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사회운동·조직 · 소련 인물 91명

조건 모두 해제

옐레나 드미트리예브나 스타소바

Елена Дмитриевна Стасова
사회운동·조직 소련 소련 러시아 1873–1966 ○ 자연사

혁명 직후 당 서기국의 실무 관리자

마리야 에센이 지하 가명을 정할 때 말했다. "차라리 '정언명령'이라 부르고 싶지만 너무 기니까, 그냥 '압솔류트'로 하자." 스타소바는 그 이름대로 임무를 절대 실수하지 않는 당의 연락책이 되었다.

1898년 사회민주노동당 창립과 함께 입당한 구볼셰비키로, 이스크라의 지하 연락책과 위조문서·무기 운반을 도맡아 '아브솔류트'(절대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1917년부터 중앙위 기술서기와 서기국 의장으로서 합법화된 당의 장부·연락·회의 실무를 체계화했고, 이후 코민테른 독일 담당과 MOPR 의장으로 국제 혁명가 구호 조직을 이끌었다. 초기 당 기구의 조직적 토대를 닦은 몇 안 되는 여성 중앙위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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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8중앙위 기술서기, 합법화된 당 조직의 기록과 연락 실무
  • 1919중앙위 서기국 의장
  • 1921–26코민테른 독일 담당

세묜 이바노비치 발라쇼프

Семён Иванович Балашов
사회운동·조직 소련 러시아 제국 → 소련 러시아인 1874–1925 ✕ 자살

프룬제와 함께 첫 소비에트를 세운 이바노보 볼셰비키, 당명 '스트란니크'

1905년 5월, 발라쇼프는 자신의 아파트를 총파업 사령부로 삼아 72일간 7만 직조 노동자의 투쟁을 지휘했고, '콤파니야' 공장 노동자들은 그를 첫 소비에트 대표로 뽑았다.

농민 출신 직조공으로 1898년 RSDLP에 입당해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위원회의 핵심이 되었다. 1905년 프룬제, 아파나시예프와 함께 72일간의 총파업과 러시아 최초의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를 이끌었으며, 아파나시예프가 흑백파에게 살해된 뒤 시당 위원장을 맡았다. 1908년 체포되어 9년간 시베리아에 유배됐다가 1917년 3월 귀환해 위원장직을 되찾고 체카에서 활동했다. 내전 후 여러 책임직을 거쳤으나, 누적된 박해와 투옥으로 쇠약해진 끝에 1925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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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RSDLP 위원회에 입당
  • 1905프룬제·아파나시예프와 함께 총파업 지도, 첫 소비에트 대표 선출
  • 1905–1908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RSDLP 위원장, 브랸스크·모스크바에서 당 활동
  • 1908–1917체포 후 시베리아 유형
  • 1917–1918이바노보 볼셰비키 위원장·체카, 내전 전투 참전
  • 1919–1925하리코프·폴타바·모스크바에서 당 및 소비에트 직책

미하일 표도로비치 블라디미르스키

Михаил Фёдорович Владимирский
사회운동·조직 소련 소련 러시아 1874–1951 ○ 자연사

4반세기 동안 당의 회계를 감시한 구볼셰비키

1919년 3월 16일부터 30일까지, 의사 출신 구볼셰비키가 스베르들로프의 급서로 공백이 된 소비에트 국가원수직을 대행했다. 불과 2주였지만 혁명 정권의 초기 권력 계승에서 결정적 틈을 메운 순간이었다.

1895년 입당한 구볼셰비키. 모스크바 노동자동맹 창립, 1905년 12월 무장봉기 등 지하운동을 거쳐, 1919년 3월 스베르들로프 사후 2주간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장 대행으로 국가원수직을 수행했다. 이후 우크라이나 부수상 겸 국가계획위원장, 러시아 보건인민위원을 지냈고, 1927년부터 사망까지 24년간 중앙감사위원장으로 당의 회계와 규율을 관장했다. 스탈린 노선을 지지하며 숙청기에도 입지를 유지했으나 사위 류틴은 당에서 제명·숙청되는 역설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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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모스크바 노동자동맹 창립 참여 · RSDLP 입당
  • 1896–1905체포·유배·망명 반복, 해방노동 그룹 합류, 이스크라 협력, 베를린·카잔 의학 학위
  • 1905–1907모스크바 당위원 · 소비에트 대의원, 12월 무장봉기 참여, 재차 체포 후 프랑스 망명
  • 1917–191910월 봉기 모스크바당 5인 지도부 · 군사혁명위 · 전러시아 중앙집행위 간부, 1919.3 중앙집행위원장 대행
  • 1922–1926우크라이나 부수상 · 국가계획위원장 · 당 중앙통제위원장 겸 노동자농민감찰 인민위원
  • 1926–1927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 1927–1951전연방공산당 중앙감사위원회 의장 (24년간, 사망 시까지)
  • 1930–1934러시아 공화국 보건인민위원 (겸임)

