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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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국가기관 인물 1086명

야코프 아르카디예비치 야코블레프

Яков Аркадьевич Яковлев

집단화 행정을 맡은 농업인민위원

1929년 12월, 야코블레프는 전체 농지의 '최소 3분의 1'을 1930년 봄까지 집단화하자고 제안했다. 스탈린은 지나치게 신중하다며 기각했고, 야코블레프는 그대로 물러서 상향된 강행 일정을 충실히 집행했다.

본명 예프스타인. 1913년 볼셰비키 입당, 혁명 후 우크라이나에서 당 활동을 이끌었다. 1923년부터 『농민신문』 편집장을 맡아 농촌 문제 전문가로 부상했고, 1929년 초대 소련 농업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정치국 집단화 위원회를 주도했다. 1930년 1월 5일 포고령을 기초해 주요 곡창지대의 강제 집단화 일정과 '부농 계급 청산' 정책을 설계했으며, 트로핌 리센코를 발탁해 소련 생물학의 반과학적 전환에도 관여했다. 대숙청 중 체포되어 1938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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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1934농업인민위원 · 집단화 행정

이즈라일 모이세예비치 레플렙스키

Израиль Моисеевич Леплевский

우크라이나 대량작전을 정점으로 끌어올린 자

GB 소령 우샤코프의 증언에 따르면, 레플렙스키는 자신의 상관인 예조프마저 두려워할 정도로 무자비한 인물이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출신의 체키스트. 벨로루시 NKVD를 거쳐 우크라이나 NKVD 수장으로 대숙청 대량작전을 주도했으며, 예조프의 측근으로서 가장 먼저 숙청된 이들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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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36벨로루시 내무인민위원
  • 1936–1937국가보안총국 특별부장
  • 1937–1938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 1938NKVD 제6부장, 이어 제3관리국장(수송·통신)
  • 1938체포와 처형

파이줄라 구바이둘라예비치 호자예프

Файзулла Губайдуллаевич Ходжае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즈베키스탄 1896–1938 ✕ 처형

부하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자디드 개혁운동에서 소비에트 우즈베키스탄의 초대 총리가 된 중앙아시아 혁명가

러시아 외교관 알렉산드르 바르민의 회고: 「'우즈베크의 레닌'이라 불린 호자예프는 왜소하고 마른 체구였으나 엄청난 에너지로 가득했다. 말라리아로 얼굴이 푸르스름해질 때도 있었지만, 엄청난 업무 속에서도 즐겁게 웃을 줄 알았다. 그는 자기 민족을 알았고 뛰어난 연설가였으며 깊이 사랑받았다.」

부하라의 부유한 상인 가문 출신으로, 11세에 모스크바로 유학하여 전통사회와 근대 유럽의 간극을 체험했다. 1916년 범튀르크주의 자디드 운동에 합류, 청년 부하라당을 창당했고 1918년 토후 전복 시도 실패 후 사형 선고를 받고 타슈켄트로 도피했다. 1920년 부하라 인민소비에트공화국 인민나지르회의 의장이 되었고, 1924년 우즈베크 SSR 수립과 함께 초대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중앙아시아의 국가 획정과 소비에트 연방 편입을 이끌었다. 1930년대 스탈린의 목화 단작 정책에 반대하다 몰락, 1937년 체포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 선고 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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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자디드 운동 참여, 청년 부하라당 창당, 비밀 중앙위원
  • 1918부하라 토후 전복 시도 실패, 타슈켄트 도피, 궐석 사형
  • 1919–1920타슈켄트에서 혁명적 청년 부하라인 사무국 조직, 『우치쿤』 편집
  • 1920–1924부하라 인민소비에트공화국 인민나지르회의 의장
  • 1924–1937우즈베크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초대)
  • 1925–1937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우즈베크 SSR 대표 의장
  • 1937–1938전직 해임·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사형, 3월 15일 총살

바실리 표도로비치 데멘티예프

Василий Фёдорович Дементьев

체첸에서 연해주까지 옮겨 다닌 '북캅카스파' 체키스트

1917년 12월 기마 유격대원으로서 그는 러시아 육군 마지막 총사령관 두호닌 장군의 거처 점거에 가담했고, 두호닌은 얼마 뒤 병사들에게 살해됐다.

