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노선 (헝가리, 1953–1955)
New Course (Hungary, 1953–1955)
스탈린 사후 소련 지도부의 요구로 1953년 6월 헝가리 노동인민당이 채택하고 너지 임레 정부가 시행한 정책 전환(헝가리어 új szakasz). 중공업 투자를 줄이고 소비·농업·주택으로 자원을 돌렸으며, 쿨라크 명부 폐지, 협동농장 탈퇴 허용, 사면과 강제수용소 해체, 소상공업 허가 재개로 억압을 완화했다. 라코시 마차시의 저항 끝에 1955년 봄 너지의 실각으로 중단되었으나 1956년 혁명의 준거점이 되었다.
상세
위기의 신호 (1952–1953)
1951년 상향 수정된 5개년 계획과 1952년 흉작이 겹치면서 헝가리 경제 전반에 심각한 불균형이 드러났다. 1952년 여름 농촌에서는 탈곡 거부, 공출 거부, 폭력 사태까지 벌어지며 의무 공출 제도에 대한 대중적 저항이 처음 나타났다. 법원은 1949년 72,300명, 1950년 98,000명, 1952년 120,000명에게 형을 선고했다. 신호는 쌓였지만 위기는 1953년 초여름에야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그사이 라코시는 스탈린 말년의 숙청을 흉내 내어, 1953년 2월 말 국가보안기관(ÁVH) 수장 페테르 가보르의 체포를 당 중앙지도부에 발표했다.
크렘린 회담 (1953년 6월 13~16일)
동독 지도부와의 협의에 이어, 소련 당 간부회는 라코시, 게뢰 에르뇌, 너지 임레, 도비 이슈트반, 헤게뒤시 언드라시 등 헝가리 지도자 여덟 명을 크렘린으로 불렀다. 말렌코프는 헝가리 동지들이 결함을 과소평가한다고 말했고, 베리야는 「인구 950만의 헝가리에서 150만 명을 입건한 것이 용납되는가」라고 물으며 라코시가 ÁVH를 직접 지휘하고 폭력까지 지시한 일을 비판했다. 몰로토프, 불가닌, 미코얀, 흐루쇼프도 강행 공업화, 무리한 집단화, 대량 탄압, 라코시 개인의 권력 집중을 차례로 비판했다. 소련 측은 너지를 총리로 추천하고 라코시는 당수로 남게 했다. 둘째 날 너지가 요구한 쿨라크 명부 폐지는 헝가리 쪽 제안이 받아들여진 유일한 사례였다.
6월 결의와 7월 4일 정부 강령
6월 27~28일 노동인민당 중앙지도부는 네 부분으로 된 결의를 채택했다. 결의는 과도한 공업화를 1951년 제2차 당대회 이후의 「종파적」 정책으로 규정했고, 탄압의 규모를 수치로 적었다. 1951년부터 1953년 5월 1일까지 경찰의 경범죄 처분이 85만 건, 1950년부터 1953년 1분기까지 법원이 다룬 사람이 65만 명이고 그중 38만 7천 명이 형을 받았으며, 공출 미납에 대한 집단 벌금으로 4억 포린트 가까이 거둬들였다는 것이다. 원인으로는 라코시, 게뢰, 퍼르커시, 레버이 네 사람에게 집중된 「파벌적」 지도와 당의 국가 기능 장악을 들었다. 결의는 공개되지 않았고, 새 방향은 7월 4일 의회에서 너지의 정부 강령으로 발표되었다. 너지는 계획 목표가 「많은 점에서 우리 힘을 넘는다」고 인정하고, 개인농의 생산과 소유 보장, 소상공업 허가, 지식인과 종교에 대한 관용, 그리고 「합법성」을 약속했다. 1945년 이래 국민 다수가 동의한 첫 공산주의 지도자의 연설이었다고 평가된다.
시행: 세 묶음의 조치
첫 묶음은 축적 기금의 일부를 소비로 돌려 중공업 투자를 줄이고 농업·경공업·식품가공·주택에 배분했다. 둘째 묶음은 92만 8천 명의 임금을 평균 100포린트 남짓 올리고, 7월과 9월 두 차례 가격 인하로 약 10억 포린트를 국민에게 돌려주었다. 셋째 묶음은 농민의 부담을 덜었다. 1953년 하반기에만 농업 정책에 관한 정부 결정이 50건 가까이 나왔고, 미납 공출과 부과금이 탕감되었으며, 1954~1956년에 적용될 새 공출 제도가 할당량을 크게 낮췄다.
억압도 완화되었다. 7월 24일 사면은 2년 이하 형을 면제하고 그보다 긴 형은 3분의 1을 감했지만 정치범은 대부분 제외했다. 그래도 공출 미납, 배급 위반, 무단 이직 같은 명목으로 처벌받은 사람과 추방·강제수용 대상자에게 두루 적용되어 사실상 제한적 정치 사면의 성격을 띠었고, 1953년 11월 보고에 따르면 약 74만 8천 명이 혜택을 입었다(최종 집계 758,611명). 약 4만 명의 수감자 중 15,761명이 석방되었고, 레치크·키슈터르처·커진츠버르치커·티서뢰크의 ÁVH 수용소에 갇혀 있던 5천여 명 가운데 3,234명이 10월 말까지 풀려났으며, 호르토바지 강제이주민 7,281명도 자유를 되찾았다. 1949년 20만 명이던 수공업자는 4년 만에 4분의 1 아래로 줄었다가 1954년 10만 명을 넘어섰다. 강령 발표 직후 협동농장 탈퇴가 잇따랐고, 5천 개가 넘는 협동농장 가운데 688곳(12%)이 해산했으며 조합원은 37만 6천 명에서 25만 명으로 줄었다.
반격과 좌절
7월 초 베리야가 실각하자 옛 노선의 지지자들이 기운을 되찾았다. 라코시는 7월 11일 부다페스트 당 활동가 회의에서 옛 목표와 구호가 그대로라고 말하며 새 노선의 의미를 줄였고, 정치위원회를 거점으로 시행을 늦추려 했다. 너지는 7월 16일 소련 대사 키셀료프를 찾아가 저항을 알렸고, 8월 8일 말렌코프의 최고회의 연설이 그의 입지를 다시 받쳐 주었다. 1954년 너지와 그 주변 세력은 수정을 넘어 개혁으로 나아가려 했지만 실패했고, 너지는 1955년 봄 모든 직위를 잃었다.
의미
러이네르 야노시에 따르면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헝가리 스탈린주의 지도부의 자신감이 영영 사라졌다는 점이다. 부분적 자기비판과 수정은 간부층과 당 지식인 사이에 불확실성과 재검토의 경향을 낳았고, 너지와 「더 인간적인 얼굴의 공산주의」는 1956년 가을의 대중운동이 기댈 수 있는 준거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