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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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오원위안

姚文元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 중국 공산주의 중국 중국 1931–2005 ↓ 체포 1976 · 자연사

『해서파관』 비판문으로 문화대혁명의 문을 연 4인방의 이론가, 「몽둥이」라 불린 평론가

1931년 저장성 주지 출신. 1965년 11월 10일 『문회보』에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함」을 실어 문화대혁명의 서막을 열었고, 1976년 10월 6일 체포되어 1981년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상하이의 문예평론가로 1957년 반우파 투쟁 때 공격적 비판문으로 마오의 눈에 들었다. 장칭·장춘차오의 지시로 1965년 11월 『문회보』에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함」을 발표해 문화대혁명의 서막을 열었고, 중앙문혁소조원으로 선전을 장악했다. 1969년 정치국원이 되어 상하이 그룹의 일원으로 「린뱌오와 공자 비판」 등 운동을 이끌었다. 1976년 10월 4인방으로 체포되어 1981년 20년형을 받았고 1996년 출소 뒤 2005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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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1969중앙문화혁명소조원
  • 1969–1976중공 중앙 정치국원

스테판 카라페티 포고샨

Ստեփան Կարապետի Պողոսյան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인 1932–2012 ○ 자연사

붕괴 직전 아르메니아 공산당의 마지막 지도자

1990년 말, 그는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의 당을 이끌었지만 그 당의 통치 기반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스테판 포고샨은 역사학자 출신의 아르메니아 공산당 정치가로,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의 대중매체와 출판 행정을 오래 맡았다. 그는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가 진행되던 시기에 당의 국가적 기반과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는 과정을 대표했다. 1990년 말부터 1991년까지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이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으로 활동한 뒤 정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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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58예레반 국립대학교 콤소몰 위원회 서기
  • 1958–1962아르메니아 콤소몰 중앙위원회 간부, 예레반 시 콤소몰 제1서기
  • 1962–1967아르메니아 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제1서기
  • 1967–1970아라라트 지구당위원회 제1서기
  • 1970–1988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 텔레비전·라디오 위원회 의장
  • 1988–1990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산하 정보통신사 사장, 국가출판위원회 의장
  • 1990–1991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포즈거이 임레

Pozsgay Imre
헝가리 국가기관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933–2016 ○ 사망

1956년을 '민중봉기'라 부르고 자기 당의 정통을 무너뜨린 개혁 정치국원

서베를린에서 동독의 '반파시스트 방어벽'은 '치욕'이라며 철거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MSZMP) 정치국원이자 개혁파의 이념적 후견자였다. 1989년 1월 28일 라디오에서 1956년 혁명을 '민중봉기'라 규정해 당의 정통성을 스스로 무너뜨렸고, 5월 서베를린에서는 베를린 장벽을 '치욕'이라 부르며 동독 체제를 비판했다. 오토 폰 합스부르크와 함께 범유럽 피크닉을 후원해 철의 장막에 첫 균열을 냈고, 이후 헝가리 사회당 부의장을 거쳐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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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헝가리 노동인민당 입당
  • 1957–1969바치-키슈쿤주 당위 선전선동부장·서기
  • 1976–1980문화부 장관
  • 1980–1982교육부 장관
  • 1982–1988애국인민전선 사무총장
  • 1988–1989MSZMP 정치국원 겸 국가장관
  • 1989.011956년 혁명을 '민중봉기'로 규정
  • 1990헝가리 사회당 부의장·대통령 후보; 낙선

바실리 게오르기예비치 자하로프

Василий Георгиевич Захар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4–2023 ○ 자연사

글라스노스트기 문화자유화를 집행한 선전 관료 출신 문화장관

1989년 6월, 소련 최고회의는 니콜라이 리시코프 총리가 제출한 각료 명단을 심사하며 자하로프의 문화장관 재임명을 거부했다. 수십 년간 거수기였던 의회가 현직 장관을 자격 미달이라며 퇴장시킨 첫 사건이었다.

경제학자 출신으로 레닌그라드 당 조직의 선전·선동 부서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중앙으로 진출했고,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문화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금지 도서의 출판, 영화 검열 완화, 예술 창작의 자율성 확대 등 소련 문화정책의 결정적 전환을 주도했으며, 모스크바 예술극장 분할 같은 첨예한 갈등을 직접 중재했다. 1989년 새로 구성된 최고회의가 그의 재임명을 거부하면서 소련 의회가 각료 인준을 실질적으로 심사하는 첫 사례의 주인공이 되었다. 퇴임 후 러시아 공화국 부총리를 지냈고, 회고록에서 고르바초프 시대를 '놓쳐버린 기회들의 통치'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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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73레닌그라드 대학 졸업 후 톰스크·레닌그라드에서 정치경제학 강의, 1973년 경제학 박사
  • 1973–1983레닌그라드 주당위 선전선동부장 → 서기, 문화·과학·교육 담당
  • 1983–1986중앙위 선전부 제1부부장 → 모스크바 시당위 제2서기 (옐친과 공조)
  • 1986–1989소련 문화장관, 글라스노스트기 금서 해제·검열 완화·극장 자율화 추진
  • 1989–1990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자소호프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Дзасох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오세티야계 러시아 1934–

국제주의와 지역 통치를 잇댄 정치가

1978년 2월 니코시아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인민연대 회의 도중 '검은 9월' 대원들이 그를 인질로 잡았지만, 40분 만에 이집트·팔레스타인 대표를 뺀 모두가 풀려났다.

