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물 징발이 씨 뿌릴 사람마저 없앨 것이라고 몰로토프에게 경고한 당 서기, 4년 뒤 총살되다
"곧 씨 뿌리고 수확할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1932년 11월, 하타예비치가 몰로토프에게. 당일 답신: "진정한 볼셰비키는 국가의 필요를 먼저 놓아야 합니다."
멘델 하타예비치는 1893년 고멜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치과기공사로 일하다 191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32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로서 11월 몰로토프에게 "콜호스의 최소한의 필요를 고려하지 않으면 곧 씨 뿌리고 수확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서한으로 경고했으나, 몰로토프는 "진정한 볼셰비키는 국가의 필요를 먼저 놓아야 한다"고 답했다. 1933년부터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주당 제1서기로 좌천된 뒤에는 오히려 대기근의 집행자가 되어 기아와 식인 보도를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1937년 대숙청 와중 체포되어 반혁명 테러조직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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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1917고멜에서 지하 볼셰비키 활동, 여러 차례 체포, 예니세이현 유형, 1917년 3월 사면
1917–1921고멜·사마라 당 간부; 체코군에 포로로 잡혀 고문으로 오른손 마비; 서부전선 제21소총사단 정치위원
1921–1925고멜현당 책임비서(1921–23), 오데사현당 책임비서(1923–24),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조직배치부 부장(1924–25)
1925–1928타타르 주당 책임비서
1928–1932중부볼가 변경당 제1서기: 대규모 집단화 추진, 쿨라크 대량 체포·추방 지휘
1932.10–1933.01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 곡물 몰수 지령 공동 서명; 11월 몰로토프에 기근 경고 서한
1933–1937.03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주당 제1서기; 기아와 식인 사례를 스탈린에게 보고하고도 1934년 당대회에서 집단화의 승리를 찬양
1937.03–10재차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 9월 체포, 10월 27일 사형선고, 10월 30일 총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데 필요한 것은 오직 용기와 자신감뿐이다. 나는 서른에 장군이 되거나, 그때까지 살아 있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1914년 근위 소위 시절의 서약.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투하쳅스키는 1893년 2월 4일(16일) 스몰렌스크현 알렉산드롭스코예에서 몰락한 귀족 아버지와 농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근위 제1사단 소속으로 부상당하고 다섯 차례 훈장을 받았으나 1915년 2월 포로가 되었고, 탈출 끝에 1917년 귀국해 1918년 3월 적군에 들어갔다. 내전에서 제1군과 콜차크에 맞선 제5군을 지휘했고, 1921년에는 크론시타트 반란과 탐보프 농민 봉기 진압을 지휘하며 포병·항공기와 함께 화학무기 사용을 명령했다. 1925~1928년 참모총장과 1935년 최초의 소련원수 다섯 명 중 한 사람을 지냈으나, 1937년 6월 11일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그날 밤 총살되어 1957년 복권됐다.
1933년 1월 중앙위 조직부장에 임명되어 당 전 간부 배치를 관장했으나, 불과 4년 뒤 자신이 구축한 기구의 수사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1893년 6월 17일(구력 5일) 토볼스크에서 유대계 가정의 소상인 신분으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루벤 게르셰비치 폴론스키다. 선원과 미숙련 노동자, 페테르부르크 전기기사로 일하다 1913년 페테르부르크 금속노조 중앙이사회 위원이 되었고, 1914년 체포되어 1915년 토볼스크 현으로 행정 유배되었다. 1917년 3월부터 모스크바 금속노조 중앙이사회 서기로 10월 무장투쟁에 참가했고, 내전기에는 서부·남부 전선 사단 군정위원과 남동철도 군정위원을 지냈다. 1920~1924년 광부노조 중앙위 서기, 1930~1933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1935~1937년 전연방 중앙노동조합평의회 서기를 지냈으며 1937년 처형되었다.
