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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당 지도 · 소련 인물 68명

펠릭스 야코블레비치 콘

Феликс Яковлевич Кон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폴란드 1864–1941 ○ 자연사

바르샤바 소년 애국자에서 코민테른의 노혁명가로: 봉인열차와 함께 돌아온 폴란드인

“여섯 살 때 나는 반란군 지도자가 되어 '모스칼'과 '슈바벤'에게서 폴란드를 해방하는 꿈을 꾸었다.” — 회고록 『50년 동안』

20년간 차르의 감옥과 시베리아 유형을 견디며 시베리아 원주민 연구로 금메달을 받은 민족지학자가 된 폴란드 혁명가. 폴란드사회당(PPS) 내에서 피우수트스키의 민족주의 노선에 맞서 좌파 분당을 주도했고, 레닌과 함께 봉인열차로 귀환해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국제적색원조회(MOPR) 창립에 참여하고 소비에트 라디오방송체계를 창설했으며, 60년 가까이 국제 혁명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다 대숙청을 넘겨 77세로 자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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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2폴란드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프롤레타리아트' 가입
  • 1884–1891체포, 10년형 선고 — 카라 강제노동수용소 복역; 1889년 여성 수감자 체벌 항의 집단 음독 주도
  • 1891–1904야쿠츠크·이르쿠츠크·미누신스크 유형 — 민족지 연구로 금메달 수상; 레닌·크루프스카야와 교류
  • 1904–1907바르샤바 귀환, PPS 좌파 지도자 — 1906년 피우수트스키 축출 및 PPS-레비차 분당 주도
  • 1907–1914오스트리아 갈리치아 망명 — 드로호비치 노동자 의료보험조합장, PPS-레비차 해외조직 활동
  • 1914–1917스위스 망명 — 치머발트 회의 참석, 국제주의 좌파 활동
  • 1917레닌과 함께 봉인열차로 러시아 귀환; 하리코프 지역 폴란드 문제 정치위원
  • 1918RKP(b) 입당 (당적 1906년 소급 인정); 우크라이나 외무인민위원부·폴란드국 활동
  • 1920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폴레프콤) 위원 — 비아위스토크에서 폴란드 소비에트 정부 수립 시도
  • 1921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책임서기 (3월–12월)
  • 1922–1923코민테른 집행위원회(ICCI) 서기
  • 1925–1928『크라스나야 즈베즈다』(붉은 별) 편집장
  • 1928–1930『라보차야 가제타』 편집장 및 아동잡지 『무르질카』 주필
  • 1931–1933전연방 라디오방송위원회 초대 의장 — 소비에트 라디오 방송체계 창설
  • 1933–1937RSFSR 교육인민위원부 박물관 부서장, 『소베츠키 무제이』 주필
  • 1937–1941『나샤 스트라나』 편집장; 독일 침공 후 모스크바 라디오 폴란드어 방송 지도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Владимир Ильич Ленин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러시아 1870–1924 ○ 병사

갈림길마다 방향을 바꾼 조타수

1917년 4월 16일(구력 4월 3일) 밤, 페트로그라드 핀란드역. 망명에서 돌아온 레닌은 장갑차 위에 올라 임시정부를 비판하고 유럽 전역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촉구했으며, 이후 며칠에 걸쳐 4월 테제를 내놓았다.

레닌은 러시아 제국 심비르스크에서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로 태어난 혁명가·정치가·이론가다.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분열에서 볼셰비키를 이끌었고 1917년 10월 혁명을 지도했다. 그의 정부는 토지를 분배하고 은행과 대공업을 국유화했으며,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탈했고 코민테른을 통해 세계혁명을 추진했다. 동시에 국가보안기구가 집행한 적색테러로 수만 명이 살해되거나 수용되었고, 내전에서 반볼셰비키 군대를 물리쳤다. 전쟁 폐허와 기근, 민중 봉기에 대응해 1921년 신경제정책을 제안했다. 1924년 1월 21일 고르키에서 사망했고 스탈린이 후계 구도를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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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900체포, 시베리아 유형
  • 1900–05이스크라, 『무엇을 할 것인가』, 볼셰비키 분파 형성
  • 1902《무엇을 할 것인가?》 출간
  • 1909《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출간
  • 1914–17치머발트 좌파,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 1916《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집필·출간
  • 1917.4귀국, 4월 테제
  • 1917.10봉기 관철, 인민위원회의 의장
  • 1918–21브레스트 강화, 내전, 전시공산주의
  • 1918《국가와 혁명》 출간(1917년 집필)
  • 1921네프로의 후퇴
  • 1922–24뇌졸중, 「대회에 보내는 편지」 구술

이네사 표도로브나 아르만트

Инесса Фёдоровна Арманд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프랑스 1874–1920 ○ 자연사

레닌과 가장 가까웠던 여성 볼셰비키: 죽음이 그녀를 숙청에서 구했다

1914년 레닌은 그녀를 브뤼셀 국제사회주의사무국 회의에 단독 대표로 파견하며 편지했다: "그대는 혼자 책임을 질 때 더 성장하고 강해지며 대담해지는 사람이다."

