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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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국가기관 인물 1086명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세레브롭스키

Александр Павлович Серебровский

"소비에트 록펠러"라 불린 바쿠 석유와 소련 금광의 재건자

1924년 크라신의 위임을 받은 아즈네프티 대표로서의 미국 방문에서 장비 구입과 함께 직접 교섭에 나섰다. 90세의 존 D. 록펠러는 한참 생각하더니 뜻밖에도 보증서 발급을 승낙했고, 차를 마신 뒤 숲 공원을 반 시간가량 빠르게 산책했다.

혁명가 출신 기계공학자로서 내전으로 폐허가 된 바쿠 유전을 미국식 시추 기술로 재건해 소련 석유 산업의 토대를 놓았다. 1928년부터 국가 금 채굴 트러스트 글라브졸로토를 이끌며 알래스카 광산 기술을 도입하고 존 리틀페이지 같은 미국 기술자를 영입해 금 생산을 늘렸으며, 이 금은 공업화의 기계 수입 재원이었다. 중공업 부인민위원으로서 소련 중공업을 총괄했고, 1937년 9월 23일 체포되어 소련 최고법원 군사재판부의 유죄 판결을 거쳐 1938년 2월 10일 처형되었으며 1956년 5월 19일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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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05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집행위원 (푸틸로프 공장 대표)
  • 1908–1911벨기에 망명; 브뤼셀 고등기술학교 졸업 (기계공학)
  • 1917–1918무역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 1919우크라이나 전선 군수보급 책임자; 중앙 포병공장 관리위원회 의장
  • 1920교통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20–1926아즈네프티(아제르바이잔 석유 트러스트) 이사회 의장
  • 1926소련 석유신디케이트(네프테신디카트) 이사회 의장
  • 1927–1930소련 최고경제회의(VSNKh) 부의장
  • 1928–1937글라브졸로토(비철금속·금·백금 총관리국) 국장
  • 1932–1937중공업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25–1937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바르바라 니콜라예브나 야코블레바

Варвара Николаевна Яковлева

체카에서 좌익 반대파로 간 재정 인민위원

죄수열차 안에서 발렌티나 폴랴코바가 추궁했다. 「당신의 거짓 증언으로 내 남편이 총살당했다.」 야코블레바가 답했다. 「예조프의 명령이었다. 15일 밤낮 잠을 못 자게 하더니 결국 서명했다.」

혁명기 페트로그라드 체카를 이끌었던 옛 볼셰비키이자, 1924~26년 좌익 반대파의 지도자였다. 러시아공화국 재정 인민위원을 지낸 뒤 1937년 체포되어 장기형을 선고받았고, 1941년 오룔 감옥의 집단 처형에서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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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17볼셰비키 지하활동과 유배
  • 1918–1919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
  • 1924–1926좌익 반대파 지도부
  • 1929–1937러시아공화국 재정 인민위원
  • 1937–1941체포, 수감과 오룔 감옥 처형

그리고리 알렉산드로비치 펠트만

Григор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Фельдман

자본재 부문 주도 성장 모형을 최초로 정식화한 고스플란의 수학적 경제학자

1929년 산업화 속도 논쟁의 정점에서 펠트만은 "나라의 산업화 템포는 소부르주아적 저항에 의해 제한될 수 없으며, 한계는 오직 모든 노동자의 육체적·심리적 지구력 한계까지 긴장시킨 물질적 가능성뿐"이라고 선언했다.

전기공학자 출신으로 1928년 경제학 사상 최초의 형식적 성장 모형을 정식화한 고스플란 경제학자. 자본재·소비재 2부문 모형은 소비에트 일반계획(1930–45)의 작업 가설로 채택되었으나, 1931년 경향적 비판으로 고스플란에서 축출되었다. 1950년대 미국 경제학자 에브시 도마르가 그의 업적을 재발견하면서 펠트만-마할라노비스 모형으로 알려져 인도 경제계획의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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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22전기공학자로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근무, 국민경제최고회의 전기부문에서 GOELRO 전력화 계획 수립에 참여
  • 1923–1927크르지자놉스키의 초청으로 고스플란 세계경제정세부에서 근무, 『계획경제』지에 해외 경제정세 분석 발표
  • 1928고스플란 장기계획부장으로서 2부문 성장 모형을 발표 — 경제학史上 최초의 형식적 성장 모형
  • 1929–1930「분석적 계획 수립 방법」 발표, 펠트만 모형이 소비에트 일반계획(1930–45)의 작업 가설로 채택
  • 1931–1934경향적 비판으로 고스플란을 떠나 계획아카데미 기술구축학부장 및 교원으로 근무
  • 1935–1937북극해항로총국(GUSMP) 종합계획반장
  • 1937–1953탄압을 겪은 후 여러 도시에서 공학직으로 근무, 시추 관련 발명특허 획득
  • 1953–1958중병을 앓으며 모스크바 귀환, 경제학 연구에서 물러나고 사후 복권

