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푸의 교관에서 원수까지, 1976년 4인방 체포를 조직해 문화대혁명을 끝낸 군인
1976년 10월 6일, 원로 장군들을 이끌고 4인방 체포를 명령해 문화대혁명을 끝냈다.
광둥 하카 출신으로 황푸군관학교 교관을 지내고 1927년 입당해 광저우 봉기에 참여했다. 대장정에서 참모장으로 장궈타오의 분열 기도를 마오에게 알렸고, 항일전쟁기와 국공내전기 참모장·베이핑 접수 책임자였다. 1955년 원수가 되었고 문화대혁명 중 「2월 역류」로 비판받았으나 살아남아 린뱌오 사후 군을 맡았다. 마오 사후 1976년 10월 화궈펑·왕둥싱과 함께 4인방 체포를 결정·집행했고, 1978년 덩샤오핑 복권을 지지했다. 1978~1983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으로 국가원수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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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5중화인민공화국 원수
- 1975–1978국방부장
- 1978–1983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신4군과 제3야전군을 이끈 시인 원수, 저우언라이를 이은 외교부장
1936년 겨울, 부상과 병고 속에 매령에서 포위된 천이는 죽음을 각오한 시 세 수를 옷 속에 숨겨 두었다. 「이 몸은 황천으로 가 옛 부하를 모으리니, 십만 깃발로 염라대왕을 베리라.」
쓰촨 출신으로 프랑스 근공검학 뒤 입당했고 난창 봉기 잔여 부대를 주더와 함께 징강산으로 이끌었다. 대장정에 참여하지 않고 남방에서 3년 유격전을 버텼으며 1941년 완난 사변 뒤 신4군 대리군장이 되었다. 국공내전에서 화둥 야전군(제3야전군)을 지휘해 회하이 전역에 참전하고 상하이를 점령해 초대 시장이 되었다. 1955년 원수, 1958년 외교부장이 되어 반둥 노선의 아시아·아프리카 외교를 이끌었다. 문화대혁명에서 「2월 역류」로 비판받았고 1972년 암으로 사망했으며 마오가 장례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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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1958상하이 시장
- 1958–1972외교부장
제4방면군 총지휘로 장궈타오의 분열을 겪고, 1979년 국방부장으로 베트남 전쟁을 지휘한 원수
1990년 6월 결핵이 재발해 입원했고 9월 21일 89세로 사망했다. 유언은 시신 인사도 추도회도 없이, 유골을 대별산·대파산·태행산·하서회랑에 뿌리라는 것이었다. 화장한 유골은 네 곳에 나뉘어 뿌려졌다.
산시 출신 황푸 1기생으로 광저우 봉기 뒤 어위완 소비에트에서 제4방면군 총지휘가 되었고, 대장정 중 장궈타오의 남하 결정에 따르다 1936년 서로군이 하서회랑에서 궤멸하는 참패를 겪었다. 항일전쟁기 129사단 부사단장, 국공내전기 화베이 군구 부사령관으로 타이위안을 점령했다. 1955년 원수가 되었고 문화대혁명 「2월 역류」 뒤 한직에 있다가 1978년 복귀해 국방부장으로 1979년 중월전쟁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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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1–1936홍군 제4방면군 총지휘
- 1978–1981국방부장
문화대혁명의 첫 희생양이 된 베이징 시장이자 마오 사후 중국 법치의 제도적 기초를 놓은 정치인
"마오 주석도 실수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마오 주석의 위신이 에베레스트만큼 높지 않더라도 타이산만큼은 높습니다. 흙 몇 톤을 퍼내도 여전히 그만큼 높습니다" ― 1962년 7천인대회에서 마오를 공개 비판하며