레닌의 절친한 동지였던 프랑스 태생 볼셰비키 혁명가. 1919년 제노트델(당 여성부) 초대 책임자로서 여성 해방 정책의 틀을 세우고, 1920년 제1차 국제공산주의여성회의를 주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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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RSDLP 입당, 볼셰비키가 되다
  • 1905–081905년 혁명 참여, 체포·메젠 유배, 탈출
  • 1909–11레닌과 조우, 롱쥐모 당학교 교무주임
  • 1912–13《여성문제에 관하여》 집필, 러시아 잠입·재체포
  • 1917.04'봉인열차' 편으로 레닌과 귀국, 모스크바 시의원 당선
  • 1919–20제노트델(여성부) 초대 책임자, 제1차 국제여성공산주의자회의 조직

필리프 이사예비치 골로쇼킨

Филипп Исаевич Голощёкин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러시아 1876–1941 ✕ 처형

카자흐스탄의 '소(小) 10월'을 이끈 혁명가

1925년 12월 키질오르다 당대회에서 "내가 오기 전까지 카자흐스탄에는 소비에트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선언하며 '소(小) 10월' 강령의 포문을 열었다.

1903년 입당한 볼셰비키로, 1912년 프라하 당대회에서 중앙위원 겸 러시아국에 선출되었고 1917년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에서 10월 봉기에 참가했다.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우랄 지역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지도했으며 1918년 7월 이파티예프 저택에서의 차르 가족 처형을 조직한 책임자 중 한 명이었다. 1925년부터 1933년까지 카자흐 자치공화국 당 제1서기로 사실상 독자적으로 통치하며 '소(小) 10월' 기치 아래 급진적 집단화와 유목민 강제 정착화를 추진했고, 이는 1930~1933년 카자흐 대기근과 함께 기록된다. 1933년 해임되어 소련 국가중재관(1933–1939)을 지내다 1939년 체포되었고, 1941년 총살되었으며 1961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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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RSDRP 입당, 볼셰비키 파벌
  • 1906–09페테르부르크 위원회·모스크바 위원회
  • 1912중앙위원 겸 러시아국 선출 (프라하 당대회)
  • 1917–18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 우랄 소비에트 권력 수립
  • 1922–25사마라 주 집행위원장, 기근 복구 지도
  • 1925–33카자흐스탄 당 제1서기, 사실상 독자적 통치, '소(小) 10월' 집단화
  • 1933–39소련 국가중재관
  • 1939–41체포, 수감, 총살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그루지야 1878–1953 ○ 자연사

그루지야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당과 국가를 장악한 지도자

1941년 6월 22일 새벽 4시 30분, 주코프가 독일 침공을 알리러 크렘린에 왔다. 주코프의 회고에 따르면 스탈린은 창백한 얼굴로 빈 담배 파이프를 쥐고 있었다. 몰로토프가 독일의 선전포고를 전하자 그는 말없이 의자에 주저앉아 길게 침묵했다.

1878년 12월 18일(구력 12월 6일) 그루지야 고리에서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다. 청년기에 마르크스주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들어가 『프라우다』를 편집했고, 강탈과 납치로 볼셰비키 자금을 조달하며 체포와 국내 유형을 거듭했다. 1917년 10월 혁명 뒤 정치국에 들어가 1922년 소련 성립을 함께 이끌었고, 같은 해 서기장에 올랐다. 이후 집단화와 급속한 공업화, 1932∼33년 기근과 대숙청,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거쳤다. 1953년 3월 5일 쿤체보 다차에서 사망했다. 일생 동안에는 1879년 출생으로도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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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17지하활동, 체포·유형을 거듭하다 1917년 프라우다로
  • 1913논문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 발표
  • 1917–22민족인민위원, 내전기 차리친 전선
  • 1922서기장 취임, 인사권 장악
  • 1924강연집 《레닌주의의 기초》 출간
  • 1928–33대전환, 집단화·5개년 계획
  • 1936–38대숙청
  • 1941–45국가방위위원회 의장·최고사령관
  • 1945–53전후 재건과 냉전, 1953년 3월 사망
  • 1952《소련 사회주의의 경제문제》 출간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페트롭스키

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Петровский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우크라이나 1878–1958 ○ 자연사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국가원수, 드니프로페트롭스크의 이름이 된 노동자 출신 볼셰비키

1915년 2월, 차르 법정은 페트롭스키에게 모든 권리 박탈과 투루한스크 종신 유형을 선고했다. 반전 연설을 한 노동자 의원에게 내려진 형벌이었다.

