механисты · 1924–1929

기계론자 (소련 철학)

Mechanists (Soviet philosophy)

1920년대 소련 철학 논쟁에서 아브람 데보린을 중심으로 한 ‘변증법론자’(데보린파)에 맞선 진영. 이반 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 류보프 악셀로드(필명 오르토독스), 아르카디 티미랴제프 등 자연과학자가 많았고,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자연과학의 법칙을 존재와 사유의 모든 영역으로 넓힌 것일 뿐 과학과 따로 떨어진 ‘철학’의 영역은 없다고 보았다. 1929년 제2차 전연방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술연구기관 협의회가 이들을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에서 명백히 이탈한 조류로 규정하면서 논쟁에서 졌고, 1930~31년에는 이긴 데보린파마저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으로 몰리면서 철학 논쟁 자체가 당의 결정으로 끝났다.

상세

혁명 뒤 소련 철학자들은 무엇을 두고 다퉜나?

1917년 혁명 뒤 마르크스주의는 국가의 공식 세계관이 되었다. 그런데 막상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무엇을 하는 학문인지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철학 체계를 남기지 않았고, 엥겔스와 플레하노프가 쓴 개설과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1920년대의 소련 철학자들은 아주 기초적인 물음으로 갈라섰다. 철학은 물리학·화학·생물학이 밝혀낸 것을 정리하는 일에 그치는가, 아니면 과학이 스스로 답할 수 없는 일반 법칙을 따로 연구하는 독자적 학문인가?

레닌은 1922년 철학 잡지 《마르크스주의의 깃발 아래》에 보낸 「전투적 유물론의 의의에 대하여」에서 두 가지를 함께 주문했다. 잡지가 “이 일에 자연과학자들을 끌어들여야” 하고, 동시에 편집진이 “헤겔 변증법의 유물론적 벗들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레닌에게는 하나의 과제였던 이 두 주문이 그가 죽은 뒤에는 서로 다른 두 진영의 깃발이 되었다. 자연과학 쪽에 무게를 둔 사람들이 ‘기계론자’, 헤겔 연구 쪽에 무게를 둔 사람들이 ‘변증법론자’라 불렸다. 논쟁은 1924년 《볼셰비크》와 《마르크스주의의 깃발 아래》 같은 이론 잡지와 단행본에서 시작되었다.

привлекать к этой работе в философском журнале естествоиспытателей
«обществом материалистических друзей гегелевской диалектики»

불을 붙인 것은 엥겔스의 유고였다. 엥겔스가 1870~80년대에 쓰다 만 『자연변증법』은 1925년 모스크바에서 독일어 원문과 러시아어 번역으로 처음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엥겔스는 여기서 변증법의 법칙이 “자연과 인간 사회의 역사에서 추상된다”고 하고, 그 법칙을 셋으로 정리했다. 양에서 질로, 질에서 양으로의 전화의 법칙, 대립물의 상호침투의 법칙,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다. 이 책은 변증법이 자연 자체 안에서 작동한다는 근거로 읽혔고, 그렇다면 자연과학자는 변증법을 배워야 하느냐, 아니면 변증법이란 과학이 이미 하고 있는 일의 다른 이름이냐가 쟁점이 되었다.

Es ist also die Geschichte der Natur wie der menschlichen Gesellschaft, aus der die Gesetze der Dialektik abstrahiert werden.

기계론자들은 무엇을 주장했나?

기계론자로 묶인 사람들은 류보프 악셀로드(오르토독스), 알렉산드르 바랴시, 블라디미르 사라뱌노프, 이반 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 아르카디 티미랴제프 등이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자연과학의 법칙을 존재와 사유의 모든 영역으로 넓히는 학설로 해석했다. 『자본』을 러시아어로 옮긴 볼셰비키 원로이자 진영의 지도자였던 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의 말이 그 생각을 잘 보여 준다. “마르크스주의자에게는 과학과 따로 떨어져 고립된, 그 나름의 무슨 특별한 ‘고유한 연구 방법’을 가진 ‘철학함’의 영역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아예 「자연의 변증법적 이해는 기계론적 이해다」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Для марксистов не существует области какого-то «философствования», отдельной и обособленной от науки, с какими-то своими, будто бы особыми, «специфическими методами исследования».

