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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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카르핀스키

Александр Петрович Карпин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47–1936 ○ 자연사

혁명을 가로질러 과학아카데미를 지킨 첫 선출 총재

1917년 5월 15일 과학아카데미 총회에서 최초의 선출 총재 투표가 열렸다. 카르핀스키는 거의 만장일치로 당선되었다 — 오직 본인만이 자신에게 반대표를 던졌다.

카르핀스키는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최초의 선출 총재(1917–1936)로서, 제정에서 소비에트 체제로의 전환기를 가로질러 학술원을 이끈 세계적 지질학자다. 유럽러시아 최초의 종합 지질도를 완성했고, 동유럽 플랫폼의 2층 구조를 밝혔으며, 남부 유럽러시아를 가로지르는 변형대인 '카르핀스키 선'을 규명해 지구조론의 기초를 놓았다. 페름기 상어 헬리코프리온을 기재했고, 그의 이름은 광물 카르핀스카이트, 달의 크레이터, 러시아 지질연구소에 남아 있다. 1917년 5월 총회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선출된 그는 혁명과 내전의 혼란 속에서도 학술원의 장비와 기록을 보존하며 소비에트 기초과학 제도의 연속성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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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6–1869우랄 지역 광산 기사
  • 1869–1896상트페테르부르크 광산연구소 교수
  • 1885–1903지질위원회 위원장
  • 1886제국 과학아카데미 회원 선출
  • 1899–1936광물학회 회장
  • 1916–1917과학아카데미 부총재 대행
  • 1917–1936과학아카데미 총재 · RAS → AN SSSR

이반 페트로비치 파블로프

Иван Петрович Павлов
소비에트 러시아 1849–1936 ○ 폐렴

조건반사를 발견하고 스탈린에게 '러시아인이라 불리는 것이 부끄럽다'고 쓴 노벨상 생리학자

동료가 거리의 총격 때문에 10분 지각했다고 설명하자, 파블로프가 외쳤다: '혁명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실험실에서 할 실험이 있는데!'

소화생리학 연구로 1904년 노벨상을 수상하고, 개 실험을 통해 조건반사(고전적 조건형성)를 발견하여 현대 행동심리학과 신경과학의 토대를 놓은 러시아·소비에트 생리학자. 레닌의 찬사와 소비에트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면서도 공산당 체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했으며, 1927년 스탈린에게 지식인 탄압에 대해 '러시아인이라 불리는 것이 부끄럽다'고 썼고 1934년 키로프 암살 후에는 대숙청을 몰로토프에게 항의했다. 그의 고등신경활동에 관한 유물론적 생리학은 사후 소비에트 이데올로기적 정설로 교조화되어, 그 자신의 치열한 독립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파블로프 학설' 국가 정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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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0–1875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자연과학 전공, 자연과학 후보 학위 취득
  • 1875–1879제국의과외과학원 수학, 금메달로 졸업
  • 1884–1886독일 라이프치히·브레슬라우에서 카를 루트비히·루돌프 하이덴하인 밑에서 연구
  • 1890–1895군사의학아카데미 약리학 교수
  • 1891–1936실험의학연구소 생리학부장
  • 1895–1925군사의학아카데미 생리학 교수
  • 1904소화생리학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 — 러시아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 1925–1936소비에트 과학아카데미 생리학연구소 소장

이반 블라디미로비치 미추린

Иван Владимирович Мичурин
소련 러시아 1855–1935 ○ 자연사

자신의 이름이 라이선코에게 도용된 독학 육종학자

“우리는 자연의 은혜를 기다릴 수 없다. 자연으로부터 그것을 빼앗는 것이 우리의 과업이다.” — 미추린이 묘목장에서 수십 년간 반복한 이 유명한 문장은 후일 소비에트 체제의 자연 정복 수사로 왜곡되었다.

300종 넘는 과일 품종을 육종한 러시아 독학 원예학자. 교잡육종에 평생을 바쳤고 레닌의 지원으로 묘목장이 국립 연구소로 성장했다. 사후 리센코가 그의 이름을 도용해 '미추린 생물학'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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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55랴잔현 베르시나 영지에서 소귀족 가문의 7번째 자녀로 출생
  • 1872프론스크 군립학교 졸업. 랴잔 김나지움에서 '상관에 대한 무례'로 퇴학당함
  • 1875코즐로프에서 첫 임차지(약 500㎡)에 과일·장과류 600종 이상 수집, 교잡 실험 시작
  • 1888투르마소보 인근에 약 13ha의 토지 구입, 러시아 최초의 선종 묘목장 중 하나 설립
  • 1906첫 학술 논문 발표. 1912년 성 안나 훈장 3등급 수훈
  • 1918인민농업위원회, 미추린 묘목장을 국유화하고 그를 관리자로 임명. 레닌이 개인적 관심 표명
  • 1931레닌 훈장 및 노동적기훈장 수훈. 1934년 생물학 박사 학위, RSFSR 과학기술 공로 활동가 칭호
  • 1935소련 과학 아카데미 명예 회원, 전연방농업과학아카데미 정회원. 6월 7일 사망