하리코프현 재단사의 아들로 열한 살부터 노동한 볼셰비키다. 국가두마 노동자 의원(1912)으로 반전 연설로 유형되었고, 10월 혁명 후 내무인민위원으로 체카 창설에 참여했다. 1919년부터 1938년까지 우크라이나 SSR 국가원수로 소련 창설 조약에 서명했고 정치국 후보위원을 지냈다. 대숙청에서 살아남았으나 1939년 해임되어 혁명박물관 부관장으로 여생을 보냈다. 예카테리노슬라프는 1926년 그의 이름을 따 드네프로페트롭스크가 되어 2016년까지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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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898예카테리노슬라프 노동계급 해방투쟁동맹 가담,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00–1903두 차례 체포·투옥, 1905년 예카테리노슬라프 소비에트 서기
  • 1912–1914제4대 국가두마 볼셰비키 노동자 의원, 32회 연설
  • 1914–1917반전 활동으로 체포, 투루한스크 종신 유형
  • 1917.11–1919.03내무인민위원: 체카 창설 참여, 적색 테러 지령 서명
  • 1919–1938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우크라이나 SSR 국가원수)
  • 1922–1938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공동의장 (우크라이나 대표)
  • 1926–1939정치국 후보위원
  • 1939–1940모든 직위에서 해임, 1년간 실직
  • 1940–1958모스크바 혁명박물관 부관장

아카키 비사리오노비치 코바히제

Акакий Виссарионович Кабахидзе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그루지야 1889–1937 ✕ 처형됨

그루지야 문제의 옛 볼셰비키

1922년 그는 오르조니키제를 ‘스탈린의 당나귀’라 부른 뒤 오르조니키제가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다. 시점은 다투어진다. 한 보도는 10월 20일로 적고, 영문 서술은 11월로 본다.

아카키 코바히제는 1904년 당에 가입하고 구볼셰비키협회 회원이었던 그루지야의 옛 볼셰비키다. 억압 명부는 1889년 그루지야 암브롤라우리 출생, 민족 грузин, 거주지 티플리스로 적는다. 1922년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으로서 자캅카스 통합에 반대하는 편에 섰고, 그해 오르조니키제를 ‘스탈린의 당나귀’라 부른 뒤 주먹으로 얼굴을 얻어맞았다. 사건 시점은 10월설과 11월설로 갈린다. 1936년 12월 22일 체포되어 1937년 6월 24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튿날 처형되었으며, 1957년 4월 2일 복권되었다. 1922년 인물과 처형자를 동일 인물로 보는 것은 출처에 근거한 추정이며 동명이인 가능성은 배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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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년(10월설·11월설)오르조니키제와 충돌해 주먹으로 얼굴을 얻어맞음
  • 1922년 12월레닌의 민족문제 비판과 연결된 인물
  • 1904당 입당, 구볼셰비키협회 회원
  • 1922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
  • 1936–1937체포(1936)되어 사형 선고 후 처형(1937)
  • 1957복권됨

게오르기 레오니도비치 퍄타코프

Георгий Леонидович Пятаков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우크라이나 1890–1937 ✕ 처형

혁명과 산업 계획 사이의 볼셰비키

1937년 1월,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피고석에서. 독일 작가 리온 포이히트방어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중간 키에 중년, 약간 벗겨진 머리와 붉은빛이 도는 옛날식의 떨리는 뾰족 수염을 한 퍄타코프가 마이크 앞에 서서, 자기가 맡은 산업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조용하고도 공들여 이야기하는 모습을. 마치 대학 강사처럼 손가락을 뻗어 설명하며, 오래전에 죽은 '퍄타코프'라는 인물의 삶과 행적을 상세히 밝히려는 역사학자처럼, 청중이 모든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납득하기를 바라는 한 가지 소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초대 수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민족자결권 문제에서 좌파 공산주의자로서 레닌과 맞섰고, 레닌이 '유언'에서 언급한 단 여섯 명의 볼셰비키 중 한 명이다. 좌익 반대파로 출당되었다가 복당 후 중공업 부인민위원으로 5개년 계획을 주도했으며, 1937년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주피고인으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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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1917볼셰비키 입당, 키예프 지하활동, 유형과 망명
  • 1917–1918키예프 위원장, 국립은행 인수, 좌파 공산주의자
  • 1918–1920CP(b)U 중앙위 서기, 우크라이나 임시정부 수반, 군사정보국장
  • 1920–1927돈바스·고스플란·최고경제회의 부의장, 좌익 반대파
  • 1928–1930복당, 고스방크 총재, 신용개혁
  • 1930–1936중공업 부인민위원·제1부인민위원, 5개년 계획
  • 1936–1937체포, 제2차 모스크바 재판 주피고인, 처형

미르사이드 하이다르갈리예비치 술탄-갈리예프

Мирсаид Хайдаргалиевич Султан-Галиев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러시아 1892–1940 ✕ 처형

이슬람 사회주의와 민족 공산주의의 창안자, 스탈린의 첫 번째 이념적 희생양

1923년 체포 후, 카메네프는 트로츠키에게 이렇게 회고했다: "술탄-갈리예프 체포를 기억하나? 스탈린의 주도로 이뤄진 첫 번째 주요 당원 체포였네. 불행히도 지노비예프와 내가 동의해버렸지."