예브도키모프가 1934년 국가정치국 안의 '자기 사람'으로 거명한 '북캅카스파' 체키스트로, 1936년 여름부터 체첸(체첸-인구시)의 NKVD를 맡았다. 쿨라크 작전에서 평균을 웃도는 숫자를 제안한 지역 책임자 가운데 하나로 나우모프의 명단에 오르내린다. 극동 개편 뒤인 1938년 8월 국가보안소령으로 연해주 NKVD 국장이 되었으나, 예조프 몰락과 함께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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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36북캅카스 체카·OGPU 요원
  • 1936–1938체첸-인구시 NKVD 책임자
  • 1938연해주 NKVD 국장 (국가보안소령)

세묜 보리소비치 주콥스키

Семён Борисович Жуковский

무역 관리에서 부인민위원이 된 이례

1923년 당내 토론에서 트로츠키 측 결의안에 투표했다. 15년 후 스탈린은 이를 기억했고, 1938년 10월 3일 카자흐스탄 리데르 광산 책임자로 좌천되었으나 부임도 못 가고 19일 만에 체포되었다.

예조프의 NKVD 부인민위원이 된 이례적 무역 관료. 키예프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독일 주재 무역대표를 거쳐 1936년 예조프에게 발탁돼 NKVD 행정·보급을 총괄했다. 1938년 숙청으로 체포·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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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6베를린 주재 무역대표부 부대표, 대외무역인민위원부 수입국장
  • 1936–1937NKVD 행정경제국장
  • 1937국가보안총국 제3부 부부장, 제12부장
  • 1938내무부인민위원
  • 1938–1940체포, 재판과 처형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젤렌초프

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Зеленц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6–1941 ✕ 전사

돌파를 시도했지만 상부 명령에 묶인 사단 지휘관

보급로가 끊긴 뒤에도 철수 허가를 받지 못한 그는 사단 일부를 이끌고 얼어붙은 키안타야르비호를 건넜다.

안드레이 젤렌초프는 제정 러시아군 장교 출신으로 붉은 군대에 합류해 내전과 군 조직 개편을 거친 직업군인이었다. 겨울전쟁에서 제163소총사단을 이끌고 수오무살미를 점령했지만, 보급로가 끊기며 사단이 소련군 최초의 포위망에 갇혔다. 그는 철수를 요청했으나 허가받지 못했고, 결국 사단 일부를 이끌고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 국경으로 빠져나왔다. 이후 제88소총사단을 지휘했으며 1941년 카렐리야 전선에서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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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제정 러시아군 보병 장교와 항공 관측장교
  • 1918–1921붉은 군대 입대, 내전기 군사위원·후방 지휘관
  • 1921–1933소총연대 지휘와 군사교육·참모 보직
  • 1936–1939제5독립중전차여단 참모장, 제3소총군단 기갑부대 책임자
  • 1939–1940제163소총사단장, 수오무살미 전투에서 포위와 철수 지휘
  • 1940–1941소장 진급, 제88소총사단장과 아르한겔스크 군관구 임시 지휘
  • 1941카렐리야 전선에서 제88사단 지휘 중 전사

볼데마르 아우구스토비치 울메르

Вольдемар Августович Ульмер

대숙청 작전명령마다 「확인함」 서명을 남긴 국가보안총국 작전서기

1943년 수용소 업무평가서는 그를 모범적인 행정십장으로 적고 수감 기간 3년 단축을 청원했다.

국경수비대 출신의 NKVD 여단장으로 1937년 4월부터 1938년 9월까지 국가보안총국 작전서기를 맡아 제00447호를 비롯한 예조프의 대숙청 작전명령 사본에 인증 서명을 했다. 프리놉스키의 심복으로 베리야 아래에서 한 달 비서실장을 지낸 뒤 1939년 체포되어 15년형을 받고 1945년 크라스노야르스크의 수용소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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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준사관 학교 졸업, 이듬해부터 남서전선에서 중대장으로 복무
  • 1919–1922적군 보구차르 연대·여단에서 부관과 참모장
  • 1924–1925체카-OGPU 국경부대 지휘관·교관
  • 1928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후 국경수비 고등학교 교관
  • 1934국경·내무 병력 총국(GUPVO) 작전부장
  • 1937–1938국가보안총국(GUGB) 작전서기, 예조프의 대숙청 작전명령 인증
  • 1938–1939베리야 비서실장, 뒤이어 GUPVV 부국장 대행

표도르 이바노비치 트루힌

Фёдор Иванович Трухи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896–1946 ✕ 처형

전선 참모에서 반소 무장조직 지도자로 전향한 장군

1941년 가을, 포로가 된 그는 독일 당국에 적군 후방의 '철도·창고 등'을 타격하여 보급과 지휘를 마비시킬 부대의 창설을 제안했다.

