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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나디 이바노비치 야나예프

Геннадий Иванович Яна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7–2010 ↓ 체포 · 사면 1994

소련의 유일한 부통령, 8월 쿠데타의 얼굴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크류치코프에게: '내 성격을 이해하게. 단 한 명이라도 죽으면 나는 살 수 없네.'

고리키주 콤소몰 제1서기와 소련 청년단체위원회 의장(1968~1980)을 거친 후, 1990년 VTsSPS 의장·정치국원·중앙위 서기를 지내고 12월 고르바초프의 강행으로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1년 8월 GKChP의 얼굴로서 고르바초프의 '병환'을 명분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자처했으나 사흘 만에 실패하고 체포되었다. 1994년 사면 후에는 회고록 『소련을 위한 마지막 전투』를 출간하고 학계에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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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3고리키주 기계화농업대장 → 셀호즈테흐니카 지부장
  • 1966–1968고리키주 콤소몰 제1서기
  • 1968–1980소련 청년단체위원회 의장
  • 1986–1990VTsSPS 서기 → 부의장 → 의장
  • 1990.07–1991.01정치국원 겸 중앙위 서기
  • 1990.12–1991.09소련 부통령
  • 1991.08.19–21GKChP 수장 · 대통령 권한대행

유리 드미트리예비치 마슬류코프

Юрий Дмитриевич Маслю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타지키스탄 1937–2010 ↓ 해임 1991 · 병사

소련 말기의 마지막 고스플란 세대

1998년 금융위기 속에서 옐친이 그에게 총리직을 제안했지만, 마슬류코프는 거절했다. "나는 프리마코프의 제1부총리로 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소련 계획경제의 마지막 책임자였던 그는 권력 자체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택했다.

타지키스탄 레니나바드 출신의 엔지니어로, 이젭스크 방산 공장에서 출발해 소련 군수산업의 핵심 기술관료로 성장했다. 1988년 고스플란 의장과 정치국 위원(1989)을 지낸 마지막 계획경제 책임자였으며, 소련 붕괴 후에는 프리마코프 내각 제1부총리(1998~1999)로 금융위기를 수습했다. 이후 공산당 두마 의원으로 2010년 사망할 때까지 활동한, 소련 계획관료 세대와 탈소비에트 산업정치를 잇는 독특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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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년대–1970년대방위산업과 국가계획기관에서 기술관료로 성장
  • 1980년대군수공업위원회와 계획기관에서 말기 소련 산업정책에 관여
  • 1988–1991국가계획위원회 의장, 계획경제 해체 국면을 관리
  • 1991 이후러시아 정치와 경제 관료제에서 계속 활동
  • 1998–1999러시아 정부에서 위기기 경제정책에 관여

니콜라이 야코블레비치 페트라코프

Николай Яковлевич Петрако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7–2014 ○ 자연사

가격 이론에서 시장 전환까지 나아간 경제학자

그는 500일 프로그램을 통해 가격 형성 연구를 소련 경제의 시장 전환 구상으로 밀어붙였다.

니콜라이 페트라코프는 가격 형성과 경제적 균형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며 계획경제의 작동 원리를 연구한 소련 경제학자였다. 그는 시장 메커니즘과 가격 개혁을 탐구했고, 1990년 스타니슬라프 샤탈린과 그리고리 야블린스키의 500일 프로그램 공동 저자로 참여했다. 이 구상은 사유화와 가격 자유화, 공화국으로의 권한 이양을 통해 소련 경제를 시장으로 전환하려 했으며, 페트라코프의 연구와 정책 활동은 학술적 모델과 급박한 정치적 선택이 만나는 지점을 보여 준다. 그는 이후 시장문제연구소를 세워 시장 전환과 경제정책 연구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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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모스크바국립대학교 경제학부 졸업
  • 1963경제학 후보학위 취득, 산업 생산의 수익성과 가격 형성 연구
  • 1970–1989모스크바국립대학교 경제학 교수
  • 1972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계획경제의 가격 형성 연구
  • 1984–1990소련 과학아카데미 회원
  • 1990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경제 담당 보좌관, 이후 소련 대통령 경제 담당 보좌관
  • 1990샤탈린-야블린스키 500일 프로그램 공동 저자
  • 1990–2014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시장문제연구소 설립자 겸 초대 원장

갈리나 블라디미로브나 세묘노바

Галина Владимировна Семёнова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7–2017 ○ 자연사

페레스트로이카기의 여성·가족 정책 설계자, 정치국 네 번째 여성

“나는 그저 한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단 1분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 정치국 입성 후 ‘여성 담당’이라는 낙인에 맞서