콘스탄틴 예두아르도비치 치올콥스키

Константин Эдуардович Циолковский
소련 러시아 1857–1935 ○ 위암

귀먹은 시골 교사에서 우주비행학의 아버지로. 로켓 방정식 하나로 우주 시대를 연 독학자

「인류는 영원히 지구의 요람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인류는 대기와 태양계의 한계를 넘어 정복할 것이다.」

로켓 추진의 기본 방정식을 정립한 우주비행학의 선구자. 1903년 다단계 로켓·궤도 정거장·우주 식민지 개념을 제시했고, 그의 이론은 코롤료프와 소비에트 우주 계획의 직접적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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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9민중학교 교사 자격 취득
  • 1880–1892보롭스크 시립학교 수학·기하 교사
  • 1892–1921칼루가 현립학교·여자교구학교 수학·물리 교사
  • 1903「반응 장치에 의한 세계 공간 탐구」 발표 — 로켓 방정식 기초 확립
  • 1920러시아 세계학 애호가 협회 회원, 소비에트 정부 개인연금 수여
  • 1924–1935우주비행학 이론 집중 연구 — 다단계 로켓·궤도정거장·우주 식민지 구상
  • 1932노동적기훈장 수훈, 75세 전국 경축

미하일 스테파노비치 올민스키

Михаил Степанович Ольмин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63–1933 ○ 자연사

이스트파르트의 창설자이자 볼셰비키 당사 편찬의 설계자

5학년 때 큰 쉬는 시간, 급우가 교실 문을 닫고 교단에 올라 불법 팸플릿 「죽음에는 죽음으로」를 낭독했다. 메젠초프 헌병사령관 암살에 대한 크랍친스키의 글은 올민스키에게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겼다.

나로드나야 볼랴에서 출발해 1904년 레닌의 지도 아래 볼셰비키에 합류한 혁명적 문필가다. 차르 감옥에서 5년 가까이 독방 생활을 견뎠고, 신문 《즈베즈다》, 《프라우다》, 잡지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의 편집을 맡으며 볼셰비키 저널리즘의 얼굴이 되었다. 1920년 이스트파르트(당사위원회)를 창설해 소비에트 당사 편찬의 제도적 기초를 놓았고, 살티코프-셰드린 연구로 문학비평사에도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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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4–1885나로드나야 볼랴 '청년동맹' 가입, 체포되어 보로네시로 추방
  • 1891–1898'나로드노볼리치 그룹' 공동 창립, 재체포 후 약 5년 독방, 올레크민스크 유형
  • 1904–1905스위스에서 레닌 지도 아래 볼셰비키 합류, 《프페료트》 《프롤레타리》 편집 참여
  • 1905–1916《노바야 지즌》 《볼나》 《즈베즈다》 《프라우다》 《프로스베셰니예》 편집, 바쿠·사라토프에서 활동
  • 1917모스크바 볼셰비키 위원, 자모스크보레츠키 군사혁명위원, 6차 대회 공동의장, 제헌의회 의원
  • 1918–1920《프라우다》 편집위원, 사회주의 아카데미 교수, 선동열차 강연단 활동
  • 1920–1928이스트파르트(당사위원회) 창설·의장, 잡지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 창간·편집
  • 1922–1933구볼셰비키협회 회장(회원번호 1번), 살티코프-셰드린 전집 편찬위원장

콘스탄틴 세르게예비치 스타니슬랍스키

Константин Сергеевич Станиславский
소련 러시아 1863–1938 ○ 자연사

모스크바 예술극장 창립자이자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의 창시자

1928년 모스크바 예술극장 30주년 기념 공연 도중 심장마비가 찾아왔다. 그는 막이 내릴 때까지 무대를 떠나지 않았고, 이후 다시는 배우로 서지 못했다.

러시아·소비에트 연극 연출가이자 배우. 1898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을 공동 창립해 근대 연극을 혁신했다. 배우의 심리적 진실을 체계화한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은 세계 연기 교육의 근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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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모스크바 예술문학협회 공동 창립
  • 1898네미로비치-단첸코와 모스크바 예술극장(MAT) 공동 창립
  • 1906'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 연기 방법론 개발 착수
  • 1912MAT 제1스튜디오 설립, 배우 훈련 실험실로 운영
  • 1918볼쇼이 극장 오페라 스튜디오(현 스타니슬랍스키 음악극장) 창설
  • 1922–1924MAT 유럽·미국 순회공연 지휘, 세계적 명성 확립
  • 1936소련 최초의 인민예술가 칭호 수여
  • 1938『배우의 작업』 출간; 모스크바에서 사망

알렉산드르 세라피모비치

Александр Серафимович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63–1949 ○ 자연사

『철류』로 혁명의 서사시를 쓴 돈 카자크의 아들

“우리는 쓰라린 고통 속에서, 온몸의 피를 쥐어짜며 승리를 배웠다.” — 『철류』

돈 카자크 출신 소비에트 작가. 1918년 볼셰비키 입당, 타만 군대의 내전 행군을 그린 『철류』(1924)로 소비에트 산문의 기념비를 세웠다. 『옥탸브리』 주필로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을 발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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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9유배지에서 첫 단편 「얼음 위에서」 발표, 필명 '세라피모비치'
  • 1902–1917모스크바에서 고리키의 '스레다' 그룹 활동 — 『모래』에 톨스토이 찬사
  • 1918볼셰비키 입당, 『이즈베스티야』 문예부장
  • 1924『철류』 발표 — 타만 군대 행군을 그린 내전 서사시
  • 1926–1929『옥탸브리』 주필, 숄로호프 『고요한 돈강』 발굴·출판
  • 1934소비에트 작가동맹 상임위원회 창립 위원
  • 1943스탈린상 1급, 상금 국방기금 헌납

