 공습 전 카스트로와 흐루쇼프에게 24시간의 사전 경고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사업가이자 공화당원으로, 피그만 침공 실패 후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CIA 국장에 임명되었다. 1962년 여름과 가을,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반입할 것이라고 거듭 경고했으나 정보기관 내부에서 기각당했고, 9월 20일 신혼여행 중 보낸 전문에서 '상상력 있는 분석'을 촉구한 끝에 10월 14일 U-2 정찰기를 명령해 미사일 기지를 발견했다. 케네디 암살 후 존슨 행정부에서도 재임했으나 베트남 확전을 둘러싼 불화로 1965년 사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9Consolidated Steel Corporation 수석부사장
  • 1937Bechtel-McCone 공동 창업
  • 1941–1945California Shipbuilding Corporation 사장
  • 1950–1951미국 공군 차관
  • 1958–1961미국 원자력위원회 위원장
  • 1961–1965제6대 CIA 국장

루엘린 E. 톰슨

Llewellyn Thompson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04–1972 ○ 암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흐루쇼프의 마음을 읽고 해법을 제시한 인물

「흐루쇼프에게 중요한 것은 '나는 쿠바를 구했다, 나는 침공을 막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 ExComm 회의에서.

미국 외교관으로, 1957년부터 1962년까지 모스크바 주재 대사를 역임하며 흐루쇼프와 독자적인 신뢰 관계를 구축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의 국가안전보장회의 집행위원회(ExComm)에서, 10월 27일 도착한 두 통의 흐루쇼프 서한 중 강경한 두 번째 서한을 무시하고 26일의 첫 번째 서한에 응답하라고 권고했으며, 이 전략이 위기 해소의 핵심이 되었다. 이후 1967년부터 1969년까지 다시 모스크바 대사를 지내며 SALT 협상과 핵비확산 정책 수립에도 기여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8미국 외교관으로 임용
  • 1941주소 미국대사관 2등서기관, 독소전 발발 후 모스크바 잔류
  • 1952–1957주오스트리아 고등판무관·대사, 오스트리아 국가조약 및 트리에스테 협상
  • 1957–1962주소 미국 대사 (1차), 캠프 데이비드·빈 정상회담, U-2 사건, 부엌 논쟁
  • 1962ExComm 위원, 쿠바 미사일 위기 해결에 핵심 조언
  • 1962–1966국무부 소련 담당 대사급 순회대사·정무담당 부차관보
  • 1967–1969주소 미국 대사 (2차), 글래스보로 정상회담, SALT·핵비확산 협상

찰스 E. 유스티스 볼렌

Charles E. Bohlen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04–1974 ○ 췌장암

케넌과 클레이턴의 정책 메모를 마셜의 하버드 연설문으로 옮긴 국무부 소련 전문가

「포츠담 이후, 소련이 세계 공동체의 합리적이고 협력적인 구성원이 되도록 유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회고록 『역사의 증인』에서.

미국 외교관이자 소련 전문가로, 1934년 주소 미국대사관 개설부터 냉전기까지 미소관계의 거의 모든 중대한 장면에 입회했다. 루스벨트와 트루먼의 통역으로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에 배석했으며, 1947년 마셜 국무장관의 요청으로 케넌과 클레이턴의 정책 메모를 하버드 졸업식 연설문으로 작성해 마셜 플랜의 공개적 출발을 이끌었다. 1953년 주소 대사로 임명되었으나 매카시의 공격을 받으며 인준 청문회를 겪었고, 이후 프랑스 대사까지 지내며 '현자들'로 불린 초당파 외교 고문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9국무부 외교관으로 임용
  • 1934–1940주소 미국대사관 3등서기관, 독소불가침조약 전문 입수
  • 1943–1945백악관 소련 고문,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 통역
  • 1947–1949국무부 고문, 마셜의 하버드 연설 초안 작성
  • 1949–1951주프랑스 미국 공사
  • 1953–1957주소 미국 대사
  • 1957–1959주필리핀 미국 대사
  • 1962–1968주프랑스 미국 대사

조지 F. 케넌

George F. Kennan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904–2005 ○ 자연사

1946년 장전문과 X 논문으로 봉쇄 정책을 설계한 미국 외교관·역사가

「소련에 대한 미국 정책의 주요 요소는 러시아의 팽창 경향에 대한 장기적이고 인내심 있으면서도 단호하고 경계하는 봉쇄여야 한다」, 1947년 X 논문에서.

