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세계 외채위기와 구조조정
1970년대 석유 달러로 넘치던 은행 대출은 왜 1982년 멕시코의 모라토리엄과 함께 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 전체의 외채위기가 되었나? IMF는 돈을 빌려주며 무엇을 요구했고, 「잃어버린 10년」 동안 채무국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나? 베이커 플랜과 브레이디 플랜, 워싱턴 컨센서스는 위기를 어떻게 정리했으며, 채무국과 사회주의권은 어떻게 맞서거나 다른 길을 갔나?
1970년대 서방 은행들은 석유 수출국의 달러를 변동 금리 대출로 라틴아메리카와 동유럽 정부에 빌려주었다. 1979년 이후 미국의 금리 인상과 1차 산품 가격 하락으로 이자 부담이 치솟자, 1982년 8월 멕시코가 800억 달러 외채를 갚을 수 없다고 선언했고 위기는 브라질·아르헨티나·베네수엘라와 아프리카로 번졌다. IMF와 공적 기구들은 이자를 갚을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긴축, 보조금 폐지, 평가절하, 민영화, 무역 자유화를 요구하는 구조조정을 조건으로 걸었다. 라틴아메리카의 실질 임금은 20~40% 떨어졌고 1980년대는 「잃어버린 10년」이 되었다. 1985년 베이커 플랜은 개혁을 앞세웠고, 1989년 브레이디 플랜이 원금 일부를 탕감했으며, 같은 해 윌리엄슨은 그 처방을 「워싱턴 컨센서스」로 정리했다. 튀니지의 빵 폭동, 카스트로와 상카라의 외채 거부 호소,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소가 이에 맞섰다.
1970년대에 남의 돈은 어떻게 라틴아메리카와 동유럽으로 흘러들었나? {mexico} {brazil} {argentina}
1960~1970년대 브라질·아르헨티나·멕시코 같은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은 공업화, 특히 도로·발전소 같은 기반 시설을 짓기 위해 외국에서 큰돈을 빌렸다. 경제가 빠르게 크던 때라 빌려주는 쪽도 기꺼이 응했다. 처음에는 세계은행 같은 공적 기구의 차관이 중심이었으나, 1973년 석유 가격이 폭등한 뒤 사정이 달라졌다. 석유 수출국들이 벌어들인 막대한 달러, 이른바 페트로달러를 서방의 대형 은행에 맡겼고, 은행들은 그 돈의 상당 부분을 라틴아메리카 정부에 다시 빌려주었다. 이것을 「페트로달러 환류」라 부른다. 미국 정부도 이 중개를 부추겼다. 1 2 3
돈은 주로 「신디케이트 대출」로 나갔다. 여러 은행이 함께 한 나라 정부에 큰 금액을 빌려주는 방식인데, 금리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런던 은행 간 금리(LIBOR)에 연동되어 대략 6개월마다 다시 정해졌다. 개발도상국 부채의 약 3분의 2가 이런 변동 금리였다. 빌릴 때는 금리가 낮아도, 미국의 금리가 오르면 이자 부담이 곧바로 따라 오르는 구조였다. 1970년 말 라틴아메리카의 대외 부채는 290억 달러였으나 1978년 말 1,590억 달러, 1982년에는 3,270억 달러로 불어났다. 1982년 미국 9대 은행이 보유한 라틴아메리카 채권은 그 은행들 자본금의 176%에 이르렀다. 4 3
같은 시기 사회주의권 일부도 서방 은행에서 돈을 빌렸다. 폴란드는 에드바르트 기에레크 아래에서 서방 차관으로 공장을 현대화하고, 그 제품을 서방에 수출해 빚을 갚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973년 석유 위기 뒤 계획은 흔들렸고, 수출 수입 가운데 빚 갚는 데 들어간 몫은 1971년 12%에서 1979년 75%로 뛰었다. 유고슬라비아의 외채도 해마다 20%씩 불어 1980년대 초 200억 달러를 넘었고, 루마니아도 1970년대 석유 사업의 실패로 큰 외채를 졌다. 이 나라들의 이야기는 「1980~1981년 폴란드 경제위기」와 「루마니아의 외채 상환과 긴축」 항목에서 따로 다룬다. 5 6 7
미국의 금리 인상은 왜 빚을 갚을 수 없게 만들었나?
