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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연구 인물 296명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우스트랴로프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Устрялов
학술·연구 소련 러시아 1890–1937 ✕ 처형

국가볼셰비즘을 창시하고 볼셰비키의 국가주의적 전환을 예견한 망명 법학자

소련은 마치 무와 같다. 겉은 붉지만 속은 희다 — 『세대 교체』와 후속 저작에서 반복한 통찰.

페테르부르크 출신 법학자이자 카데트당원. 1913년 모스크바대학을 졸업한 후 내전기 콜차크 정부 언론국장으로 백군에 참여했다. 패배 후 하얼빈 망명길에 올라 『세대 교체』(1921)를 발표, 볼셰비키만이 러시아 국가를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스메노베호프스트보를 창시했다. 네프 시기 소련을 '겉은 붉고 속은 흰 무'라 평했고, 그의 사상은 1925년 제14차 당대회에서 스탈린과 지노비예프의 논쟁 대상이 되었다. 1935년 귀국해 모스크바교통공학원 교수로 일했고, 1937년 6월 체포되어 9월 14일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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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6모스크바대학 법학부 졸업(1급), 동 대학 사립강사; 카데트당 입당
  • 1917–1918페름대학 정교수, 법학부에서 국가법·법철학 강의
  • 1919–1920콜차크 정부 언론국장; 내전기 백군 이념전선 담당
  • 1920–1935하얼빈 망명, 법학부 교수 겸 КВЖД 고문; 『Окно』 창간, 『세대 교체』(1921)로 스메노베호프스트보 창시
  • 1925『혁명의 기치 아래』 출간; 제14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지노비예프의 공개 논쟁
  • 1925–1934КВЖД 교육부장(1925–28), 도서관장(1928–34); 중국학 서지 편찬
  • 1935–1937귀국, 모스크바교통공학원 교수; 1937년 6월 체포, 9월 14일 총살

후스

胡适
학술·연구 중국 중국 1891–1962 ○ 심장마비

백화문 운동을 이끈 신문화운동의 자유주의자, 뒤에 국민정부의 외교관

미국 컬럼비아에서 존 듀이에게 배운 실용주의 철학자로, 문어 대신 백화문으로 글을 쓰는 문학혁명을 이끌어 중국인의 문자 생활을 바꾸었다. 신청년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도, 헌정을 저버린 국민정부와도 거리를 두었으며 1962년 타이베이에서 사망했다.

미국에서 존 듀이에게 배운 철학자로 1917년 『신청년』에 문학개량을 제안해 백화문 운동을 열었다. 5·4 시기 「문제를 많이 연구하고 주의(主義)를 적게 말하라」며 마르크스주의로 기운 리다자오·천두슈와 갈라섰다. 베이징대 교수와 총장을 지냈고 항일전쟁기 주미대사로 일했다. 1949년 뒤 미국과 대만에서 활동했으며 대륙에서는 1950년대 그의 사상을 겨냥한 대규모 비판운동이 벌어졌다. 타이베이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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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6베이징대학 교수
  • 1938–1942주미 중화민국 대사
  • 1946–1948베이징대학 총장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학술·연구 독일 독일 1892–1940 ✕ 모르핀 과다복용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유령적 동반자, 기술복제시대 예술론으로 자본주의 문화를 해부한 마르크스주의 문예비평가

「역사철학 테제」에서 벤야민은 이렇게 썼다: "문명의 기록물 가운데 동시에 야만의 기록물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베를린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발터 벤야민은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깊이 교차하면서도 어느 학파에도 포섭되지 않은 독보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화비평가였다. 유대 신비주의와 역사적 유물론을 독창적으로 결합한 그의 사유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5)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예술의 '아우라'를 붕괴시키는 메커니즘을 분석했고, 유작 「역사철학 테제」(1940)에서는 파울 클레의 그림에 빗대 '역사의 천사'라는 강렬한 알레고리로 진보서사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았다. 망명 중에도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19세기 파리의 자본주의 문화를 고고학적으로 발굴했고, 브레히트·아도르노·숄렘과의 긴장 어린 교류 속에서 기술·이미지·역사에 관한 가장 선구적인 마르크스주의적 통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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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베른대학교에서 「독일 낭만주의의 예술비평 개념」으로 박사학위 취득
  • 1925프랑크푸르트대학교 교수자격 논문 『독일 비극의 기원』 제출했으나 철회
  • 1928『일방통행로』와 『독일 비극의 기원』 출간
  • 1933나치 정권 성립 후 독일을 영구히 떠나 파리로 망명
  • 1935–1936「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집필 및 프랑스어판 발표
  • 1940「역사철학 테제」 집필, 피레네 국경 포트보우에서 자결

알렉산드로스 스볼로스

Αλέξανδρος Σβώλος
학술·연구 소속 미확정 그리스 그리스계 아로마니아인 1892–1956 ○ 자연사

민중주권을 설계한 사회주의 헌법학자

1944년 레바논 회의에서 그는 저항운동이 세운 해방 지역의 대표성을 전국 정부 구상에 반영하려 했다.