트루힌은 러시아 제국군 장교 출신으로 적군에서 경력을 쌓아 군사교육과 참모 업무를 맡은 장군이었다.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 때 발트 군관구와 북서전선의 작전 지휘 체계에서 복무했으나, 전선 후퇴 중 포로가 되었다. 그는 포로 상태에서 독일 당국과 협력하고 블라소프의 러시아 해방군 및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 군사조직의 참모장으로 활동했다. 전쟁 뒤 소련에 넘겨져 반역죄로 처형되었으며, 그의 이력은 전문 군사 관료의 지식이 독일 점령전과 반소 무장 프로젝트에 전용된 사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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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7러시아 제국군 장교,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18–1921적군 중대·대대·연대 지휘관, 내전에 참전
  • 1922–1925적군 군사아카데미 수학
  • 1932–1936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관 및 전투훈련 방법론 학과장
  • 1937–1940총참모부 군사아카데미 고급 교관, 소장 진급
  • 1940–1941적군 전투훈련국 부국장, 발트 군관구 작전부장 겸 참모차장
  • 1941.06북서전선 참모차장, 리투아니아에서 포로가 됨
  • 1943–1945다벤도르프 러시아 해방군 학교장,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 군사조직 참모장

야코프 니콜라예비치 페도렌코

Яков Николаевич Федоренко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6–1947 ○ 자연사

전쟁 내내 붉은 군대 기갑부대를 지휘한 초대 기갑군 원수

1917년 10월 오데사에서, 페도렌코가 이끄는 수병 부대가 오데사 군관구 사령부를 점령하고 도시에 소비에트 권력을 세웠다.

야코프 페도렌코는 소련의 군사 지휘관으로, 1940년부터 1947년까지 붉은 군대의 주자동차장갑전차총국(GABTU)을 이끌며 대조국전쟁 전 기간 동안 소련 기갑·기계화 부대의 건설과 전투 운용을 총괄했다. 1941년 7월 국방 인민위원으로 임명되어 전차 생산과 보급을 직접 조율했으며,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 전투에서 최고사령부 스타프카 대표로 파견되었다. 전쟁 중 149차례 스탈린의 집무실로 불려간 최고 지휘부의 핵심 군사 고문으로, 1944년 2월 로트미스트로프와 함께 소련 최초의 기갑군 원수가 되었다. 흑해 함대 수병으로 10월 혁명에 참가했고 내전 시기 장갑열차를 지휘했으며, 1947년 사망하여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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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흑해 함대 수병, 기뢰소해정 선상위원회 위원장
  • 1917–1918적위대 오데사 수병 부대 지휘관
  • 1918–1920붉은 군대 장갑열차 지휘관·군정위원, 내전 참전
  • 1937–1940키예프 특별군관구 자동차장갑전차부대장
  • 1940–1942붉은 군대 주자동차장갑전차총국(GABTU) 국장
  • 1941–1943소련 국방 인민위원
  • 1942–1947붉은 군대 기갑·기계화 부대 사령관
  • 1946–1947소련 육군 기갑·기계화 부대 사령관, 최고회의 대의원

안드레이 알렉산드로비치 즈다노프

Андр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Жданов
이념·선전 소련 공산당·볼셰비키 소련 러시아 1896–1948 ○ 자연사(사인 논쟁)

스탈린주의 문화정책에 이름을 남긴 이념 관리자

1947년 9월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세계 정치 세력이 '제국주의·반민주 진영'과 '반제국주의·민주 진영'으로 나뉘었다고 선언하며 냉전기 소련의 공식 세계관을 정식화했다.

스탈린의 최측근으로 1934년 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에 올랐고, 대숙청 시기 정치국원으로 176건의 사형 명단을 직접 승인했다. 1989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 결정은 그를 1930~40년대 대량 탄압의 조직자 중 한 사람으로 규정했다. 전후 당내 2인자로 부상하여 1946년부터 문학·음악·철학을 강타한 즈다노프시나를 주도했고, 1947년 코민포름 창설을 조직하며 '두 진영' 세계관을 정식화했다. 1948년 6월 스탈린의 신임을 잃었고 8월 31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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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s니즈니노브고로드 당 조직에서 성장, 스탈린파 지방 간부로 부상
  • 1934–1945키로프 피살 뒤 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 도시와 당 조직 장악 (1945년 1월 쿠즈네초프에게 이양)
  • 1941–1944레닌그라드 포위전 시기 도시 방어와 정치동원 책임자
  • 1946–1948중앙위 서기, 문학·음악·철학 캠페인을 주도
  • 1947코민포름 창설과 두 진영 노선 제시
  • 1948사망 뒤에도 「즈다노프주의」가 전후 문화통제의 이름으로 남음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체르니셰프

Василий Васильевич Чернышёв

예조프의 부관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굴라그를 관리한 내무인민위원부 차관

베리야가 예조프를 대체하며 예조프 측근들을 차례로 체포할 때, 체르니셰프만은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굴라그 국장을 겸임하라는 임무를 받고 2년간 수용소 체제 전체를 지휘했다.

