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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지휘 인물 424명

파보 탈벨라

Paavo Talvela
군사·지휘 핀란드 국가기관 핀란드 핀란드인 1897–1973 ○ 자연사

만네르헤임의 베를린 밀사로 핀란드와 독일의 군사 협력을 매듭지은 예거 장군

1944년 휴전 후 힘러가 핀란드 무장 저항을 이끌어 달라고 요청하자, 탈벨라는 '만네르헤임 원수의 명령이 있을 경우에만' 응하겠다고 답했다.

핀란드 예거 운동으로 군에 입문한 탈벨라는 겨울전쟁에서 톨바얘르비 전투의 첫 승리를 지휘하며 장군으로 급부상했다. 1940년 가을 만네르헤임의 개인 대리인으로 베를린에 파견되어 독일 참모본부와 핀란드군의 비밀 군사 협력을 협상했고, 이는 계속전쟁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고리가 되었다. 전후 사업가와 헬싱키 시의원으로 활동했으며, 두 번째 만네르헤임 십자장 수훈자로서 1966년 보병대장으로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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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예거 지원병, 제27프로이센 예거대대
  • 1918백군 대대장, 핀란드 내전; 소령
  • 1919–1922아우누스 원정군 총사령관; 비에나 원정군 대대장
  • 1926–1927사보 예거연대장
  • 1939.12–1940.04탈벨라 전단장(톨바얘르비 승리), 이어 제3군단장; 소장
  • 1940.09만네르헤임의 개인 대리인으로 베를린 파견, 독일-핀란드 군사 협력 협상
  • 1941.06–1942.01제6군단장, 카렐리야군; 만네르헤임 십자장 수훈(1941.8.3)
  • 1942–1944독일 최고사령부 주재 핀란드군 대표; 중장; 1944년 아우누스 전단 사령관

시프리아노 메라

Cipriano Mera Sanz
군사·지휘 스페인 공화파 스페인 스페인 1897–1975 ○ 사망

카사도의 마드리드 쿠데타를 공산군의 반격에서 구한 아나키스트 제4군단장

「군복을 입는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다. 이제부터 내 행동이 내 성실함을 증명할 것이다」

마드리드 출신의 벽돌공으로 CNT 건설노조를 이끌다 내전 직전 투옥되었고, 반란 발발과 함께 풀려나 과달라하라·쿠엥카에서 봉기를 진압하는 종대를 조직했다. 제14사단을 거쳐 제4군단장이 된 그는 과달라하라 전투에서 이탈리아 지원군단을 격퇴하며 공화국 진영에서 손꼽힌 아나키스트 지휘관이 되었다. 1939년 3월 네그린 정부의 공산당 의존에 반발해 카사도의 쿠데타를 지지했고, 공산군이 마드리드를 장악해 가던 순간 메라의 제4군단 예비대가 시내로 진입해 3일 만에 저항을 분쇄함으로써 전쟁의 종결 경로를 결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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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CNT 마드리드 건설노조 서기
  • 1936.07민병 종대 조직, 과달라하라·쿠엥카 탈환
  • 1936.11–1937제14사단장
  • 1937–1939제4군단장
  • 1939.03카사도 쿠데타 지지, 마드리드에서 공산군 저항 분쇄
  • 1939–1942오랑·카사블랑카 망명 후 비시정권에 의해 스페인 송환
  • 1946–1975출소 후 프랑스 재망명, 파리에서 벽돌공으로 일함

루시우스 D. 클레이

Lucius D. Clay
군사·지휘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97–1978 ○ 폐기종

서베를린 봉쇄에 공수로 맞서 324일을 버텨낸 미군 지구 군정장관

봉쇄 하루 만인 1948년 6월 25일, 클레이는 트루먼의 공식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공수 작전을 스스로 명령했고, 살아남은 베를린 시민들은 그를 '도시의 아버지'라 부르며 무덤에 '우리 자유의 수호자'라는 감사 비문을 새겼다.

그루지야 출신의 공병 장교로, 전시 보급 지휘로 두각을 나타낸 뒤 1947년 점령 독일 미군 지구 군정장관이 되었다. 1948년 소련이 서베를린을 봉쇄하자 무력 호송대 대신 공수를 택해 직접 명령을 내렸고, 베를린 방위가 곧 미국의 명예이자 서유럽의 운명이라고 주장하며 324일의 공수를 끝까지 이끌었다. 1949년 퇴역한 뒤 사업가와 역대 대통령의 고문을 지냈고, 1961년 베를린 장벽 위기 때 케네디의 특사로 돌아와 체크포인트 찰리의 미군 전차를 소련 전차와 대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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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그루지야주 메리에타에서 알렉산더 스티븐스 클레이 상원의원의 아들로 출생
  • 1918웨스트포인트 졸업, 공병 장교로 임관
  • 1942최연소 준장으로 승진, 아이젠하워 휘하 물자국장
  • 1945–1946아이젠하워 부관, 독일 연합군 정부 부군정장관
  • 1947–1949미군 지구 군정장관 겸 유럽 주둔 미군 사령관
  • 1948.06.25베를린 공수 작전 개시 명령
  • 1949–1962퇴역, 컨티넨털 캔 사 회장
  • 1961–1962케네디의 베를린 특사, 체크포인트 찰리 미소 전차 대치

이반 흐리스토포로비치 바그라먄

Иван Христофорович Баграмя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아르메니아 1897–1982 ○ 자연사

비슬라브 최초의 전선군 사령관, 바그라티온에서 발트까지

1944년 여름, 부대가 발트해에 닿자 바그라먄은 스탈린에게 발트해 물 한 병을 보냈다. 독일군이 해안을 되찾는 사이 병이 크렘린에 도착하자 스탈린은 말했다. "돌려주시오. 바그라먄 동무가 직접 따라 부을 수 있게."

