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로디온 야코블레비치 말리놉스키

Родион Яковлевич Малино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8–1967 ○ 자연사

원수이자 1957–1967년 국방장관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 그는 스스로의 판단으로 제2근위군을 멈춰 세워 200km 행군 뒤 진지에서 곧바로 만슈타인의 구원군에 맞서 싸우게 했다. 독일군의 돌파는 저지되었고, 이 결정은 코텔니코보 작전과 스탈린그라드 승리에 큰 몫을 했다.

오데사의 사생아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우크라이나 농민 출신이고 아버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열한 살에 집을 떠나 머슴과 점원으로 일하며 프랑스어를 독학했고, 1914년 열여섯도 되기 전에 나이를 속이고 입대했다. 기관총수로 복무하다 부상했고 프랑스 전선에서 싸워 프랑스 무공십자훈장을 받았다. 간첩 혐의로 총살될 뻔한 뒤 1919년 11월 적군에 들어갔다. 프룬제 군사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말리노 대령'이라는 가명으로 스페인에서 군사고문으로 일했으며, 이후 원수가 되어 스탈린그라드, 우크라이나, 발칸, 만주 전역을 지휘한 2차대전 최고의 야전사령관 중 한 사람이었다. 1957년부터 죽을 때까지 국방장관으로서 전략 핵무장을 추진하고 당의 지시에 따라 군을 대폭 축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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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9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 참전, 적군 지휘관으로 성장
  • 1942–1943스탈린그라드 반격과 남부전선 작전에서 핵심 지휘관으로 부상
  • 1944–1945우크라이나·루마니아·헝가리·만주 작전 지휘
  • 1956–1957국방부 차관 겸 육군총사령관, 1956년 11월 헝가리 봉기 진압에는 참여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음
  • 1957–1967국방장관, 핵·미사일 시대 소련군을 관리

키릴 세묘노비치 모스칼렌코

Кирилл Семёнович Москаленк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2–1985 ○ 자연사

베리야 체포를 주도하고 부하를 '인민의 적'이라 부른 원수

베리야는 1953년 6월 26일 크렘린의 각료회의와 당 간부회의 합동 회의에서 체포되었다. 흐루쇼프의 회고록은 모스칼렌코가 장교들을 이끌었다고 전하나, 다른 사료는 말렌코프의 책상 버튼 신호로 주코프의 무장 장교들이 들어왔다고 전한다.

그리시노의 우크라이나인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20년 8월 적군에 입대해 제1기병군에서 복무했다. 1941년 5월 제1대전차여단을 시작으로 제15소총군단과 제6기병군단, 이어 제38·제1전차·제1근위·제40군을 차례로 지휘했으며, 드네프르 도하로 1943년 10월 소련 영웅 칭호를 받고 같은 달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제38군을 이끌었다. 1953년 6월 자신이 모은 군인 그룹을 이끌어 베리야 체포를 수행했고, 루덴코와 함께 수사에 참여했으며 12월 특별재판부의 일원이었다. 1955년 소련 원수가 되었고 1960년부터 1962년 4월까지 전략로켓군 총사령관을 지냈다. 1978년 두 번째 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흐루쇼프는 그를 '제3의 모스칼렌코, 기회주의자'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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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2적군 제1기병군 복무, 내전 종군
  • 1939–1941핀란드 전쟁, 이후 제1대전차여단장
  • 1942–1943제1전차군·제1근위군·제40군 사령관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
  • 1943드네프르 강 도하로 소련 영웅 칭호
  • 1943–1945제38군 사령관, 키예프·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해방
  • 1953베리야 체포 주도,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55소련 원수
  • 1960–1962전략로켓군 총사령관
  • 1978두 번째 소련 영웅 칭호

니콜라이 빅토로비치 포드고르니

Николай Викторович Подгорны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3–1983 ○ 사망, 사망일 이견

브레즈네프-코시긴 집단지도부의 국가원수

1965년 바쿠에서 중공업 편향과 시베리아 가스 수출을 비판했으나, 자신이 이끌던 하리코프 당조직을 비판한 기사에 대한 반격이었고 수슬로프는 이를 '수정주의적'이라 불렀다.