1937년부터 1952년 사망까지 15년간 내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을 지낸 국가보안 간부로, 예조프 휘하의 부인민위원 가운데 유일하게 숙청을 피한 인물이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굴라그 국장을 겸임하며 수용소 체제를 총괄했고, 전시에는 발트 3국 강제이주 작전의 실무를 지휘했다. 전후에는 원자력 프로젝트 건설을 감독하며 굴라그 노동력을 핵시설 공사에 동원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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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러시아 제국군 소위,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17–1920랴잔 시소비에트 부의장, 특수목적부대 조직
  • 1920–1927체카·OGPU 부대 지휘관, 투르키스탄 전선
  • 1927–1937극동 OGPU·NKVD 국경군 사령관
  • 1937–1939NKVD 부인민위원 겸 노동자농민민병대 총국장
  • 1939–1941NKVD 부인민위원 겸 굴라그 국장
  • 1941–1952NKVD·MVD 부인민위원/부장관, 원자력 건설 감독

이반 알렉세예비치 리하초프

Иван Алексеевич Лихачёв

소련 자동차 공업의 아버지, 포드에게 '나는 인민의 하인'이라고 말한 붉은 디렉터

1930년 헨리 포드와의 오찬에서: "나는 공업자가 아니라 인민의 하인입니다. 디렉터 자리는 세습이 아닌 우리 당의 의지로 받은 것입니다."

툴라 농민의 아들로 푸틸로프 공장 견습공에서 출발해 소련 자동차 대량생산 체제를 세운 산업 조직자. 1926년 모스크바 자동차 공장(AMO, 후일 ZIS) 디렉터로 부임해 낙후된 소규모 공장을 유럽 최대 자동차 생산기지로 키웠고 소련 최초의 컨베이어 조립을 도입했다. 대조국전쟁 중 공장을 동부로 대피시켜 4개 도시에 새 공장을 세우면서도 전선에 트럭과 무기를 끊임없이 공급했으며, 1949년 생산 중단 없는 신모델 전환 공법으로 스탈린상을 받았다. 사후 그가 키운 공장은 ZIL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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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RSDLP(b) 입당, 헬싱키에서 적위대 조직
  • 1917–1921붉은 군대 지휘관 및 체카 근무
  • 1926–1939모스크바 자동차 공장(AMO/ZIS) 디렉터
  • 1939–1940소련 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
  • 1940–1950ZIS 디렉터 복귀, 전시 생산 및 대피 공장 설립 총괄
  • 1950–1953항공기 공장 No. 41 디렉터
  • 1953–1956소련 자동차운수·도로 장관

이반 예피모비치 페트로프

Иван Ефимович Петр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6–1958 ○ 자연사

오데사·세바스토폴을 지키고 두 번 강등당해도 다시 전선에 선 육군대장

세바스토폴 함락 직전, 도시의 수비병들을 구하지 못한 절망에 페트로프는 권총을 들어 자결하려 했다. 장교들이 달려들어 그의 손에서 무기를 빼앗았다. 그는 잠수함으로 철수한 뒤 다시 전선으로 돌아갔다.

이반 페트로프는 대조국전쟁 최대의 방어전 두 곳인 오데사(1941)와 세바스토폴(1941~1942)을 지휘한 소련군 대장이다. 중앙아시아 바스마치 토벌로 군 경력을 쌓았고, 프리모르스크 군 사령관으로 흑해 방어전을 이끌었다. 북캅카스 전선군 사령관으로 타만 반도와 케르치-엘티겐 상륙작전을 성공시켰으며, 제2벨로루시·제4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지휘해 카르파티아를 넘었다.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 참모장으로 베를린·프라하 작전을 수행해 소련영웅이 되었다. 메흘리스와 스탈린에 의해 두 차례 강등되었으나 매번 재기용될 만큼 대체 불가능한 작전 능력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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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8알렉세옙스크 사관학교 졸업, 제156예비보병연대 반중대장(준위), 건강 악화로 제대
  • 1918–1922적군 입대·RKP(b) 가입, 내전에서 사마라·우랄·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참전, 제17기병사단 군정위원
  • 1922–1940중앙아시아 군관구에서 바스마치 토벌, 제1투르키스탄 산악소총사단장, 타슈켄트 보병학교장, 소장 진급
  • 1941.7–10제25차파예프 소총사단장 → 프리모르스크 군 사령관 — 오데사 방어전과 철수 지휘
  • 1941.10–1942.7세바스토폴 방어구역 부사령관 겸 프리모르스크 군 사령관, 만슈타인의 3차 공세까지 250일 방어
  • 1942.8–1943.11제44군 사령관 → 흑해집단군 사령관 → 북캅카스 전선군 사령관 — 캅카스 방어·타만 해방·케르치-엘티겐 상륙작전
  • 1944.3–1945.3제33군 사령관 → 제2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 → 제4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 — 대장 진급 후 강등, 재진급
  • 1945.4–5제1우크라이나 전선군 참모장 — 베를린·프라하 작전, 소련영웅 수훈
  • 1945–1958투르키스탄 군관구 사령관, 소련군 총감찰부 제1차장, 지상군 제1부총사령관, 국방부 총감찰관