아제르바이잔 출신 아르메니아인으로 비슬라브인 최초 소련 전선군 사령관.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습지 돌파로 독일 북부집단군을 쿠를란트에 고립시켰다. 소련원수, 두 번의 소련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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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7러시아 제국군 자원입대, 캅카스 전선 페르시아 원정, 소위
  • 1918–20아르메니아군에서 튀르크군과 교전, 중대장·기병대대장, 중위
  • 1920–34붉은군대 합류, 기병연대장, 고급기병학교·프룬제 아카데미 졸업
  • 1934–40키예프군관구 기병사단 참모장, 참모아카데미 졸업 후 교관
  • 1941–42남서전선 작전참모 — 키예프 방어, 로스토프 반격, 하리코프 공세
  • 1942–4316군·11근위군 사령관 — 지즈드라, 오룔 반격에서 독일 방어 돌파
  • 1943–451발트전선군 사령관 — 바그라티온, 메멜, 쾨니히스베르크 함락
  • 1945–55발트군관구 사령관, 소련원수, 국방차관
  • 1956–68참모아카데미 원장, 국방차관 겸 후방총국장

파벨 이바노비치 바토프

Павел Иванович Бат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7–1985 ○ 자연사

65군을 이끌고 스탈린그라드에서 베를린까지 진격한 도하 작전의 명수

'적은 기술적으로 쳐부숴야 하며, 그것은 곧 적은 피로 싸운다는 뜻이다'라는 바토프의 원칙

러시아 제국 야로슬라블현 필리소보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열세 살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하며 독학했다. 1915년 제정군에 징집되어 근위 3소총연대 정찰대를 지휘하고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두 번 받았으며, 1918년 붉은군대에 들어가 내전을 거친 뒤 1929년 당에 입당했다. 1936~1937년 스페인 내전에 '파블로 프리츠'라는 가명으로 참전해 공화파 군사고문을 맡았고, 1942년부터 종전까지 65군을 지휘하며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바그라티온·비스와-오데르 작전을 수행했다. 전후 바르샤바조약기구 합동군 참모총장을 지냈고 카르파티아 군관구 재임 중이던 1956년 헝가리 사건 진압에 참여했으며, 1970~1981년 소비에트 전쟁참전용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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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71차대전, 제국육군 정찰대 지휘, 게오르기 십자훈장 2회
  • 1918–21붉은군대 내전, 기관총 소대장→중대장
  • 1936–37스페인 내전, 공화파 군사고문 (가명 파블로 프리츠), 중상
  • 1939–403소총군단장, 폴란드 진주·핀란드 전역
  • 1941–4251군 부사령관→사령관(크림), 3군 사령관(브랸스크 전선)
  • 1942–4565군 사령관: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바그라티온·비스와-오데르·베를린
  • 1955–62카르파티아·발트 군관구 사령관, 남부군집단 사령관
  • 1962–65바르샤바조약기구 합동군 참모총장 (소련군 제1부참모총장 겸임)
  • 1970–81소비에트 전쟁참전용사위원회 위원장

예젠잉

叶剑英
군사·지휘 중국 중국 1897–1986 ○ 자연사

황푸의 교관에서 원수까지, 1976년 4인방 체포를 조직해 문화대혁명을 끝낸 군인

1976년 10월 6일, 원로 장군들을 이끌고 4인방 체포를 명령해 문화대혁명을 끝냈다.

광둥 하카 출신으로 황푸군관학교 교관을 지내고 1927년 입당해 광저우 봉기에 참여했다. 대장정에서 참모장으로 장궈타오의 분열 기도를 마오에게 알렸고, 항일전쟁기와 국공내전기 참모장·베이핑 접수 책임자였다. 1955년 원수가 되었고 문화대혁명 중 「2월 역류」로 비판받았으나 살아남아 린뱌오 사후 군을 맡았다. 마오 사후 1976년 10월 화궈펑·왕둥싱과 함께 4인방 체포를 결정·집행했고, 1978년 덩샤오핑 복권을 지지했다. 1978~1983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으로 국가원수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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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중화인민공화국 원수
  • 1975–1978국방부장
  • 1978–1983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알렉세이 파블로비치 판필로프

Алексей Павлович Панфил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8–1966 ○ 자연사

화학전 정보로 처칠을 움직인 GRU 국장, 베를린까지 진군한 전차군 중장

1942년 초, 판필로프는 스탈린에게 「독일 파시스트군의 화학 공격 준비 지속에 관하여」라는 특별 보고를 올렸다. 이 보고는 처칠이 라디오 연설을 통해 베를린에 가스전의 대가를 공개 경고하게 만든 외교적 연쇄 반응을 촉발시켰다.