갈리나 세묘노바는 소련 역사상 정치국 정위원에 오른 네 명의 여성 중 한 명으로, 고르바초프 시기 말기 가족·여성·인구정책을 총괄한 당 중앙위 서기였다. 1981년부터 10년간 잡지 《크레스티얀카》(농촌 여성)의 편집장으로 재임하며 발행부수를 600만 부에서 2,200만 부로 끌어올렸고, 패션·가족·문화 기사로 편집 방향을 전환해 수백만 소비에트 여성의 일상 담론에 접속했다. 1990년 제28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원 겸 서기국원으로 발탁되었으며, 여성위원회 신설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한 중앙위 결정을 주도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에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몇 안 되는 당 지도부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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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오데사 지역신문 《콤소몰스코예 플레먀》 문예부원
  • 1963우크라이나 콤소몰 중앙위 기관지 《콤소몰스카야 이스크라》 부장
  • 1965–1974콤소몰 중앙위 기관지 《콤소몰스카야 지즌》 문예부원 → 부장 → 책임비서
  • 1974–1981《콤소몰스카야 지즌》 편집장
  • 1978–1981CPSU 중앙위 부설 사회과학 아카데미(AON) 대학원생
  • 1981–1990《크레스티얀카》(농촌 여성) 편집장
  • 1990–1991CPSU 중앙위 서기 · 정치국 위원
  • 1991소련 대통령 비서실 고문

바딤 빅토로비치 바카틴

Вадим Викторович Бакат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7–2022 ○ 자연사

KGB를 해체하도록 임명된 마지막 의장

「체키즘의 전통은 근절되어야 하며, 이데올로기로서 존재를 멈춰야 한다」 — 1992년 회고록 『KGB로부터의 해방』에서, 루뱐카를 해체한 마지막 의장이 남긴 선언.

건설기사 출신으로 고르바초프의 신임을 받아 소련 내무장관(1988–1990)과 마지막 KGB 의장(1991년 8월–11월)을 지냈다. 8월 쿠데타 실패 후 크류치코프의 후임으로 KGB를 맡아 외부정보·통신·국경수비대를 분리하고 기관을 해체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남은 조직을 대통령 직속의 소규모 정보기관으로 재편했다. 1991년 12월 미국 측에 모스크바 대사관 도청 장치의 설계도를 넘겨 보수 진영으로부터 '매국'이라는 맹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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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1973케메로보 건설현장 기술자·관리자
  • 1973–1985케메로보 시·주 당 간부, CPSU 중앙위원회 감찰관
  • 1985–1987키로프 주당위 제1서기
  • 1987–1988케메로보 주당위 제1서기
  • 1988–1990소련 내무장관
  • 1991.03–08소련 대통령 직속 안전보장회의 위원
  • 1991.08–11KGB 의장 (마지막)
  • 1991.11–1992.01공화국간보안국(MSB) 국장
  • 1992–1997레포르마 재단 부총재

빅토르 블라디미로비치 게라셴코

Виктор Владимирович Геращенк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7–2022 ○ 자연사

소련 말기와 러시아 초기의 중앙은행가

1994년 10월 11일 '검은 화요일', 루블화가 하루 만에 27% 폭락했다. 사흘 뒤 게라셴코의 중앙은행은 환율을 거의 원상 복구시키며 통화 투기세력을 응징했다. 동료 은행가는 "중앙은행도 이를 드러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라고 평했다.

소련 고스방크 총재와 러시아 중앙은행 총재를 각각 두 차례씩 지내며 네 번에 걸쳐 국가 주요 은행을 이끈 러시아 역사상 유일한 인물이다. 1989년 고스방크 총재로 취임해 소련 해체기의 통화 체계를 관리했고, 1992년 러시아 중앙은행 초대 총재로서 1993년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1998년 금융위기 때 다시 중앙은행 수장으로 복귀해 IMF 협상과 루블 안정화를 추진했으며, 푸틴 집권 초기까지 중앙은행을 이끌었다. 은퇴 후에는 블록 '로디나' 소속으로 국가두마 의원과 대통령 후보로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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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년대–1970년대소련 대외은행과 국제금융 부문에서 성장
  • 1980년대브네슈토르그방크 등 대외금융기관을 거쳐 국가은행 지도부로 진입
  • 1988–1991국가은행 총재, 말기 소련 통화체계와 공화국 금융분열을 관리
  • 1991 이후러시아 중앙은행에서 전환기 금융위기를 다룸
  • 1998 이후러시아 금융위기 뒤 다시 중앙은행 수장으로 복귀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골루시코

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Голушк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37–2025 ○ 자연사