폴타바현 카를로프카 태생의 우크라이나인으로, 사료는 출생을 1906년 2월 18일로 기록하지만 내전 중 나이를 세 살 올려 여권상 생년은 1903년이 되었다. 제당공업 엔지니어였던 그는 1940년 소련 식품공업 부인민위원이 되었으나 1942년 제당공장 철거를 직접 지휘했다는 허위 보고로 미코얀의 지시로 해임되었다. 1950년 하리코프 주당 제1서기, 1957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를 거쳐 1963년 중앙위 서기가 되었고 흐루쇼프 축출의 주요 조직자였다. 이듬해부터 국가원수로서 집단지도체제의 한 축을 이루었으나 1977년 정치국에서 해임되고 6월 국가원수직에서 물러났으며, 1983년 1월 사망일과 장소는 사료마다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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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77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표트르 키릴로비치 코셰보이

Пётр Кириллович Кошево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4–1976 ○ 자연사

사푼산과 쾨니히스베르크를 함락시킨 두 번의 영웅

≪적은 강하고 교활하다. 그러니 너희가 더 교활하고 더 영리해져라. 약점을 찾아내 예상치 못한 강한 일격을 가해라.≫ — 부하들을 훈련시키며.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5세에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한 소련 군사 지휘관이다. 대조국전쟁에서 티흐빈, 스탈린그라드, 크림, 동프로이센 전역을 지휘하며 사푼산 탈환과 쾨니히스베르크 함락으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시베리아·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1965년 주독 소련군 총사령관에 올랐고, 1968년 소련군 원수로 진급했다. 재임 중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진압 작전에 주독 소련군 부대를 투입했으며, 1969년 해임될 때까지 동독 주둔 소련군의 전투태세를 강화했다. 1961년부터 1971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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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붉은 군대 자원입대, 제8적기카자크기병사단에서 복무
  • 1927우크라이나 기병학교 졸업, 소대장 보임
  • 1939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제15기병사단 참모장
  • 1940제65소총병사단 사단장 (자바이칼 군관구)
  • 1941–1942티흐빈·류반 작전에서 제65소총병사단 지휘
  • 1942–1943제24근위소총병사단장으로 스탈린그라드·북카프카스 전투
  • 1943–1944제63소총병군단장 — 돈바스·멜리토폴·크림 공세, 사푼산 탈환
  • 1944첫 번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 수여 (5월 16일)
  • 1944–1945제71소총병군단장, 이후 제36근위소총병군단장 — 동프로이센 공세, 쾨니히스베르크 함락
  • 1945두 번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 수여 (4월 19일), 승리 퍼레이드에서 제3벨로루시전선 연대 지휘
  • 1946–1948제6근위군 사령관, 이후 보로실로프 고등군사아카데미 과정 수료
  • 1948–1954제5군 사령관 (극동)
  • 1954–1955제11근위군 사령관 (발트 군관구)
  • 1955–1957주독 소련군 제1부총사령관
  • 1957–1960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
  • 1960–1965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 1961–1971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65–1969주독 소련군 총사령관
  • 1968소련군 원수 진급 (4월 15일)
  • 1969–1976국방부 감찰총감 그룹에서 명예직 수행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코롤료프

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Королё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7–1966 ○ 자연사

수용소에서 우주로. 이름조차 국가기밀이었던 설계자

1961년 4월 12일, 바이코누르 발사대. 코롤료프의 무선 음성: "예비단계… 중간단계… 주단계… 발사!" 가가린: "출발이다!(Поехали!)" — 한 사람의 목소리와 다른 한 사람의 대답으로 인류 우주시대가 열렸다.

1938년 숙청에 걸려 콜리마 금광에서 건강과 이를 잃은 로켓 기술자. 살아 돌아와 스푸트니크와 가가린을 쏘아 올린 로켓을 만들었지만, 생전에 그의 이름은 기밀이었다. 노벨상 위원회의 문의에 소련은 「수석설계자」라고만 답했다. 수용소가 망가뜨린 몸은 1966년의 수술을 견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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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제트추진연구그룹(GIRD) 출신으로 로켓연구소 창설 참여
  • 1938–1940체포, 콜리마 금광
  • 1940–1944옥중 설계국(샤라시카)에서 항공기 설계
  • 1946–1957수석설계자: R-7 대륙간탄도미사일
  • 1957스푸트니크 발사
  • 1961보스토크(가가린) 발사
  • 1966수술 중 사망, 사후에야 실명 공개

보리스 예프스타피예비치 부토마

Борис Евстафьевич Бутома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계 1907–1976 ○ 자연사

19년간 소련 조선을 지휘한 핵잠수함 함대의 설계자

1959년 7월 23일, '특수장비 제작에 관한 정부 과업 수행'이라는 비밀 포고령으로 부토마는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 '특수장비'란 K-3 '레닌스키 콤소몰' — 소련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이었다.

