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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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조직 인물 181명

아구스틴 파라분도 마르티

Agustín Farabundo Martí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엘살바도르 엘살바도르 1893–1932 ✕ 처형

중미 공산주의의 아버지, 산디노의 대령, 라 마탄사의 순교자

미군기가 산디노 진영을 폭격하는 가운데, 마르티는 타자기를 밀치며 말했다. "역사가 펜으로 쓰이지 못할 때는 총으로 쓰여야 한다." 그리고 소총을 들고 미군기를 향해 사격했다.

엘살바도르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가로, 중미 공산주의 운동의 선구자이다. 1930년 엘살바도르 공산당(PCS)을 공동 창건하고 1932년 대공황으로 몰락한 농민·원주민의 무장봉기를 이끌었으나 마르티네스 군부의 라 마탄사 학살로 진압·총살당했으며, 사후 그 이름은 FMLN에 계승되어 중미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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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멜렌데스 독재 반대 학생시위 주도, 체포 후 과테말라로 망명
  • 1925중미공산당 공동 창립 (과테말라시티)
  • 1925–1928국제적색원조(SRI) 엘살바도르 대표, 지역노동연합(FRTS) 조직
  • 1928–1929산디노의 비서 겸 EDSN 대령, 니카라과 주둔 미군에 맞서 게릴라전
  • 1930엘살바도르 공산당(PCS) 공동 창립
  • 1931–1932PCS 임시 총비서; 마르티네스 쿠데타 후 농민·원주민 무장봉기 지도

멘델 마르코비치 하타예비치

Мендель Маркович Хатаевич

곡물 징발이 씨 뿌릴 사람마저 없앨 것이라고 몰로토프에게 경고한 당 서기, 4년 뒤 총살되다

"곧 씨 뿌리고 수확할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1932년 11월, 하타예비치가 몰로토프에게. 당일 답신: "진정한 볼셰비키는 국가의 필요를 먼저 놓아야 합니다."

멘델 하타예비치는 1893년 고멜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치과기공사로 일하다 191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32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로서 11월 몰로토프에게 "콜호스의 최소한의 필요를 고려하지 않으면 곧 씨 뿌리고 수확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서한으로 경고했으나, 몰로토프는 "진정한 볼셰비키는 국가의 필요를 먼저 놓아야 한다"고 답했다. 1933년부터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주당 제1서기로 좌천된 뒤에는 오히려 대기근의 집행자가 되어 기아와 식인 보도를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1937년 대숙청 와중 체포되어 반혁명 테러조직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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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7고멜에서 지하 볼셰비키 활동, 여러 차례 체포, 예니세이현 유형, 1917년 3월 사면
  • 1917–1921고멜·사마라 당 간부; 체코군에 포로로 잡혀 고문으로 오른손 마비; 서부전선 제21소총사단 정치위원
  • 1921–1925고멜현당 책임비서(1921–23), 오데사현당 책임비서(1923–24),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조직배치부 부장(1924–25)
  • 1925–1928타타르 주당 책임비서
  • 1928–1932중부볼가 변경당 제1서기: 대규모 집단화 추진, 쿨라크 대량 체포·추방 지휘
  • 1932.10–1933.01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 곡물 몰수 지령 공동 서명; 11월 몰로토프에 기근 경고 서한
  • 1933–1937.03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주당 제1서기; 기아와 식인 사례를 스탈린에게 보고하고도 1934년 당대회에서 집단화의 승리를 찬양
  • 1937.03–10재차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 9월 체포, 10월 27일 사형선고, 10월 30일 총살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폴론스키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Полонский

볼셰비키 조직부장에서 숙청된 노동조합 간부

1933년 1월 중앙위 조직부장에 임명되어 당 전 간부 배치를 관장했으나, 불과 4년 뒤 자신이 구축한 기구의 수사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1893년 6월 17일(구력 5일) 토볼스크에서 유대계 가정의 소상인 신분으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루벤 게르셰비치 폴론스키다. 선원과 미숙련 노동자, 페테르부르크 전기기사로 일하다 1913년 페테르부르크 금속노조 중앙이사회 위원이 되었고, 1914년 체포되어 1915년 토볼스크 현으로 행정 유배되었다. 1917년 3월부터 모스크바 금속노조 중앙이사회 서기로 10월 무장투쟁에 참가했고, 내전기에는 서부·남부 전선 사단 군정위원과 남동철도 군정위원을 지냈다. 1920~1924년 광부노조 중앙위 서기, 1930~1933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1935~1937년 전연방 중앙노동조합평의회 서기를 지냈으며 193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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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볼셰비키 입당
  • 1913페테르부르크 금속노조 중앙이사회 위원
  • 1917모스크바 금속노조 중앙이사회 서기 · 10월 봉기 참가
  • 1918–1920사단 군정위원 · 남동철도 군정위원 · VTsSPS 남부국 의장
  • 1925–1928로고시스코-시모놉스키 구당위 서기 · 모스크바 당위 제2서기
  • 1930–1933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자카프카스 변경위 서기
  • 1933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부장
  • 1933–1935교통인민위원부 정치총국장 · 부인민위원
  • 1935–1937전연방 중앙노동조합평의회(VTsSPS) 서기
  • 1937체신 부인민위원 · 체포

베르티 알브레히트

Berty Albrecht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프랑스 프랑스인 1893–1943 ✕ 옥중 자살

여성해방과 반파시즘을 지하 저항으로 잇다

“삶은 값비싸지 않으며, 죽음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명예와 이상에 맞게 사는 것이다.”

