훗날 카잔니크는 그 결정을 이렇게 돌아봤다: "모스크바에서 옐친에게 투표한 사람은 550만 명, 나에게는 170만 명이었다. 옐친이 최고회의 첫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카자흐스탄의 건설 노동자와 소련 공병대 복무를 거쳐 이르쿠츠크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법학자로, 1975년부터 옴스크대학에서 환경법과 국가법을 가르쳤다. 1989년 소련 인민대의원으로 당선되었고, 5월 29일 제1차 대회에서 옐친이 최고회의 의원 선출에 실패하자 자신의 당선 자리를 옐친에게 양보해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다. 1993년 옐친에 의해 러시아 검찰총장에 임명되었으나, 1994년 2월 국가두마의 사면 결의를 헌법에 따라 집행했다는 이유로 대통령 측의 압력을 받고 사임하며 원칙을 지켰다. 이후 옴스크주 부지사(1996–2003)를 지내고 모교로 돌아가 후학 양성에 힘쓰다 2019년 사망했다.
보수나 신프랑코주의 역사가 중에 증거를 조작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으며, 그들이 파는 것은 뻔뻔한 거짓말이다.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정권에 관한 연구에서 문서고 실증으로 프랑코주의 역사 서사를 체계적으로 허물어 온 역사가이자 경제학자, 외교관이다. 대학원 시절 본에서 나치 독일의 프랑코 지원을 파헤친 것을 시작으로, 「모스크바의 금」 신화의 실체를 밝혔고 4부작 『공화국』 연작에서 무기 금수와 국제 외교가 전쟁의 승패를 어떻게 갈랐는지를 입증했다. 2011년 왕립역사아카데미가 프랑코를 독재자로도 적시하지 않은 『스페인 인명사전』을 내자 30여 명의 역사학자들을 규합해 976쪽의 대항 사전 『역사를 위한 싸움』(2012)을 출간했으며, 이는 스페인 '역사 전쟁'의 분수령이 되었다.
「흐루쇼프는 조국과 자신 모두에게 승리와 비극을 함께 안긴 복합적 인물이었다」고 토브먼은 서문에 썼다.
윌리엄 토브먼은 소련 정치와 냉전사를 연구한 미국 정치학자이자 역사가다. 그는 니키타 흐루쇼프의 삶과 시대를 장기간 연구해 2003년 전기를 출간했고, 이 책은 2004년 퓰리처 전기상을 받았다. 그의 작업은 흐루쇼프를 스탈린주의의 계승자이자 비판자로 함께 다루며, 제20차 당대회 비밀연설을 개인의 성격과 제도적 맥락 속에 놓는다. 또한 고르바초프와 스탈린의 대미 정책을 다룬 저서를 통해 소련 지도부와 국제정치의 관계를 추적했다.
인과의 사슬을 최종적으로 고정시킨 것은 자신의 권위주의적·편집증적·자기애적 성향에 예측 가능하게 반응한 스탈린이었다.
미국의 냉전사가로, 1972년 첫 저서로 후기수정주의 학파를 창시했다. 냉전의 책임이 양측에 있다는 틀을 세웠으나, 소련 붕괴 후 기록보관소가 열리자 1997년 『우리는 이제 안다』에서 스탈린이 냉전의 결정적 원인이라고 주장하며 정통주의로 회귀했다. 조지 F. 케넌의 공식 전기로 2012년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예일대 교수로 『뉴욕타임스』로부터 '냉전사가들의 학장'이라 불렸다. 그의 궤적은 냉전사 서술이 증거에 따라 어떻게 진화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레고리가 발굴한 1938년 정치국 최종 회의록에서 스탈린은 대숙청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위대한 과업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명한다.'
폴 R. 그레고리는 미국 경제사가이자 러시아·소련 경제 연구자다. 그는 소련 경제관료제와 계획의 작동을 통계 분석과 현장 인터뷰로 추적했으며, 소련 인터뷰 프로젝트를 이끌어 계획 담당자와 관료의 경험을 연구 자료로 남겼다. 유리 올세비치와 함께 쓴 2000년 소련 계획경제 회고 연구는 코시긴 개혁을 지령적 계획과 이윤 유인의 긴장을 해소하지 못한 시도로 분석했다.