알렉세이 이노켄티예비치 안토노프

Алексей Иннокентьевич Антон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6–1962 ○ 자연사

원수도 영웅도 아니었지만, 1943년 이후 모든 대규모 작전의 설계자

그는 상황을 속속들이 알면서도 스타브카 보고 때마다 2~3시간씩 준비했다 — 부하 장군 시테멘코의 회고

소련군 총참모장(1945~1946)이자 바르샤바조약기구 합동군 초대 참모장(1955~1962). 1942년 12월 작전국장으로 기용된 이후 쿠르스크, 바그라티온,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작전에 이르기까지 소련군의 모든 주요 전략작전 입안을 실무적으로 지휘했다. 야전사령관이 아닌 참모장교로서 전쟁의 실질적 설계자 역할을 수행했으며, 스탈린의 크렘린 집무실을 그 누구보다 자주 드나들며 직접 작전을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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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8제국 러시아군 소위; 남서전선에서 참전해 부상, 성 안나 훈장 수여
  • 1919–1922붉은 군대 남북전쟁 참전: 사단 부참모장에서 여단 참모장; 시바시 도하·크림 작전
  • 1928–1937프룬제 군사아카데미 → 작전학부 → 참모아카데미 수료; 모스크바 군관구 참모장
  • 1941–1942남부전선 참모장, 이후 자캅카스 전선 참모장
  • 1942–1945작전국장 → 부참모장 → 총참모장; 모든 주요 전략작전 입안 주도
  • 1948–1954자캅카스 군관구 제1부사령관, 이후 사령관
  • 1955–1962바르샤바조약기구 합동군 참모장

니콜라이 시도로비치 블라시크

Николай Сидорович Власик

25년간 스탈린의 그림자였던 경호 책임자

체포된 블라시크는 "나를 체포했다면, 곧 스탈린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한 달 반 뒤 스탈린은 죽었다.

벨라루스 농민 출신으로, 1931년부터 1952년까지 25년간 스탈린의 개인 경호를 책임지며 소련 지도자의 신변 안전과 모든 별장·관저를 총괄했다.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사후 스탈린의 자녀들을 사실상 양육했고, 경호 업무를 넘어 스탈린 가문의 집사 구실까지 했다. 중장까지 진급하고 레닌 훈장 3개와 쿠투조프 1급 훈장을 받았으나, 1952년 말 의사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실각했다. 1955년 유죄 판결로 계급과 훈장을 박탈당했으며, 사후 2000년이 되어서야 러시아 대법원에 의해 무죄가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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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러시아 제국군 하사관,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 수훈
  • 1917–1919모스크바 경찰, 이후 체카로 전속
  • 1926–1931OGPU 작전국 선임전권대표
  • 1931–1952스탈린 개인 경호 책임자
  • 1938–1942NKVD 국가보안총국(GUGB) 제1국장
  • 1943NKGB 제6총국장
  • 1946–1952MGB 경호총국(GUO) 국장
  • 1952바제노프 강제노동수용소 부소장으로 좌천

콘스탄틴 크사베리예비치(출생) / 콘스탄티노비치(개명) 로코솝스키

Константи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Рокоссовский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폴란드 1896–1968 ○ 전립선암

소련과 폴란드의 두 원수, 1945년 승리 퍼레이드를 지휘하다

1939년, NKVD는 그를 감옥 뜰로 끌어내 총성을 울렸다. 빈 총성이었다. 고문으로 이가 아홉 개 부러지고 갈비뼈 세 대가 부러졌으나 허위 자백을 거부했다. 석방 후에는 파울루스에게서 빼앗은 작은 권총을 늘 지녔다.

