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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지휘 · 프랑스 국가기관 인물 17명

조건 모두 해제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

Patrice de Mac Mahon
군사·지휘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808–1893 ○ 자연사

스당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베르사유군을 이끌고 파리 코뮌을 진압했으며, 「도덕 질서」의 대통령이 된 원수

1871년 5월 베르사유군 사령관으로 파리 코뮌을 진압했다. 1873년 대통령이 된 뒤 「도덕 질서」 정부를 이끌었고, 1877년 공화파가 의회 다수당이 되자 1879년 사임했다.

아일랜드계 귀족 가문 출신 군인으로 알제리 정복과 크림 전쟁의 말라코프 공격, 1859년 마젠타 전투로 원수와 공작이 되었다. 1870년 샬롱군을 이끌고 메스를 구하러 가다 스당에서 부상당해 황제와 함께 포로가 되었다. 독일에서 풀려난 뒤 티에르의 베르사유군 사령관이 되어 1871년 5월 파리에 진입했고, 피의 주간의 진압과 대량 처형이 그의 지휘 아래 벌어졌다. 1873년 티에르를 이어 대통령이 되어 왕정복고를 기다리는 「도덕 질서」 정부를 이끌었고, 1877년 의회와의 충돌에서 패한 뒤 1879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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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7프랑스군에 입대했다.
  • 1855크림 전쟁 중 세바스토폴 공방전의 말라코프 전투에서 승리했다.
  • 1859마젠타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승리에 기여해 원수와 마젠타 공작 작위를 받았다.
  • 1864알제리 총독으로 임명됐다.
  • 1870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하다 스당 전투에서 부상당해 나폴레옹 3세와 함께 포로가 됐다.
  • 1871티에르 대통령 아래 베르사유군 사령관이 되어 5월 파리 코뮌 진압을 지휘했다.
  • 1873프랑스 제3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돼 「도덕 질서」 정책을 추진했다.
  • 1877–1879의회와의 대립 뒤 공화파가 선거에서 승리하자 1879년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귀스타브 폴 클뤼세레

Gustave Paul Cluseret
군사·지휘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823–1900 ○ 자연사

프랑스 군인으로 파리 코뮌의 전쟁대표를 지냈다

파리 코뮌의 전쟁대표로 국민방위군 재편을 추진했으나 지도부와 충돌해 체포되었다.

클뤼세레는 1848년 프랑스군 장교로 6월 봉기 진압에 참여했고, 이후 이탈리아 통일전쟁과 미국 남북전쟁에서 복무했다. 1871년 파리 코뮌에서 전쟁대표로 국민방위군 재편을 추진했으나 지도부와의 갈등 속에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코뮌 진압 뒤 해외로 피신했다. 사면 후 귀국해 툴롱에서 사회주의자로 하원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이후 사회주의에서 멀어져 반드레퓌스파에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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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3프랑스 쉬렌에서 태어났다.
  • 1848프랑스군 장교로 6월 봉기 진압에 참여했다.
  • 1860가리발디 의용군에 합류해 이탈리아 통일전쟁에 참여했다.
  • 1861–1863미국 남북전쟁에서 북군에 복무하고 준장 계급에 올랐다.
  • 1871파리 코뮌의 전쟁대표로 국민방위군 재편을 추진했다. 지도부와 충돌해 5월 1일 체포됐고, 5월 21일 특별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 1880코뮌 참여자 사면으로 프랑스에 돌아왔다.
  • 1888–1898툴롱에서 사회주의자로 네 차례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 1900사망했다.

파리 코뮌의 전쟁 대표를 지낸 프랑스군 장교

코뮌의 방어를 재편하려 했으나 국민위병 부대들은 자신들의 구역 밖에서 복무하기를 대체로 거부했다.

루이 나타니엘 로셀은 프랑스군 장교로, 1871년 파리 코뮌에 합류한 유일한 고위 장교였다. 전쟁 대표가 된 뒤 방어선과 포병을 재편하려 했지만 국민위병의 중앙 지휘 불신 등으로 계획을 실행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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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4–1871프랑스군에서 복무했다.
  • 1871파리 코뮌에 합류해 전쟁 대표를 맡았고, 9일 뒤 사임했다.
  • 1871코뮌 진압 뒤 체포되어 11월 28일 베르사유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필리프 페탱

Philippe Pétain
군사·지휘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856–1951 ○ 반역죄 유죄 · 종신형

베르됭의 영웅에서 비시의 협력자로 전락한 원수

1940년 6월 17일, 페탱은 프랑스에 전투를 중지하겠다고 방송했다.