베르티 알브레히트는 여성해방과 반파시즘을 결합한 프랑스의 활동가로, 피임과 낙태의 권리를 주장하며 여성주의 잡지를 만들었다. 나치즘의 위험을 일찍 경고하고 독일인 망명자를 도운 일은 앙리 프르네와의 협력, 그리고 지하 저항운동 콩바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Les Petites Ailes와 Vérités의 제작을 맡고 콩바의 사회사업을 조직하며 체포와 투옥, 탈출 뒤에도 활동을 계속했다. 1943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고문받은 뒤 프레즈네 감옥에서 숨졌고, 사후 해방의 동료로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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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간호사 자격 취득
  • 1918–1931네덜란드와 런던에서 생활, 여성주의와 가족계획 운동 접촉
  • 1933–1935여성주의 잡지 《성 문제》 창간·편집
  • 1933–1940독일 망명자 지원, 반파시즘 활동, 앙리 프르네와 협력
  • 1940–1941지하 간행물 《Les Petites Ailes》·《Vérités》 제작
  • 1941–1943콩바 지도부 협력자·사회사업 책임자
  • 1943체포·고문 뒤 프레즈네 감옥에서 사망

클라브디야 이바노브나 니콜라예바

Клавдия Ивановна Николаева

인쇄공 출신으로 당 중앙위원·노조 지도부에 오른 프롤레타리아 여성혁명가

1918년 제1차 전러시아 여성노동자·농민대회, 레닌이 입장하자 니콜라예바는 일어나 《인터내셔널》을 부르기 시작했고 1,147명의 대의원들이 따라 불렀다.

인쇄공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 1917년 《라보트니차》 편집장, 내전기 페트로그라드 여성부를 이끌었다. 당 중앙위원·오르그뷰로 위원까지 오른 소비에트 체제 최고위 여성 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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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RSDLP(b) 입당, 인쇄노조 활동
  • 1908–15반복적 체포·유배, 혁명 선전 지속
  • 1917《라보트니차》 편집장, 10월혁명 참여
  • 1918–19페트로그라드 여성부·선전부장, 제1차 전러시아 여성대회 의장
  • 1924–26오르그뷰로 위원·서기국 후보위원·제노트델 책임
  • 1930–33중앙위 선동대중부장
  • 1936–44전연방노조중앙평의회 서기
  • 1942영국 파견, 귀환 중 공습 하 부상자 구조

야니스 에두아르도비치 칼른베르진슈

Ян Эдуардович Калнберзинь

소비에트 라트비아의 창립자이자 발트 3국 최장기 집권 공화당 제1서기

1939년 라트비아 당국에 체포되어 리가 중앙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1940년 6월 소련군 진주 후 사면으로 석방되자마자 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로 호출되었다. 지하운동가에서 소비에트 공화국 창립 지도자로의 전환은 불과 며칠 사이에 이루어졌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1940년부터 1959년까지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지내며 소비에트 라트비아의 창립과 제도화를 주도했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17년 입당, 붉은 라트비아 소총병으로 내전에 참전했으며 이후 라트비아 지하운동과 모스크바 유학을 오갔다. 1940년 소련군 진주 후 리가 형무소에서 석방되어 곧바로 공화국 당 제1서기로 임명되었고, 전후 집단화와 공업화를 통해 라트비아의 소비에트 체제 편입을 총괄했다. 1957년 CPSU 정치국 후보위원에 올랐으나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때 불충분한 대응을 이유로 제1서기에서 물러났다. 이후 1970년까지 라트비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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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라트비아 사회민주당(볼셰비키) 입당
  • 1919–1920적군 라트비아 소총병으로 남부전선에서 내전 참전
  • 1923–1933서방 소수민족 공산대학 및 붉은교수양성소에서 수학
  • 1925–1939라트비아 내 지하 공산주의 운동 활동, 수차례 체포·투옥
  • 1940–1959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40–1951라트비아 공산당 리가 시위원회 제1서기 (겸임)
  • 1952–197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57–1961CPSU 중앙위 정치국(간부회) 후보위원
  • 1959–1970라트비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 부의장 겸임

라자르 모이세예비치 카가노비치

Лазарь Моисеевич Каганович

스탈린의 강경 집행자 '아이언 라자르'

1934년 17차 당대회에서 개표위원장을 맡아 스탈린 반대표 약 290장을 삭제하고, 키로프(3표) 대신 스탈린이 최소 반대표를 얻은 것처럼 조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 조작은 여러 문헌이 전하는 주장이며 확정된 사실로 단정할 수 없다.

