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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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츨라프 바츨라보비치 보롭스키

Вацлав Вацлавович Воро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71–1923 ✕ 암살

혁명과 외교, 문학 사이를 오간 최초의 소비에트 외교관, 로잔에서 총탄에 쓰러지다

1923년 5월 10일 로잔 호텔 세실 식당. 저녁 식사 중 백계 장교 모리스 콘라디가 다가가 권총을 쏘았다. 콘라디는 웨이터에게 리볼버를 건네며 말했다: "나는 좋은 일을 했다 — 러시아 볼셰비키가 유럽 전체를 망쳤다… 이것은 온 세계를 이롭게 할 것이다."

보롭스키는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의 선구자이자 세계 최초의 소비에트 외교관 중 한 사람이다. 폴란드계 귀족 출신으로 1903년 볼셰비키에 합류해 'P. 오를롭스키' 등 여러 필명으로 당 기관지에 날카로운 문학비평과 정치 팸플릿을 발표했다. 1917년 말 스칸디나비아 3국 주재 외교대표로 임명되며 혁명 러시아의 첫 외교 창구를 열었고, 1921년부터 이탈리아 전권대표로 활동하며 제노바 회담에 참가했다. 1923년 로잔 회담 중 백계 망명 장교에게 암살당했으며, 범인에 대한 스위스 법정의 무죄 판결은 소련-스위스 국교 단절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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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혁명운동 참여, 학생 비밀 모임
  • 1897–1899체포, 뱟카 유형
  • 1900–1904제네바 망명, 《이스크라》 기고, 볼셰비키 합류(1903)
  • 1903오데사 잠입, 지하활동, 볼셰비키-폴란드 좌파 연락 담당
  • 1905–1906페테르부르크 볼셰비키 언론 활동, 무기 구매, 제4차 당대회 참가
  • 1915–1916페트로그라드 지멘스-슈케르트 공장 근무
  • 1917.04스톡홀름 자граничное бюро ЦК 위원 (가네츠키·라데크와 함께)
  • 1917–1919스칸디나비아 3국(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 주재 소비에트 외교대표
  • 1919–1920귀국, 국가출판사(Госиздат) 책임자
  • 1921–1923이탈리아 주재 전권대표 겸 무역대표
  • 1922제노바 회담 소비에트 대표단 참가
  • 1923.05.10로잔 회담 파견 중 백계 장교 M. 콘라디에게 암살

막심 막시모비치 리트비노프

Максим Максимович Литви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76–1951 ○ 자연사

집단안보를 외친 외교관, 1939년에 치워지다

그의 집단안보 외교를 상징하는 구호는 "평화는 분할될 수 없다"였다. 사료는 이 말이 나온 자리를 하나로 특정하지 않는다. '평화의 불가분성'을 제목으로 내세운 국제연맹 총회 연설은 1936년 7월 1일의 기록이다.

러시아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외교관. 1876년 러시아 제국 그로드노 현 비아위스토크(현 폴란드)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메이르-헤노흐 발라흐로 태어났다. 1930~1939년 외무인민위원으로 집단안보를 주창했고, 1939년 5월 스탈린이 그를 해임하고 몰로토프를 세웠다. 대숙청기에 그는 숙청과 트로츠키파 탄압을 공개 지지하고 부하린·리코프의 처벌을 심의해 추방과 재판에는 찬성하되 처형에는 반대했다. 1940년 NKVD는 그를 비밀리에 살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독소전쟁 후 복무에 나가 1941~1943년 주미 대사와 쿠바 공사를 겸했고, 외무부인민위원을 지냈다. 1951년 12월 31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해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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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9외무인민위원

얀 돔프스키

Jan Dąbski
폴란드 국가기관 폴란드 폴란드인 1880–1931 ○ 자연사

리가 평화를 설계한 농민운동 외교가

협상이 교착에 빠지자 돔프스키는 상대 수석대표 아돌프 이오페에게 일대일 비공개 교섭을 직접 제안했고, 그것이 막힌 국경 문제를 풀어 예비조약 체결로 이끌었다.