이반 미하일로비치 마이스키

Иван Михайлович Майский

멘셰비키에서 소련의 대영제국 외교관으로, 전향과 회유 속에서도 세계대전 외교의 중심에 선 인물

1918년 11월, 멘셰비키 중앙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민주주의가 혁명을 구하려는 마지막 영웅적-절망적 시도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렸다"고 썼다. 2년 후 그는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멘셰비키에서 볼셰비키로 전향한 소련 외교관이자 역사가. 1932년부터 11년간 영국 대사로 재임하며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 외교의 핵심 창구로 활약했고, 마이스키-시코르스키 협정으로 소련-폴란드 외교 관계를 복원했다. 종전 후 외무인민부위원으로 얄타·포츠담 회담에 참여하고 독일 배상 문제를 주도했다. 그의 런던 외교 일기는 전간기 및 전시 소련 외교의 내막을 담은 독보적 사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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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가입, 멘셰비키
  • 1906–19081905년 혁명 참여로 체포, 토볼스크 유배
  • 1912뮌헨 대학 경제학부 졸업, 런던으로 이주
  • 1917임시정부 노동부 차관
  • 1918사마라 KOMUCh 정부 노동상; 멘셰비키당 제명
  • 1920–1921볼셰비키 전향 선언, RKP(b)에 입당
  • 1922–1923외무인민위원부 언론국장
  • 1929–1932핀란드 주재 소련 전권대표
  • 1932–1943영국 주재 소련 전권대표 겸 대사
  • 1941마이스키–시코르스키 협정 서명, 소련-폴란드 외교 관계 복원
  • 1943–1946외무인민부위원, 얄타·포츠담 회담 참여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 1953–1955간첩 혐의로 체포·투옥, 스탈린 사후 석방 및 복권
  • 1957–1975당적 회복, 학술 활동 재개; 회고록 및 외교 일기 집필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킴

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на Ким

러시아 혁명에 투신한 최초의 조선인 공산주의자

1918년 9월 16일, 아타만 칼미코프의 백군에게 끌려나가 총살당하기 직전 그녀의 마지막 외침: '자유와 독립을 조선에!'

시베리아 한인 이주민의 딸로 태어나 1916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최초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다. 레닌의 지시로 극동에 파견되어 하바롭스크 소비에트 외무인민위원을 지내고 이동휘와 함께 한인사회당을 창당했으며, 조선인 적위대를 조직해 백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1918년 33세로 처형당한, 러시아 혁명과 조선 독립운동을 잇는 상징적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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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 1917하바롭스크 볼셰비키 지부 서기 겸 극동 인민위원회 외무인민위원
  • 1918.4한인사회당(이후 조선공산당의 전신) 공동 창당
  • 1918.6–8조선인 적위대 및 국제 적위대 조직, 백군·일본군에 맞서 전투
  • 1918.9.4백군과 일본군에 체포됨
  • 1918.9.16하바롭스크에서 백군 코사크에 의해 처형됨

야코프 미하일로비치 스베르들로프

Яков Михайлович Свердлов

혁명 직후 당과 국가를 연결한 조직가

1918년 1월 5일 제헌의회 개회 순간, 사회자로 나선 원로 사회혁명당원을 단상에서 밀어내고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의 이름으로 직접 개회를 선언했다.

중앙위 서기국 의장과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겸하며 혁명 직후 볼셰비키 권력의 실무를 총괄했다. 레닌의 정치 결정을 표결·인사·기관 운영으로 전환한 독보적 조직가로, 10월 봉기 실무 지휘, 제헌의회 해산, 최초 소비에트 헌법 제정, 코민테른 창립을 주관했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비준에서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12년 넘는 유형과 감옥 생활로 쌓은 당내 인맥과 현장 감각이 그의 무기였다. 34세에 스페인 독감으로 급서하자 레닌은 '당 전체의 기둥이 무너졌다'고 썼으며, 그의 공백은 훗날 스탈린의 권력 집중을 앞당긴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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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중앙위 서기, 10월 봉기 조직 실무
  • 1917–19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1918–19중앙위 서기국 의장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프룬제

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Фрунзе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출생: 키르기스스탄(피슈페크) 1885–1925 ○ 수술 중 사망, 사인 논쟁

내전의 전선 사령관, 붉은 군대 개혁자

1925년 수술을 앞둔 병상에서 아내 소피야 알렉세예브나에게 "토요일에 새 회진이 있을 예정이다. 수술을 거부당하지나 않을까 두렵다"고 썼다.