타타르인 교사 가정 출신으로, 볼셰비키 내 최고위 무슬림 정치인이자 이론가였다. 1917년 입당 후 민족인민위원부 무슬림분과장과 중앙무슬림군사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식민지 무슬림 민중 전체를 '프롤레타리아 민족'으로 재정의하고 동방 혁명이 세계혁명을 선도해야 한다는 '무슬림 민족공산주의'를 정립했다. 1923년 스탈린 주도로 체포·출당된 최초의 저명 볼셰비키이며, 그의 사상은 후일 나세르와 벤 벨라 등 제3세계 반식민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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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7교사·사서·언론인; 타타르어·러시아어 신문에 혁명적 글 발표
  • 1917.7물라누르 바히토프와 함께 무슬림 사회주의 위원회(카잔) 공동 창설
  • 1917.11볼셰비키당 입당; 민족인민위원부 무슬림 부문 책임자
  • 1918–1920중앙무슬림군사대학 의장; 붉은 군대 무슬림 부대 조직, 바시키르 부대 편입 주도
  • 1919–1921동방민족 공산주의 조직 중앙국 의장
  • 1920–1923민족인민위원부 대학 구성원; 타타르 자치공화국 창설 주도, 동방노동자 공산대학 강사
  • 1923.5'민족 일탈주의'로 체포·제명; '술탄갈리예프주의' 숙청 시작
  • 1928–1934재체포, 사형 선고 후 10년형으로 감형; 솔로프키 수용소 수감
  • 1937–19403차 체포; 1940년 1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총살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시르초프

Сергей Иванович Сырцов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러시아 1893–1937 ✕ 처형

시베리아에서 스탈린에게 반기를 든 러시아 총리

1930년 11월, 스탈린의 갑작스러운 전화에 "소 생산성 문제입니다, 스탈린 동지"라고 답한 시르초프는 곧바로 정치국에서 강제 집단화를 공개 비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대에서 볼셰비키가 되어 내전기 돈 지역 소비에트 권력 수립에 참여했다. 1926–1929년 시베리아 당 제1서기로 네프적 협동조합 노선을 추진했고, 1929년 러시아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과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강제 집단화의 참상을 목격하고 1930년 로미나제와 함께 반대파를 조직, 스탈린의 권력 집중을 비판했다가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1937년 대숙청 중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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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 입당, 지하 선전 활동
  • 1917.10–1918로스토프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돈 소비에트공화국 부의장
  • 1918–1919제12군 정치위원, 돈 지역 탈코사크화 참여
  • 1921–1923중앙위원회 등록배치부장 — 노멘클라투라 제도 구축
  • 1924–1926중앙위원회 선동선전부장, 《공산주의 혁명》 편집자
  • 1926–1929시베리아 당 제1서기 — 네프적 협동조합 노선, 곡물 위기 때 스탈린과 갈등
  • 1929–1930러시아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정치국 후보위원
  • 1930로미나제와 반대파 조직 — 「무언가 해야 한다」, 스탈린 비판으로 전직 해임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쇼프

Никита Сергеевич Хрущёв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러시아 1894–1971 ↓ 실각 1964

관 뚜껑을 연 사람, 침대에서 죽은 첫 지도자

1956년 11월 18일, 모스크바 폴란드 대사관 리셉션에서 서방 대사들에게 말했다. 「역사는 우리 편이다. 우리가 당신들을 묻어버릴 것이다!」 열두 NATO 국가 대사와 이스라엘 대사가 자리를 떴다.

스탈린의 그늘에서 당 간부로 성장해 1953년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고 제1서기가 되었다. 1956년 2월 25일 제20차 당대회 비공개 회의에서 스탈린의 대숙청을 고발하는 비밀연설로 탈스탈린화를 열었다. 1956년 헝가리 봉기를 소련군으로 진압했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거쳐 미사일 철수와 대가로 미국의 쿠바 불침공 약속을 받아냈다. 1964년 10월 14일 동료들의 표결로 해임되고 은퇴했으며, 회고록을 남기고 1971년 9월 11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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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38모스크바 당 제1서기, 지하철 건설
  • 1938–49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
  • 1942–43스탈린그라드 전선 군사위원
  • 1953–64당 제1서기
  • 1954–56처녀지 개간, 비밀연설
  • 1957「반당 그룹」 격퇴
  • 1961제22차 당대회, 스탈린 시신을 묘소에서 이장
  • 1964해임, 연금 생활

미르 자파르 아바소비치 바기로프

Мир Аббасович Джафар Багиров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아제르바이잔 1895–1956 ✕ 처형

아제르바이잔을 20년간 통치한 스탈린 시대의 당 서기

재판에서 진술은 몇 마디에 그쳤고, 그중 하나는 "나를 망친 것은 스탈린에 대한 나의 믿음이었다"였다고 전해진다.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1933~1953)로 20년간 공화국을 통치했다. 체카·GPU·OGPU 의장과 내무인민위원을 지낸 인물로, 대숙청기에 공화국 당·국가 간부와 지식인에 대한 대량 탄압을 주도했고 베리야 실각 후 몰락해 1956년 5월 총살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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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볼셰비키당 입당 (1917년 3월 또는 1918년 — 기록 충돌), 쿠바 혁명위원회 부의장
  • 1918–1920러시아 내전: 연대장, 아제르바이잔 사단 군사위원, 혁명군사재판소장
  • 1921–1927아제르바이잔 SSR 체카·GPU·OGPU 의장, 내무인민위원
  • 1929–1930아제르바이잔 SSR GPU·OGPU 의장 (재임)
  • 1932–1933아제르바이잔 SSR 인민위원회 의장
  • 1933–1953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20년), 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 겸임 (1950년까지)
  • 1953CPSU 중앙위 상임위원 후보 (3~7월), 아제르바이잔 SSR 각료회의 의장
  • 1954–19561954년 3월 체포, 1956년 4월 사형 선고·5월 총살 집행 (5월 26일설과 5월 7일설이 엇갈림)

