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바쿠닌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акунин
아나키스트 러시아 러시아 1814–1876 ○ 병사

마르크스의 가장 위대한 라이벌: 집산주의적 아나키즘의 창시자이자 제1인터내셔널 분열의 중심

1869년 바젤 대회에서 "가장 열정적인 혁명가도 절대 권력을 쥐면 1년 안에 차르보다 더 나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 『국가와 무정부』

트베리 귀족 출신, 집산주의적 아나키즘의 창시자. 제1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와 대립하다 1872년 헤이그 대회에서 축출되었고, 『국가와 무정부』(1873)로 무국가 연방주의를 체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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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9–1835페테르부르크 포병학교 — 소위 임관 후 상관 모독으로 면직, 모스크바 스탄케비치 서클 합류
  • 1840–1842베를린 대학 — 헤겔 좌파 합류, 가명 쥘 엘리자르로 「독일에서의 반동」 발표
  • 1843–1847파리·브뤼셀 — 프루동·마르크스와 교류, 폴란드 독립 연설로 프랑스 추방
  • 1848–1849프라하 범슬라브 대회, 프라하·드레스덴 봉기 지도 — 작센·오스트리아 사형 선고, 종신형 감형
  • 1851–1861러시아 송환 — 페트로파블롭스크·슐리셀부르크 6년, 시베리아 유형 후 일본·미국 경유 탈출
  • 1861–1864런던 망명 — 게르첸 『콜로콜』 편집 참여, 폴란드 봉기(1863) 지원 원정 실패
  • 1864–1868이탈리아 —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 결성, 『혁명적 카테키즘』(1865–66) 집필, 국제형제단 창설
  • 1868–1872제1인터내셔널 가입, 국제사회주의민주동맹 조직 — 마르크스와 투쟁, 1872년 헤이그 대회 축출
  • 1872–1876루가노·로카르노 — 『국가와 무정부』(1873), 미완성 『신과 국가』 집필, 베른에서 병사

나탈리 르멜

Nathalie Le Mel

프랑스 제본공이자 파리 코뮌의 여성 연합 활동가

브르타뉴 브레스트 출신인 르멜은 파리에서 제본공으로 일하며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1865년 제본공 노동자들의 남녀 동일임금 쟁취에 기여했고, 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해 외젠 바를랭과 협동조합 식당 라 마르미트를 운영했다. 1871년 파리 코뮌 때 여성 연합의 지도적 활동가로 바리케이드에서 싸웠다. 체포된 뒤 루이즈 미셸과 함께 누벨칼레도니로 유형되었으며 1880년 사면으로 파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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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5제본공들의 남녀 동일임금 쟁취에 기여하고 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했다.
  • 1860년대–1871외젠 바를랭과 협동조합 식당 라 마르미트를 운영했다.
  • 1871파리 코뮌의 여성 연합에서 활동하고 바리케이드에서 싸웠다.
  • 1871–1880체포·뉴칼레도니아 유형 뒤 1880년 사면으로 파리로 돌아왔다.

루이즈 미셸

Louise Michel
아나키스트 프랑스 프랑스 1830–1905 ○ 폐렴

코뮌의 바리케이드에서 싸우고 뉴칼레도니아로 유형된 뒤 아나키즘의 상징이 된 「붉은 처녀」

파리 코뮌에서 몽마르트르 여성감시위원회를 이끌고 바리케이드에서 싸운 루이즈 미셸은 패배 뒤 뉴칼레도니아로 유형되었으며, 귀환 후 노동자 집회와 아나키스트 운동에 헌신했다.