유대계 제화공 가정에서 태어나 1911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22년 당 조직부를 맡아 스탈린의 지지자들을 요직에 배치했다. 1925~1928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총서기로 중앙집권과 농업 재편을 밀어붙였고, 1930년 정치국 정회원이 되어 당 서기국과 모스크바 재건, 지하철 건설을 지휘했다. 1932년 북캅카스 곡물 조달 위원회를 이끌며 마을을 블랙리스트에 올렸고, 대숙청기에는 처형 리스트에 서명하고 공화국들을 돌며 숙청을 독려했다. 1957년 반당 그룹으로 실각하고 1961년 제명되었으며, 1991년 97세로 죽어 마지막 생존 옛 볼셰비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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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24조직지도부, 임명과 배치 실무
  • 1928–39중앙위 서기, 스탈린의 당 기구 장악 지원
  • 1957반당 그룹으로 실각
  • 1925–28우크라이나 공산당 총서기
  • 1935–42, 1943–44철도 인민위원
  • 1947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
  • 1961당 제명

이오시프 미하일로비치 바레이키스

Иосиф Михайлович Варейкис

집단화와 대숙청의 지역당 보스, 스탈린에게 '간첩이 너무 많다'는 핀잔을 듣다

1937년 9월, 극동지방에서 철도 노동자만 500명을 간첩으로 색출해 총살했다고 스탈린에게 보고하자, 스탈린은 이렇게 물었다. '바레이키스 동지, 당신 구역에는 왜 그렇게 간첩이 많은 겁니까?'

리투아니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공장에서 선반공으로 일하며 191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내전기에는 심비르스크 방어를 지휘하고 좌파 에스에르 봉기 진압에 참여했으며, 1920년대 중앙위 출판부장을 거쳐 중앙검은토지주·보로네시·스탈린그라드·극동지방의 제1서기를 차례로 맡았다. 집단화 과정에서 오스트로고시스크 봉기를 직접 진압하고, 트로이카를 통해 수만 명을 유죄판결했다. 1937년 극동지방에서 한인 17만 명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를 집행하고 수백 명의 '일본 간첩'을 적발했다고 스탈린에게 보고했으나, 그해 10월 자신이 체포되어 1938년 총살되었다. 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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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 1918.01–1918.06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공화국 인민위원 · 당 지역위 서기
  • 1918.06–1920.08심비르스크 현당위원회 위원장
  • 1920–1921비텝스크 현집행위원회 위원장 · 식량인민위원
  • 1921–1923바쿠 소비에트 부의장
  • 1923.08–1924.02키예프 현당위원회 책임서기
  • 1924.02–1924.10투르키스탄 공산당 중앙위 책임서기
  • 1924–1930전연방공산당 중앙위 후보위원
  • 1924.10–1926.01중앙위 출판부장 · 『몰로다야 그바르디야』 편집장
  • 1926.01–1928.04사라토프 현당위원회 서기
  • 1928.08–1934.06중앙검은토지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30–1937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
  • 1934.06–1935.03보로네시 주당위원회 제1서기
  • 1935.03–1936.12스탈린그라드 변경당위원회 제1서기
  • 1937.01–1937.10극동 변경당위원회 제1서기
  • 1937.10체포
  • 1938.07.29사형선고 후 총살 (코무나르카)

보리스 페트로비치 셰볼다예프

Борис Петрович Шеболдаев

대테러 전야에 무너진 아조프-흑해 변경주의 당 주인

1934년 제17차 당대회에서 그는 키로프를 찾아가 '노인들'이 레닌의 유언대로 스탈린을 다른 자리로 옮기고 그대를 서기장으로 세우자고 한다는 뜻을 전했다.

1914년 입당한 고참 볼셰비키로, 니즈니볼가와 북캅카스 변경주 당 제1서기로서 집단화와 곡물 징발을 지휘했고 1932년 쿠반의 '검은 명부' 탄압에 그 이름이 남았다. 1934년부터 아조프-흑해 변경주 제1서기를 지냈으나, 1936년 여름 예브도키모프가 '셰볼다예프파' 숙청을 위해 파견되고 류시코프가 지역 NKVD를 맡으면서 포위되었다. 1937년 2~3월 중앙위원회 총회 보고로 격하되어 쿠르스크주로 밀려났고, 그해 6월 체포되어 10월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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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볼셰비키 입당
  • 1918–1920국내전기 캅카스에서 정치 활동
  • 1928–1931니즈니볼가 변경주 당 제1서기
  • 1931–1934북캅카스 변경주 당 제1서기
  • 1934–1937아조프-흑해 변경주 당 제1서기
  • 1937쿠르스크주로 격하, 6월 체포, 10월 총살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안드레예프