미국 외교관이자 역사가로, 1946년 모스크바에서 국무부에 보낸 '장전문'과 1947년 《포린 어페어스》에 발표한 X 논문에서 소련의 팽창을 장기적·인내심 있게 봉쇄해야 한다는 전략을 제시했다. 국무부 정책기획실 초대 실장으로서 마셜 플랜의 설계에 핵심적 역할을 했으며, 이후 트루먼 독트린과 NATO로 이어지는 냉전 초기 미국 대외정책의 지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자신이 설계한 봉쇄가 군사적 대결로 변질되자 평생 비판자로 돌아섰고, 베트남 전쟁과 NATO 확장에 공개 반대하며 현실주의적 외교를 주장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5국무부 외교관으로 임용
  • 1933–1936주소 미국대사관 3등서기관
  • 1944–1946주소 미국대사관 공사참사관, '장전문' 송신
  • 1947–1949국무부 정책기획실 초대 실장, 마셜 플랜 설계, X 논문 발표
  • 1952주소 대사, 페르소나 논 그라타 선언
  • 1956–2005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수, 외교사 저술
  • 1961–1963주유고슬라비아 대사

윌리엄 H. 터너

William H. Tunner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계 1906–1983 ○ 자연사

대규모 공수작전의 설계자

“모든 비행은 날씨가 좋든 나쁘든, 낮이든 밤이든 계기비행으로 한다.”

윌리엄 H. 터너는 제2차 세계대전의 히말라야 공수와 베를린 공수에서 대규모 항공수송을 정교한 체계로 바꾼 미국 공군 지휘관이었다. 그는 베를린 봉쇄 때 연합 공수임무부대를 이끌며 항공기를 일방통행 회랑과 엄격한 시간표에 배치해 임시 작전을 지속 가능한 공급망으로 전환했다. 블랙 프라이데이의 사고 뒤에는 악천후에도 계기비행을 의무화하고 착륙 실패 항공기를 되돌리는 규칙을 세워 안전과 처리량을 함께 높였다. 이후 한국전쟁 공수와 군사항공수송 근무를 지휘하며 현대 전략공수의 조직 원리를 남겼다.

상세 이력 보기
  • 1928–1941미 육군 항공대 장교, 조종사와 참모
  • 1942–1943항공수송사령부 국내·수송 사단장
  • 1942여성보조수송비행대 창설 조직
  • 1944–1945인도·중국 사단장, 히말라야 공수 지휘
  • 1948–1949연합 공수임무부대 사령관, 베를린 공수
  • 1950–1951전투화물사령부 사령관, 한국전쟁 공수
  • 1958–1960군사항공수송 근무 사령관
  • 1960미 공군 퇴역

커티스 E. 르메이

Curtis LeMay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906–1990 ○ 심장마비

일본을 불태우고 상대에게 핵폭격을 주장한 공군 원수

클레이가 '석탄이라도 실어날라 줄 수 있겠소?' 하고 묻자 르메이는 '우리는 무엇이든 실어나를 수 있다'고 답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에 대한 전략폭격을 지휘한 인물로,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을 시작으로 66개 도시를 소이탄으로 태웠다. 1948년 미 유럽공군 사령관으로서 베를린 봉쇄에 맞서 루시우스 클레이에게 '우리는 무엇이든 실어나를 수 있다'고 답하며 공수의 첫 단계를 세웠다. 이어 전략공군사령부(SAC)를 맡아 핵전력 중심의 제트 공군으로 개편했고, 1961년 공군 참모총장이 되어 쿠바 위기 때 미사일 기지 폭격을 주장했다. 은퇴 후에는 인종분리주의자 조지 월리스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1968년 대선에 나섰다.

상세 이력 보기
  • 1942제305폭격단장, 유럽 전선
  • 1944–1945제21폭격사령부 지휘관, 일본 소이탄 공습
  • 1947–1948미 유럽공군(USAFE) 사령관, 베를린 공수 개시
  • 1948–1957전략공군사령부(SAC) 사령관
  • 1957–1961미 공군 부참모총장
  • 1961–1965미 공군 참모총장
  • 1968조지 월리스의 부통령 후보

제임스 웨브

James Edwin Webb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인 1906–1992 ○ 자연사

아폴로를 조직한 행정가

아폴로 1호 화재 뒤 그는 NASA가 조사와 수습을 맡아야 한다고 존슨 대통령에게 요구했다.