니콜라이 표도로비치 기칼로

Николай Фёдорович Гикало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우크라이나 1897–1938 ✕ 처형

그로즈니 방어전을 지휘한 내전 영웅, 세 공화국 당 제1서기로 공업화·집단화를 추진했다

1933년 2월, 기칼로는 정치국에 보낸 서한에서 트락토로첸트르 체계의 '쿨라크 및 백위대 음모' 사건을 트로이카가 심리하게 해달라고 직접 요청했다 — 공화국 당수가 직접 숙청 가속을 청원한 장면이다.

오데사 출신 우크라이나인 볼셰비키로, 내전기 그로즈니 방어전(1918)을 지휘해 적기훈장을 받은 전쟁 영웅이다. 1929년부터 우즈베키스탄·아제르바이잔·벨로루시 세 공화국 당 제1서기를 연이어 맡아 공업화와 집단화를 추진했고, 벨로루시에서는 당원 수가 절반 가까이 줄 만큼 대대적 숙청을 주도했다. 1934년 중앙위 후보위원이자 NKVD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에 가담했으나,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총살당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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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티플리스 군의학교 졸업, 제1차 세계대전 위생병 복무, 게오르기 십자훈장 수훈
  • 1917–1918RSDLP(b) 입당, 그로즈니 시당위원장 겸 집행위원장, 그로즈니 방어전 지휘, 적기훈장 수훈
  • 1919–1921카프카스 지방위원, 테레크·다게스탄 반란군 사령관, 페르시아 적군 사령관
  • 1921–1927고르스키 주당위 책임서기, 남동부 중앙위 뷰로 위원, 북카프카스 지방위 선전부장·서기·제2서기
  • 1927–1930중앙아시아 뷰로 조직부장,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제1서기(1929),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1서기(1929–1930)
  • 1930–1932중앙위 조직지도부 부부장, 모스크바 주·시 당위원회 서기
  • 1932–1937벨로루시 공산당 제1서기, 중앙위 후보위원(1934–1937), NKVD 트로이카 참여
  • 1937–1938하리코프 주·시 당위원회 제1서기, 체포(1937.10.11), 총살(1938.4.25), 1955년 복권

아크말 이크라모비치 이크라모프

Акмаль Икрамович Икрамов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우즈베키스탄 1898–1938 ✕ 처형

우즈베크 공산당 최초의 우즈베크인 제1서기, 강제 집단화와 목화 단작을 이끈 뒤 대숙청에 희생된 인물

«나는 지금 발가벗겨진 인간 형상의 짐승이다.» 1938년 3월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최후 진술에서 이크라모프가 남긴 말로 전해지지만, 다른 사료에는 «너희가 나를 짐승으로 만들었다»는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문구는 확정되지 않았다.

타슈켄트의 우즈베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8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내전기 투르키스탄에서 당 기관을 이끌었고, 1921~1922년 투르키스탄 공산당 중앙위 서기를 지냈다. 1922년부터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24~1925년 우즈베크 공산당 창당 조직국원을 맡았다. 1929년 제1서기가 되어 우즈베크인 최초로 이 직책에 올랐고 강제 집단화를 밀어붙여 우즈베키스탄을 소련의 주요 목화 공급지로 만들었다. 1934년 전연방 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1937년 해임되어 9월 20일 체포되었고,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총살되었다. 1957년 6월 완전히 복권되어 당적을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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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나만간 교육국 교사·시찰관, 페르가나 농촌사업부장
  • 1920–1921나만간 혁명위 부위원장, 무슬림국 의장, 페르가나·시르다리야 지역위 책임서기
  • 1921–1922투르키스탄 공산당 중앙위 조직부장 겸 서기
  • 1922–1924모스크바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수학
  • 1924–1929우즈베크 공산당 창당 조직국원, 타슈켄트 주당위 서기, 중앙위 제2서기, 『콤무니스트』 편집자
  • 1929–1937우즈베크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집단화·목화 단작 주도
  • 1934–1937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 (소수민족 출신 유일)
  • 1937–1938해임·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사형, 총살

알렉세이 블라디미로비치 스네고프

Алекс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Снегов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러시아계 1898–1989 ○ 자연사

굴라크 생존자로서 탈스탈린화를 밀어붙인 구볼셰비키

미코얀이 소치행을 권했지만, 스네고프는 당원증을 돌려받기 전에는 떠날 수 없다고 버텼다.