"부자유하고 억압받는 자들 가운데 위대한 사람은 오직 억압자를 파괴하기 위해 투쟁하는 자뿐이다" — 『유럽은 어떻게 아프리카를 저발전시켰는가』 (1972)
가이아나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이자 범아프리카 운동가로, 1972년 『유럽은 어떻게 아프리카를 저발전시켰는가』에서 노예무역과 식민주의,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아프리카의 저발전을 구조적으로 생산했다고 논증해 제3세계 역사학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다르에스살람대학과 서인도제도대학 강단에서 탈식민 사회과학의 중심을 세웠고, 가이아나에서 다인종 노동계급 연대에 기반한 사회주의 정치를 전개했다.
미국의 동아시아사 학자로, 『한국전쟁의 기원』(1981, 1990) 2권을 통해 한국전쟁을 냉전의 국제적 충돌이 아니라 일제 식민지배와 해방 후 사회 갈등에서 비롯된 내전으로 재규정했다. 시카고 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미국 학계의 한국전쟁 이해를 근본적으로 전환시켰고, 이 공로로 미국역사협회 존 K. 페어뱅크상과 김대중 학술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업은 전통주의 냉전 서사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현대 한국사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개혁은 좌초되었고, 국가는 정체기에 접어들었으며, 이 정체가 궁극적으로 소련 사회주의 경제의 종말을 예고했다.
유리 골란드는 소련 신경제정책(NEP)과 화폐개혁 연구로 출발한 러시아 경제학자다. 모스크바국립대 물리학부를 졸업한 후 오랫동안 물리학 연구소에서 일하다 1990년대 경제학으로 전환, 네프와 관련한 논쟁사를 복원하는 작업에 집중했다. 2010년 알렉산드르 네키펠로프와 함께 발표한 논문 「코시긴 개혁: 놓친 기회인가 신기루인가」는 이 개혁을 둘러싼 탈소비에트 역사학 논쟁의 핵심 질문을 공식화했다.
수년에 걸쳐 나는 「레닌그라드 사건」이 1917년 이래 소비에트 러시아의 '러시아 문제' 전체 역사와 떼어놓고는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확신을 굳혔다.
블라디미르 드미트리예비치 쿠즈네쳅스키는 소련과 러시아의 정치사를 연구한 러시아 역사학자이자 역사학 박사이다. 그는 스탈린 시대의 권력과 국가 민족정책을 다룬 저술을 발표했으며, 특히 레닌그라드 사건을 러시아공화국의 지위와 러시아계 지도층을 둘러싼 갈등으로 해석했다. 그의 해석은 사건을 단순한 권력투쟁이 아니라 소련 체제의 ‘러시아 문제’와 연결해 보려는 논쟁적 역사서술로 자리 잡았다.
「나는 이제 이 법정 앞에서, 이 나라 국민 앞에서, 캘리포니아 주가 나에 대해 제기한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합니다」 — 1971년 1월 5일 법정 진술
미국 마르크스주의-페미니스트 철학자이자 감옥 폐지 운동의 핵심 이론가. 1968년 CPUSA 입당, 1980·1984년 부통령 후보 출마. 1970년 체포·16개월 수감 후 무죄 평결로 국제 연대 운동 촉발. 『여성, 인종, 계급』(1981)으로 인종-성별-계급 교차 분석을 정초했고 감옥-산업복합체 개념을 발전시켰다. 1997년 비판적 저항(Critical Resistance)을 공동창립해 폐지 민주주의를 제도화했으며, UC 샌타크루즈 석좌교수로 퇴임했다. 반세기 넘게 급진 사상과 실천의 교차점에 서 있는 살아있는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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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앨라배마주 버밍햄에서 출생 — '다이너마이트 힐' 흑인 중산층 이웃에서 성장
1965브랜다이스대학 우등 졸업 —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제자
1968CPUSA 입당, 블랙팬서당 LA 지부에서 정치교육 담당
1969UCLA 철학과 조교수 임용 — 공산당원 자격으로 즉시 해고, 법원 판결로 복직
1970–1972마린 카운티 법정 무장 사건 연루로 체포, FBI 10대 지명수배 — 16개월 수감 후 전면 무죄 평결
1979소련 레닌 평화상 수상
1980, 1984CPUSA 부통령 후보 — 거스 홀의 러닝메이트
1981『여성, 인종, 계급』 출간 — 교차성 분석의 고전
1991CPUSA 탈당,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위한 통신위원회(CCDS) 공동창립
1991–2008UC 샌타크루즈 역사의식·페미니스트 연구 교수 — 2008년 석좌교수 퇴임
1997비판적 저항(Critical Resistance) 공동창립 — 감옥-산업복합체 폐지 운동의 제도적 기반
1987년 남성 기대수명이 3.2년 늘어 65세에 이르렀다는 계산은 정책 논쟁을 사망률의 언어로 바꾸었다.
