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자주의
Hoxhaism
호자주의는 1970년대 후반 중국 공산당과 알바니아 노동당이 갈라선 중국-알바니아 분열로 반수정주의 운동이 쪼개지며 형성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한 갈래로, 알바니아 노동당 제1서기 엔베르 호자의 이름을 땄다. 스탈린의 유산을 엄격히 옹호하며 유고슬라비아와 스탈린 이후의 소련, 분열 뒤의 중국을 사회제국주의로 규탄했고, 마오쩌둥도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아니라 진보적 혁명적 민주주의자였다고 보았다. 지지 조직들은 이 이름을 거의 쓰지 않고 스스로를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 부른다. 1991년 알바니아 공산 체제가 무너진 뒤에는 1994년 결성된 국제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조직 회의(통일과 투쟁)를 중심으로 라틴아메리카 등지의 정당들이 이 흐름을 이었다.
상세
명칭
호자주의라는 이름은 엔베르 호자에게서 왔지만, 그와 연결된 조직들은 이 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 이들은 호자의 이론적 기여를 별개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반수정주의를 보강한 것으로 보며, 스스로를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또는 스탈린주의자로 부른다. 알바니아에서도 이 말은 비공식 용어로, 이 경향에 이따금 붙던 꼬리표였다. 호자의 이름 엔베르를 따서 '엔베르주의'(Enverizmi)라고도 한다.
소련과의 결별에서 중국과의 결별까지
호자주의의 뿌리는 1950년대 중반 흐루쇼프의 개혁에 반대해 나타난 반수정주의다. 알바니아 지도부는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을 국제 공산주의 운동 안에 수정주의를 정당화하려는 기회주의적 행위로 보았고, 1956~1961년의 알바니아-소련 분열 끝에 1961년 12월 두 나라는 국교를 끊었다. 중소분열 속에서 중국 공산당과 알바니아 노동당은 함께 흐루쇼프 노선을 수정주의로 규탄했다. 알바니아는 1968년 8월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규탄하고 9월 5일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서 공식 탈퇴했다. 그러나 1971년 이후 닉슨의 중국 방문과 중국의 '3개 세계론'이 알바니아 지도부를 불안하게 했다. 1974년 4월 덩샤오핑이 유엔 총회에서 3개 세계론을 선언했고, 알바니아가 이를 지지하지 않자 중국은 1976년까지 원조를 크게 줄였다. 1976년 11월 알바니아 노동당 제7차 대회에서 호자는 화궈펑을 언급하지 않고 덩샤오핑을 공개 비판했다. 1977년 7월 7일 당 기관지 『인민의 목소리』(Zëri i Popullit)는 호자가 쓴 사설 「혁명의 이론과 실천」으로 3개 세계론을 정면 공격했다. 꼭 한 해 뒤인 1978년 7월 7일 중국은 알바니아와의 모든 경제·군사 협정을 중단한다고 통보했고, 알바니아는 이를 티토·흐루쇼프·브레즈네프의 방식을 되풀이한 강대국적 반동 행위라고 맞받았다. 1978년 12월 나온 호자의 『제국주의와 혁명』은 후반부를 3개 세계론과 중국 외교, 마오주의 비판에 바쳤다.
주요 주장
호자주의는 스탈린의 유산과 스탈린 시기 소련 체제를 엄격히 옹호하고, 다른 거의 모든 공산주의 조류를 수정주의로 비판하는 데서 자신을 구분한다. 호자는 미국과 유고슬라비아를 비판하며 유고슬라비아를 사회제국주의로 규정했고, 스탈린 사후와 중국과의 분열 뒤에는 이 비판을 소련과 중국에까지 넓혔다. 『제국주의와 혁명』에서 그는 중국이 미국과 손잡고 소련에 맞서며 초강대국이 되려는 사회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다고 보았고, 마오쩌둥을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아니라 진보적 혁명적 민주주의자이자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에 관념론과 중국 고대 철학을 섞은 절충주의자로 평가했다. 1977년 12월에는 중국 혁명이 민족해방 무장투쟁을 통한 신형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었을 뿐 사회주의 혁명이 될 수 없었다고 썼다.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도 프롤레타리아적이지도 혁명도 아닌 전국 규모의 궁정 쿠데타였다고 깎아내렸다. 유로코뮤니즘은 반공산주의 운동으로 취급했다. 한편 각 나라가 자기 조건에 따라 서로 다른 길로 사회주의를 추구할 권리를 인정하면서도, 호자 자신은 티토주의를 실천 전반에서 '반마르크스주의'로 보았다. 국내에서는 1967년 알바니아를 세계 최초의 무신론 국가로 선언했고, 중국과의 분열 뒤에는 외국의 원조나 차관 없이 오로지 자기 힘에 기대는 자력갱생을 내세웠다.
마오주의·반수정주의와의 구분
반수정주의는 흐루쇼프 이후 소련을 수정주의·사회제국주의로 비판한 넓은 입장으로, 1960년대에는 중국 공산당과 알바니아 노동당이 그 두 중심이었다. 마오주의가 마오쩌둥 사상과 3개 세계론, 문화대혁명을 반수정주의의 정점으로 보았다면, 호자주의는 바로 그 마오쩌둥 사상을 수정주의의 한 형태로 규탄하며 반수정주의 진영 안에서 갈라져 나왔다. 그래서 호자주의는 마오주의의 연장이 아니라 그에 대한 반대 노선이며, 중국과 소련, 유고슬라비아를 모두 적대하는 데서 자기 정체성을 찾았다. 티토주의가 소련 모델에서 벗어난 자주관리와 비동맹을 내세웠다면, 호자주의는 그런 이탈 자체를 수정주의로 보았다. '수정주의'라는 말은 호자주의에서 정통에서 이탈했다는 비난어로 쓰였고, 호자주의자들은 1944년 미국 공산당을 해산한 브라우더주의를 현대 수정주의의 선구로 꼽았다.
확산과 그 뒤
중국-알바니아 분열 뒤 알바니아는 마오주의자들 가운데 상당수, 특히 라틴아메리카의 조직들을 끌어들였다. 브라질 공산당이 호자주의 노선을 따랐고, 티그라이 인민해방전선도 1991년까지 이 흐름에 섰다. 서독에서는 독일 공산당(마르크스-레닌주의)이 가장 큰 호자주의 정당이었다. 호자는 1985년 4월 11일 사망했고 라미즈 알리아가 뒤를 이었다. 1991년 알바니아 공산 체제가 무너진 뒤 호자주의 정당들은 1994년 국제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조직 회의(통일과 투쟁)와 그 간행물 『통일과 투쟁』을 중심으로 다시 모였다. 비판자들은 호자를 '알바니아의 스탈린'으로 만든 개인숭배, 종교 금지, 반대자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호자주의의 본질로 지적하며, 많은 이들이 호자주의를 스탈린주의에 호자의 이름을 새겨 넣으려는 시도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