폴란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크사베리 로코소프스키(1853~1902)는 철도 검사로 일하다 사고로 죽었고, 그는 일찍 고아가 되어 제과점과 치과 조수,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1914년 8월 5 카르고폴 용기병연대에 자원입대해 게오르기 십자훈장 4급을 받았고, 1917년 10월 붉은 근위대에 들어갔다. 내전에서 기병대를 지휘했고 1919년 당에 입당했다. 1937년 8월 17일 체포되어 레닌그라드 슈팔레르나야의 감옥에 1940년까지 갇혀 고문당했으나 거짓 자백을 거부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를 지휘하고 바그라티온 작전을 입안했으며, 소련 원수(1944)와 폴란드 원수(1949)를 겸한 유일한 인물이다. 196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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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75 카르고폴 용기병연대에서 1차대전 참전, 게오르기 십자훈장
  • 1918–21붉은기병대에서 내전 참전, 35기병연대장, 두 차례 적기훈장
  • 1937–40대숙청으로 체포·투옥, 1940년 복권·석방
  • 1941–4216군 사령관으로 모스크바 방어,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
  • 1942–43돈 전선군 사령관 — 스탈린그라드 포위 및 파울루스 생포
  • 1943–44중부·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 — 쿠르스크 방어, 바그라티온
  • 1944–451·2 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 — 동프로이센·포메라니아·베를린
  • 1949–56폴란드 국방장관 겸 부총리, 폴란드 원수

게오르기 콘스탄티노비치 주코프

Георг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Жук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6–1974 ○ 자연사

스탈린이 총애한 승리의 원수, 그 명성 때문에 두 번 좌천되다

1945년 5월 9일 0시 43분 모스크바 시각, 베를린 카를스호르스트에서 주코프는 소련 대표로 독일의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이후 6월 24일 붉은광장에서 승리 열병식을 주관했다.

칼루가주 스트렐콥카의 가난한 러시아 농가에서 태어나 1915년 제정군에 징집되어 용기병 연대 하사관까지 올랐고, 1918년 붉은군대에 들어가 1919년 당에 입당했다. 내전에서 기병 지휘관으로 싸웠고 1939년 할힌골에서 관동군을 포위 격파해 소련 영웅이 되었다. 1941년 1월부터 참모총장을 지내다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방어를 지휘했고, 1942년 8월부터 최고부사령관 대리로서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베를린 공세를 이끌었다. 1945년 5월 카를스호르스트에서 독일의 항복을 받았으나, 1946년 전리품 사건으로 오데사, 1948년 우랄로 밀려났다. 1953년 국방차관으로 복귀해 베리야 체포에 가담했고, 1955년부터 국방장관을 지내다 197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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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할힌골에서 일본군 격파
  • 1941참모총장, 이후 레닌그라드·모스크바 방어 지휘
  • 1942–45최고부사령관,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베를린
  • 1945독일 항복 접수, 소련 점령지구 사령관
  • 1946–19481차 실각: 오데사, 이어 우랄 군관구로
  • 1953–1957베리야 체포에 가담, 국방장관을 거쳐 1957년 해임
  • 1969회고록 출간으로 복권

미하일 세묘노비치 호진

Михаил Семёнович Хози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6–1979 ○ 자연사

레닌그라드 봉쇄의 첫 겨울을 지휘하고, 제2충격군 상실로 경질된 소련 상장

스타프카는 1942년 6월 8일 그를 해임하며 "서류 중심의 관료적 부대 관리와 부대와의 단절로 제2충격군의 통신선이 차단되어 예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빠뜨렸다"고 적었다.

미하일 호진은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적군에 들어가 내전을 치렀다. 1938년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1939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을 거쳐, 독소전 발발 후 주코프를 따라 레닌그라드 전선으로 가 참모장과 제54군 사령관을 겸임했다. 1941년 10월 주코프가 떠난 뒤 레닌그라드 전선 사령관이 되어 첫 봉쇄 겨울의 방어와 티흐빈 공세를 지휘했으나, 1942년 6월 제2충격군을 포위에서 구출하지 못한 책임으로 해임되었다. 이후 제33군, 제20군 사령관 등 현장 지휘를 거쳐 전후에는 군사교육 기관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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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러시아 제국군 징집, 준사관으로 임관
  • 1918적군 입대, 볼셰비키당 입당
  • 1925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고등학술과정 수료
  • 1937레닌그라드 군관구 부사령관
  • 1938–1939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 1939–1941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
  • 1941.09레닌그라드 전선 참모장 겸 제54군 사령관
  • 1941.10–1942.06레닌그라드 전선 사령관
  • 1942.06–10제33군 사령관
  • 1942.12–1943.01제20군 사령관 (화성 작전)
  • 1943상장 진급
  • 1944–1945볼가 군관구 사령관
  • 1946–1963군사교육기관장 역임
  • 1963퇴역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세묘노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Семён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6–1986 ○ 자연사

소련 유일의 노벨화학상 수상자, 연쇄반응 이론의 창시자

1927년 독일의 보덴슈타인이 제자들의 인 산화 실험 데이터를 신뢰할 수 없다고 일축하자, 세묘노프는 오히려 그것이 미지의 현상임을 직감하고 실험을 재현하여 분지연쇄반응을 발견했다.

