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인열차
Sealed Train
1917년 4월, 레닌을 비롯한 32명의 러시아 혁명적 망명자들이 전시 독일을 관통해 스위스에서 러시아로 귀환할 때 탑승한 열차. 독일 정부는 러시아 전선을 붕괴시키려는 계산으로 통행을 허가했고, 열차는 치외법권을 인정받아 검문 없이 국경을 통과했다. 이 귀환은 레닌이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해 4월 테제를 발표하고 볼셰비키의 혁명 노선을 전환하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상세
용어의 범위
역사서술에서 '봉인열차(플롬비로바니 바곤)'는 1917년 4월 스위스에서 독일을 거쳐 러시아로 향한 세 편의 열차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굳어졌다. 좁은 의미로는 그 첫 열차에서 레닌이 탄 한 량만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봉인열차란 세관·출입국 봉인 아래 국제 운행을 하여 경유국의 영토로 법적으로 들어온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 열차를 말하며, 20세기에는 스페인 내전 참전자 송환, 나치 독일에서 미국으로 가는 유대인 이주, 동독 탈출민의 서독 이송 등에도 이런 방식이 쓰였다. 레닌의 귀환은 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이지만, 승객들이 프랑크푸르트에서 하차해 하룻밤을 보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의 봉인열차는 아니었다는 지적도 있다.
경로와 조건
1917년 3월 17일 콜론타이, 뱌타코프, 보시, 가네츠키는 레닌에게 귀국해야 한다고 전보를 보냈고, 레닌은 스위스를 떠나기가 매우 어렵다고 답했다. 임시정부의 정치범 사면이 알려진 뒤인 3월 18일 그는 영국을 경유하는 길을 알아봤으나 거절당했다. 3월 19일 베른에서 열린 망명자 회의에서 율리 마르토프가 독일에 억류된 독일인과 맞바꾸는 통과 계획을 제안했다. 레닌은 3월 31일 스위스 사회민주당원 로베르트 그림에게 독일 경유 제안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즉시 여행을 준비하라고 전보했다.
통과 조건은 1917년 4월 4일 베른과 취리히에서 스위스 사회민주당 서기 프리츠 플라텐이 서명했다. 독일 당국과의 접촉은 플라텐만이 담당하고 그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차내에 들어올 수 없으며, 차량에는 치외법권이 인정되어 출입국 시 여권이나 승객 검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승객은 전쟁과 평화 문제에 대한 견해와 무관하게 태운다는 조항, 그리고 통과 허가는 러시아에 억류된 독일·오스트리아 포로와의 교환을 근거로 한다는 조항도 포함됐다. 마지막 조항에 대해 세르게이 푸시카료프는 볼셰비키가 정부에 참여하지도, 소비에트에서 다수도 아니었으므로 실제 교환은 불가능했고, 이 조항은 계약이 대등해 보이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본다.
실행과 경과
1917년 4월 9일 오후 3시 10분, 32명의 러시아 망명자가 취리히를 출발해 독일 국경역 고트마딩겐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봉인 차량에 올랐다. 취리히 역에는 애국 성향의 망명자 약 100명이 모여 이들을 민족 반역자라고 비난하며 모두 러시아에서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라고 외쳤다. 차량은 독일을 거의 정차 없이 통과해 자스니츠에 이르렀고, 일행은 증기선 '빅토리아 여왕' 호로 스웨덴으로 건너갔다. 트렐레보리에서 가네츠키의 영접을 받은 레닌은 4월 13일 스톡홀름에 도착했고, 4월 16일 밤 페트로그라드 핀란드 역에 도착했다. 곧이어 4월 테제를 발표했고, 1917년 4월 8일 독일 정보기관의 스톡홀름 책임자는 레닌의 귀환이 성공적이며 그가 우리가 바라던 대로 움직이고 있다고 베를린에 전보했다.
봉인열차로 귀환한 것은 레닌 일행만이 아니었다. 1917년 5월에는 마르토프, 파벨 악셀로드,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가 이끄는 멘셰비키 인터내셔널리스트, 사회혁명당원, 비분파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같은 경로를 이용했다. 연합국 측이 통과를 막은 '가장 위험한 평화주의자 명단'에는 레닌과 지노비예프뿐 아니라 트로츠키, 마르토프 등도 올라 있었다.
독일의 계산과 논쟁
독일 정부는 1917년 4월 3일 러시아 내 선전을 위해 재무부에 300만 마르크를 요청해 배정받았다. 동부전선 참모장 막스 호프만은 회고에서 러시아군에 혁명이 끼친 분열을 선전으로 더욱 키우려 했으며, 스위스에 있던 러시아인들과 연락하던 누군가가 그들을 이용하자고 제안했다고 적었다. 1921년에는 그 주동자가 독일 주코펜하겐 대사 울리히 폰 브록도르프란차우를 통해 활동한 알렉산드르 파르부스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봉인열차를 둘러싼 '독일 금화' 논쟁에서 비판자들은 파르부스가 통과 교섭의 중개자가 아니었고, 에밀 무어와 로베르트 그림을 독일 요원으로 의심해 배제한 뒤 플라텐에게 협상을 맡겼으며, 망명자들이 진 정치적 의무는 억류된 독일인 통과를 요구하는 일뿐이었다고 본다. 반대로 러시아 망명자 상당수는 영국 경유가 '가장 위험한 평화주의자 명단' 탓에 막혀 있었고, 영국이 빅토르 체르노프와 트로츠키를 억류한 것이 레닌이 플라텐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한 계기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봉인 조치 자체도 논쟁적이다. 윈스턴 처칠은 레닌이 봉인열차를 타고 '페스트균처럼' 러시아에 반입됐다고 말했으나,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는 네 개 문 가운데 세 개만 봉인됐고 나머지 하나는 플라텐과 독일 장교들의 통제 아래 외부와의 연락에 사용됐다. 카를 라데크 등 당시 참가자와 연구자 일부는 봉인 자체를 부정하고 차내에 머물지 않겠다는 약속만 있었다고 주장했다.
평가
혁명적 망명자들은 이 귀환을 독일 제국주의와의 타협이 아니라 전쟁과 임시정부에 반대하는 혁명 노선으로 나아가기 위한 선택으로 정당화했다. 1924년 빅토르 세르주는 레닌이 차내에서 독일 사회애국주의자들의 출입을 거부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세 가지 통과 조건과 10명의 유럽 사회주의자가 여행을 보증했다는 점을 볼셰비키 편에서 기록했다. 한편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회고에서 레닌을 러시아로 보낸 것이 군사적으로 정당했으며 러시아를 무너뜨려야 했다고 썼다. 이 기록들은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당사자들의 진술이라는 점을 함께 두어야 한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위키백과 (러시아어) Russian Wikipedia: comprehensive article on the sealed train, including the 9-point agreement negotiated by Fritz Platten, passenger lists, the role of Parvus and the German Foreign Office, and Lenin's arrival at Finland Station.
- 위키백과 (영문) English Wikipedia: defines the sealed train concept and identifies Lenin's 1917 journey as the most notable use.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Victor Serge, 'Lenin in 1917' (1924), Marxists Internet Archive: Section I 'The Story of the Sealed Train' provides a detailed Bolshevik account of the journey, including the three transit conditions, the 10 European socialist signatories endorsing the trip, and Lenin's own description of refusing German social-chauvinists entry to the carriage.
- 위키백과 (러시아어)
- 위키백과 (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