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주의
Monetarism
통화량의 변동이 단기에는 생산에, 장기에는 물가 수준에 큰 영향을 준다고 보고, 중앙은행이 재량적 정책 대신 통화량 증가율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제학 학파. 밀턴 프리드먼이 대표하며,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이라는 말로 알려졌다.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속에서 케인스주의의 대안으로 떠올라 1979년 이후 미국 연준의 볼커 쇼크와 영국 대처 정부의 긴축 정책에 영향을 주었다.
상세
통화주의의 뿌리는 어빙 피셔와 앨프리드 마셜 같은 경제학자들이 내놓은 오래된 화폐수량설이다. 통화량이 늘어나면 물건 값이 오른다는 생각이다. 밀턴 프리드먼은 1956년 이 이론을 다시 정식화했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필요한 만큼만 돈을 들고 있으려 하므로, 통화량이 늘면 남는 돈을 써 버리고 그만큼 총수요가 커진다. 반대로 통화량이 줄면 사람들은 지출을 줄여 돈을 다시 채운다. 이것은 「돈은 중요하지 않다」는, 케인스에게 돌려지던 단순화에 맞선 주장이었고, 여기서 「통화주의자」라는 말이 생겼다.
프리드먼은 안나 슈워츠와 함께 쓴 『미국 화폐사, 1867~1960』(1963)에서 역사적 근거를 댔다. 이 책은 인플레이션을 중앙은행이 만들어 낸 지나친 통화 공급 탓으로,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을 유동성 위기 때 중앙은행이 통화를 받쳐 주지 못한 탓으로 돌렸다. 특히 1930년대 대공황은 케인스가 말한 투자 부족이 아니라 통화량의 대규모 수축, 곧 「대수축」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처방은 규칙이었다. 프리드먼은 해마다 통화량을 실질 국내총생산 증가율과 같은 일정 비율만큼 자동으로 늘리는 「k% 규칙」을 내놓았다. 경제가 2% 성장할 것으로 보이면 통화량도 2% 늘리는 식이다. 재량적 통화 정책은 경제를 안정시키는 만큼 흔들 수도 있으므로 연준을 고정된 규칙에 묶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통화주의자는 금본위제에도 반대했다. 인구나 교역이 금보다 빨리 늘면 디플레이션을 막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 통화주의가 인기를 얻은 것은 1971년 닉슨 쇼크와 1973년 석유 파동 뒤 실업과 인플레이션이 함께 오르는 현상을 케인스주의가 설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을 때였다. 1979년 카터 대통령이 연준 의장에 앉힌 폴 볼커는 통화량을 죄어 인플레이션을 잡으려 했고, 그 결과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금리가 크게 올랐다. 1979년부터 1982년 여름까지 이어진 이 「볼커 쇼크」는 인플레이션을 낮추고 실업을 늘렸다. 같은 해 5월 영국 총선에서 이긴 마거릿 대처도 통화주의를 인플레이션과 싸우는 무기로 삼았다. 인플레이션은 1983년 4.6%로 내려갔지만, 실업률은 1979년 5.7%에서 1982년 13.0%까지 올랐다.
통화주의의 전성기는 짧았다. 통화량 목표가 쓸모 있으려면 통화량과 명목 국내총생산의 관계, 곧 화폐의 유통 속도가 안정적이어야 한다. 1970년대에는 유통 속도가 비교적 일정하게 오르는 듯했지만 1980~1990년대에는 크게 불안정해졌고, 통화량과 명목 국내총생산 사이의 안정된 관계가 무너지자 통화주의에 설득되었던 많은 경제학자들이 이 접근을 버렸다. 영국에서도 대처 정부는 1980년 예산의 중기 재정 전략에 담은 통화량 목표를 여러 번 넘기자 1982년 목표를 올려 잡았다. 1990년대 초부터 주요 중앙은행은 단기 금리를 주된 수단으로 물가를 직접 겨냥하는 인플레이션 목표제로 옮겨 갔다.
그래도 유산은 남았다. 인플레이션 억제가 중앙은행의 일차 책임이라는 믿음, 재정 정책뿐 아니라 통화 정책도 단기 생산에 영향을 준다는 인식은 2000년대의 새 신고전파 종합, 곧 거시경제학의 합의된 견해에 흡수되었다. 신자유주의를 다루는 쪽에서는 통화주의를 가격 안정을 다른 거시 목표보다 앞세우는 신자유주의의 핵심 경제 이론 가운데 하나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