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Être et le Néant. Essai d'ontologie phénoménologique · 1943

존재와 무

Being and Nothingness

장폴 사르트르가 독일 점령기인 1943년 갈리마르에서 펴낸 철학 주저. 부제는 「현상학적 존재론 시론」이다. 사물의 존재인 「즉자」와 의식의 존재인 「대자」를 나누고, 의식은 세계에 「무」를 들여오는 자유이며 인간은 그 자유를 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자기 자유를 감추는 태도를 「자기기만」이라 부른 분석, 타인의 「시선」 분석으로 유명하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이어받아 프랑스 실존주의의 철학적 토대가 되었고, 루카치 등 마르크스주의자의 비판을 받았으며, 사르트르 자신은 뒷날 『변증법적 이성 비판』에서 마르크스주의와의 결합을 꾀했다.

상세

왜 이 책이 실존주의의 경전이 되었나?

『존재와 무』는 프랑스 실존주의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표현으로 꼽힌다. 1945년 해방 직후 사르트르가 강연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대중에게 던진 구호, 곧 인간에게는 미리 주어진 본질이 없고 스스로 만든 것이 곧 그 사람이라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생각의 철학적 바탕이 이 책에 있다. 영어 위키백과는 이 책의 중심 생각으로 이 구호와 「자기기만」 개념, 「무」에 대한 탐구를 꼽는다.

니체와의 관계는 직접적이라기보다 바탕에 깔려 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무신론적이다. 신이 없으니 인간의 본질을 미리 정해 줄 설계자도, 행동을 정당화해 줄 바깥의 가치도 없다. 니체가 「신의 죽음」이라고 부른 사태를 사르트르는 인간이 홀로 가치를 만들어야 하는 조건으로 받아들였다. 동시에 그는 신이 되려는 인간의 욕망 자체를 해부했다. 대자는 즉자처럼 단단하면서도 의식인 존재, 곧 스스로의 원인인 신이 되려 하지만, 그것은 모순이라 이룰 수 없다. 프랑스어 위키백과가 인용하는 이 책의 결론대로 “인간은 쓸모없는 수난이다.”

L'homme est une passion inutile.

어떻게 쓰였나?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사르트르는 1940년과 1941년 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었고, 자기 철학의 방향이 이 독서에서 정해졌다고 말했다. 프랑스어 위키백과는 이 책의 형이상학적 착상 상당수가 『기묘한 전쟁 수첩』의 메모에서 나왔고, 원고의 많은 부분이 점령기 파리 생제르맹데프레의 카페 드 플로르 2층에서 쓰였다고 전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도 같은 이유로 그 방을 드나들었다. 책 속에 나오는 「카페 종업원」의 예는 이 작업 장소와 이어져 있다.

사르트르는 이 책 뒤에 실존주의 윤리학을 약속했지만 그 책은 끝내 쓰지 않았다. 그 자리를 보부아르의 『애매성의 윤리를 위하여』(1947)와 사르트르 사후에 나온 『도덕을 위한 노트』가 부분적으로 채운다. 국내에는 『존재와 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무엇을 주장하나?

사르트르는 존재를 두 영역으로 나눈다. 즉자 존재는 사물의 존재로, 그저 그것인 것이다. 대자 존재는 의식의 존재로, 언제나 무엇에 대한 의식이며 자기 자신과 거리를 둔다. 의식은 묻고 기대하고 부정함으로써 세계에 「무」를 들여온다. 약속한 친구가 카페에 없다는 경험, 「아무도 안 왔다」는 대답 같은 구체적인 부재가 그 예다. 프랑스어 위키백과가 인용하듯 사르트르는 인간 실재가 자기를 고립시키는 무를 분비하는 이 가능성에, 데카르트가 스토아학파를 이어 붙인 이름이 곧 「자유」라고 썼다. 그래서 인간은 자유를 그만둘 자유가 없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

l'homme est condamné à être libre

이 자유의 무게에서 달아나는 태도가 「자기기만(mauvaise foi)」이다. 지나치게 민첩하고 지나치게 공손한 카페 종업원은 마치 잉크병이 잉크병이듯 자기가 종업원인 것처럼 연기한다. 사회적 역할이나 과거의 자신, 기질을 핑계 삼아 자기 선택을 사물의 필연처럼 꾸미는 것이 자기기만이다. 사르트르는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도 결국 같은 문제를 「검열관」에게 옮겼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제3부는 타인을 다룬다. 남의 「시선」을 받는 순간 나는 남에게 대상이 되고, 세계의 중심이 내게서 미끄러져 나간다. 사랑과 욕망,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남의 자유를 붙잡으려다 실패하는 형태로 분석된다. 「즉자」「대자」라는 용어는 헤겔의 「즉자」「대자」에서 왔지만, 사르트르에게 둘은 화해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어떻게 읽었나?

전후 프랑스에서 공산당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책의 개인주의적 자유 개념을 의심했다. 사회 계급과 역사 대신 고립된 의식의 선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에 따르면 죄르지 루카치는 1949년 파리에 가서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두고 사르트르와 논쟁했고, 같은 시기 『실존주의냐 마르크스주의냐』로 실존주의를 위기에 빠진 부르주아 지식인의 철학이라고 비판했다. 루카치가 『이성의 파괴』에서 하이데거를 비합리주의의 계보에 넣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르트르 자신의 길은 반대 방향으로 갔다. 그는 1950년대 초 프랑스 공산당의 동반자가 되었다가 1956년 헝가리 봉기 진압을 계기로 멀어졌고, 1960년 『변증법적 이성 비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우리 시대의 넘어설 수 없는 철학”이라 부르며 실존주의를 그 안의 한 영역으로 자리매김했다. 프랑스어 위키백과는 개인에서 사회로 옮겨 간 이 「두 번째 철학」과 『존재와 무』의 「첫 번째 철학」을 나누는 통설이 2010년대 중반부터 도전받고 있다고 적는다. 『존재와 무』의 주체도 이미 과거와 미래 사이의 상황 속에 놓인 주체였다는 독해다.

이 책은 동료의 비판도 받았다. 알베르 카뮈는 사르트르와 친구였지만 존재론의 체계를 세우는 대신 「반항」이라는 구체적 경험에서 출발했고, 결국 『반항하는 인간』을 둘러싼 논쟁으로 사르트르와 갈라섰다. 하이데거는 사르트르의 독해를 거부했다. 그럼에도 가브리엘 마르셀 같은 기독교 실존주의자까지 이 책의 중요성을 인정했고, 1999년 프랑스의 한 설문에서 20세기 최고의 책 100권 가운데 13위에 올랐다.

관련 인물

출처

  1. fr.wikipedia.org
  2. 위키백과 (영문)
  3. plato.stanford.edu
  4. plato.stanford.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