1930년 11월, 스탈린의 갑작스러운 전화에 "소 생산성 문제입니다, 스탈린 동지"라고 답한 시르초프는 곧바로 정치국에서 강제 집단화를 공개 비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대에서 볼셰비키가 되어 내전기 돈 지역 소비에트 권력 수립에 참여했다. 1926–1929년 시베리아 당 제1서기로 네프적 협동조합 노선을 추진했고, 1929년 러시아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과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강제 집단화의 참상을 목격하고 1930년 로미나제와 함께 반대파를 조직, 스탈린의 권력 집중을 비판했다가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1937년 대숙청 중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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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 입당, 지하 선전 활동
1917.10–1918로스토프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돈 소비에트공화국 부의장
1918–1919제12군 정치위원, 돈 지역 탈코사크화 참여
1921–1923중앙위원회 등록배치부장 — 노멘클라투라 제도 구축
1924–1926중앙위원회 선동선전부장, 《공산주의 혁명》 편집자
1926–1929시베리아 당 제1서기 — 네프적 협동조합 노선, 곡물 위기 때 스탈린과 갈등
각료회의 중 파란 연필로 동료 간부 캐리커처를 그린 메즐라우크. 낙서 532점이 보로실로프의 비밀 파일에 남았고, 체포 후 베리야는 한 장에 '메즐라우크의 작품'이라는 쪽지를 붙여 보내왔다.
소련 계획경제의 이론가이자 실무 책임자로, 1·2·3차 5개년계획 수립을 주도했다. 고스플란 의장으로 공업화 지표와 자원 배분을 총괄했으며, 1929년 포드 사와 고리키 자동차 공장 건설 계약을 체결했다. 기관지 《За индустриализацию》 편집장을 지냈고, 각료 회의에서 그린 당 간부들의 캐리커처로도 유명했다. 라트비아계였던 그는 대숙청 속 '라트비아 반혁명 조직' 혐의로 1938년 총살되었다.
1921년 타간체프 사건으로 페트로그라드 지식인들을 대거 처형한 뒤, 어찌 그리 가혹하냐는 물음에 아그라노프는 답했다. "페트로그라드 지식인의 70퍼센트는 한쪽 다리를 적의 진영에 담그고 있었소. 우리는 그 다리를 불태워야 했소."
1893년 10월 12일 모길료프 현 체체르스크에서 상인 집안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2년 사회혁명당에 들어갔다가 1915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같은 해 체포돼 예니세이 현으로 유배됐다. 1918년 인민위원회 서기로 레닌과 제르진스키의 지시를 직접 받았고, 1919년 체카에 들어가 크론슈타트 봉기와 안토노프 농민 봉기, 타간체프 사건을 수사했다. OGPU 비밀부장과 부의장을 거쳐 1934년 내무인민위원 제1부관 겸 국가보안총국 실질 책임자가 되어 키로프 살해 수사를 지휘했다. 1937년 사라토프로 좌천됐다가 체포돼 1938년 8월 1일 총살됐고, 사후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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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31체카와 OGPU의 정치수사 요원 겸 특별전권위원
1931–1933OGPU 비밀정치부장, OGPU 위원회 위원
1933–1934OGPU 부의장
1934–1936내무인민위원 제1부관, 국가보안총국 업무 실질 지휘
1936–1937NKVD 국가보안총국장
1937–1938사라토프 NKVD 책임자, 1937년 7월 20일 체포돼 1938년 8월 1일 총살
1913년 툴루즈 항공학교, 구레비치의 동급생은 마르셀 블로크였다. 30년 후 한쪽은 MiG-15, 다른 쪽은 미라주를 설계하여 냉전 하늘에서 맞서게 될 두 유대인 전투기 설계자가 같은 교실에 앉아 있었다.