여기서 ‘기계론’은 낮춤말처럼 들리지만, 그들이 지키려던 것은 근대 과학의 설명 방식이었다. 생명 현상도 결국 화학과 물리학으로, 질의 차이도 결국 입자의 양과 운동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양이 질로 바뀐다’는 말은 과학이 측정하고 계산하는 과정을 다르게 표현한 것일 뿐이고, 그 위에 헤겔의 개념을 덧씌우는 것은 과학 바깥에서 자연에 법칙을 강요하는 형이상학이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과학은 그 자체가 철학이다”라는 실증주의의 명제를 숨기지 않고 되풀이했다. 물리학자 티미랴제프는 같은 이유로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을 관념론이라며 배격했다.

«Наука — сама себе философия»

정치 무대에서는 니콜라이 부하린이 이들 편으로 여겨졌다. 부하린은 1921년의 『사적 유물론 이론』에서 사회와 자연의 관계를 균형이 깨지고 다시 회복되는 과정으로 설명했는데, 비판자들은 이것이 사물 내부의 모순 대신 바깥 힘들의 충돌로 발전을 설명하는 기계론적 ‘균형론’이며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보았다. 부하린 자신은 기계론자를 자처하지 않았다. 류보프 악셀로드는 혁명 전 보그다노프 같은 마흐주의자들을 레닌보다 먼저 공격해 ‘정통파’라는 뜻의 필명 오르토독스를 얻은 플레하노프의 제자였다. 기계론자 진영은 신참 이론가들이 아니라 혁명 전부터 유물론을 지켜 온 사람들이었다.

데보린파는 무엇으로 맞섰나?

반대편의 중심은 플레하노프의 제자로 1926년부터 《마르크스주의의 깃발 아래》 책임편집자였던 아브람 데보린이었다. 니콜라이 카레프, 이반 루폴, 얀 스텐, 그리고리 밤멜 같은 제자들이 그 둘레에 모였고, 블라디미르 아도라츠키와 예멜리얀 야로슬랍스키 등도 기계론 비판에 가담했다. 이들에게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자연과학의 결론과 같은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지위와 고유한 내용을 가진 학문이었다. 그 내용은 헤겔의 논리학을 유물론적으로 다시 읽어 얻는 변증법의 범주들이었다.

데보린파는 엥겔스의 『반뒤링론』과 막 출간된 『자연변증법』에 기대어 변증법의 법칙이 자연 속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했다. 기계론자들이 과학의 이름으로 철학을 거부하자, 데보린파는 오히려 당시 최신 과학인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을 들어 기계론자들의 자연관이 너무 좁다고 반박했다. 고전역학의 입자와 힘만으로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현대 물리학이 보여 준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스피노자를 둘러싼 다툼도 있었다. 기계론자들은 스피노자를 관념론적 형이상학자로 보았고, 데보린은 스승 플레하노프를 따라 그를 유물론자이자 변증론자로 보았다.

논쟁은 차분한 학술 토론이 아니었다. 양쪽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서로를 관념론, 수정주의, 해당주의, 스콜라주의, 절충주의, 반마르크스주의, 철학적 무능이라고 비난했다. 철학의 문제가 곧바로 당에 대한 충성의 문제로 번역되는 언어가 이때 이미 쓰이고 있었다.

1929년에 무엇이 결정되었고, 그 뒤 어떻게 되었나?

1929년 4월 제2차 전연방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술연구기관 협의회는 기계론 비판을 마무리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결의는 이 조류가 “실제로는 혁명적-유물론적 변증법을 속류 진화론으로, 유물론을 실증주의로 바꿔치기하며” 변증법적 유물론의 방법이 자연과학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의 입장에서 명백히 이탈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같은 해 데보린은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고 공산주의 아카데미 철학연구소의 초대 소장이 되었다. 러시아어 위키백과가 인용하는 연구들은 데보린파가 이긴 것이 논증의 힘보다 그들이 쥐고 있던 행정적 지렛대 덕분이었다고 평가한다.

подменяя на деле революционно-материалистическую диалектику вульгарным эволюционизмом, а материализм — позитивизмом
это течение представляет явный отход от марксистско-ленинских философских позиций.