안나 일리니치나 옐리자로바-울리야노바

Анна Ильинична Елизарова-Ульянова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64–1935 ○ 병사

레닌의 맏누이이자 이스크라 지하유통을 조직한 구볼셰비키 혁명가

1932년 안나는 스탈린에게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유대인에 대해 언제나 좋게 말했습니다'라고 쓰며 레닌의 유대인 혈통을 공개해 반유대주의에 맞서 줄 것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거부했다.

레닌의 맏누이이자 1898년 RSDLP에 입당한 구볼셰비키. 동생 알렉산드르의 차르 암살 기도 사건으로 5년 유형을 선고받은 후, 블라디미르의 옥중 연락망과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출판을 조직했다. 1917년 『프라우다』 편집서기로 10월 혁명을 준비했고, 혁명 후 이스트파르트와 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 창립에 참여해 소비에트 역사제도의 기초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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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 사건으로 체포, 5년 유형
  • 1898RSDLP 입당, 모스크바 첫 당위원회 활동
  • 1900–1902『이스크라』 유통망 조직 (베를린, 파리, 러시아)
  • 1909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출판 조직
  • 1913–1917『프라우다』 편집위원, 편집서기
  • 1917RSDLP(b) 중앙위원회국 위원, 10월 혁명 준비
  • 1918–1921인민위생인민위원부 아동보호부장, 교육인민위원부 근무
  • 1920년대–1932이스트파르트·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 공동창립,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 편집서기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코즐롭스키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Козловский

크론시타트 포병대장으로 봉기했고, 볼셰비키가 '반란의 주모자'로 지목한 구제국 장군

"공산주의자들은 크론시타트 봉기를 백위대 음모로 보이게 만들기 위해 내 이름을 이용했다. 내가 요새에 있던 유일한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제정 러시아 포병 장교로 30년간 복무하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시베리아 포병 여단을 지휘했다. 2월 혁명 후 예편했다가 1918년 붉은 군대에 군사전문가로 입대했고, 1920년 12월 크론시타트 요새 포병대장에 임명되었다. 1921년 3월 크론시타트 봉기 당시 봉기군의 방어를 조직했으나, 볼셰비키는 3월 2일 포고에서 봉기를 '코즐롭스키 전 장군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그를 법외자로 선언했으며, 가족과 지인 27명을 인질로 체포했다. 봉기 진압 후 8천여 명의 크론시타트 수병과 함께 핀란드로 탈출했고, 망명지에서 교사와 정비공으로 일하다 1940년 헬싱키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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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2블라디미르 키예프 사관생도단 입대
  • 1884미하일롭스키 포병학교 졸업
  • 1890미하일롭스키 포병아카데미 1등급 졸업
  • 1905–1912제33포병여단 제2대대장
  • 1912소장 진급; 제11시베리아 포병여단장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제34군단 포병감
  • 1918–1920적군 군사전문가로 복무
  • 1920.12–1921.03크론시타트 요새 포병대장; 봉기 중 방어 지휘
  • 1921–1940핀란드 망명: 교사, 도로 노동자, 정비공

안드레이 예브게니예비치 스네사레프

Андрей Евгеньевич Снесар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65–1937 ○ 수용 후유증

차르 장군 출신 붉은 군대 이론가, 차리친에서 스탈린과 충돌하다

1918년 차리친에서 보로실로프에 대해 보고했다: "군대 지휘관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복무 의무에 충분히 스며들지 않았으며 부대 지휘의 기본 규칙조차 지키지 않는다." 며칠 후 그와 전 참모진은 체포되었다.

안드레이 스네사레프는 차르 군대 중장에서 붉은 군대 지휘관으로 전향한 군사 지식인이자 동양학자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군단장까지 오르고 1918년 붉은 군대에 합류했으나, 차리친 방어전에서 군사 전문성을 무시하는 스탈린-보로실로프와 충돌하며 해임·체포되었다. 이후 참모총장 아카데미 원장으로 3년제 정규 교육체계를 정비하고 《전쟁철학》 등 독창적 군사이론을 개척했으며, 모스크바 동양학 연구소 총장으로 소비에트 동양학의 토대를 닦았다. 1928년 소련 군 지도자 최초로 노동영웅이 되었으나, 1930년 '봄' 사건으로 사형 선고 후 10년형으로 감형, 수용소에서 뇌졸중을 겪고 1934년 석방되어 193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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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1899모스크바대학 물리수학과 졸업, 모스크바 보병학교 수료,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1등 졸업
  • 1900–1913투르케스탄 군관구 참모, 파미르 분견대장, 인도·아프가니스탄 군사지리학 연구, 중앙아시아 첩보 담당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연대장·여단장·사단장·군단장, 중장 진급, 성 조지 훈장 3·4등급
  • 1918붉은 군대 입대, 북카프카스 군관구 군사지도자 — 차리친 방어전에서 스탈린-보로실로프와 충돌, 체포 후 석방
  • 1919–1921노농적군 참모총장 아카데미 원장: 3년제 정규과정 정비, 《전쟁철학》 강의 개설
  • 1921–1930모스크바 동양학 연구소 총장·교수, 군사지리학 주임 지도관, 노동영웅 칭호(1928)
  • 1930–1937「봄」 사건으로 체포, 사형→10년형 감형, 수용소 뇌졸중, 1934년 석방, 1937년 사망, 1958년 복권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포크롭스키

