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크류치코프에게: '내 성격을 이해하게. 단 한 명이라도 죽으면 나는 살 수 없네.'
고리키주 콤소몰 제1서기와 소련 청년단체위원회 의장(1968~1980)을 거친 후, 1990년 VTsSPS 의장·정치국원·중앙위 서기를 지내고 12월 고르바초프의 강행으로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1년 8월 GKChP의 얼굴로서 고르바초프의 '병환'을 명분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자처했으나 사흘 만에 실패하고 체포되었다. 1994년 사면 후에는 회고록 『소련을 위한 마지막 전투』를 출간하고 학계에서 여생을 보냈다.
1998년 금융위기 속에서 옐친이 그에게 총리직을 제안했지만, 마슬류코프는 거절했다. "나는 프리마코프의 제1부총리로 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소련 계획경제의 마지막 책임자였던 그는 권력 자체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택했다.
타지키스탄 레니나바드 출신의 엔지니어로, 이젭스크 방산 공장에서 출발해 소련 군수산업의 핵심 기술관료로 성장했다. 1988년 고스플란 의장과 정치국 위원(1989)을 지낸 마지막 계획경제 책임자였으며, 소련 붕괴 후에는 프리마코프 내각 제1부총리(1998~1999)로 금융위기를 수습했다. 이후 공산당 두마 의원으로 2010년 사망할 때까지 활동한, 소련 계획관료 세대와 탈소비에트 산업정치를 잇는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는 500일 프로그램을 통해 가격 형성 연구를 소련 경제의 시장 전환 구상으로 밀어붙였다.
니콜라이 페트라코프는 가격 형성과 경제적 균형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며 계획경제의 작동 원리를 연구한 소련 경제학자였다. 그는 시장 메커니즘과 가격 개혁을 탐구했고, 1990년 스타니슬라프 샤탈린과 그리고리 야블린스키의 500일 프로그램 공동 저자로 참여했다. 이 구상은 사유화와 가격 자유화, 공화국으로의 권한 이양을 통해 소련 경제를 시장으로 전환하려 했으며, 페트라코프의 연구와 정책 활동은 학술적 모델과 급박한 정치적 선택이 만나는 지점을 보여 준다. 그는 이후 시장문제연구소를 세워 시장 전환과 경제정책 연구를 이끌었다.
상세 이력 보기
1959모스크바국립대학교 경제학부 졸업
1963경제학 후보학위 취득, 산업 생산의 수익성과 가격 형성 연구
1970–1989모스크바국립대학교 경제학 교수
1972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계획경제의 가격 형성 연구
1984–1990소련 과학아카데미 회원
1990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경제 담당 보좌관, 이후 소련 대통령 경제 담당 보좌관
“나는 그저 한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단 1분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 정치국 입성 후 ‘여성 담당’이라는 낙인에 맞서
갈리나 세묘노바는 소련 역사상 정치국 정위원에 오른 네 명의 여성 중 한 명으로, 고르바초프 시기 말기 가족·여성·인구정책을 총괄한 당 중앙위 서기였다. 1981년부터 10년간 잡지 《크레스티얀카》(농촌 여성)의 편집장으로 재임하며 발행부수를 600만 부에서 2,200만 부로 끌어올렸고, 패션·가족·문화 기사로 편집 방향을 전환해 수백만 소비에트 여성의 일상 담론에 접속했다. 1990년 제28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원 겸 서기국원으로 발탁되었으며, 여성위원회 신설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한 중앙위 결정을 주도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에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몇 안 되는 당 지도부 인사였다.
「체키즘의 전통은 근절되어야 하며, 이데올로기로서 존재를 멈춰야 한다」 — 1992년 회고록 『KGB로부터의 해방』에서, 루뱐카를 해체한 마지막 의장이 남긴 선언.
건설기사 출신으로 고르바초프의 신임을 받아 소련 내무장관(1988–1990)과 마지막 KGB 의장(1991년 8월–11월)을 지냈다. 8월 쿠데타 실패 후 크류치코프의 후임으로 KGB를 맡아 외부정보·통신·국경수비대를 분리하고 기관을 해체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남은 조직을 대통령 직속의 소규모 정보기관으로 재편했다. 1991년 12월 미국 측에 모스크바 대사관 도청 장치의 설계도를 넘겨 보수 진영으로부터 '매국'이라는 맹비난을 받았다.