1923년 산시성에서 창립 당원으로 입당해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쳐 1945년 정치국원에 올랐다. 1951년부터 15년간 베이징 시장 겸 시당위 제1서기로 수도 전역을 당의 충실한 거점으로 만들었다. 1966년 2월 5인 소조의 「2월 강요」로 문화대혁명의 학술적 봉쇄를 시도했으나, 마오쩌둥에 의해 무효화되고 '반혁명 수정주의자'로 몰려 53차례 대중투쟁을 당했다. 바로 문화대혁명의 개막이었다. 1979년 덩샤오핑에 의해 복권되어 중앙정법위원회 서기로 7개 기본 법률을 3개월 만에 통과시켰고, 제6기 전인대 상무위원장(1983~1988)으로서 개혁기 중국 법치의 제도적 기초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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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3타이위안에서 중국공산당 입당, 산시성 창립 당원
- 1929–1935베이징·톈진에서 투옥, 옥중에서도 지하활동 지속
- 1937–1941화북국 조직부장 겸 산시-차하얼-허베이 변경구 서기
- 1941–1944중앙당교 부교장, 옌안 정풍운동에서 당교 숙청 주도
- 1945정치국원 선출; 동북국 서기 파견 — 1946년 군사적 패배로 해임
- 1951–1966베이징 시장 겸 시당위 제1서기
- 19665인 소조 조장, 「2월 강요」 기초; 5월 회의에서 숙청, 문화대혁명 개막
- 1979–1988전인대 법제위 주임, 중앙정법위 서기; 제6기 전인대 상무위원장(1983–1988)
「가오강·라오수스 반당연맹」으로 건국 후 첫 고위 숙청에 걸린 화둥의 지도자
천이와 함께 화둥 당을 이끌다 1953년 중앙조직부장으로 베이징에 갔다. 1954년 가오강과 함께 숙청되고 1955년 당적이 박탈되었으며, 1975년 구금 중 사망했고 복권되지 않았다.
장시 출신으로 1941년 완난 사변 뒤 신4군 정치위원이 되었고 국공내전기 화둥국 서기로 천이와 함께 화둥을 관할했다. 건국 후 화둥 군정위원회 주석과 중앙조직부장을 맡았다. 1953년 가오강과 함께 류사오치·저우언라이를 밀어내려 했다는 이유로 1954년 「가오강·라오수스 반당연맹」으로 비판받고 1955년 체포되었다. 재판 없이 수감되었다가 1975년 옥중에서 사망했으며, 가오강과 달리 공식 복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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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1952화둥 군정위원회 주석
- 1953–1954중공 중앙 조직부장
만주에서 사실상 독자적 권력을 휘둘렀다가 마오의 함정에 걸려 죽음으로 몰락한 당내 2인자
'이 훈장은 후방의 곰보딱지 가오강에게 가야 합니다': 1953년 7월 평양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 훈장을 받으며 펑더화이가 한 말
산시성 유격 근거지에서 출발해 만주(둥베이)의 당·정·군을 총괄한 중국공산당 초기 지도자로, 1949년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이 되었다. 한국전쟁 시기 둥베이 군구 사령원으로서 중국인민지원군의 후방 기지와 보급망 전반을 책임졌으며, 펑더화이조차 '이 훈장은 곰보딱지 가오강에게 가야 한다'고 인정했을 정도로 참전의 물질적 토대를 조직했다. 1952년 국가계획위원회 주석으로 발탁되었으나, 류샤오치를 대체하려 한 권력 투쟁이 '가오-라오 반당 연맹'으로 규정되며 실각, 1954년 가택연금 중 수면제로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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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중국공산당 입당
- 1932–1935산시-간쑤 소비에트 지역 창설, 대장정 종착 기지 제공
- 1941정풍운동 지도소조 위원
- 1945–1952둥베이국 부서기(1945), 서기(1946), 둥베이 인민정부 주석(1949), 둥베이 군구 사령원 겸 정치위원
- 1949중앙인민정부 부주석
- 1950–1953둥베이 변경 방위군 사령원, 중국인민지원군 후방·보급 총책
- 1952–1954국가계획위원회 주석, 제1차 5개년 계획 주도
- 1954'가오-라오 반당 연맹'으로 실각, 8월 자살
마오의 후계자였던 군사 천재, 중국 내전을 승리로 이끈 10대 원수
대중이 자신을 '마오의 가장 훌륭한 제자'로 여긴다는 말에 린뱌오는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아무 재능이 없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마오 주석에게서 배운 것이다.'