1918년 붉은 군대와 볼셰비키 당에 입당하여 동부전선에서 정치위원으로 내전을 치렀다. 기갑부대로 전환해 1937년 기계화·차량화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1938년 하산 호에서 제2기계화여단을 지휘했다. 1941년 7월부터 1942년까지 GRU 국장으로서 전쟁 최대 위기 속 소비에트 군사정보를 지휘했고, 1942년 초 독일 화학전 준비 보고로 처칠의 공개 경고를 이끌어냈다. 안데르스군 이탈 후 전선으로 복귀해 제3근위전차군단을 이끌고 동포메라니아와 베를린 공세에서 독일 제2군을 격멸,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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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22붉은 군대 자원입대, 제5군에서 내전 참전 (동부전선, 콜차크군 상대)
  • 1922–26기병연대 정치위원 → 시베리아 군관구 정치국 근무 → 프룬제 사관학교 고위지휘관 과정 졸업
  • 1927–31제5기병여단 정치부장 겸 군정위원 → 레닌그라드 군관구 군검찰 보좌관
  • 1931–37군사기술아카데미 입학 → 기계화·차량화 군사아카데미 지휘학부 졸업
  • 1937–40기갑시험장 군정위원 → 기갑총국 부국장 → 제2기계화여단장(하산 호) → 정보총국(GRU) 부국장
  • 1941–42GRU 정보총국장 대행(7~9월) → 정식 국장(10월~) 겸 참모본부 부총장 겸 안데르스군 편성 전권위원
  • 1942–43제3전차군 부사령관(코젤스크) → 제5전차군 부사령관(보로실로브그라드)
  • 1943–44기갑·기계화군 총국 제2부국장 → 제6근위전차군단장(키예프·지토미르)
  • 1944–45제3근위전차군단장 — 동포메라니아·베를린 공세, 그디니아-단치히 독일 제2군 격멸, 소비에트연방영웅
  • 1945–51제3근위전차사단장 → 기갑군사아카데미 공병전술학부장 → 외국군 장교 교육학부장
  • 1952–53북부군관구 기갑·기계화군 사령관
  • 1954–59참모본부 아카데미 고위과정 졸업 → 동 아카데미 교관·전술학부 부장, 1959년 11월 예편

로디온 야코블레비치 말리놉스키

Родион Яковлевич Малиновский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898–1967 ○ 자연사

원수이자 1957–1967년 국방장관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 그는 스스로의 판단으로 제2근위군을 멈춰 세워 200km 행군 뒤 진지에서 곧바로 만슈타인의 구원군에 맞서 싸우게 했다. 독일군의 돌파는 저지되었고, 이 결정은 코텔니코보 작전과 스탈린그라드 승리에 큰 몫을 했다.

오데사의 사생아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우크라이나 농민 출신이고 아버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열한 살에 집을 떠나 머슴과 점원으로 일하며 프랑스어를 독학했고, 1914년 열여섯도 되기 전에 나이를 속이고 입대했다. 기관총수로 복무하다 부상했고 프랑스 전선에서 싸워 프랑스 무공십자훈장을 받았다. 간첩 혐의로 총살될 뻔한 뒤 1919년 11월 적군에 들어갔다. 프룬제 군사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말리노 대령'이라는 가명으로 스페인에서 군사고문으로 일했으며, 이후 원수가 되어 스탈린그라드, 우크라이나, 발칸, 만주 전역을 지휘한 2차대전 최고의 야전사령관 중 한 사람이었다. 1957년부터 죽을 때까지 국방장관으로서 전략 핵무장을 추진하고 당의 지시에 따라 군을 대폭 축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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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9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 참전, 적군 지휘관으로 성장
  • 1942–1943스탈린그라드 반격과 남부전선 작전에서 핵심 지휘관으로 부상
  • 1944–1945우크라이나·루마니아·헝가리·만주 작전 지휘
  • 1956–1957국방부 차관 겸 육군총사령관, 1956년 11월 헝가리 봉기 진압에는 참여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음
  • 1957–1967국방장관, 핵·미사일 시대 소련군을 관리

니콜라이 드미트리예비치 야코블레프

Николай Дмитриевич Яковле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8–1972 ○ 자연사

전시 내내 포병을 책임지고 로켓 시대를 연 군수 원수

1941년 6월 22일 아침, GAU 청사에서 사무실 열쇠를 받는 순간 독일군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대조국전쟁 전 기간 동안 포병총국(GAU)장으로서 적군의 포병 보급·개발·편제를 총괄하고 스탈린에게 140회 호출된 포병원수. 종전 후 독일 V-2 시설을 조사하고 GAU 내 로켓국을 창설했으며, 1948년 R-1 탄도미사일 첫 발사 국가위원회 위원장으로 소련 로켓 개발의 기초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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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20제국군 징집 → 붉은군대 입대; 제1차 세계대전·내전 참전, 페트로그라드 포병과정 졸업
  • 1920–193728산악사단 포대장·포병연대장 등 포병 지휘관 역임, 고등포병학교 졸업(1924)
  • 1937–1941벨로루시아·북카프카스·키예프 특별군관구 포병사령관; 폴란드 원정·겨울전쟁 참전
  • 1941–1948포병총국(GAU)장; 포병원수 진급(1944); 전시 내내 포병 보급·개발 총괄
  • 1948–1952군무차관; S-60 대공포 결함으로 1952년 2월 체포·계급 박탈
  • 1953–1960복권(1953.4); 방공군 제1부사령관 겸 제1부총사령관; S-25 위원장; ABM 서한 공동서명
  • 1960–1972국방부 감찰장단 감찰고문; 회고록 『Об артиллерии и немного о себе』

마트베이 바실리예비치 자하로프

Матвей Васильевич Захар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8–1972 ○ 자연사

전격전을 예견하고 오데사 군관구를 구한 참모, 냉전 소련군의 총참모장

1941년 6월 21일 밤, 오데사 군관구 참모장 자하로프는 흑해함대로부터 적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받았다. 상부 승인 없이, 그는 관구 전 부대에 전투경계태세 돌입과 항공기의 야전비행장 분산을 명령했다. 새벽에 전쟁이 터졌을 때, 오데사 군관구는 붕괴를 면한 유일한 국경 군관구였다.