소련·우크라이나·러시아 3개국 보안기관을 두루 거친 KGB 우크라이나 공화국 KGB의 마지막 의장

그는 회고록 제목처럼 소련·우크라이나·러시아 3개국 보안기관에서 근무했다. 1994년 10월 사태 관련자 사면을 막으라는 옐친의 요구를 거부하고 “러시아 장교로서 국민에게 한 맹세를 지켰다”며 사임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경력을 쌓아 우크라이나 공화국 KGB의 마지막 의장(1987–1991)을 지낸 인물이다. KGB 제5총국(이념적 방첩 및 반체제 탄압)에서 오래 근무하며 민족주의 감시와 반소 활동 단속을 전담하다가, 페레스트로이카기 우크라이나 공화국 보안기관 수장으로 발탁되었다. 소련 해체 후에는 잠시 독립 우크라이나의 국가안보국(SBU)을 이끌었고, 이후 러시아로 옮겨 보안장관과 연방방첩국(FSK) 국장을 역임하며 3개국 보안기관에서 근무한 특이한 이력을 남겼다. 러시아 보안장관 시절 1993년 10월 사태 수감자 사면 문제로 옐친 대통령과 갈등하다 사임하였으며, 회고록 『3개국의 특별기관에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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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3케메로보 검찰청 수사관
  • 1963–1974케메로보주 KGB, 작전요원 → 제5과 부과장
  • 1974–1983KGB 제5총국 제2과(민족주의 담당) 과장
  • 1983–1984KGB 제5총국 부총국장
  • 1984–1987KGB 사무국 제1부국장 겸 당직근무국장
  • 1987–1991우크라이나 공화국 KGB 의장, KGB Collegium 위원
  • 1991우크라이나 국가안보국(SNBU) 의장 대행
  • 1992–1993러시아 보안부 제1차관
  • 1993러시아 보안장관
  • 1993–1994러시아 연방방첩국(FSK) 국장

예고르 세묘노비치 스트로예프

Егор Семёнович Стро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7–

고르바초프 시기 마지막 농업 정치국원, 페레스트로이카 농정의 실무 책임자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가 발족되자 스트로예프는 이를 승인하기를 거부했다 — 페레스트로이카기 정치국원 중 쿠데타에 동조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1937년 오룔 지역 집단농장의 목동으로 일을 시작해 미추린스크 원예대학을 졸업한 농업 테크노크라트다. 30년간 오룔 주 당조직에서 성장하여 1985년 주당 제1서기가 되었고, 1989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중앙위원회 농업 담당 비서로 발탁되어 1990년 정치국 위원에 올랐다. 농공복합체 개편과 식량 위기 대응 등 페레스트로이카기 농업 정책의 최고 실무 책임자로 활동했으며,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승인을 거부했다. 소련 해체 후 오룔 주지사(1993~2009)와 연방평의회 의장(1996~2001)을 지내며 탈소비에트 러시아 지역 엘리트로 재편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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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1984오룔 주당위원회 농업 담당 비서
  • 1984–1985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지도원
  • 1985–1989오룔 주당위원회 제1서기
  • 1986–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89–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비서 (농업)
  • 1990–1991소련 공산당 정치국 위원
  • 1993–2009오룔 주지사
  • 1996–2001러시아 연방평의회 의장

아불파즈 가디르굴루 오글루 엘치베이

Əbülfəz Qədirqulu oğlu Elçibəy
아제르바이잔 국가기관 반체제 인사 아제르바이잔 아제르바이잔 1938–2000 ○ 전립선암으로 사망

범투르크주의를 내건 아제르바이잔 최초의 민선 대통령

1992년 11월 앙카라를 방문해 아느트카비르에서 아타튀르크의 묘를 참배하고 방명록에 그를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병사로 적었다.

1938년 6월 24일 나흐치반 칼라키에서 태어나 2000년 8월 22일 앙카라에서 사망한 아제르바이잔의 정치인. 바쿠 국립대학교에서 아랍어문헌학을 전공했고 1969년 역사학 후보 학위를 받았다. 1970년대부터 투르크주의자·반공산주의자로 알려졌고 1975년 1월 국가보안위원회에 체포되어 1976년 7월까지 카라다흐 채석장에서 노동했다. 1989년 인민전선의 창립자이자 의장으로 1990년 1월 국방위원회를 조직했고, 바쿠의 반아르메니아 포그롬과 '검은 1월'로 이어진 위기의 중심 인물이었다. 1992년 6월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1993년 6월 카라바흐 전선의 패배와 후세이노프의 반란 속에 축출되었고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승계했다. 1997년 바쿠로 돌아와 야당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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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62바쿠 국립대학교 동양학부 아랍어문학과 입학(1957), 졸업은 1962년으로 기록됨(영어 자료의 1957년 졸업설과 충돌)
  • 1963–1964이집트에서 통역사로 근무
  • 1968–1975바쿠 국립대학교 아시아·아프리카 제국사 교원 → 1975년 1월 국가보안위원회에 체포, 1976년 7월까지 카라다흐 채석장에서 노동
  • 1976–1992아제르바이잔 과학아카데미 필사본연구소 연구원, 선임연구원·부서장 (1992년 7월 16일까지)
  • 1989–1992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 의장
  • 1990.01바쿠에서 국방위원회 조직·의장 (1990년 1월 12일)
  • 1992–1993아제르바이잔 공화국 대통령. 1992년 6월 7일 당선되어 6월 17일 취임, 1993년 8월 29일 국민투표로 자격 상실
  • 1997–2000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당 당수(야당). 1997년 10월 30일 바쿠로 복귀, 2000년 사망 때까지 재임