쿠르스크 지방 유대인 가정 출신. 차르 시절 혁명 활동으로 하리코프 대학에서 퇴학당한 후 프랑스에서 항공공학을 수학했다. 1939년 아르툠 미코얀과 OKB-155(MiG)를 공동 창립, 부수석설계자(1939–1957)와 수석설계자(1957–1964)로 MiG-1부터 MiG-25까지 참여했다. MiG-3는 독소전 초기 주력기, MiG-15는 한국전쟁 제공권을 장악, MiG-25는 현역 최고속 요격기로 남았다. 사회주의노동영웅·6회 스탈린상·레닌상 수상. 평생 비당원이었던 유일한 최고위 군수설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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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1아흐티르카 김나지움 은메달 졸업, 하리코프 대학 입학 — 혁명 활동으로 퇴학·추방
1912–14몽펠리에 대학·툴루즈 SUPAERO 수학, 마르셀 다쏘와 동급생
1917–25하리코프 공과대학 항공공학 졸업, 글라이더 «부메랑»·«황새» 설계
1929–37모스크바 각 설계국 근무, 1936–37년 미국 더글러스사 공장 파견
1939–57OKB-155(MiG) 공동 창립, 부수석설계자 — MiG-1·MiG-3·MiG-9·MiG-15
1957–64OKB-155 수석설계자 — MiG-17·MiG-19·MiG-21·MiG-25; 무인·순항미사일 개발
"사이버네틱스의 주된 목표는 인간이 복잡하고 통제하기 어려운 과정을 통제하는 효율을 높이도록 돕는 것이다. 인간의 역할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1959년 4월 10일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회 보고
1893년 오렌부르크에서 스웨덴·핀란드·독일계 루터교 군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1979년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정 해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1919년 잠수함 판테라의 항해장으로 영국 구축함을 격침한 뒤 군 통신 연구와 레이더 개발을 지휘했다. 1937년 12월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유죄 판결을 받지 않고 1940년 석방되었고, 1991년에야 사후 복권되었다. 1946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55년 제독-기사, 1953년부터 1957년까지 국방차관을 지냈고, 1959년부터 죽을 때까지 아카데미 사이버네틱스 과학위원회를 이끌며 생물학적·기술적 사이버네틱스와 인공지능 연구를 제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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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918전함 체사레비치 항해사, 영국 잠수함 E8 연락장교 (제정 러시아 해군)
1918–1922잠수함 판테라 항해사, 잠수함 리스·볼크·즈메야 함장 (붉은 함대); HMS 비토리아 격침 (1919)
1925–1937해군공병학교 교관, 무선연구소 설립 → 해군통신·원격기계연구소장 (NIMIST)
1937–1940체포, NKVD 특별설계국(샤라슈카)에서 군 통신체계 개발; 증거불충분 석방
1939년 라트비아 당국에 체포되어 리가 중앙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1940년 6월 소련군 진주 후 사면으로 석방되자마자 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로 호출되었다. 지하운동가에서 소비에트 공화국 창립 지도자로의 전환은 불과 며칠 사이에 이루어졌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1940년부터 1959년까지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지내며 소비에트 라트비아의 창립과 제도화를 주도했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17년 입당, 붉은 라트비아 소총병으로 내전에 참전했으며 이후 라트비아 지하운동과 모스크바 유학을 오갔다. 1940년 소련군 진주 후 리가 형무소에서 석방되어 곧바로 공화국 당 제1서기로 임명되었고, 전후 집단화와 공업화를 통해 라트비아의 소비에트 체제 편입을 총괄했다. 1957년 CPSU 정치국 후보위원에 올랐으나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때 불충분한 대응을 이유로 제1서기에서 물러났다. 이후 1970년까지 라트비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을 지냈다.
1934년 17차 당대회에서 개표위원장을 맡아 스탈린 반대표 약 290장을 삭제하고, 키로프(3표) 대신 스탈린이 최소 반대표를 얻은 것처럼 조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 조작은 여러 문헌이 전하는 주장이며 확정된 사실로 단정할 수 없다.
유대계 제화공 가정에서 태어나 1911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22년 당 조직부를 맡아 스탈린의 지지자들을 요직에 배치했다. 1925~1928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총서기로 중앙집권과 농업 재편을 밀어붙였고, 1930년 정치국 정회원이 되어 당 서기국과 모스크바 재건, 지하철 건설을 지휘했다. 1932년 북캅카스 곡물 조달 위원회를 이끌며 마을을 블랙리스트에 올렸고, 대숙청기에는 처형 리스트에 서명하고 공화국들을 돌며 숙청을 독려했다. 1957년 반당 그룹으로 실각하고 1961년 제명되었으며, 1991년 97세로 죽어 마지막 생존 옛 볼셰비키가 되었다.