알렉산드로스 스볼로스는 노동권과 민주적 헌정 질서를 연구한 그리스의 헌법학자이자 사회주의 정치인이었다. 추축국 점령기에 민족해방정치위원회 의장으로서 해방 지역의 행정과 민중 대표 제도 구상을 이끌었고, 레바논 회의에서 저항운동과 망명정부의 연합을 모색했다. 해방 뒤에는 국민통합정부의 재무장관으로 경제 재건을 추진했으나, 좌파 장관들과 함께 사임하며 저항군 해산에 반대했다. 그는 반공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서 독자적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지키려 했고, 그 긴장은 전후 그리스 정치에서 그의 영향력과 고립을 함께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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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아테네대학교 헌법학 박사 취득, 강의 시작
  • 1917–1920국가경제부 노동·사회정책국장
  • 1929–1946아테네대학교 헌법학 교수
  • 1941–1943마케도니아·트라키아 위원회 의장
  • 1944.04–09민족해방정치위원회 의장, 외무·교육·종교·국민계몽 담당 서기
  • 1944.09–12국민통합정부 재무장관
  • 1945–1953사회당·인민민주주의동맹 의장
  • 1950, 1956테살로니키 선출 국회의원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코로빈

Евген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оровин
학술·연구 소련 러시아 1892–1964 ○ 자연사

소비에트 국제법학의 창시자, '과도기 국제법' 개념을 정립한 이론가

국제법을 부르주아적 잔재로 부정하는 대신, 체제 간 '과도기적' 국제법을 정식화했다. 한스 켈젠은 이를 소비에트 법이론 내 '해결 불가능한 모순'이라고 평했다.

소비에트 국제법 이론의 창시자. 1924년 『과도기의 국제법』에서 체제 간 '과도기적 국제법' 개념을 정립했다. 우주법 선구자로도 평가되며, 스탈린 시대를 생존하여 소비에트 국제법학의 제도적 토대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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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모스크바 대학 법학부 졸업
  • 1918–1927러시아 적십자사 중앙위원회 서기 겸 외국부장
  • 1923모스크바 국립대학 교수
  • 1924『과도기의 국제법』 출간 — 소비에트 국제법 이론의 기초 확립
  • 1938법학박사 학위 취득
  • 1945–1946유엔 준비위원회 소련 대표단 전문가, 런던·파리 외무장관회의 자문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48–1952소련 과학아카데미 법학연구소 소장
  • 1957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 위원
  • 1959과학아카데미 행성간 공간 법률문제 위원회 위원장
  • 1960–1964모스크바 국립대학 법학부 국제법 주임

E. H. 카

E. H. Carr
학술·연구 영국 영국 1892–1982 ○ 자연사

14권 『소비에트 러시아사』의 저자, 네프의 "시장과 계획의 잠재적 양립불가능성"을 진단한 역사가

'신경제정책의 원리와 계획의 원리 사이에는 잠재적 양립불가능성이 있었다.' 『계획경제의 기초』(1969)에서.

영국 외교관 출신 역사가로, 14권의 『소비에트 러시아사』(1950–1978)를 집필해 초기 소비에트 권력의 정치·경제·사회를 총체적으로 기록했다. 국제정치학에서는 『20년의 위기』(1939)로 현실주의의 기초를 놓았고, 『역사란 무엇인가』(1961)에서 역사 서술을 사실 축적이 아닌 해석의 과정으로 재정의했다. 네프에 관해 '신경제정책의 원리와 계획의 원리 사이에는 잠재적 양립불가능성이 있었다'고 진단했으며, 이는 네프의 생존 가능성을 둘러싼 4대 역사학적 입장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말년까지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로 소비에트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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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36영국 외무부 외교관, 파리 강화회의(1919) 및 리가 대사관(1925~1929) 근무
  • 1936–1947애버리스트위스 우드로 윌슨 국제정치학 교수
  • 1941–1946『타임스』 부편집장
  • 1950–197814권 『소비에트 러시아사』 간행
  • 1953–1955옥스퍼드 베일리얼 칼리지 정치학 펠로
  • 1955–1982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 펠로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셰르바코프

Дмитрий Иванович Щербаков
학술·연구 소련 러시아계 1893–1966 ○ 자연사

우라늄 탐사의 지질학적 설계자

1943년, 그는 광범위한 우라늄 탐사 대신 중앙아시아에 한정된 자원을 집중하자고 제안했다.

