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은 마치 무와 같다. 겉은 붉지만 속은 희다 — 『세대 교체』와 후속 저작에서 반복한 통찰.
페테르부르크 출신 법학자이자 카데트당원. 1913년 모스크바대학을 졸업한 후 내전기 콜차크 정부 언론국장으로 백군에 참여했다. 패배 후 하얼빈 망명길에 올라 『세대 교체』(1921)를 발표, 볼셰비키만이 러시아 국가를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스메노베호프스트보를 창시했다. 네프 시기 소련을 '겉은 붉고 속은 흰 무'라 평했고, 그의 사상은 1925년 제14차 당대회에서 스탈린과 지노비예프의 논쟁 대상이 되었다. 1935년 귀국해 모스크바교통공학원 교수로 일했고, 1937년 6월 체포되어 9월 14일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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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1916모스크바대학 법학부 졸업(1급), 동 대학 사립강사; 카데트당 입당
1917–1918페름대학 정교수, 법학부에서 국가법·법철학 강의
1919–1920콜차크 정부 언론국장; 내전기 백군 이념전선 담당
1920–1935하얼빈 망명, 법학부 교수 겸 КВЖД 고문; 『Окно』 창간, 『세대 교체』(1921)로 스메노베호프스트보 창시
미국 컬럼비아에서 존 듀이에게 배운 실용주의 철학자로, 문어 대신 백화문으로 글을 쓰는 문학혁명을 이끌어 중국인의 문자 생활을 바꾸었다. 신청년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도, 헌정을 저버린 국민정부와도 거리를 두었으며 1962년 타이베이에서 사망했다.
미국에서 존 듀이에게 배운 철학자로 1917년 『신청년』에 문학개량을 제안해 백화문 운동을 열었다. 5·4 시기 「문제를 많이 연구하고 주의(主義)를 적게 말하라」며 마르크스주의로 기운 리다자오·천두슈와 갈라섰다. 베이징대 교수와 총장을 지냈고 항일전쟁기 주미대사로 일했다. 1949년 뒤 미국과 대만에서 활동했으며 대륙에서는 1950년대 그의 사상을 겨냥한 대규모 비판운동이 벌어졌다. 타이베이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유령적 동반자, 기술복제시대 예술론으로 자본주의 문화를 해부한 마르크스주의 문예비평가
「역사철학 테제」에서 벤야민은 이렇게 썼다: "문명의 기록물 가운데 동시에 야만의 기록물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베를린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발터 벤야민은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깊이 교차하면서도 어느 학파에도 포섭되지 않은 독보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화비평가였다. 유대 신비주의와 역사적 유물론을 독창적으로 결합한 그의 사유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5)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예술의 '아우라'를 붕괴시키는 메커니즘을 분석했고, 유작 「역사철학 테제」(1940)에서는 파울 클레의 그림에 빗대 '역사의 천사'라는 강렬한 알레고리로 진보서사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았다. 망명 중에도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19세기 파리의 자본주의 문화를 고고학적으로 발굴했고, 브레히트·아도르노·숄렘과의 긴장 어린 교류 속에서 기술·이미지·역사에 관한 가장 선구적인 마르크스주의적 통찰을 남겼다.
1944년 레바논 회의에서 그는 저항운동이 세운 해방 지역의 대표성을 전국 정부 구상에 반영하려 했다.
알렉산드로스 스볼로스는 노동권과 민주적 헌정 질서를 연구한 그리스의 헌법학자이자 사회주의 정치인이었다. 추축국 점령기에 민족해방정치위원회 의장으로서 해방 지역의 행정과 민중 대표 제도 구상을 이끌었고, 레바논 회의에서 저항운동과 망명정부의 연합을 모색했다. 해방 뒤에는 국민통합정부의 재무장관으로 경제 재건을 추진했으나, 좌파 장관들과 함께 사임하며 저항군 해산에 반대했다. 그는 반공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서 독자적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지키려 했고, 그 긴장은 전후 그리스 정치에서 그의 영향력과 고립을 함께 만들었다.
14권 『소비에트 러시아사』의 저자, 네프의 "시장과 계획의 잠재적 양립불가능성"을 진단한 역사가
'신경제정책의 원리와 계획의 원리 사이에는 잠재적 양립불가능성이 있었다.' 『계획경제의 기초』(1969)에서.