알렉산드르 자소호프는 청년조직과 아시아·아프리카 연대 운동에서 경력을 쌓은 소련의 당·외교 정치가였다. 시리아 대사를 거쳐 북오세티야 당 조직을 이끌었고, 소련 말기의 민족문제와 국제정치를 함께 다루는 위치에 올랐다. 제28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원과 중앙위원회 서기로 선출되었으며, 연방의 개혁과 해체가 교차한 마지막 소비에트 권력층의 한 인물이었다. 이후 러시아 국가두마 의원을 거쳐 북오세티야 공화국 대통령이 되어 지역의 연방관계와 민족 간 긴장을 관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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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오르조니키제 시 콤소몰위원회 제1서기
  • 1967–1986소련 아시아·아프리카 국가연대위원회 제1서기, 제1부위원장
  • 1986–1988소련의 시리아 대사
  • 1988–1990북오세티야주 공산당 지역위원회 제1서기
  • 1989–1991소련 인민대표, 최고회의 국제문제위원회 위원장
  • 1990–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서기
  • 1993–1998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 1998–2005북오세티야 공화국 대통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리투아니아 1940–2022 ○ 자연사

빌뉴스 1월 사태에서 국가구원위원회를 선포한 모스크바파 리투아니아공산당 이념서기

1991년 1월 13일 소련군 BMP 확성기에서 그의 육성이 흘러나왔다: 「리투아니아 형제들이여, 인민에게 맞섰던 민족주의·분리주의 정부는 전복되었다!」

리투아니아 남부 농가 출신으로 빌뉴스대학과 레닌그라드 고등당학교를 마친 뒤, 20년간 당 역사연구소에서 학자로 일하며 종교·무신론을 연구했다. 1990년 친모스크바 리투아니아공산당(CPSU 강령파) 이념부장이 되어 리투아니아 독립에 격렬히 반대했고, 1991년 1월 11일 '리투아니아 국가구원위원회' 창설을 발표해 소련군 작전의 정치적 명분을 제공했다. 1999년 반국가조직 활동과 폭력적 정권 전복 선동으로 8년형을 선고받았고, 출소 후 러시아로 이주해 사망할 때까지 소련 체제를 옹호하는 저술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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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소련공산당 입당
  • 1970–1990리투아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 당역사연구소 연구원
  • 1990–1991리투아니아공산당(CPSU 강령파) 중앙위원회 이념부장
  • 1994–2002반국가 활동 혐의로 수감 (8년형)
  • 2002–2012러시아국립사회대학 교수, 공산당연합-CPSU 평의회 부의장

바간 그리고리예비치 그리고랸

Ваган Григорьевич Григорья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901/1902–1983 ○ 자연사

스탈린 말기 국제공산운동을 관리한 아르메니아 출신 당 간부

1953년 8월, 중앙위원회 간부 데도프는 흐루쇼프에게 보낸 진정서에서 그리고랸의 동료들이 그와 베리야의 '가까운 관계'를 지적했다고 보고했다.

아제르바이잔의 아르메니아인 마을에서 태어난 그리고랸은 군대 신문 편집자에서 시작해 모스크바 당 기관의 출판·선전 책임자로 올라섰다. 1949년 미하일 수슬로프의 후임으로 대외정책위원회(국제부) 위원장에 임명되어 1953년까지 소련 공산당과 전 세계 공산당 간 관계를 총괄했다. 그의 재임기는 코민포름 창설 이후 유고슬라비아와의 결별이 심화되고 중국 혁명이 승리했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한 시기와 겹친다. 1952년 제19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1953년 베리야 숙청 이후 측근으로 지목되어 중앙위원회에서 제외되고 외교부로 전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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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4아제르바이잔 당 중앙위원회 출판부장, 군대 신문 편집
  • 1924–1927모스크바 하모브니키 구당위 출판부장, 모스크바 시당위 출판부장
  • 1927–1933트빌리시에서 「라보차야 프라우다」, 「프롤레타르」, 「나 루베제 보스토카」 편집
  • 1933–1946트빌리시 「자랴 보스토카」 편집장
  • 1946–1947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 중앙신문부장
  • 1947–1949코민포름 기관지 「항구적 평화와 인민민주주의를 위하여」 부편집장
  • 1949–1953중앙위원회 대외정책위원회 위원장 (국제부장)
  • 1952–1954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53소련 외교부 콜레기야 위원 및 국장, 아자리야自治공화국 중앙위원회 전권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