드미트리 셰르바코프는 중앙아시아와 희소금속을 연구한 소련의 지질학자·지구화학자·지리학자이자 과학 조직가였다. 그는 파미르와 중앙아시아 탐사를 이끌며 광상 분포를 예측하는 금속생성학적 방법을 발전시켰고, 전시에는 전략 자원 탐사에 기여했다. 1943년 우라늄위원회에 참여해 소련의 우라늄 매장 가능성을 분석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제한된 시간과 자원을 중앙아시아 탐사에 집중하자고 제안했다. 이 선택은 초기 소련 원자력 사업에 필요한 우라늄 탐사망을 조직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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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페르가나 라듐 탐사대 선임 채집원
  • 1921–1930자연생산력연구위원회 연구원
  • 1925–1930국립 라듐 연구소 광물·지구화학 부문 책임자
  • 1928–1936파미르·중앙아시아 종합 탐사대 학술 책임자
  • 1930–1938지구화학연구소 및 지질과학연구소 부소장
  • 1942–1943소련 과학아카데미 지질과학연구소 코카서스 탐사대 대장
  • 1943전연방 광물원료연구소 우라늄위원회 위원
  • 1953–196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겐리흐 흐리스토포로비치 에이헤

Генрих Христофорович Эйхе
학술·연구 소련 라트비아계 러시아 제국 주민 1893–1968 ○ 자연사

콜차크의 후퇴를 끝까지 압박한 적군 지휘관

1919년 말, 에이헤의 제5군은 콜차크군의 후퇴를 토볼강에서 옴스크와 톰스크를 거쳐 크라스노야르스크까지 밀어붙였다.

겐리흐 에이헤는 라트비아계 노동자 가정 출신의 혁명가이자 적군 지휘관, 군사사 연구자였다. 그는 1919년 동부전선에서 제26소총사단을 이끌어 백군 후방을 찌르는 기동을 펼쳤고, 제5군 사령관으로 콜차크군의 후퇴를 토볼강에서 시베리아 내륙까지 추격했다. 이후 극동공화국의 군사적 통합을 맡았지만, 대숙청기의 허위 혐의로 수감되었다가 1954년 무죄로 재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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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러시아 제국군 제245보병연대 중대장, 참모대위
  • 1917제245보병연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 1918–1919적군 동부전선 연대·여단 지휘관
  • 1919제26소총사단장
  • 1919–1920제5군 사령관
  • 1920–1921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 1922벨로루시·페르가나 지역 소련군 지휘관
  • 1924–1936대외무역 인민위원부 관료
  • 1954–1968군사사 연구자, 내전사 저술가

장팅푸

蒋廷黻
외교·국제활동 중국국민당 중화민국 중국 (한족) 1895–1965 ○ 자연사

소련 대표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게 만든, 안보리 의장석의 국민당 외교관

1950년 1월, 의장석에 앉은 장팅푸를 향해 말리크가 '이것은 회의가 아니라 회의의 패러디'라고 외치고 퇴장했다.

청나라 외교문서를 실증적으로 연구한 역사가에서 중화민국 외교관으로 전환한 인물이다. 컬럼비아대에서 박사를 마치고 난카이·칭화대에서 중국 근대외교사 연구를 개척했으며, 1935년 학계를 떠나 국민정부에 합류해 주소대사와 상임 유엔대표를 지냈다. 1950년 1월 안보리 의장으로 회의를 주재할 때 소련 대표 말리크가 중공이 아닌 국민당 대표와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없다며 퇴장했고, 이 공백은 6월 한국전쟁 유엔군 결의가 거부권 없이 통과되는 결정적 조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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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9난카이대학 역사학과 교수·주임
  • 1929–1935칭화대학 역사학과 주임·문학원장
  • 1935–1936국민정부 행정원 정무처장
  • 1936–1938주소 중화민국 대사
  • 1944–1946UNRRA 중국 대표·행정원 선후구제총서 서장
  • 1947–1962중화민국 상임 유엔대표·안보리 대표
  • 1961–1965주미 중화민국 대사 (유엔대표 겸임)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바흐친

Михаил Михайлович Бахтин
학술·연구 소련 러시아 1895–1975 ○ 자연사

대화와 카니발의 철학자, 30년의 망각을 뚫고 귀환하다

“예술 속에서 내가 체험하고 이해한 모든 것에 나는 내 삶으로 응답해야 한다.” — 「예술과 책임」(1919)