Андрей Андреевич Андреев

20년간 정치국에 앉아 있던 조직의 사나이, 가장 자주 지방을 숙청하러 파견된 서기

1917년 4월 3일 밤, 레닌의 귀국을 맞은 핀란드역 집회에서 서너 걸음 떨어진 자리에 앉았고, 훗날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 지하 볼셰비키들이 얼마나 레닌을 보고 듣고 싶어 했던가. 마침내 그 꿈이 이루어졌다.」

스몰렌스크주 쿠즈네초보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두 해의 농촌 학교를 다녔고, 1908년 13세에 모스크바로 나가 식당의 접시닦이 소년으로 일했다. 노동자 야학과 프레치스텐스키 노동자 강좌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접하고 1911~1912년 사회민주주의 서클에 들어갔으며, 1914년 페테르부르크로 옮겨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0월 혁명과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 참가했고, 중앙위 서기로서 조직국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며 대숙청기에 지방에 파견되어 당 조직을 숙청했다. 정치국 정위원으로 20년간 최고 지도부에 있었다. 1937~1962년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을 지냈고, 1971년 12월 5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해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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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볼셰비키 입당, 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위원(1915–1916)
  • 191710월 혁명 참여,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대의원
  • 1920–22전러시아 중앙노조평의회 서기, 노동조합 논쟁에서 트로츠키·부하린 노선 지지
  • 1922–27철도노조 중앙위원장
  • 1924–25중앙위원회 서기 (1기)
  • 1928–30북캅카스 지방당 제1서기, 집단화 추진
  • 1930–31중앙통제위원회 의장 겸 노농감독인민위원, 집단화 특별위 주재
  • 1931–35교통인민위원, 철도 근대화 추진
  • 1932–52정치국 정위원 (1926년부터 후보위원), 20년간 최고 지도부
  • 1935–46중앙위 서기 (2기), 조직국 실질적 운영자 — 대숙청 시기 가장 자주 지방에 파견되어 당 조직을 교체
  • 1938–46연방회의(소비에트) 의장
  • 1939–52당 통제위원회 의장, 예조프의 뒤를 이어 당 규율 총괄
  • 1943–46농업인민위원, 전후 복구 계획 참여
  • 1946–53소비에트 각료회의 부의장, 농업·콜호즈 담당
  • 1953–62최고소비에트 간부회의 위원
  • 1957–62소중우호협회 회장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Buenaventura Durruti

바르셀로나에서 반란군을 꺾고 자기 이름의 종대를 이끈 아나키스트 금속노동자

1936년 바르셀로나에서 캐나다 기자 피에르 반 파선에게 한 말로 전해진다. 「우리는 폐허가 조금도 두렵지 않다. 우리는 이 땅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자기 세계를 부수고 물러갈지 몰라도,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이 가슴속에 품고 있다.」 널리 인용되지만 이 인터뷰의 정확한 문구를 두고는 논쟁이 있다.

레온의 철도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금속공. 1917년 총파업으로 해고된 뒤 프랑스로 달아나 아나키즘을 받아들였고, 로스 솔리다리오스와 로스 에란테스에서 은행 「수용」과 국왕 암살 시도를 거치며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감옥을 전전했다. 1936년 7월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을 이끌고 아타라사나스 병영을 함락시켜 카탈루냐에서 군부 반란을 무너뜨렸고, 이 전투에서 오랜 동지 프란시스코 아스카소를 잃었다. 곧 6천 명 규모의 두루티 종대를 꾸려 아라곤 전선으로 나가면서 해방 지역에서 토지와 공장의 집단화를 밀어붙였다. 11월 마드리드 방어에 합류했다가 19일 카사데캄포 전선에서 총상을 입고 이튿날 숨졌으며, 총알의 출처를 두고는 적의 사격, 아군의 오발, 그의 자동소총 오작동이라는 설이 지금도 갈린다. 바르셀로나 장례 행렬에는 수십만 명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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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레온의 철도 노동자 집안에서 여덟 남매 중 둘째로 출생
  • 1913–1917금속노조(UGT) 가입, 1917년 총파업 참여로 북부철도에서 해고되고 프랑스로 도피
  • 1918–1919망명지에서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고 귀국해 CNT 가입
  • 1920–1922로스 후스티시에로스 결성, 알폰소 13세 암살 계획이 발각되어 사라고사로 피신
  • 1922–1923아스카소·가르시아 올리베르와 로스 솔리다리오스 조직, 히혼 스페인은행 「수용」
  • 1924–1926쿠바·멕시코·칠레·아르헨티나를 도는 「수용」 원정, 파리에서 체포되어 라상테 감옥 수감
  • 1927–1931석방 후 벨기에 체류, 이베리아아나키스트연맹(FAI) 활동; 제2공화국 선포와 함께 바르셀로나 귀환
  • 1931–1936친화그룹 「노소트로스」 결성, 잦은 체포와 유형 속에 CNT 좌파의 얼굴이 됨
  • 1936.07.19–20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을 이끌고 아타라사나스 병영 함락, 동지 프란시스코 아스카소 전사
  • 1936.07–11두루티 종대를 편성해 아라곤 전선으로, 해방 지역의 토지·공장 집단화 추진
  • 1936.11.14종대 일부를 이끌고 마드리드 방어전에 합류
  • 1936.11.19–20카사데캄포 전선에서 총상을 입고 이튿날 사망, 총알의 출처는 지금도 논쟁
  • 1936.11.22바르셀로나 장례, 수십만 명이 운구를 따름