리디야 알렉산드로브나 포티예바

Лид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Фотиева
사회운동·조직 소련 소련 러시아 1881–1975 ○ 자연사

레닌의 개인비서, 마지막 정치투쟁의 전달자

1923년 3월 5일, 레닌은 포티예바에게 스탈린과의 관계 단절 편지를 받아쓰게 한 뒤 카메네프에게 '그루지야 문제에서 트로츠키 편에 섰다'고 전하라고 지시했다. 글랏세르는 트로츠키에게 말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가 스탈린을 향한 폭탄을 준비 중입니다."

레닌의 개인비서(1918~1924)로, 1922년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유언)를 구술받아 30년간 보관, 1956년 공개로 이끌었다. 1923년 병상의 레닌을 대신해 트로츠키와의 연락을 중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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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17모스크바 음악원과 베스투제프 여성고등과정 수학, 학생운동으로 페름 유형
  • 1904–1905제네바·파리 망명 중 RSDLP(b) 입당, 제1차 러시아 혁명 참가
  • 1917「프라우다」지에서 몰로토프의 보좌관, 모스크바 음악원 졸업
  • 1918–1924V.I. 레닌 개인비서, 인민위원회의(Sovnarkom) 및 노동국방회의(STO) 서기 겸임
  • 1922–1923레닌의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유언) 구술 필기, 그루지야 문제 자료 분석 및 레닌-트로츠키 연락 중개
  • 1918–1930인민위원회의 및 노동국방회의 서기 지속
  • 1938–1941중앙 V.I. 레닌 박물관 연구원
  • 1941–1945MOPR(국제혁명투사원조기구) 중앙위원회 근무
  • 1956–1975연방 등급 개인연금 수급자, 회고록 집필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크레스틴스키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Крестинский
사회운동·조직 소련 소련 벨라루스 1883–1938 ✕ 처형

책임서기에서 피고석으로 간 초기 볼셰비키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첫날, 크레스틴스키는 피고석에서 일어나 '나는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니며, 반소비에트 블록의 구성원도 아니었다'고 선언했다. 대숙청기 세 재판 전체에서 법정 자백을 거부한 유일한 순간이었다.

차르 시절 변호사 출신의 볼셰비키로, 예카테린부르크에서 혁명을 이끌고 최초의 정치국원이 되었다. 스베르들로프 사후 1919년부터 2년간 책임서기로서 당을 이끌었으나, 노동조합 논쟁에서 트로츠키를 지지하며 레닌과 충돌해 실각했다. 이후 소련 최대의 외교무대인 주독 전권대표로 9년간 활약했고, 대숙청기 모스크바 재판에서 유일하게 법정 자백을 거부한 피고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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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22재무인민위원
  • 1919–21책임서기, 정치국원
  • 1938제3차 모스크바 재판 후 처형

마트베이 표도로비치 시키랴토프

Матвей Фёдорович Шкирятов
사회운동·조직 소련 소련 러시아 1883–1954 ○ 담석증

30년간 당원 명부 위에 놓인 지우개

1948년 1월, 음악가 소환 회의. 즈다노프의 설교가 이어지는 가운데 시키랴토프가 프로코피예프를 향해 주의를 기울이라고 명령했다. 프로코피예프는 대답했다: "나는 나에게 소개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결코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1906년 입당한 볼셰비키로, 모스크바 재봉노동자 사이에서 지하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레닌의 첫 당원 검증을 집행한 이래 30년간 중앙통제위원회·당통제위원회에서 스탈린기 모든 핵심 숙청의 실무 집행자로 활동했으며(부하린·리코프 기소, 체첸-인구시 지도부 전원 체포, 몰로토프 아내 추방 등) 1952년 당통제위원장 겸 중앙위 상임위원에 올랐으나 스탈린 사후 한 달 만에 상임위에서 제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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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RSDLP 입당, 모스크바 재봉노동자 사이에서 지하활동
  • 1910–14체포·볼로그다 유형 → 귀환 후 모스크바 볼셰비키 지하조직 복귀
  • 1917모스크바 병사대표 소비에트·툴라 소비에트 집행위원,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18–20전러시아 재봉노조 중앙위 서기, 모스크바 시당위원
  • 1921–34중앙통제위원회(CCC) 위원 → 상임위원, 당 검증·숙청 실무 총괄
  • 1934–39당통제위원회 당콜레기야 서기
  • 1939–52당통제위원회 부위원장, 중앙위원
  • 1952–54당통제위원회 위원장, 중앙위 상임위원 (1953.3 제외)