트베리 농민 출신으로 1917년 겨울궁전 습격에 참가한 적위대원에서 소련군 총참모장까지 오른 원수. 코네프·말리놉스키 휘하 참모장으로 코르순-셰브첸콥스키 포위전과 야시-키시네프 공세 등 주요 작전을 기획했다. 1960년대 총참모장으로 핵·미사일 시대 소련군의 전략 현대화를 지휘했으며, 흐루쇼프와의 충돌로 1963년 경질되었다가 그가 실각하자 복귀했다. 군사이론 교수이자 다수의 전략 저작을 남긴 학자-군인으로, 1917년 혁명에 참가한 마지막 현역 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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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적위대원으로 겨울궁전 습격, 볼셰비키 입당
  • 1918–1921적군 포병 지휘관으로 내전 종군, 차리친 전투 참가
  • 1924–1937프룬제 사관학교·참모아카데미 졸업, 벨라루스 군관구 작전과장
  • 1938–1940적군 참모부 부참모장
  • 1940–1941오데사 군관구 참모장 — 6월 21일 자발적 경계태세 명령
  • 1941–1944칼리닌·스텝·제2우크라이나 전선군 참모장, 주요 공세 기획
  • 1945자바이칼 전선군 참모장, 만주 전략작전 기획
  • 1945–1949고등군사아카데미 원장
  • 1949–1952참모부 부참모장 겸 정보총국(GRU) 국장
  • 1953–1957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 1957–1960주독 소련군 총사령관
  • 1960–1963소련군 총참모장 — 흐루쇼프와 충돌 후 경질
  • 1964–1971총참모장 재임명, 냉전기 전략 현대화 지휘

펑더화이

彭德怀
군사·지휘 중국 중국 1898–1974 ○ 옥사

대약진을 비판했다가 숙청된 중국 인민해방군 원수이자 한국전쟁 지휘관

'나는 하이루이(海瑞)가 되겠다!' — 1962년 마오쩌둥에게 제출한 8만 자 상소문에서, 황제에게 직언한 명나라 청렴 관리를 자처하며

중국 인민해방군 10대 원수 중 한 명으로, 한국전쟁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을 지휘했고 국방부장으로서 소련식 군대 개혁을 추진한 군사 지도자였다. 1959년 루산 회의에서 대약진의 실패와 기근을 마오쩌둥에게 서한으로 비판한 일로 '반당 집단' 수장으로 숙청되었고, 문화대혁명 시기 투옥·고문 끝에 1974년 옥사했으며 1978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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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국민당 군대에서 봉기, 홍5군 창설 후 징강산에서 마오·주더와 합류
  • 1930–1934홍3군단 사령관, 장시 소비에트 방어전 지휘
  • 1934–1935대장정 참가,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 지지
  • 1937–1940팔로군 부총사령관, 백단대전 총지휘
  • 1947–1949서북야전군 사령관, 옌안 방어 및 서북 5개 성 해방
  • 1950–1953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 겸 정치위원, 한국전쟁 지휘
  • 1954–1959국방부장, 중앙군사위 부주석; 소련식 군 현대화 추진
  • 1959루산 회의에서 대약진 비판 서한으로 숙청, 전직 박탈

게오르기 사모일로비치 이세르손

Георгий Самойлович Иссерсо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8–1976 ○ 자연사

종심작전 교리의 삼두정치를 완성한 군사 이론가. 그리고 버림받은 예언자

「전쟁은 일반적으로 선포되지 않는다. 이미 전개된 군대로 그냥 시작된다. 동원과 집중은 1914년처럼 전쟁 상태 발발 이후의 시기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에 은밀히 진행된다」 — 『새로운 투쟁 형태』(1940)

소련의 군사 이론가이자 군 장교로, 트리안다필로프투하쳅스키와 함께 종심작전(глубокая операция) 교리의 핵심 설계자 중 한 명이다. 그의 『작전술의 진화』(1932, 1937)는 전략과 전술 사이의 작전술을 체계화한 기념비적 저작이며, 참모 아카데미 작전술 학과장으로서 붉은 군대 지휘관 세대를 양성했다. 1940년 저서 『새로운 투쟁 형태』는 독일군의 전격전을 예리하게 분석하며 동원 없는 전쟁 개시를 예언했으나 스탈린 지도부는 외면했고, 이 책은 오늘날 게라시모프 doctrine에서 인용되며 재평가되고 있다. 1941년 6월 체포되어 사형 선고 후 10년형으로 감형, 카라간다 수용소에서 복역했으며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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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8준사관학교 졸업, 제1차 세계대전 참전; 1918년 여름 붉은 군대 자원입대
  • 1918–21제6군 정치부, 제159소총연대 군 정치위원, 제154소총연대 부지휘관
  • 1921–24붉은 군대 군사아카데미 졸업; 서부전선 참모부 정보부장 겸임 (1923–24)
  • 1925–30레닌그라드 군관구 작전부장 → 제10소총군단 참모장
  • 1930–33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수 → 작전학부장 (1932)
  • 1933–36제4소총사단장 (벨로루시 군관구), 1935년 콤브리그 계급 부여
  • 1936–39참모본부 제1부 부부장 → 참모 아카데미 군 작전학과장 → 작전술 학과장, 교수
  • 1939.12겨울전쟁 당시 제7군 참모장 (12월 17–30일), 콤디브 계급 (12.9)
  • 1940–41국방인민위원회 배속; 『새로운 투쟁 형태』 출간 (1940); 1941년 6월 7일 체포
  • 1942–55사형 선고 후 10년형 감형, 카라간다 교정노동수용소 복역; 만기 후 크라스노야르스크 유형
  • 1955–761955년 6월 복권, 대령 계급 회복 후 퇴역; 『군사사상』 편집부 근무, 저술 재개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비노그라도프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Виноград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9–1940 ✕ 처형