필리프 페탱은 제1차 세계대전의 장군으로, 베르됭 전투의 승리와 병사들의 사기를 회복한 지휘로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1940년 독일의 침공 앞에서 전쟁 지속을 반대하고 휴전을 요청했으며, 의회가 헌법 제정 권한을 넘긴 뒤 비시 프랑스의 국가수반으로 공화국을 권위주의 체제로 대체했다. 그의 정부는 독일과 협력하고 반유대주의 법령을 시행해 점령 질서에 프랑스 국가기구를 결합시켰다. 해방 뒤 고등법원은 그를 적과의 내통과 반역으로 사형 선고했으며, 드골은 이를 종신형으로 감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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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6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입학
  • 1916베르됭 전투 프랑스군 지휘
  • 1917–1918프랑스군 총사령관
  • 1934전쟁장관
  • 1939–1940주스페인 프랑스 대사
  • 1940.06프랑스 각료회의 의장
  • 1940–1944비시 프랑스 국가수반
  • 1945–1951반역죄 유죄 판결과 종신 구금

막심 베강

Maxime Weygand
군사·지휘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867–1965 ○ 자연사

승리의 참모에서 패배와 협력의 장군으로

1940년 6월 12일, 베강은 프랑스 정부에 항복을 권고했다.

막심 베강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페르디낭 포슈의 핵심 참모로 연합군 작전을 조율하고 1918년 휴전 조건을 독일 대표단에 낭독한 프랑스 장군이다. 전간기에는 폴란드·레반트에서 프랑스의 군사적 영향력을 수행했으며, 1940년 5월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어 독일군의 돌파 뒤 본토에서 계속 싸우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휴전을 권고했다. 그는 비시 정부와 북아프리카에서 제한적 협력을 택했지만, 유대인 박해 정책을 가혹하게 집행했고 독일과의 전면 협력에는 거리를 두었다. 전후 반역 혐의로 구금되었다가 1948년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며, 이후 페탱의 기억을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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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1888생시르 군사학교와 소뮈르 기병학교에서 수학
  • 1914–1918포슈의 참모장 및 연합군 최고사령부 참모
  • 1918콩피에뉴 휴전 협상에서 조건 낭독
  • 1920폴란드 국제연합군사사절단 군사 고문
  • 1923–1924레반트 고등판무관
  • 1931–1935프랑스 최고전쟁위원회 부의장 겸 육군 감찰관
  • 1940.05–06프랑스군 총사령관, 휴전 권고
  • 1940.06–1941.11비시 국방장관 및 북아프리카 총대표
  • 1942–1945독일에 억류, 이터성에 수감
  • 1948반역 혐의 무혐의 처분

모리스 가믈랭

Maurice Gamelin
군사·지휘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계 1872–1958 ○ 자연사

방어선과 전진 사이에서 결단을 잃은 총사령관

1940년 5월 16일 파리에서 처칠이 '전략 예비대는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자 가믈랭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모리스 가믈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모 경험과 공화국 군부의 조정자로서의 명성을 바탕으로 프랑스군 최고지휘부에 오른 장군이었다. 그는 독일과의 장기전을 예상하며 마지노선에 기대는 방어 구상을 세웠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사르 공세를 제한하고 독일의 벨기에 침공에 대비해 주력을 딜강과 벨기에 국경으로 전진시키는 선택을 했다. 1940년 5월 독일군의 아르덴 돌파와 세당의 붕괴 뒤 해임되었고, 프랑스 패전의 책임을 둘러싼 재판과 독일 억류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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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수석 졸업
  • 1906–1914조프르 장군 참모 및 전쟁계획 보좌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제9보병사단 지휘
  • 1919–1924브라질 프랑스군사사절단 단장
  • 1924–1929레반트 프랑스군 사령관
  • 1931–1939육군 참모총장, 육·해·공군 최고 조정
  • 1939–1940프랑스군 총사령관, 사르 공세와 딜 계획 지휘
  • 1940해임 및 비시 정권의 구금

로베르 투숑

Robert Touchon
군사·지휘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878–1960 ○ 자연사

산악전 경험과 구식 지휘체계의 긴장을 드러낸 프랑스 장군

1914년 크리스마스 밤, 부상당한 채 테트드포 정상에서 숫적으로 우세한 독일군을 상대로 중대를 지휘하며 버텨 두 차례 표창을 받았다.

