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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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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정보·치안 인물 210명

레오니트 미하일로비치 자콥스키

Леонид Михайлович Заковский

레닌그라드의 해머

재판 마지막 진술에서: "내가 수사에서 아주 많은 정직한 사람들을 무고히 비방했음을 참작해 주십시오... 저 자신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제 운명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이자 시베리아와 벨라루스를 거쳐 레닌그라드 NKVD 수장으로 올라선 대숙청의 집행자. 키로프 암살 수사와 '구시대 계급' 1만 1천여 명의 추방을 지휘했고, '벨라루스 민족중앙' 사건을 조작했으며, 라트비아인을 겨냥한 대규모 민족 작전을 조직했다. 1938년 초 예조프의 부내무인민위원 겸 모스크바 NKVD 수장으로 승진했지만 수개월 만에 자신이 속했던 기관에 체포되어 총살됐고, 사후에도 복권이 거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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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7라트비아 볼셰비키 활동, 체포와 유형
  • 1918–1921체카 전권대표, 전선 특별부서장
  • 1921–1925우크라이나 포돌·오데사 GPU 의장, 몰도바 전권대표
  • 1926–1932시베리아·서시베리아 OGPU 전권대표, 특별3인조 의장
  • 1932–1934벨라루스 OGPU 전권대표, 벨라루스 NKVD 인민위원
  • 1934–1938레닌그라드 NKVD 수장, 키로프 사건 수사·대규모 추방
  • 1938.1–1938.4내무부인민위원·모스크바 NKVD 수장
  • 1938.4–1938.8해임·체포·총살, 복권 거부

에두아르트 페트로비치 베르진

Эдуард Петрович Берзин

콜리마 금광의 굴라그를 설계한 라트비아 출신 체키스트

1932년 2월 나가예바 만에 상륙해 툰드라에 마가단을 세운 베르진. 샬라모프는 이렇게 적었다: '콜리마 최초의 책임자 베르진은 가혹한 변경의 식민화와 동시에 수감자들의 '개조'와 격리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라트비아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베를린 왕립미술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 라트비아 소총병으로 참전하며 볼셰비키 혁명에 합류했다. 1918년 체카의 지시로 영국 외교관 로크하트의 반소비에트 음모에 위장 접근해 공모자 체포를 이끌었고, 좌익사회혁명당 반란 진압에도 기여했다. OGPU 소속으로 비세르 화학공장을 수감자 노동으로 건설한 뒤, 1931년 달스트로이 초대 국장으로 콜리마 금광 개발과 마가단 건설을 주도했다. 임금·조기석방·가족동반을 허용하는 독특한 수용소 경영으로 식민화를 추진했으나, 대숙청이 절정이던 1937년 말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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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베를린 왕립미술학교 졸업, 라트비아로 귀국 후 징집
  • 1915–17제4 비제메 라트비아 소총병 연대 소위, 게오르기 십자훈장 수훈
  • 1917–18라트비아 소총병 사단 제1경포병대대 지휘관; 좌익SR 반란 진압, 로크하트 음모 적발
  • 1918.11RKP(b) 입당
  • 1919–20남부전선에서 데니킨 백군 격퇴,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 보급참모
  • 1921.02체카 특별부에서 근무 시작 (후 OGPU)
  • 1926–31비세르 화학공장(비슐라크) 건설 책임자 — OGPU 수감자 노동으로 18개월 만에 완공
  • 1931.11달스트로이(Дальстрой) 초대 국장 임명
  • 1932.02나가예바 만에 상륙, 마가단 건설과 콜리마 금광 개발 개시
  • 1935.03금 채굴 계획 달성으로 레닌 훈장 수훈
  • 1937.04사단인텐단트(дивинтендант) 특별계급 수여
  • 1937.12휴가차 모스크바行, 12월 19일 체포

세르게이 나우모비치 미로노프

Сергей Наумович Миронов

서시베리아에서 대량작전의 포문을 연 '북캅카스인' 체키스트

명령 제00447호를 준비하던 1937년 여름, 부하들에게 훈시한 속기록이 남아 있다. '제1차 작전의 상한선은 11,000명입니다... 12,000명을 잡아도 좋고, 13,000명도, 15,000명도 좋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그 숫자로 제한하지는 않습니다. 제1범주로 20,000명을 잡아도 됩니다.'