1920년대 '바흐친 서클'을 이끈 문학이론가로, 대화주의·폴리포니·카니발화 개념을 통해 언어와 문학 서사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했다. 30여 년의 망각 끝에 재발견되어 세계 인문학 전반을 재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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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4네벨·비테프스크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바흐친 서클' 형성, 「예술과 책임」 발표
  • 1924–1928레닌그라드에서 연구활동, 『도스토예프스키 창작의 문제들』(1929) 집필
  • 1929–1934OGPU 체포 → 솔로프키 5년형 → 쿠스타나이(카자흐스탄) 유배, 회계원으로 생계
  • 1936–1961사란스크 교육대학 교수, 1946년 라블레 논문으로 후보박사 학위 취득
  • 1963–1975재발견 — 『도스토예프스키 시학』 개정판(1963)·『라블레』(1965) 출간, 1967년 복권, 1970년 작가동맹 가입
학술·연구 소속 미확정 프랑스 러시아 1895–1984 ○ 자연사

코민테른 3대 지도기구에 모두 참여한 유일한 비볼셰비키. 그리고 최초의 스탈린 비판 전기 저자.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지 열흘 뒤인 1917년 11월 17일, 스물두 살의 수바린은 이렇게 썼다: "레닌과 그 동지들에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볼셰비키와 그 지도자의 독재가 될 것이 두렵다. 이는 러시아 노동계급에게, 그리고 이어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에게도 재앙이 될 수 있다. […] 우리가 바라는 것은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합의로 안정된 권력을 조직하고, 그것이 한 인간의 권력이 아니라 진정한 인민의 권력이 되는 것이다." — 「최대강령파 코뮌」, 『세 푸아 디르』 제78호

코민테른 3대 지도기구에 모두 참여한 유일한 비볼셰비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 트로츠키 옹호로 제명된 후 1935년 최초의 스탈린 비판 전기를 출간, 소비에트학의 선구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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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프랑스군 동원 —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전선 참호전 경험
  • 1916SFIO 입당, 반전 소수파 기관지 《Le Populaire》에서 활동 — '수바린' 필명 채택
  • 1919제3인터내셔널 위원회 활동 — 코민테른 선전물 배포
  • 1920.5'무정부주의 음모' 혐의로 체포 — 산테 교도소 수감 중 《Bulletin Communiste》 집필
  • 1920.12투르 대회: 수바린 결의안 채택으로 프랑스 공산당(SFIC) 창당 — 명예의장 추대
  • 1921–1924코민테른 집행위원회·상임위원회·서기국 위원 — 3대 기구 모두에 참여한 유일한 비볼셰비키
  • 1924볼셰비키 13차 대회에서 트로츠키 옹호 — 코민테른과 프랑스 공산당에서 전격 제명
  • 1926크루프스카야→라코프스키 경로로 입수한 레닌의 유언장을 프랑스에서 최초 출판
  • 1927–1935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분석하며 트로츠키와 결별 — 민주공산주의서클(CCD) 조직
  • 1935《Staline, aperçu historique du bolchévisme》 출간 — 최초의 비판적 스탈린 평전
  • 1935사회사연구소(Institut d'Histoire Sociale) 설립 — 암스테르담 IISH의 프랑스 지부
  • 1939.5《피가로》 지면에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100일 앞서 예측
  • 1940–1947비시 정권에 체포, 석방 후 미국 망명 — 1947년 귀환
  • 1947–1976《Est & Ouest》 및 《Le Contrat Social》 발행 — 냉전기 반스탈린 좌파 소비에트학 주도

레프 세묘노비치 비고츠키

Лев Семёнович Выготский
학술·연구 소련 벨라루스 1896–1934 ○ 결핵

문화역사심리학의 창시자, 근위발달영역 개념을 정립한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자

마지막 말: "나는 준비됐다" — 젊은 시절 햄릿 에세이에 쓴 구절: "결심이 아니라 준비 — 그것이 햄릿의 상태다."

사회문화적 상호작용으로 고등정신기능이 형성된다는 문화역사이론을 정립한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자다. 『사고와 언어』를 남기고 37세에 결핵으로 사망했으나, 세계 발달심리학과 교육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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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모스크바대학 법학부 및 샤냡스키대학 역사철학부 졸업
  • 1919–1924고멜에서 교사·연극 평론가·출판 편집자로 활동하며 심리학 연구 시작
  • 1924모스크바 실험심리학연구소 연구원, 루리야·레온티예프와 '비고츠키 서클' 형성
  • 1925–1926『예술심리학』으로 학위 취득, 결핵 악화로 장기 입원
  • 1927–1931결함학연구소 과학지도자, 제2모스크바대학·공산주의교육아카데미 교수
  • 1932–1934『사고와 언어』 집필, 근위발달영역 개념 제안, 하리코프에서 의학 공부
  • 1934전연방실험의학연구소 심리학 부문 초청받았으나 6월 11일 결핵으로 사망

보리스 이그나티예비치 아르바토프

Борис Игнатьевич Арватов
학술·연구 소련 리투아니아 1896–1940 ✕ 자살

아방가르드의 생쥐스트, 생산예술의 이론가

「예술 밖으로 뛰어내려야 비로소 예술을 이해할 수 있다」 — 나탄 알트만에 관한 책(1924)의 마지막 주석에서, 아르바토프는 형식 분석에서 사회적 사실로의 자신의 방법론적 도약을 이 한 문장으로 정식화했다.