Михаил Николаевич Покро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68–1932 ○ 암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창건자이자 사후 부정된 혁명적 역사가

1920년 12월, 레닌은 포크롭스키에게 『가장 간결한 러시아사』에 대해 "구성과 접근이 독창적이며 굉장한 흥미로 읽힌다"고 썼고, 연표를 보충해 교과서로 만들라고 제안했다.

클류쳅스키의 제자에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창건자로 전환한 인물로, 러시아사 전체를 계급 분석과 경제 결정론 위에 다시 세웠다. 볼셰비키로서 10월 혁명에 참여했고, 1918년부터 죽을 때까지 소비에트 학문 제도(공산주의 아카데미, 붉은 교수양성원, 이스트파르트, 레닌 연구소, 중앙기록보관소)의 골격을 구축했다. 러시아 전제정을 '모노마흐의 모자를 쓴 상업자본'으로 파악한 그의 테제는 초기 소비에트 역사교육을 규정했으나, 사후 스탈린기에 '포크롭스키 학파'라는 낙인 아래 전면 부정되어 수많은 역사가 숙청의 구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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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1891모스크바대학 사학과 졸업, 클류쳅스키·비노그라도프 사사; 대학 잔류하여 교수준비생 지위
  • 1896–1905'합법적 마르크스주의'에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로 전향; 1905년 RSDLP(볼셰비키) 가입, 제네바에서 레닌 첫 대면
  • 1905–1907모스크바 볼셰비키 강연단·신문 ≪보르바≫ 편집; 12월 봉기 참가; RSDLP 제5차 런던대회 대의원·중앙위 후보위원
  • 1908–1917망명: '전진파'·이후 반파벳적 입장; 1차대전 때 국제주의자로 복귀; ≪고대 이후의 러시아사≫ 5권 집필(1910–1913)
  • 1917–1918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1917.11–1918.3),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대표단 위원
  • 1918–1932계몽인민부위원(루나차르스키 대리); 고등교육·과학·기록보관소 개혁 주도; 공산주의 아카데미·적색교수양성원·이스트파르트·레닌연구소·중앙기록보관소장
  • 1920–1923≪가장 간결한 러시아사≫ 출간 — 초기 소비에트 역사교육의 표준 교재
  • 1929–1932소비에트 아카데미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정회원 선출(1929); 중앙통제위원회 상임위원(1930–1932); 암으로 사망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고리키

Алексей Максимович Горький

폭풍을 부르다 새장에 갇힌 바다제비

"인간 — 바로 이것이 진리다!" - 『밑바닥에서』(1902)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목수 막심 페시코프의 아들로 태어난 알렉세이 페시코프는 부두 노동자와 방랑자로 러시아의 밑바닥을 떠돌다 1892년 단편 「마카르 추드라」로 막심 고리키가 되었다. 혁명 전에는 볼셰비키의 최대 후원자였으나 1917~1918년 자신의 신문 『노바야 지즌』에 「때 이른 생각들」을 연재하며 레닌의 폭력을 비판했고, 그 논쟁은 최종 결별이 아니었다. 1921년 결핵 때문에 이탈리아로 떠나 소렌토에 머물렀고, 널리 퍼진 서술은 1932년 10월 귀국으로 보지만 바신스키는 1933년으로 본다. 귀국 뒤 스탈린을 미화하고 집단화와 노동수용소 체계를 옹호했고, 1936년 6월 18일 고르키에서 지병으로 사망했으며 독살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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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1917부랑 노동자 출신 작가로 세계적 명성, 볼셰비키 자금 지원
  • 1917–1921『노바야 지즌』에 「제때없는 생각들」 — 혁명의 폭력을 공개 비판
  • 1921–1933요양 명목의 국외 체류(소렌토)
  • 1932–1936귀국, 작가동맹 초대 의장 — 사회주의 리얼리즘 정식화

마리야 표도로브나 안드레예바

Мария Фёдоровна Андреева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868–1953 ○ 자연사