키예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체키스트로, 본디 성은 코롤이며(문헌에는 미로노프코롤로도 쓴다) 북캅카스에서 예브도키모프 아래 경력을 쌓은 이른바 '북캅카스인' 그룹의 일원이자 프리놉스키의 최측근 조력자였다. 서시베리아 변경주 NKVD 국장으로서 1937년 여름 대량작전의 포문을 열었고, 검사 브라코프·당서기 에이헤와 함께 구성된 트로이카의 의장을 맡아 부하들에게 할당 숫자에 얽매이지 말고 잡아들이라고 훈시했다. 1937년 8월 몽골 주재 전권대표로 전임해 라마 승려 8천 명가량이 희생된 몽골 대숙청을 조직했으며, 이후 외무인민위원부 제2동방부장으로 있다가 1939년 1월 체포되어 1940년 1월 16일 스탈린에게 보내진 총살 명단에 올라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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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군 장교
  • 1918–1921붉은군대 입대, 국내전 참전
  • 1921–1931북캅카스 체카·OGPU 요원
  • 1931–1933카자흐스탄 OGPU 전권대표부 부대표
  • 1933–1936드네프로페트롭스크주 GPU·NKVD 지도자
  • 1936–1937서시베리아 변경주 NKVD 국장
  • 1937서시베리아 트로이카 의장, 레닌훈장 수훈
  • 1937–1938몽골 주재 소련 전권대표
  • 1938–1939외무인민위원부 제2동방부장
  • 1939–1940체포, 총살

샬바 오타로비치 체레텔리

Шалва Отарович Церетели

제정군 장교에서 베리야의 비공식 집행자가 된 국가보안 장교

1939년 7월 8일 모스크바에서 츠할투보로 가는 NKVD 특별열차 안에서 주중 전권대표 보프쿤-루가네츠 부부가 살해되고 교통사고로 위장되었으며, 1953년 심문에서 타격의 책임은 진술마다 엇갈렸다.

그루지야 사치헤레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정군 장교와 포로 생활을 거쳐 1921년 그루지야 노동농민 민병대에 들어갔고, 1922년 베리야의 추천으로 GPU로 옮겼다. 베리야가 1938년 말 그를 중앙 NKVD 3국 특수부 부책임자로 모스크바에 데려가자, 그는 납치와 은밀한 암살을 전담하는 베리야의 개인 공작원이 되었다. 1937년 8월부터 1938년 7월까지 그루지야 NKVD 특별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의 대량 처형 결정에 참여했고, 1941년 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제1부위원, 이후 공화국 내무부 차관 겸 국경경비대 관리국장, 중장을 지냈다. 1953년 9월 트빌리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11월 15일 총살됐으며, 아직 명예회복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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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5제정 러시아군 소위, 포로
  • 1937–1938그루지야 민병대 책임자, NKVD 특별 트로이카 위원
  • 1939–1941자캅카스 국경경비대 관리국장
  • 1941–1946그루지야 제1부내무인민위원
  • 1946–1953그루지야 부국가보안장관, 국경경비대 지휘 겸임
  • 1953–1955체포, 트빌리시 재판과 처형

바실리 미하일로비치 자루빈

Василий Михайлович Зарубин

게슈타포 첩자를 운용한 소련 원자력 스파이의 대미 레지던트

1941년 10월 12일,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곽에 도달한 날, 스탈린은 자루빈을 직접 불러 워싱턴에서의 유일한 임무를 하달했다: '미국이 독일과 단독 강화를 시도할지 여부를 알아내라.'

소련 국가보안 기관의 대표적 해외정보 장교로, 23년간 근무 중 13년을 불법 체류 요원으로 활동했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베를린 비합법 레지던트로 근무하며 게슈타포 내부의 핵심 정보원인 빌리 레만(암호명 '브라이텐바흐')을 운용, RSHA와 게슈타포의 구조·작전·군사 계획에 관한 정보를 입수해 모스크바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는 워싱턴 주재 NKVD 수석 레지던트로서 미국 내 원자력 스파이 활동을 총괄 지휘했으며, 소련의 핵무기 개발에 결정적 정보 기반을 제공했다. 귀국 후 1948년까지 대외정보 부국장을 역임하며 불법 정보망을 감독했고, 퇴역 후에도 KGB 훈련기관에서 후배 정보원들을 교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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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러시아 제국군 복무, 제1차 세계대전 동부전선 참전
  • 1918–1920붉은 군대 복무, 러시아 내전 남부전선 참전
  • 1920–1925체카·OGPU 내부보안·경제부서 근무 (블라디보스토크)
  • 1925–1927INO OGPU 합법 레지던트: 중국, 핀란드
  • 1927–1929비합법 레지던트: 덴마크, 독일 (체코인 신분)
  • 1929–1933비합법 레지던트: 프랑스 (암호명 '베티')
  • 1933–1937비합법 레지던트: 베를린, 게슈타포 요원 빌리 레만 운용
  • 1939–1940NKVD 장교, 코젤스크 수용소에서 폴란드 포로 심문
  • 1941NKGB 제1총국 부국장, 중국 특수임무 (발터 슈테네스 접촉)
  • 1941–1944NKVD/NKGB 대미 수석 레지던트 (신분: 부영사 바실리 주빌린)
  • 1945–1948NKGB/MGB 대외정보 부국장 겸 비합법정보 부국장
  • 1948건강 문제로 예편, 이후 KGB 훈련기관 강사