1994년 10월 11일 '검은 화요일', 루블화가 하루 만에 27% 폭락했다. 사흘 뒤 게라셴코의 중앙은행은 환율을 거의 원상 복구시키며 통화 투기세력을 응징했다. 동료 은행가는 "중앙은행도 이를 드러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라고 평했다.
소련 고스방크 총재와 러시아 중앙은행 총재를 각각 두 차례씩 지내며 네 번에 걸쳐 국가 주요 은행을 이끈 러시아 역사상 유일한 인물이다. 1989년 고스방크 총재로 취임해 소련 해체기의 통화 체계를 관리했고, 1992년 러시아 중앙은행 초대 총재로서 1993년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1998년 금융위기 때 다시 중앙은행 수장으로 복귀해 IMF 협상과 루블 안정화를 추진했으며, 푸틴 집권 초기까지 중앙은행을 이끌었다. 은퇴 후에는 블록 '로디나' 소속으로 국가두마 의원과 대통령 후보로도 나섰다.
소련·우크라이나·러시아 3개국 보안기관을 두루 거친 KGB 우크라이나 공화국 KGB의 마지막 의장
그는 회고록 제목처럼 소련·우크라이나·러시아 3개국 보안기관에서 근무했다. 1994년 10월 사태 관련자 사면을 막으라는 옐친의 요구를 거부하고 “러시아 장교로서 국민에게 한 맹세를 지켰다”며 사임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경력을 쌓아 우크라이나 공화국 KGB의 마지막 의장(1987–1991)을 지낸 인물이다. KGB 제5총국(이념적 방첩 및 반체제 탄압)에서 오래 근무하며 민족주의 감시와 반소 활동 단속을 전담하다가, 페레스트로이카기 우크라이나 공화국 보안기관 수장으로 발탁되었다. 소련 해체 후에는 잠시 독립 우크라이나의 국가안보국(SBU)을 이끌었고, 이후 러시아로 옮겨 보안장관과 연방방첩국(FSK) 국장을 역임하며 3개국 보안기관에서 근무한 특이한 이력을 남겼다. 러시아 보안장관 시절 1993년 10월 사태 수감자 사면 문제로 옐친 대통령과 갈등하다 사임하였으며, 회고록 『3개국의 특별기관에서』를 남겼다.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가 발족되자 스트로예프는 이를 승인하기를 거부했다 — 페레스트로이카기 정치국원 중 쿠데타에 동조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1937년 오룔 지역 집단농장의 목동으로 일을 시작해 미추린스크 원예대학을 졸업한 농업 테크노크라트다. 30년간 오룔 주 당조직에서 성장하여 1985년 주당 제1서기가 되었고, 1989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중앙위원회 농업 담당 비서로 발탁되어 1990년 정치국 위원에 올랐다. 농공복합체 개편과 식량 위기 대응 등 페레스트로이카기 농업 정책의 최고 실무 책임자로 활동했으며,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승인을 거부했다. 소련 해체 후 오룔 주지사(1993~2009)와 연방평의회 의장(1996~2001)을 지내며 탈소비에트 러시아 지역 엘리트로 재편에 성공했다.
1992년 11월 앙카라를 방문해 아느트카비르에서 아타튀르크의 묘를 참배하고 방명록에 그를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병사로 적었다.
1938년 6월 24일 나흐치반 칼라키에서 태어나 2000년 8월 22일 앙카라에서 사망한 아제르바이잔의 정치인. 바쿠 국립대학교에서 아랍어문헌학을 전공했고 1969년 역사학 후보 학위를 받았다. 1970년대부터 투르크주의자·반공산주의자로 알려졌고 1975년 1월 국가보안위원회에 체포되어 1976년 7월까지 카라다흐 채석장에서 노동했다. 1989년 인민전선의 창립자이자 의장으로 1990년 1월 국방위원회를 조직했고, 바쿠의 반아르메니아 포그롬과 '검은 1월'로 이어진 위기의 중심 인물이었다. 1992년 6월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1993년 6월 카라바흐 전선의 패배와 후세이노프의 반란 속에 축출되었고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승계했다. 1997년 바쿠로 돌아와 야당을 이끌었다.