1885년 러시아령 투르키스탄 피슈페크(현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에서 태어나 1925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군사 지도자다. 1904년 페테르부르크 폴리테크닉에 입학해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했고, 1905년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직물 총파업을 이끌고 12월 모스크바 무장봉기에 참가했다. 1907년 체포되어 카토르가형을 선고받고 1909년과 1910년 두 차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모두 감형되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고, 1916년 탈출해 1917년 민스크에서 민병대를 지휘했다. 내전기에는 동부전선에서 콜차크를, 남부전선에서 브란겔을 격파하고 크림을 점령했으며, 1924년부터 군사개혁을 추진하다 1925년 1월 혁명군사평의회 의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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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혁명운동과 투옥·유형, 1917년 뒤 볼셰비키 군사조직으로 이동
  • 1919–1920동부전선과 투르케스탄 전선에서 백군 격파
  • 1920남부전선에서 브란겔군 격파와 크림 점령 지휘
  • 1924–1925군사개혁 구상, 통일군사교리와 정규군 재편 추진
  • 1925전쟁인민위원 취임 직후 수술 중 사망

솔로몬 그리고리예비치 모길렙스키

Соломон Григорьевич Могилевский
보안·정보·치안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85–1925 ✕ 항공사고

소비에트 대외정보기관의 첫 책임자: 이녜의 토대를 놓은 8개월

1921년 초대 이녜 부장으로 취임한 모길렙스키에게 주어진 것은 겨우 몇 명의 요원과 모스크바의 허름한 사무실이 전부였다. 그로부터 불과 8개월 후 소비에트 해외정보기관의 첫 거점망이 유럽과 중동에 뿌리를 내렸다.

파블로그라드의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18세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직업혁명가. 1904년 체포된 뒤 스위스로 망명해 제네바에서 레닌을 만났고, 그의 추천으로 볼셰비키 분파에 합류했다. 1919년 전연방비상위원회(체카)에 배치되어 모스크바 체카와 특별부에서 활동했으며, 1921년 8월 GPU 해외부(INO)의 초대 부장으로 임명되어 소비에트 대외정보기관의 기초 조직을 구축했다. 1922년 자캅카스 GPU 전권대표 겸 의장으로 전임되어 튀르키예·이란 방면 첩보망을 지휘하고 1924년 그루지야 8월봉기 진압에 참여해 적기훈장을 받았다. 1925년 3월 트빌리시 근방에서 발생한 의문의 항공기 폭발 사고로 먀스니코프, 아타르베코프와 함께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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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파블로그라드 RSDLP 조직 입당
  • 1904체포, 이후 스위스 망명 — 제네바에서 레닌과 만남
  • 1906–1916러시아 귀국 후 예카테리노슬라프 선전활동, 대학 수학, 군 복무
  • 1917민스크 RSDLP 위원, 4월 당 대회 대의원, 10월 혁명 참가
  • 1917–1919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모스크바·키예프 사법기관, 제12군 혁명재판소
  • 1919–1920모스크바 체카, 좌파 SR 음모 적발; GPU 특별부 전권대표
  • 1921–1922GPU 해외부(INO) 부장 — 소비에트 대외정보기관 초대 책임자
  • 1922–1925자캅카스 GPU 전권대표 겸 의장 — 튀르키예·이란 첩보, 1924년 8월봉기 진압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메드베데프

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Медведев

노동자 반대파의 금속노동자. 당 기관에 패배하고 숙청되다

1937년 9월 10일 군사합의회에서 58조 테러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끝내 자백하지 않았고, 공범으로 누구도 지목하지 않았다. 당일 총살되었다.

모스크바 근교 빈농 가정 출신으로 열셋에 오부호프 공장 선반공이 된 볼셰비키 노동자였다. 1차대전 중 실랴프니코프와 함께 페트로그라드에서 당 중앙위 러시아국을 조직했고, 1917년 아친스크 소비에트를 결성했다. 내전 후 금속노동자조합 중앙위원으로 실랴프니코프와 '노동자 반대파'를 공동 지도하며 노동조합의 경제 통제와 당내 노동자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1922년 '22인 서한'에 서명해 코민테른에 당내 탄압을 호소했고, 1933년 출당 후 1937년 재판에서 끝내 자백을 거부하고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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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오부호프 공장 파업 참가
  • 1903RSDLP 입당, 볼셰비키 파벌 합류
  • 1912–14지하 노동자보험운동 조직
  • 1915–17당 중앙위 러시아국 조직, 시베리아 유형
  • 1917아친스크 소비에트 결성, 제헌의회 의원 당선
  • 1918전러시아 중앙집행위 혁명재판소장, 적군 정치위원
  • 1920–22금속노동자조합 중앙위원, '노동자 반대파' 공동 지도
  • 1921–22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22'22인 서한' 코민테른 제출, 분파활동 혐의로 경고
  • 1920s 후반중공업인민위원부 근무
  • 1933당 제명, 북부 러시아 행정유형
  • 1935–37체포, 백해-발트 운하 수용소 수감, 사형 선고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크릴렌코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Крыленко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85–1938 ✕ 처형