그리고리 예레메예비치 예브도키모프

Григорий Еремеевич Евдокимов
사회운동·조직 소련 소련 러시아 1884–1936 ✕ 처형

지노비예프의 오른팔로 페트로그라드를 구했고, 스탈린의 쇼재판에서 사라졌다

1919년 페트로그라드 공방전. 세르주: 「백발에 우렁찬 목소리, 술 좋아하는 늙은 뱃사람. 도시는 주로 그 덕에 구원되었다」

15세에 하천 선원이 되어 190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9년 제7군 정치부장으로 유데니치의 페트로그라드 공세를 막아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고, 빅토르 세르주는 「도시를 구한 것은 주로 예브도키모프였다」고 기록했다. 내전 후 페트로그라드 노조 의장과 소비에트 부의장을 거쳐 1925년 레닌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로 지노비예프의 최측근이자 '신반대파' 지도자가 되었다. 1926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었으나 곧 통합반대파에 가담해 모든 직위를 잃고 출당됐다. 복당 후 낙농업 관료로 전락했다가 1936년 제1차 모스크바 전시재판에서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함께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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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RSDLP 입당, 볼셰비키
  • 1908–16수차례 체포와 유형, 시베리아 탈출
  • 1917페트로그라드 적위대 조직, 제헌의회 의원
  • 1919제7군 정치부장, 페트로그라드 방어
  • 1922–25페트로그라드 노조평의회 의장, 소비에트 부의장
  • 1925–26레닌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 '신반대파'
  • 1926.1–4중앙위 서기 겸 조직국원
  • 1927통합반대파, 중앙위 제명, 출당
  • 1929–34낙농공업 총관리국장 등 경제 관료
  • 1936.8제1차 모스크바 전시재판, 사형

야코프 미하일로비치 스베르들로프

Яков Михайлович Свердлов
사회운동·조직 소련 소련 러시아 1885–1919 ○ 병사

혁명 직후 당과 국가를 연결한 조직가

1918년 1월 5일 제헌의회 개회 순간, 사회자로 나선 원로 사회혁명당원을 단상에서 밀어내고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의 이름으로 직접 개회를 선언했다.

중앙위 서기국 의장과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겸하며 혁명 직후 볼셰비키 권력의 실무를 총괄했다. 레닌의 정치 결정을 표결·인사·기관 운영으로 전환한 독보적 조직가로, 10월 봉기 실무 지휘, 제헌의회 해산, 최초 소비에트 헌법 제정, 코민테른 창립을 주관했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비준에서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12년 넘는 유형과 감옥 생활로 쌓은 당내 인맥과 현장 감각이 그의 무기였다. 34세에 스페인 독감으로 급서하자 레닌은 '당 전체의 기둥이 무너졌다'고 썼으며, 그의 공백은 훗날 스탈린의 권력 집중을 앞당긴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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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중앙위 서기, 10월 봉기 조직 실무
  • 1917–19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1918–19중앙위 서기국 의장

이반 이바노비치 코롯코프

Иван Иванович Коротков
사회운동·조직 소련 소련 러시아 1885–1949 ○ 자연사

당 통제 기관에서 미술관으로 간 볼셰비키

11세에 마을을 떠나 그림 도제가 되었고, 16세에 성상화가 밑에서 이콘을 그렸다. 그로부터 20년 뒤, 같은 손으로 당 중앙기구의 간부 명단을 쥐었다.

블라디미르 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1세에 도제로 나가 성상화가 기술을 익혔고, 1905년 20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내전 후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지역 당 조직을 이끌었고, 1923년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장에 올라 스탈린의 당 기구 강화 초기 단계에서 간부 임명 라인을 관리했으며, 오르그뷰로 후보위원도 지냈다. 이후 15년간 중앙통제위원회와 당통제위원회에서 근무하며 대숙청기의 당 기구 숙청 작업에도 관여했고, 1939년 한동안 직위에서 배제된 뒤 푸시킨 미술관 관장으로 자리를 옮겨 1944년 은퇴할 때까지 박물관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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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RSDRP 입당,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에서 1905-07년 혁명 참여
  • 1913–16체포 및 유형
  • 1917야로슬라블 RSDRP(b) 위원회 위원
  • 1918–21테이코보 현 당위원장·집행위원장,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현 집행위 부위원장, 이후 현 당위 서기
  • 1922–24RKP(b) 중앙위원
  • 1923–24중앙위 조직지도부장, 오르그뷰로 후보위원
  • 1924–34중앙통제위원회 간부위원
  • 1934–39당통제위원회 위원
  • 1939–44푸시킨 국립미술관 관장
  • 1944은퇴

세르게이 미로노비치 키로프

Сергей Миронович Киров
사회운동·조직 소련 소련 러시아 1886–1934 ✕ 암살

레닌그라드의 조직가, 대숙청의 구실이 된 암살

1926년 레닌그라드 부임 첫해, 키로프는 공장을 돌며 180회 넘는 노동자 집회에서 연설했다.