1970년대 후반 선진국들의 최우선 과제는 물가를 잡는 일이었다. 1979년 10월 연방준비제도 의장 폴 볼커는 인플레이션을 억누르기 위한 새 조치를 발표했고, 미국과 유럽의 금리가 함께 치솟았다(이 정책은 볼커 쇼크 항목에서 다룬다). 그 결과 라틴아메리카 대출에 붙는 LIBOR 금리는 1980년 평균 10.2%에서 1981~1982년 평균 15.8%로 올랐다. 변동 금리 대출이었으므로 채무국은 새로 빌리지 않아도 이미 진 빚의 이자를 훨씬 많이 내야 했다. 1975년 120억 달러이던 라틴아메리카의 원리금 상환액은 1982년 660억 달러로 늘었다. 8 4 1
금리만이 아니었다. 1981년 세계 무역이 줄어들면서 라틴아메리카의 주력 수출품인 1차 산품 가격이 떨어졌다. 빚은 달러로 졌으므로, 달러가 강해지고 자국 통화 가치가 떨어질수록 같은 달러 빚을 갚는 데 훨씬 많은 자국 돈이 들었다. 멕시코는 앞으로 들어올 석유 수입을 믿고 달러 빚을 졌는데, 1981년 여름 국제 유가가 떨어지자 상환 능력이 빠르게 무너졌다.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의 분석은 멕시코 위기를 직접 일으킨 것이 높은 금리와 1982년의 유가 급락이 겹친 일이었다고 정리한다. 1 9 4
위험을 내다본 사람도 있었다. 1977년 당시 연방준비제도 의장 아서 번스는 강연에서 상업은행들이 제3세계 대출로 지나친 위험을 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1970년대 초에는 실질 금리가 거의 0이었고 세계 경제가 커지고 있었으므로, 은행과 채무국 모두 대출이 계속 갈아타질 수 있으리라 여겼다. 대부분의 대출이 만기가 짧아서, 은행이 만기 연장을 거부하는 순간 갚아야 할 돈이 한꺼번에 몰리는 구조였다. 1970년대 말 금리가 오르자 은행들은 오히려 상환 기간을 줄이고 금리를 올렸다. 3 1
1982년 8월 멕시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
1982년 2월 멕시코는 페소를 평가절하했지만 자본 도피는 멈추지 않았다. 8월 12일 재무장관 헤수스 실바 에르소그는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 재무장관,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에게 멕시코가 8월 16일로 다가온 원리금을 갚을 수 없다고 알렸다. 멕시코의 외채는 800억 달러였고 대부분 달러 표시였다. 멕시코는 90일 동안 일방적으로 지불을 유예(모라토리엄)하겠다고 밝히고, 상환 기한 재조정과 기존 빚을 갚기 위한 새 대출을 요청했다. 국제 자본시장이 라틴아메리카가 빚을 갚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 순간이 외채위기의 출발점이다. 4 1 9
9월 1일 임기 마지막 국정 보고에서 호세 로페스 포르티요 대통령은 자본 도피를 일으킨 기업가와 은행가를 비난하며 은행을 국유화했다. 그는 “그들이 우리를 약탈했지만 멕시코는 끝나지 않았다. 다시는 우리를 약탈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8월에 세계 중앙은행가들을 긴급 소집해 멕시코에 단기 연결 대출을 마련했고, 미국 은행들에 멕시코 대출의 상환 일정 재조정에 참여하라고 권했다. 12월 1일 취임한 미겔 데 라 마드리드 대통령은 깊은 공공 지출 삭감과 시장 개방으로 방향을 틀었다. 9 3 10
멕시코의 모라토리엄 뒤 상업은행들은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새 대출을 크게 줄이거나 끊었다. 대출 상당수가 단기였으므로 만기 연장이 거부되자 이전 같으면 갈아탔을 수십억 달러가 곧바로 상환 기일을 맞았다. 1983년 10월까지 27개국이 2,390억 달러의 빚을 은행과 재조정했거나 재조정 중이었다. 그 가운데 16개국이 라틴아메리카였고, 멕시코·브라질·베네수엘라·아르헨티나 네 나라가 상업은행에 진 빚만 1,760억 달러로 개발도상국 부채 전체의 약 74%였다. 미국 8대 은행에 대한 빚은 그 은행들 자본과 준비금의 147%에 달해, 세계 최대 은행 몇 곳이 파산 위험에 몰렸다. 1 4