오트마른의 성에서 하녀의 딸로 태어나 교사가 되었고, 1850년대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학교를 열며 공화파·사회주의 클럽에 드나들었다. 1871년 3월 18일 몽마르트르에서 대포를 지키러 나섰고, 코뮌 기간 감시위원회와 구급 활동, 방위군 대대에서 활동했다. 피의 주간 뒤 어머니 대신 자수해 법정에서 사형을 요구했으나 뉴칼레도니아 유형을 선고받았다. 그곳에서 카나크인의 1878년 봉기를 지지했다. 1880년 사면으로 돌아와 아나키스트로서 연설과 투옥을 거듭했고 1905년 마르세유에서 강연 여행 중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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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50년대–1860년대마을에서 교사로 일한 뒤 1856년 파리로 옮겼다. 1865년 파리에 학교를 열고 시를 발표했으며, 블랑키주의 혁명가들과 교류하고 여성의 시민권과 여학생 교육을 위한 활동에 참여했다.
  • 1871파리 코뮌에서 몽마르트르 여성감시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제61 몽마르트르 대대에서 싸우며 구급소를 조직했다. 피의 주간에 어머니를 지키려 프랑스군에 자수했다.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요구했지만 태평양의 프랑스 유형지 뉴칼레도니아로 이송형을 선고받았다.
  • 1873–1880뉴칼레도니아로 유형되어 카나크인과 교류하고 프랑스어를 가르쳤으며 1878년 카나크 봉기를 지지했다. 1880년 코뮌 참여자 사면으로 프랑스로 돌아왔다.
  • 1880–1905프랑스로 돌아온 뒤 노동자 집회와 시위에서 연설했고, 아나키스트로서 여러 차례 투옥되면서도 프랑스와 유럽에서 활동했다. 1883년 실업 노동자 시위를 이끌었고, 세바스티앵 포르와 함께 1895년 아나키스트 잡지 《르 리베르테르》를 창간했다. 1905년 마르세유에서 사망했다.

외젠 바를랭

Eugène Varlin
아나키스트 프랑스 프랑스 1839–1871 ✕ 총살

인터내셔널 파리 지부를 이끌고 코뮌의 재정을 맡았다가 피의 주간 마지막 날 총살된 제본공

제본공 노동조합을 국제노동자협회와 파리 노동자협회 연맹으로 연결하고, 파리 코뮌의 재정과 노동 관계를 맡아 조직했다. 1871년 5월 28일 베르사유군에 붙잡혀 몽마르트르에서 다른 포로들과 총살되었다.

농가 출신으로 파리에서 제본공이 되어 1864년 제본공 파업을 이끌었고, 상호부조 조합과 협동 식당 「라 마르미트」를 세웠다. 국제노동자협회 파리 지부의 중심인물로 1868년 두 차례 재판을 받았고, 노동조합 연합회를 조직했다. 1871년 국민방위군 중앙위원회에 들어갔고 코뮌 의원으로 재정과 식량 공급을 맡았다. 코뮌 공안위원회 설치에 반대한 소수파에 속했다. 5월 28일 붙잡혀 몽마르트르로 끌려가 군중에게 구타당한 뒤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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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57제본공 상호부조회를 세우는 데 참여했다.
  • 1864파리 제본공들의 첫 파업을 주도적으로 조직했다.
  • 1869파리 노동자협회 연맹 창립을 도왔다.
  • 1871파리 코뮌 의원으로 선출되어 재정 담당관과 노동 관계 책임을 맡았다.

이오시프 솔로모노비치 블레이흐만

Иосиф Соломонович Блейхман
아나키스트 러시아 제국·러시아 러시아 (유대계) 1868–1921 ○ 병사

1917년 위기의 무정부주의적 도화선

“거리가 우리를 조직할 것이다.”

이오시프 블레이흐만은 장인 출신의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혁명가로, 노동자 조직과 병사 집회에 자신의 정치를 밀어 넣었다. 2월혁명 뒤 페트로그라드 무정부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이 되어 산업의 사회화와 지주 재산의 수탈, 코뮌 건설을 임시정부 밖에서 주장했다. 1917년 7월 3일에는 제1기관총연대에 무장하고 행진하라고 촉구해 위기를 무장한 7월 시위로 전환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이 운동은 볼셰비키 지도부가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10월 뒤에는 구체제에 맞선 혁명을 지지하면서도 볼셰비키 국가를 비판했고, 그 결과 거듭된 체포와 강제노동, 병을 겪다가 1921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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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혁명운동 참가
  • 1904미국에서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수용
  • 1906드빈스크 무정부주의 그룹 조직
  • 1913–1914페테르부르크 노동조합 선동가
  • 1917페트로그라드 무정부주의 공산주의자연맹 서기·《코뮌》 편집자
  • 19177월 시위 때 제1기관총연대 선동가
  • 1917–1919페트로그라드 무정부주의 그룹연맹 서기
  • 1920–1921모스크바 노동조합 평의회 활동가, 체포되어 강제노동

구스타프 란다우어

Gustav Landauer
아나키스트 독일 유대계 독일인 1870–1919 ✕ 구타 · 총격으로 살해

독일의 아나키스트 사상가이자 바이에른 혁명 정부의 교육 담당자로, 1919년 진압군에 살해되었다.