1904년 톰스크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1905년 혁명에 참여한 혁명가이자 소련 정치인이다. 1921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1서기로 바쿠 유전 재건을 이끌었고, 1926년 레닌그라드 당을 맡아 1930년 정치국원이 되었다. 내전기에는 아스트라한 방어를 지휘하며 반볼셰비키 봉기를 대규모 사살로 진압했고, 1933년에는 레닌그라드주 '트로이카' 위원으로 반혁명 사건의 사형 판결권을 가졌다. 1934년 12월 1일 레닌그라드 스몰니에서 레오니트 니콜라예프에게 총격당해 사망했고, 그 죽음은 대숙청의 구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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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7블라디캅카스에서 언론·지하활동
  • 1921–26아제르바이잔 당 제1서기, 바쿠 유전 재건
  • 1926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 지노비예프의 기반 인수
  • 1930정치국원
  • 1934.12.1스몰니에서 니콜라예프에게 피살, 같은 날 신속 처형령 발효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우글라노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Угланов
사회운동·조직 소련 소련 러시아 1886–1937 ✕ 처형

모스크바를 쥔 우파 반대파의 조직적 기반

1928년 10월 19일, 스탈린이 직접 모스크바 당 위원회 및 통제위원회 합동 총회 연단에 올라 '우경 위험'을 주제로 기조연설을 했다. 이어 11월 우글라노프는 모스크바 제1서기직에서 해임되었다.

1886년 12월 5일(구력 17일) 야로슬라블현 페오도리츠코예의 러시아인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하다 1905~07년 혁명에 가담했고 1907년 볼셰비키로 입당했으며, 1914년 재징집되었다가 부상으로 1916년 제대했다. 1924년부터 1928년까지 모스크바 당 조직을 이끌며 최고 실력자로 부상했고,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류틴과 함께 좌익 반대파 분쇄에 앞장섰다. 1928년 우익 반대파의 지도자가 되어 강제 집단화와 급속한 공업화에 반대했으나 그해 11월 모스크바 제1서기직에서 해임되었다. 1932년 류틴 사건으로 출당되었다가 1936년 다시 체포되어 1937년 5월 31일 사형을 선고받고 당일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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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RSDLP 입당, 볼셰비키
  • 1914–16차르군 복무, 부상 후 페트로그라드 귀환
  • 19172월·10월 혁명 참여,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원
  • 1921–22페트로그라드 현당 책임서기, 크론시타트 진압 참여
  • 1922–24니즈니노브고로드 현당 책임서기
  • 1924–28모스크바 현당 제1서기, 중앙위 서기
  • 1926–29정치국 후보위원
  • 1928–30소련 노동인민위원
  • 1932류틴 사건으로 출당
  • 1937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 당일 총살

파벨 페트로비치 포스티셰프

Павел Петрович Постышев
사회운동·조직 소련 소련 러시아인 1887–1939 ✕ 처형

기근의 특사이자 공포의 집행자, '우크라이나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불린 뒤 1939년 처형되다

1935년 12월 28일 『프라우다』 기고에서 학교·아동원·소년궁전·클럽·극장에 새해 전나무를 세우자고 제안해 금지되었던 욜카가 되살아났고, 첫 공식 소비에트 욜카는 1935년 12월 30일 하르키우에서 열렸다.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에서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나 1904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1908년 체포되어 블라디미르 중앙감옥과 이르쿠츠크 유형을 거쳤다. 10월 혁명기에 이르쿠츠크를 볼셰비키 손에 넘기고 극동공화국 수립에 참여했으며, 1923년 우크라이나로 전보되어 1925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가 되었다. 1933~34년 약 10만 명의 당원이 제명되어 그는 '우크라이나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불렸고, 1937년 쿠이비셰프 제1서기로 옮겨 대숙청을 확대하다 체포되어 1939년 처형되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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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17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와 이르쿠츠크에서 지하 볼셰비키 활동; 1905년 이바노보 파업 참가, 여러 차례 체포·유형
  • 1917–1922이르쿠츠크 소비에트 부의장, 혁명재판소 의장, 중앙시베리아 위원, 극동공화국 군사위원
  • 1924–1930키예프·하리코프 당위원회 서기,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 1930–1933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서기 겸 조직지도부장
  • 1932.11–12대기근 와중 곡물징발 특별전권대표로 볼가하류·우크라이나 파견
  • 1933–1937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 ― 코시오르를 능가하는 실권으로 대숙청·러시아화 주도, 당원 10만 명 숙청
  • 1934–1938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
  • 1937–1939쿠이비셰프 주당 제1서기로 좌천, 1938년 2월 체포, 1939년 2월 26일 총살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시베르니크