위기는 곧 남미의 두 큰 나라로 번졌다. 아르헨티나에서는 1976~1983년 군사정권 아래 경제장관 호세 알프레도 마르티네스 데 오스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도하는 동안 외채가 불어났고, 1983년 물가 상승률은 344%에 이르렀다. 브라질에서는 1985년 민정 이양으로 대통령이 된 주제 사르네이가 막대한 외채와 치솟는 인플레이션을 물려받았다. 1986년 2월 28일의 크루자두 계획은 물가를 동결하고 화폐를 바꾸어 처음에는 큰 지지를 받았지만, 고정된 환율이 수입을 늘리고 수출을 해치면서 외환 보유고가 무너졌다. 물가를 잡으려던 계획이 국제수지를 악화시켜 결국 대외 채무를 지킬 능력까지 무너뜨린 것이다. 11 12 13
IMF는 돈을 빌려주며 무엇을 요구했나? {usa}
위기가 멕시코 밖으로 번지자 미국은 상업은행·중앙은행·IMF가 함께하는 「국제 최종 대부자」 체제를 짰다. 은행들은 빚의 상환 일정을 다시 짜고, IMF와 공적 기관들은 채무국이 원금은 아니라도 이자는 갚을 수 있게 돈을 빌려주었다. 그 대가로 채무국은 경제 구조를 개혁하고 재정 적자를 없애기로 약속해야 했다. 이렇게 개혁하면 수출이 늘고 무역 흑자로 달러를 벌어 빚을 갚을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결국 새 돈은 대부분 채무국 경제로 가지 않고 은행의 이자로 되돌아갔다. 3 1 14
이 약속을 「조건부」(conditionality)라 한다. IMF는 대출의 조건으로 정책 개혁을 요구하고, 조건을 지키지 않으면 돈을 멈춘다. 조건은 대개 통화 평가절하로 국제수지 적자를 줄이고, 세금을 올리고 정부 지출을 깎아 재정 적자를 줄이며, 식료품 보조금을 없애고 공공요금을 올리며 임금을 깎는 「안정화」 정책과, 시장 자유화·국영기업 민영화·외국인 투자자 권리 강화·수출 중심 재편 같은 장기 「조정」 정책으로 이루어졌다. 이 묶음을 구조조정이라 부른다. 1980년대 IMF와 세계은행은 라틴아메리카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대부분 나라에 이런 대출 묶음을 만들었고, 멕시코가 그 첫 나라였다. 14 15 16
1980년대 중반 IMF의 역할 자체가 바뀌었다. 통화 안정이라는 좁은 임무에서 구조조정 프로그램으로 시장 자유화 개혁을 밀어붙이는 쪽으로 넓어진 것인데, 기구의 헌장을 공식적으로 고치지 않은 채 일어난 변화였다. 레이건 행정부, 특히 1985년 재무장관이 된 제임스 베이커와 그 부하들이 IMF의 조건부 대출에 시장 자유화 개혁을 붙이라고 압박했다. 미국의 투표권이 가장 많은 IMF에서 채권국의 목소리는 채무국보다 훨씬 컸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경험을 분석한 한 연구는 구조조정이 국가 활동을 줄이고 시장을 자유화해야만 성장이 다시 시작된다는 전제 위에 설계되었다고 정리한다. 14 17 15
「잃어버린 10년」은 사람들의 삶에 무엇을 남겼나? {mexico} {argentina} {brazil}
1982년 외채위기는 라틴아메리카 역사상 가장 심각한 경제 위기였다. 소득과 수입이 줄고 성장이 멈추었으며 실업이 치솟고 인플레이션이 중간층의 구매력을 갉아먹었다. 1980년 이후 10년 동안 도시의 실질 임금은 20~40% 떨어졌다. 1980~1985년 지역의 실질 성장률은 2.3%에 그쳤고, 1인당으로는 거의 9% 뒷걸음질했다. 그런데도 1982~1985년 라틴아메리카는 1,080억 달러를 갚았다. 빈곤과 사회 문제에 쓸 수 있었을 돈이 빚 갚는 데 들어간 것이다. 이 시기를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잃어버린 10년」(La Década Perdida)이라 부른다. 1