빅토르 스테파노비치 체르노미르딘

Виктор Степанович Черномырд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8–2010 ○ 자연사

가스공업부를 가스프롬으로 바꾼 소련 마지막 가스공업 장관

오르스크 시당이 그를 공장에서 당 기관으로 데려가려 하자, 그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생산직 인간이라고 느꼈고 고향 공장에 남고 싶었다. 그러나 삶은 다르게 정했다." 평생 자신을 당료가 아닌 '생산자'로 여겼다.

오렌부르크 코사크 가정 출신으로 오르스크 정유공장 기계공에서 시작해 오렌부르크 가스처리공장장을 거쳐 1985년 소련 가스공업 장관에 올랐다. 장관 재임 중 CPSU 중앙위원(1986~1990)과 연방·공화국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내며 소련 후기 에너지 행정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1989년 자신의 부처를 폐지하고 세계 최대 국영 가스 독점기업이 될 '가스프롬'을 창설해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이는 계획경제 부처를 국가 독점 주식회사로 바꾼 선구적 전환이었으며 이후 러시아 경제의 근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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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1973오르스크 정유공장 기계공·운전기사, 오렌부르크 가스처리공장 부주임기사·공장장
  • 1973–1982오르스크 시당·CPSU 중앙위 중공업부에서 산업 행정
  • 1982–1985소련 가스공업 차관, 튜멘가스프롬 청장
  • 1985–1989소련 가스공업 장관
  • 1989–1992국영 가스 콘체른 가스프롬 창설·초대 이사회 의장
  • 1984–1990소련 최고회의·RSFSR 최고회의 대의원, CPSU 중앙위원

이슬람 압두가니예비치 카리모프

Islom Abdugʻaniyevich Karimov

독립과 주권을 앞세운 권위주의적 국가 건설자

1991년 연방 존속 국민투표에서 우즈베키스탄은 잔류를 택했지만, 그는 같은 해 독립을 선언했다.

이슬람 카리모프는 소비에트 체제의 경제관료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초대 대통령으로 전환한 정치가였다. 그는 독립 직전 연방의 틀을 둘러싼 협상에 참여하면서도 우즈베키스탄의 주권과 국가적 선택권을 우선했고, 1991년 독립 뒤에는 이를 국가 건설의 중심 원리로 삼았다. 그의 통치는 산업 기반과 국가 통합을 지키려는 정책을 추진했지만, 야당과 언론을 억누르고 이슬람주의와 대중 시위를 강경하게 통제하는 권위주의로 굳어졌다. 따라서 카리모프는 탈소비에트 중앙아시아에서 주권 국가를 세운 지도자인 동시에 정치적 다원주의를 희생시킨 통치자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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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1966타슈켄트 기계·항공 산업체의 기계공학자
  • 1966–1983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계획위원회 경제관료
  • 1983–1986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재무장관
  • 1986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각료회의 부의장
  • 1986–1989카슈카다리야주 공산당 제1서기
  • 1989–1991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0–1991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대통령
  • 1991–2016우즈베키스탄 초대 대통령
  • 1991–1996우즈베키스탄 인민민주당 의장

푸아트 엔베르 오글루 무사예프

Fuad Ənvər oğlu Musayev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제르바이잔인 1938–2017 ○ 신부전

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 바쿠로 가는 버스를 막아 폭력을 숨가이트로 돌린 인물

“나는 이것이 포그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정착지들에서 도시로 통하는 모든 도로를 봉쇄하라고 명령했다. 명령은 실행됐다. 버스들은 숨가이트로 향했다.”

