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12월, 야코블레프는 전체 농지의 '최소 3분의 1'을 1930년 봄까지 집단화하자고 제안했다. 스탈린은 지나치게 신중하다며 기각했고, 야코블레프는 그대로 물러서 상향된 강행 일정을 충실히 집행했다.
본명 예프스타인. 1913년 볼셰비키 입당, 혁명 후 우크라이나에서 당 활동을 이끌었다. 1923년부터 『농민신문』 편집장을 맡아 농촌 문제 전문가로 부상했고, 1929년 초대 소련 농업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정치국 집단화 위원회를 주도했다. 1930년 1월 5일 포고령을 기초해 주요 곡창지대의 강제 집단화 일정과 '부농 계급 청산' 정책을 설계했으며, 트로핌 리센코를 발탁해 소련 생물학의 반과학적 전환에도 관여했다. 대숙청 중 체포되어 1938년 처형되었다.
부하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자디드 개혁운동에서 소비에트 우즈베키스탄의 초대 총리가 된 중앙아시아 혁명가
러시아 외교관 알렉산드르 바르민의 회고: 「'우즈베크의 레닌'이라 불린 호자예프는 왜소하고 마른 체구였으나 엄청난 에너지로 가득했다. 말라리아로 얼굴이 푸르스름해질 때도 있었지만, 엄청난 업무 속에서도 즐겁게 웃을 줄 알았다. 그는 자기 민족을 알았고 뛰어난 연설가였으며 깊이 사랑받았다.」
부하라의 부유한 상인 가문 출신으로, 11세에 모스크바로 유학하여 전통사회와 근대 유럽의 간극을 체험했다. 1916년 범튀르크주의 자디드 운동에 합류, 청년 부하라당을 창당했고 1918년 토후 전복 시도 실패 후 사형 선고를 받고 타슈켄트로 도피했다. 1920년 부하라 인민소비에트공화국 인민나지르회의 의장이 되었고, 1924년 우즈베크 SSR 수립과 함께 초대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중앙아시아의 국가 획정과 소비에트 연방 편입을 이끌었다. 1930년대 스탈린의 목화 단작 정책에 반대하다 몰락, 1937년 체포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 선고 후 총살되었다.
1917년 12월 기마 유격대원으로서 그는 러시아 육군 마지막 총사령관 두호닌 장군의 거처 점거에 가담했고, 두호닌은 얼마 뒤 병사들에게 살해됐다.
예브도키모프가 1934년 국가정치국 안의 '자기 사람'으로 거명한 '북캅카스파' 체키스트로, 1936년 여름부터 체첸(체첸-인구시)의 NKVD를 맡았다. 쿨라크 작전에서 평균을 웃도는 숫자를 제안한 지역 책임자 가운데 하나로 나우모프의 명단에 오르내린다. 극동 개편 뒤인 1938년 8월 국가보안소령으로 연해주 NKVD 국장이 되었으나, 예조프 몰락과 함께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보급로가 끊긴 뒤에도 철수 허가를 받지 못한 그는 사단 일부를 이끌고 얼어붙은 키안타야르비호를 건넜다.
안드레이 젤렌초프는 제정 러시아군 장교 출신으로 붉은 군대에 합류해 내전과 군 조직 개편을 거친 직업군인이었다. 겨울전쟁에서 제163소총사단을 이끌고 수오무살미를 점령했지만, 보급로가 끊기며 사단이 소련군 최초의 포위망에 갇혔다. 그는 철수를 요청했으나 허가받지 못했고, 결국 사단 일부를 이끌고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 국경으로 빠져나왔다. 이후 제88소총사단을 지휘했으며 1941년 카렐리야 전선에서 전사했다.
1943년 수용소 업무평가서는 그를 모범적인 행정십장으로 적고 수감 기간 3년 단축을 청원했다.
국경수비대 출신의 NKVD 여단장으로 1937년 4월부터 1938년 9월까지 국가보안총국 작전서기를 맡아 제00447호를 비롯한 예조프의 대숙청 작전명령 사본에 인증 서명을 했다. 프리놉스키의 심복으로 베리야 아래에서 한 달 비서실장을 지낸 뒤 1939년 체포되어 15년형을 받고 1945년 크라스노야르스크의 수용소에서 죽었다.