수오무살미 참패 후 사단 앞에서 총살된 제44사단장

재판은 50분 만에 끝났고, 1940년 1월 11일 비노그라도프는 참모장·정치부장과 함께 생존한 사단 병력 앞에서 총살되었다.

트베리 현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1919년 붉은 군대에 입대, 내전에서 콜차크·마흐노·브란겔과 싸웠다. 1939년 초 급격한 승진으로 제44소총병사단장이 되어 폴란드 침공을 거쳐 겨울전쟁에 투입되었고, 포위된 제163사단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고 라테 도로로 진격했다. 핀란드군의 모티 전술에 사단이 궤멸되자 지휘를 포기하고 탈출했으며, 50분간의 군사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아 1940년 1월 11일 생존 병력 앞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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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붉은 군대 입대, 동부전선에서 콜차크군과 교전 중 부상
  • 1920–1924보병 지휘 과정 수료, 소대장·중대장 보좌
  • 1924–1937제48소총병사단 내 중대장·연대학교장·연대 참모장 역임, 1936년 소령
  • 1937–1938제143소총연대장, 1938년 대령 진급
  • 1938–1939지휘관 예비역, 중국 특별 파견; 1939년 1월 콤브리그 진급
  • 1939.01–1940.01제44소총병사단장: 폴란드 침공, 겨울전쟁 라테 도로 전투
  • 1940.01.11제9군 군사재판소 사형 판결, 사단 앞에서 총살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말리닌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Малини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9–1960 ○ 자연사

로코솝스키의 불가분의 참모장, 위대한 공세의 기획자

1941년 여름, 폭탄 파편이 말리닌의 뒷머리와 목에 박혔다. 중상이었지만 그는 병원 후송을 거부하고 야전 사령부에 남았다. 로코솝스키는 후일 '전쟁 내내 나의 오른팔이었다'고 회고했다.

농민 출신 목수에서 붉은군대 최고의 참모 장교 중 한 명으로 성장한 말리닌은, 스몰렌스크 포위망의 절망적인 순간부터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바그라티온 작전의 승리까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참모장으로 복무했다. 로코솝스키가 지휘하고 말리닌이 치밀하게 계획한 이 긴밀한 동반 관계는 제16군, 돈·중앙·제1벨로루시 전선군 사령부를 소련 작전술의 모범으로 만들었다. 전후에는 소련군 독일주둔군 참모장, 지상군 주참모장을 거쳐 195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소련군 총참모부 제1부참모장으로 재직했으며, 1956년 헝가리 봉기 진압 작전 계획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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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붉은군대 입대, 내전 참전
  • 1931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기갑부대 근무
  • 1939–40제9군 작전처장으로 소련-핀란드 전쟁 참전
  • 1941–44로코솝스키 휘하 제16군·전선군 참모장;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바그라티온
  • 1945소련 영웅 칭호 수여; 독일주둔 소련군 참모장
  • 1948–50지상군 주참모장
  • 1953–60소련군 총참모부 제1부참모장; 1956년 헝가리 개입 계획

안드레이 그리고리예비치 크랍첸코

Андрей Григорьевич Кравченко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1899–1963 ○ 자연사

스탈린그라드에서 만주까지, 소련 최정예 전차군을 이끈 기갑사령관

1945년 8월, 크랍첸코의 제6근위전차군은 고비사막을 가로질러 3주도 안 되어 800킬로미터를 돌파하며 대싱안링 산맥을 넘어 만주 평원으로 쏟아져 내려왔다.

소련의 전차군 지휘관으로, 스탈린그라드 포위 고리를 닫은 제4전차군단을 지휘했고 쿠르스크와 드네프르에서 제5근위전차군단을 이끌었다. 1944년 제6전차군(이후 제6근위전차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코르순-셰우첸콥스키, 우만-보토샤니, 야시-키시네프, 부다페스트, 빈 공세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다. 1945년 8월 만주 전략공세작전에서 그의 군대는 고비사막과 대싱안링 산맥을 초고속으로 돌파하며 관동군을 분쇄하는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이 공로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전차병 대장까지 진급한 몇 안 되는 기갑지휘관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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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붉은군대 자원입대, 남북전쟁 참전 — 타라샤 연대, 제44소총병사단, 제60소총연대
  • 1923폴타바 보병학교 졸업
  • 1928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 1939–1940제173차량화소총사단 참모장, 소련-핀란드 전쟁 및 베사라비아 진주 참전
  • 1941–1942제31전차여단장 (모스크바 방어전), 제61군 전차병과 부사령관
  • 1942제1전차군단 참모장 → 제2전차군단장 (스탈린그라드)
  • 1942–1944제4전차군단장 → 제5근위전차군단장 (스탈린그라드 포위, 쿠르스크, 드네프르)
  • 1944–1947제6전차군 사령관 → 제6근위전차군 사령관 (코르순, 야시-키시네프, 부다페스트, 빈, 만주)
  • 1948–1954자바이칼·발트·극동 군관구 기갑·기계화병과 사령관, 극동 군관구 전차무장 담당 부사령관
  • 1955건강 악화로 예비역 편입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보로노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Ворон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9–1968 ○ 자연사