게오르기 예브게니예비치 프로코피예프

Георгий Евгеньевич Прокофьев

경제 파괴 사건을 만들어 낸 부인민위원

1934년 미국 《타임》지는 프로코피예프를 "공장 고장이 나면 기술자를 '사보타주'로 총살하는 일을 관장하는" OGPU 산업 담당 인민위원으로 묘사했다.

OGPU 경제국장으로 소련 기술 전문가들을 겨냥한 '파괴 공작' 사건들을 조작한 체키스트. NKVD 제2부인민위원까지 올랐으나 야고다 실각 후 193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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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26OGPU 비밀국장, 이어 정보국장
  • 1926–1931OGPU 경제국장
  • 1932–1934OGPU 부의장
  • 1932–1934노농민병대 총국장 겸임
  • 1934–1936내무 제2부인민위원
  • 1936–1937체신 제1부인민위원
  • 1937체포와 처형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Ежов

‘피의 난쟁이’, 당 인사기구가 키운 대숙청의 집행자

“그보다 더 이상적인 집행자는 모른다. 그에게는 멈출 줄 모른다는 것 하나만이 흠이다.” 그의 후원자 이반 모스크빈이 사위 레프 라즈곤에게 한 말

예조프는 1895년 코브노 현에서 툴라 출신 농민 아버지와 리투아니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22·1924년 서류에는 페테르부르크 출생의 러시아 노동자 가정, 입당 시기도 1917년 3월로 적혔지만 기록과 본인의 심문 진술은 어긋난다. 실제로는 1917년 8월 3일 비테프스크에서 입당해 당 인사기구에서 성장했다. NKVD 수장으로서 스탈린 지도부 아래 1937~38년 대량 체포·처형 작전을 조직했다. 1936~38년 국가 범죄로 최소 130만 명이 체포되고 68만 1692명이 처형되었으며 굴라크 수용자는 68만 5201명 늘었다. 경력 체키스트는 아니었으나 고문에 가담했고, 1939년 4월 10일 체포되어 1940년 2월 총살됐다. 1998년 복권은 거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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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34당 기구에서 간부 인사 담당으로 성장
  • 1934–36키로프 사건 수사 감독
  • 1936.9내무인민위원
  • 1936–38대외 작전 지휘: 스페인 주재 NKVD를 관할하고 국외 「트로츠키주의자」 색출 작전을 확대
  • 1937–38대숙청 집행: 「예조프시나」
  • 1938.11수리교통인민위원으로 전보(사실상 실각)
  • 1939/1940체포, 처형

블라디미르 예피모비치 체사르스키

Владимир Ефимович Цесарский

대숙청의 회계장부를 쥐었던 예조프의 심복

1938년 여름, 심사를 기다리는 대량작전 「앨범」이 중앙에 10만 명분 넘게 쌓였다. 그 서류 더미에서 유죄와 형량을 확정하던 회계등록부장이 체사르스키였다.

오데사의 사무원 가정에서 태어나 1915년부터 사회혁명당과 보로트비스트를 거쳐 1919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30년대 당 중앙위 기구에서 일하다 1935년부터 중앙위 서기 예조프의 보고담당 보좌관이 되었고, 예조프가 내무인민위원부를 맡자 그를 따라 들어가 그를 위해 신설된 인민위원 특임전권위원 자리를 거쳐 회계등록을 총괄하는 GUGB 제8부장이 되었다. 대량작전의 「앨범」 심사와 처형 명부 실무가 그의 손을 거쳤고, 1937년 국가보안 상급소좌로 승진했다. 1938년 비밀정치부(제4부)장과 모스크바주 NKVD 국장을 지낸 뒤 우흐토-이젬스키 수용소장으로 밀려났고, 예조프 몰락 직후인 1938년 12월 체포되어 1940년 1월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되었다. 2002년 복권이 거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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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9사회혁명당·보로트비스트 활동가
  • 1930–1935당 중앙위 배치부·공업부 실무 간부
  • 1935–1937당 중앙위 서기 예조프의 보고담당 보좌관
  • 1936.10–11내무인민위원 직속 특임전권위원
  • 1936.11–1938.3GUGB 제8부(회계등록)부장 · 「앨범」 심사·명부 실무
  • 1938.3–5GUGB 제4부(비밀정치)부장
  • 1938.5–9모스크바주 NKVD 국장
  • 1938.9–12우흐토-이젬스키 수용소장