예브게니 안드레예프는 수학적 엄밀성과 통계 실무를 결합해 러시아와 소련의 사망률을 연구한 인구학자다. 그의 기대수명 분해 방법은 연령과 사망 원인이 수명 변화에 미친 영향을 추적하는 표준 도구가 되었고, 1980년대 후반 남성 기대수명 반등을 3.2년, 65세까지로 산출한 작업은 금주 정책의 건강 효과를 평가하는 핵심 근거가 되었다. 그는 알코올 관련 사망률을 장기 자료와 방법론의 문제로 다루며, 정책 효과를 단순한 서사로 환원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리고 러시아인들이 언제나 가져온 것은 상실이었다."
1945년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1975년부터 웰즐리 칼리지에서 소비에트 역사와 기억 정치를 가르쳐 온 미국의 러시아사 학자다. 『레닌은 살아 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레닌 숭배』(1983)로 윌슨상을 수상했고, 결정적 저작 『산 자와 죽은 자: 러시아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 숭배의 흥망』(1994)에서 스탈린이 전쟁 기억을 억압하고 브레즈네프가 숭배로 격상시켰으며 1985년 이후 그 숭배가 흔들렸음을 실증했다. 1985년 제네바 정상회담을 앞두고 레이건을 브리핑한 6인의 소비에트 전문가 중 한 명이었으며, 클린턴은 1995년 모스크바 승전 기념일 방문에 앞서 그녀의 책을 읽고 '위대한 책'이라 평했다.
"여러모로 한국전쟁은 제3차 세계대전의 드레스 리허설이었다. 우리는 그 세 번째 세계대전을 피했기에,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은 오늘날의 세계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이었던 매우 중요한 사건에 관여했다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미국의 외교사학자로, 한국전쟁을 국제적 시각에서 재구성한 대표적인 탈수정주의 연구자다. 1995년 『한국전쟁: 국제사』에서 이 전쟁이 시기와 경과, 결과 면에서 제3차 세계대전의 대체물로 기능했다고 주장했으며, 브루스 커밍스의 수정주의적 해석에 맞서 한국전쟁을 냉전의 국제정치적 맥락 속에 재배치했다. 그루지야대학교에서 30년 넘게 재직하며 한국전쟁 연구의 외교사적 패러다임을 정립했고, 이 전쟁을 '잊힌 전쟁'에서 냉전사의 중심 무대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위로부터의 혁명』의 핵심 주장은 소련의 집권 정당·국가 엘리트가 부와 권력을 늘리려 스스로 체제를 해체했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M. 코츠는 제도 변화와 정치경제를 연구한 미국의 경제학자다. 그는 프레드 위어와 함께 소련의 해체를 경제 붕괴와 대중 봉기만으로 설명하지 않고, 당·국가 엘리트가 부와 권력을 넓히려 체제를 해체한 과정으로 분석했다. 대표 저서인 『Revolution from Above』는 소련의 정체, 페레스트로이카, 자본주의 연합의 형성과 그 이후 러시아를 연결해 해석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주둔 작전집단의 최측근 보좌관으로서의 내부 시점에서, 비공개 문서고 자료와 참전자 증언에 기초해 아프간 전쟁을 다룬 『아프간의 비극과 용맹』(1995)을 썼다.
알렉산드르 랴홉스키는 러시아 군인이자 군사 저술가로, 1946년 2월 5일 트빌리시에서 태어나 2009년 2월 3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1968년 바쿠 고등제병지휘학교를 금메달로 졸업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사태에 참가했으며, 1977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를 우등으로 졸업한 뒤 총참모부 작전총국에서 8년간 아프리카 군사협력 업무를 맡았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 국방부 작전집단에서 바렌니코프의 최측근 보좌관으로 철군까지 복무했고, 1990년 지상군 총참모부 작전국 제1부국장을 지냈다. 2002년 예비역으로 전역했으며 장군 소령 계급을 받았다.