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Шверник
입법·국가 대표 소련 소련 러시아 1888–1970 ○ 자연사

스탈린 말기의 공식 국가원수

1905년 1월 9일, 16세의 공장 소년공이었던 시베르니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앞에서 '피의 일요일' 발포를 목격했다. 같은 해 가을, 그는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7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출신으로,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제1서기를 14년간 맡으며 소비에트 노조체계를 구축했다. 1946년 칼리닌의 뒤를 이어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이 되었으나 실권은 스탈린과 정치국에 있었다. 전시에는 산업 대피와 나치 전쟁범죄 조사위원회를 이끌었고, 스탈린 사후에는 흐루쇼프와 함께 당통제위원장으로서 정치적 억압 피해자들의 복권을 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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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s–1930s노동조합과 당 행정에서 성장
  • 1938–1946민족소비에트 의장, 스탈린기 공식 연방대표제의 한 축
  • 1946–1953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명목상 국가원수
  • 1953–1956스탈린 사후 노조·국가 행정 원로로 이동
  • 1956 이후당통제위원회 등에서 복권·징계 문제에 관여

이반 파블로비치 톱스투하

Иван Павлович Товстуха
사회운동·조직 소련 소련 우크라이나 1889–1935 ○ 폐결핵

스탈린의 첫 비서, 그 기록 보관자이자 첫 전기 작가

바자노프의 회고: 톱스투하는 당대회 투표용지의 필적을 하나하나 대조하며 누가 스탈린의 이름을 지웠는지 식별했다. 「그가 가진 건 반쪽짜리 폐뿐이었지만, 스탈린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스탈린의 첫 개인비서(1918~1935)이자 중앙위 비밀부장(1926~1930)으로, 스탈린 개인 사무국을 운영하고 레닌연구소 기록보관소를 통제한 인물이다. 1922년 백과사전 「그라나트」에 스탈린의 첫 공식 전기를 집필했으며, 레닌 전집 초판 편찬 작업을 주도했다. 망명 시절 프랑스 사회당에 가입해 노동자로 일했고, 귀국 후 민족인민위원부 서기로 스탈린과 인연을 맺었다. 그의 기록 관리(특히 레닌과 트로츠키 관련 문서의 선택적 접근)는 스탈린 진영의 이념적 정비에 결정적 도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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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09체르니고프 사회민주주의 조직에서 혁명운동 시작
  • 1909–11불온서적 소지로 체포, 시베리아 유형
  • 1912–17망명, 오스트리아·프랑스에서 노동; 프랑스 사회당 및 파리 RSDLP(b) 지부 가입
  • 1917–18적위대 중앙참모부 감찰부 서기
  • 1918–21민족인민위원부 서기·간부, 스탈린과 결합
  • 1921–24중앙위 기구 책임일꾼, 스탈린 개인 사무국 조직·운영
  • 1922백과사전 「그라나트」에 스탈린 최초 공식 전기 집필
  • 1924–26레닌연구소 부소장, 레닌 전집 초판 편찬 참여
  • 1926–30중앙위 비밀부장 겸 서기장 제1보좌관
  • 1930–31레닌연구소 부소장,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 편집위원
  • 1931–35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 부소장 겸 기록보관소장
  • 1934–35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후보위원,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스타니스와프 비켄티예비치 코시오르

Станислав Викентьевич Косиор
사회운동·조직 소련 소련 폴란드 1889–1939 ✕ 처형

기근을 부인한 우크라이나 당 수장, 스탈린의 총에 쓰러지다

1932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에 기근이 번지던 때 코시오르는 스탈린에게 보낸 서한에서 밝혔다: "우크라이나에 '기근'이 있다는 온갖 이야기는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굶주리는 마을들이 있기는 하나 이는 현지의 무능 탓일 뿐입니다."

1889년 11월 18일(구력 11월 6일) 러시아 제국 지배하 폴란드 왕국 벵그루프에서 공장 노동자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1907년 당에 입당했다. 돈바스와 키예프의 지하운동을 거쳐 우크라이나 공산당 창설에 참여했고, 1928~1938년 우크라이나 당을 이끌며 집단화와 공업화를 밀어붙였다. 1930년 정치국 정위원. 1932~33년 대기근의 존재를 부인하는 보고로 비판받는 동시에 감축과 식량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1938년 5월 체포되어 1939년 2월 26일 사형이 선고·집행되었고, 1956년 3월 14일 복권되었다. 2010년 우크라이나 법원은 그를 1932~33년 기근 조직자 중 한 사람으로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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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917돈바스 지하 볼셰비키 활동, 여러 차례 체포·유형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19–192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 1926–1928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서기 겸 조직국원
  • 1928–1938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총서기 → 제1서기
  • 1930–1938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정위원
  • 1938.5'폴란드 군사조직' 혐의로 체포
  • 1939.2.26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 당일 집행

알렉산드라 바실리예브나 아르튜히나

Александра Васильевна Артюхина
사회운동·조직 소련 소련 러시아 1889–1969 ○ 자연사

제노트델을 전성기로 이끈 유일한 여성 조직국·서기국원

1927년 국제회의 연단에서 "우리 경제학자들조차 여성 노동을 덜 가치 있는 것으로 본다"며 당내 편견을 직시했다.