린뱌오는 중국 공산당의 가장 뛰어난 군사지휘관 중 한 명으로, 만주에서 랴오선·핑진 전역을 지휘해 국민당 주력을 섬멸하고 인민해방군을 베이징으로 진군시켰다. 1955년 10대 원수 중 3위로 서열되었으며, 국방부장으로서 마오쩌둥의 개인숭배를 주도하고 문화대혁명을 적극 추진했다. 1966년 당의 유일한 부주석으로 마오의 공식 후계자로 지정되어 최고 권력에 근접했으나, 1970년대 초 마오와의 갈등 속에 실각했다. 1971년 9월 쿠데타 시도 실패 후 소련으로 탈출하던 중 몽골 상공에서 비행기 추락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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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5황푸군관학교 입학, 중국 공산당 입당
- 1932홍군 제1군단장
- 1937팔로군 115사단장 — 핑싱관 대첩 승리
- 1948–1949동북야전군 사령관, 랴오선·핑진 전역 승리로 베이징 입성
- 1955중화인민공화국 원수 (10대 원수 제3위)
- 1959국방부장 — 마오쩌둥 개인숭배와 인민해방군 정치화 주도
- 1966–1971당 중앙위원회 유일 부주석, 마오쩌둥의 공식 후계자
문화대혁명을 살아남은 재정 책임자, 4인방 체포에 가담하고 국가주석이 된 「팔대 원로」
중앙계획경제를 굳게 믿은 정통파 공산주의자로 시장화를 막았고, 1989년 천안문 시위에 대한 군사 진압을 열렬히 주장했다.
후베이 목수 출신으로 제4방면군의 정치위원이었고 서로군 궤멸 뒤 살아남았다. 항일전쟁기 후베이의 신4군 제5사단을 세웠고 국공내전 초기 중원 돌파를 이끌었다. 1954년부터 재정부장으로 22년간 경제 운영을 맡았으며 문화대혁명에서도 저우언라이 곁에서 살아남았다. 1976년 4인방 체포에 참여했고 화궈펑의 「양개범시」와 덩샤오핑 사이에서 천윈과 함께 계획경제 우선을 주장했다. 1983~1988년 국가주석을 지냈으며 1989년 강경 진압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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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1975재정부장
- 1983–1988중화인민공화국 주석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1979년 중월전쟁에서 쿤밍 군구를 이끌고 서부 전선을 지휘한 뒤 총참모장이 된 장군
1979년 1월 쿤밍 군구 사령관에 임명되어 중월전쟁의 윈난 방향 작전을 지휘했다. 이듬해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이 되었다.
후난 리링 출신으로 1928년 홍군에 들어가 항일전쟁과 국공내전,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지난 군구와 우한 군구를 거쳐 1979년 1월 쿤밍 군구 사령관이 되었고, 중월전쟁에서 서북부 방향의 서부 전선을 지휘했다. 쉬스유가 동부 전선을 맡았다. 1980년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이 되었고 1994년 베이징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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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공농혁명군에 입대하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 1937팔로군 제115사단 제685연대장으로 평형관 전투에 참가했다.
- 1951중국인민지원군 제19병단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 1979쿤밍 군구 사령관으로 윈난 방향의 중월전쟁 작전을 지휘했다.
- 1980–1987인민해방군 총참모장으로 재직한 뒤 중앙고문위원회 상무위원이 되었다.
상하이 무대에서 문화대혁명의 정점까지: 마오쩌둥의 아내이자 사인방의 수장으로 중국 혁명예술을 재편한 정치인
1980년 재판에서 장칭은 '나는 마오 주석의 개였다. 그가 물라고 하면 나는 물었다'고 외치며 모든 혐의를 부인했고, 법정 밖으로 끌려나가면서도 혁명 구호를 외쳤다.