로베르 투숑은 산악전과 보병 교육으로 명성을 쌓은 프랑스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 경험과 알프스 부대 지휘를 바탕으로 승진했다. 1940년 5월 독일군의 돌파 뒤 제6군을 지휘하며 마지노선에서 이동한 부대들을 엔강 방어선에 급히 배치했고, 샤를 드골의 제4기갑사단도 몽코르네 반격에 투입했다. 그러나 전차부대는 충분히 통합되거나 지원되지 못했고, 그의 군은 전선의 틈을 막은 뒤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휴전 뒤 퇴역한 그는 비시의 국가평의회와 리옹 국가재판소에 참여해 군인으로서의 경력과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협력이 겹치는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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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01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생도
  • 1914–1918알프스 엽병 대대 지휘, 제1차 세계대전 참전과 다수 표창
  • 1928–1930제159보병연대 지휘관, 브리앙송
  • 1932–1935생마상 보병·전차 응용학교 교장
  • 1938–1939리옹 군정장관 및 제14군관구 사령관
  • 1939.11–1940.02제23군단 사령관
  • 1940.02–07제6군 사령관, 엔강 방어와 몽코르네 반격 시기
  • 1941–1942비시 국가평의회 위원 및 리옹 국가재판소 판사

샤를 들레스트랭

Charles Delestraint

기갑전과 지하군을 잇고 사라진 장군

1943년 6월 9일, 지하군 지휘관 비달은 파리 라뮈에트역에서 체포되었다.

샤를 들레스트랭은 제1차 세계대전의 포로 경험과 기갑부대 지휘를 거친 프랑스 장군으로, 현대전에서 전차의 역할을 중시했다. 패전과 휴전 뒤에도 저항을 선택한 그는 샤를 드골의 지명으로 비밀군의 초대 지휘관이 되어 여러 저항운동의 군사 조직을 묶었다. 그는 장 물랭과 협력해 점령지 전역으로 조직을 넓혔지만 1943년 6월 9일 체포되었고, 후임을 정해야 하는 상황은 칼뤼르 회의의 배경이 되었다. 나치 수용소에서 살해된 그는 사후 해방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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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0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생도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독일군 포로
  • 1923–1936기갑부대 지휘관, 대령
  • 1936–1939제3기갑여단장, 준장
  • 1939–1940제7군 전차부대 및 제1기갑집단 지휘관
  • 1942–1943비밀군 초대 지휘관, 암호명 비달
  • 1943–1945나츠바일러와 다하우 수감, 처형

샤를 욍치제르

Charles Huntziger
군사·지휘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계 1880–1941 ○ 추락사

패전과 정전의 군사적 논리를 대표한 장군

그는 1940년 6월 22일 콩피에뉴 숲에서 프랑스를 대표해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샤를 욍치제르는 프랑스 식민보병 출신의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발칸 전선과 전간기 해외 지휘·협상에서 경력을 쌓았다. 1940년 세당 방면 제2군을 지휘하며 독일군의 돌파를 막지 못했고, 그 판단은 프랑스 패전의 책임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비판받았다. 그는 전투를 계속할 수 있는 한계가 임박했다고 보았으며, 페탱 정부의 전권대표단 의장으로 6월 22일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이후 비시의 국방장관이 되어 협력국가의 군사 재편을 맡았고, 1941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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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생시르 졸업, 식민보병 소위
  • 1918동부연합군 작전참모, 바르다르 공세 계획
  • 1924–1928톈진 프랑스 조계 주둔군 사령관
  • 1934–1938레반트 프랑스군 총사령관
  • 1939–1940제2군 사령관, 세당 방면
  • 1940제4군집단 사령관, 6월 22일 정전 프랑스 대표단 의장
  • 1940–1941비시 국방장관, 정전군 총사령관

에메 두멩크

Joseph Édouard Aimé Doumenc
군사·지휘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계 1880–1948 ○ 등산 사고사

수송·기계화·모스크바 협상의 장군

1939년 8월 모스크바에서 그는 소련과의 군사협정을 협상했으나, 프랑스 대표단의 권한은 제한적이었고 영국 대표는 서면 권한이 없었으며, 회담은 폴란드 통과 문제에서 막혔다.