프롤레트쿨트 이론가이자 ЛЕФ 공동 창립자. 예술을 산업과 융합하는 '생산예술'을 주창하며 구성주의 미학의 기초를 놓았다. 전시 뇌진탕 후유증으로 1920년대 말 창작을 중단했고 1940년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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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바르샤바에서 문학 활동 시작
  • 1917사회혁명당원, 툴라 현 위원회 부의장, 제1차 소비에트 대회 및 제헌의회 대의원
  • 1919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폴란드 전선에서 정치위원으로 복무
  • 1920–1923프롤레트쿨트 이론가, ИНХУК 연구원, ЛЕФ 공동 창립과 잡지 활동
  • 1923–1926『예술과 계급』(1923), 『예술과 생산』(1926) 출간; 형식-사회학적 방법 정식화와 생산예술론 전개
  • 1927–1930『사회학적 시학』(1928), 『선동 및 생산 예술에 관하여』(1930) 출간; 뇌진탕 후유증 악화로 활동 위축
  • 1940오랜 투병 끝에 모스크바에서 자살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 야놉스카야

Софь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Яновская
학술·연구 소비에트 러시아 1896–1966 ○ 당뇨병

소련 수리논리학을 부활시킨 볼셰비키 수학자

백군이 그녀를 총살하려 했을 때, 그녀의 키가 너무 작아 총알이 높은 모자에만 맞았고, 그녀는 다리 밑 강물로 떨어져 갈대숲에 숨어 살아남았다.

볼셰비키 혁명가 출신의 소비에트 수학자이자 철학자로, 소련에서 수리논리학을 독자적 학문 분야로 부활시키고 제도화한 창시자다. 내전기 백군에게 체포되어 총살 직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으며, 1933년 마르크스의 『수학 초고』를 발굴·출판하여 전 세계 마르크스주의 수학 연구의 초석을 놓았다. 1930년대에는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서 '관념론적' 수학을 공격했으나, 이후 입장을 전환하여 스탈린 시대에 탄압받던 수리논리학을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되살려냈고, 1935년 비트겐슈타인의 소련 이주를 만류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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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19오데사 볼셰비키 지하운동, 지하 적십자사 서기
  • 1919–1920제12군 정치국 신문 《적군》 편집보좌·정보부장
  • 1920–1923오데사 현당위원회 정보부 당원
  • 1923–1929적색교수양성소 수학·수강생, 이후 교원
  • 1931–1941모스크바 국립대학 교수; 1935년 물리수학 박사
  • 1943–1966모스크바 국립대학 수리논리학 세미나 조직·지도
  • 1944–1955모스크바 국립대학 수리과학사 학과장
  • 1959–1966모스크바 국립대학 수리논리학 학과 교수

안나 미하일로브나 판크라토바

Анна Михайловна Панкратова
학술·연구 소련 러시아 1897–1957 ○ 자연사

스탈린 사후 역사학의 탈스탈린화를 주도한 노동계급사 권위자: 소련 최초 여성 역사학 아카데미크

1953년 『역사의 제문제』 주필이 된 판크라토바는 스탈린의 『단기 강좌』 도식을 공개 토론에 부치며 역사학의 탈스탈린화를 추진했다. 1957년 3월 중앙위 결정은 그녀의 노선을 '자유주의와 부르주아 객관주의'로 규탄하고 사실상 해임했다.

