Рютинская платформа («Сталин и кризис пролетарской диктатуры») · 1932년

류틴 강령

Ryutin Platform

1932년 마르테먄 류틴이 작성한 약 200쪽 분량의 반대 강령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이라는 당내 지하 조직의 정치 프로그램이었다. 강제 집단화 중단, 급속한 공업화 속도 조절, 트로츠키를 포함한 제명 당원들의 복권, 그리고 스탈린의 '강제적 제거'를 호소한 마지막 조직적 당내 저항이었다. 정보원의 밀고로 류틴을 비롯한 24명이 체포·제명·유배되었으며, 스탈린은 이 사건을 계기로 당내 적에 대한 편집증적 숙청 의지를 굳혀 대숙청으로 가는 결정적 분기점이 되었다.

상세

성립

「류틴 강령」은 1932년에 작성된 두 문서를 함께 가리킨다. 하나는 「전연합공산당(볼셰비키) 모든 당원에게 보내는 호소문」이고, 다른 하나는 『스탈린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위기』라는 장문의 필사본이다. 전자는 강령의 요약본이고, 후자는 타자 원고로 160여 쪽에서 200쪽에 이르며 흔히 '류틴 강령'으로 통칭된다([P8], [P111]).

집필은 마르테먄 류틴이 맡았다. 그는 1930년 10월 '배신적 이중 행위와 우익 기회주의적 견해의 지하 선전 시도'를 이유로 제명된 상태였고, 1930년 11월 국가정치보위국(OGPU)에 체포되었다가 1931년 1월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 뒤 경제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문서를 의뢰한 쪽은 10월 혁명 이전부터 당원이던 볼셰비키 집단으로, 하르빈 소비에트 의장과 지역 당서기를 지낸 류틴을 이미 알려진 스탈린 비판자로 보고 집필을 요청했다([P17], [P62], [P109], [P111]).

1932년 8월 21일 모스크바 근교에서 조직 회의가 열려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이 선포되었고, 모스크바와 하르코프에서 온 14명의 공산주의자가 참석해 카유로프, 이바노프, 갈킨, 데미도프, 표도로프로 구성된 위원회를 선출했다. 류틴 자신은 무소속이었고, 안페르티예프에 따르면 이 집단은 강령과 규약, 당원증도 갖추지 못한 채 프로그램 문서를 준비하던 단계에서 체포되었다([P112], [P124]).

내용

강령은 마르크스의 역사적 우연성 개념, 특히 지도자 개인의 성격이라는 우연을 끌어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아래에서 그것이 치명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논했다. 레닌의 '유서'에 담긴 스탈린 평가를 다시 읽으면서, 스탈린이 자기 결점을 무례함 하나로 축소해 왔다고 지적하고 불충성과 다른 의견에 대한 편협함을 문제 삼았다. 스탈린의 집권은 루이 보나파르트의 18일 브뤼마르에 비유되었고, 진정한 대중적 지도자가 아니라 군사·당 기구와 경찰에 기대어 앉은 독재자로 규정되었다([P140], [P141], [P142], [P145], [P146]).

경제와 농촌 문제에서 강령은 스탈린의 '계급투쟁 필연적 격화' 이론을 마르크스주의의 왜곡으로 비판하고, '쿨라크를 계급으로서 청산' 구호가 실제로는 중농과 빈농을 겨냥했다고 주장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1932년 초 농촌 인구의 30~35%가 라스쿨라크되었고, 1928~1932년 각종 억압에 놓인 사람이 전체 농촌 인구의 40~50%에 이르렀다는 수치가 제시되었다. 저자들은 스탈린이 청산을 완전한 몰수와 물리적 절멸로 축소했다고 비판하면서, 강제 집단화 중단('농민과의 화해'), 농민의 자발적 집단화, 개별 빈농·중농 경영 지원, 공업화 속도 조절, 농산물 약탈식 수매와 염가 수출의 중단을 요구했다([P153], [P177], [P179], [P219], [P220]).

정치적으로 강령은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한 스탈린 제거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당 규약과 소비에트 헌법이 보장하는 정상적 민주 절차로는 그가 물러나지 않으므로 '이 파벌을 힘으로 제거'해야 한다고 했고, 그래서 임시 당대회 소집, 당 기구 수뇌부 교체, 당내 민주주의에 기초한 당 기관 재선거, 소비에트 재선거와 임명제 철폐, 혁명적 합법성 확립과 국가정치보위국 기구의 철저한 정화가 제안되었다. 한편 강령은 이 전환이 반혁명 세력의 활성화 위험을 동반한다는 점도 인정했다([P212], [P216], [P219]).

호소문은 더 격렬했다. 스탈린을 '당과 혁명의 사악한 천재'로 규정하고, 그가 '힘으로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레닌주의의 기치 아래 스탈린 독재 청산을 위한 동맹 세포를 곳곳에 조직하라고 호소했다. 강령은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자들, 그리고 부하린에 대한 평가에서 내부적 모순을 드러낸다. 경제 문제에서는 좌익 반대파의 1920년대 강령이 그르다고 하면서도, 당내 체제와 스탈린의 역할이라는 결정적 문제에서는 트로츠키가 옳았다고 인정했다. 로고빈은 이것이 서로 다른 반스탈린 집단 사이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고 보았고, 흐레프뉴크는 오늘날 기록보관소에 남은 사본이 처음의 류틴 원고와 같은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고 지적했다([P9], [P113], [P162], [P183], [P184]).