오르스크 시당이 그를 공장에서 당 기관으로 데려가려 하자, 그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생산직 인간이라고 느꼈고 고향 공장에 남고 싶었다. 그러나 삶은 다르게 정했다." 평생 자신을 당료가 아닌 '생산자'로 여겼다.
오렌부르크 코사크 가정 출신으로 오르스크 정유공장 기계공에서 시작해 오렌부르크 가스처리공장장을 거쳐 1985년 소련 가스공업 장관에 올랐다. 장관 재임 중 CPSU 중앙위원(1986~1990)과 연방·공화국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내며 소련 후기 에너지 행정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1989년 자신의 부처를 폐지하고 세계 최대 국영 가스 독점기업이 될 '가스프롬'을 창설해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이는 계획경제 부처를 국가 독점 주식회사로 바꾼 선구적 전환이었으며 이후 러시아 경제의 근간이 되었다.
1991년 연방 존속 국민투표에서 우즈베키스탄은 잔류를 택했지만, 그는 같은 해 독립을 선언했다.
이슬람 카리모프는 소비에트 체제의 경제관료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초대 대통령으로 전환한 정치가였다. 그는 독립 직전 연방의 틀을 둘러싼 협상에 참여하면서도 우즈베키스탄의 주권과 국가적 선택권을 우선했고, 1991년 독립 뒤에는 이를 국가 건설의 중심 원리로 삼았다. 그의 통치는 산업 기반과 국가 통합을 지키려는 정책을 추진했지만, 야당과 언론을 억누르고 이슬람주의와 대중 시위를 강경하게 통제하는 권위주의로 굳어졌다. 따라서 카리모프는 탈소비에트 중앙아시아에서 주권 국가를 세운 지도자인 동시에 정치적 다원주의를 희생시킨 통치자로 기억된다.
“나는 이것이 포그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정착지들에서 도시로 통하는 모든 도로를 봉쇄하라고 명령했다. 명령은 실행됐다. 버스들은 숨가이트로 향했다.”
소련 및 아제르바이잔의 당·국가 관료로, 건설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 1983년 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1988년 2월 아르메니아에서 쫓겨난 아제르바이잔인 난민들이 버스로 바쿠에 몰려들자 시내 진입로를 봉쇄했고, 이 조치는 바쿠의 폭력적 충돌을 막았으나 버스 행렬이 숨가이트로 방향을 돌리게 만들었다. 소련 해체 후에는 독립 아제르바이잔의 첫 축구협회 회장(1992~2003)을 지내며 아제르바이잔 축구의 UEFA·FIFA 가입을 이끌었다.
“우리 언론은 지금 스탈린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 역사를 먹칠하고 있다.”
레닌그라드 출신의 화학자이자 공산당원으로, 1988년 3월 『소비에츠카야 로시야』에 「나는 원칙을 양보할 수 없다」를 발표해 페레스트로이카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스탈린을 옹호했다. 이 글은 당 중앙위원회 서기 예고르 리가초프의 지원 아래 작성되어 '반페레스트로이카 세력의 선언'으로 불렸으며, 고르바초프로 하여금 정치 개혁을 가속화하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91년 이후 전연방 볼셰비키 공산당(VKPB)을 창당해 총서기를 지내며 소련 체제의 복원을 주장했으나, 러시아 정치 무대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아야즈 무탈리보프는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의 관료에서 공화국의 마지막 공산당 지도자이자 초대 대통령으로 올라선 정치가였다. 1991년 노보오가료보 9+1 회의에서 그는 공화국의 주권을 보장하는 새로운 연방을 지지하며, 연방은 공화국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관점을 내세웠다. 자치공화국의 지위와 권한을 둘러싼 협상에도 적극 참여했지만, 카라바흐 전쟁과 국내 권력투쟁 속에서 통치 기반을 잃었다. 1992년 축출된 뒤 모스크바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2012년 귀국했고 2022년 바쿠에서 사망했다.