얀 돔프스키는 폴란드 농민운동에서 성장한 정치가이자 언론인으로, 독립 이후 의회 정치와 외교를 연결했다. 폴란드-소련 전쟁의 종결 국면에서 그는 폴란드 대표단을 이끌며 전쟁 수행의 성과와 동부 국경의 현실 사이에서 타협을 모색했다. 리가에서 아돌프 이오페와 비공개 교섭을 벌여 1920년 10월 12일 예비조약을 성사시켰고, 이듬해 최종 평화조약에 서명했다. 이후에도 농민정당과 의회 민주주의를 지켰지만, 리가 체제가 남긴 우크라이나·벨라루스 분할의 문제는 그의 외교가 감당해야 할 역사적 유산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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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갈리치아 폴란드 농민당 입당
  • 1907–1913빈 의회 담당 기자·『쿠리에르 르보프스키』 공동편집자
  • 1913–1918폴란드 군사·민족위원회 활동, 폴란드 군단 복무
  • 1919–1922제헌의회 의원, 농업위원회 위원
  • 1920–1921폴란드 외무차관, 민스크·리가 평화협상 대표단 수석대표
  • 1921외무부장, 비스와프 비토스 내각
  • 1923–1931농민정당 지도자, 세임 부의장
  • 1931『리가 평화』 회고록 출간, 바르샤바에서 사망

스타니스와프 스타니스와보비치 페스트콥스키

Станислав Станиславович Пестко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82–1937 ✕ 처형

폴란드 귀족에서 카자흐 초대 소비에트 지도자가 된 국제주의 혁명가

1917년 11월, 스몰니 연구소에서 멘진스키에게 런던 대학에서 금융학을 공부했다고 말하자, 멘진스키가 몸을 일으키며 「그렇다면 자네를 국가은행 관리자로 임명하겠네」라고 선언했다. 그렇게 페스트콥스키는 소비에트 국가은행의 초대 인민위원이 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영향을 받아 SDKPiL에 입당하고 1905년 혁명기에는 지도부에서 활동한 폴란드 귀족 출신 볼셰비키. 10월혁명 직후 국가은행 초대 인민위원을 지냈고, 스탈린의 민족문제인민위원부에서 부인민위원으로 일하며 소비에트 민족정책의 제도화에 참여했다. 1919년 키르기스(카자흐) 혁명위원회 초대 의장에 임명되어 사실상 카자흐스탄의 초대 소비에트 지도자가 되었으며, 이후 초대 소련 주멕시코 전권대표와 코민테른·프로핀테른 활동가로 국제혁명운동에 헌신했다. 대숙청으로 1937년 처형,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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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1906SDKPiL 입당, 1905-06년 주이사회 위원
  • 1906–19124년 강제노동형 후 이르쿠츠크 영구유형, 1912년 크라쿠프로 탈출
  • 1917.10–11중앙전신국 인민위원 → 국가은행 인민위원
  • 1917–1919민족문제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스탈린 보좌)
  • 1919–1920키르기스(카자흐) 혁명위원회 초대 의장
  • 1920–1921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서부전선 정치총국장
  • 1924–1926초대 소련 주멕시코 전권대표
  • 1926–1937MOPR 중앙위 부의장, 코민테른·프로핀테른 활동

안드레이 야누아리예비치 비신스키

Андрей Януарьевич Вышин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83–1954 ○ 자연사

모스크바 재판의 검사, 뒤에 유엔에서 강경 외교를 대변한 인물

1947년 9월 18일 유엔 총회에서 당시 외무차관에 불과했던 비신스키는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이 구호물자를 "정치적 압력의 도구"로 쓴다고 맹비난하며, 구호물자를 정치적 무기로 써서는 안 된다는 1946년 12월 유엔 총회 결의를 인용했다.