프랑스 육군 장성 에메 두멩크는 제1차 세계대전기에 자동차 수송을 조직했고 전간기에는 독립 기갑사단 구상을 내놓았다. 1939년 8월 모스크바에서 프랑스 군사대표단을 이끌며 소련과의 군사협정을 협상했으나 권한은 제한돼 있었고 회담은 폴란드 통과 문제에서 막혔으며, 독일·소련 협정으로 중단됐다. 1940년에는 최고사령부 소장으로 아르덴 전선의 붕괴를 겪었고, 이후 국가재건 총감과 군사사 저술 활동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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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1900에콜 폴리테크니크 학생
  • 1907–1909고등전쟁학교 수학
  • 1916–1918자동차수송국 지휘, 베르됭 보급·교대 조직
  • 1925리프 전쟁 참전
  • 1928독립 기갑사단 구상 제시
  • 1938최고전쟁위원회 위원
  • 1939모스크바 프랑스 군사대표단 단장
  • 1940–1942육군 총사령부 소장, 국가재건 총감, 현역 이탈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

Jean de Lattre de Tassigny
군사·지휘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계 1889–1952 ○ 자연사

비시의 명령을 거부하고 해방군을 이끈 장군

1945년 1월, 후퇴 명령이 내려졌지만 장군은 상징적 도시 스트라스부르의 수성을 명령해 드골의 지시를 '완벽한 수렴'으로 하루 먼저 앞질렀다.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는 제1차 세계대전과 모로코 전쟁을 거친 프랑스 직업군인으로, 1940년 패전 속에서도 사단의 결속을 지킨 지휘관이다. 비시 정권 아래 복무했지만 1942년 독일군의 남부 프랑스 점령에 맞서라는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고, 투옥과 탈출 뒤 자유 프랑스에 합류했다. 육군 B와 프랑스 제1군을 지휘하며 프로방스 상륙 이후 툴롱과 마르세유를 해방하고 라인강과 다뉴브강까지 진격했으며, 1945년 베를린 항복식에서 프랑스를 대표했다. 전후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식민전쟁을 지휘하던 중 암으로 사망했고 사후 프랑스 원수로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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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기병학교 수료, 장교 임관
  • 1914–1918제12용기병연대·제93보병연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21–1926모로코 주둔, 리프 전쟁 참전
  • 1940제14보병사단 사단장, 프랑스 전투
  • 1942–1943몽펠리에 제16군관구 사령관, 비시 명령 거부로 투옥·탈출
  • 1943–1945육군 B 및 프랑스 제1군 사령관, 해방전쟁 지휘
  • 1950–1951인도차이나 고등판무관·극동원정군 총사령관

조르주 티에리 다르장리외

Georges Thierry d'Argenlieu
군사·지휘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889–1964 ○ 자연사

고등판무관으로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세워 인도차이나 전쟁의 길을 연 수도사 출신 제독

1946년 6월 1일, 호찌민이 프랑스에서 협상 중일 때 코친차이나 임시정부를 일방 선포해 베트남민주공화국과의 충돌을 격화했다.