1941년 가을, 포로가 된 그는 독일 당국에 적군 후방의 '철도·창고 등'을 타격하여 보급과 지휘를 마비시킬 부대의 창설을 제안했다.
트루힌은 러시아 제국군 장교 출신으로 적군에서 경력을 쌓아 군사교육과 참모 업무를 맡은 장군이었다.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 때 발트 군관구와 북서전선의 작전 지휘 체계에서 복무했으나, 전선 후퇴 중 포로가 되었다. 그는 포로 상태에서 독일 당국과 협력하고 블라소프의 러시아 해방군 및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 군사조직의 참모장으로 활동했다. 전쟁 뒤 소련에 넘겨져 반역죄로 처형되었으며, 그의 이력은 전문 군사 관료의 지식이 독일 점령전과 반소 무장 프로젝트에 전용된 사례를 보여준다.
1917년 10월 오데사에서, 페도렌코가 이끄는 수병 부대가 오데사 군관구 사령부를 점령하고 도시에 소비에트 권력을 세웠다.
야코프 페도렌코는 소련의 군사 지휘관으로, 1940년부터 1947년까지 붉은 군대의 주자동차장갑전차총국(GABTU)을 이끌며 대조국전쟁 전 기간 동안 소련 기갑·기계화 부대의 건설과 전투 운용을 총괄했다. 1941년 7월 국방 인민위원으로 임명되어 전차 생산과 보급을 직접 조율했으며,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 전투에서 최고사령부 스타프카 대표로 파견되었다. 전쟁 중 149차례 스탈린의 집무실로 불려간 최고 지휘부의 핵심 군사 고문으로, 1944년 2월 로트미스트로프와 함께 소련 최초의 기갑군 원수가 되었다. 흑해 함대 수병으로 10월 혁명에 참가했고 내전 시기 장갑열차를 지휘했으며, 1947년 사망하여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1947년 9월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세계 정치 세력이 '제국주의·반민주 진영'과 '반제국주의·민주 진영'으로 나뉘었다고 선언하며 냉전기 소련의 공식 세계관을 정식화했다.
스탈린의 최측근으로 1934년 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에 올랐고, 대숙청 시기 정치국원으로 176건의 사형 명단을 직접 승인했다. 1989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 결정은 그를 1930~40년대 대량 탄압의 조직자 중 한 사람으로 규정했다. 전후 당내 2인자로 부상하여 1946년부터 문학·음악·철학을 강타한 즈다노프시나를 주도했고, 1947년 코민포름 창설을 조직하며 '두 진영' 세계관을 정식화했다. 1948년 6월 스탈린의 신임을 잃었고 8월 31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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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s니즈니노브고로드 당 조직에서 성장, 스탈린파 지방 간부로 부상
1934–1945키로프 피살 뒤 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 도시와 당 조직 장악 (1945년 1월 쿠즈네초프에게 이양)
베리야가 예조프를 대체하며 예조프 측근들을 차례로 체포할 때, 체르니셰프만은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굴라그 국장을 겸임하라는 임무를 받고 2년간 수용소 체제 전체를 지휘했다.
1937년부터 1952년 사망까지 15년간 내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을 지낸 국가보안 간부로, 예조프 휘하의 부인민위원 가운데 유일하게 숙청을 피한 인물이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굴라그 국장을 겸임하며 수용소 체제를 총괄했고, 전시에는 발트 3국 강제이주 작전의 실무를 지휘했다. 전후에는 원자력 프로젝트 건설을 감독하며 굴라그 노동력을 핵시설 공사에 동원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1930년 헨리 포드와의 오찬에서: "나는 공업자가 아니라 인민의 하인입니다. 디렉터 자리는 세습이 아닌 우리 당의 의지로 받은 것입니다."
