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르타뉴 브레스트 출신인 르멜은 파리에서 제본공으로 일하며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1865년 제본공 노동자들의 남녀 동일임금 쟁취에 기여했고, 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해 외젠 바를랭과 협동조합 식당 라 마르미트를 운영했다. 1871년 파리 코뮌 때 여성 연합의 지도적 활동가로 바리케이드에서 싸웠다. 체포된 뒤 루이즈 미셸과 함께 누벨칼레도니로 유형되었으며 1880년 사면으로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 코뮌에서 몽마르트르 여성감시위원회를 이끌고 바리케이드에서 싸운 루이즈 미셸은 패배 뒤 뉴칼레도니아로 유형되었으며, 귀환 후 노동자 집회와 아나키스트 운동에 헌신했다.
오트마른의 성에서 하녀의 딸로 태어나 교사가 되었고, 1850년대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학교를 열며 공화파·사회주의 클럽에 드나들었다. 1871년 3월 18일 몽마르트르에서 대포를 지키러 나섰고, 코뮌 기간 감시위원회와 구급 활동, 방위군 대대에서 활동했다. 피의 주간 뒤 어머니 대신 자수해 법정에서 사형을 요구했으나 뉴칼레도니아 유형을 선고받았다. 그곳에서 카나크인의 1878년 봉기를 지지했다. 1880년 사면으로 돌아와 아나키스트로서 연설과 투옥을 거듭했고 1905년 마르세유에서 강연 여행 중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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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대–1860년대마을에서 교사로 일한 뒤 1856년 파리로 옮겼다. 1865년 파리에 학교를 열고 시를 발표했으며, 블랑키주의 혁명가들과 교류하고 여성의 시민권과 여학생 교육을 위한 활동에 참여했다.
1871파리 코뮌에서 몽마르트르 여성감시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제61 몽마르트르 대대에서 싸우며 구급소를 조직했다. 피의 주간에 어머니를 지키려 프랑스군에 자수했다.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요구했지만 태평양의 프랑스 유형지 뉴칼레도니아로 이송형을 선고받았다.
1873–1880뉴칼레도니아로 유형되어 카나크인과 교류하고 프랑스어를 가르쳤으며 1878년 카나크 봉기를 지지했다. 1880년 코뮌 참여자 사면으로 프랑스로 돌아왔다.
1880–1905프랑스로 돌아온 뒤 노동자 집회와 시위에서 연설했고, 아나키스트로서 여러 차례 투옥되면서도 프랑스와 유럽에서 활동했다. 1883년 실업 노동자 시위를 이끌었고, 세바스티앵 포르와 함께 1895년 아나키스트 잡지 《르 리베르테르》를 창간했다. 1905년 마르세유에서 사망했다.
제본공 노동조합을 국제노동자협회와 파리 노동자협회 연맹으로 연결하고, 파리 코뮌의 재정과 노동 관계를 맡아 조직했다. 1871년 5월 28일 베르사유군에 붙잡혀 몽마르트르에서 다른 포로들과 총살되었다.
농가 출신으로 파리에서 제본공이 되어 1864년 제본공 파업을 이끌었고, 상호부조 조합과 협동 식당 「라 마르미트」를 세웠다. 국제노동자협회 파리 지부의 중심인물로 1868년 두 차례 재판을 받았고, 노동조합 연합회를 조직했다. 1871년 국민방위군 중앙위원회에 들어갔고 코뮌 의원으로 재정과 식량 공급을 맡았다. 코뮌 공안위원회 설치에 반대한 소수파에 속했다. 5월 28일 붙잡혀 몽마르트르로 끌려가 군중에게 구타당한 뒤 총살되었다.
이오시프 블레이흐만은 장인 출신의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혁명가로, 노동자 조직과 병사 집회에 자신의 정치를 밀어 넣었다. 2월혁명 뒤 페트로그라드 무정부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이 되어 산업의 사회화와 지주 재산의 수탈, 코뮌 건설을 임시정부 밖에서 주장했다. 1917년 7월 3일에는 제1기관총연대에 무장하고 행진하라고 촉구해 위기를 무장한 7월 시위로 전환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이 운동은 볼셰비키 지도부가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10월 뒤에는 구체제에 맞선 혁명을 지지하면서도 볼셰비키 국가를 비판했고, 그 결과 거듭된 체포와 강제노동, 병을 겪다가 1921년에 사망했다.
독일의 아나키스트 사상가이자 바이에른 혁명 정부의 교육 담당자로, 1919년 진압군에 살해되었다.
국가는 사회적 관계다.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때 국가는 다른 사회적 관계로 대체된다.
란다우어는 국가를 단순히 전복할 권력기구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로 보고, 자발적 공동체를 만들어 이를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08년 사회주의자 동맹을 세워 협동조합과 공동체를 통한 사회주의 실천을 모색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했으며, 카를 아이스너의 요청으로 1918년 뮌헨에 와 혁명 정부를 지원했다. 1919년 4월 바이에른 레테 공화국에 참여해 계몽·공교육 담당 인민위원을 맡았고, 공화국 진압 뒤 체포되어 5월 2일 스타델하임 교도소에서 살해되었다.
시카고 환송연에서 헨리 클레이 프릭의 사망 소식을 듣고 베르크만은 이렇게 말했다: '프릭은 신에 의해 추방되었다.'