국가는 사회적 관계다.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때 국가는 다른 사회적 관계로 대체된다.

란다우어는 국가를 단순히 전복할 권력기구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로 보고, 자발적 공동체를 만들어 이를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08년 사회주의자 동맹을 세워 협동조합과 공동체를 통한 사회주의 실천을 모색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했으며, 카를 아이스너의 요청으로 1918년 뮌헨에 와 혁명 정부를 지원했다. 1919년 4월 바이에른 레테 공화국에 참여해 계몽·공교육 담당 인민위원을 맡았고, 공화국 진압 뒤 체포되어 5월 2일 스타델하임 교도소에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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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사회주의자 동맹 창립
  • 1918카를 아이스너의 요청으로 뮌헨에 와 혁명 정부를 지원
  • 1919바이에른 레테 공화국의 계몽·공교육 담당 인민위원

알렉산드르 오시포비치 베르크만

Александр Осипович Беркман
아나키스트 러시아 러시아 1870–1936 ✕ 자살

프릭 암살 미수로 14년 복역하고 소비에트를 떠난 아나키스트 작가

시카고 환송연에서 헨리 클레이 프릭의 사망 소식을 듣고 베르크만은 이렇게 말했다: '프릭은 신에 의해 추방되었다.'

러시아 제국 빌나에서 태어나 1888년 미국으로 이주한 아나키스트 혁명가이자 작가. 1892년 홈스테드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에 분노하여 제철소 사장 헨리 클레이 프릭을 암살하려다 실패, 14년간 복역했으며 그 경험을 《한 아나키스트의 옥중기》(1912)에 담았다. 출소 후 에마 골드만의 잡지 《마더 어스》 편집자로 활동하며 미국 아나키스트 운동의 중심 인물이 되었고, 1919년 반전 활동으로 소비에트 러시아로 추방되었다. 처음에는 볼셰비키 혁명에 열광했으나 크론시타트 반란 진압을 목격하고 환멸을 느껴 《볼셰비키 신화》(1925)에서 초기 소비에트 국가의 권위주의를 기록했으며, 이후 프랑스 망명 중 아나코-코뮤니즘 입문서 《지금 그리고 이후에》(1929)를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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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미국 이주, 요한 모스트의 『프라이하이트』 식자공으로 아나키스트 운동 합류
  • 1892홈스테드 파업 중 프릭 암살 미수 — 22년형 선고, 14년 복역
  • 1907–1915『마더 어스』 편집자, 미국 최대 아나키스트 잡지로 성장
  • 1916샌프란시스코에서 자체 잡지 『더 블래스트』 창간
  • 1917징병 반대 활동으로 2년 수감, 1919년 소비에트 러시아로 추방
  • 1921크론시타트 반란 진압 목격 후 볼셰비키와 결별, 러시아 탈출
  • 1925『볼셰비키 신화』 출간 — 초기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일기체 비판서
  • 1929아나코-코뮤니즘 입문서 『지금 그리고 이후에』 출간

프세볼로트 미하일로비치 예이헨바움

Всеволод Михайлович Эйхенбаум

아나키스트 통합을 이론화하고 볼셰비키가 억압한 혁명을 기록한 러시아 아나키스트 지식인

『골로스 트루다』, 1917년: '볼셰비키가 권력을 공고히 하고 합법화하면… 국가와 인민의 삶을 위에서부터 운영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은 모든 반대를 철권으로 분쇄할 권위주의적 정치·국가 기구를 발전시킬 것이다.'