스탈린그라드 포위망을 엮어낸 붉은군대 포병의 설계자

1943년 1월 31일 파울루스가 제64군에 사로잡힌 뒤, 보로노프는 자바리기노의 자크바냐에서 로코소프스키와 함께 그를 신문해 저항 중인 북부 집단의 항복 명령을 요구했으나, 파울루스는 자신이 포로라 명령이 무효라며 거부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서기 집안에서 태어나 1918년 붉은군대에 들어갔고, 내전·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포병 장교로 싸우다 1920년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스페인 내전에 '볼테르'라는 이름의 포병 고문으로 파견되었고, 1937년 귀국해 적군 포병 총책임자가 되면서 중앙집중식 포병 운용을 밀어붙였으며, 그해 처형된 전임자 로고프스키를 대신한 자리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스타프카 대표로 스탈린그라드·레닌그라드·쿠르스크에 파견되어 천왕성 작전의 포병 준비를 감독했고, 1943년 파울루스의 신문에 참여했다. 1944년 최초의 포병 총사령관에 올랐고 전후에는 포병과학아카데미와 포병지휘아카데미를 이끌었으며, 1968년 2월 악성 종양 수술 뒤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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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21붉은군대 입대, 내전·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참전, 폴란드군 포로
  • 1930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포병연대장
  • 1936–37스페인 내전 공화파 포병 고문 (암호명 '볼테르')
  • 1937–40적군 포병 총책임자, 할힌골·겨울전쟁 참전
  • 1941–50포병사령관 겸 국방부인민위원, 스타프카 대표로 주요 작전 지휘
  • 1943천왕성 작전 포병 계획 수립, 파울루스 직접 신문
  • 1944최초의 포병 총사령관 진급, 타임지 표지 인물
  • 1950–68포병과학아카데미 원장, 포병지휘아카데미장, 감찰장단

필리프 세르게예비치 옥탸브리스키

Филипп Сергеевич Октябрьский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9–1969 ○ 자연사

흑해함대를 이끌고 오데사와 세바스토폴을 방어한 해군 제독, 그리고 대피 논쟁의 주인공

1941년 6월 22일, 적기 접근 보고에 옥탸브리스키는 "지시대로 행동하라"며 사격 명령을 거부했다. 참모장이 독자적으로 포문을 열었지만, 그 짧은 지연 동안 항만에 기뢰가 투하되었다.

소련 흑해함대의 전시 사령관. 1939년부터 흑해함대를 지휘하며 바르바로사 작전 발발 직후 오데사와 세바스토폴 방어전을 진두지휘했고, 케르치-페오도시야 상륙작전을 조직했다. 1943년 남오제레이카 상륙작전 실패로 경질되었다가 1944년 흑해함대 사령관으로 복귀해 크림·오데사·야시-키시뇨프 작전에 기여했다. 1944년 제독으로 진급했고 전후 해군 제1부사령관을 지냈으며, 1958년 영웅도시 세바스토폴의 방어를 이끈 공로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세바스토폴 함락 직전 자신과 지휘부만 빠져나오고 수만 명의 수비대를 남겼다는 비판은 오늘날까지 논쟁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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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발트함대 자원입대, 내전 참전
  • 1920발트함대 기뢰학교 졸업
  • 1924이바노프에서 옥탸브리스키로 개명 (10월 혁명 기념)
  • 1938–1939아무르 소함대 사령관, 하산 호 전투 참전
  • 1939–1943흑해함대 사령관 — 오데사·세바스토폴 방어
  • 1943–1944아무르 소함대 사령관 (경질 후 좌천)
  • 1944–1948흑해함대 사령관 복귀, 제독 진급 (1944.4.10)
  • 1948–1951해군 제1부총사령관
  • 1957–1960나히모프 흑해고등해군학교장
  • 1960–1969국방부 총감찰단 감찰고문

세묜 모이세예비치 크리보셰인

Семён Моисеевич Кривошеи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9–1978 ○ 자연사

구데리안과 함께 브레스트 열병식을 주관한 소련 기갑군 중장

1939년 9월 22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독일군이 철수하고 소련군이 도시를 접수하는 자리에서, 크리보셰인은 구데리안과 나란히 서서 나치 독일군과 붉은 군대의 합동 열병식을 주관했다.

