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통일전선
Workers' united front (Comintern)
코민테른이 1921년 제3차 대회 무렵부터 내건 전술. 공산당이 사회민주당·노동조합 같은 다른 노동계급 조직에 공동 행동을 제의해, 임금·노동시간·파시즘 저지처럼 노동자 다수의 당면 이익을 함께 지키자는 것이다. 공산당은 자기 강령과 비판의 자유를 그대로 지닌 채 함께 싸우며 개량주의 정당의 노동자들을 설득하려 했다. 1928년 이후 제3기 노선과 사회파시즘론으로 사실상 버려졌고, 트로츠키는 1930년대 초 독일에서 이 전술로 나치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세
왜 나왔나
1917년 이후의 혁명적 고양이 1921년 무렵 가라앉자, 서유럽의 공산당은 대부분 노동계급 안의 소수파로 남았다. 같은 해 독일 공산당의 3월 행동처럼 고립된 봉기가 실패하자, 코민테른은 「대중 속으로」라는 구호 아래 장기적인 전술로 돌아섰다. 노동계급 다수가 아직 사회민주당과 개량주의 노동조합을 따르고 있으니, 그 조직들과 함께 싸우는 경험을 통해 다수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전술은 1921년 제3차 대회와 1922년 제4차 대회에서 정리되었다. 제4차 대회 테제는 통일전선 전술을 공산당이 다른 정당과 단체에 속한 노동자와 무소속 노동자 모두와 함께 부르주아지에 맞서 노동계급의 당면 이익을 지키는 공동 투쟁을 제의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어떻게 움직이나
원칙은 「따로 행진하고 함께 친다」였다. 공산당은 독자적인 조직과 강령, 사회민주당 지도부를 비판할 자유를 지킨다. 그러면서도 개량주의 조직의 지도부를 건너뛰지 않고 그들에게 직접 공동 행동을 요구한다. 지도부가 거절하면 노동자들 눈에 단결의 걸림돌로 보이고, 받아들이면 파업과 시위처럼 공산당의 방법이 시험받는 무대에서 함께 싸워야 한다. 이 전술은 선거를 위한 지도부끼리의 거래와는 다르다고 테제는 강조했다. 독일에서는 1922~1923년에 이 전술이 쓰였고, 1923년 가을 작센과 튀링겐에서는 공산당 각료가 들어간 「노동자 정부」가 서기도 했다.
「아래로부터」와 노선 전환
1928년 제6차 대회와 1929년 집행위원회 제10차 총회 이후 코민테른은 사회민주당을 「사회파시즘」으로 규정하고, 사회민주당 지도부와의 공동 행동을 거부했다. 남은 것은 사회민주당 노동자를 지도부에서 떼어 내는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뿐이었다. 트로츠키는 1931~1932년 독일에 관한 글에서 이것이 나치에 맞선 노동자 단결을 막는다고 비판하며, 공산당과 사회민주당 조직 사이의 실제적인 공동 투쟁 협정을 요구했다. 그는 나치와 싸우기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그의 할머니와도, 노스케나 쵸르기벨과도 실천적 투쟁 협정을 맺겠다고 썼다.
인민전선과의 차이
1933년 나치 집권 뒤 프랑스에서는 1934년 사회당과 공산당의 공동 행동 협정이 맺어졌고,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는 사회파시즘론을 거두고 인민전선을 공식 노선으로 삼았다. 두 말은 자주 섞여 쓰였지만, 노동자 통일전선이 노동계급 조직들 사이의 공동 투쟁이라면 인민전선은 자유주의 정당 같은 부르주아 정당까지 끌어들여 부르주아 민주주의 방어를 강령으로 삼았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인민전선을 거부하고 제3·4차 대회의 통일전선 전술을 계속 내세웠다. 중국의 국공합작처럼 다른 나라에서 「통일전선」이라 부른 연합은 이 항목과 구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