브레스트 출신의 해군 장교로 1차 대전 뒤 카르멜회 수도사가 되었다가, 2차 대전 때 해군으로 돌아와 드골의 자유 프랑스 해군을 이끌었다. 1945년 10월 31일 인도차이나 고등판무관으로 부임해 식민 행정의 복구를 맡았다. 1946년 베트민 지도부가 프랑스에서 협상하는 동안, 3월 6일 호–생트니 협정을 어기고 코친차이나 자치 공화국을 세워 사실상 전쟁을 시작하게 했다. 하이퐁 포격 등 강경책을 이끌다 1947년 소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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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카르멜회에 입회해 수도사가 되었다.
  • 1940드골 휘하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했다.
  • 1945드골에 의해 인도차이나 고등판무관으로 지명되었고, 10월 31일 현지에 도착했다.
  • 19466월 1일 코친차이나 임시정부를 선포했다. 11월 랑선과 하이퐁의 무력 장악을 지지했다.
  • 19473월 4일 프랑스 정부가 그를 소환하고 직위에서 해임했다.

앙리 나바르

Henri Navarre
군사·지휘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898–1983 ○ 자연사

프랑스 극동원정군의 마지막 사령관으로 디엔비엔푸 요새화를 결정해 1954년 패배를 맞은 장군

1953년 11월 디엔비엔푸에 프랑스군을 투입하고 요새화를 명령한 나바르는 1954년 3월 시작된 포위전에서 철수를 명하지 않았으며, 5월 요새가 함락되어 프랑스의 협상 입지가 무너졌다.

1차·2차 세계대전을 치른 프랑스 육군 장군으로, 1953년 5월 살랑의 뒤를 이어 인도차이나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부임 직후 본국 정부에 이 전쟁은 이길 수 없고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은 교착이라고 보고했다. 도시와 주요 도로를 지키며 베트민을 협상으로 몰아넣는다는 「나바르 계획」에 따라, 라오스로 가는 베트민의 길목을 막으려 1953년 11월 디엔비엔푸에 낙하산 부대를 내려 요새를 세웠다. 1954년 5월 요새가 함락되면서 프랑스의 패배가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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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8생시르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제1차 세계대전 전선에서 기병 소대장으로 복무했다.
  • 1942–1945독일에 맞선 활동으로 소환되자 지하로 들어가 프랑스 저항운동에 참여했고, 프랑스 해방전에서 제1군 기갑연대를 지휘했다.
  • 1945–1953준장이 되어 독일에서 복무했으며 제5기갑사단장과 알퐁스 쥐앵 원수 참모장을 지냈다. 1948~1949년에는 알제리에서 사단을 지휘했다.
  • 1953–1954인도차이나 프랑스군 사령관으로서 디엔비엔푸 전투를 지휘했으며, 요새 함락 뒤 교체되었다.
  • 1956육군에서 퇴역하고 인도차이나 전쟁에 관한 저서 《인도차이나의 고통》을 출간했다.

라울 살랑

Raoul Salan
군사·지휘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899–1984 ○ 자연사

인도차이나 전쟁의 프랑스군 사령관이자 OAS 지도자였다.

살랑은 1952~1953년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한 뒤 알제리 주재 프랑스 정부 대표를 맡았다. 알제리 독립에 반대해 1961년 4월 장군들의 쿠데타에 가담하고, 실패 뒤 지하로 들어가 프랑스령 알제리의 유지를 주장하는 비밀 무장조직 OAS를 창설·지휘했다. OAS는 알제리와 프랑스에서 테러와 폭력을 벌였다. 1962년 체포되어 종신 구금형을 받았으며, 1968년 사면·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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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3인도차이나 프랑스군 총사령관
  • 1958–1960알제리 주재 프랑스 정부 대표
  • 1961–19624월 쿠데타 가담, 이후 OAS 지도자
  • 1962체포되어 종신 구금형 선고
  • 1968사면·복권
군사·지휘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인 1902–1947 ✕ 추락사

자유 프랑스의 기갑 지휘관

1941년 쿠프라에서 그는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 프랑스 국기가 휘날릴 때까지 무기를 내려놓지 않겠다고 서약하게 했다.