툴라 농민의 아들로 푸틸로프 공장 견습공에서 출발해 소련 자동차 대량생산 체제를 세운 산업 조직자. 1926년 모스크바 자동차 공장(AMO, 후일 ZIS) 디렉터로 부임해 낙후된 소규모 공장을 유럽 최대 자동차 생산기지로 키웠고 소련 최초의 컨베이어 조립을 도입했다. 대조국전쟁 중 공장을 동부로 대피시켜 4개 도시에 새 공장을 세우면서도 전선에 트럭과 무기를 끊임없이 공급했으며, 1949년 생산 중단 없는 신모델 전환 공법으로 스탈린상을 받았다. 사후 그가 키운 공장은 ZIL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세바스토폴 함락 직전, 도시의 수비병들을 구하지 못한 절망에 페트로프는 권총을 들어 자결하려 했다. 장교들이 달려들어 그의 손에서 무기를 빼앗았다. 그는 잠수함으로 철수한 뒤 다시 전선으로 돌아갔다.
이반 페트로프는 대조국전쟁 최대의 방어전 두 곳인 오데사(1941)와 세바스토폴(1941~1942)을 지휘한 소련군 대장이다. 중앙아시아 바스마치 토벌로 군 경력을 쌓았고, 프리모르스크 군 사령관으로 흑해 방어전을 이끌었다. 북캅카스 전선군 사령관으로 타만 반도와 케르치-엘티겐 상륙작전을 성공시켰으며, 제2벨로루시·제4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지휘해 카르파티아를 넘었다.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 참모장으로 베를린·프라하 작전을 수행해 소련영웅이 되었다. 메흘리스와 스탈린에 의해 두 차례 강등되었으나 매번 재기용될 만큼 대체 불가능한 작전 능력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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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18알렉세옙스크 사관학교 졸업, 제156예비보병연대 반중대장(준위), 건강 악화로 제대
1918–1922적군 입대·RKP(b) 가입, 내전에서 사마라·우랄·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참전, 제17기병사단 군정위원
1922–1940중앙아시아 군관구에서 바스마치 토벌, 제1투르키스탄 산악소총사단장, 타슈켄트 보병학교장, 소장 진급
1941.7–10제25차파예프 소총사단장 → 프리모르스크 군 사령관 — 오데사 방어전과 철수 지휘
1941.10–1942.7세바스토폴 방어구역 부사령관 겸 프리모르스크 군 사령관, 만슈타인의 3차 공세까지 250일 방어
1942.8–1943.11제44군 사령관 → 흑해집단군 사령관 → 북캅카스 전선군 사령관 — 캅카스 방어·타만 해방·케르치-엘티겐 상륙작전
1944.3–1945.3제33군 사령관 → 제2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 → 제4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 — 대장 진급 후 강등, 재진급
1945.4–5제1우크라이나 전선군 참모장 — 베를린·프라하 작전, 소련영웅 수훈
1945–1958투르키스탄 군관구 사령관, 소련군 총감찰부 제1차장, 지상군 제1부총사령관, 국방부 총감찰관
그는 상황을 속속들이 알면서도 스타브카 보고 때마다 2~3시간씩 준비했다 — 부하 장군 시테멘코의 회고
소련군 총참모장(1945~1946)이자 바르샤바조약기구 합동군 초대 참모장(1955~1962). 1942년 12월 작전국장으로 기용된 이후 쿠르스크, 바그라티온,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작전에 이르기까지 소련군의 모든 주요 전략작전 입안을 실무적으로 지휘했다. 야전사령관이 아닌 참모장교로서 전쟁의 실질적 설계자 역할을 수행했으며, 스탈린의 크렘린 집무실을 그 누구보다 자주 드나들며 직접 작전을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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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18제국 러시아군 소위; 남서전선에서 참전해 부상, 성 안나 훈장 수여
1919–1922붉은 군대 남북전쟁 참전: 사단 부참모장에서 여단 참모장; 시바시 도하·크림 작전
1928–1937프룬제 군사아카데미 → 작전학부 → 참모아카데미 수료; 모스크바 군관구 참모장
체포된 블라시크는 "나를 체포했다면, 곧 스탈린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한 달 반 뒤 스탈린은 죽었다.