소련 화학물리학의 창시자이자 연쇄반응 이론을 확립한 물리화학자였다. 1928년 분지연쇄반응을 발견하여 연소·폭발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고, 이 공로로 1956년 시릴 힌셜우드와 함께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1931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화학물리학연구소를 설립하여 55년간 소장으로 이끌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연소·폭발 연구로 소련 원자폭탄 계획에 기여했다. 과학아카데미 부총재(1963~1971)와 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 공동설립자로서 소련 과학 행정의 제도적 틀을 설계한 조직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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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31LFTI 전자현상연구실장, 부소장
  • 1931–1986화학물리학연구소 설립자 겸 소장
  • 1932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41–1945연소·폭발 연구, 원자폭탄 계획 기여
  • 1944–1986모스크바대학교 화학반응속도론 강좌 주임
  • 1957–1971과학아카데미 화학부문 아카데미-서기
  • 1963–1971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게오르기 안드레예비치 몰차노프

Георгий Андреевич Молчанов

야고다의 비밀정치국장

1937년 2-3월 중앙위 전원회의. 스탈린이 예조프의 보고 도중 물었다: "몰차노프는 어떻게 됐나? 체포됐나, 안 됐나?" 예조프가 답했다: "체포했습니다, 스탈린 동지, 앉아 있습니다."

야고다의 측근으로 OGPU·NKVD 비밀정치국장을 맡아 반대파 탄압을 총괄했다. 류틴 그룹 체포와 키로프 암살 후 대량 체포를 지휘했다. 야고다 실각 후 벨로루시 NKVD로 밀려났다가 1937년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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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1그로즈니 체카 의장
  • 1925–1931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도 GPU 책임자
  • 1931–1936OGPU·NKVD 비밀정치국장
  • 1936–1937벨로루시 내무인민위원
  • 1937체포와 처형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쿠르스키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Курский

경력의 정점에서 방아쇠를 당긴 '북캅카스파' 부인민위원

1937년 7월 8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그로즈넨스키 라보치」의 부고는 그가 '잠깐의 병을 앓다 심장파열로 사망'했다고 알렸다.

우크라이나 체카 방첩부에서 니콜라예프-주리드, 다긴 등과 함께 복무를 시작해 1923년 예브도키모프를 따라 북캅카스로 옮겨 간 '북캅카스파' 체키스트다. 1936년 여름 카루츠키의 후임으로 서시베리아 변경주 NKVD 국장이 되었고, 몇 달 뒤 모스크바 중앙 기구로 불려 올라가 국가보안총국 비밀정치부장과 방첩부장을 거쳐 내무 부인민위원까지 올랐다. 1937년 7월 2일 수훈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나 며칠 뒤 권총 자살했으며, 나우모프는 이를 경력이 상승하던 때에 일어난 죽음으로 특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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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3우크라이나 체카 방첩부 요원
  • 1923–1936북캅카스 OGPU·NKVD, 예브도키모프 그룹
  • 1936서시베리아 변경주 NKVD 국장
  • 1936–1937NKVD 국가보안총국 비밀정치부장
  • 1937내무 부인민위원 겸 방첩부장
  • 1937수훈 며칠 뒤 권총 자살

비탈리 마르코비치 프리마코프

Виталий Маркович Примак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897–1937 ✕ 처형

붉은 카자크를 이끈 '붉은 로렌스',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한 소련 군사령관

1929년, 프리마코프는 튀르크 장교 '라기브 베이'로 위장하고 아프간 군복을 입은 2천 기병을 이끌고 국경을 넘었다. 서방은 그를 '붉은 로렌스'라 불렀다.