방직 노동자 출신 혁명가로서 제노트델(여성노동부)을 전성기로 이끌며 여성의 산업 진출을 추진했다. 유일한 여성 조직국원·서기국 후보위원(1926~1930)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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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4상트페테르부르크 방직·금속 노동자, 노조 조직, 프라우다에 '금속노동자 슈라' 필명 기고
  • 1914–1917체포되어 유형
  • 1917–1924비시니볼로초크 당위원, 노동위원, 트베리현 여성부장, 프롤레타르카 공장위원장
  • 1924–1929당 중앙위 여성노동부(제노트델) 부장, 잡지 《라보트니차》 편집장
  • 1926–1930중앙위원, 조직국 위원, 서기국 후보위원
  • 1930–1934중앙통제위원회 위원
  • 1934–1938섬유(면방직)노동자노조 중앙위원장
  • 1938–1951모스크바 방직 공장장

마르테먄 니키티치 류틴

Мартемьян Никитич Рютин
사회운동·조직 소련 소련 러시아 1890–1937 ✕ 처형

「류틴 강령」으로 스탈린 독재에 마지막 당내 저항을 조직한 우익 반대파

1932년 9월 OGPU 심문에서: "내 뒤에는 어떤 배후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나 자신이 이 조직의 주동자였고, 그 선두에 섰으며, 나 혼자 강령과 호소문 전부를 썼다." — 동지들을 감싸며 모든 책임을 홀로 짊어지려 한 순간.

이르쿠츠크 농민 가정 출신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 하얼빈 소비에트 의장과 여러 지역 당서기를 역임하고 1927년 중앙위원 후보가 되었다. 강제 집단화를 목격한 후 우익 반대로 전환, 1932년 200쪽 분량의 「류틴 강령」을 집필해 스탈린 개인독재 타도를 호소했다. 이는 당내 마지막 조직적 반대운동이었다. 1932년 체포되어 1937년 25분 재판 끝에 사형 선고를 받고 당일 총살되었다. 1988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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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7멘셰비키 입당, 하얼빈 소비에트 의장
  • 1918–21이르쿠츠크 군관구 사령관, 이르쿠츠크 당위원장
  • 1923–24다게스탄 당위원회 책임서기
  • 1925–28크라스나야프레스냐 구당서기, 중앙위원 후보
  • 1928–30『크라스나야 즈베즈다』 부편집장, 소유즈키노 의장
  • 1930당 제명, 체포 후 석방
  • 1932「류틴 강령」 집필,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결성
  • 1937군사재판 25분 만에 사형, 당일 총살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포스크료비셰프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Поскрёбышев
사회운동·조직 소련 소련 러시아 1891–1965 ○ 자연사

스탈린의 그림자: 25년간 정보를 걸러내고 헌법과 당사를 쓴 비서실장

딸 나탈리야의 증언: 「아버지는 거의 24시간 일하셨다. 새벽 5시에 퇴근해서 오전 10-11시에 다시 출근하셨다. 사람들은 그를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라 불렀다. 어떤 질문에도 답을 주셨다.」

스탈린의 개인비서로 25년간 특별섹터를 이끌며 모든 정보를 여과했다. 1936년 헌법과 『당사 소사』를 집필했으며, 아내가 숙청되는 와중에도 자리를 지켰다. 1952년 베리야의 음모로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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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1펠트셰르 → 투르케스탄군 정치부 → 즐라토우스트 현 혁명위 의장
  • 1922–1928중앙위 업무관리국장 → 서기장(스탈린) 보좌관
  • 1928–1934스탈린 개인비서, 중앙위 비밀부 부장 → 비밀부장
  • 1934–1952중앙위 특별섹터장 — 25년간 스탈린 비서실 총괄
  • 1939제18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 최고회의 대의원
  • 1941–1945전쟁기 스탈린 비서실에서 군사작전·얄타·포츠담 회담 실무
  • 1952–1953중앙위 상임위원회·국장단 서기 → 베리야 음모로 해임

마리야 아키모브나 볼로디체바

Мария Акимовна Володичева
사회운동·조직 소련 소련 러시아 1891–1973 ○ 자연사

레닌의 업무서기, 마지막 구술의 기록자

1963년, 72세의 볼로디체바는 유리 카랴킨에게 말했다: "레닌 동지를 해독하는 것은 아주 어려웠고, 스탈린 동지는 아주 쉬웠습니다…"