알렉세이 스네고프는 초기 소비에트 당 사업을 거친 구볼셰비키였지만, 대숙청의 조작된 혐의로 15년 넘게 굴라크에 갇혔다. 1954년 석방과 복권 뒤 그는 수감 경험을 바탕으로 니키타 흐루쇼프와 아나스타스 미코얀에게 스탈린 체제의 폭력과 재활 문제를 알리는 자문자가 되었다. 올가 샤투노프스카야와 함께 희생자들의 복권을 추진하고 제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과 개인숭배를 비판하도록 흐루쇼프를 설득했다. 이후에도 더 깊은 탈스탈린화를 주장하다가 감시와 비판을 받았으며, 1967년 잠시 당에서 제명되었다가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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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파 가입
  • 1918–1921빈니차·포돌리아 지하 당조직과 포돌리아 губер니아 당위원회 책임서기
  • 193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31–1937자캅카스·이르쿠츠크·첼랴빈스크·차파옙스크·무르만스크의 당·정치 부문 간부
  • 1937–1954대숙청으로 체포되어 굴라크와 유형지에서 15년 이상 복역
  • 1954–1960석방·복권 후 내무부 굴라크 정치부장
  • 1956제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 비판과 희생자 복권을 촉구
  • 1967잠시 당에서 제명되었으나 곧 복권

그리고리 아르테모비치 아루티노프

Григорий Артемьевич Арутинов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그루지야 1900–1957 ○ 심장마비

16년간 스탈린 시대 아르메니아를 이끌며 산업 건설과 문화 부흥을 주도한 '그리고리 건설자'

요양 제안을 거절하며: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치료받으면 우리 제르무크는 누가 짓나?' 진흙 속을 걸으며 직접 부지를 정한 끝에 제르무크는 아르메니아 대표 온천도시가 되었다.

1937년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로 발탁돼 16년간 공화국을 이끌며 중공업·도시계획과 '다비드 사순스키' 서사시 기념 등 문화 부흥을 주도했다. 1953년 해임 후 국영농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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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22그루지야 공산당 테라비 현위원회 선전부장 · 서기
  • 1922–1924모스크바 마르크스 국민경제연구소 수학 (중퇴)
  • 1927–1930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농촌 담당
  • 1931–1934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부장 · 서기국원
  • 1934–1937트빌리시 시당위원회 서기 (제1서기 → 제2서기)
  • 1937–1953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41–1945자캅카스 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 1953–1955예레반 근교 국영농장(소프호스) 의장

니콜라이 그리고리예비치 이그나토프

Николай Григорьевич Игнатов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러시아 1901–1966 ○ 자연사

흐루쇼프를 구하고, 흐루쇼프를 무너뜨린 크렘린의 두 얼굴

1964년 가을, 이그나토프가 자신의 다차에서 고주파 전화로 흐루쇼프 축출 음모를 논의하는 동안, 그의 경호원이 창가에 서서 모든 대화를 들었다. 경호원이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에게 경고했지만 흐루쇼프는 웃어넘겼다. «그 애송이들이 나한테 맞서? 말도 안 돼!»

목수 아들로 태어나 체카-OGPU에서 11년 복무하고 대숙청 시기 쿠이비셰프 당 책임자로 급부상했다. 1957년 6월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들을 조직해 반당그룹의 흐루쇼프 축출 시도를 저지했고, 그 대가로 중앙위 서기와 당 간부국(프레지디움) 정위원이 되었다. 이후 흐루쇼프에게 밀려나자 1964년 음모의 핵심 조직자로 돌아서 흐루쇼프 축출을 주도했다. 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으로서 해빙기 최고 권력투쟁의 양면에 모두 깊이 관여한 역설적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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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1적위대 및 붉은군대 복무
  • 1921–1932체카-OGPU에서 돈 지역 및 중앙아시아 근무, 바스마치 진압 참여
  • 1937–1940쿠이비셰프 주당위 제1서기, 포스티셰프 공격으로 부상
  • 1943–1948오룔 주당위 제1서기, 전시 파르티잔 운동 지휘
  • 1949–1952크라스노다르 변강당위 제1서기
  • 1952–1953CPSU 중앙위 서기, 간부국(프레지디움) 후보위원, 소련 조달장관
  • 1955–1957보로네시·고리키 주당위 제1서기, '고리키식 주택건설' 추진
  • 1957–1960CPSU 중앙위 서기, 간부국(프레지디움) 정위원
  • 1959, 1962–1966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
  • 1960–1962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조달위원회 의장
  • 1964흐루쇼프 축출 음모의 핵심 조직자로 활동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오르가노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Органов
정치·당 지도 소련 소비에트 러시아인 1901–1982 ○ 자연사

NKVD 트로이카에 이름을 올렸던 러시아 공화국 국가원수

1937년, 야로슬라블 주당 제2서기 대행이던 오르가노프는 NKVD 특별트로이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 법정도, 변호도, 항소도 없는 세 사람의 서명이 곧 사형선고였다.