소련 및 아제르바이잔의 당·국가 관료로, 건설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 1983년 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1988년 2월 아르메니아에서 쫓겨난 아제르바이잔인 난민들이 버스로 바쿠에 몰려들자 시내 진입로를 봉쇄했고, 이 조치는 바쿠의 폭력적 충돌을 막았으나 버스 행렬이 숨가이트로 방향을 돌리게 만들었다. 소련 해체 후에는 독립 아제르바이잔의 첫 축구협회 회장(1992~2003)을 지내며 아제르바이잔 축구의 UEFA·FIFA 가입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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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5–1977아제르바이잔 SSR 농촌건설부 제1차관
  • 1977–1981아제르바이잔 SSR 국가계획위원회 제1부위원장
  • 1981아제르바이잔 SSR 각료회의 부의장
  • 1981–1983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건설 담당 서기
  • 1983–1988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89–1990소련 산업안전·광산감독 국가위원회 의장
  • 1990–1991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산업 담당 서기
  • 1992–2003아제르바이잔 축구협회 연합(AFFA) 회장

니나 알렉산드로브나 안드레예바

Нина Александровна Андреева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38–2020 ○ 자연사

「나는 원칙을 양보할 수 없다」로 페레스트로이카를 정면 공격한 레닌그라드의 화학 강사

“우리 언론은 지금 스탈린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 역사를 먹칠하고 있다.”

레닌그라드 출신의 화학자이자 공산당원으로, 1988년 3월 『소비에츠카야 로시야』에 「나는 원칙을 양보할 수 없다」를 발표해 페레스트로이카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스탈린을 옹호했다. 이 글은 당 중앙위원회 서기 예고르 리가초프의 지원 아래 작성되어 '반페레스트로이카 세력의 선언'으로 불렸으며, 고르바초프로 하여금 정치 개혁을 가속화하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91년 이후 전연방 볼셰비키 공산당(VKPB)을 창당해 총서기를 지내며 소련 체제의 복원을 주장했으나, 러시아 정치 무대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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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레닌그라드 공과대학 졸업, 화학공학자
  • 1966CPSU 입당
  • 1972–1988레닌그라드 공과대학 물리화학과 조교수·선임강사
  • 1979–1981CPSU에서 제명되었다가 당통제위원회 심사로 복권
  • 1988.03『소비에츠카야 로시야』에 「나는 원칙을 양보할 수 없다」 발표
  • 1989전연방협회 '옌딘스트보(통일)' 창립, 조정위원회 의장
  • 1991–2020전연방 볼셰비키 공산당(VKPB) 창당, 중앙위 총서기
  • 2020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

아야즈 니야지 오글루 무탈리보프

Ајаз Нијази оғлу Мүтәллиб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아제르바이잔 아제르바이잔인 1938–2022

연방 재편과 독립 사이에 선 마지막 소비에트 지도자

연방은 공화국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신연방조약을 지지했다.

아야즈 무탈리보프는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의 관료에서 공화국의 마지막 공산당 지도자이자 초대 대통령으로 올라선 정치가였다. 1991년 노보오가료보 9+1 회의에서 그는 공화국의 주권을 보장하는 새로운 연방을 지지하며, 연방은 공화국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관점을 내세웠다. 자치공화국의 지위와 권한을 둘러싼 협상에도 적극 참여했지만, 카라바흐 전쟁과 국내 권력투쟁 속에서 통치 기반을 잃었다. 1992년 축출된 뒤 모스크바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2012년 귀국했고 2022년 바쿠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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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4–1977바쿠 냉장고 공장장, 바쿠 전기생활용품 생산회사 총괄
  • 1977–1979바쿠 나리마노프구 당위원회 제2서기
  • 1979–1982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공화국 지방산업장관
  • 1982–1989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공화국 국가계획위원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
  • 1989–1990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90–1991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 1991–1992아제르바이잔 초대 대통령
  • 1992–2012축출 뒤 모스크바 망명, 2012년 귀국

메라브 이바네스 제 코스타바

მერაბ ივანეს ძე კოსტავა
반체제 인사 소련 그루지야 1939–1989 ✕ 의문의 교통사고사

독립운동과 인권 투쟁을 함께 이끈 시인

1989년 4월 9일, 그는 트빌리시 독립 시위의 조직자로 체포되었지만 45일 뒤 대중의 압력으로 풀려났다.

메라브 코스타바는 음악가·시인이자 그루지야의 독립과 인권을 위해 싸운 반체제 운동가였다. 그는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와 함께 지하 출판과 헬싱키 인권운동을 조직하며 소비에트 체제의 민족·종교 억압에 맞섰다. 장기간의 수감과 시베리아 유배 뒤 1987년 귀환한 그는 1988년 이후 대중적 독립운동과 트빌리시 시위를 이끌었다. 1989년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며, 그루지야는 그를 민족영웅으로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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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와 청년 지하조직 ‘고르가슬리아니’ 창립
  • 1956–1958반소 활동으로 첫 체포와 구금
  • 1962–1977트빌리시 음악학교 교사, 음악·문학 활동
  • 1973–1976인권수호 이니셔티브 그룹과 그루지야 헬싱키 그룹 창립
  • 1977–1987반소 선전 혐의로 수감·시베리아 유배
  • 1987–1989독립운동 지도, 1989년 4월 9일 트빌리시 시위 조직
  • 1989보리티 인근 교통사고로 사망

알렉산드르 필리포비치 카투세프

Александр Филиппович Катус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9–2000 ✕ 자살

숨가이트 포그롬의 불씨를 당긴 소련 부검찰총장

1988년 2월 27일 중앙텔레비전에서 그는 아스케란 충돌로 숨진 두 청년이 '아제르바이잔인'이라 밝혔고, 그날 밤 숨가이트 포그롬이 터졌다.