레닌의 업무서기(1918~1924)로, 1922년 12월 30~31일 「민족 문제 또는 자치화에 관하여」를 포함한 마지막 구술들을 받아썼다. 1923년 3월 5일 레닌이 트로츠키에게 그루지야 사건 방어를 요청한 편지를 받아쓰고 전달했으며, 유언 초기 필사본을 스탈린의 명령으로 폐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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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VII(4월) 전러시아 당대회 서기국 근무, VI 당대회 속기사
  • 1917.11–1918.07인민위원회의(Sovnarkom) 출판국 서기
  • 1918–1924인민위원회의 및 노동국방회의(STO) 타자수·속기사, 서기 보좌관
  • 1922.12–1923.03레닌의 마지막 논문·편지 구술을 받아씀: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 「민족 문제 또는 자치화에 관하여」 등
  • 1924–1928V.I. 레닌 연구소(후일 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 연구원

카를 야노비치 바우만

Карл Янович Бауман
사회운동·조직 소련 소련 러시아 제국의 라트비아계 1892–1937 ○ 옥사

집단화를 밀어붙인 당 조직가

1930년 그는 집단농장 편입률 82.4%를 보고받고도 “너무 적다”고 답했다.

라트비아계 농민 가정 출신의 볼셰비키로, 혁명과 당 조직 사업을 거쳐 중앙 지도부에 올랐다. 그는 농촌 정책에서 전면적 집단화를 강행한 핵심 실무자였으며, 모스크바 당 조직을 이끌며 속도전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1930년 과속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실각했으며, 이후에도 중앙아시아와 과학 행정에서 당의 정책을 집행했다. 1937년 체포되어 조사 중 사망했고, 1955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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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 가입, 불법 정치활동 시작
  • 1917키예프에서 10월혁명과 소비에트 권력 수립에 참여
  • 1920–1923쿠르스크 губерния 노동조합평의회 의장, 쿠르스크 губком 책임서기
  • 1928–1930중앙위원회 농촌사업 담당, 모스크바 당위원회 제1서기
  • 1929–1930중앙위원회 서기, 정치국 후보위원
  • 1931–1934중앙아시아국 중앙아시아국 제1서기
  • 1934–1937중앙위원회 과학·기술 및 계획·재정·무역 부서 책임자
  • 1937체포 후 레포르토보 감옥에서 사망, 1955년 복권

멘델 마르코비치 하타예비치

Мендель Маркович Хатаевич
사회운동·조직 소련 소련 러시아 1893–1937 ✕ 처형

곡물 징발이 씨 뿌릴 사람마저 없앨 것이라고 몰로토프에게 경고한 당 서기, 4년 뒤 총살되다

"곧 씨 뿌리고 수확할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1932년 11월, 하타예비치가 몰로토프에게. 당일 답신: "진정한 볼셰비키는 국가의 필요를 먼저 놓아야 합니다."

멘델 하타예비치는 1893년 고멜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치과기공사로 일하다 191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32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로서 11월 몰로토프에게 "콜호스의 최소한의 필요를 고려하지 않으면 곧 씨 뿌리고 수확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서한으로 경고했으나, 몰로토프는 "진정한 볼셰비키는 국가의 필요를 먼저 놓아야 한다"고 답했다. 1933년부터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주당 제1서기로 좌천된 뒤에는 오히려 대기근의 집행자가 되어 기아와 식인 보도를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1937년 대숙청 와중 체포되어 반혁명 테러조직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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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7고멜에서 지하 볼셰비키 활동, 여러 차례 체포, 예니세이현 유형, 1917년 3월 사면
  • 1917–1921고멜·사마라 당 간부; 체코군에 포로로 잡혀 고문으로 오른손 마비; 서부전선 제21소총사단 정치위원
  • 1921–1925고멜현당 책임비서(1921–23), 오데사현당 책임비서(1923–24),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조직배치부 부장(1924–25)
  • 1925–1928타타르 주당 책임비서
  • 1928–1932중부볼가 변경당 제1서기: 대규모 집단화 추진, 쿨라크 대량 체포·추방 지휘
  • 1932.10–1933.01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 곡물 몰수 지령 공동 서명; 11월 몰로토프에 기근 경고 서한
  • 1933–1937.03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주당 제1서기; 기아와 식인 사례를 스탈린에게 보고하고도 1934년 당대회에서 집단화의 승리를 찬양
  • 1937.03–10재차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 9월 체포, 10월 27일 사형선고, 10월 30일 총살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폴론스키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Полонский
사회운동·조직 소련 소련 유대계 1893–1937 ✕ 처형