홀로 무장해제한 채 러스키섬 사관생도들 앞에 선 라조: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러시아 땅을 위해 우리는 죽을지언정 그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몰도바 보야르 가문 출신의 러시아 제국군 장교로 1917년 혁명에 합류하여 시베리아와 극동에서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이끈 볼셰비키 군사 지도자다. 크라스노야르스크 소비에트를 장악하고 자바이칼 전선 사령관으로 그리고리 세묘노프의 백군과 싸웠으며, 블라디보스토크 지하활동과 유격전을 거쳐 1920년 1월 봉기를 조직해 콜차크의 극동 통치를 무너뜨렸다. 1920년 4월 일본군에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증기기관차 화실에서 불태워졌으며, 소련에서 가장 널리 기념된 내전 순교자 중 한 명이다.
「군사 문제에서 그에게 흥미를 끌지 않는 것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트리안다필로프는 언제나 활기와 에너지, 창조적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 『평생의 일』 (1975)
카르스주 출신의 폰토스계 그리스인으로, 차르군 대위에서 붉은 군대 부참모총장까지 오른 군사 이론가이다. 『현대군의 작전 규모』(1926)와 『현대군 작전의 성격』(1929)을 저술하여 전략과 전술을 잇는 '작전술' 개념을 정립하고 종심작전 교리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의 구상은 붉은 군대의 전간기 교리 개혁을 이끌었고 제2차 세계대전 소련군 승리의 교리적 기반이 되었다. 1931년 근무 중 항공 사고로 37세에 사망, 유해는 크렘린 성벽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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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7차르군 입대, 모스크바 준사관학교 졸업 후 제6핀란드소총연대 중대장·대대장, 참모대위
1917–18혁명 후 병사들에 의해 연대장·제7군 사령관 선출, 케렌스키·페틀류라 정부로부터 법외 선언
10년간 벨라루스 공업화를 진두지휘한 정부수반, 아카데미 숙청에 서명하고 같은 심판대에 서다
1937년 6월 21일 민스크 NKVD 5층 심문실에서 '폴란드 간첩' 혐의를 받던 골로데트는 심문 도중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 공식 발표는 자살, 비공식 증언은 구타 살해 후 위장.
일곱 살부터 목동으로 일한 농민 혁명가로, 1927년부터 벨라루스 공화국 정부수반을 10년간 맡아 공업화와 집단화를 주도하며 공화국을 농업 국가에서 공업 국가로 바꾸어 놓고 1935년 레닌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과학아카데미 학자 추방 결의에 직접 서명한 그 자신도 1937년 '폴란드 간첩'으로 체포되어 민스크 NKVD 심문 중 투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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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915크리보이로크 광산에서 선로 수리공, 자물쇠공, 전기기사로 노동
1917남서부전선 병사위원회에서 볼셰비키 혁명 선전 활동
1918–1921RCP(b) 입당, 적위대 조직 및 독일군·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과 교전; 노보집코프현 소비에트 활동
1921–1924고르키현 집행위원회 의장, 도적 진압 트로이카 의장
1925–1927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
1927–1937벨라루스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 공업화·집단화 주도
1930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벨라루스 과학아카데미 학자 6인 추방 결의 서명
매년 키예프에서 아버지가 낡은 가죽 장화를 청하러 왔지만, 가마르니크는 끝내 거절했다. "일하는 사람들이 그 장화를 보면, 아들이 군대에서 도둑질한다고 생각할 게 아닙니까."
내전기 우크라이나에서 볼셰비키 지하운동을 이끌고 극동 지역의 산업화를 진두지휘한 혁명가. 1929년부터 8년간 붉은 군대 정치총국장으로서 소련군 정치장교 체계를 구축하고 이끌었으며, 투하쳅스키의 기계화·항공 중심 군 현대화를 정치적으로 뒷받침했다. 1929년 중앙위원회에서 부하린 '우익 반대파' 숙청을 공개 지지했으나, 1937년 5월 자신이 '군사-파시스트 음모' 혐의로 해임되자 체포를 기다리지 않고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1955년 복권.