소련의 조선 기술관료이자 당·국가 지도자로, 195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19년간 소련 조선산업을 총괄했다.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두 시대를 관통하며 국내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프로젝트 627, K-3 '레닌스키 콤소몰'), 세계 최초의 탄도미사일 잠수함(프로젝트 V611), 그리고 전략미사일 잠수함 667B형의 건조를 진두지휘하여 소련 해군을 대양함대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지휘 아래 220여 개 조선·선박기계 공장이 신설·재건되었고, 민간 부문에서도 원자력 쇄빙선과 초대형 유조선 건조가 본격화되었다. 스탈린상(1949), 사회주의노동영웅(1959), 레닌상(1974)을 수상했으며, 1966년부터 사망 시까지 CPSU 중앙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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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레닌그라드 조선연구소 졸업
  • 1936–1944블라디보스토크 달자보트 조선소에서 정비공·진수기사·수석기사 역임
  • 1944–1948젤레노돌스크 제340조선소 수석기사, 이후 소장
  • 1948–1952소련 조선공업부 본부장
  • 1952–1953소련 조선공업부 차관
  • 1954–1957소련 조선공업부 차관
  • 1957–1965소련 각료회의 국가조선위원회 의장
  • 1965–1976소련 조선공업부 장관

로만 안드레예비치 루덴코

Роман Андреевич Руденк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7–1981 ○ 자연사

뉘른베르크의 소련 수석검사, 소련 검찰을 28년간 이끈 최장수 검찰총장

1946년 2월 8일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루덴코는 나치 지도부를 향해 그들이 '식인종의 도덕과 강도의 탐욕'을 독일 민족에게 주입했다고 규탄하며 소련 검찰의 개시 진술을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코사크 가문 출신으로 1926년 입당, 1944년 우크라이나 검사장이 되었다. 1945~1946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소련 수석검사로 괴링을 신문하며 나치 전쟁범죄의 실체를 법정에 세웠다. 1953년부터 사망 시까지 28년간 소련 검찰총장으로 재임하며 베리야 재판을 주도하고 정치범 재활위원회를 이끌어 흐루쇼프 해빙기의 사법 복권을 추진했다. 브레즈네프 시기에는 안드로포프와 함께 반체제 인사에 대한 '예방적 경고' 제도를 도입하고 1979년 소련 검찰법 제정으로 검찰 제도의 법적 기반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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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체르니고프 지역 검찰청 수사관
  • 1937–1938도네츠크 주 검사
  • 1938–1940스탈리노 주 검사
  • 1942–1944우크라이나 SSR 부검사장
  • 1944–1953우크라이나 SSR 검사장
  • 1945–1946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소련 수석검사
  • 1953–1981소련 검찰총장
  • 1961–1981CPSU 중앙위원회 위원

페트로 그리고리예비치 그리고렌코

Пётр Григорьевич Григоренко
소련 국가기관 반체제 인사 소련 우크라이나 1907–1987 ○ 뇌졸중

소련 장성에서 인권·민족 권리 옹호로 전향한 반체제 인사

"지하에서는 쥐밖에 만날 수 없다" — 반체제 활동은 공개적으로 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을 담아 회고록 제목이 된 말.

소련군 소장(1959) 출신의 반체제 인사로, 크림 타타르인의 귀환 권리 투쟁을 이끌고 모스크바·우크라이나 헬싱키 그룹 창립에 모두 참여한 인권운동가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공개 규탄하고 두 차례 정치적 정신병원에 강제 수감(1964–65, 1969–74)되면서 소련의 정신의학 정치적 남용을 상징하는 사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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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1929콤소몰 간부 · 우크라이나 콤소몰 중앙위원
  • 1934–1939군사공학 아카데미 및 참모 아카데미 우등 졸업
  • 1939–1943할힌골 전투 · 극동전선 참모 · 여단장
  • 1943–1945독소전: 제10근위군 부참모장 · 제8소총사단 참모장 (부상)
  • 1945–1961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수 · 군사사이버네틱스 학과장 (1959 소장 진급)
  • 1961–1964정치 연설로 해임 · 극동 좌천 · '레닌주의 부활 동맹' 결성
  • 1964–1974정치적 정신병원 강제 수감 (1964–65, 1969–74)
  • 1976–1977모스크바 헬싱키 그룹 · 우크라이나 헬싱키 그룹 창립 멤버

게오르기 카르포비치 치뇨프

Георгий Карпович Цинё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7–1996 ○ 자연사

브레즈네프가 KGB 안에 심은 또 하나의 눈

장군은 배신하지 않는다 — 20년 뒤 체포된 CIA 이중간첩 폴랴코프에 대한 첫 경고가 왔을 때 치뇨프가 한 말이다.

브레즈네프가 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당 시절부터 신임한 야금 기술자 출신 KGB 간부로, 부의장 자리에서 15년간 안드로포프 의장의 움직임을 총비서에게 직접 보고한 'KGB 안의 브레즈네프의 눈'이었다. 육군대장·사회주의노동영웅까지 올랐으나 음모와 전횡으로 동료들의 평판은 나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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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39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야금 공장 노동자 · 기술자
  • 1939–1941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당 간부 (브레즈네프 아래서 근무)
  • 1941–1945군 정치위원: 칼리닌 전선 폴리트국 부국장 → 제57군 폴리트부장
  • 1945–1951소련 측 오스트리아 연합국위원회 보좌관 · 부최고위원
  • 1953–1958주독 소련군 특별부장 (MVD/KGB)
  • 1966–1967KGB 제3국장 (군 방첩)
  • 1967–1970KGB 제2총국장 (방첩)
  • 1970–1982KGB 부의장 (군 방첩·수사부서 총괄)
  • 1982–1985KGB 제1부의장
  • 1985–1992국방부 총감찰관단 감찰관