1989년 4월 9일, 그는 트빌리시 독립 시위의 조직자로 체포되었지만 45일 뒤 대중의 압력으로 풀려났다.
메라브 코스타바는 음악가·시인이자 그루지야의 독립과 인권을 위해 싸운 반체제 운동가였다. 그는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와 함께 지하 출판과 헬싱키 인권운동을 조직하며 소비에트 체제의 민족·종교 억압에 맞섰다. 장기간의 수감과 시베리아 유배 뒤 1987년 귀환한 그는 1988년 이후 대중적 독립운동과 트빌리시 시위를 이끌었다. 1989년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며, 그루지야는 그를 민족영웅으로 기렸다.
1988년 2월 27일 중앙텔레비전에서 그는 아스케란 충돌로 숨진 두 청년이 '아제르바이잔인'이라 밝혔고, 그날 밤 숨가이트 포그롬이 터졌다.
벨로루시 출신의 소련 군사법률가로, 1987년 소련 부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우즈베키스탄 등 주요 부패사건 수사를 지휘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역사에 남은 것은 1988년 2월 27일 중앙텔레비전 방송에서 아스케란 인근 충돌로 사망한 두 아제르바이잔인 청년의 이름과 국적을 거론한 순간이다: 이 발표는 몇 시간 뒤 숨가이트 포그롬의 직접적 방아쇠가 되었다. 1989년부터 주임군사검사로 재임하며 판필로프 28영웅 신화의 허구성을 폭로했으나, 8월 쿠데타 이후 강제 퇴진당했다.
유리 프로코피예프는 모스크바의 당·행정 조직에서 성장한 소비에트 당 간부였다. 그는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로서 개혁과 당의 해체가 충돌한 마지막 시기를 관리했고, 1990년 정치국에 들어갔다. 1991년 국가비상사태위원회 활동에 관여했지만 위원은 아니었으며, 소련과 공산당의 금지 뒤에는 회고록과 기술 기업 활동으로 전환했다.
파티아슈빌리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고르바초프가 전화로 말했다. '즉시 광장을 비워야 한다. 군대가 처리할 것이다.' 나는 그가 작전을 알고 지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셰바르드나제의 후임으로 1985년 그루지야 공산당 제1서기에 올랐으나, 전임자의 개혁 실험을 거의 모두 폐기하고 반대파를 지하로 몰아넣었다. 1989년 4월, 아프하스 자치 문제로 촉발된 독립 요구 시위 앞에서 모스크바에 군대 파견을 요청했고, 4월 8일 공화국 국방위원회를 소집해 시위대 강제 해산을 결정했다. 다음날 새벽 삽과 독가스로 무장한 소련군이 비무장 시민을 덮쳐 21명이 숨졌고, 그 책임을 지고 보름 만에 물러났다. 퇴진 후에도 그루지야 정치에 남아 두 차례 대선에 출마했고, 2003년 장미혁명을 지지했으나 이후 사카슈빌리를 비판했다.
“나는 평생 반대파였고 정부와 싸워 왔다. 이제 내가 정부다.” 1990년 새로 선출된 최고회의 의장이 된 뒤 가진 인터뷰에서.