에이미 나이트는 소련과 러시아를 연구하는 미국 역사학자로, 《뉴욕 타임스》로부터 "서구 최고의 KGB 학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1993년 저서 《베리야: 스탈린의 제1부관》은 영어권 최초의 본격적인 라브렌티 베리야 학술 전기로, 새로 개방된 소련 기록보관소 자료를 활용해 가학적 비밀경찰 우두머리라는 캐리커처 너머의 복합적 인물을 드러냈다: 스탈린 사후 권력 공백 속에서 흐루쇼프에게 제거되기 전까지 소련 체제의 자유화를 추진했던 인물이라는 역설이다. 나이트의 작업은 키로프 암살 사건부터 푸틴 시대의 정치적 살인까지 아우르지만, 굴라그의 설계자가 잠시나마 개혁의 목소리를 냈다는 베리야 역설이 그녀의 결정적 학문적 기여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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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런던정치경제대학(LSE)에서 러시아 정치학 박사학위 취득
1977–1995미국 의회도서관 소련·러시아 전문 분석관
1993《Beria: Stalin's First Lieutenant》 출간
1993–1994우드로 윌슨 국제학술센터 펠로
2017《Orders to Kill: The Putin Regime and Political Murder》 출간
남예멘 인민민주공화국을 다룬 1985년 런던정경대 박사논문과 이를 발전시킨 1990년 저서가, 남예멘 사회주의 국가의 성과와 한계를 평가할 때 인용되는 대표적 연구다.
사이먼 프레더릭 피터 핼리데이(1946~2010)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난 작가이자 국제정치·중동 연구자다. 옥스퍼드 퀸스 칼리지에서 정치·철학·경제학을, 런던대학교 동양아프리카연구원에서 중동정치 석사를 마쳤고, 1969~1983년 『뉴 레프트 리뷰』 편집위원을 지냈다. 런던정경대에서 1985년 남예멘 대외관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그때부터 2008년까지 이 대학 국제관계학 교수로 재직했다. 남예멘 인민민주공화국의 성과와 한계를 평가할 때 인용되는 대표적 연구자다.
'메르카데르의 얼음도끼가 트로츠키를 끝내지 못했다면, 내 책이 그러길 바란다'는 말로 자신의 트로츠키 전기를 소개했다.
로버트 서비스는 영국의 소련사 연구자이자 역사가로, 혁명부터 스탈린 사망까지의 정치사를 폭넓게 다뤘다. 레닌·스탈린·트로츠키 전기를 통해 개인의 선택과 혁명 국가의 구조를 함께 해석했다. 베리야 처형을 그의 범죄뿐 아니라 전후 개혁 구상을 둘러싼 권력투쟁으로 읽은 그의 서술은 역사해석 논쟁을 촉발했다.
"소련 경제는 대개 실패로 치부된다. 그러나 나는 소련 경제가 훌륭히 작동했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20세기 가장 성공한 개발도상국이었지만, 소련은 바로 그 뒤를 이었다."
옥스퍼드대학교 경제사학자 로버트 앨런은 2003년 저서 『농장에서 공장으로: 소비에트 산업혁명의 재해석』에서 소련의 산업화가 20세기 가장 성공적인 개발 사례 중 하나였다고 주장했다. 그의 추계에 따르면 1928년부터 1937년까지 1인당 소비는 약 30% 증가했으며, 이는 기존 연구(버그슨·채프먼)의 소비 감소 결론을 정면으로 뒤집는 결과였다. 그는 계량모형을 바탕으로 집단화 없는 NEP 지속 경로가 GDP 성장률 면에서는 실제 성과와 비슷했을 것이라는 반사실적 시뮬레이션도 제시해, 소련 산업화의 비용과 성과를 둘러싼 논쟁의 핵심 참조점이 되었다.
프랭크는 원자폭탄이 천황을 움직여 항복을 시작하게 했지만 「소련의 개입이야말로 항복 이행을 강제하는 데 무겁게 작용하는 요인」이라고 봤다.