혁명적 법의식의 설계자, 대숙청에 삼켜진 검사

1918년 5월, 사형제가 폐지된 뒤 방청객이 술렁이자 크릴렌코는 "처형이 폐지된 겁니다. 샤스트니는 처형되는 게 아니라 총살되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스몰렌스크 현 베흐테예보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역사와 문학을 공부하던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당명은 아브람이었다. 1917년 2월 혁명 뒤 연대와 사단, 11군 위원회 의장을 거쳐 11월 최초의 소비에트 최고총사령관이 되어 독일과의 정전 교섭을 열었다. 이듬해부터 혁명재판소와 검찰, 사법인민위원직을 거치며 혁명적 법의식을 내세워 법을 계급투쟁의 도구로 규정하고 1922년 사회혁명당 재판과 1928년 샤흐띠 재판, 1930년 산업당 재판, 1931년 멘셰비키 재판을 이끌었다. 1938년 1월 31일 부하린 우익 조직 연계와 사법기관 파괴 혐의로 체포되어 7월 29일 20분 재판 끝에 사형을 선고받고 그날 총살되었으며,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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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17볼셰비키 비밀 활동, 체포와 망명 반복; 제1차 세계대전에 장교로 참전
  • 1917.11–1918.3소비에트 최초의 최고총사령관; 두호닌 해임, 휴전 교섭 개시
  • 1918–1922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혁명재판소 의장
  • 1922–1929러시아 공화국 법무부차관 겸 수석 검사보
  • 1929–1931러시아 공화국 검사; 샤흐띠·산업당·멘셰비키 재판의 국가검사
  • 1931–1936러시아 공화국 법무인민위원
  • 1936–1938.1소련 법무인민위원
  • 1938.7.2920분 재판 후 사형 선고, 당일 총살

아론 리보비치 셰인만

Арон Львович Шейнман

체르보네츠로 네프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고 스탈린 체제에서 이탈한 첫 고위 금융 관료

1922년 2월 28일, 레닌이 셰인만에게: "현재 국가은행은 관료적 서류 게임일 뿐이다. 달콤한 공산주의-관료적 거짓말이 아닌 진실을 듣고 싶다면, 이것이 진실이다."

1903년 입당한 볼셰비키 혁명가로, 1917년 헬싱키 소비에트 의장과 제헌의회 의원을 지냈다. 1921~1924년과 1926~1929년 두 차례 소련 국가은행 총재를 맡아 금태환 체르보네츠를 도입, 네프 시기 초인플레이션을 진정시켰다. 레닌으로부터 "관료적 서류 게임"이라는 신랄한 질책을 받았지만, 바로 그 제도 구축이 화폐 안정을 가능케 했다. 1929년 해외 출장 중 소환을 거부해 초기 네보즈브라셰네츠가 되었고, 대숙청을 피해 런던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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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17헬싱키 소비에트 의장 · 제헌의회 의원
  • 1918–1919스톡홀름 주재 재무관
  • 1920–1921그루지야 주재 전권대표
  • 1921–1924국가은행 총재 (1차) · 체르보네츠 도입
  • 1926–1929국가은행 총재 (2차) · 소환 거부, 망명
  • 1933–1939인투리스트 런던 지부장 · 영국 귀화
  • 1944런던에서 사망

이반 이바노비치 코롯코프

Иван Иванович Коротков

당 통제 기관에서 미술관으로 간 볼셰비키

11세에 마을을 떠나 그림 도제가 되었고, 16세에 성상화가 밑에서 이콘을 그렸다. 그로부터 20년 뒤, 같은 손으로 당 중앙기구의 간부 명단을 쥐었다.

블라디미르 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1세에 도제로 나가 성상화가 기술을 익혔고, 1905년 20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내전 후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지역 당 조직을 이끌었고, 1923년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장에 올라 스탈린의 당 기구 강화 초기 단계에서 간부 임명 라인을 관리했으며, 오르그뷰로 후보위원도 지냈다. 이후 15년간 중앙통제위원회와 당통제위원회에서 근무하며 대숙청기의 당 기구 숙청 작업에도 관여했고, 1939년 한동안 직위에서 배제된 뒤 푸시킨 미술관 관장으로 자리를 옮겨 1944년 은퇴할 때까지 박물관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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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RSDRP 입당,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에서 1905-07년 혁명 참여
  • 1913–16체포 및 유형
  • 1917야로슬라블 RSDRP(b) 위원회 위원
  • 1918–21테이코보 현 당위원장·집행위원장,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현 집행위 부위원장, 이후 현 당위 서기
  • 1922–24RKP(b) 중앙위원
  • 1923–24중앙위 조직지도부장, 오르그뷰로 후보위원
  • 1924–34중앙통제위원회 간부위원
  • 1934–39당통제위원회 위원
  • 1939–44푸시킨 국립미술관 관장
  • 1944은퇴

예핌 아파나시예비치 샤덴코

Ефим Афанасьевич Щаденко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계 1885–1951 ○ 자연사

1기병군의 인민위원에서 대숙청의 인사 집행자로

「모터전, 기계화, 항공, 화학 같은 건 군사전문가들이 지어낸 것이다. 지금으로선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다. 앞으로의 전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기병대일 것이다.」