영국 외교관 출신 역사가로, 14권의 『소비에트 러시아사』(1950–1978)를 집필해 초기 소비에트 권력의 정치·경제·사회를 총체적으로 기록했다. 국제정치학에서는 『20년의 위기』(1939)로 현실주의의 기초를 놓았고, 『역사란 무엇인가』(1961)에서 역사 서술을 사실 축적이 아닌 해석의 과정으로 재정의했다. 네프에 관해 '신경제정책의 원리와 계획의 원리 사이에는 잠재적 양립불가능성이 있었다'고 진단했으며, 이는 네프의 생존 가능성을 둘러싼 4대 역사학적 입장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말년까지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로 소비에트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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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36영국 외무부 외교관, 파리 강화회의(1919) 및 리가 대사관(1925~1929) 근무
1943년, 그는 광범위한 우라늄 탐사 대신 중앙아시아에 한정된 자원을 집중하자고 제안했다.
드미트리 셰르바코프는 중앙아시아와 희소금속을 연구한 소련의 지질학자·지구화학자·지리학자이자 과학 조직가였다. 그는 파미르와 중앙아시아 탐사를 이끌며 광상 분포를 예측하는 금속생성학적 방법을 발전시켰고, 전시에는 전략 자원 탐사에 기여했다. 1943년 우라늄위원회에 참여해 소련의 우라늄 매장 가능성을 분석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제한된 시간과 자원을 중앙아시아 탐사에 집중하자고 제안했다. 이 선택은 초기 소련 원자력 사업에 필요한 우라늄 탐사망을 조직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1919년 말, 에이헤의 제5군은 콜차크군의 후퇴를 토볼강에서 옴스크와 톰스크를 거쳐 크라스노야르스크까지 밀어붙였다.
겐리흐 에이헤는 라트비아계 노동자 가정 출신의 혁명가이자 적군 지휘관, 군사사 연구자였다. 그는 1919년 동부전선에서 제26소총사단을 이끌어 백군 후방을 찌르는 기동을 펼쳤고, 제5군 사령관으로 콜차크군의 후퇴를 토볼강에서 시베리아 내륙까지 추격했다. 이후 극동공화국의 군사적 통합을 맡았지만, 대숙청기의 허위 혐의로 수감되었다가 1954년 무죄로 재활되었다.
1950년 1월, 의장석에 앉은 장팅푸를 향해 말리크가 '이것은 회의가 아니라 회의의 패러디'라고 외치고 퇴장했다.
청나라 외교문서를 실증적으로 연구한 역사가에서 중화민국 외교관으로 전환한 인물이다. 컬럼비아대에서 박사를 마치고 난카이·칭화대에서 중국 근대외교사 연구를 개척했으며, 1935년 학계를 떠나 국민정부에 합류해 주소대사와 상임 유엔대표를 지냈다. 1950년 1월 안보리 의장으로 회의를 주재할 때 소련 대표 말리크가 중공이 아닌 국민당 대표와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없다며 퇴장했고, 이 공백은 6월 한국전쟁 유엔군 결의가 거부권 없이 통과되는 결정적 조건이 되었다.
코민테른 3대 지도기구에 모두 참여한 유일한 비볼셰비키. 그리고 최초의 스탈린 비판 전기 저자.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지 열흘 뒤인 1917년 11월 17일, 스물두 살의 수바린은 이렇게 썼다: "레닌과 그 동지들에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볼셰비키와 그 지도자의 독재가 될 것이 두렵다. 이는 러시아 노동계급에게, 그리고 이어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에게도 재앙이 될 수 있다. […] 우리가 바라는 것은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합의로 안정된 권력을 조직하고, 그것이 한 인간의 권력이 아니라 진정한 인민의 권력이 되는 것이다." — 「최대강령파 코뮌」, 『세 푸아 디르』 제78호
코민테른 3대 지도기구에 모두 참여한 유일한 비볼셰비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 트로츠키 옹호로 제명된 후 1935년 최초의 스탈린 비판 전기를 출간, 소비에트학의 선구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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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프랑스군 동원 —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전선 참호전 경험
1916SFIO 입당, 반전 소수파 기관지 《Le Populaire》에서 활동 — '수바린' 필명 채택
1919제3인터내셔널 위원회 활동 — 코민테른 선전물 배포
1920.5'무정부주의 음모' 혐의로 체포 — 산테 교도소 수감 중 《Bulletin Communiste》 집필
백군이 그녀를 총살하려 했을 때, 그녀의 키가 너무 작아 총알이 높은 모자에만 맞았고, 그녀는 다리 밑 강물로 떨어져 갈대숲에 숨어 살아남았다.