벨로루시 출신의 소련 군사법률가로, 1987년 소련 부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우즈베키스탄 등 주요 부패사건 수사를 지휘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역사에 남은 것은 1988년 2월 27일 중앙텔레비전 방송에서 아스케란 인근 충돌로 사망한 두 아제르바이잔인 청년의 이름과 국적을 거론한 순간이다: 이 발표는 몇 시간 뒤 숨가이트 포그롬의 직접적 방아쇠가 되었다. 1989년부터 주임군사검사로 재임하며 판필로프 28영웅 신화의 허구성을 폭로했으나, 8월 쿠데타 이후 강제 퇴진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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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년대드네프로제르진스크 야금학교 졸업, 드네프르 야금 콤비나트 노동자
  • 1965하리코프 법학대학 졸업
  • 1966자바이칼 군관구 수비대 검찰 수사관
  • 1970년대–1987소련 검찰청 수사관, 선임수사관, 수사부서장, 주임수사국장 역임
  • 1987–1989소련 부검찰총장
  • 1989–1991소련 주임군사검사 겸 부검찰총장
  • 19918월 쿠데타 이후 강제 퇴진

유리 아나톨리예비치 프로코피예프

Юрий Анатольевич Прокофье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계 1939–

소련 말기의 모스크바 당 조직자

그의 삶은 공산당 금지 전후로 갈라졌다고 회고되었다.

유리 프로코피예프는 모스크바의 당·행정 조직에서 성장한 소비에트 당 간부였다. 그는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로서 개혁과 당의 해체가 충돌한 마지막 시기를 관리했고, 1990년 정치국에 들어갔다. 1991년 국가비상사태위원회 활동에 관여했지만 위원은 아니었으며, 소련과 공산당의 금지 뒤에는 회고록과 기술 기업 활동으로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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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모스크바 학교 선구자단 지도원
  • 1960소련 공산당 입당
  • 1968모스크바 시당 조직·당무 부문 간부
  • 1977–1985모스크바 쿠이비셰프 구당위 서기·제1서기
  • 1986–1988모스크바 시 집행위원회 서기
  • 1988–1989모스크바 시당 서기·제2서기
  • 1989–1991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 1990–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정치국원

줌베르 일리치 파티아슈빌리

ჯუმბერ ილიას ძე პატიაშვილი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939–

트빌리시 비극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그루지야 공산당 제1서기

파티아슈빌리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고르바초프가 전화로 말했다. '즉시 광장을 비워야 한다. 군대가 처리할 것이다.' 나는 그가 작전을 알고 지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셰바르드나제의 후임으로 1985년 그루지야 공산당 제1서기에 올랐으나, 전임자의 개혁 실험을 거의 모두 폐기하고 반대파를 지하로 몰아넣었다. 1989년 4월, 아프하스 자치 문제로 촉발된 독립 요구 시위 앞에서 모스크바에 군대 파견을 요청했고, 4월 8일 공화국 국방위원회를 소집해 시위대 강제 해산을 결정했다. 다음날 새벽 삽과 독가스로 무장한 소련군이 비무장 시민을 덮쳐 21명이 숨졌고, 그 책임을 지고 보름 만에 물러났다. 퇴진 후에도 그루지야 정치에 남아 두 차례 대선에 출마했고, 2003년 장미혁명을 지지했으나 이후 사카슈빌리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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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73그루지야 콤소몰 간부, 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 1973–1974고리 지구당 제1서기
  • 1974–1985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 농업 담당 서기
  • 1985–1989.04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89–1991과학생산연합·농업연구소 소장
  • 1995그루지야 대선 출마, 셰바르드나제에 이어 2위
  • 2000그루지야 대선 출마, 셰바르드나제에 이어 2위

즈비아드 콘스탄티노비치 감사후르디아

ზვიად კონსტანტინეს ძე გამსახურდია
반체제 인사 조지아 그루지야 1939–1993 ✕ 의문의 총상 사망

반체제 인권운동가에서 그루지야의 첫 민선 대통령이 된 민족주의자

“나는 평생 반대파였고 정부와 싸워 왔다. 이제 내가 정부다.” 1990년 새로 선출된 최고회의 의장이 된 뒤 가진 인터뷰에서.