니콜라이 오르가노프는 1959년부터 1962년까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RSFSR)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명목상 러시아 공화국의 국가원수로 활동한 소련의 당·국가 관료이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25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한 후 프리모르스키와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역당 제1서기를 거쳐 당내에서 꾸준히 승진했다. 대숙청 시기인 1937년에는 NKVD 특별트로이카 위원으로 임명되어 약식재판과 즉결처형에 가담했으며, 이는 훗날 국가원수 자리에 오른 인물의 전력으로서 냉혹한 모순을 남겼다. 흐루쇼프 시기 말에는 불가리아 주재 소련 대사로 전출되었고, 이후 당 중앙위원회 산하 해외여행위원회 위원장을 끝으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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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3붉은 군대 복무
  • 1924–1925유리예프-폴스키 현 콤소몰 위원회 서기
  • 1925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4–1937네코우스키 구당위원회 제1서기 (야로슬라블 주)
  • 1937–1938야로슬라블 주당위원회 제2서기 대행 · NKVD 특별트로이카 위원
  • 1943–1947프리모르스키 지방당위원회 제3서기 → 제2서기
  • 1947–1952프리모르스키 지방당위원회 제1서기
  • 1952–1958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당위원회 제1서기
  • 1952–197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58–1959RSFSR 각료회의 부의장
  • 1959–1962RSFSR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
  • 1961–1962RSFSR 담당 CPSU 중앙위원회 뷰로 위원
  • 1963–1967주불가리아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67–1973CPSU 중앙위원회 해외여행위원회 위원장

주마바이 샤야흐메토비치 샤야흐메토프

Жумабай Шаяхметович Шаяхметов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카자흐스탄 1902–1966 ↓ 실각 1954

카자흐 SSR 출신 민족소비에트 의장

1946년 여름 투시노 항공 퍼레이드에서 스탈린이 참석자들에게 "동지들, 이것이 주마바이 샤야흐메토프 — 카자흐스탄 최초의 민족 서기다"라고 소개하며 그를 "동방의 독수리"라 불렀다.

카자흐 당 지도부에서 올라와 민족소비에트 의장을 맡았다. 스탈린 말기와 흐루쇼프 초의 공화국 대표제 라인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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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s카자흐 공화국 NKVD와 당 행정에서 성장
  • 1946–1954카자흐 공산당 제1서기, 스탈린 말기 공화국 지도자
  • 1950–1954민족소비에트 의장, 카자흐 대표로 공식 연방 라인에 진입
  • 1954처녀지 개간과 흐루쇼프 노선 속에서 실각
  • 1966중앙권력 복귀 없이 사망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리투아니아 1903–1974 ○ 자연사

소련 리투아니아를 34년간 통치한 공산주의자

1949~50년, 모스크바가 리투아니아의 구세대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려 하자 스니에치쿠스는 스탈린에게 직접 맞섰다. 리투아니아는 구시대 공산주의자 단 한 명도 체포되지 않은 유일한 공화국이 되었다.

34년간 리투아니아 공산당 제1서기를 지낸 소련 최장수 공화국 지도자다. 지하운동 출신으로 소비에트화를 주도했으나, 이후 모스크바 간섭을 완충하며 리투아니아어와 문화 공간을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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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1리투아니아 공산당 알리투스 지하위원회 책임자
  • 1921–1925스몰렌스크에서 리투아니아 공산당 출판국 근무
  • 1925–1926, 1933–1936코민테른 집행위 내 리투아니아 공산당 대표부 근무
  • 1927–1930리투아니아 공산당 중앙위 서기 (지하), 선전·조직 담당
  • 1936–1939리투아니아 공산당 제1서기 (비합법, 카우나스)
  • 1940.6–1940.8리투아니아 국가보안국장
  • 1940–1974리투아니아 공산당 제1서기 (34년)
  • 1942–1944리투아니아 파르티잔 운동 참모장

니콜라이 빅토로비치 포드고르니

Николай Викторович Подгорный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우크라이나 1903–1983 ○ 사망, 사망일 이견

브레즈네프-코시긴 집단지도부의 국가원수

1965년 바쿠에서 중공업 편향과 시베리아 가스 수출을 비판했으나, 자신이 이끌던 하리코프 당조직을 비판한 기사에 대한 반격이었고 수슬로프는 이를 '수정주의적'이라 불렀다.

폴타바현 카를로프카 태생의 우크라이나인으로, 사료는 출생을 1906년 2월 18일로 기록하지만 내전 중 나이를 세 살 올려 여권상 생년은 1903년이 되었다. 제당공업 엔지니어였던 그는 1940년 소련 식품공업 부인민위원이 되었으나 1942년 제당공장 철거를 직접 지휘했다는 허위 보고로 미코얀의 지시로 해임되었다. 1950년 하리코프 주당 제1서기, 1957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를 거쳐 1963년 중앙위 서기가 되었고 흐루쇼프 축출의 주요 조직자였다. 이듬해부터 국가원수로서 집단지도체제의 한 축을 이루었으나 1977년 정치국에서 해임되고 6월 국가원수직에서 물러났으며, 1983년 1월 사망일과 장소는 사료마다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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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77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요한네스 구스타보비치 캐빈

Иван Густавович Кэбин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에스토니아 1905–1999 ○ 자연사