표트르 이바노비치 스모로딘

Пётр Иванович Смородин

콤소몰의 대중적 기반을 다지고 '배움'을 기치로 내건 노동자 출신 제1서기

제5차 콤소몰 대회에서 한 대의원이 스모로딘을 "노동청년의 지도자"로 전국에 선전하자고 제안하자, 그는 단상에서 이렇게 쏘아붙였다. "무슨 까닭에 나를 성상(이콘)으로 만들려는 거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4세에 페트로그라드 외과기구 공장의 견습공이 되었고, 1917년 5월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10월 무장봉기에 직접 참가했다. 페트로그라드 사회주의 노동청년동맹(SSRM) 창설을 주도했고, 1921년부터 1924년까지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서 NEP 시기 청년 조직의 대중적 기반을 다지고 '배움'을 콤소몰의 핵심 과제로 내세웠다. 이후 레닌그라드와 스탈린그라드 당 지역위원회 서기를 역임했고, NKVD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에 가담했으나 1938년 '인민의 적'으로 체포되어 1939년 총살당했으며 1954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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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7페트로그라드 외과기구 공장 견습공·노동자
  • 1917페트로그라드 사회주의 노동청년동맹(SSRM) 공동 창설자
  • 1920–1921페트로그라드 콤소몰 시위원회 서기
  • 1921–1924콤소몰(РКСМ)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28–1937레닌그라드 바실레오스트롭스키·비보르크·모스크바 구당위원회 서기
  • 1937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2서기
  • 1937–1938스탈린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
  • 1938스탈린그라드 시당위원회 제1서기

샤를 티용

Charles Tillon

노동운동에서 무장 레지스탕스로 나아간 공산주의자

“수와 단결이 우리 힘이 될 것이다.”

금속노동자와 노동조합 활동가로 출발한 샤를 티용은 1919년 해군 mutiny에 참여한 뒤 프랑스 공산당과 CGTU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는 1940년 독일 점령에 맞선 민족해방과 노동계급의 단결을 호소했고, 1941년부터 공산주의 무장조직을 통합해 프랑스 유격대·의용군(FTP)을 이끌었다. 해방 뒤에는 장관과 의원으로 국가 재건에 참여했지만, 당 지도부와의 갈등으로 1952년 권력에서 밀려났고 1970년 공산당에서 제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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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21프랑스 해군 기관병, 1919년 군함 게생의 반란 주도, 군사형무소 수감
  • 1921–1931프랑스 공산당 가입, CGTU 일드빌렌 지역·낭트 노동조합 지도자
  • 1931–1936CGTU 전국 지도부,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및 정치국 후보위원
  • 1936–1940하원의원, 스페인 공화파 피난 지원 활동
  • 1940–1944공산당 비밀 지도부, 국민군사위원회와 FTP 창설·최고사령관
  • 1944–1947공군·군수·재건부 장관, 오베르빌리에 시장 및 의원
  • 1952–1970공산당 지도부에서 축출, 1957년 복권, 1970년 제명

김원봉

김원봉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족 1898–1958 ↓ 사망

의열단 창설자로서 조선의용대·광복군을 거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에 이른 무장투쟁가

베이징에서 김익상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얻어지는 것이오. … 우리가 먼저 피를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김익상은 그 자리에서 의열단에 가입했고, 수주 뒤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졌다.

의열단을 조직해 6년간 일본 식민통치 기관에 대한 폭탄 투척과 요인 암살을 지휘한 무정부주의적 독립운동가. 이후 황푸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해 연합전선을 모색했으며,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광복군 부사령관 겸 군무부장으로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해방 후 좌우합작에 힘쓰다 여운형 암살로 남한 내 입지가 무너지자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잔류해 국가검열상과 노동상을 역임했으며, 1958년 숙청당했다. 의열투쟁에서 통일전선 정치로, 다시 분단 후 조선 내각까지, 조선 혁명 진영 전체를 가로지른 유일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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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의열단 창설, 단장(의백) 취임
  • 1926황푸군관학교 제4기 입학
  • 1935조선민족혁명당 창당
  • 1938조선의용대 편성, 대장 취임
  • 1944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부사령관
  • 1948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검열상
  • 1952내각 노동상
  • 1957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스레텐 주요비치

Сретен Жујовић

티토와 결별한 당내 스탈린 지지자

1948년 4월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그는 티토의 대소련 답신에 반대했다.