그루지야의 문학자이자 반체제 운동가로, 유명 작가 콘스탄틴 감사후르디아의 아들이며 1977년 메라브 코스타바와 함께 그루지야 헬싱키 그룹을 결성해 소련의 인권 탄압을 국제사회에 고발했고 수차례 투옥되었다. 1989년 4월 독립위원회 공동 지도자로서 트빌리시에서 수만 명의 평화 시위와 단식 투쟁을 조직했고, 소련군의 유혈 진압은 그루지야 독립 여론을 결정적으로 급진화시켰다. 1990년 원탁-자유그루지야 연합을 이끌어 최초의 다당제 선거에서 압승했고 1991년 5월 87% 득표로 그루지야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취임 7개월 만에 무장 쿠데타로 축출되어 체첸으로 망명했으며 1993년 12월 서부 그루지야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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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지하 청년 조직 '고르가슬리아니' 창립
  • 1963–1977트빌리시 국립대학 영문학 강사, 그루지야 과학아카데미 문학연구소 연구원
  • 1977–1979그루지야 헬싱키 그룹 공동 창립, 체포·수감 후 공개 '참회'로 감형
  • 1988–1990성 일리아 의인회 공동 의장, 독립위원회 공동 지도자
  • 1990–1991그루지야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
  • 1991–1992그루지야 공화국 대통령

콘스탄틴 이바노비치 코베츠

Константин Иванович Кобец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39–2012 ○ 사망

8월 쿠데타 당시 옐친 편에 선 최고위 장성, 백악관 방어를 지휘했다

"군대는 국민에게 총을 겨누지 않을 것입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기자회견)

소련 통신병대 총책임자이자 참모총장 차장으로 체르노빌 사고 수습에도 참가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에 맞서 보리스 옐친 편에 선 최고위 현역 장성으로, 모스크바 백악관 방어본부를 조직하고 8월 20일 러시아 연방 국방장관에 임명되었으며 24일 대장으로 진급했다. 아이러니하게도 1993년 10월 헌정위기 때는 자신이 방어했던 같은 건물을 공격하는 쪽에 섰으며, 1997년 부패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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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6체르노빌 원전 사고 수습 참가
  • 1987–1991소련 국방부 통신병대 총책임자 겸 참모총장 차장
  • 1990RSFSR 인민대표로 선출
  • 1991.01RSFSR 국가방위안보위원회 위원장
  • 1991.08.20RSFSR 국방장관 임명, 8월 24일 대장 진급
  • 1993–1997러시아 연방 국방차관
  • 1997부패 혐의 체포, 유죄 판결

로무알다스 오졸라스

Romualdas Ozolas

200만 서명으로 소련군 철수를 요구한 사유디스의 철학자

오랜 망설임 끝에 나는 '사회주의가 무엇으로 되는지' 보기로 결심했다. 몇 년 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리투아니아의 철학자이자 정치가로, 빌뉴스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문화잡지 『쿨투로스 바라이』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1973년 리투아니아 공산당에 입당했으나 페레스트로이카를 계기로 1988년 사유디스 창립에 참여했고, 독립운동의 이론가로서 200만 명 서명 운동을 주도해 주둔 소련군 철수를 요구했다. 에스토니아·라트비아 대중운동과 함께 '발트의 길'을 기획한 3국 조정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독립 후 부총리(1990~1991)로 란츠베르기스-프룬스키에네 내각의 실무를 떠받쳤다. 이후 중도연합을 창당해 세이마스 의원(1992~2000)을 지냈고, 유럽연합 가입을 주권 제약으로 간주해 끝까지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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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62빌뉴스대학 철학 전공
  • 1965–1968『쿨투로스 바라이』 편집자
  • 1973–1989빌뉴스대학 철학 강사
  • 1988–1990사유디스 창립 멤버·평의회 의원
  • 1989–1990소련 인민대표대회 대의원
  • 1990–1991리투아니아 공화국 부총리
  • 1992–2000세이마스(의회) 의원
  • 1993–2000리투아니아 중도연합 당수

미하일 알렉세예비치 모이세예프

Михаил Алексеевич Моисе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9–2022 ○ 자연사

마지막 소련 총참모장, 8월 쿠데타로 몰락하다

1991년 8월 22일, GKChP 쿠데타가 무너지고 야조프가 체포되자 모이세예프는 단 하루 동안 소련 국방장관 대행을 맡았다. 이튿날 그 역시 해임되었다.