연방준비제도의 역사 서술도 이 처방이 문제를 곪게 했다고 본다. 많은 채무국이 국영기업 보조금을 없애는 대신 기반 시설·보건·교육 지출을 깎고 임금을 동결하거나 공무원을 해고했고, 그 결과가 높은 실업과 1인당 소득의 급락, 정체하거나 마이너스인 성장이었다. 멕시코에서는 1987년 연간 물가 상승률이 139.7%까지 올랐고, 실질 임금은 1978년의 절반으로 떨어졌다. 1985년 9월 19일 멕시코시티 대지진으로 적어도 5천 명이 죽었을 때도 정부는 연방 예산의 약 30%를 외채 상환에 쓰고 있었고, 복구를 위해 외채 지불을 줄이기를 거부해 비판받았다. 3 18 10 19
아르헨티나에서는 1983년 민정 이양 뒤 라울 알폰신 정부가 군사정권의 외채와 높은 인플레이션을 물려받았다. 1985년 아우스트랄 계획으로 물가와 임금을 묶고 IMF가 요구한 것보다 더 크게 지출을 줄였지만, 수출 가격이 떨어지고 수입이 늘어 외채 이자를 더 갚을 수 없게 되자 IMF 프로그램을 지키지 못해 국제 금융을 잃었다. 아프리카도 같은 길을 걸었다. 구리 수출에 기대던 잠비아는 1980년대 중반 국내총생산 대비 세계에서 가장 빚이 많은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IMF의 요구로 식료품 보조금을 없애자 생필품 값이 크게 올라 도시 주민들이 봉기했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1970~2002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가 2,940억 달러를 빌려 2,680억 달러를 갚고도 여전히 3,000억 달러를 빚지고 있다고 추산했다. 20 21 22
베이커 플랜과 브레이디 플랜은 무엇이 달랐나?
1985년 재무장관이 된 제임스 베이커는 플라자 합의와 함께 「베이커 플랜」을 마련했다. 그 중심에는 채무국의 시장 지향 개혁이 있었다. 베이커와 그 부하들은 IMF의 조건부 대출에 시장 자유화 개혁을 붙이라고 압박했고, 경제학자 존 윌리엄슨은 민간 부문이 더 효율적이라는 믿음은 워싱턴의 오랜 신조였지만, 다른 나라의 민영화를 촉진하는 것이 미국의 공식 정책이 된 것은 1985년 베이커 플랜이 발표되면서부터라고 썼다. 미국 은행 규제 당국은 그동안 은행들이 개발도상국 대출 손실을 장부에 제대로 반영하지 않도록 눈감아 주었다. 손실을 다 인정하면 대형 은행들이 지급불능으로 판정받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17 14 23 3
협상이 몇 년 이어지면서 대출 대부분이 상환되지 않으리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1987년 시티은행이 처음으로 개발도상국 대출 손실 충당금 33억 달러를 쌓았다. 전체 개발도상국 대출의 30%가 넘는 금액이었고, 다른 은행들도 곧 뒤따랐다. 1989년이면 미국 정부도 채무국이 성장을 되살리면서 빚을 다 갚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베이커 플랜이 개혁을 앞세웠다면, 재무장관 니컬러스 브레이디가 제안한 「브레이디 플랜」은 대출 원금과 원리금 부담을 영구히 줄이는 쪽으로 돌아섰다. 1989년 3월 그 첫 채권이 만들어졌다. 3 24
브레이디 플랜은 은행의 대출 채권을 원금이 미국 재무부 30년 만기 무이표채로 보증되는 새 채권, 곧 「브레이디 채권」으로 바꾸어 주었다. 은행은 원래 대출보다 액면이 낮은 할인 채권이나, 액면은 같되 금리가 낮은 액면 채권 가운데 골랐다. 거래할 수 있는 채권이 되자 은행은 그 위험을 장부에서 덜어낼 수 있었다. 1989~1994년 민간 채권자들은 18개국에 대한 1,910억 달러 가운데 약 32%, 610억 달러를 탕감했다. 그 대가로 참가국들은 경제를 자유화해야 했고, 스페인어판 위키백과의 서술처럼 사실상 워싱턴 컨센서스의 지침을 따르는 것이 조건이었다. FDIC는 브레이디 플랜으로 세계 최대 은행들의 주주가 손실을 떠안으며 10년의 협상 끝에 위기가 끝났다고 평가한다. 24 4 25
워싱턴 컨센서스란 무엇이었나?