레닌이 '동지 페노멘'이라 부른 배우 출신 볼셰비키 재정 요원

1903년, 고위 철도 관리의 아내 신분으로 1등석 열차 칸에 경찰이 쫓는 지하운동가를 숨기고 고리키에게 5월제 선전물을 실은 여행가방을 배달했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대표 여배우로 스타니슬랍스키의 무대 파트너였던 마리야 안드레예바는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후 당의 핵심 재정 요원으로 활약했다. 사바 모로조프의 유산 등 자본가들의 거액 헌금을 레닌의 금고로 연결하는 탁월한 자금 조달 능력으로 '동지 페노멘'이라는 당내 별칭을 얻었으며, 18년간 막심 고리키의 동반자로서 그의 문학 활동과 해외 선전 여행을 물질적·실무적으로 뒷받침했다. 10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극장·공연 인민위원으로서 볼쇼이 드라마 극장을 공동 창립했고, 이후 모스크바 과학자회관 관장으로 18년간 봉직하며 혁명기 문화 제도 건설에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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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1898러시아 예술문학협회 배우
  • 1898–1905모스크바 예술극장 주요 여배우
  • 1904–1917RSDRP(볼셰비키) 재정 요원 — '동지 페노멘'
  • 1918–1921페트로그라드 극장·공연 인민위원
  • 1919볼쇼이 드라마 극장 공동 창립
  • 1922–1928베를린 소비에트 무역대표부 예술·영화 담당
  • 1931–1948모스크바 과학자회관 관장

나데즈다 콘스탄티노브나 크룹스카야

Надежда Константиновна Крупская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69–1939 ○ 복막염

남편의 그림자 속에서 소비에트 학교와 도서관을 만든 여성

트로츠키는 『이스크라』 시절의 그녀 방을 이렇게 기억했다. 방에서는 늘 종이가 타는 냄새가 났다. 암호 편지를 촛불에 쬐어 읽었기 때문이다. 수백 명 지하 연락원의 가명과 주소가 그녀 머릿속에 있었다.

레닌의 아내이자 가장 가까운 동지였지만, 스스로 조직을 세운 혁명가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몰락한 귀족 가정에서 태어나 노동자들 사이에서 교사이자 선전원으로 활동하다 1898년 슈셴스코예 유형지에서 레닌과 결혼했다. 망명지에서 『이스크라』의 서기로서 암호와 가명, 주소로 이어지는 통신망을 운영하며 당을 묶어냈고, 1917년 이후에는 리크베스 문맹 퇴치와 전국 도서관망으로 소비에트 교육을 세웠다. 1925년 신반대파를 잠시 지지했다가 철회했고, 추콥스키의 동화를 비판한 글은 그를 아동문학에서 사실상 배제했다. '해로운' 도서를 걷어내는 도서관 정화를 주도하면서도 테러의 표적이 된 이들을 위해 탄원했다. 1939년 2월 27일 복막염으로 사망, 유골은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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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오볼렌스카야 여성 김나지움 금메달 졸업
  • 1889–1890베스투제프 여성 고등과정 수학, 마르크스주의 서클 가입
  • 1891–1896페테르부르크 넵스카야 자스타바 성인 야간학교 교사, 노동자 선전 활동
  • 1898슈셴스코예 유형지에서 레닌과 결혼, RSDLP 입당
  • 1901–1905뮌헨·런던 망명, 「이스크라」지 서기
  • 1905–1907러시아로 귀환,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서기
  • 1911롱쥬모 당학교 교사, 여성지 「라보트니차」 창간 참여
  • 1917–192010월 혁명 참여, 콤소몰·피오네르 조직 설계, 글라브폴리트프로스베트 의장
  • 1924–1927중앙통제위원회 위원, 1925년 14차 당대회에서 '신반대파' 지지 후 철회
  • 1927–1939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29–1939RSFSR 계몽인민부위원, 소비에트 교육·도서관·검열 정책 주도
  • 1931소련 과학아카데미 명예회원, 교육학 박사학위 취득
  • 1937소비에트 최고회의 제1기 대의원, 최고회의 간부회 위원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비노쿠로프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Винокур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69–1944 ○ 자연사

소련 최고재판소 초대 의장, 14년간 사법부를 이끈 의사 출신 볼셰비키

1918년 8월 30일, 레닌이 총격을 당해 크렘린으로 이송되자 비노쿠로프가 응급처치를 했다. 의대를 나온 혁명가가 6년 후 소련 사법부의 정점에 오를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의학을 공부한 볼셰비키 법률가로, 1924년부터 1938년까지 소련 최고재판소 초대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사법 체계의 기틀을 세웠다. 1903년 볼셰비키에 합류한 혁명 1세대로, 1893년 모스크바 사회민주주의 조직을 공동 창립하고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 시두마의 첫 볼셰비키 의장을 지냈다. 1918년 레닌 피격 직후 응급처치를 한 의사였으며, 1918–1921년 러시아 사회보장인민위원으로 복지 행정의 초석을 놓았다. 최고재판소 의장 재임기간 내내 비신스키·크릴렌코와 사법 통제권을 놓고 경쟁했고, 법의 규칙성을 중시했으나 대숙청에 제도적으로 연루되었다. 1938년 해임 후 보건인민위원부 위생교육 부서로 밀려났고, 1944년 자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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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1902모스크바·예카테리노슬라프 사회민주주의 조직 공동 창립; 체포·독방·유배
  • 1903–1917볼셰비키 당원; 예카테리노슬라프·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당 활동, 「보험문제」지 편집
  • 1917.10첫 볼셰비키 페트로그라드 시두마 의장; 노동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 1918–1921러시아 사회보장인민위원
  • 1921–1924기근구제위원회 및 기근후속대책위원회 위원
  • 1924–1938소련 최고재판소 의장
  • 1938–1944보건인민위원부 위생교육부장; 메드기즈 근무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Владимир Ильич Ленин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0–1924 ○ 병사

갈림길마다 방향을 바꾼 조타수

1917년 4월 16일(구력 4월 3일) 밤, 페트로그라드 핀란드역. 망명에서 돌아온 레닌은 장갑차 위에 올라 임시정부를 비판하고 유럽 전역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촉구했으며, 이후 며칠에 걸쳐 4월 테제를 내놓았다.