벨라루스 농민 출신으로, 1931년부터 1952년까지 25년간 스탈린의 개인 경호를 책임지며 소련 지도자의 신변 안전과 모든 별장·관저를 총괄했다.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사후 스탈린의 자녀들을 사실상 양육했고, 경호 업무를 넘어 스탈린 가문의 집사 구실까지 했다. 중장까지 진급하고 레닌 훈장 3개와 쿠투조프 1급 훈장을 받았으나, 1952년 말 의사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실각했다. 1955년 유죄 판결로 계급과 훈장을 박탈당했으며, 사후 2000년이 되어서야 러시아 대법원에 의해 무죄가 확정되었다.
1939년, NKVD는 그를 감옥 뜰로 끌어내 총성을 울렸다. 빈 총성이었다. 고문으로 이가 아홉 개 부러지고 갈비뼈 세 대가 부러졌으나 허위 자백을 거부했다. 석방 후에는 파울루스에게서 빼앗은 작은 권총을 늘 지녔다.
폴란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크사베리 로코소프스키(1853~1902)는 철도 검사로 일하다 사고로 죽었고, 그는 일찍 고아가 되어 제과점과 치과 조수,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1914년 8월 5 카르고폴 용기병연대에 자원입대해 게오르기 십자훈장 4급을 받았고, 1917년 10월 붉은 근위대에 들어갔다. 내전에서 기병대를 지휘했고 1919년 당에 입당했다. 1937년 8월 17일 체포되어 레닌그라드 슈팔레르나야의 감옥에 1940년까지 갇혀 고문당했으나 거짓 자백을 거부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를 지휘하고 바그라티온 작전을 입안했으며, 소련 원수(1944)와 폴란드 원수(1949)를 겸한 유일한 인물이다. 1968년 사망했다.
1945년 5월 9일 0시 43분 모스크바 시각, 베를린 카를스호르스트에서 주코프는 소련 대표로 독일의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이후 6월 24일 붉은광장에서 승리 열병식을 주관했다.
칼루가주 스트렐콥카의 가난한 러시아 농가에서 태어나 1915년 제정군에 징집되어 용기병 연대 하사관까지 올랐고, 1918년 붉은군대에 들어가 1919년 당에 입당했다. 내전에서 기병 지휘관으로 싸웠고 1939년 할힌골에서 관동군을 포위 격파해 소련 영웅이 되었다. 1941년 1월부터 참모총장을 지내다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방어를 지휘했고, 1942년 8월부터 최고부사령관 대리로서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베를린 공세를 이끌었다. 1945년 5월 카를스호르스트에서 독일의 항복을 받았으나, 1946년 전리품 사건으로 오데사, 1948년 우랄로 밀려났다. 1953년 국방차관으로 복귀해 베리야 체포에 가담했고, 1955년부터 국방장관을 지내다 1974년 사망했다.
스타프카는 1942년 6월 8일 그를 해임하며 "서류 중심의 관료적 부대 관리와 부대와의 단절로 제2충격군의 통신선이 차단되어 예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빠뜨렸다"고 적었다.
미하일 호진은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적군에 들어가 내전을 치렀다. 1938년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1939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을 거쳐, 독소전 발발 후 주코프를 따라 레닌그라드 전선으로 가 참모장과 제54군 사령관을 겸임했다. 1941년 10월 주코프가 떠난 뒤 레닌그라드 전선 사령관이 되어 첫 봉쇄 겨울의 방어와 티흐빈 공세를 지휘했으나, 1942년 6월 제2충격군을 포위에서 구출하지 못한 책임으로 해임되었다. 이후 제33군, 제20군 사령관 등 현장 지휘를 거쳐 전후에는 군사교육 기관을 이끌었다.
1927년 독일의 보덴슈타인이 제자들의 인 산화 실험 데이터를 신뢰할 수 없다고 일축하자, 세묘노프는 오히려 그것이 미지의 현상임을 직감하고 실험을 재현하여 분지연쇄반응을 발견했다.