소비에트 노동계급사와 혁명운동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약 200편의 저작을 남겼다. 소련 역사학 분야 최초의 여성 정회원(아카데미크)이자, 카자흐스탄사의 첫 종합적 집필을 지도했다. 스탈린 사후 『역사의 제문제』 주필로서 「소련 공산당사 단기 강좌」의 도식적 서사를 재검토하고 탈스탈린화를 주도했으나, 1957년 중앙위로부터 '자유주의와 부르주아 객관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실질적으로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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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내전기 오데사 유격대 활동
  • 1922–1925붉은 교수양성소 수학
  • 1926–1939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 레닌 정치군사아카데미 · 모스크바 국립대 등에서 교편
  • 1939소련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 연구원
  • 1942–1949『카자흐 SSR사』(1949) 집필 지도 — 소련 최초의 공화국 통사
  • 1952제19차 당대회에서 CPSU 중앙위원으로 선출
  • 1953–1957잡지 『역사의 제문제』(Вопросы истории) 주필
  • 1955–1957소련 역사가 전국위원회 의장

옙세이 그리고리예비치 리베르만

Евсей Григорьевич Либерман
학술·연구 소속 미확정 소련 러시아 1897–1981 ○ 심장마비

1965년 경제 개혁의 이론적 촉매

「사회에 이로운 것은 모든 기업에도 이로워야 한다」 — 1962년 《프라우다》 논문의 핵심 명제

소련의 경제학자. 1962년 9월 《프라우다》에 발표한 논문 「계획, 이윤, 프리미엄」으로 전연방 경제 토론을 촉발하여 1965년 코시긴 개혁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윤 지표를 기업 평가의 핵심으로 삼고 '사회에 이로운 것이 개별 기업에도 이로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0년대 소련 최초의 기계식 회계 스테이션을 창설했고, 1938년 조작된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1939년 말 복권되었다. 아내 레기나 고로비츠는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누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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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볼린현 슬라부타에서 산림영지 관리인의 아들로 출생
  • 1920키예프대학교 법학부 졸업
  • 1923–1929우크라이나 노동연구소 실습생, 할키우 공장에 소련 최초 기계식 회계 스테이션 창설
  • 1930–1941하리코프 공학경제연구소 기계제조업 조직·계획 주임
  • 1938–1939NKVD에 간첩·테러 혐의로 체포, 15년형 선고 후 1939년 말 복권
  • 1941–1943키르기스 SSR 재무부 근무
  • 1947–1962하리코프 공학경제연구소 교수, 기계제조업 경제·계획 연구실 창설
  • 1956경제학 박사 (논문: 사회주의 기업의 수익성 제고 방안)
  • 1962《프라우다》에 「계획, 이윤, 프리미엄」 발표 — 전연방 개혁 논쟁 촉발
  • 1962–1981하리코프대학교 통계·회계학과 교수
  • 1981할키우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학술·연구 미국 독일 1898–1979 ○ 뇌졸중

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자이자 1960년대 신좌파의 대표적 이론가

'그것은 가장 진전된 위치에서 위대한 거부, 즉 존재하는 것에 대한 항의다' — 《일차원적 인간》(1964)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핵심 철학자로,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 정신분석을 결합하여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 이론을 전개했다. 《에로스와 문명》(1955)에서 자본주의의 억압 구조를 분석하고 해방된 에로스의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탐구했으며, 《일차원적 인간》(1964)에서는 기술적 풍요가 비판 의식을 잠식하는 현대 산업사회를 '일차원적 사회'로 규정하며 억압적 탈승화 개념을 제시했다. 독일계 유대인으로 나치를 피해 미국에 망명, 전시 OSS에서 근무하고 브랜다이스대와 UC샌디에이고에서 가르치며 1960년대 학생 운동과 신좌파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위대한 거부'로 상징되는 그의 급진적 사유는 비판 이론과 해방 정치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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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제네바 사회연구소(프랑크푸르트학파) 합류
  • 1934–1942컬럼비아대학교 사회연구소 연구원, 뉴욕
  • 1942–1951OSS 및 국무부 분석관, 중앙유럽과장
  • 1954–1965브랜다이스대학교 정치이론 교수
  • 1965–1970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 철학 교수

얀 에르네스토비치 스텐

Ян Эрнестович Стэн
학술·연구 소비에트 라트비아 1899–1937 ✕ 처형

스탈린의 철학 교사에서 우익 반대파로 전락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스탈린이 헤겔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하자, 성미 급한 라트비아인 철학자 스텐은 크렘린 사무실에서 제자의 양복 옷깃을 붙잡고 흔들며 가르쳤다. 수업 후 친구에게 남긴 말: '코바는 10년 안에 드레퓌스와 베일리스 재판을 무색하게 만들 짓을 할 거야.'