스레텐 주요비치는 세르비아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이자 노동운동 조직가로, 제1차 세계대전과 유고슬라비아 인민해방전쟁을 거쳤다. 그는 전쟁기 파르티잔 봉기를 조직하고 최고사령부에서 활동했으며, 해방 뒤 재무장관을 맡았다. 1948년 티토와 스탈린의 충돌에서 그는 소비에트 노선을 지지한 유일한 반대자로 중앙위원회 회의에 나섰고, 그 선택으로 당과 공직에서 축출되어 구금되었다. 1950년 자기비판 뒤 석방되고 훗날 당에 복귀했지만, 그의 경력은 혁명적 국제주의와 유고슬라비아의 자율성 사이의 균열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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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4귀국 후 노동운동·노동조합 활동
  • 1924–1933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입당, 당 조직 활동
  • 1938–1940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중앙위원
  • 1941–1944세르비아 파르티잔 최고사령부·참모 활동
  • 1945–1947유고슬라비아 연방 재무장관
  • 1948티토·스탈린 분열에서 인포르비로 노선 지지
  • 1948–1950가택연금과 수감, 자기비판 뒤 석방
  • 1950–1971당 복귀, 《보르바》·경제연구기관 간부

아르비트 야노비치 펠셰

Арвид Янович Пельше

브레즈네프 시대의 당 규율 수호자, 라트비아 출신 정치국원

1918년 모스크바 레온티옙스키 골목에서 체카 청사 폭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당시 체카 직원이었던 펠셰는 현장에서 부상자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 혁명 초기 비밀경찰 본부를 뒤흔든 이 폭발 사건은 그가 이후 소비에트 권력의 중심으로 나아가는 경로에 자리한 초기 위기 중 하나였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 브레즈네프 시대 정치국원 겸 당통제위원장으로 17년간 당 규율을 총괄했다. 비러시아계로 소련 최고지도부에 오른 드문 인물이며, 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로 공화국 산업화를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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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라트비아 사회민주당(볼셰비키) 입당
  • 19176차 당대회 대의원, 10월혁명 참가
  • 1918모스크바 체카 직원
  • 1919–1929적군 및 해군에서 정치·교육 업무
  • 1941–1959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 담당 서기
  • 1959–1966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66–1983정치국 정위원 겸 당통제위원회 의장

보리스 게오르기예비치 바자노프

Борис Георгиевич Бажанов

스탈린 비서실에서 유일하게 망명한 정치국 기록자

1923년 10월 26일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레닌트로츠키에게 자신의 후계자 역할을 제안했고, 트로츠키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 장면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정치국 서기 보리스 바자노프였다.

볼셰비키 당의 기술서기로, 1923년부터 1925년까지 스탈린의 개인 보좌관 겸 정치국 서기를 지내며 모든 정치국 회의의 기록을 담당했다. 레닌 사후 권력 투쟁이 한창이던 시기 정치국의 내부 작동 방식을 직접 목격했으며, 1928년 소련을 탈출한 후 파리에서 회고록을 출간해 스탈린 체제의 의사 결정 구조와 권력 장악 과정을 서방에 최초로 폭로했다. 스탈린의 서기국에서 망명한 유일한 인물로, 그의 회고록은 초기 소비에트 권력의 내막을 전하는 핵심 사료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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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20–1922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 화학 전공 (중퇴)
  • 1922중앙위 조직지도부 근무, 카가노비치 보좌
  • 1923중앙위원회 조직국 서기
  • 1923–1925스탈린 개인보좌관 · 정치국 서기 — 모든 정치국 회의 기록
  • 1926–1927『재정신문』 편집자, 재무인민위원부 및 체육최고위원회 근무
  • 19281월 1일 소련 탈출 — 이란 · 인도 경유 프랑스 망명
  • 1930–1980회고록 『스탈린의 전 비서의 회상』 출간 및 확대판 간행

스테판 비신스키

Stefan Wyszyński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폴란드 폴란드계 1901–1981 ○ 자연사

공산주의 시대 교회의 자율성을 지킨 대주교

1953년 체포될 때 그는 묵주와 성무일도서만 챙겼다.

스테판 비신스키는 폴란드 가톨릭교회의 수장이자 사회적 권위를 지닌 종교 지도자로,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 교회와 민족 정체성의 자율성을 지켰다. 그는 국가와의 공개 대립만이 아니라 1950년 협정과 이후의 협상을 통해 신자 공동체와 교회 제도의 활동 공간을 보존하려 했다. 1953년 체포되어 1956년까지 억류되었지만, 석방 뒤에는 교회의 장기적 조직력과 도덕적 권위를 재건했고, 기에레크 시기에는 국가와 공존하면서도 독립된 사회 세력으로 남았다. 1980년 연대노조가 출범하자 정부와 파업 노동자 모두에게 책임 있는 행동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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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사제 서품, 전주교구에서 사목 시작
  • 1929루블린 가톨릭대학교에서 교회법 박사 학위 취득
  • 1931–1939전주 신학교 교수, 가톨릭 사회교리와 사회학 강의
  • 1946–1948루블린 주교
  • 1948–1981그니에즈노와 바르샤바 대주교, 폴란드 수석주교
  • 1953–1956공산주의 당국에 의해 억류
  • 1953추기경 서임
  • 2021바르샤바에서 복자품에 오름