레닌은 러시아 제국 심비르스크에서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로 태어난 혁명가·정치가·이론가다.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분열에서 볼셰비키를 이끌었고 1917년 10월 혁명을 지도했다. 그의 정부는 토지를 분배하고 은행과 대공업을 국유화했으며,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탈했고 코민테른을 통해 세계혁명을 추진했다. 동시에 국가보안기구가 집행한 적색테러로 수만 명이 살해되거나 수용되었고, 내전에서 반볼셰비키 군대를 물리쳤다. 전쟁 폐허와 기근, 민중 봉기에 대응해 1921년 신경제정책을 제안했다. 1924년 1월 21일 고르키에서 사망했고 스탈린이 후계 구도를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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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900체포, 시베리아 유형
  • 1900–1905이스크라, 『무엇을 할 것인가』, 볼셰비키 분파 형성
  • 1902《무엇을 할 것인가?》 출간
  • 1909《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출간
  • 1914–1917치머발트 좌파,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 1916《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집필·출간
  • 1917.04귀국, 4월 테제
  • 1917.10봉기 관철, 인민위원회의 의장
  • 1918–1921브레스트 강화, 내전, 전시공산주의
  • 1918《국가와 혁명》 출간(1917년 집필)
  • 1921네프로의 후퇴
  • 1922–1924뇌졸중, 「대회에 보내는 편지」 구술

레오니트 보리소비치 크라신

Леонид Борисович Крас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0–1926 ○ 백혈병

혁명의 기술자에서 소비에트 외교의 설계자로, 서구 자본과 거래할 줄 알았던 유일한 볼셰비키

1893년, 젊은 크라신은 톨스토이를 찾아가 혁명의 필연성을 설파했다. 비폭력을 설교하던 대문호는 격노하여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고 동석했던 아내 류보비는 기록했다.

차르 치하의 시베리아 유형에서 지멘스-슈케르트 러시아 총책임자로, 다시 소비에트 국가의 초대 대외무역인민위원으로, 크라신의 궤적은 볼셰비키 안에서도 독보적이었다. 1905년 혁명기에는 전투기술단을 지휘하며 무기 조달·자금책을 맡았고 바쿠 지하 인쇄소 '니나'로 《이스크라》를 찍어냈다. 1909년 정계에서 물러나 기술자로 복귀, 지멘스의 러시아 총대표까지 올랐다가 1918년 레닌의 부름으로 귀환했다. 대외무역 독점 체제와 1921년 영소통상협정을 주도한 서구 비즈니스계 유일의 고위 볼셰비키로, 레닌은 그를 당내 가장 유능한 실무 조직가로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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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07RSDLP 중앙위원회 위원
  • 1905RSDLP 중앙위원회 전투기술단 책임자
  • 1913–1917지멘스-슈케르트 러시아 총대표
  • 1918–1920RSFSR 통상산업인민위원
  • 1919–1920RSFSR 교통인민위원
  • 1920–1925소련 대외무역인민위원
  • 1921–1923RSFSR·소련 전권대표 (영국)
  • 1924–1926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위원

이반 이바노비치 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

Иван Иванович Скворц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0–1928 ○ 장티푸스

『자본』을 러시아어로 옮기고 최초의 재무인민위원을 지낸 볼셰비키 지식인

「수동적으로 굶주리고 말없이 죽어가는 농촌 — 아니다, 이것은 사회 발전을 움직일 수 있는 지렛대가 아니다」 — 1919년 회고록에서 1891–1892년 기근이 자신의 세대에 끼친 영향을 회고하며

1898년 입당한 초기 볼셰비키. 마르크스 『자본』의 러시아어 번역을 주도했으며, 레닌이 최고의 번역으로 꼽은 판본을 남겼다. 1917년 10월 소비에트 정부의 초대 재무인민위원에 임명되었고, 이후 『이즈베스티야』와 『레닌그라드스카야 프라우다』 편집장, 레닌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1920년대 소비에트 철학 논쟁에서 '기계론자' 진영을 이끌었고, 야로슬랍스키와 함께 전투적 무신론 운동의 주요 이론가로 활동했다. 1925년부터 사망까지 중앙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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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차르 암살 준비 혐의로 체포, 툴라 유배 중 사회민주주의자로 전향
  • 1901모스크바 사회민주당 위원회 조직 시도 중 체포, 시베리아 아친스크 유배
  • 1907–1909보그다노프·바자로프와 함께 마르크스 『자본』 러시아어 번역 출간
  • 1917.10RSFSR 초대 재무인민위원 임명 (취임하지 않음);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20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참전, 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 위원
  • 1925–1928『이즈베스티야』 편집장, 이후 『프라우다』 부편집장 겸 레닌 연구소 소장
  • 1926–1928『레닌그라드스카야 프라우다』 편집장; 철학 논쟁에서 기계론자 진영 지도

다비트 보리소비치 랴자노프

Давид Борисович Рязано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0–1938 ✕ 처형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의 창설자, 이견을 멈추지 않은 당내 독립적 마르크스주의자

「코바, 그만둬, 창피한 꼴 당하지 말게. 이론이 자네 분야가 아니란 건 모두 알고 있네.」 — 당 회의에서 스탈린에게 던진 말.