비탈리 프리마코프는 적군(赤軍)의 군사 지휘관으로, 우크라이나에서 붉은 카자크(Червонное казачество) 부대를 창설해 남북전쟁에서 14차례의 후방 급습과 60회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929년에는 '라기브 베이'라는 가명으로 아프간 군복을 입고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을 지휘하여 서방에서 '붉은 로렌스'라 불렸으며,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일본에서 무관으로 복무했다. 1936년 체포되어 1937년 6월 투하쳅스키 등과 함께 '트로츠키주의 반소비에트 군사조직' 사건으로 사형당했고, 1957년 복권되었다. 마야콥스키의 연인으로 유명한 릴리야 브릭의 세 번째 남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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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볼셰비키 입당
  • 1915반전 선전 활동으로 시베리아 종신 유형
  • 19172월 혁명으로 석방, 키예프 볼셰비키 위원, 겨울궁전 습격 지휘
  • 1918–1920붉은 카자크 연대→여단→8기병사단→1기병군단 지휘, 3차례 적기훈장
  • 1924–1925레닌그라드 고등기병학교장
  • 1925–1926중국 국민군 군사고문
  • 1927–1930아프가니스탄·일본 주재 무관
  • 1929'라기브 베이'로 위장,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개입 지휘
  • 1933–1934북카프카스 군관구 부사령관
  • 1935–1936레닌그라드 군관구 부사령관, 국방인민위원 산하 군사평의회 위원
  • 1936체포 (8월 14일)
  • 1937'트로츠키주의 반소비에트 군사조직' 사건으로 사형, 총살 (6월 12일)
  • 1957사후 복권 (1월 31일)

이반 아다모비치 크라발

Иван Адамович Краваль

스탈린에게 불만족스러운 인구를 센 통계학자

1937년 1월 인구총조사 결과가 크렘린에 도착했을 때, 크라발의 통계는 스탈린이 선전해온 인구 성장 신화를 숫자로 깨뜨렸다. 불과 4개월 후 그는 체포되었다.

라트비아 출신 소련 경제학자이자 통계학자로, 노동경제학 박사. 고스플란 부의장 겸 중앙국민경제회계국(TSUNKHU) 국장으로서 1937년 전연방 인구총조사를 주관했다. 집단화와 기근으로 인한 인구 손실을 반영한 낮은 수치가 정치 지도부의 분노를 샀고, 이는 그의 몰락으로 직결되었다. 그가 수립한 통계 방법론은 소련 계획경제의 기초 통계 인프라를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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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라트비아계 볼셰비키로 입당
  • 1924–1930최고국민경제회의(ВСНХ) 간부로 노동경제·통계 기반 구축
  • 1930–1932소련 노동부인민위원회 부위원장
  • 1933–1935TSUNKHU 제1부국장 겸 고스플란 간부회의 위원
  • 1935–1937TSUNKHU 국장 겸 고스플란 부의장, 전연방 인구총조사 책임
  • 1937인구총조사 결과를 이유로 체포·처형, 1956년 복권

니콜라이 표도로비치 기칼로

Николай Фёдорович Гикало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897–1938 ✕ 처형

그로즈니 방어전을 지휘한 내전 영웅, 세 공화국 당 제1서기로 공업화·집단화를 추진했다

1933년 2월, 기칼로는 정치국에 보낸 서한에서 트락토로첸트르 체계의 '쿨라크 및 백위대 음모' 사건을 트로이카가 심리하게 해달라고 직접 요청했다 — 공화국 당수가 직접 숙청 가속을 청원한 장면이다.

오데사 출신 우크라이나인 볼셰비키로, 내전기 그로즈니 방어전(1918)을 지휘해 적기훈장을 받은 전쟁 영웅이다. 1929년부터 우즈베키스탄·아제르바이잔·벨로루시 세 공화국 당 제1서기를 연이어 맡아 공업화와 집단화를 추진했고, 벨로루시에서는 당원 수가 절반 가까이 줄 만큼 대대적 숙청을 주도했다. 1934년 중앙위 후보위원이자 NKVD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에 가담했으나,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총살당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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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티플리스 군의학교 졸업, 제1차 세계대전 위생병 복무, 게오르기 십자훈장 수훈
  • 1917–1918RSDLP(b) 입당, 그로즈니 시당위원장 겸 집행위원장, 그로즈니 방어전 지휘, 적기훈장 수훈
  • 1919–1921카프카스 지방위원, 테레크·다게스탄 반란군 사령관, 페르시아 적군 사령관
  • 1921–1927고르스키 주당위 책임서기, 남동부 중앙위 뷰로 위원, 북카프카스 지방위 선전부장·서기·제2서기
  • 1927–1930중앙아시아 뷰로 조직부장,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제1서기(1929),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1서기(1929–1930)
  • 1930–1932중앙위 조직지도부 부부장, 모스크바 주·시 당위원회 서기
  • 1932–1937벨로루시 공산당 제1서기, 중앙위 후보위원(1934–1937), NKVD 트로이카 참여
  • 1937–1938하리코프 주·시 당위원회 제1서기, 체포(1937.10.11), 총살(1938.4.25), 1955년 복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