게오르기 막시밀리아노비치 말렌코프

Георгий Максимилианович Маленков

패자가 죽지 않게 된 시대의 첫 패자

1952년 10월, 제19차 당대회. 중앙위원회 사업보고를 한 사람은 스탈린이 아니라 말렌코프였다. 스탈린은 10월 14일 짧은 폐회 연설을 했을 뿐이다. 홀은 술렁였고, 누구나 신호를 읽었다.

스탈린의 인사 서류를 쥐고 1939년부터 중앙위 서기로, 1948년부터 후계 서열 1위로 올라섰다. 대숙청기의 지방 숙청과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 1952년 유대인 작가 13인의 처형에 책임이 있다. 스탈린 사후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총리로 소비재·감세·핵전쟁에 승자 없다는 노선을 폈다. 1957년 「반당그룹」 주모자로 실각해 카자흐스탄 발전소장으로 좌천되었고 1961년 제명되었다. 1988년 1월 14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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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45서기국 간부 인사, 전시 국가방위위원회에서 항공기 생산 총괄
  • 1953.3–55총리, 소비재·감세·「핵전쟁에 승자 없다」 발언
  • 1957「반당 그룹」 주모자로 실각
  • 1957–68카자흐스탄 우스티카메노고르스크 수력발전소장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차플린

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Чаплин

콤소몰을 당의 청년 훈련 기관으로 만든 소년 정치위원

콤소몰 총서기에서 물러난 직후, 그는 가짜 이름으로 원양 화물선 갑판 선원이 되어 독일·영국·벨기에·포르투갈·터키를 돌았다. 함께 갑판을 닦던 선원들은 그가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인 줄 몰랐다.

농촌 사제의 아들로 태어나 열여섯에 스몰렌스크 학교에 청년 공산주의자 조직을 세웠다. 1922년 전연방 피오네르 조직의 초대 의장이 되어 소비에트 아동·청소년 대중운동의 틀을 놓았고, 1924년부터 1928년까지 콤소몰 중앙위원회 총서기로서 청년 농민학교, 공장견습학교(FZU), 정치교육 체계를 통해 콤소몰을 당의 간부 양성 기구로 전환시켰다. 청년의 교양과 지식을 강조한 그의 노선은 크룹스카야루나차르스키의 지지를 받았다. 콤소몰 지도부를 떠난 뒤 상선 선원으로 위장해 유럽을 여행했고, 이후 트란스캅카스 당 기관과 철도 정치부에서 일했으며 1936년 레닌 훈장을 받았다. 대숙청 시기 체포되어 1938년 총살되었고, 1955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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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스몰렌스크 학교 청년 공산주의자 조직 결성
  • 1919스몰렌스크 군·시 콤소몰 위원회 의장
  • 1920–1921튜멘 현·스몰렌스크 현 콤소몰 위원회 서기
  • 1921–1922콤소몰 중앙위원회 정치교육부장
  • 1922전연방 피오네르 조직 중앙국 초대 의장
  • 1922–1924트란스캅카스 지역 콤소몰 위원회 서기
  • 1924–1928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총서기
  • 1924–1934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24–1930전연방 공산당 조직국 후보위원
  • 1930–1931트란스캅카스 지역 당위원회 제2서기
  • 1931–1933중앙소비자조합 간부회 위원·전연방급식조합 의장
  • 1933–1937무르만스크·키로프 철도 정치부장
  • 1937남동철도 관리국장

바실리 미하일로비치 안드리아노프

Василий Михайлович Андрианов

전시 스베르들롭스크를 이끌고 숙청된 레닌그라드를 재건한 스탈린 시대의 지역 당 보스

1942년,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원회는 「베르흐-이세츠키 제철소에서 전채요리와 술이 곁들여진 야회를 개최한 건에 대하여」라는 결의를 채택했다. 공장 간부들의 연회를 규탄한 이 결의는 안드리아노프의 강경한 통치 스타일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바실리 안드리아노프는 스탈린 시대 후기 소련의 주요 지역당 지도자로,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원회 제1서기(1939~1946)와 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1949~1953)를 지냈다. 전시 스베르들롭스크에서 신타길 제철소와 스레드네우랄스크 제련소 건설을 진두지휘하고 방산 생산을 총괄하여 네 개의 레닌 훈장을 받았다.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 후 말렌코프의 추천으로 레닌그라드에 파견되어 대규모 당·국가 기구 개편을 주도했고, 1952년 10월 스탈린에 의해 당 중앙위원회 간부회(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스탈린 사후인 1953년 3월 간부회에서 제외되고 곧 레닌그라드 당직에서도 해임되었으며, 국가통제부 차관을 거쳐 1956년 연금 생활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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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5붉은군대 복무
  • 1926볼셰비키당 입당
  • 1937–1938코브로프 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38스탈린그라드 주당위원회 제2서기
  • 1939–1946스베르들롭스크 주·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46–1952당 중앙위원회 조직국 위원
  • 1949–1953레닌그라드 주·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52–1953당 중앙위원회 간부회 위원
  • 1953–1956소련 국가통제부 차관