오데사 출신의 유대계 러시아인 마르크스주의자로, 17세부터 혁명운동에 투신했다. 1921년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ИМЭ)를 창설하여 세계 최고의 마르크스 문헌 컬렉션을 구축했고, 마르크스·엥겔스의 미발표 원고를 직접 발굴·편집하여 《독일 이데올로기》 제1장과 《자연변증법》을 최초로 출판했다. 소비에트 아카데미 정회원(1929)이자 당대 최고의 마르크스 학자였으나, 제헌의회 해산·브레스트 평화·당내 이견 탄압에 공개적으로 반대한 독립적 성향 때문에 1931년 체포·추방되었고, 1938년 사라토프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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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1889오데사에서 노동자 서클 조직, 초기 마르크스주의자로 활동; 첫 파리 체류, 플레하노프·라브로프와 교류
  • 1891–1899체포·18개월 구금 후 4년 강제노동형, 이후 키시뇨프 유형; 총 5년을 크레스티 교도소에서 복역
  • 1901–1905그룹 「보르바」 이끌며 RSDLP 제2차 대회 참가; 레닌의 당 중앙집권화·분파주의를 공개 비판
  • 1905–1907러시아로 귀국, 페테르부르크 최초 노동조합 조직; 제2두마 사민당 분파에서 활동
  • 1907–1917해외 망명; 독일 사민당 기록보관소 연구, 카우츠키의 학술비서; 마르크스·엥겔스 미출간 원고 다수 발굴·출판
  • 1917–1918귀국 후 메즈라욘카 합류, 볼셰비키와 통합; 제헌의회 의원 당선; 무장봉기·제헌의회 해산·언론탄압에 반대
  • 1918–1920브레스트 평화 반대로 일시 탈당 후 복당; 국가기록관리총국(글라바르히프) 국장, 과학총국장
  • 1921–1931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ИМЭ) 창설·소장; 《독일 이데올로기》 제1장(1924)·《자연변증법》(1925) 최초 출판
  • 1929소비에트 아카데미 정회원 선출(역사학, 27/30표); 적기노동훈장 수훈
  • 1931–1938멘셰비키 연계 혐의로 체포·제명·사라토프 유형; 1937년 재체포, 1938년 1월 21일 총살

표트르 아나니예비치 크라시코프

Пётр Ананьевич Краси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0–1939 ○ 병사

소련 최초의 검찰총장, 혁명적 합법성의 설계자

1922년 페트로그라드 재판에서 크라시코프는 정교회 메트로폴리탄 베니아민에게 사형을 구형하며 "혁명 앞에서 교회는 무릎 꿇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법정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1892년 제네바에서 플레하노프의 '노동해방단'에 가입하고 1903년 제2차 당대회에서 레닌·플레하노프와 함께 뷰로 위원을 지낸 볼셰비키 혁명가로, 1924년 초대 소련 검찰총장에 취임해 소비에트 사법 체계의 제도적 기초를 세웠다. 반종교 저널 《혁명과 교회》를 창간하고 1918·1924·1936년 소비에트 헌법 제정에 참여했으며, 1938년 대숙청 와중에 해임된 뒤 이듬해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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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제네바 '노동해방단' 가입
  • 1903제2차 당대회 뷰로 위원 (레닌·플레하노프와 공동)
  • 1905페테르부르크 당위원회 선동부장
  • 1917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조직 참여, 군사수사위원회 의장
  • 1918–1924법무부 인민위원
  • 1919–1924《혁명과 교회》 창간·편집장
  • 1924–1933초대 소련 검찰총장
  • 1933–1938소련 대법원 부원장

미하일 드미트리예비치 본치-브루예비치

Михаил Дмитриевич Бонч-Бруевич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0–1956 ○ 자연사

볼셰비키에 합류한 첫 제국군 장성으로 적군 창설을 지휘한 군사지도자

그는 훗날 회고했다. '나는 이성보다는 본능으로 볼셰비키에게 끌렸다. 러시아를 붕괴와 완전한 파멸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 그들에게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제국 육군 소장에서 볼셰비키로 전향한 최초의 고위 장교로, 최고군사위원회 군사지도자(1918)와 혁명군사위원회 야전참모장(1919)을 맡아 적군의 초기 조직을 지휘했다. 독일군 총공세에 레닌의 긴급 소환을 받고 페트로그라드로 달려가 나르바-프스코프 방어선을 설정했으며, 구 제국 장교들을 군사전문가로 대거 기용하는 제도를 주도했다. 전간기에는 소련 최초의 측지국을 창설했고, 스탈린 시기 두 차례 체포되었으나 살아남아 1944년 중장으로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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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1898콘스탄티노프 측량학교·모스크바 보병 사관학교 졸업,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 1898–1913키예프 군관구 등 각 참모부 근무, 『전술교본』 개정과 응용전술 강의
  • 1914–1915제176 페레볼로첸스키 연대장으로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제3군·북서전선 군수참모부장, 소장 진급
  • 1915–1916북부전선 참모장 대리, 황후의 반대로 경질
  • 1917.03–09프스코프 수비대장, 코르닐로프 반란 당시 북부전선 사령관 대리로 크라스노프 장군 체포
  • 1917.11–1918.08최고사령관 참모장 → 최고군사위원회 군사지도자, 독일군 차단 '차폐' 방어체계 구축
  • 1919.06–07혁명군사위원회 야전참모장
  • 1919–1944최고측지국 초대 국장(1919–23), 항공촬영국 조직(1925), 1931년 체포 후 석방, 사단지휘관(1937)·중장(1944) 진급