알렉세이 일라리오노비치 키리첸코

Алексей Илларионович Кириченко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8–1975 ↓ 실각 1960

흐루쇼프 초의 당 임명 담당 서기

1957년 6월 반당 그룹과의 대결에서 키리첸코는 논거를 고르는 수고도 없이 모든 비난을 거칠게 쳐내며 흐루쇼프 편에 섰다. 흐루쇼프 없이는 자신에게도 미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당 역사상 첫 우크라이나인 제1서기로, 1957년 반당 그룹에 맞서 흐루쇼프를 결사적으로 지지하며 모스크바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었다. 1958년 사실상 당 제2서기로서 서기국을 주재하고 인사권을 장악했으나, 거친 성격과 독자적 행보로 동료들의 반감을 사고 흐루쇼프의 신임마저 잃었다. 1960년 실각 후 공장장으로 전락했다가 연금 생활자로 완전히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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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57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
  • 1957–1960중앙위 서기, 당 임명 업무
  • 1960흐루쇼프 체제 내부에서 실각

아르히프 미하일로비치 률카

Архип Михайлович Люлька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8–1984 ○ 폐암

독일 엔진을 베끼지 않고 소련 제트추진 시대를 연 설계자

"많은 사람들은 '무언가'로 들어간 제트 기류가 '무언가'에서 나와 어떻게 비행기를 움직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 1930년대 후반, 률카가 최초의 터보제트 엔진 구상을 처음 설명했을 때 마주한 반응.

우크라이나 태생의 소련 항공엔진 설계자. 1941년 세계 최초의 터보팬 엔진 설계 특허를 출원했고, 독일 포획 장비를 모방하기를 거부하며 독자적인 연구로 1947년 소련 최초의 터보제트 엔진 TR-1을 완성했다. OKB-165(후일 NPO 사투른)의 총설계자로서 AL-7, AL-21, AL-31F 등 AL 시리즈 엔진을 개발하여 수호이·미그·투폴레프 전투기 세대를 추진했으며, AL-31F는 오늘날까지 Su-27 계열의 심장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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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키예프 공과대학 졸업, 하리코프 터보발전기 공장
  • 1933–1939하리코프 항공연구소 강사, 가스터빈 연구
  • 1939–1941키로프 공장 SKB-1, RD-1 설계, 세계 최초 터보팬 특허
  • 1941–1943첼랴빈스크 전차공장 디젤 엔지니어
  • 1946–1957OKB-165 수석설계자; TR-1 소련 최초 터보제트 국가시험 통과 (1947)
  • 1957–1981OKB-165 총설계자; AL-7, AL-21, AL-31F 엔진 시리즈
  • 1968–198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가스터빈 위원회 의장

발렌틴 페트로비치 글루시코

Валентин Петрович Глушк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8–1989 ○ 자연사

R-7을 하늘로 올린 소련 액체로켓엔진의 창시자

1924년 3월, 열다섯 살 글루시코가 치올콥스키에게 보낸 첫 편지: "행성 간 통신은 제 이상이자 평생의 목표입니다. 이 위대한 일에 인생을 바치겠습니다."

오데사 출신으로 열여섯 살에 치올콥스키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주비행 책을 썼다. 1929년 GDL에서 세계 최초의 전기열로켓을 시험한 후 소련 액체로켓엔진의 기초를 세웠다. 1938년 체포되어 8년형을 받고 샤라시카에서 설계를 이어갔으며, 1944년 석방·복권되었다. OKB-456(현 에네르고마시) 수석설계자로서 R-7의 RD-107/108 엔진을 개발해 스푸트니크와 가가린을 우주로 보냈다. 코롤료프 사후 1974년 NPO 에네르기야의 총괄설계자가 되어 15년간 소련 유인우주계획을 이끌었고, 세계 최강 액체로켓 RD-170과 에네르기야-부란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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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가스역학연구소(GDL) 입소, 전기열로켓·액체로켓 개발 주도
  • 1933–1938로켓연구소(RNII)에서 ORM 계열 엔진 개발
  • 1938–1944체포·8년형, 카잔 샤라시카에서 항공기용 보조로켓 RD-1 설계
  • 1946–1974OKB-456 수석설계자: R-7 계열 엔진(RD-107/108), 프로톤 엔진(RD-253) 개발
  • 1957스푸트니크 발사 성공
  • 1961보스토크(가가린) 발사 성공, 두 번째 사회주의노동영웅
  • 1974–1989NPO 에네르기야 총괄설계자, 소련 유인우주계획 총괄
  • 1988RD-170 엔진 탑재 에네르기야-부란 발사 성공

페트로 예피모비치 셸레스트

Пётр Ефимович Шелест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8–1996 ↓ 해임 1972

우크라이나 문화투자로 밀려난 공화국 제1서기

수슬로프가 "그대의 카자크는 시대착오요!"라고 외치자, 셸레스트는 "카자크가 없었다면 자네도 여기 없었을 것이네. 그들은 유목민 무리로부터 국경을 가슴으로 막아냈어." 하고 받아쳤다.