볼셰비키 혁명가 출신의 소비에트 수학자이자 철학자로, 소련에서 수리논리학을 독자적 학문 분야로 부활시키고 제도화한 창시자다. 내전기 백군에게 체포되어 총살 직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으며, 1933년 마르크스의 『수학 초고』를 발굴·출판하여 전 세계 마르크스주의 수학 연구의 초석을 놓았다. 1930년대에는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서 '관념론적' 수학을 공격했으나, 이후 입장을 전환하여 스탈린 시대에 탄압받던 수리논리학을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되살려냈고, 1935년 비트겐슈타인의 소련 이주를 만류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스탈린 사후 역사학의 탈스탈린화를 주도한 노동계급사 권위자: 소련 최초 여성 역사학 아카데미크
1953년 『역사의 제문제』 주필이 된 판크라토바는 스탈린의 『단기 강좌』 도식을 공개 토론에 부치며 역사학의 탈스탈린화를 추진했다. 1957년 3월 중앙위 결정은 그녀의 노선을 '자유주의와 부르주아 객관주의'로 규탄하고 사실상 해임했다.
소비에트 노동계급사와 혁명운동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약 200편의 저작을 남겼다. 소련 역사학 분야 최초의 여성 정회원(아카데미크)이자, 카자흐스탄사의 첫 종합적 집필을 지도했다. 스탈린 사후 『역사의 제문제』 주필로서 「소련 공산당사 단기 강좌」의 도식적 서사를 재검토하고 탈스탈린화를 주도했으나, 1957년 중앙위로부터 '자유주의와 부르주아 객관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실질적으로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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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내전기 오데사 유격대 활동
1922–1925붉은 교수양성소 수학
1926–1939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 레닌 정치군사아카데미 · 모스크바 국립대 등에서 교편
「사회에 이로운 것은 모든 기업에도 이로워야 한다」 — 1962년 《프라우다》 논문의 핵심 명제
소련의 경제학자. 1962년 9월 《프라우다》에 발표한 논문 「계획, 이윤, 프리미엄」으로 전연방 경제 토론을 촉발하여 1965년 코시긴 개혁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윤 지표를 기업 평가의 핵심으로 삼고 '사회에 이로운 것이 개별 기업에도 이로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0년대 소련 최초의 기계식 회계 스테이션을 창설했고, 1938년 조작된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1939년 말 복권되었다. 아내 레기나 고로비츠는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누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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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볼린현 슬라부타에서 산림영지 관리인의 아들로 출생
1920키예프대학교 법학부 졸업
1923–1929우크라이나 노동연구소 실습생, 할키우 공장에 소련 최초 기계식 회계 스테이션 창설
'그것은 가장 진전된 위치에서 위대한 거부, 즉 존재하는 것에 대한 항의다' — 《일차원적 인간》(1964)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핵심 철학자로,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 정신분석을 결합하여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 이론을 전개했다. 《에로스와 문명》(1955)에서 자본주의의 억압 구조를 분석하고 해방된 에로스의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탐구했으며, 《일차원적 인간》(1964)에서는 기술적 풍요가 비판 의식을 잠식하는 현대 산업사회를 '일차원적 사회'로 규정하며 억압적 탈승화 개념을 제시했다. 독일계 유대인으로 나치를 피해 미국에 망명, 전시 OSS에서 근무하고 브랜다이스대와 UC샌디에이고에서 가르치며 1960년대 학생 운동과 신좌파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위대한 거부'로 상징되는 그의 급진적 사유는 비판 이론과 해방 정치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스탈린이 헤겔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하자, 성미 급한 라트비아인 철학자 스텐은 크렘린 사무실에서 제자의 양복 옷깃을 붙잡고 흔들며 가르쳤다. 수업 후 친구에게 남긴 말: '코바는 10년 안에 드레퓌스와 베일리스 재판을 무색하게 만들 짓을 할 거야.'
라트비아 출신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붉은교수양성소 1기 졸업 후 스탈린에게 헤겔 변증법을 개인교습하며 소비에트 철학 제도화의 중심에 섰다. 1928년 부하린의 우익 반대파로 돌아선 뒤 1932년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사건으로 유배되었고, 잠시 복권되었으나 1937년 처형되었다.
1944년 6월 4일 밤, 스태그는 폭풍 뒤 6월 6일 새벽까지 이어질 짧은 호전을 예보했다.
제임스 스태그는 영국 기상청 출신의 스코틀랜드 기상학자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기상 자문을 맡았다. 그는 해상 관측, 정찰 비행, 암호 해독 자료를 종합해 군사작전에 필요한 예보를 만들었고, 기상학을 지휘부의 작전 판단과 연결했다. 1944년 6월 4일 폭풍 뒤 6월 6일의 짧은 호전 가능성을 제시해 노르망디 상륙의 실행 조건을 판단하게 했으며, 이는 완벽한 날씨가 아니라 감수 가능한 위험을 과학적으로 규정한 결정이었다. 전후에도 기상청에서 일하며 자신의 경험을 『오버로드 예보』로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