1904년 입당한 볼셰비키로, 재단사에서 직업혁명가가 되었다. 부됸니, 보로실로프와 함께 제1기병군을 창건하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복무하며 내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1937년 국방부인민위원 대리 겸 지휘·지도인원관리국장에 오른 뒤, 키예프 군관구에서 지휘관들에 대한 '군부 파시스트 음모' 수사를 주도하며 대숙청의 핵심 집행자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글라부쁘라포름(총군편성보충관리국) 국장으로서 붉은 군대의 병력 편성과 보충을 총괄했으나, 기병 만능론에 집착해 기계화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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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RSDLP(볼셰비키) 입당
  • 1917카멘스카야 볼셰비키 위원회 의장 · 적위대 지휘관
  • 1918–1919제10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우크라이나 전선 RVS 위원
  • 1919–1920제1기병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0제2기병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마흐노 토벌
  • 1930–1934중앙통제위원회 위원
  • 1937–1940국방부인민위원 대리 · 지휘·지도인원관리국장
  • 1939–1941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41–1943국방부인민위원 대리 · 글라부쁘라포름 국장
  • 1943–1944남부전선 · 제4우크라이나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파벨 드미트리예비치 바실리예프

Павел Дмитриевич Василье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85–? ○ 행적과 최후 미상

혁명의 거점에서 권력의 역풍을 맞은 지방 소비에트 간부

1921년 3월 2일, 크론시타트 반란 세력은 그를 체포해 가두었다.

파벨 바실리예프는 러시아 내전 말기의 크론시타트 소비에트를 이끈 볼셰비키 지방 간부였다. 그는 전쟁공산주의와 당의 통치에 반발한 수병·노동자들의 요구가 공개 충돌로 번지는 현장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대표했다. 1921년 3월 반란 세력은 그를 니콜라이 쿠즈민과 함께 체포했고, 이 사건은 혁명적 소비에트 민주주의와 당 독점 권력 사이의 긴장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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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1크론시타트 소비에트 의장
  • 1919–1921크론시타트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의장
  • 1921.3.1앵커 광장 집회에서 소비에트 권력 대표
  • 1921.3.2대표자 회의에서 발언, 반란 세력에 체포됨

알렉산드르 야코블레비치 파르호멘코

Александр Яковлевич Пархоменко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886–1921 ✕ 전사

차리친 방어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화를 이끈 내전 지휘관

마흐노에게 체포된 그는 아나키스트 동생 아르툠이 '아직 늦지 않았다'고 쓴 편지를 꺼내 보였으나, 마흐노의 총에 쓰러졌다.

1886년 예카테리노슬라프현 우크라이나 농가에서 태어나 루간스크 기관차 공장 노동자로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05년 혁명에서 무장 분견대를 이끌었고, 1917년 이후 보로실로프와 함께 돈바스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고 백군 및 독일 점령군과 싸웠으며, 차리친 방어전에서 스탈린·보로실로프와 협력했다. 제1기병군 특별전권위원과 제14기병사단장으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과 브란겔 토벌에 참전했고, 1921년 1월 3일 마흐노 부대의 기습으로 전사했다. 사후 두 차례 적기훈장을 받고 이바노프의 소설과 1942년 동명 영화로 소비에트 내전 영웅의 판테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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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17루간스크 공장 노동자, 볼셰비키 입당(1904), 1905년 혁명 무장분견대 조직, 수차례 체포
  • 1917–1918루간스크 적위대 참모장, 돈바스 소비에트 권력 수립, 칼레딘·독일군과 전투
  • 1918보로실로프와 함께 차리친으로 후퇴, 제10군 혁명군사평의회 특별전권위원
  • 1919하리코프 군사위원·수비대장, 그리고리예프 반란 진압, 예카테리노슬라프 탈환
  • 1919–1920제1기병군 혁명군사평의회 특별전권위원, 로스토프 함락 참여
  • 1920–1921제14기병사단장, 소비에트-폴란드 전쟁·북타브리야 작전 참전, 마흐노군 토벌 중 전사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먀스니코프

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 Мясник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아르메니아 1886–1925 ✕ 추락사

벨라루스와 아르메니아에 소비에트 권력을 세운 레닌의 변방 건설자

1917년 10월 혁명 소식이 민스크에 닿자 먀스니코프는 즉시 군사혁명위원회를 만들어 이끌었고, 소비에트 권력은 민스크에서 유혈 없이 수립되었다.