소련군의 마지막 총참모장(1988~1991). 드미트리 야조프의 측근으로 극동군관구에서 빠르게 승진하여 군 2인자 자리에 올랐으며, 아프가니스탄 철수 계획을 지휘하고 미소 군축 협상에도 참여했으나, 1991년 8월 쿠데타에서 야조프를 지지했다가 실패 후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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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2군 복무, 극동전차학교 졸업
  • 1962–1972전차소대장·중대장, 독일주둔 소련군 및 카르파티아 군관구
  • 1972–1980전차연대장, 제50·27근위차량화소총사단장
  • 1982–1985극동군관구 제15군 부사령관, 이후 사령관
  • 1985–1987극동군관구 참모장·제1부사령관
  • 1987–1988극동군관구 사령관
  • 1988–1991소련군 총참모장·국방제1차관
  • 1991.08.22–23소련 국방장관 대행
  • 2011–2016국가두마 의원(통합 러시아)

누르술탄 아비슐리 나자르바예프

Нұрсұлтан Әбішұлы Назарбаев

연방을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던 카자흐스탄의 30년 통치자

1991년 12월 8일, 옐친 측이 벨로베즈 숲에서 전화로 합류를 권했지만 그는 비행기를 돌리지 않았다. 여드레 뒤, 그의 카자흐스탄은 소련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독립을 선언한 공화국이 되었고, 소련의 공식 사망 선고문(알마아타 의정서)은 그의 수도에서 서명되었다.

제철소 용광로 노동자에서 출발해 카자흐스탄 총리와 당 제1서기를 거쳐 1990년 카자흐스탄 대통령이 된 인물로, 노보오가료보 협상에서 신연방조약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였다. 1991년 12월 벨로베즈 협정에 불참했고, 카자흐스탄은 소련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독립을 선언한 공화국이 되었다. 이후 30년 가까이 집권하며 핵무기 포기와 수도 이전, 다방면 실용 외교로 신생국의 기틀을 놓았지만, 권위주의 통치와 개인숭배, 세습적 부패의 비판도 함께 남겼다. 2019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실권을 쥐다 2022년 1월 소요 사태로 완전히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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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1969카라간다 금속 콤비나트 노동자 (용광로, 주조기, 배합원, 가스 담당 등). 1962년 공산당 입당. 1967년 카라간다 금속 콤비나트 부설 고등기술학교 졸업.
  • 1969–1973테미르타우 시 당·콤소몰 기관에서 활동.
  • 1973–1978카라간다 금속 콤비나트 당위원회 서기 — 3만 명 규모 사업장의 사실상 2인자.
  • 1978–1979카라간다 주 당위원회 서기, 이후 제2서기.
  • 1979–1984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산업·운수·통신 담당).
  • 1984–1989카자흐 SSR 각료회의 의장 (총리). 44세에 소련 최연소 공화국 정부 수반.
  • 1989–1991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1990년 카자흐 SSR 대통령 겸임. 1990–199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 1990–2019카자흐스탄 대통령 (1990년 4월 카자흐 SSR 대통령, 1991년 12월 독립 후 초대 대통령). 1991, 1999, 2005, 2011, 2015년 재선. 2019년 3월 사임.

마리우 라우리스틴

Marju Lauristin

소련 체제 안에서 자라 발트 독립운동의 지적 기둥이 된 사회학자

1988년 10월 라흐바린네 창립대회에서 사회학자 라우리스틴은 사비사르와 함께 연단에 서서 독립운동의 지적 초석을 놓았다.

마리우 라우리스틴은 에스토니아 공산당 고위 간부의 딸로 탈린에서 태어나 타르투 대학에서 언론학과 사회학을 전공했다. 1980년 「40인 서한」에 서명하여 에스토니아의 언어와 문화를 질식시키는 러시아화 정책에 공개 저항했고, 이 경험은 지식인으로서의 정치적 진로를 결정지었다. 1988년 에드가 사비사르와 함께 라흐바린네를 공동 창립하고 그 창립대회를 조직했으며, 라흐바린네의 지적 리더십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독립 회복 후에는 초대 사회부 장관을 지냈고, 타르투 대학 교수로서 탈사회주의 전환의 사회학을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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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타르투 대학 졸업 (언론학·사회학)
  • 1976모스크바 대학에서 언론학 박사 학위 취득
  • 1980「40인 서한」 서명
  • 1988라흐바린네 공동 창립, 제1기 지도부
  • 1989–1990소련 인민대의원
  • 1990–1992에스토니아 최고회의 부의장; 헌법제정회의 위원
  • 1990–1995에스토니아 사회민주당 초대 의장
  • 1992–1994에스토니아 사회부 장관
  • 2003–2021타르투 대학 사회커뮤니케이션 교수
  • 2014–2017유럽의회 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