판텔레이몬 콘드라티예비치 포노마렌코

Пантелеймон Кондратьевич Пономаренко

스탈린이 신임한 유격대 총사령관, 후계 문턱에서 밀려나다

1941년 12월, 스탈린은 포노마렌코를 불러들여 여러 시간 면담한 끝에 전 유격대를 총괄할 중앙본부 설립안을 직접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독일군 후방을 향한 '철도전쟁'의 씨앗이 그날 뿌려졌다.

스탈린이 신임한 유격대 지휘관으로 '철도전쟁'을 기획해 독일군 후방을 마비시켰다. 1952년 간부국에 올라 후계자로 거론됐으나, 스탈린 사후 실권을 잃고 외교관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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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7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 1939년 서부 벨라루스 병합 관리
  • 1942–1944중앙유격대본부장, '철도전쟁'·'콘체르트' 작전 기획·지휘
  • 1944–1948벨라루스 인민위원회의·각료회의 의장
  • 1948–1953중앙위 서기, 조달장관, 당 간부국원 — 스탈린 말기 급부상
  • 1953–1954소련 초대 문화장관
  • 1954–1955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
  • 1955–1962폴란드·인도·네팔·네덜란드 주재 대사
  • 1965–1978중앙위 부설 사회과학연구소 교수

바실 파블로비치 므자바나제

Васил Павлович Мжаванадзе

19년 집권한 그루지야의 보스, 그림자 경제의 대부

1965년 6월, 스탈린 격하가 지나쳤다고 판단한 므자바나제는 스탈린의 고향 고리에 있는 박물관을 다시 열게 하고 스탈린의 말을 인용했다: "우리 당은 검증된 사람에게만 문이 열리는 요새다."

1902년 9월 7일(구력)/9월 20일(신력) 쿠타이시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15년부터 공장에서 일했고, 1924년 붉은 군대에 들어가 1927년 당에 입당했다. 1937년 레닌그라드 군사정치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군사정치위원으로 복무했고, 대조국전쟁 중에는 제42군·제2충격군·제21군 군사평의회 위원을 지냈다. 1953년 9월 20일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로 선출되어 19년간 공화국을 이끌었고, 1957년부터 1972년까지 소련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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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24공장 노동자
  • 1924–37붉은 군대 복무, 1927년 입당
  • 1937–41군사정치위원, 소련-핀란드 전쟁 참전
  • 1941–45대조국전쟁: 레닌그라드 전선·여러 야전군 군사평의회 위원
  • 1945–53키예프·프리카르파티예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
  • 1953–72그루지야 당 중앙위 제1서기
  • 1957–72CPSU 정치국(상임위) 후보위원
  • 1972.9부패 혐의로 해임, 연금 생활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코사레프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Косарев

콤소몰을 이끌며 대숙청을 집행하다 그 숙청에 삼켜진 젊은 지도자

북극점-1 부빙기지 귀환 기념 크렘린 연회에서 스탈린이 코사레프와 잔을 부딪히고 껴안아 입맞춘 뒤 귀에 속삭였다. 코사레프가 아내 마리야에게 전한 그 말은 '배신하면 죽인다'였다. 회고록과 유. 보린의 저술로 전해지는 일화다.

모스크바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콤소몰 창립과 함께 가입하고 1919년 볼셰비키당에 들어갔다. 내전 참전 여부에 대해서는 적군에 자원 입대했다는 기록과 병을 이유로 복무를 피했다는 기록이 엇갈린다. 25세에 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가 되어 스파르타크 협회를 세웠고, 대숙청기에는 콤소몰원 14만 1천여 명 제명을 관장했으며 1937년 2월 부하린·리코프의 체포와 사형에 찬성표를 던졌다. 미샤코바 사건 뒤 1938년 11월 콤소몰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해임되고 11월 28일 체포되었으며, 로도스의 고문에도 자백하지 않은 채 1939년 2월 23일 레포르토보 교도소에서 총살되었다. 1954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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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콤소몰 창립과 동시 가입, 볼셰비키당 입당
  • 1922–26모스크바 바우만·펜자 주 콤소몰 제1서기
  • 1926지노비예프 지지파 숙청 위해 레닌그라드 파견
  • 1929–38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 25세 최연소 지도자
  • 1934당 중앙위원·오르그뷰로 정위원 — 최연소
  • 1936–38콤소몰 대숙청: 141,337명 제명
  • 1938–39베리야가 직접 체포, 로도스의 고문에도 자백 거부, 총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