나히체반-나-도누의 아르메니아계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906년 RSDLP에 입당해 불법 문헌 소지로 바쿠에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샤우먄의 영향을 받았다. 1917년 민스크에서 서부전선 볼셰비키를 이끌어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주도했다. 1919년 2월 벨라루스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거쳐 1921년 5월부터 아르메니아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아르메니아의 국가 제도와 경제를 세웠다. 1922년부터 자카프카스 연방평의회 의장과 자카프카스 당 제1서기를 지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과 아르메니아 문학에 관한 저작을 남겼다. 1925년 3월 22일 트빌리시 근처에서 비행기가 불타 추락해 아타르베코프, 모길렙스키와 함께 사망했으며 화재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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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RSDLP 가입, 불법 문헌 소지로 바쿠로 유배 — 샤우먄과 교류
  • 1911–1914모스크바 대학 법학부 졸업(1911), 군 복무 후 변호사 조수로 볼셰비키 언론에 기고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 복무, 병사들 사이에서 혁명 선전
  • 1917.9–1918.5서북지역 당위원회 의장, 민스크 군사혁명위 의장, 서부전선 총사령관
  • 1919.1–2벨라루스 SSR 초대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겸 군사인민위원
  • 1919–1920모스크바 당위원회 군사조직자·서기; 폴란드 전쟁 시 서부전선 정치국장
  • 1921–1922아르메니아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겸 군사인민위원, 자카프카스 SFSR 부의장
  • 1922–1925자카프카스 연방평의회 의장, 자캅카스 당 제1서기 — 소련 중앙집행위 상임위원,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당 중앙위 후보위원
  • 1925.3.22트빌리시 근처 항공기 화재로 사망 — 아타르베코프, 모길렙스키와 함께 순직

세르게이 미로노비치 키로프

Сергей Миронович Киров

레닌그라드의 조직가, 대숙청의 구실이 된 암살

1926년 레닌그라드 부임 첫해, 키로프는 공장을 돌며 180회 넘는 노동자 집회에서 연설했다.

1904년 톰스크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1905년 혁명에 참여한 혁명가이자 소련 정치인이다. 1921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1서기로 바쿠 유전 재건을 이끌었고, 1926년 레닌그라드 당을 맡아 1930년 정치국원이 되었다. 내전기에는 아스트라한 방어를 지휘하며 반볼셰비키 봉기를 대규모 사살로 진압했고, 1933년에는 레닌그라드주 '트로이카' 위원으로 반혁명 사건의 사형 판결권을 가졌다. 1934년 12월 1일 레닌그라드 스몰니에서 레오니트 니콜라예프에게 총격당해 사망했고, 그 죽음은 대숙청의 구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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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7블라디캅카스에서 언론·지하활동
  • 1921–26아제르바이잔 당 제1서기, 바쿠 유전 재건
  • 1926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 지노비예프의 기반 인수
  • 1930정치국원
  • 1934.12.1스몰니에서 니콜라예프에게 피살, 같은 날 신속 처형령 발효

그리고리 콘스탄티노비치 오르조니키제

Григор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Серго) Орджоникидзе
산업·생산 운영 소련 국가기관 러시아 제국 → 소련 그루지야 1886–1937 ✕ 총상 사망, 자살로 추정

대전환의 공업 사령관, 스스로 방아쇠를 당기다

1936년 10월 50세 생일 무렵, 퍄티고르스크에서 열린 기념 행사에 그는 형 파풀리아의 체포 소식에 충격을 받아 참석하지 않았고 아내 지나이다만 홀로 자리를 지켰다.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볼셰비키 원로로, 1912년 프라하 회의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고 1930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다. 캅카스 소비에트화와 트랜스캅카스 연방 수립을 이끌었으며, 1926~30년 중앙통제위원회와 노농검열인민위원회를 이끌고 1930~32년 국민경제최고회의를 거쳐 1932년부터 중공업인민위원으로 제1·2차 5개년계획을 지휘했다. 중공업인민위원으로서 자기 부문의 대량 탄압에 반대해 간부들을 감쌌고, 1937년 2월 18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으며 공식 발표는 심장마비였다. 숙청된 측근과 가족, 죽음의 정황은 사망 원인을 둘러싼 이견과 함께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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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프라하 협의회에서 중앙위원 선출
  • 1921캅카스 소비에트화 지휘, 「그루지야 사건」 논란
  • 1926–30중앙통제위원회 의장
  • 1930–32국민경제최고회의 의장
  • 1932–37중공업인민위원: 5개년 계획의 공업 총괄
  • 1924–26트랜스캅카스 지역위원회 제1서기
  • 1926북캅카스 지역위원회 제1서기
  • 1926–30노농검열인민위원, 소련 인민위원회 부의장
  • 1930–37정치국 정위원
  • 1935스타하노프 운동을 전국적 캠페인으로 전환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우글라노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Угланов

모스크바를 쥔 우파 반대파의 조직적 기반

1928년 10월 19일, 스탈린이 직접 모스크바 당 위원회 및 통제위원회 합동 총회 연단에 올라 '우경 위험'을 주제로 기조연설을 했다. 이어 11월 우글라노프는 모스크바 제1서기직에서 해임되었다.