1989년 워싱턴의 국제경제연구소(현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 경제학자 존 윌리엄슨은 라틴아메리카 각국이 개혁을 얼마나 했는지 재는 연구의 기준 문서에서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말을 처음 썼다. 외채위기 해법을 말할 때마다 채무국에 「집안 정리」, 「정책 개혁」, 「강한 조건부 수용」을 요구하는데, 그것이 워싱턴에서 무엇을 뜻하는지 정리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가 말한 워싱턴은 의회와 행정부, 그리고 IMF·세계은행·미국 재무부·연방준비제도·싱크탱크로 이루어진 기술관료의 워싱턴이었다. 그는 재정 규율, 공공 지출의 재배분, 조세 개혁, 시장이 정하는 금리, 경쟁력 있는 환율, 무역 자유화, 외국인 직접투자 자유화, 국영기업 민영화, 규제 완화, 재산권 보장의 열 가지를 꼽았다. 23 26 27
이 말은 곧 윌리엄슨의 열 가지를 넘어 시장 근본주의나 신자유주의 일반을 가리키는 넓은 뜻으로 쓰이게 되었고, 윌리엄슨은 그 쓰임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자본 계정 자유화, 통화주의, 공급 측 경제학, 최소 국가를 일부러 뺐다고 말했다. 한편 그 자신도 1990년 글에서, 1980년대 워싱턴이 라틴아메리카의 긴축 정책을 지지한 동기 가운데 하나로 미국이 외채 원리금을 계속 받으려는 이해를 꼽는 사람들도 있다고 적었다. 용어의 두 가지 뜻과 그것을 둘러싼 평가는 워싱턴 컨센서스 항목에서 자세히 다룬다. 26 23
채무국과 그 주민들은 어떻게 맞섰나? {cuba} {burkina-faso} {brazil} {peru} {venezuela}
구조조정은 거리의 저항을 불렀다. 흔히 「IMF 폭동」이라 불린 봉기는 대개 보조금 폐지로 빵과 연료, 버스 요금이 오른 날 터졌다. 튀니지에서는 1983년 12월 29일 정부가 IMF 차관의 조건에 따라 밀과 세몰리나 보조금을 없애자 빵값이 두 배 넘게 뛰었고, 이듬해 1월 초까지 이어진 「빵 폭동」에서 100명이 넘게 죽었다. 앞서 1977년 1월 이집트에서도 IMF와 합의하던 정부가 기초 식료품 보조금을 깎자 「빵 봉기」가 일어났다. 멕시코시티에서는 1986년 시위대가 IMF와 정부에 맞서 행진했다. 28 29 3
가장 큰 봉기는 1989년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소」였다.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는 선거 운동 때 IMF 직원을 「경제 전체주의에 고용된 대량 학살자」라 부르며 자유화를 거부했지만, 2월 2일 취임한 뒤 외환 보유고가 3억 달러, 국가 부채가 340억 달러인 현실 앞에서 돌아섰다. 2월 16일 그는 IMF가 권한 충격요법, 이른바 「대전환」을 발표했고, 휘발유 보조금 삭감으로 휘발유값이 두 배가 되었다. 2월 27일 버스 요금이 오르자 과렌아스에서 시작된 시위와 약탈이 카라카스로 번졌다. 바로 그날 베네수엘라 중앙은행 총재와 경제장관은 워싱턴의 IMF 본부에서 그 처방을 지키겠다는 의향서에 서명하고 있었다. 정부는 계엄을 펴고 군을 투입했으며, 공식 사망자는 276명이었으나 이후 발견된 무연고 무덤 때문에 2천~5천 명으로 보는 추정이 많다. 30