라트비아 출신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붉은교수양성소 1기 졸업 후 스탈린에게 헤겔 변증법을 개인교습하며 소비에트 철학 제도화의 중심에 섰다. 1928년 부하린의 우익 반대파로 돌아선 뒤 1932년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사건으로 유배되었고, 잠시 복권되었으나 193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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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라트비아에서 RSDLP 입당
  • 1921–1924붉은교수양성소 철학과 1기 수학
  • 1925–1928스탈린에게 헤겔 변증법 개인교습
  • 1927–1928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선전부 부장
  • 1928–1930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부소장
  • 1932당 제명,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사건으로 체포·유배
  • 1934–1936석방, 『대소비에트 백과사전』 편집
  • 1937재체포되어 사형

미하우 칼레츠키

Michał Kalecki
학술·연구 소속 미확정 폴란드 폴란드 1899–1970 ○ 자연사

케인스보다 먼저 유효수요 원리를 정식화한 마르크스주의 거시경제학자

칼레츠키는 1943년 논문에서 이렇게 썼다: "공장 내 '규율'과 '정치적 안정'은 기업 지도자들이 이윤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가치다. 그들의 계급적 본능은 지속적인 완전고용이 자신들의 관점에서 건전하지 않다고 말해준다."

케인스보다 앞서 유효수요 원리를 정식화한 폴란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이윤·투자·소득분배를 계급 분석으로 설명하는 독자적 거시경제학을 구축했고, 사회주의 폴란드에서 계획경제 성장 이론을 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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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1936바르샤바 경기순환·물가연구소 연구원
  • 1933「경기순환 이론 시론」 발표 — 유효수요 원리를 케인스보다 먼저 정식화
  • 1936–1945영국 이주; LSE, 케임브리지, 옥스퍼드 통계연구소에서 연구
  • 1943「완전고용의 정치적 측면」 발표 —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저항을 예측
  • 1946–1954유엔 사무국 경제개발부 차장 (뉴욕); 매카시즘 압력으로 사임
  • 1955–1968폴란드 각료회의 경제고문,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 바르샤바 대학 교수
  • 1957폴란드 과학아카데미 회원 선출
  • 1968반유대주의 숙청에 항의하여 공직 사임

보리스 알렉산드로비치 차긴

Борис Александрович Чагин
학술·연구 소련 러시아인 1899–1987 ○ 자연사

숙청당한 동료들 사이에서 홀로 살아남은 소련 마르크스주의 철학사 연구의 대부

1930년대 레닌그라드 철학연구소에서 차긴을 제외한 모든 연구원이 체포되었고, 대다수는 총살되었다.

레닌그라드 철학연구소 동료들이 스탈린 숙청으로 전원 처형될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이후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그의 철학 저작 선집 편집을 주도했고, 이 공로로 플레하노프상을 수상했으며 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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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1남북전쟁 및 크론슈타트 봉기 진압 참전, RKP(b) 입당
  • 1922–1931교편 생활 시작, 붉은교수양성소 철학과 졸업
  • 1930s붉은군대 교육기관·레닌그라드 공산아카데미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강의
  • 1940–1941레닌그라드대학 철학학부 학장
  • 1946철학박사 학위 취득
  • 1956–1967레닌그라드대학 철학사 교수주임
  • 1960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 1963–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레닌그라드 철학부문 선임연구원·주임

제임스 마틴 스태그

James Martin Stagg
학술·연구 영국 스코틀랜드 1900–1975 ○ 자연사

전쟁의 결정을 바꾼 기상학자

1944년 6월 4일 밤, 스태그는 폭풍 뒤 6월 6일 새벽까지 이어질 짧은 호전을 예보했다.

제임스 스태그는 영국 기상청 출신의 스코틀랜드 기상학자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기상 자문을 맡았다. 그는 해상 관측, 정찰 비행, 암호 해독 자료를 종합해 군사작전에 필요한 예보를 만들었고, 기상학을 지휘부의 작전 판단과 연결했다. 1944년 6월 4일 폭풍 뒤 6월 6일의 짧은 호전 가능성을 제시해 노르망디 상륙의 실행 조건을 판단하게 했으며, 이는 완벽한 날씨가 아니라 감수 가능한 위험을 과학적으로 규정한 결정이었다. 전후에도 기상청에서 일하며 자신의 경험을 『오버로드 예보』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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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에든버러대학교에서 우등 문학석사 취득
  • 1924영국 기상청 조수
  • 1932–1933영국 북극 캐나다 탐험대 지휘
  • 1939큐 천문대 감독관
  • 1943–1945연합군 최고사령부 작전 오버로드 수석 기상장교
  • 1944영국 공군 지원예비역 소장 대우의 그룹 대령
  • 1945–1960전후 영국 기상청 근무, 1960년 서비스국장 퇴임
  • 1971『오버로드 예보』 출간
학술·연구 소속 미확정 트리니다드 토바고 트리니다드 토바고 1901–1989 ○ 자연사

아이티 혁명을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으로 되살린 트리니다드 출신 트로츠키주의자이자 범아프리카주의 지식인

“크리켓만 아는 자들이 크리켓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 『비욘드 어 바운더리』 서문, 키플링을 뒤집으며