러시아 아나키스트 지식인이자 마흐놉시치나의 지도적 이론가. 페트로그라드에서 『골로스 트루다』를 편집하고, 우크라이나에서 나바트 연합을 공동 창설했으며, 마흐노 군사혁명평의회 의장으로서 아나키스트 통합 이론을 발전시켜 공산주의·개인주의·생디칼리즘 아나키스트들의 협력을 주창했다. 1922년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추방된 후, 1917–1921년 혁명의 아나키스트적 결정판인 『미지의 혁명』을 저술했으며, 동지 마흐노가 추진한 플랫폼주의 중앙집권화에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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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 중퇴, 사회혁명당 입당, 노동자 학습 모임 조직
  • 1905피의 일요일 행진 참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결성 참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 1907오흐라나에 체포, 시베리아 유배; 탈출하여 프랑스 망명
  • 1911아폴론 카렐린의 영향으로 아나키스트 전향, 파리에서 '자유 공산주의자 형제단' 가입
  • 1915–1916반전 활동으로 프랑스 당국 추적 피해 미국 도피; 뉴욕에서 『골로스 트루다』 편집
  • 1917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귀환; 『골로스 트루다』를 주요 아나코생디칼리즘 기관지로 재창간
  • 1918–1920우크라이나 나바트 연합 공동 창설; 마흐노 군사혁명평의회 의장; 체카에 두 차례 체포
  • 1922단식 투쟁과 프로핀테른 대표단 개입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추방
  • 1924–1939세바스티앵 포르의 초청으로 파리 이주; 『아나키스트 백과사전』 기고; 5개국어 아나키스트 정기간행물에 집필
  • 1940마르세유에서 빈곤 속에 『미지의 혁명』 탈고
  • 1945파리에서 결핵으로 사망, 페르 라셰즈 묘지 네스토르 마흐노 곁에 안장

알렉산드르 모이세예비치 샤피로

Александр Моисеевич Шапиро
아나키스트 소련 러시아 1882–1946 ○ 심장마비

암스테르담에서 IWA까지 국제 아니코생디칼리슴을 엮은 배후의 조직가

1921년 2월, 크로폿킨의 장례 행렬 뒤로 2만 명의 아나키스트가 모스크바 거리를 메웠다. 샤피로와 베르크만이 장례위원회를 조직했다. 소련에서 허용된 마지막 아나키스트 시위였다.

국제 아나코생디칼리즘의 핵심 연결자.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 서기로서 대륙 간 네트워크를 조직했고, 혁명기 볼셰비키 정부에서 일하면서도 아나키스트 비판을 견지했다. 추방 후 베를린에서 IWA 창립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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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7런던 유대인 아나키스트 운동에서 활동, 『아르베테르 프라인트』 그룹 회원, 주빌리 스트리트 클럽 주재
  • 1907암스테르담 국제아나키스트대회 대표; 국제사무국 서기 및 『Bulletin de l'Internationale Anarchiste』 편집
  • 1915『국제아나키스트 반전 선언』 서명; 크로폿킨의 연합국 지지와 결별
  • 1917–1920귀국 후 『골로스 트루다』 편집진; 유대인인민위원부 및 외무인민위원부에서 근무
  • 1921크로폿킨 장례 조직; 『러시아 혁명과 공산당』 공동 집필; RILU 대회 중 정치범 석방 협상
  • 1922모스크바에서 체포, 국제적 항의로 석방된 후 소련에서 영구 추방
  • 1922–1932베를린에서 IWA 창립 주도, 사무국 서기; 『라보치 푸티』로 러시아 내 비밀 유통
  • 1932–1939바르셀로나에서 CNT-FAI 갈등 중재; 프랑스에서 『라 부아 뒤 트라바이』 편집; 1939년 뉴욕 이주
  • 1945–1946뉴욕에서 『뉴 트렌즈』 편집, 심장마비로 사망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Buenaventura Durruti

바르셀로나에서 반란군을 꺾고 자기 이름의 종대를 이끈 아나키스트 금속노동자

1936년 바르셀로나에서 캐나다 기자 피에르 반 파선에게 한 말로 전해진다. 「우리는 폐허가 조금도 두렵지 않다. 우리는 이 땅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자기 세계를 부수고 물러갈지 몰라도,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이 가슴속에 품고 있다.」 널리 인용되지만 이 인터뷰의 정확한 문구를 두고는 논쟁이 있다.