리처드 B. 프랭크는 미국의 변호사이자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전쟁을 연구한 군사사가다. 그는 과달카날 전투부터 일본 제국의 종말까지 작전과 정책, 일본 지도부의 판단을 함께 추적하며 전쟁의 귀결을 설명했다. 특히 『Downfall』은 일본의 항복을 둘러싼 군사적 붕괴와 원자폭탄 투하,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결합해 논쟁적인 종결 과정을 분석한 저작이다.
“군사적으로는 균형이 크게 이동한 순간이지만, 소련인들이 갑자기 자신을 믿기 시작한 상징적 전환점이었다.”
리처드 오버리는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 독일을 중심으로 현대 전쟁의 구조와 결과를 연구해 온 영국 역사가다. 그는 군사 작전만이 아니라 국가의 경제 동원, 사회적 경험, 정치적 심리가 전쟁의 향방을 함께 만든다고 분석했다. 스탈린그라드에 대해서는 소련의 전략적 승리가 아직 독일의 패배를 확정한 것은 아니지만, 소련 사회가 자신감을 회복하고 독일군이 취약하다는 인식이 세계로 퍼진 상징적·심리적 전환점이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관점은 전쟁의 물질적 조건과 집단적 인식의 변화를 대립시키기보다 서로 연결해 파악한다.
그는 더그의 구성원을 120명으로 보는 통설에 반대하여, 실제로는 110명 미만이었고 고위 장교는 배제되었으며 새 구성원은 받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현대 에티오피아사를 연구하는 역사가이자 저술가로, 아디스아바바 대학 명예교수다. 하일레 셀라시에 1세 대학에서 역사학을, 런던 대학에서 아프리카사를 공부했고, 역사학과장과 에티오피아 연구소장을 지냈다. 1855~1991년을 다루는 에티오피아 현대사 표준 개설서를 썼으며, 사회연구포럼 창립 회원으로 활동했다.
「우리는 스탈린에게 기근 책임을 면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이 드러낸 것은 잘못된 정책 탓에 초래되었지만 예상치 못했고 바라지도 않았던 기근 위기와 씨름하는 소비에트 지도부의 모습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제사가이자 소비에트 사회·경제·인구사 연구자. 로버트 W. 데이비스와 함께 『기아의 해』(2004)를 저술해 구소련 기록보관소 자료를 바탕으로 1932–1933년 기근 사망자를 약 450만~650만 명으로 추산했으며, 기근을 의도된 제노사이드가 아니라 강제적 곡물 조달 정책·기상 재해·무분별한 공업화가 결합된 비극으로 설명했다. 1990년 「소련의 1930년대 탄압 규모와 초과 사망에 대한 추가 해명」으로 서방의 과장된 수치를 바로잡기 시작했고, 훗날 독일과 소련의 탄압 규모를 비교하는 작업으로까지 나아갔다.
2008년 인터뷰에서 "프랑코는 스페인 국민 대다수의 감사와 인정을 받아 마땅하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마오주의 도시게릴라 조직 GRAPO의 창립 멤버에서 프랑코 옹호 역사 수정론자로 전향한 스페인의 논쟁적 저술가. 스페인 내전의 발발 책임이 좌익의 반민주적 혁명 기도에 있다고 주장하며, 1934년 10월 사회당 주도 봉기를 내전의 실질적 시작으로 보는 관점으로 포스트 프랑코 역사학계의 정설에 도전했다. 2003년 『내전의 신화』는 15만 부 판매로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고, 스탠리 G. 페인의 옹호와 폴 프레스턴 등 주류 역사학자들의 맹비판 사이에서 스페인 현대사 수정주의 논쟁의 중심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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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1974마드리드 국립언론학교 수학, 급진적 반프랑코 운동가로 활동
1975마오주의 무장조직 GRAPO 공동 창립, 10월 1일 경찰관 살해 현장에 동행
1977GRAPO에서 제명됨
1983납치 공모로 징역 1년 선고, 사회 재편입 조치 수용
1999–2001『내전의 기원』 등 3부작 출간, 수정주의적 내전 해석 제시
2003『내전의 신화』 출간, 15만 부 판매 및 6개월 연속 베스트셀러
2005–현재Libertad Digital 등에 칼럼 기고, 프랑코 옹호 역사서 다수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