폴란드 슐라흐타(귀족) 가문 출신으로 오데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바쿠로 이주했고, 1903년 러시아사민당 멘셰비키파에 들어갔다. 1908년 바일로프 감옥 1년형을 선고받아 그곳에서 스탈린을 만났고, 1913년 키예프대학을 졸업한 뒤 1920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러시아연방 검사(1931), 부검찰총장(1933), 소련 검찰총장(1935~1939)을 지냈고 1936~1938년 세 차례 모스크바 재판 모두에서 국가검사를 맡았다. 1939년 5월부터 인민위원회 부의장, 1940~1946년에는 외무인민위원 제1부위원으로 뉘른베르크 소련 대표단을 지휘했다. 외무장관(1949~1953)과 유엔 상임대표(1953~1954)를 지낸 뒤 1954년 뉴욕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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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3외무장관

재판에서 살아남아 감옥에서 죽은 논객

"스탈린과 모세의 차이를 아십니까? 모세는 유대인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지만, 스탈린 동지는 유대인들을 정치국에서 데리고 나왔지요." —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가 정치국에서 축출된 뒤 라데크가 바자노프에게 던진 농담.

폴란드계 유대인 출신으로 국제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을 오간 저널리스트·외교가였다. 레닌의 측근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협상과 코민테른 창립에 참여했고, 볼셰비키 중앙위원·코민테른 서기를 지냈다. 날카로운 논쟁과 비꼬는 유머로 이름난 좌익 반대파 지도자였으나, 1930년 공개 자아비판으로 복당했다. 대숙청 속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중심 피고로 법정에서 연극적 자백을 펼쳐 10년형을 받았고, 1939년 옥중에서 스탈린의 지시로 살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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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3국제 공산주의·외교 활동
  • 1923–1927좌익 반대파 지도부
  • 1937–1939재판, 수감과 살해

에드바르트 라친스키

Edward Raczyński
폴란드 국가기관 폴란드 폴란드인 1891–1993 ○ 자연사

망명 속에서 폴란드의 외교적 연속성을 지킨 귀족 외교관

1943년 4월 17일, 라친스키가 이끄는 폴란드 외교부는 카틴 사건 조사를 국제적십자위원회에 요청했다.

에드바르트 라친스키는 폴란드 제2공화국의 외교관이자 런던 망명정부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전쟁 중 연합국에 독일 점령지의 유대인 대량학살을 알렸고, 1943년 카틴 학살 의혹의 국제적 조사를 요청하는 폴란드 측 외교 행동에 참여했다. 1945년 이후에도 망명정부의 정통성을 지키면서 조선의 민주 opposition movement와 연대를 모색했고, 1979년부터 1986년까지 망명 중인 폴란드 공화국 대통령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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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5베른·코펜하겐·런던의 폴란드 외교공관 근무
  • 1925–1932폴란드 외무부 국제조약 부서장
  • 1932–1934국제연맹 주재 폴란드 대사
  • 1934–1945영국 주재 폴란드 대사, 런던 망명정부 외교 대표
  • 1941–1943런던 망명정부 외무장관
  • 1954–1972망명정부 삼인평의회 위원
  • 1979–1986망명 중인 폴란드 공화국 대통령
  • 1986–1993런던 폴란드 망명 공동체의 원로

레온 야코블레비치 가이키스

Леон Яковлевич Гайкис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98–1937 ✕ 처형

스페인 주재 두 번째 소련 대사, 부임 석 달 만에 소환되어 총살당했다

콜론타이는 1927년 멕시코에서 일기에 적었다: 「간부라고는 가이키스와 나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암호를 직접 친다. 소름 끼치도록 고립되어 있다.」