그루지야의 문학자이자 반체제 운동가로, 유명 작가 콘스탄틴 감사후르디아의 아들이며 1977년 메라브 코스타바와 함께 그루지야 헬싱키 그룹을 결성해 소련의 인권 탄압을 국제사회에 고발했고 수차례 투옥되었다. 1989년 4월 독립위원회 공동 지도자로서 트빌리시에서 수만 명의 평화 시위와 단식 투쟁을 조직했고, 소련군의 유혈 진압은 그루지야 독립 여론을 결정적으로 급진화시켰다. 1990년 원탁-자유그루지야 연합을 이끌어 최초의 다당제 선거에서 압승했고 1991년 5월 87% 득표로 그루지야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취임 7개월 만에 무장 쿠데타로 축출되어 체첸으로 망명했으며 1993년 12월 서부 그루지야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소련 통신병대 총책임자이자 참모총장 차장으로 체르노빌 사고 수습에도 참가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에 맞서 보리스 옐친 편에 선 최고위 현역 장성으로, 모스크바 백악관 방어본부를 조직하고 8월 20일 러시아 연방 국방장관에 임명되었으며 24일 대장으로 진급했다. 아이러니하게도 1993년 10월 헌정위기 때는 자신이 방어했던 같은 건물을 공격하는 쪽에 섰으며, 1997년 부패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오랜 망설임 끝에 나는 '사회주의가 무엇으로 되는지' 보기로 결심했다. 몇 년 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리투아니아의 철학자이자 정치가로, 빌뉴스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문화잡지 『쿨투로스 바라이』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1973년 리투아니아 공산당에 입당했으나 페레스트로이카를 계기로 1988년 사유디스 창립에 참여했고, 독립운동의 이론가로서 200만 명 서명 운동을 주도해 주둔 소련군 철수를 요구했다. 에스토니아·라트비아 대중운동과 함께 '발트의 길'을 기획한 3국 조정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독립 후 부총리(1990~1991)로 란츠베르기스-프룬스키에네 내각의 실무를 떠받쳤다. 이후 중도연합을 창당해 세이마스 의원(1992~2000)을 지냈고, 유럽연합 가입을 주권 제약으로 간주해 끝까지 반대했다.
1991년 12월 8일, 옐친 측이 벨로베즈 숲에서 전화로 합류를 권했지만 그는 비행기를 돌리지 않았다. 여드레 뒤, 그의 카자흐스탄은 소련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독립을 선언한 공화국이 되었고, 소련의 공식 사망 선고문(알마아타 의정서)은 그의 수도에서 서명되었다.
제철소 용광로 노동자에서 출발해 카자흐스탄 총리와 당 제1서기를 거쳐 1990년 카자흐스탄 대통령이 된 인물로, 노보오가료보 협상에서 신연방조약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였다. 1991년 12월 벨로베즈 협정에 불참했고, 카자흐스탄은 소련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독립을 선언한 공화국이 되었다. 이후 30년 가까이 집권하며 핵무기 포기와 수도 이전, 다방면 실용 외교로 신생국의 기틀을 놓았지만, 권위주의 통치와 개인숭배, 세습적 부패의 비판도 함께 남겼다. 2019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실권을 쥐다 2022년 1월 소요 사태로 완전히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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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69카라간다 금속 콤비나트 노동자 (용광로, 주조기, 배합원, 가스 담당 등). 1962년 공산당 입당. 1967년 카라간다 금속 콤비나트 부설 고등기술학교 졸업.
1969–1973테미르타우 시 당·콤소몰 기관에서 활동.
1973–1978카라간다 금속 콤비나트 당위원회 서기 — 3만 명 규모 사업장의 사실상 2인자.
1978–1979카라간다 주 당위원회 서기, 이후 제2서기.
1979–1984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산업·운수·통신 담당).
1984–1989카자흐 SSR 각료회의 의장 (총리). 44세에 소련 최연소 공화국 정부 수반.
1989–1991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1990년 카자흐 SSR 대통령 겸임. 1990–199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1990–2019카자흐스탄 대통령 (1990년 4월 카자흐 SSR 대통령, 1991년 12월 독립 후 초대 대통령). 1991, 1999, 2005, 2011, 2015년 재선. 2019년 3월 사임.
1988년 10월 라흐바린네 창립대회에서 사회학자 라우리스틴은 사비사르와 함께 연단에 서서 독립운동의 지적 초석을 놓았다.
마리우 라우리스틴은 에스토니아 공산당 고위 간부의 딸로 탈린에서 태어나 타르투 대학에서 언론학과 사회학을 전공했다. 1980년 「40인 서한」에 서명하여 에스토니아의 언어와 문화를 질식시키는 러시아화 정책에 공개 저항했고, 이 경험은 지식인으로서의 정치적 진로를 결정지었다. 1988년 에드가 사비사르와 함께 라흐바린네를 공동 창립하고 그 창립대회를 조직했으며, 라흐바린네의 지적 리더십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독립 회복 후에는 초대 사회부 장관을 지냈고, 타르투 대학 교수로서 탈사회주의 전환의 사회학을 연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