1886년 12월 5일(구력 17일) 야로슬라블현 페오도리츠코예의 러시아인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하다 1905~07년 혁명에 가담했고 1907년 볼셰비키로 입당했으며, 1914년 재징집되었다가 부상으로 1916년 제대했다. 1924년부터 1928년까지 모스크바 당 조직을 이끌며 최고 실력자로 부상했고,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류틴과 함께 좌익 반대파 분쇄에 앞장섰다. 1928년 우익 반대파의 지도자가 되어 강제 집단화와 급속한 공업화에 반대했으나 그해 11월 모스크바 제1서기직에서 해임되었다. 1932년 류틴 사건으로 출당되었다가 1936년 다시 체포되어 1937년 5월 31일 사형을 선고받고 당일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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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RSDLP 입당, 볼셰비키
  • 1914–16차르군 복무, 부상 후 페트로그라드 귀환
  • 19172월·10월 혁명 참여,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원
  • 1921–22페트로그라드 현당 책임서기, 크론시타트 진압 참여
  • 1922–24니즈니노브고로드 현당 책임서기
  • 1924–28모스크바 현당 제1서기, 중앙위 서기
  • 1926–29정치국 후보위원
  • 1928–30소련 노동인민위원
  • 1932류틴 사건으로 출당
  • 1937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 당일 총살

바실리 블라디미로비치 시미트

Васил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Шмидт

노동조합의 국가화를 주도한 노동인민위원

아서 랜섬은 1918년 12월 임명 직후 그를 만나 "면도를 깔끔히 한 총명한 젊은이로, 사무 처리에 대한 관심이 그의 인민위원부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고 기록했고, 슈미트는 인민위원부가 노동조합의 직접 통제를 받는다고 말했다.

1886년 12월 17일(그레고리력 29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하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러시아어 전기에서는 독일계로 기재되어 있다. 1905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철도 정비공으로 일했고, 1907년부터 1911년까지 독일에서 도장공으로 지내다 돌아와 1915년부터 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1917년 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와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서기,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1917년 11월 노동부인민위원으로 임명되어 1928년까지 재임했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을 지냈고, 1937년 1월 체포되어 1938년 1월 28일 사형을 선고받아 처형되었으며, 1957년 7월 30일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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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철도 정비공
  • 1907–1911독일 망명, 도장공 노동
  • 1912–1914페테르부르크 금속노동자조합 비서
  • 1915–1916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서기 (수차례 체포)
  • 1917.2–10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서기,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서기,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17–1918노동부인민위원
  • 1918–1928노동인민위원 (RSFSR, 1923년부터 소련), 전연방 중앙노동조합평의회 간부
  • 1928–1930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겸 노동국방평의회 부의장
  • 1930–1931농업부인민위원
  • 1931–1933소련 인민위원회의 수석중재관
  • 1933–1937프리모리예 변경주 계획위원회 의장 등 지방 경제직

보리스 자하로비치 슈먀츠키

Борис Захарович Шумяцкий
이념·선전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86–1938 ✕ 처형

소련 영화산업을 설계한 혁명가 출신 문화행정가, '소비에트 할리우드'를 꿈꾸다

1934년 11월 15일 크렘린. 《차파예프》를 아홉 번째 본 스탈린이 "전국 모든 군 중심지에서 상영하나?"라고 물었다. 슈먀츠키는 음향 영사기가 약 4~5백 대뿐이라 답했고, 스탈린은 대책을 요구했다.

제정 러시아 베르흐네우딘스크(현 울란우데)의 가난한 유대인 장인 집안에서 태어나 1905년 크라스노야르스크 무장봉기를 이끌었다. 1917년 첸트로시비리 의장으로 시베리아 전역에 소비에트 권력을 선포했고, 극동공화국 제2대 총리 겸 외무장관, 페르시아 주재 전권대표(1923–1925), 동방노동자공산대학 총장을 지냈다. 1930년 11월 소유즈키노 이사장에 임명되어 1933년부터 영화사진공업총관리국(GUKF)을 이끌며 소련 영화산업을 총괄했고, 1936년 예술위원회 부의장을 겸했다. 1938년 1월 7일 해임되고 1월 17–18일 밤 반혁명 테러조직 가담·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7월 29일 코뮤나르카에서 총살되었으며, 1956년 2월 22일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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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05치타·크라스노야르스크 철도노동자로 입당, 1905년 크라스노야르스크 무장봉기 지휘
  • 1906–1913지하신문 편집·선동, 아르헨티나 망명, 귀국 후 체포·징집
  • 1917.10–1918.3첸트로시비리 의장, 시베리아 전역에 소비에트 권력 선포
  • 1920.6–1920.10극동공화국 외무장관 겸 총리
  • 1921–1922코민테른 극동비서국장, 몽골 인민혁명 고문, 수흐바타르와 의형제
  • 1923–1925페르시아 주재 소련 전권대표
  • 1926–1928동방노동자공산대학(KUTV) 총장, 《혁명적 동방》 편집장
  • 1930–1938소유즈키노 이사장 → 영화사진공업총관리국장, 소련 영화산업 총괄
  • 1935제1회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창설, 레닌훈장 수훈
  • 1938.1–1938.7해임·체포, 반혁명·간첩 혐의로 사형, 코뮤나르카에서 총살

세묜 마르코비치 디만시테인

Семён Маркович Диманштейн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러시아 1886–1938 ✕ 처형

랍비 서품을 받은 볼셰비키 유대인위원장이자 소비에트 민족정책의 설계자

1930년, 디만시테인은 유대인 민족지구에서의 강제 집단화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그가 스탈린 노선에서 이탈한 유일한 순간이었고, 당 견책을 받았다.