정부 차원의 저항도 있었다. 1985년 페루의 알란 가르시아 정부는 외채 상환을 국민총생산의 10%로 일방적으로 제한해 국제 금융시장에서 고립되었다. 1987년 2월 20일 브라질의 재무장관 딜손 푸나루는 외환 보유고가 급감하자 민간 은행에 대한 외채 원리금 지불을 중단했다. 1987년 5월 잠비아의 케네스 카운다는 IMF와 결별했다가 1989년 다시 합의로 돌아갔다. 1985년 아바나는 외채 문제를 다루는 국제회의를 다섯 차례 열었고, 피델 카스트로는 제3세계가 제1세계의 은행과 정부가 지운 빚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며 그 부당함을 고발했다. 31 13 21 32
1987년 7월 29일 아디스아바바의 아프리카통일기구(OAU) 정상회의에서 부르키나파소의 토마 상카라는 외채를 갚지 않을 아프리카 통일 전선을 호소했다. 그는 빚의 기원이 식민주의의 기원이며 “빌려준 사람들은 우리를 식민지로 삼았던 바로 그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빚을 “교묘하게 관리되는 아프리카의 재정복”이라 불렀다. “우리가 갚지 않아도 채권자는 죽지 않지만, 갚으면 우리가 죽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부르키나파소 혼자 거부하면 다음 회의에 자신이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석 달도 지나지 않은 10월 15일 상카라는 블레즈 콩파오레가 이끈 쿠데타로 살해되었고, 콩파오레는 IMF와 세계은행에 다시 가입했다. 33 34
사회주의권 채무국은 어떤 길을 걸었나? {poland} {romania}
외채위기는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도 비켜 가지 않았다. 폴란드의 대외 부채는 1980년 230억 달러에 이르렀다. 서방이 추가 대출을 거부하자 수입품이 끊겼고, 빚을 갚기 위해 식량과 석탄까지 내다 팔아야 했다. 1980년 4월 바르샤바의 한 은행에서 열린 모임에서 서방 채권 은행들은 국가가 더는 소비재 값을 인위적으로 낮게 보조할 수 없다고 못 박았고, 그 뒤의 가격 인상은 연대노조 파업으로 이어졌다(「1980~1981년 폴란드 경제위기」). 1981년 폴란드는 파리 클럽에 지급불능을 통보했고, 외채 상환 협상은 1989~1991년에야 끝났다. 35 5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정반대로 빚을 모두 갚는 길을 택했다. 1986년 국민투표로 헌법에 앞으로 외국에서 돈을 빌리지 못한다는 조항을 넣었고, 수출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늘리고 수입을 극도로 줄였으며, 가정의 에너지 사용을 혹독하게 묶었다. 1989년 3월이면 중장기 외채가 사실상 모두 상환되었다. 상업은행 빚을 모두 갚은 기록은 세계의 어떤 고채무국도 따라오지 못했지만, 그 대가로 1980년대 내내 경제가 정체하고 생활수준이 크게 떨어졌다(「루마니아의 외채 상환과 긴축」). 유고슬라비아는 1982년 5월 IMF의 강화된 감시를 받아들이고 연료 배급과 수입 제한 같은 긴축을 폈다. 1979~1985년 디나르 가치는 달러당 15에서 1,370으로 떨어졌고 수출 수입의 절반이 빚 갚는 데 들어갔으며, 1989년 말 안테 마르코비치 정부는 디나르를 독일 마르크에 고정하는 개혁에 나섰다. 7 6
외채위기를 어떻게 해석하나?