제임스 웨브는 과학자나 기술자가 아니라 대규모 공공사업을 조직한 미국의 행정가였다. NASA 국장으로서 아폴로 계획에 안정적인 예산과 정치적 지지를 결합하고, 연구센터와 산업·대학을 조정하는 중앙집중적 운영 체계를 세웠다. 그는 유인 달 착륙을 추진하면서도 마리너와 파이어니어 같은 행성과학 및 우주망원경 연구를 지지했다. 아폴로 1호 화재 뒤에는 조사를 이끌고 NASA의 책임을 의회에 설명하며 계획의 연속성을 지켰다.

상세 이력 보기
  • 1928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졸업
  • 1936워싱턴 법학대학원 졸업, 변호사 자격 취득
  • 1936–1944스페리 자이로스코프 인사·재무·경영 담당
  • 1946–1949미국 예산국 국장
  • 1949–1952미국 국무부 차관
  • 1961–1968미 항공우주국 국장
  • 1969대통령 자유훈장 수훈, 『우주시대의 관리』 출간

어니스트 그로스

Ernest A. Gross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06–1999 ○ 자연사

유엔의 절차를 움직인 국제법률가

1950년 6월 25일, 그는 한국의 상황을 보고하고 결의안 표결을 위한 안전보장이사회 절차를 이끌었다.

어니스트 그로스는 국제법률가이자 미국 외교관으로, 법률 자문과 전후 점령지 행정을 거쳐 유엔에서 미국의 정책을 대표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미국 대표단을 이끌며 안전보장이사회가 결의 82를 채택하도록 절차와 표결을 조율했다. 이 과정은 소련 대표의 불참이라는 조건을 활용한 미국 외교의 성과였지만, 유엔의 집단안보가 강대국 경쟁 속에서 작동한 방식이라는 긴장도 남겼다. 이후 그는 국제변호사로서 티베트 문제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를 다뤘다.

상세 이력 보기
  • 1931–1933미 국무부 법률고문
  • 1940–1943전시노동위원회 부법률고문
  • 1943–1945미 육군 민정국 경제과장
  • 1945–1949국무부 법률고문 및 점령지역 담당 차관보 보좌관
  • 1949국무부 의회관계 담당 차관보
  • 1949–1953유엔 주재 미국 대표부 차석대표, 1949–1950년 대표단장 직무대행
  • 1953–1999커티스·말레-프레보스트 법률사무소 변호사
  • 1959–1960티베트 망명정부 국제연합 로비스트·자문역
  • 1960년대국제사법재판소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 소송 제기

폴 니츠

Paul Nitze
미국 국가기관 미국인 미국계 1907–2004 ○ 자연사

핵전략과 군비통제를 오간 냉전 설계자

1982년 제네바 협상 중 유리 크비친스키와 ‘숲속 산책’을 하며 타협안을 모색했다.

폴 니츠는 미국의 냉전 전략과 핵무기 정책을 형성한 외교·안보 관료였다. 그는 NSC-68에서 소련과의 장기 대결을 군사력 증강의 문제로 정식화했지만, 핵무기의 위험을 관리하려면 정교한 협상도 필요하다고 보았다. SALT에 참여하고 레이건 행정부의 INF 협상을 이끌면서, 강한 억지력과 군비 감축을 서로 배타적인 선택으로 보지 않는 실무 노선을 추구했다. 이 때문에 그는 군비경쟁의 설계자이자 협상 가능한 질서를 찾은 인물이라는 상반된 유산을 남겼다.

상세 이력 보기
  • 1944–1946전략폭격조사단 부의장
  • 1950–1953국무부 정책기획국장
  • 1961–1963국방부 국제안보담당 차관보
  • 1963–1967해군장관
  • 1967–1969국방부 부장관
  • 1969–1973SALT I 미국 대표단
  • 1981–1984INF 미국 수석협상가
  • 1984–1989대통령·국무장관 군비통제 특별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