1963년부터 1972년까지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를 지내며 흐루쇼프에서 브레즈네프로 넘어가는 전환기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위기를 관통했다. 호르티차 역사보호구, 피로히우 민속건축박물관, 26권짜리 『우크라이나 도시와 마을의 역사』 등 우크라이나 문화유산 사업에 대규모 재정을 배정했다. 소비에트 연방 틀 안에서 우크라이나의 경제·문화적 이해를 대변하다가 1972년 브레즈네프 파벌에 의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혐의로 해임되었으며, 그의 몰락은 소비에트 연방제에서 공화국 자율성과 중앙 통제 사이의 긴장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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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54하르키우·첼랴빈스크·사라토프 당 간부, 키예프 항공공장장
  • 1954–1957키예프 주당위 제2서기
  • 1957–1962키예프 주당위 제1서기
  • 1963–1972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64–1973CPSU 중앙위 정치국(상무회) 위원
  • 1972–1973소비에트연방 각료회의 부의장
  • 1974–1984모스크바 교외 항공공장 설계국장

이반 그리고리예비치 파블롭스키

Иван Григорьевич Павло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9–1999 ○ 자연사

체코를 침공하고 아프가니스탄을 반대한 지상군 총사령관

1979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파블롭스키는 국방장관 우스티노프와 참모총장 오가르코프에게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단호히 반대하는 서면 보고서를 제출했고, 수개월 후 지상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됐다.

우크라이나 농촌 출신으로 농업학교를 나와 붉은 군대에 입대, 독소전쟁에서 코카서스에서 베를린까지 진군한 소총사단을 지휘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67년 지상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라 13년간 소련 지상군을 지휘했으며, 1968년에는 바르샤바조약군 통합군 사령관으로서 체코슬로바키아 침공(다뉴브 작전)을 현장 지휘했다. 1979년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귀환한 후 국방장관 우스티노프와 참모총장 오가르코프에게 소련군 파병을 단호히 반대하는 서면 보고서를 제출했고, 수개월 뒤 해임됐다. 소련 최대의 지상군을 13년간 이끈 육군대장으로서 군사개입을 공개 반대한 이력은 브레즈네프 말기 군사 엘리트 내부의 균열을 드러낸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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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328소총사단장으로 코카서스에서 베를린까지 진군, 바르샤바 해방
  • 1952–1955북카프카스 군관구 제6소총군단장
  • 1955–1958자카프카스 군관구 제7근위군 사령관
  • 1961–1963볼가 군관구 사령관
  • 1963–1967극동 군관구 사령관
  • 1967–1980소련 지상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1968년 다뉴브 작전 지휘
  • 1979아프가니스탄 사절단 파견, 소련군 파병 반대 보고서 제출
  • 1980–1992국방부 총감찰단 군사고문, 이후 퇴역

파벨 표도로비치 바티츠키

Павел Фёдорович Батиц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10–1984 ○ 자연사

소련 방공군을 건설한 원수, 베리야를 직접 처형한 사령관

베리야의 눈을 가리려던 헌병을 제지하며 바티츠키가 말했다. '왜 가리나? 보게 놔둬!'

14세에 붉은 군대에 입대해 기병·참모 장교로 성장했고, 독소전쟁에서는 254소총사단과 73·128소총군단을 지휘하며 드네프르 도하, 벨라루스 해방, 베를린·프라하 공세를 치렀다. 1953년 라브렌티 베리야의 사형 집행을 자청해 직접 방아쇠를 당겼고, 모스크바 방공군구 사령관으로서 소련 영공 방어 체계의 기초를 닦았다. 1966년 방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라 1978년까지 12년간 방공군을 전략적 우주방어 체계로 확대하고 바르샤바조약 통합방공을 총괄했으며, 임기 말 방공군 분할 결정에 반대해 스스로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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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3254소총사단장, 데먄스크 전역 방어전
  • 1943–194473소총군단장, 드네프르 도하·체르카시 해방·코르순-셰우첸콥스키 작전
  • 1944–1945128소총군단장, 벨라루스·동프로이센·베를린·프라하 공세
  • 1950–1953공군 주참모장·공군 부총사령관, 베리야 체포·처형 참여
  • 1954–1965모스크바 방공군구 사령관
  • 1965–1966소련군 참모총장 제1차장
  • 1966–1978방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바르샤바조약 통합방공군 사령관
  • 1978–1984국방부 감찰총감단