소련 화학물리학의 창시자이자 연쇄반응 이론을 확립한 물리화학자였다. 1928년 분지연쇄반응을 발견하여 연소·폭발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고, 이 공로로 1956년 시릴 힌셜우드와 함께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1931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화학물리학연구소를 설립하여 55년간 소장으로 이끌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연소·폭발 연구로 소련 원자폭탄 계획에 기여했다. 과학아카데미 부총재(1963~1971)와 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 공동설립자로서 소련 과학 행정의 제도적 틀을 설계한 조직가이기도 했다.
1937년 7월 8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그로즈넨스키 라보치」의 부고는 그가 '잠깐의 병을 앓다 심장파열로 사망'했다고 알렸다.
우크라이나 체카 방첩부에서 니콜라예프-주리드, 다긴 등과 함께 복무를 시작해 1923년 예브도키모프를 따라 북캅카스로 옮겨 간 '북캅카스파' 체키스트다. 1936년 여름 카루츠키의 후임으로 서시베리아 변경주 NKVD 국장이 되었고, 몇 달 뒤 모스크바 중앙 기구로 불려 올라가 국가보안총국 비밀정치부장과 방첩부장을 거쳐 내무 부인민위원까지 올랐다. 1937년 7월 2일 수훈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나 며칠 뒤 권총 자살했으며, 나우모프는 이를 경력이 상승하던 때에 일어난 죽음으로 특기한다.
1929년, 프리마코프는 튀르크 장교 '라기브 베이'로 위장하고 아프간 군복을 입은 2천 기병을 이끌고 국경을 넘었다. 서방은 그를 '붉은 로렌스'라 불렀다.
비탈리 프리마코프는 적군(赤軍)의 군사 지휘관으로, 우크라이나에서 붉은 카자크(Червонное казачество) 부대를 창설해 남북전쟁에서 14차례의 후방 급습과 60회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929년에는 '라기브 베이'라는 가명으로 아프간 군복을 입고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을 지휘하여 서방에서 '붉은 로렌스'라 불렸으며,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일본에서 무관으로 복무했다. 1936년 체포되어 1937년 6월 투하쳅스키 등과 함께 '트로츠키주의 반소비에트 군사조직' 사건으로 사형당했고, 1957년 복권되었다. 마야콥스키의 연인으로 유명한 릴리야 브릭의 세 번째 남편이기도 하다.
1937년 1월 인구총조사 결과가 크렘린에 도착했을 때, 크라발의 통계는 스탈린이 선전해온 인구 성장 신화를 숫자로 깨뜨렸다. 불과 4개월 후 그는 체포되었다.
라트비아 출신 소련 경제학자이자 통계학자로, 노동경제학 박사. 고스플란 부의장 겸 중앙국민경제회계국(TSUNKHU) 국장으로서 1937년 전연방 인구총조사를 주관했다. 집단화와 기근으로 인한 인구 손실을 반영한 낮은 수치가 정치 지도부의 분노를 샀고, 이는 그의 몰락으로 직결되었다. 그가 수립한 통계 방법론은 소련 계획경제의 기초 통계 인프라를 형성했다.
1933년 2월, 기칼로는 정치국에 보낸 서한에서 트락토로첸트르 체계의 '쿨라크 및 백위대 음모' 사건을 트로이카가 심리하게 해달라고 직접 요청했다 — 공화국 당수가 직접 숙청 가속을 청원한 장면이다.
오데사 출신 우크라이나인 볼셰비키로, 내전기 그로즈니 방어전(1918)을 지휘해 적기훈장을 받은 전쟁 영웅이다. 1929년부터 우즈베키스탄·아제르바이잔·벨로루시 세 공화국 당 제1서기를 연이어 맡아 공업화와 집단화를 추진했고, 벨로루시에서는 당원 수가 절반 가까이 줄 만큼 대대적 숙청을 주도했다. 1934년 중앙위 후보위원이자 NKVD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에 가담했으나,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총살당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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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1917티플리스 군의학교 졸업, 제1차 세계대전 위생병 복무, 게오르기 십자훈장 수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