소련 기갑군 중장. 보로네시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18년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남북전쟁을 치렀다. 프룬제 사관학교 졸업 후 기갑 부대로 옮겨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소련군 최초의 전차 지휘관으로 마드리드 방어전에 참가했다. 1939년 9월 22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구데리안과 만나 독일군 철수와 합동 열병식을 함께 주관했다. 1943년 쿠르스크 전투에서 카투코프의 제1전차군 소속 제3기계화군단을 지휘하며 오보얀 축선을 방어, 호트의 주력 기갑 공세를 저지하는 결정적 역할을 수행해 근위군단으로 승격되었다. 1945년 베를린 공세에서 제1기계화군단을 이끌며 4월 25일 가장 먼저 시내로 돌입,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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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붉은 군대 입대, 남북전쟁 참전 (제1기병군)
  • 1919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1프룬제 사관학교 졸업, 제7기계화연대 참모장
  • 1934제6기계화연대장
  • 1936–1937스페인 내전 참전, 마드리드 방어전에서 전차부대 지휘
  • 1937제8독립기계화여단장 (곧 전차여단으로 개편)
  • 1938하산 호 전투 조사위원회 대표로 파견
  • 1939폴란드 진주: 제29전차여단 지휘, 브레스트에서 구데리안과 합동 열병식
  • 1939–1940겨울전쟁 참전, 비보르크 점령
  • 1940–1941소장 진급; 제15기계화사단장, 제2전차사단장, 제25기계화군단장
  • 1941–1943적군 기갑총국 전투훈련국장
  • 1943제3기계화군단장; 쿠르스크 오보얀 축선 방어; 중장 진급, 근위군단 승격
  • 1944제1기계화군단장; 바그라치온 작전에서 브레스트 탈환
  • 1945비스와-오데르·베를린 공세 — 4월 25일 베를린 최초 돌입; 소비에트연방영웅
  • 1946–1949프룬제 사관학교 기갑전술학과장
  • 1950–1952오데사 군관구 기갑·기계화부대 사령관
  • 1953예비역 편입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그로모프

Михаил Михайлович Гром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899–1985 ○ 자연사

기록비행의 영웅에서 공군 지휘관으로: 북극을 넘어 캘리포니아까지

1937년 7월 14일, ANT-25기가 캘리포니아 샌재신토 목장에 착륙하자 현지 목장 주인이 물었다. "도대체 어디서 왔소?" 그로모프는 대답했다. "모스크바에서, 북극을 넘어서요."

소련의 전설적 시험비행사이자 공군 지휘관. 1937년 ANT-25기로 모스크바에서 북극을 넘어 캘리포니아까지 무착륙 비행해 세계 거리 기록을 세웠고, 독소전쟁에서는 항공군을 지휘했으며, 전후에는 수용소에 갇혀 있던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이감을 주선해 소련 우주 개발의 분기점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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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30NII VVS 시험비행사
  • 1930–1941TsAGI 수석 시험비행사
  • 1941LII 초대 소장
  • 1942–1943제3항공군 사령관
  • 1943–1944제1항공군 사령관
  • 1944–1946VVS 전선항공 전투훈련총국장
  • 1946–1949장거리항공 부사령관
  • 1949–1955항공산업성 비행근무국장

알렉산드르 그리고리예비치 바르민

Александр Григорьевич Барми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9–1987 ○ 자연사

스탈린의 대숙청을 피해 망명한 소련 GRU 준장: 극소수 생존자

「내가 책을 쓸 때면 마치 묘지를 걷는 듯하다. 내 친구와 평생의 동지들은 모두 총살되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무슨 실수처럼 느껴진다」 — 『살아남은 자』(1945)

소련 군사정보국(GRU) 장교이자 외교관으로, 프랑스 주재 GRU 레지던트와 그리스 주재 대리대사를 역임했다. 대숙청이 한창이던 1937년, 동료들이 차례로 사라지고 아들이 보내온 편지에서 미하일 투하쳅스키 원수의 처형 소식을 접한 뒤 아테네에서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OSS에서 복무하고 16년간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러시아어 방송 책임자를 지냈다. 1945년 회고록 『살아남은 자』에서 '내가 집필할 때면 마치 묘지를 걷는 듯하다. 내 친구와 평생의 동지들은 모두 총살되었다'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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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붉은군대 입대, 러시아 내전 참전; RCP(b) 입당
  • 1920–23보병장교학교·프룬제 군사아카데미 동양학부 수학
  • 1921–25투르케스탄 전선 RVS 전권대표, 부하라 총영사, 페르시아 길란 총영사
  • 1929–32파리·밀라노·브뤼셀 소련 통상대표부 근무
  • 1934–35아프토모토엑스포르트 청장; 아프가니스탄 주재 소련 대표부 1등서기관
  • 1935–37프랑스 주재 GRU 레지던트; 그리스 주재 소련 대리대사
  • 1937.7그리스에서 프랑스로 망명 — 초기 고위급 소련 정보장교 망명자
  • 1940–44미국 이주; 미육군 사병 복무 후 OSS(전략첩보국) 근무
  • 1948–64미국의 소리(VOA) 러시아어 방송 책임자
  • 1964–72미국 정보국(USIA) 소련 담당 고문

녜룽전

聂荣臻
군사·지휘 중국 중국 1899–1992 ○ 자연사

진차지 근거지의 사령관에서 「양탄일성」 핵·미사일 계획의 총책임자가 된 원수

1958년부터 국방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중국 핵 계획을 지휘했고, '제국주의의 핵 공격을 받을 때 최소한의 보복 수단을 갖추기 위해' 첨단 무기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쓰촨 출신으로 프랑스·벨기에·소련에서 배우고 황푸군관학교 정치교관을 지냈다. 대장정에서 린뱌오의 제1군단 정치위원이었고 항일전쟁기 화베이의 진차지 근거지를 세워 지휘했다. 국공내전 뒤 베이징 시장을 지냈고 1955년 원수가 되었다. 1956년부터 국무원 과학기술 담당 부총리로 소련 원조 철수 뒤에도 1964년 원자폭탄, 1967년 수소폭탄, 1970년 인공위성 발사에 이르는 국방과학 계획을 총괄했다. 10대 원수 중 마지막으로 1992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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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5진차지 군구 사령관
  • 1958–1975국방과학기술위원회 주임

블라디미르 예피모비치 고레프

Владимир Ефимович Горе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벨라루스계 1900–1938 ✕ 처형