표트르 스테파노비치 네포로즈니

Пётр Степанович Непорожн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10–1999 ○ 자연사

통합에너지시스템을 만든 최장수 에너지 장관

미국 방문 중 닉슨 대통령을 만난 네포로즈니는 지역 전력망을 연결하라고 조언했다. 「미국인들은 그 충고를 받아들였고, 이제 미국의 주요 지역들은 500kV와 750kV 송전선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러시아 위키백과는 전한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수력 기술자가 된 네포로즈니는, 1962년부터 23년간 소련 에너지·전화부 장관으로 재임하며 세계 최대 규모의 수력발전소들과 원자력발전 프로그램을 총괄했다. 브라츠크, 크라스노야르스크, 사야노-슈셴스카야 등 시베리아의 거대 댐들과 볼가 강 cascade, 중앙아시아의 고압력 댐들을 동시에 추진했고, 소련 전역에 원전을 건설하는 한편 세계에서 가장 신뢰성 높은 통합에너지시스템(ЕЭС)을 구축했다. 그의 재임 기간 소련의 발전 용량은 8,200만 kW에서 3억 1,500만 kW로 거의 네 배 성장했다. 레닌상 수상자이자 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으로, 2000년 사야노-슈셴스카야 수력발전소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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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1933중앙아시아 수자원·관개 및 수력 건설 현장에서 기술자로 활동
  • 1933–1935발트 해군 복무
  • 1935–1940레닌그라드 Гидропроект, 치르치크ГЭС 건설, 중공업인민위원부 수력건설총국 근무
  • 1940–1954중앙아시아·레닌그라드·카홉카 수력발전소 건설에서 수석기술자 역임
  • 1954–1959우크라이나 SSR 부수상 겸 국가건설위원회 의장
  • 1959–1962소련 발전소건설부 제1차관
  • 1962–1985소련 에너지·전화부 장관
  • 1985–1999은퇴 후 에너지 분야 베테랑 협의회 지도

블라디미르 표도로비치 톨룹코

Владимир Фёдорович Толубк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14–1989 ○ 자연사

소련 전략로켓군을 대미 전략적 균형으로 이끈 사령관

1983년 3월 25일, 톨룹코는 중간 계급인 포병원수를 건너뛰고 대장에서 포병주력원수로 직접 진급했다. 소련 역사상 유일한 사례다.

독소전에서 전차장교로 단련되고 1972년부터 1985년까지 전략로켓군(RVSN)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으로 재임하며 MIRV 탑재 3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이동식 미사일 «피오네르»의 실전 배치를 주도하여 소련의 대미 전략적 균형을 완성한 군인이다. 1983년 대장에서 포병주력원수로 바로 진급한 유일한 사례로, 1962년 쿠바 미사일 배치 작전 「아나디리」 조직에도 핵심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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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독소전 참전, 전차여단 지휘 및 4근위기계화군단 작전과장
  • 1951–1960주동독 제19근위기계화사단장 → 제1근위전차군 → 제8근위군 사령관
  • 1960–1968전략로켓군 제1부사령관, 작전 「아나디리」(쿠바 미사일 배치) 조직 참여
  • 1968–1972시베리아·극동 군관구 사령관
  • 1972–1985전략로켓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3세대 미사일 배치 주도
  • 1983대장에서 포병주력원수로 직접 진급 (소련 역사상 유일)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랴시코

Александр Павлович Ляшк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15–2002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우크라이나 정부를 15년간 이끈 도네츠크 출신의 소비에트 경제관리자

«폭발이 중앙 당국에 보고된 것은 몇 시간 이내였지만, 사태의 전모는 이틀이 지나서야 분명해졌습니다.» — 1986년 5월 8일 키예프 기자회견에서 체르노빌 초기 대응의 정보 지연을 설명하며.

도네츠크 공업지대에서 기술자로 출발하여 당 기구를 따라 승진한 랴시코는, 1972년부터 1987년까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각료회의 의장으로서 공화국 경제를 총괄했다. 15년의 임기는 이 직책 사상 최장기 재임이었으며, 브레즈네프 안정기 전체와 페레스트로이카 출범기를 관통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직후에는 공화국 정부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사고 수습을 지휘했으며, 사고 발생 수 시간 내에 중앙에 보고했으나 전모 파악에는 이틀이 걸렸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셰르비츠키와 함께 우크라이나 당·정을 분담하며 중앙의 정책을 충실히 집행하는 제도적 안정성을 대표했고, 퇴임 후에는 4권의 회고록 《기억의 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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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하리코프 전차학교 졸업, 전차소대장으로 북캅카스 전선 참전, 이후 사마르칸트 전차학교 교관
  • 1945–1952노보크라마토르스크 기계제작공장 기술자·부공장장·당조직자
  • 1952–1954크라마토르스크 시당위 제1서기
  • 1954–1960스탈리노(도네츠크) 주당위 서기 → 제2서기
  • 1960–1963도네츠크 주당위 제1서기
  • 1963–1966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공업건설국 의장
  • 1966–1969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 1969–1972우크라이나 SSR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소련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부의장
  • 1972–1987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
  • 1986체르노빌 원전 사고 공화국 정부위원회 위원장