트리니다드 출신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블랙 자코뱅』으로 아이티 혁명을 해방사로 재구성했으며, 트로츠키와 흑인 자기결정권을 논쟁했다. 소련 국가자본주의론을 발전시키고 크리켓으로 제국을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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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트리니다드 터너푸나에서 교사 로버트 알렉산더 제임스와 이다 엘리자베스의 장남으로 출생
  • 1910–1918퀸스 로열 칼리지(QRC) 장학생으로 입학, 졸업 후 동교에서 영문학과 역사 교사로 근무 (에릭 윌리엄스 제자)
  • 1932영국 랭커셔로 이주, 『맨체스터 가디언』 크리켓 기자로 활동하며 반식민 저술 시작
  • 1934–1936ILP 가입 및 트로츠키주의 그룹 활동, 희곡 『투생 루베르튀르』 상연, 첫 소설 『민티 앨리』 출간
  • 1937–1938『세계혁명』(코민테른사) 및 『블랙 자코뱅』 출간 — 트로츠키·오웰·E.H. 카의 찬사
  • 1938–1939SWP 초청으로 미국 순회 강연,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트로츠키와 '흑인 문제' 논쟁
  • 1941–1951두나옙스카야와 존슨-포레스트 경향 결성, 소련 국가자본주의론 정립, 『변증법 노트』 집필
  • 1953미국에서 추방, 엘리스섬 구금 중 멜빌 연구서 『선원들, 배신자들, 난파자들』 집필
  • 1957–1960가나 독립 축하 방문, 은크루마 혁명 연구 집필; 트리니다드에서 PNM 기관지 『더 네이션』 편집장
  • 1963『비욘드 어 바운더리』 출간 — 크리켓을 통해 식민지 사회와 계급·인종을 분석한 자전적 명저
  • 1970–1980워싱턴 D.C. 연방시립대학 강사, 앨리슨 & 버즈비에서 저작 선집 4권 출간
  • 1989런던 브릭스턴에서 흉부 감염으로 88세로 사망, 트리니다드 터너푸나 묘지에 안장

필리프 예고로비치 미헤예프

Филипп Егорович Михеев
학술·연구 소련 러시아인 1902–1975 ○ 옥고 후 재활

숙청에 휩쓸린 당 조직의 실무 책임자

“진심으로 뉘우치니 죄를 씻을 기회를 달라”고 그는 최후진술에서 말했다.

필리프 미헤예프는 전쟁과 전후를 거쳐 레닌그라드 시·주 당위원회의 관리국장으로 조직의 운영을 떠받친 소련 공산당 실무 간부였다.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체포되어 1950년 10년형을 선고받았고, 1954년 불법 수사가 확인되며 복권과 함께 당적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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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트베리현 체르노야로보 마을에서 출생
  • 1923프스코프 소비에트당 학교에서 수학
  • 1924–1926붉은군대 복무
  • 1926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6–1940데츠코셀스키 지구당위원회 부서기 및 제1서기
  • 1940–1949레닌그라드 시·주 당위원회 관리국장
  • 1941–1944레닌그라드 방어에 참여
  • 1950–1954레닌그라드 사건으로 10년형, 1954년 재활

알렉산드르 로마노비치 루리야

Александр Романович Лурия
학술·연구 소련 러시아 1902–1977 ○ 심근경색

신경심리학의 창시자, 비고츠키의 문화역사이론을 임상신경과학과 연결한 '낭만적 과학'의 실천자

그는 과학자를 '고전파'와 '낭만파'로 나누었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지만, 생명의 나무는 푸르다" — 살아있는 현실의 풍요를 보존하는 것이 진정한 과학이다.

비고츠키와 문화역사심리학을 창립하고, 뇌 손상 병사 치료로 신경심리학의 토대를 세웠다. 독특한 기억력을 지닌 인물들의 사례를 과학과 문학으로 엮어낸 '낭만적 과학'의 실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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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카잔대학 졸업, 카잔 정신분석학회 설립
  • 1924–1934모스크바 실험심리학연구소 연구원, 비고츠키·레온티예프와 '트로이카' 형성
  • 1931–1934하리코프 우크라이나 정신신경학아카데미 심리학 부문장, 중앙아시아 비교문화 원정
  • 1937제1모스크바의대 졸업, 교육학 박사 — 『인간 갈등의 본성』
  • 1941–1944키세가치 신경외과 후송병원장, 뇌 손상 병사 치료 및 재활 체계 구축
  • 1945–1966모스크바대학 교수, 부르덴코 신경외과연구소 연구원
  • 1966–1977모스크바대학 심리학부 신경·병리심리학 주임교수
  • 1967–1977소비에트 교육학아카데미 정회원,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 외국인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