중국 문화대혁명의 핵심 지도자이자 '사인방'의 수장으로, 마오쩌둥의 부인으로서 중국공산당 내 가장 강력한 여성 정치인이었다. 1930년대 상하이에서 좌익 연극·영화 배우로 활동하다 1937년 옌안으로 가 마오쩌둥과 결혼했고, 20년간 정치에서 배제된 후 1963년 경극 혁명을 계기로 공적 무대에 복귀했다. 1966년 중앙문화혁명소조 부조장에 임명되어 《해서파관》 비판으로 문화대혁명의 서막을 열었고, 8개의 혁명적 양판희를 제정해 전통 예술을 프롤레타리아 주제로 재편했으며, 1969년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마오 사후 1976년 10월 체포되어 '반혁명 범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감형되었고, 1991년 5월 병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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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중국 공산당 입당
- 1935–1937상하이 좌익 영화·연극 배우 (예명: 란핑)
- 1938마오쩌둥과 결혼, 옌안 루쉰 예술학원 연극 강사
- 1949–1951영화지도위원회 부주임
- 1966–1969중앙문화혁명소조 부조장
- 1969–1976중국공산당 정치국 위원
- 1976'사인방'과 함께 체포됨
- 1980–1991사형 선고 → 무기징역 → 의료 가석방 → 자살
마오의 경호대장, 중난하이의 8341부대로 4인방을 체포한 뒤 「양개범시」로 밀려난 인물
「끝까지 마오 주석의 충성스러운 병사」라 자처한 그는 수십 년간 마오를 경호했고, 1976년에는 8341부대로 4인방을 체포했다.
장시 출신으로 대장정 뒤 마오의 경호를 맡았고 1949년부터 중앙경위국(8341부대) 책임자로 지도부의 안전과 일상을 관리했다. 문화대혁명기 중앙판공청 주임으로 마오의 신임을 받았으며 1976년 10월 예젠잉·화궈펑과 함께 8341부대를 동원해 장칭 등 4인방을 체포했다. 1977년 당 부주석이 되었으나 화궈펑의 「양개범시」를 지지해 덩샤오핑과 대립했고, 1980년 부주석직에서 물러나 정치적으로 퇴장했다. 2015년 99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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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1977중앙경위국(8341부대) 국장
- 1977–1980중공 중앙 부주석
『해서파관』 비판문으로 문화대혁명의 문을 연 4인방의 이론가, 「몽둥이」라 불린 평론가
1931년 저장성 주지 출신. 1965년 11월 10일 『문회보』에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함」을 실어 문화대혁명의 서막을 열었고, 1976년 10월 6일 체포되어 1981년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상하이의 문예평론가로 1957년 반우파 투쟁 때 공격적 비판문으로 마오의 눈에 들었다. 장칭·장춘차오의 지시로 1965년 11월 『문회보』에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함」을 발표해 문화대혁명의 서막을 열었고, 중앙문혁소조원으로 선전을 장악했다. 1969년 정치국원이 되어 상하이 그룹의 일원으로 「린뱌오와 공자 비판」 등 운동을 이끌었다. 1976년 10월 4인방으로 체포되어 1981년 20년형을 받았고 1996년 출소 뒤 2005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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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1969중앙문화혁명소조원
- 1969–1976중공 중앙 정치국원
상하이 노동자 반란파에서 당 부주석까지 오른 「헬리콥터」, 4인방의 최연소
4인방의 최연소자. 상하이 면방직공장 보위 간부에서 1966년 11월 노동자 반란 본부를 세우고 상하이 코뮌을 조직했으며, 38세에 당 제2부주석까지 올랐다가 1976년 10월 6일 쿠데타로 체포되었다.
지린 출신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뒤 상하이 면방직공장의 보위 간부였다. 1966년 노동자 반란 조직 「공총사」를 이끌어 1967년 1월 상하이 시정부를 접수한 「1월 폭풍」의 주역이 되었고, 장춘차오·야오원위안과 함께 상하이 혁명위원회를 이끌었다. 마오가 「노동자 출신 후계자」로 발탁해 1973년 제10차 당대회에서 당 부주석이 되었으나 경험 부족으로 「헬리콥터」라 조롱받았다. 1976년 10월 4인방으로 체포되어 1981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1992년 옥중 간질환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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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1976상하이 혁명위원회 부주임
- 1973–1976중공 중앙 부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