1937년 3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그는 트로츠키주의자·지노비예프주의자·우익파가 '독일과 일본 파시스트에게 고용된 피비린내 나는 파괴공작자-살인자 덩어리'라고 규탄했다. 넉 달 뒤 그 자신이 체포되었다.
12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10월 혁명 당시 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간부로 활동했고, 내전기에는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을 지냈다. 1924년 중앙위 조직배치부(오르그라스프레드) 책임자로서 스탈린의 노멘클라투라 체계 구축에 핵심 역할을 했으며, 이후 우랄·레닌그라드 지역당 서기, 체신인민위원을 거쳐 1935년 소비에트통제위원회 의장 겸 인민위원회의 부의장에 올랐다. 당-국가 통제기구의 정점에서 중앙계획 규율을 감독했으나, 1937년 6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제명·체포되어 1938년 7월 총살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재판 마지막 진술에서: "내가 수사에서 아주 많은 정직한 사람들을 무고히 비방했음을 참작해 주십시오... 저 자신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제 운명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이자 시베리아와 벨라루스를 거쳐 레닌그라드 NKVD 수장으로 올라선 대숙청의 집행자. 키로프 암살 수사와 '구시대 계급' 1만 1천여 명의 추방을 지휘했고, '벨라루스 민족중앙' 사건을 조작했으며, 라트비아인을 겨냥한 대규모 민족 작전을 조직했다. 1938년 초 예조프의 부내무인민위원 겸 모스크바 NKVD 수장으로 승진했지만 수개월 만에 자신이 속했던 기관에 체포되어 총살됐고, 사후에도 복권이 거부됐다.
1936년 7월 14일, 스탈린의 집무실. 고스방크 총재 마랴신이 자신의 운명을 걱정하자 스탈린은 그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너는 반대파도 아니잖나. 우리의 붉은 은행가야. 뭐가 두렵나?" 일주일 뒤 그의 집무실은 봉인되었다.
모길료프의 법률고문 아들로 태어나 1915년 볼셰비키에 입당, 혁명기 모스크바 군관구 교육기관 정치위원을 시작으로 내전기 전러시아 총참모부에서 보편군사훈련 부서를 이끌었다. 1920년대 당 조직국과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보통계부를 거쳐 1927년 볼셰비키 전당 중앙위원회 조직배치부 부장에 올랐으며, 이 시기 니콜라이 예조프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930년 적색교수양성소를 졸업하고 국가은행에 입행하여 1934년 4월부터 1936년 7월까지 고스방크 총재를 지내며 재정부인민위원과 노동국방평의회 위원을 겸임했다. 해임된 지 5개월 만에 체포되어 1938년 8월 총살되었으며, 한때 '료부시카'라 부르던 예조프가 직접 고문을 지시했다.
1932년 2월 나가예바 만에 상륙해 툰드라에 마가단을 세운 베르진. 샬라모프는 이렇게 적었다: '콜리마 최초의 책임자 베르진은 가혹한 변경의 식민화와 동시에 수감자들의 '개조'와 격리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라트비아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베를린 왕립미술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 라트비아 소총병으로 참전하며 볼셰비키 혁명에 합류했다. 1918년 체카의 지시로 영국 외교관 로크하트의 반소비에트 음모에 위장 접근해 공모자 체포를 이끌었고, 좌익사회혁명당 반란 진압에도 기여했다. OGPU 소속으로 비세르 화학공장을 수감자 노동으로 건설한 뒤, 1931년 달스트로이 초대 국장으로 콜리마 금광 개발과 마가단 건설을 주도했다. 임금·조기석방·가족동반을 허용하는 독특한 수용소 경영으로 식민화를 추진했으나, 대숙청이 절정이던 1937년 말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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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베를린 왕립미술학교 졸업, 라트비아로 귀국 후 징집
1915–17제4 비제메 라트비아 소총병 연대 소위, 게오르기 십자훈장 수훈
1917–18라트비아 소총병 사단 제1경포병대대 지휘관; 좌익SR 반란 진압, 로크하트 음모 적발
1918.11RKP(b) 입당
1919–20남부전선에서 데니킨 백군 격퇴,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 보급참모
1921.02체카 특별부에서 근무 시작 (후 OGPU)
1926–31비세르 화학공장(비슐라크) 건설 책임자 — OGPU 수감자 노동으로 18개월 만에 완공
1937년 9월, 극동지방에서 철도 노동자만 500명을 간첩으로 색출해 총살했다고 스탈린에게 보고하자, 스탈린은 이렇게 물었다. '바레이키스 동지, 당신 구역에는 왜 그렇게 간첩이 많은 겁니까?'