마드리드 방어를 조직한 국제주의 군인

1936년 가을, 고레프는 마드리드 방어에서 공화파 민병대를 규율 있는 군대로 재편하는 소련 고문단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블라디미르 고레프는 러시아 내전과 중국 혁명전쟁을 거친 소련 군인이자 군사고문이었다. 1936년 스페인에 파견되어 ‘산초’라는 암호명으로 공화파 군대의 조직과 마드리드 방어를 지원했고, 이후 북부 전선에서도 활동했다. 귀국 뒤 대숙청의 피고가 되어 처형되었으나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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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1적군, 러시아 내전 참전 및 지휘관
  • 1925–1927중국 국민혁명군 군사·정보 고문, ‘니키틴’·‘고든’
  • 1930–1933미국 비합법 정보원
  • 1933–1935레닌그라드 군관구 자동차·기갑 부대 지휘부
  • 1935–1936제31독립기계화여단장 겸 정치위원, 콤브리그
  • 1936–1937스페인 공화국군 소련 군사고문 및 군사주재관, ‘산초’
  • 1937스페인 북부 전선 군사고문
  • 1938체포·처형, 1956년 복권

그리고리 미하일로비치 시테른

Григорий Михайлович Штер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유대인, 러시아 제국 (키예프현 출신, 현 우크라이나) 1900–1941 ✕ 재판 없이 총살

하산·할힌골의 승리자, 숙청된 극동전선 사령관

1939년 7월 5일 국방인민위원 명령으로 시테른을 사령관으로 하는 전선집단이 편성되어 제1붉은기군, 제2붉은기군, 자바이칼군관구, 제57특수군단을 통제했다. 7월 19일 제57특수군단이 주코프의 제1군집단으로 개편되었다.

1900년 8월 6일(구력 7월 24일) 키예프현 스멜라(현 우크라이나 체르카시주)에서 태어나 1941년 10월 28일 사망한 소련 군사지휘관이다.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18년 키예프의 볼셰비키 지하 활동에 참여했고, 1919년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내전기 정치위원으로 복무했다. 1937~38년 '그리고로비치'라는 성으로 스페인 내전 공화국군 주임 군사고문을 지냈고, 1938년 하산 호 전투에서 제39소총군단을 지휘했다. 1939년 7월 5일 전선집단 사령관으로 할힌골 전투를 총괄해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다. 1941년 체포되어 트로츠키주의 음모와 독일 스파이라는 자백을 강요당했고, 10월 28일 쿠이비셰프 인근에서 재판 없이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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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붉은 군대 입대, 남부전선에서 정치위원으로 복무
  • 1924투르키스탄에서 바스마치 토벌
  • 1929프룬제 군사아카데미 동양학부 졸업, 국방인민위원부 참모
  • 1936제7사마라기병사단장
  • 1937–1938스페인 내전 공화국군 주임 군사고문 (가명: 그리고로비치)
  • 1938극동전선 참모장 → 하산 호 전투에서 제39소총군단 지휘
  • 1938–1939제1독립붉은기군 사령관
  • 1939할힌골 전투 전선집단 사령관 — 소비에트연방영웅 수훈
  • 1940제8군 사령관 (겨울전쟁) → 극동전선 사령관, 상장 진급
  • 1941방공총국장 → 6월 체포, 10월 28일 재판 없이 처형

파벨 표도로비치 지가레프

Павел Фёдорович Жигаре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0–1963 ○ 자연사

바르바로사 작전의 폭풍 속에서 소련 공군을 지휘하고, 해빙기에는 다시 공군을 재건한 두 번의 공군 총사령관

공장 전보들이 증명한 진실: 701대의 완성 항공기가 조종사 부족으로 공장 비행장에 묶여 있었다. 스탈린 앞에서 지가레프의 '전투 불가' 이야기는 산산조각 났고, 스탈린은 단 한 마디를 내뱉었다. "비열한 놈! 꺼져!"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기병에서 항공으로 전환한 소련 공군 지도자였다. 1941년 6월 독일 침공 직후 공군 총사령관에 올랐으나, 전쟁 첫해의 참담한 손실과 항공기 생산을 둘러싼 스탈린과의 대면에서 거짓말이 발각되어 1942년 4월 경질되었다. 이후 극동전선 공군을 지휘하며 1945년 소일전쟁에서 제10항공군을 이끌었고, 전후 장거리 항공대를 지휘하다 1949년 다시 공군 총사령관으로 복귀하여 1957년까지 재임하며 제트기 전환을 주도했다. 1955년 항공 총원수로 진급했고, 말년에는 민간항공총국장과 방공군사령학교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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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붉은 군대 입대, 러시아 내전 참전
  • 1922제4트베리 기병학교 졸업, 기병 소대장
  • 1927레닌그라드 군사비행관측사 학교 졸업
  • 1932주콥스키 공군 아카데미 지휘학부 졸업
  • 1937–1938주중 소련 대사관 항공 무관보, 중국 내 소련 의용비행대 지휘
  • 1938–1939국방인민위원부 공군 전투훈련국장
  • 1940–1941공군 총국 제1부국장 → 국장
  • 1941–1942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부인민위원
  • 1942–1945극동전선 공군 사령관
  • 1945제10항공군 사령관 — 소일전쟁 참전
  • 1946–1948공군 제1부총사령관 겸 장거리 항공대 사령관
  • 1949–1957공군 총사령관, 국방차관 → 국방제1차관 (1955)
  • 1955항공 총원수 진급
  • 1957–1959민간항공총국장
  • 1959–1963방공군사령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