파벨 파블로비치 레베데프

Павел Павлович Лебед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2–1933 ○ 자연사

차르의 소장에서 붉은 군대 첫 참모장으로, 내전 승리의 작전 설계자

1918년 3월, 전직 차르 소장이 예이스크에서 은퇴해 있을 때 레닌의 전보가 도착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모스크바로 가 붉은 군대에 입대했다.

차르 군대 소장 출신으로 1918년 레닌의 요청으로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내전 결정적 작전들을 설계했다. 공화국 야전참모장(1919–1921)으로 콜차크, 데니킨, 유데니치, 브란겔을 상대한 모든 주요 공세를 기획했고, 1919년 10월 오룔-쿠르스크 작전으로 데니킨의 모스크바 진격을 저지했다. 1921년 붉은 군대 초대 참모장이 되어 참모 제도를 정비하고 군사아카데미 원장을 겸하며 장교 교육의 기초를 놓았다. 이후 이오나 야키르 휘하 우크라이나 군관구 참모장(1925–1928)을 지냈다. 제정 참모본부와 소비에트 군사 전문성을 이은 핵심 보옌스페츠로, 비당원이었으나 '극히 성실하고 유능한 일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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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남서부전선 작전국장, 제3군 참모장, 서부전선 병참참모장 (소장)
  • 1918–1919전러시아 총참모부 동원국장
  • 1919동부전선 참모장 겸 사령관 대행
  • 1919–1921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야전참모장
  • 1921–1924붉은 군대 참모장 (초대)
  • 1922–1924붉은 군대 군사아카데미 원장 (겸임)
  • 1925–1928우크라이나 군관구 참모장 겸 부사령관
  • 1928–1933우크라이나 군관구 부사령관

게오르기 바실리예비치 치체린

Георгий Васильевич Чичер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2–1936 ○ 자연사

혁명국가를 외교 언어로 번역한 첫 외무인민위원

「치체린은 훌륭한 일꾼, 가장 성실하고 똑똑하며 박식하다. 이런 사람은 귀히 여겨야 한다. '지휘력'이 부족한 게 흠이라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다.」 — 레닌, 1918년 7월

1872년 탐보프현 카라울 영지에서 오래된 러시아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1930년까지 13년간 소비에트 외교를 이끌었다. 1918년 3월 트로츠키의 뒤를 이어 외무인민위원 대행이 되었고 5월 30일 정식 취임했으며, 1922년 라팔로 조약으로 베르사유 체제의 봉쇄를 뚫었다. 1923년부터 소련 외무인민위원, 1930년 병으로 물러나 리트비노프에게 자리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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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30외무인민위원
  • 1898–1904제정 러시아 외무성 관리

파벨 일리치 포포프

Павел Ильич Поп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872–1950 ○ 자연사

레닌이 질책하고도 신뢰한 소비에트 통계의 설계자

1921년 8월 16일, 레닌은 포포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ЦСУ를 '비공식 필자 집단보다도 뒤처진 모범적 관료 기관'이라고 불렀다.

파벨 포포프는 소비에트 중앙통계청(ЦСУ)의 초대 청장으로서 중앙계획의 데이터 기반을 구축했다. 젬스트보 통계학자였던 그는 우파 유형지에서 레닌 및 치우루파와 인연을 맺었고, 그 연결로 1918년 국가 통계 기구의 수장이 되었다. 그의 지휘 아래 ЦСУ는 1923/24년 세계 최초로 국민경제 산업연관균형표를 편찬했다. 1921년 레닌은 ЦСУ를 '모범적 관료 기관'이라 질책했으나, 포포프는 1926년까지 자리를 지키고 고스플란 간부회의 위원으로 경제 데이터의 계획 통합을 주도했다. 1924년에야 입당한 비볼셰비키였음에도 대숙청을 넘기고 1948년까지 근무한 드문 생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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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1895우스티우다 교사, 정치 망명자들과 교류
  • 1896–1898혁명 활동으로 체포, 우파현 유형 중 통계학 입문
  • 1898–1917우파·사마라·스몰렌스크·볼로그다·하리코프·툴라 젬스트보 통계국 근무
  • 1917–1918식량성·농업인민위원부·최고경제회의 통계 부서장
  • 1918–1926ЦСУ РСФСР/소련 관리자 (인민위원급); 세계 최초 산업연관균형표 편찬 주도
  • 1922–1928고스플란 간부회의 위원
  • 1928–1929ЦСУ 소련 산하 경기연구소 소장
  • 1931–1948고스플란 РСФСР 농업부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