볼셰비키 조직부장에서 숙청된 노동조합 간부

1933년 1월 중앙위 조직부장에 임명되어 당 전 간부 배치를 관장했으나, 불과 4년 뒤 자신이 구축한 기구의 수사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1893년 6월 17일(구력 5일) 토볼스크에서 유대계 가정의 소상인 신분으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루벤 게르셰비치 폴론스키다. 선원과 미숙련 노동자, 페테르부르크 전기기사로 일하다 1913년 페테르부르크 금속노조 중앙이사회 위원이 되었고, 1914년 체포되어 1915년 토볼스크 현으로 행정 유배되었다. 1917년 3월부터 모스크바 금속노조 중앙이사회 서기로 10월 무장투쟁에 참가했고, 내전기에는 서부·남부 전선 사단 군정위원과 남동철도 군정위원을 지냈다. 1920~1924년 광부노조 중앙위 서기, 1930~1933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1935~1937년 전연방 중앙노동조합평의회 서기를 지냈으며 193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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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볼셰비키 입당
  • 1913페테르부르크 금속노조 중앙이사회 위원
  • 1917모스크바 금속노조 중앙이사회 서기 · 10월 봉기 참가
  • 1918–1920사단 군정위원 · 남동철도 군정위원 · VTsSPS 남부국 의장
  • 1925–1928로고시스코-시모놉스키 구당위 서기 · 모스크바 당위 제2서기
  • 1930–1933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자카프카스 변경위 서기
  • 1933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부장
  • 1933–1935교통인민위원부 정치총국장 · 부인민위원
  • 1935–1937전연방 중앙노동조합평의회(VTsSPS) 서기
  • 1937체신 부인민위원 · 체포

클라브디야 이바노브나 니콜라예바

Клавдия Ивановна Николаева
사회운동·조직 소련 소련 러시아 1893–1944 ○ 병사

인쇄공 출신으로 당 중앙위원·노조 지도부에 오른 프롤레타리아 여성혁명가

1918년 제1차 전러시아 여성노동자·농민대회, 레닌이 입장하자 니콜라예바는 일어나 《인터내셔널》을 부르기 시작했고 1,147명의 대의원들이 따라 불렀다.

인쇄공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 1917년 《라보트니차》 편집장, 내전기 페트로그라드 여성부를 이끌었다. 당 중앙위원·오르그뷰로 위원까지 오른 소비에트 체제 최고위 여성 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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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RSDLP(b) 입당, 인쇄노조 활동
  • 1908–15반복적 체포·유배, 혁명 선전 지속
  • 1917《라보트니차》 편집장, 10월혁명 참여
  • 1918–19페트로그라드 여성부·선전부장, 제1차 전러시아 여성대회 의장
  • 1924–26오르그뷰로 위원·서기국 후보위원·제노트델 책임
  • 1930–33중앙위 선동대중부장
  • 1936–44전연방노조중앙평의회 서기
  • 1942영국 파견, 귀환 중 공습 하 부상자 구조

야니스 에두아르도비치 칼른베르진슈

Ян Эдуардович Калнберзинь
사회운동·조직 소련 소련 라트비아 1893–1986 ○ 자연사

소비에트 라트비아의 창립자이자 발트 3국 최장기 집권 공화당 제1서기

1939년 라트비아 당국에 체포되어 리가 중앙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1940년 6월 소련군 진주 후 사면으로 석방되자마자 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로 호출되었다. 지하운동가에서 소비에트 공화국 창립 지도자로의 전환은 불과 며칠 사이에 이루어졌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1940년부터 1959년까지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지내며 소비에트 라트비아의 창립과 제도화를 주도했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17년 입당, 붉은 라트비아 소총병으로 내전에 참전했으며 이후 라트비아 지하운동과 모스크바 유학을 오갔다. 1940년 소련군 진주 후 리가 형무소에서 석방되어 곧바로 공화국 당 제1서기로 임명되었고, 전후 집단화와 공업화를 통해 라트비아의 소비에트 체제 편입을 총괄했다. 1957년 CPSU 정치국 후보위원에 올랐으나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때 불충분한 대응을 이유로 제1서기에서 물러났다. 이후 1970년까지 라트비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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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라트비아 사회민주당(볼셰비키) 입당
  • 1919–1920적군 라트비아 소총병으로 남부전선에서 내전 참전
  • 1923–1933서방 소수민족 공산대학 및 붉은교수양성소에서 수학
  • 1925–1939라트비아 내 지하 공산주의 운동 활동, 수차례 체포·투옥
  • 1940–1959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40–1951라트비아 공산당 리가 시위원회 제1서기 (겸임)
  • 1952–197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57–1961CPSU 중앙위 정치국(간부회) 후보위원
  • 1959–1970라트비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 부의장 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