유포와 진압

1932년 여름과 초가을에 호소문은 노동자들과 반대파 당원들에게 배포되었다. 부하린의 옛 동료였던 '붉은 교수들'인 슬레프코프, 마레츠키, 슈테른이 유포를 도왔고, 슈테른은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에게, 슬레프코프는 하르코프의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문서를 넘겼다. 옛 우익 반대파 지도부인 톰스키, 우글라노프, 리코프도 호소문을 보았으며, 카유로프도 이 집단에 합류했다([P9], [P111]).

1932년 9월 14일 두 당원이 호소문을 중앙위원회에 제보했고, 다음 날 다섯 명이 체포되었다. 이어 19명이 추가로 체포되어 전체 24명 가운데 8명이 옛 우익, 3명이 지노비예프파, 3명이 잘 알려지지 않은 트로츠키주의자였으며, 문서를 읽은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슈테른도 함께 체포되었다([P67], [P121]).

한편 문서에 접촉한 사람의 범위에 관해서는 사료가 일치하지 않는다. 러시아어 위키백과의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항목은 체포된 24명을 '동맹' 성원으로 서술하는 반면, 같은 백과사전의 류틴 개인 항목은 조직이 소규모였고 안페르티예프의 평가처럼 규약과 강령이 없는 준비 단계에 있었다고 서술한다. 다만 9월 말 국가정치보위국이 관련자들을 폭넓게 체포했다는 점은 두 서술이 일치한다([P67], [P121], [P124]).

1932년 9월 27일 중앙통제위원회 간부회는 루드주타크, 야로슬랍스키, 예누키제, 솔츠, 레닌의 여동생 마리야 일리니치나 울리야노바 등 24명이 참석한 가운데 류틴 집단을 다루었고, 국가정치보위국에 '아직 드러나지 않은 반혁명 집단 성원'을 색출하고 '이 백위군 범죄자들'에게 혁명적 법의 엄격함을 다하라고 승인했다. 10월 9일 간부회 최종 보고는 24명을 당에서 제명하고 모스크바에서 각기 다른 기간 추방했다. 이들은 '가짜 마르크스-레닌주의 기치 아래 자본주의와 쿨라크를 복원하려 한 부르주아-쿨라크 지하 조직'으로 규정되었다([P10], [P123]).

류틴의 운명은 정치국으로 넘겨졌다. 1932년 9월 사형을 요구한 스탈린에 맞서 정치국은 한동안 그 결정을 취소했고, 소문을 두려워한 스탈린은 재판을 열지 않았다. 1932년 10월 11일 국가정치보위국 위원회는 그에게 10년 금고형을 선고했으며, 동지들은 5년에서 10년을 받았다. 류틴은 수즈달 정치수용소와 베르흐네우랄스크 정치수용소에 갇혔다가 1936년 모스크바로 압송되었고, 1937년 1월 10일 군사재판부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같은 날 총살되었다([P51], [P71], [P73], [P75]).

역사적 의의와 평가

1934년 제17차 당대회에서 당 서기장직 자체가 폐지되었고, 류틴 사건을 계기로 스탈린에 대한 모든 반대는 자동으로 '반혁명'으로 취급되며 제명에 체포와 초법적 처벌이 뒤따르게 되었다는 것이 러시아 연구자 푸르소프의 해석이다. 이 사건은 당 안에서 스탈린에게 맞선 마지막 조직적 시도이자 우익 반대파의 일반적 쇠퇴를 표시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P3], [P47]).

가장 오래 논쟁이 된 지점은 스탈린의 사형 요구를 정치국이 저지했다는 이야기이다. 콘퀘스트를 비롯한 여러 역사가는 1936년 니콜라옙스키의 「한 늙은 볼셰비키의 편지」에서 처음 제기된 이 이야기를 받아들여, 키로프가 사형 반대를 특히 강하게 주장했고 오르조니키제, 쿠이비셰프, 코시오르, 루드주타크가 거들었으며 스탈린을 지지한 것은 카가노비치뿐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J. 아치 게티는 이를 '집요한 신화'로 보고, 이전에도 정치국이 가혹한 처벌을 결정했을 때 스탈린이 오히려 감형한 사례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 회의의 속기록은 발견되지 않았고, 스탈린이 실제로 어디까지 사형을 관철하려 했는지는 사료로 확정할 수 없다([P12]).

조직의 규모와 준비 정도에 대해서도 해석이 갈린다. 안페르티예프는 포위된 조건에서 서기장을 축출하려는 시도가 성공할 가능성이 없었고, 이 집단은 조직으로 성립하기 전 단계에서 해산되었으며 어떤 반소비에트 조직이나 테러 중심지에도 속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브루에는 류틴 집단이 1932년에 형성된 더 큰 반스탈린 블록의 일부였고 스미르노프와 트로츠키가 여기에 속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지만, 이 블록의 성원 명단은 어떤 사료로도 확인되지 않는다([P13], [P124]).

류틴 사건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았다. 문서를 읽고도 신고하지 않은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1932년 10월 제명되어 우랄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류틴은 1956년과 1958년 두 차례 딸의 청원에도 불구하고 복권되지 못했고, 당과 국가의 공식적 복권은 1988년에야 이루어졌다([P13], [P79], [P80]).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Historical account of the Ryutin affair, the Union of Marxist-Leninists, the Platform's contents and demands, and the Politburo's response.
  2. 위키백과 (러시아어) Russian Wikipedia article on Martemyan Ryutin, covering the drafting and contents of the Platform, Stalin's response, and the historical significance.
  3. orlandofiges.info Orlando Figes educational resource: the Platform as a blistering critique of Stalin that marked the last significant internal Party opposition before the Great Terror.
  4. 위키백과 (영문)
  5. 위키백과 (러시아어)
  6. 위키백과 (러시아어)
  7. history.wikireading.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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