레온의 철도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금속공. 1917년 총파업으로 해고된 뒤 프랑스로 달아나 아나키즘을 받아들였고, 로스 솔리다리오스와 로스 에란테스에서 은행 「수용」과 국왕 암살 시도를 거치며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감옥을 전전했다. 1936년 7월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을 이끌고 아타라사나스 병영을 함락시켜 카탈루냐에서 군부 반란을 무너뜨렸고, 이 전투에서 오랜 동지 프란시스코 아스카소를 잃었다. 곧 6천 명 규모의 두루티 종대를 꾸려 아라곤 전선으로 나가면서 해방 지역에서 토지와 공장의 집단화를 밀어붙였다. 11월 마드리드 방어에 합류했다가 19일 카사데캄포 전선에서 총상을 입고 이튿날 숨졌으며, 총알의 출처를 두고는 적의 사격, 아군의 오발, 그의 자동소총 오작동이라는 설이 지금도 갈린다. 바르셀로나 장례 행렬에는 수십만 명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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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레온의 철도 노동자 집안에서 여덟 남매 중 둘째로 출생
  • 1913–1917금속노조(UGT) 가입, 1917년 총파업 참여로 북부철도에서 해고되고 프랑스로 도피
  • 1918–1919망명지에서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고 귀국해 CNT 가입
  • 1920–1922로스 후스티시에로스 결성, 알폰소 13세 암살 계획이 발각되어 사라고사로 피신
  • 1922–1923아스카소·가르시아 올리베르와 로스 솔리다리오스 조직, 히혼 스페인은행 「수용」
  • 1924–1926쿠바·멕시코·칠레·아르헨티나를 도는 「수용」 원정, 파리에서 체포되어 라상테 감옥 수감
  • 1927–1931석방 후 벨기에 체류, 이베리아아나키스트연맹(FAI) 활동; 제2공화국 선포와 함께 바르셀로나 귀환
  • 1931–1936친화그룹 「노소트로스」 결성, 잦은 체포와 유형 속에 CNT 좌파의 얼굴이 됨
  • 1936.07.19–20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을 이끌고 아타라사나스 병영 함락, 동지 프란시스코 아스카소 전사
  • 1936.07–11두루티 종대를 편성해 아라곤 전선으로, 해방 지역의 토지·공장 집단화 추진
  • 1936.11.14종대 일부를 이끌고 마드리드 방어전에 합류
  • 1936.11.19–20카사데캄포 전선에서 총상을 입고 이튿날 사망, 총알의 출처는 지금도 논쟁
  • 1936.11.22바르셀로나 장례, 수십만 명이 운구를 따름

김원봉

김원봉
북조선로동당 아나키스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족 1898–1958 ↓ 사망

의열단 창설자로서 조선의용대·광복군을 거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에 이른 무장투쟁가

베이징에서 김익상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얻어지는 것이오. … 우리가 먼저 피를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김익상은 그 자리에서 의열단에 가입했고, 수주 뒤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졌다.

의열단을 조직해 6년간 일본 식민통치 기관에 대한 폭탄 투척과 요인 암살을 지휘한 무정부주의적 독립운동가. 이후 황푸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해 연합전선을 모색했으며,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광복군 부사령관 겸 군무부장으로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해방 후 좌우합작에 힘쓰다 여운형 암살로 남한 내 입지가 무너지자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잔류해 국가검열상과 노동상을 역임했으며, 1958년 숙청당했다. 의열투쟁에서 통일전선 정치로, 다시 분단 후 조선 내각까지, 조선 혁명 진영 전체를 가로지른 유일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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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의열단 창설, 단장(의백) 취임
  • 1926황푸군관학교 제4기 입학
  • 1935조선민족혁명당 창당
  • 1938조선의용대 편성, 대장 취임
  • 1944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부사령관
  • 1948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검열상
  • 1952내각 노동상
  • 1957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