러시아 제국 빌나에서 태어나 1888년 미국으로 이주한 아나키스트 혁명가이자 작가. 1892년 홈스테드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에 분노하여 제철소 사장 헨리 클레이 프릭을 암살하려다 실패, 14년간 복역했으며 그 경험을 《한 아나키스트의 옥중기》(1912)에 담았다. 출소 후 에마 골드만의 잡지 《마더 어스》 편집자로 활동하며 미국 아나키스트 운동의 중심 인물이 되었고, 1919년 반전 활동으로 소비에트 러시아로 추방되었다. 처음에는 볼셰비키 혁명에 열광했으나 크론시타트 반란 진압을 목격하고 환멸을 느껴 《볼셰비키 신화》(1925)에서 초기 소비에트 국가의 권위주의를 기록했으며, 이후 프랑스 망명 중 아나코-코뮤니즘 입문서 《지금 그리고 이후에》(1929)를 저술했다.
『골로스 트루다』, 1917년: '볼셰비키가 권력을 공고히 하고 합법화하면… 국가와 인민의 삶을 위에서부터 운영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은 모든 반대를 철권으로 분쇄할 권위주의적 정치·국가 기구를 발전시킬 것이다.'
러시아 아나키스트 지식인이자 마흐놉시치나의 지도적 이론가. 페트로그라드에서 『골로스 트루다』를 편집하고, 우크라이나에서 나바트 연합을 공동 창설했으며, 마흐노 군사혁명평의회 의장으로서 아나키스트 통합 이론을 발전시켜 공산주의·개인주의·생디칼리즘 아나키스트들의 협력을 주창했다. 1922년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추방된 후, 1917–1921년 혁명의 아나키스트적 결정판인 『미지의 혁명』을 저술했으며, 동지 마흐노가 추진한 플랫폼주의 중앙집권화에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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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 중퇴, 사회혁명당 입당, 노동자 학습 모임 조직
1905피의 일요일 행진 참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결성 참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1907오흐라나에 체포, 시베리아 유배; 탈출하여 프랑스 망명
1911아폴론 카렐린의 영향으로 아나키스트 전향, 파리에서 '자유 공산주의자 형제단' 가입
1915–1916반전 활동으로 프랑스 당국 추적 피해 미국 도피; 뉴욕에서 『골로스 트루다』 편집
1917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귀환; 『골로스 트루다』를 주요 아나코생디칼리즘 기관지로 재창간
1918–1920우크라이나 나바트 연합 공동 창설; 마흐노 군사혁명평의회 의장; 체카에 두 차례 체포
1936년 바르셀로나에서 캐나다 기자 피에르 반 파선에게 한 말로 전해진다. 「우리는 폐허가 조금도 두렵지 않다. 우리는 이 땅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자기 세계를 부수고 물러갈지 몰라도,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이 가슴속에 품고 있다.」 널리 인용되지만 이 인터뷰의 정확한 문구를 두고는 논쟁이 있다.
레온의 철도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금속공. 1917년 총파업으로 해고된 뒤 프랑스로 달아나 아나키즘을 받아들였고, 로스 솔리다리오스와 로스 에란테스에서 은행 「수용」과 국왕 암살 시도를 거치며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감옥을 전전했다. 1936년 7월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을 이끌고 아타라사나스 병영을 함락시켜 카탈루냐에서 군부 반란을 무너뜨렸고, 이 전투에서 오랜 동지 프란시스코 아스카소를 잃었다. 곧 6천 명 규모의 두루티 종대를 꾸려 아라곤 전선으로 나가면서 해방 지역에서 토지와 공장의 집단화를 밀어붙였다. 11월 마드리드 방어에 합류했다가 19일 카사데캄포 전선에서 총상을 입고 이튿날 숨졌으며, 총알의 출처를 두고는 적의 사격, 아군의 오발, 그의 자동소총 오작동이라는 설이 지금도 갈린다. 바르셀로나 장례 행렬에는 수십만 명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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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레온의 철도 노동자 집안에서 여덟 남매 중 둘째로 출생
1913–1917금속노조(UGT) 가입, 1917년 총파업 참여로 북부철도에서 해고되고 프랑스로 도피
1918–1919망명지에서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고 귀국해 CNT 가입
1920–1922로스 후스티시에로스 결성, 알폰소 13세 암살 계획이 발각되어 사라고사로 피신
1922–1923아스카소·가르시아 올리베르와 로스 솔리다리오스 조직, 히혼 스페인은행 「수용」
1924–1926쿠바·멕시코·칠레·아르헨티나를 도는 「수용」 원정, 파리에서 체포되어 라상테 감옥 수감
1927–1931석방 후 벨기에 체류, 이베리아아나키스트연맹(FAI) 활동; 제2공화국 선포와 함께 바르셀로나 귀환
1931–1936친화그룹 「노소트로스」 결성, 잦은 체포와 유형 속에 CNT 좌파의 얼굴이 됨
1936.07.19–20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을 이끌고 아타라사나스 병영 함락, 동지 프란시스코 아스카소 전사
1936.07–11두루티 종대를 편성해 아라곤 전선으로, 해방 지역의 토지·공장 집단화 추진
1936.11.14종대 일부를 이끌고 마드리드 방어전에 합류
1936.11.19–20카사데캄포 전선에서 총상을 입고 이튿날 사망, 총알의 출처는 지금도 논쟁
베이징에서 김익상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얻어지는 것이오. … 우리가 먼저 피를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김익상은 그 자리에서 의열단에 가입했고, 수주 뒤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졌다.
의열단을 조직해 6년간 일본 식민통치 기관에 대한 폭탄 투척과 요인 암살을 지휘한 무정부주의적 독립운동가. 이후 황푸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해 연합전선을 모색했으며,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광복군 부사령관 겸 군무부장으로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해방 후 좌우합작에 힘쓰다 여운형 암살로 남한 내 입지가 무너지자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잔류해 국가검열상과 노동상을 역임했으며, 1958년 숙청당했다. 의열투쟁에서 통일전선 정치로, 다시 분단 후 조선 내각까지, 조선 혁명 진영 전체를 가로지른 유일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