스테판 바실리예비치 체르보넨코

Степан Васильевич Червоненк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15–2003 ○ 자연사

중소분쟁·프라하의 봄·데탕트를 관통한 24년 임기 소련 대사

1968년 8월 21일, 지시보다 두 시간 앞서 스보보다 대통령을 찾아간 체르보넨코는 체코슬로바키아군의 무저항 전문을 이끌어냈다. 그레치코 원수의 회고: 「그 공으로 대사에게 레닌훈장을 두 개 줘야 한다고 누군가 말하더군.」

소련 외교관으로 중소 분열기 주중 대사(1959~1965), 프라하의 봄 당시 주체코슬로바키아 대사(1965~1973), 주프랑스 대사(1973~1982)를 지냈다. 1968년 8월 21일 모스크바 지시보다 두 시간 앞서 스보보다 대통령을 찾아가 체코슬로바키아군에 무저항 명령을 설득해 대규모 유혈 충돌을 막았으며, 소련 지도부는 이 공로에 「레닌훈장 두 개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1961~1989년 CPSU 중앙위원, 5개 레닌훈장 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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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1중학교 교사·교장, 키예프주·수미주
  • 1941–1944붉은군대 복무, 위대한 조국전쟁 참전
  • 1944–1949체르카시 사범대학 마르크스-레닌주의 학과장·부학장
  • 1949–1951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선전부 강사단장
  • 1951–1956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과학·고등교육 부장
  • 1956–1959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이념 담당)
  • 1959–1965주중국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65–1973주체코슬로바키아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73–1982주프랑스 소련 특명전권대사 (마다가스카르 겸임 1973~1974)
  • 1982–1988CPSU 중앙위 해외간부·출국관리 부장
  • 1989–1993소련·러시아 외무부 고문

세묜 쿠지미치 츠비군

Семён Кузьмич Цвигу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17–1982 ✕ 자살

브레즈네프가 안드로포프 옆에 심은 감시자

1982년 1월 19일, 수슬로프와의 격렬한 대면 후 다차 서재에서 권총 한 발. 당일 소집된 의사들은 심장마비로 사망진단서를 썼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 출신으로 역사 교사에서 NKVD에 입문해 몰다비아에서 브레즈네프의 신임을 얻었고, 1967년 KGB 제1부의장 겸 제5국장으로서 반체제 인사 탄압을 총괄했다. 1982년 1월 의문의 권총 사망은 수슬로프의 급서와 안드로포프의 당직 이동, 브레즈네프의 사망으로 이어지며 크렘린 권력 구도의 분수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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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9역사 교사 · 중학교 교장
  • 1939NKVD 입대
  • 1941–1945남서부·남부 전선 및 SMERSH 복무 (전선 기록 논란)
  • 1951–1953몰다비아 MGB 부장관: 브레즈네프와 인연
  • 1957–1963타지크 KGB 의장
  • 1963–1967아제르바이잔 KGB 의장
  • 1967–1982KGB 제1부의장 · 제5국장: 반체제 탄압 총괄

드미트리 스테파노비치 폴랸스키

Дмитрий Степанович Полян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17–2001 ↓ 전보 1976

농업과 정부 부문을 오간 브레즈네프 시대 관료

1973년 2월, 브레즈네프는 상임간부회에서 폴랸스키의 농업장관 전보를 통보했다. 몸을 떨며 일어선 폴랸스키가 "아무도 나와 상의하지 않았다"고 하자, 브레즈네프는 "자, 지금 상의하고 있잖나"라고 응수했다.

정치국원·제1부수상을 지내며 1964년 흐루쇼프 축출을 위한 '폴랸스키 보고서'를 작성한 소련 고위 관료. 이후 농업장관을 거쳐 일본·노르웨이 대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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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1976농업장관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 셰르비츠키

Владимир Васильевич Щербицкий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18–1990 ○ 자연사

17년간 우크라이나를 이끈 브레즈네프 시대의 공화국 건설자, 드네프르 클랜의 핵심

«도대체 어떤 바보가 페레스트로이카라는 말을 만들어냈나? 집이 무너지지도 않는데 왜 다시 지어야 하나? 우리는 잘 살고 있다!» — 고르바초프의 개혁에 대한 셰르비츠키의 반응.