주류의 설명은 채무국의 정책 실패에 무게를 둔다. 연방준비제도 이사 로저 퍼거슨은 1999년 위기 이전 라틴아메리카의 정책을 높은 국내 소비, 해외 차입에 대한 과도한 의존, 지속할 수 없는 환율, 정부의 지나친 경제 개입으로 요약했다. 수입대체 공업화가 수출을 빨리 늘릴 수 없는 경제를 남겼다는 지적도 이 계열에 속한다. 같은 관점에서도 은행과 규제 당국의 책임은 인정된다. 연방준비제도의 역사 서술은 규제 당국이 대형 은행의 손실 인정을 늦춰 준 것이 시장 규율을 약하게 하고 이후 수십 년의 과도한 위험 감수를 부추겼을 수 있다고 본다. 한 연구는 워싱턴 컨센서스 정책이 5~10년에 걸쳐 1인당 실질 국내총생산을 높였다고 보고, 다른 연구는 브라질·칠레·멕시코에서 거시경제 안정은 나아졌으나 성장은 대체로 실망스러웠다고 본다. 3 26
비판적 경제학자들은 처방 자체를 문제 삼는다. 제프리 삭스는 IMF가 너무 가난해 허리띠조차 없는 나라에 허리띠 졸라매기를 처방한다고 비꼬았고, 세계은행 수석 경제학자를 지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IMF가 원래 케인스주의적 경기 부양을 돕도록 만들어진 기구인데 통화주의로 돌아서면서 존재 이유를 잃었으며, 음모가 아니라 서방 금융계의 이해와 이데올로기를 반영했다고 비판했다. 윌리엄슨 자신도 성장·고용·빈곤 감소의 성과를 “아무리 좋게 말해도 실망스럽다”고 평가했다. 14 26
종속이론과 세계체제론, 마르크스주의 쪽은 위기를 중심부와 주변부의 관계에서 읽는다. 종속이론은 자원이 가난한 주변부에서 부유한 중심부로 흘러간다고 보는데, 어떤 논자는 중심부와 주변부의 결정적 차이가 기술이 아니라 금융의 힘, 특히 주변부가 자기 통화로 돈을 빌릴 수 없다는 데 있다고 본다. 조반니 아리기는 1982년 멕시코 채무불이행이 알린 자본 부족이 「개발 사상의 반혁명」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었고, 구조조정이 채무국의 지위를 개선하지 못한 채 자본 흐름을 미국의 부와 권력의 부활 쪽으로 돌렸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신자유주의가 민영화, 금융화, 위기의 관리와 조작, 국가의 재분배를 통해 부와 권력을 소수에게 모으는 「탈취에 의한 축적」이라고 규정했다. 36 15 37
채무국의 혁명가들은 더 직접적으로 말했다. 상카라는 빚을 신식민주의라 부르며 위기가 갑자기 온 것이 아니라 대중이 착취자에 맞서 자기 권리를 의식할수록 깊어졌다고 말했고, 카스트로는 제3세계가 제1세계의 은행과 정부가 지운 빚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며 외채 문제를 고발했다. 외채위기의 경험은 구조조정과 신자유주의, 그리고 1990년대 동유럽의 충격요법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연방준비제도의 역사 서술조차 그 비용을 라틴아메리카와 다른 개발도상국 시민이 치렀다고 적는다. 33 32 3
결과
1989~1994년 브레이디 플랜으로 18개국에 대한 은행 대출의 약 3분의 1인 610억 달러가 탕감되고 남은 빚이 거래 가능한 채권으로 바뀌면서, 10년에 걸친 협상 끝에 위기는 일단락되었다. 대가는 채무국의 시장 개방이었다. 대부분의 채무국은 수입대체 공업화를 버리고 IMF가 권한 수출 지향·신자유주의 전략으로 돌아섰고, 구조조정과 워싱턴 컨센서스는 1990년대 동유럽 체제 전환의 충격요법과 이후의 금융위기 대응에도 표준 처방이 되었다. 미국 은행 규제 당국의 손실 유예는 대형 은행의 파산을 막았으나 이후 과도한 위험 감수의 선례를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2000년대 과다채무빈곤국 구상에 이르기까지 빚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연표와 지도
- 11979.10볼커의 인플레이션 억제 조치
연방준비제도 의장 폴 볼커가 인플레이션을 억누르기 위한 연방공개시장위원회의 새 조치를 발표했다.
- 21980.04.24바르샤바의 채권 은행 모임
폴란드에 돈을 빌려준 서방 금융기관들이 바르샤바의 한들로비 은행에 모여, 국가가 더는 소비재 값을 인위적으로 낮게 보조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 31981폴란드의 지급불능 통보
폴란드가 서방 채권국 모임인 파리 클럽에 외채를 갚을 수 없다고 통보했다.
- 41982.02멕시코 페소 평가절하
유가 하락과 자본 도피 속에 멕시코가 페소를 평가절하했다.
- 51982.05.12IMF의 유고슬라비아 감시 강화
IMF 이사회가 파리 클럽 채권국까지 포함하는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강화된 감시를 승인했다.
- 61982.08.12멕시코의 상환 불능 통보
재무장관 헤수스 실바 에르소그가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 재무장관, IMF 총재에게 멕시코가 8월 16일 만기인 원리금을 갚을 수 없다고 알렸다. 멕시코는 90일 지불 유예를 선언했다.