리투아니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공장에서 선반공으로 일하며 191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내전기에는 심비르스크 방어를 지휘하고 좌파 에스에르 봉기 진압에 참여했으며, 1920년대 중앙위 출판부장을 거쳐 중앙검은토지주·보로네시·스탈린그라드·극동지방의 제1서기를 차례로 맡았다. 집단화 과정에서 오스트로고시스크 봉기를 직접 진압하고, 트로이카를 통해 수만 명을 유죄판결했다. 1937년 극동지방에서 한인 17만 명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를 집행하고 수백 명의 '일본 간첩'을 적발했다고 스탈린에게 보고했으나, 그해 10월 자신이 체포되어 1938년 총살되었다. 1956년 복권.
1923년 6월, 스탈린이 '범튀르크주의'라고 비난하자 리스쿨로프는 연단에서 반박했다: "몇 달 전만 해도 동지 스탈린이 술탄갈리예프를 혁명적 공산주의자라고 칭송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와서 말을 바꾸는 것은 정치적 편의입니다."
카자흐인 볼셰비키 혁명가로 투르키스탄 자치공화국의 핵심 지도자였다. 중앙아시아 투르크어권 민족들이 하나의 역사적 공동체라고 주장하며 스탈린의 민족 획정에 맞섰고, 1923년 제4차 민족공화국 간부회의에서 '범튀르크주의'라는 비난을 공개 반박했다. RSFSR 인민위원회의 부의장(1926~1937)으로 투르크시브 철도와 카라간다 중공업 단지를 추진했으며, 1932~1933년 카자흐 대기근 때 스탈린에게 직서해 골로쇼킨의 강제집산화가 낳은 참상을 알리고 식량 원조를 이끌어냈다. 1938년 총살, 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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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914메르케 러시아-카자흐 기숙학교 → 피슈페크 농업학교 졸업
1916–1917중앙아시아 민족해방봉기 참가, 체포; 타슈켄트 사범학교 수학; 메르케에서 카자흐 청년 혁명조직 '부하라' 창설
명령 제00447호를 준비하던 1937년 여름, 부하들에게 훈시한 속기록이 남아 있다. '제1차 작전의 상한선은 11,000명입니다... 12,000명을 잡아도 좋고, 13,000명도, 15,000명도 좋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그 숫자로 제한하지는 않습니다. 제1범주로 20,000명을 잡아도 됩니다.'
키예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체키스트로, 본디 성은 코롤이며(문헌에는 미로노프코롤로도 쓴다) 북캅카스에서 예브도키모프 아래 경력을 쌓은 이른바 '북캅카스인' 그룹의 일원이자 프리놉스키의 최측근 조력자였다. 서시베리아 변경주 NKVD 국장으로서 1937년 여름 대량작전의 포문을 열었고, 검사 브라코프·당서기 에이헤와 함께 구성된 트로이카의 의장을 맡아 부하들에게 할당 숫자에 얽매이지 말고 잡아들이라고 훈시했다. 1937년 8월 몽골 주재 전권대표로 전임해 라마 승려 8천 명가량이 희생된 몽골 대숙청을 조직했으며, 이후 외무인민위원부 제2동방부장으로 있다가 1939년 1월 체포되어 1940년 1월 16일 스탈린에게 보내진 총살 명단에 올라 처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