드네프로제르진스크·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공업 지구에서 당 간부로 성장하여, 1972년부터 1989년까지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와 18년간 CPSU 정치국원(1971–1989)을 겸했다. 브레즈네프와 드네프르 인맥을 공유하며 17년간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진두지휘했고, 공화국 경제 규모를 4배 이상 키웠다. 흐루쇼프의 분권 실험에 반대하여 일시 좌천되었으나 브레즈네프 집권 후 복귀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정보 통제와 키예프 메이데이 행진 강행으로 비판받았으며, 1989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교체된 마지막 구세대 공화국 수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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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화학방호군 장교, 자캅카스 전선 복무, 대위 제대
  • 1946–1952드네프로제르진스크 코크스화학공장·금속공장 당비서 및 당 간부
  • 1952–1954드네프로제르진스크 시당위 제1서기
  • 1955–1957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주당위 제1서기
  • 1957–1961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 1961–1963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
  • 1965–1972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
  • 1972–1989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71–1989CPSU 중앙위 정치국 정위원 (1961–1963, 1965–1971 후보위원)

그리고리 바실리예비치 키순코

Григорий Васильевич Кисуньк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18–1998 ○ 자연사

세계 최초의 작전형 미사일 방어 체계를 설계한 소련 군사과학자

사망 몇 시간 전, 아내에게 "녀석들에게 전화해야겠어. 내가 문제를 풀었는데, 그들이 내게 맡긴 문제 말이야"라고 말했다.

소련의 전파물리학자이자 미사일 방어 체계의 개척자. S-25 베르쿠트와 S-75 대공 미사일 체계 개발에 참여한 후, 1956년부터 세계 최초의 실전형 탄도미사일 방어 체계인 시스템 A의 수석설계자를 맡아 1961년 3월 4일 사상 최초로 비행 중인 탄도미사일을 요격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모스크바 방어를 위한 A-35 및 A-35M 체계의 총설계자로서 소련의 전략적 방어 우위를 확립했으며, 레닌상과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1975년 무선공업부 지도부와의 갈등 속에 자신이 설계한 체계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해임되었고, 말년에는 은퇴 후 회고록 『비밀 구역』을 집필하며 역사 속에 묻힌 자신의 작업을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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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337독립무선대대, 모스크바 방공군 — 소대장 보좌관·소대장·중대 기술장교
  • 1944–1950부됸니 통신사관학교 — 레이더 이론 교관·부학과장
  • 1950KB-1 — 초고주파 부문장, S-25 베르쿠트 체계 유도 레이더 시험 부기술책임자
  • 1953SKB-30 / KB-1 — 특수설계국장, 대미사일 방어 주제 착수
  • 1956시스템 A 수석설계자 — 세계 최초의 실험적 탄도미사일 방어 체계
  • 1958A-35 미사일 방어 체계 총설계자
  • 1961OKB-30 (후일 OKB 빔펠) — 초대 소장 겸 총설계자
  • 1970중앙과학생산연합 빔펠 — 과학담당 부총국장
  • 1975중앙무선전자시스템연구소 — 과학담당 제1부소장 (ABM 작업에서 배제됨)
  • 1979–1987국방부 제45중앙연구소 — 과학 고문
  • 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이론문제부 — 연구실장

그리고리 표도로비치 그리고렌코

Григорий Фёдорович Григоренк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18–2007 ○ 자연사

SMERSH 라디오 게임에서 KGB 제2총국까지 40년 방첩의 설계자

그리고렌코가 직접 조직하고 수행한 SMERSH 라디오 게임은 181건에 달했다 — '자가드카(수수께끼)', '투만(안개)' 등 암호명으로 압베어와 체펠린을 교란하며 독일군 사령부에 허위 정보를 주입했다.

그리고리 그리고렌코는 소련 방첩 기관의 중추를 40년 넘게 떠받친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SMERSH에서 181건의 라디오 게임을 직접 수행하며 압베어와 체펠린을 상대로 기만 작전을 지휘했고, 이후 MGB와 KGB로 이어지는 방첩 부서에서 경력을 쌓았다. 1970년부터 1983년까지 KGB 제2총국장을 맡아 CIA와 서방 정보기관의 심층 침투 요원들을 연쇄 적발하는 체계를 구축했으며, 1978년부터는 KGB 부의장을 겸임하며 유리 안드로포프의 핵심 측근으로 활동했다. 그의 방첩 시스템은 외국 정보기관의 모스크바 거점을 수년간 마비시켰고,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 방첩의 방법론적 토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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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2NKVD 특별부 작전장교, 남서전선 및 스탈린그라드 전투 참전
  • 1943–1946SMERSH 3과 선임작전장교, 181건의 라디오 게임 수행
  • 1954–1956헝가리 주재 KGB 대표부 제1부대표
  • 1962–1969KGB 제1총국 대외방첩국장
  • 1970–1983KGB 제2총국장
  • 1978–1983KGB 부의장 (제2총국장 겸임)
  • 1983–1989소련 일반기계제작부 차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