- 71982.09.01멕시코 은행 국유화
호세 로페스 포르티요 대통령이 마지막 국정 보고에서 자본 도피를 일으킨 은행가들을 비난하고 은행 국유화를 발표했다.
- 81982.12.01데 라 마드리드 취임
미겔 데 라 마드리드가 멕시코 대통령에 취임했다.
- 91983.12.29–
1984.01 튀니지의 빵 보조금 폐지튀니지 정부가 IMF 차관의 조건에 따라 밀과 세몰리나 보조금 폐지를 발표했고, 빵값이 두 배 넘게 뛰어 이듬해 1월 초까지 빵 폭동이 이어졌다.
- 101985아바나의 외채 회의
쿠바 아바나가 세계 외채 문제를 다루는 국제회의를 다섯 차례 열었다.
- 111985.09.19멕시코시티 대지진
규모 8.0의 지진이 멕시코시티를 덮쳐 적어도 5천 명이 죽었다.
- 121986루마니아의 외채 금지 국민투표
차우셰스쿠가 국민투표를 거쳐 앞으로 외국에서 돈을 빌리지 못하게 하는 조항을 헌법에 넣었다.
- 131987.02.20브라질의 지불 중단
외환 보유고가 급감하자 브라질 재무장관 딜손 푸나루가 민간 은행에 대한 외채 원리금 지불을 중단했다.
- 1987시티은행의 손실 충당금
시티은행이 개발도상국 대출 손실에 대비해 33억 달러의 충당금을 쌓았고, 다른 은행들도 곧 뒤따랐다.
- 141987.05잠비아의 IMF 결별
케네스 카운다 대통령이 IMF와의 관계를 끊었다.
- 151987.07.29상카라의 아디스아바바 연설
토마 상카라가 아프리카통일기구 정상회의에서 외채를 갚지 않을 아프리카 통일 전선을 호소했다.
- 161987.10.15상카라 피살
블레즈 콩파오레가 이끈 쿠데타에서 상카라와 관리 12명이 살해되었다.
- 171989.02.16베네수엘라의 「대전환」 발표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대통령이 기술관료 내각과 IMF가 권한 충격요법 경제 정책 묶음을 발표했다.
- 181989.02.27카라카소
버스 요금 인상에 맞선 시위와 약탈이 과렌아스에서 시작되어 카라카스로 번졌다. 같은 날 베네수엘라 대표단은 워싱턴의 IMF 본부에서 의향서에 서명했다.
- 191989.03브레이디 채권 시작
은행 대출을 미국 국채로 보증한 새 채권으로 바꾸는 브레이디 채권이 만들어졌다.
- 201989.03루마니아의 외채 상환 완료
루마니아가 중장기 외채를 사실상 모두 갚았다.
- 211989「워싱턴 컨센서스」
경제학자 존 윌리엄슨이 워싱턴이 라틴아메리카에 권하던 개혁을 열 가지로 정리하며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말을 처음 썼다.
- 221989.12.31마르코비치의 디나르 개혁
유고슬라비아 총리 안테 마르코비치가 1만 디나르를 신디나르 1로 바꾸고 독일 마르크에 고정하는 경제 개혁을 시작했다.
관련 인물 11명
집행 · 지휘3
참여5
1989년 워싱턴이 채무국에 요구하던 개혁을 열 가지로 정리하며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말을 만들었다.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제1서기에드바르트 기에레크1913–20011970년대 서방 차관으로 공업을 현대화하는 계획을 이끌었고, 그 빚이 1980년 위기로 이어졌다.
루마니아 공산당 서기장니콜라에 차우셰스쿠1918–19891980년대 혹독한 긴축으로 외채를 모두 갚고 1986년 국민투표로 외국 차입을 헌법으로 금지했다.
멕시코 재무장관헤수스 실바 에르소그1935–20171982년 8월 12일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재무장관과 IMF 총재에게 멕시코가 8월 16일 원리금을 갚을 수 없다고 알렸고, 멕시코는 90일 지불 유예를 선언했다.
멕시코 대통령호세 로페스 포르티요1920–2004유전을 담보로 외채를 끌어다 쓰다 1982년 채무 불이행을 맞았고, 9월 1일 마지막 국정 보고에서 자본 도피를 비난하며 은행을 국유화했다.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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