1929년은 부하린이 ‘우익 편향’으로 몰려 정치국에서 밀려난 해이기도 했다. 철학의 기계론은 정치의 우익 반대파와 한데 묶여 공격받았고, 데보린파의 승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1930년 12월 9일 스탈린은 붉은교수양성소 철학·자연과학 분과의 당 세포 간부들을 만나 ‘철학 전선의 두 전선 투쟁’을 이야기했고, 이 자리에서 데보린파를 겨냥한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이라는 낙인이 나왔다. 1931년 1월 25일 중앙위원회가 《마르크스주의의 깃발 아래》에 관한 결정을 내리자 데보린은 철학연구소 지도부에서 물러났고, 마르크 미틴과 파벨 유딘이 소련 철학의 새 지도부가 되었다. 이제 기계론은 우익 편향,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은 그와 짝을 이루는 또 하나의 편향이 되었다.

기계론자들의 운명은 엇갈렸다. 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는 1928년 10월에 병으로 죽어 크렘린 벽에 묻혔으므로 단죄를 보지 않았다. 류보프 악셀로드는 1930년대 초 ‘이른바 기계론자’로 분류된 뒤 이름이 잊혔고, 마지막 책은 1934년에 나왔으며 1946년에 죽었다. 데보린의 제자 얀 스텐은 1937년 총살되었다.

이 논쟁은 소련 철학에 무엇을 남겼나?

러시아어 위키백과의 정리대로, 이 논쟁 이후 소련에서 공식 교조와 무관한 철학 연구의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졌다. 스탈린은 철학의 쟁점을 토론이 아니라 결정으로 끝냈고, 1938년 『단기강좌』 제4장 2절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에 대하여」에서 변증법의 특징을 네 가지로 정리했다. 그 첫머리는 늘 “형이상학과는 반대로 변증법은 자연을 정지와 부동의 상태로 보지 않고…”라는 형식이었다. 기계론자들이 무기로 삼던 ‘형이상학 비판’이 이제 국가 교과서의 문형이 된 것이다. 동시에 엥겔스의 세 법칙 가운데 부정의 부정은 이 정식화에서 빠졌다. 헤겔의 냄새가 짙은 이 법칙을 빼 버린 것은 데보린파가 공들인 헤겔 연구가 더는 환영받지 못한다는 신호로도 읽힌다.

В противоположность метафизике диалектика рассматривает природу не как состояние покоя и неподвижности

공식 소련 철학사는 이 논쟁을 레닌주의적 변증법이 기계론과 관념론이라는 ‘두 전선’에서 승리한 과정으로 서술했다. 반면 1981년 망명지에서 『소련에서 철학의 억압』을 낸 이예구다 야홋이나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의 알렉산드르 오구르초프 같은 연구자들은 이를 철학적 사유가 억눌리기 시작한 첫 단계로 본다. 데보린 자신은 1956년 아나스타스 미코얀을 만나 낙인을 풀어 달라고 청하면서 “25년째 그게 무엇인지 이해하려 애쓰고 있지만 아직도 모르겠다”고 웃었다고 한다.

вот уже 25 лет стараюсь понять, что это такое, да так и не понял

그래도 이 논쟁이 던진 물음은 1920년대에 끝나지 않았다. 철학이 과학의 결론을 따라야 하느냐, 과학을 이끌어야 하느냐는 문제는 철학이 생물학 논쟁의 심판관으로 나선 1948년의 리센코주의에서 가장 나쁜 방식으로 되풀이되었고, 해빙기 이후 에발드 일리옌코프 세대가 변증법적 논리를 다시 연구할 때에도 출발점이 되었다. 철학이 과학에 무엇을 보탤 수 있는지, 또 무엇을 강요해서는 안 되는지를 묻는 사람에게 이 논쟁은 양쪽의 실패를 함께 보여 주는 사례로 남아 있다. 이 사전의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 항목은 1930~31년 데보린파 단죄를, 이 항목은 그에 앞선 기계론자와 변증법론자의 논쟁을 다룬다.

관련 인물

출처

  1. 위키백과 (러시아어)
  2. 위키백과 (영문)
  3. 위키백과 (러시아어)
  4. 위키백과 (러시아어)
  5. 위키백과 (러시아어)
  6. ru.wikisource.org
  7. de.wikipedia.org
  8. web.archive.org
  9. lib.ru
  10. 위키백과 (러시아어)
  11. 위키백과 (러시아어)
  12. 위키백과 (러시아어)
  13. 위키백과 (러시아어)
  14. 위키백과 (러시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