1898년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유대계 폴란드인으로, 청년기에는 폴란드 사회당 좌파와 사회민주당에서 활동하다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치체린의 비서, 멕시코 주재 일등서기관, 이스탄불 총영사를 거쳐 1936년 스페인 공화국 대사관 고문으로 마드리드에 파견됐고, 1937년 2월 로젠베르크의 후임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석 달 뒤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도착 즉시 체포되었고, 1937년 8월 21일 「조국에 대한 배신」 혐의로 총살된 뒤 1955년 복권되었다. 가이키스의 처형으로 소련은 종전까지 스페인에 대사를 다시 두지 않았고, 공화국 수도에는 사실상 빈 대사관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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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9폴란드 사회당 좌파·사회민주당 활동, 적군 제11군 복무
  • 1920카자흐 군사혁명위원회(Kazrevkom) 간부
  • 1921–1924외무인민위원부 근무, 치체린 인민위원 비서
  • 1924–1928주멕시코 대사관 일등서기관 겸 대리대사
  • 1929–1933프로핀테른(적색노조인터내셔널) 근무
  • 1935–1936주이스탄불 총영사
  • 1936–1937.02주스페인 대사관 고문
  • 1937.02–06주스페인 전권대표(대사)

아담 라파츠키

Adam Rapacki
폴란드 국가기관 공산주의 폴란드 폴란드계 1909–1970 ○ 자연사

동서 긴장 속에서 협상 공간을 넓힌 외교가

1957년 10월 2일 그는 유엔 총회에서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동독·서독으로 이루어진 중부 유럽 비핵지대안을 제시했고, 이는 채택되지 못했다.

아담 라파츠키는 1909년 12월 2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렘베르크(현 리비우)에서 태어나 바르샤바에서 자랐다. 폴란드의 사회주의 정치가이자 경제학자, 외교관으로서 사회주의권의 안보 요구를 국제 협상의 언어로 번역한 인물이다. 그는 1957년 중부 유럽 비핵지대안을 제시했고, 1964년에는 유럽안보회의 소집을 제안해 헬싱키 프로세스로 이어질 의제 형성에 기여했다. 동시에 PZPR 지도부와 정부에서 활동한 공산주의 정치가였으며, 1966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검열 완화를 선호한 개혁파로 여겨졌으나, 1968년 유대계 인사 박해에 반대해 12월 외무장관직에서 해임되었고 1970년 10월 10일 바르샤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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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독립사회주의청년동맹 가입
  • 1939–1945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교육·정치 활동
  • 1947–1950폴란드 해운장관
  • 1950–1956고등교육·과학 및 고등교육 장관
  • 1956–1968폴란드 외무장관
  • 1964유럽안보회의 소집 제안
  • 19683월 사태 뒤 정치 활동에서 이탈
  • 1948–1968PZPR 정치국원(1954~56년 후보위원)
  • 1968.12유대계 인사 박해에 반대해 외무장관직에서 해임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폴란드 1928–2017 ○ 자연사

소련을 아프간 늪으로 끌어들인 카터의 국가안보보좌관

그 비밀 작전은 탁월한 발상이었다. 그것은 러시아인들을 아프간 덫으로 끌어들였다… 소련이 국경을 넘던 날 나는 카터 대통령에게 썼다: 우리는 지금 소련에게 베트남 전쟁을 선사할 기회를 가졌다.

폴란드 출신의 미국 정치학자이자 외교 전략가로, 카터 행정부(1977–1981)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다. 소련 견제를 위한 인권 외교와 대중국 관계 정규화,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주도했으며, 카터 독트린으로 페르시아만 군사 개입 의지를 천명했다. 1979년 7월 3일, 소련 개입을 유발할 위험을 알리는 메모를 대통령에게 보내면서도 무자헤딘 비밀 원조 지시에 서명했으며, 훗날 "소련에게 베트남 전쟁을 선사할 기회"라 평했다. 냉전 후에는 《거대한 체스판》(1997)으로 유라시아 지정학과 NATO 확장을 주창하며 미국 외교에 지속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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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1981국가안보보좌관
  • 1973–19763극위원회 디렉터
  • 1966–1968국무부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 1960–1972컬럼비아대학교 교수, 공산권연구소 소장
  • 1953–1960하버드대학교 교수
  • 1981–2017존스홉킨스대학교 SAIS 교수, CSIS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