모스크바와 에스토니아 사이를 28년간 조종한 실용적 민족공산주의자

1978년 7월, 28년간 에스토니아를 이끈 캐빈은 중앙위원회에서 해임 통보를 받았다. 후임으로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에스토니아어조차 서툰 카를 바이노가 임명되었다 — 민족 간부에 대한 브레즈네프 중앙의 신뢰 상실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1950년부터 1978년까지 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지내며 소련 에스토니아를 실질적으로 이끈 정치인으로, 이후 1983년까지 에스토니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을 역임했다. 스탈린주의자로 출발했으나 점차 온건·실용 노선으로 전환하여 '라비림(laveerimine)'이라 불리는 균형 정책(모스크바의 요구와 에스토니아 민족 이익 사이의 절충)을 구사했다. 28년간 재임하며 공화국 역사상 최장기 집권자가 되었고, CPSU 중앙위원(1952–1986)으로서 전연방 차원에서도 에스토니아의 이해를 대변했다. 1970년대 후반 브레즈네프 시기 러시아화 정책이 강화되자 중앙과 마찰을 빚었고, 결국 1978년 카를 바이노에게 자리를 내주며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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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출판부문장, 이후 선전선동부문 제1부부장
  • 1946–1948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설 당역사연구소 소장
  • 1948–1950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 담당 서기
  • 1950–1978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52–1986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78–1983에스토니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국가원수)

레오니트 게오르기예비치 멜니코프

Леонид Георгиевич Мельников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러시아 1906–1981 ○ 자연사

스탈린 말기 최대 공화당을 4년간 통치한 우크라이나 제1서기

스탈린이 카라간다 탄광 증산을 명하자 멜니코프는 현지어를 모른다고 고백했다. 스탈린의 답: 「시장에 가서 노래하는 늙은 아킨을 찾아라. 그가 도와줄 것이다.」 아킨은 노래했고, 광부들은 일했다.

도네츠크 탄광 지대에서 성장한 광산 기술자 출신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종군한 뒤 카라간다 탄전 증산 임무를 완수하며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다. 1949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에 올라 전후 복구와 서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화, '우크라이나 부르주아 민족주의' 척결 운동을 지휘했으며, 반유대주의 캠페인에서 강경 노선을 취하며 흐루쇼프와 결별했다. 1952년 10월 확대된 당 중앙위 간부회의 정위원에 선출되었으나, 스탈린 사망 직후인 1953년 6월 '민족정책 왜곡'을 이유로 해임되고 루마니아 대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건설부 장관, 카자흐스탄 국가계획위원장을 거쳐 1966년부터 사망까지 15년간 소련 국가산업안전감독위원회 의장으로 일하며 산업 안전 체계를 정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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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39스탈리노(도네츠크) 시당 · 주당 간부
  • 1939–41스탈리노 주당 제2서기
  • 1941–42제66군 군사위원, 스탈린그라드 전투
  • 1942–44카라간다 주당 제1서기 — 코크스용 석탄 증산
  • 1944–47스탈리노 주당 제1서기
  • 1947–49우크라이나 당 중앙위 서기 → 제2서기
  • 1949–53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 · 소련 공산당 간부회 정위원(1952–53)
  • 1953–55주 루마니아 소련 대사
  • 1955–57소련 석탄산업 기업건설부 장관
  • 1957–61카자흐스탄 각료회의 제1부의장 → 부의장 겸 국가계획위원장
  • 1961–66카자흐 · 러시아 국가산업안전감독위원회 의장
  • 1966–81소련 국가산업안전감독위원회 의장

레오니트 일리치 브레즈네프

Леонид Ильич Брежнев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러시아 1906–1982 ○ 자연사

흔들지 않는 것을 통치로 삼은 사람

1979년 10월 7일 동베를린, 동독 건국 30주년 기념식에서 사진작가 레지스 보수가 브레즈네프와 에리히 호네커의 '사회주의 형제의 키스'를 촬영했다. 이 사진은 드미트리 브루벨의 1990년 베를린 장벽 벽화의 바탕이 되었다.

흐루쇼프 해임에 참여해 그를 대신해 제1서기가 되었고, 1960년대 말까지 권력을 독점했다. 1964년부터 1982년 사망할 때까지 서기장으로, 1960~1964년과 1977~1982년에는 국가원수를 겸했다. 해빙 뒤에는 검열과 탄압이 강화되어 1970년대 중반 정치·종교 사범이 약 1만 명에 이르렀다. 정치·경제 개혁에 적대적이어서 '정체의 시대'의 부패와 소비재 부족을 낳았고, 1975년 이후 건강이 나빠지자 통치에서 물러났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과 1979년 아프가니스탄 개입을 결정했으며, 데탕트와 함께 SALT I·헬싱키 협정으로 미국과 핵 균형을 이루었다. 소련영웅 칭호를 네 번 받았고 1978년의 승리훈장은 1989년 취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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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52몰다비아 당 제1서기
  • 1954–56카자흐스탄에서 처녀지 개간 지휘
  • 1964.10흐루쇼프 해임을 주도하고 제1서기로
  • 1968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브레즈네프 독트린
  • 1972–79데탕트: SALT I·II, 헬싱키 협정
  • 1977신헌법 제정, 국가원수 겸임
  • 1979아프가니스탄 침공 승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