필리프 르클레르 드 오트클로크는 1940년 패전 뒤 드골의 자유 프랑스에 합류해 식민지 군대와 망명군을 하나의 전투력으로 묶은 프랑스 장군이다. 그는 쿠프라에서 스트라스부르까지 이어지는 목표를 제시했고, 아프리카 전역에서 단련한 기동전을 제2기갑사단에 이식했다. 1944년 8월에는 연합군의 파리 우회 구상에 맞서 수도로 진격해 프랑스군과 레지스탕스가 주도하는 해방을 실현했다. 전후 인도차이나에서는 군사적 승리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인식했지만, 194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해 그 판단을 끝까지 펼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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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졸업
  • 1925–1939기병 장교, 모로코 복무 및 전쟁대학 수료
  • 1940자유 프랑스 합류, 드골의 지휘 아래 아프리카 파견
  • 1940–1943카메룬·차드 군사 지휘관, 쿠프라·페잔 전역 지휘
  • 1943–1945제2기갑사단 지휘, 노르망디·파리·스트라스부르 해방전 참가
  • 1945–1946극동 프랑스 원정군 사령관, 일본 항복식 프랑스 대표
  • 1946–1947북아프리카 육군 감찰관

크리스티앙 드 카스트리

Christian de Castries
군사·지휘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902–1991 ○ 자연사

1954년 디엔비엔푸 요새를 지휘하다 함락과 함께 포로가 된 프랑스 장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해 패전 뒤 포로가 되었다. 석방 후 사단장과 기업 경영자를 거쳐 군에서 은퇴했다.

프랑스의 오랜 귀족 가문 출신 기병 장교로, 2차 세계대전을 거쳐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했다. 1953년 12월 디엔비엔푸 요새의 지휘를 맡았다. 1954년 3월 13일 베트민의 공격이 시작되어 비행장이 포격으로 부서지고 우기로 보급이 끊기자 요새는 3개 거점만 남았다. 5월 7일 하노이의 코니 장군은 백기를 들지 말고 사격을 멈춘 뒤 장비를 파괴하라고 명령했고, 카스트리는 요새 함락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가 제네바 협정 뒤 풀려났다.

상세 이력 보기
  • 1923육군에 입대해 소뮈르 기병학교에서 수학했다.
  • 1926기병 장교로 임관했다가 승마 스포츠를 위해 군을 떠났다.
  • 1940–1945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군에 복귀해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했다.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프랑스 남부와 독일에서 연합군과 싸웠으며, 전쟁 말기에는 제3 모로코 스파히 기병대를 지휘했다.
  • 1946인도차이나에 파견되어 모로코 구미에르 대대를 지휘했다.
  • 1953–1954부상으로 프랑스에서 1년간 요양한 뒤 베트남으로 돌아왔다. 대령으로 디엔비엔푸 방어를 맡았고, 포위전 막바지에 준장으로 승진했다. 프랑스군은 1954년 5월 7일 패배했고, 그는 제네바 휴전 협정이 마련되는 동안 4개월간 포로로 억류됐다.
  • 1954–1959귀국 후 서독 주둔 제5기갑사단을 지휘했다. 1959년 교통사고 뒤 군에서 은퇴했다.
  • 1991파리에서 사망했다.

앙리 롤탕기

Henri Rol-Tanguy
군사·지휘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인 1908–2002 ○ 자연사

파리 봉기를 지휘한 공산주의 레지스탕스 지도자

1944년 8월 21일, 그는 파리 전역에 바리케이드를 세우라는 명령을 게시했다.

앙리 롤탕기는 금속 노동자 출신의 프랑스 공산주의자이자 국제여단 참전자로, 스페인 내전과 반나치 레지스탕스에서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그는 1944년 8월 파리 지역 프랑스 국내군(FFI) 사령관으로서 동맹군이 입성하기 전에 봉기를 조직하고 지휘했다. 그의 활동은 노동운동의 조직 경험과 무장 저항을 결합해 수도 해방을 내부에서 추진한 사례였다. 전후에는 군과 프랑스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레지스탕스의 독자적 역할을 공적으로 옹호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5탈보 금속공장 노동자, 공산주의 청년동맹 가입
  • 1936파리 지역 금속노동조합 CGT 서기
  • 1937–1938스페인 국제여단 제14여단 정치위원, 에브로 전투 참전
  • 1941–1942파리 지역 무장조직 책임자, FTP 창설 지도부
  • 1943파리 지역 FTP 재편, FFI 지역 참모부 합류
  • 1944파리 지역 FFI 사령관, 파리 봉기 지휘
  • 1945–1962프랑스 육군 중령, 전후 군사 보직
  • 1962–1987프랑스 공산당 중앙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