예시바에서 수학하고 랍비 서품을 받은 후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세묜 디만시테인은 소비에트 정권 초기 20년간 유대인 민족정책의 핵심 설계자였다. 민족문제인민위원부 산하 유대인위원회 위원장(1918), 예브섹치야 의장(1918~1920)을 지냈으며, 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과 소비에트연방 중앙집행위원회 민족연구소 소장(1932~1936)을 역임했다. 1926년부터 OZET 의장으로서 유대인 농업 정착을 추진하고 유대인 자치주 설립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혁명과 민족』 등 당대 민족정책의 주요 저널을 편집했다. 1938년 2월 대숙청 와중에 체포되어 그해 8월 처형되었고, 1955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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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빌나에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볼셰비키 합류
  • 1918민족문제인민위원부 유대인위원회 위원장
  • 1918–1920예브섹치야(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유대인부) 의장
  • 1920–1922투르케스탄 교육·민족문제 인민위원, 부하라 공화국 정치대표
  • 1922–1924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장·조직국 위원
  • 1924–1930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
  • 1926–1938OZET(유대인 노동자 토지정착촉진협회) 중앙이사회 의장
  • 1932–1936소비에트연방 중앙집행위원회 민족연구소 소장

야코프 흐리스토포로비치 페테르스

Яков Христофорович Петерс

체카 창설 부의장, 명예체키스트 제2호

“그는 사형 영장에 서명할 때마다 육체적 고통을 느낀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그의 성격에는 감상적인 면이 강했지만, 볼셰비즘과 자본주의의 충돌에 관해서는 광신자였고 무자비한 의무감으로 목표를 추구했다.” — 영국 외교관 로버트 브루스 록하트, 1918년 회고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체카의 핵심 설계자. 1904년 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1905년 혁명 참여 후 런던 망명. 1917년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10월 봉기를 준비했고, 혁명 후 체카 부의장으로 보안기관의 초석을 놓았다. 1918년 좌파SR 반란 당시 체카 권한대행, 이후 GPU·OGPU 동부국장으로 중앙아시아 바스마치 소탕을 지휘했다.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총살, 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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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LSDRP) 입당
  • 1907–1908체포·기소, 리가 군사법원에서 무죄 판결
  • 1909–1917런던 망명, 영국 사회당 및 라트비아 SD 그룹 활동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0월 무장봉기 준비
  • 1917.12–1918.07체카 부의장 (제1대)
  • 1918.07–1918.08체카 권한대행 의장 — 좌파SR 반란 진압
  • 1918.08–1919.03체카 부의장, 카플란 사건·로카트 음모 수사
  • 1920–1922투르키스탄 전권대표·타슈켄트 체카장, 바스마치 소탕
  • 1922–1929GPU·OGPU 동부국장, 국경군 감찰관 겸임
  • 1930–1934모스크바 통제위원회 위원장, 중앙통제위원회 위원
  • 1934–1937당 통제위원회 위원

바실리 이바노비치 차파예프

Василий Иванович Чапае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87–1919 ✕ 전사

소련 영화와 민담으로 되살아난 내전의 전설적 지휘관

내가 목수였을 땐 목숨이 전혀 아깝지 않았어. 용감했지. 그런데 지금은 좀 더 잘 살게 되면서 새로운 삶을 알게 됐다. 이제는 그때의 내가 아니야—이제는 목숨이 아까워.

가난한 농민 출신의 붉은 군대 지휘관. 정규 군사교육 없이 과감한 전술과 카리스마로 내전의 전설이 되었다. 1919년 우랄 전선에서 전사했으나 푸르마노프의 소설과 영화로 소비에트 영웅으로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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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17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 326 벨고라이 연대에서 복무하며 펠트페벨까지 승진.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 3개 수훈.
  • 1917–1918볼셰비키 입당. 니콜라옙스크에서 붉은위병대 조직, 니콜라옙스크 제1·제2연대 지휘.
  • 1918제2니콜라옙스크사단장으로 우랄 코사크 및 체코군단과 교전. 능선을 따라 사마라 방면으로 진격.
  • 1918–1919붉은 군대 참모아카데미에 입학했으나 학업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의로 이탈.
  • 1919제25소총병사단장으로 부활. 부구루슬란, 벨레베이, 우파 작전에서 두각. 적기훈장 수훈.
  • 1919.6–9우랄 전선으로 재배치. 특별집단 지휘관으로 우랄스크 포위 해제. 9월 5일 르비셴스크에서 코사크 기습으로 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