이사크 일리치 샤피로

Исаак Ильич Шапиро

대숙청의 문서와 수치를 관리한 예조프의 비서실장

1938년 11월, 예조프가 NKVD를 잃은 지 며칠 만에 비서실장 샤피로가 체포되었다 — 대숙청의 모든 수치를 관리하던 사람이 이번에는 자기 상관을 겨눈 조서의 진술자가 되었다.

재무인민위원부와 소비에트통제위원회, 당 중앙위 기구를 거친 경제 관료 출신으로, 1937년 1월 예조프를 따라 NKVD에 들어가 비서실 부실장·실장과 제9특별부장을 지냈고, 1938년부터는 작전 기록·등록·통계를 총괄하는 제1특별부장을 맡았다. 대숙청의 문서와 수치가 그의 손을 거쳐 예조프의 책상에 올랐고, 그 공로로 적성훈장과 명예 체키스트 휘장을 받았다. 예조프 몰락 직후인 1938년 11월 13일 체포되어 옛 상관에게 불리한 진술을 남기고 1940년 2월 군사법정에서 총살형을 선고받아 처형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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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2적군 정치위원 — 여단 코미사르
  • 1922–1929러시아공화국 재무인민위원부·고스플란 근무
  • 1930년대소비에트통제위원회 부부장, 당 중앙위 기구 부문장
  • 1937.1–7NKVD 비서실 부실장
  • 1937–1938NKVD 비서실장(겸임) · GUGB 제9특별부장
  • 1938.3–11NKVD 제1특별부장 — 작전 기록·등록·통계 총괄
  • 1937–1938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 대의원

이즈라일 야코블레비치 다긴

Израиль Яковлевич Дагин

북캅카스 NKVD 국장에서 정부 경호부장으로, 대숙청 집행자

1938년 11월, 정부 경호부장 다긴은 베리야의 NKVD 내부 숙청으로 체포되었다. 크렘린을 지키던 자가 루뱐카의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

예브도키모프의 측근으로 북캅카스 NKVD에서 대숙청기 대량 체포를 지휘한 국가보안 간부. 정부 경호부장으로 크렘린을 지키다 1938년 베리야에게 체포되어 1940년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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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9차르군 복무, 적위대·지하당 활동
  • 1919–1924니콜라예프·헤르손·크림 체카 주요 직책
  • 1924–1934북캅카스 OGPU에서 테르스크 주·변경주 보안 책임자로 승진
  • 1934–1937북캅카스(오르조니키제) 변경주 NKVD 국장
  • 1937.4–1937.6고리키 주 NKVD 국장
  • 1937–1938GUGB NKVD 제1부(정부 경호) 부장
  • 1938–1940체포, 재판, 총살

지노비 마르코비치 우샤코프

Зиновий Маркович Ушаков

투하쳅스키의 자백을 받아낸 심문관, 자기가 맞고 나서야 매를 말했다

자신이 심문받는 자리에서 그는 인정했다. “나는 레포르토보에서 당의 적들을 직접 때려야 했지만, 맞는 자가 겪는 고통은 한 번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그를 때린 것도 같은 기관이었다.

1895년 키예프현의 유대인 목수 집안에서 태어나 헤데르만 마치고 열세 살부터 일했다. 1920년 키예프 체카에 들어가 우크라이나에서 십사 년을 보냈고, 1937년 1월 모스크바 국가보안총국 특별부 부부장이 되었다. 그해 봄 붉은군대 ‘군사파시스트 음모’ 사건의 주임 심문관으로 투하쳅스키와 야키르, 우보레비치의 자백을 만들어냈다. 5월 25일 투하쳅스키의 첫 심문을 맡았고 그 조서에는 핏자국이 남았다. 1938년에는 아직 붙지 않은 에이헤의 갈비뼈를 이용해 그를 고문했다. 그해 9월 하바롭스크에서 체포되어 1940년 1월 26일 총살됐다.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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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키예프 체카
  • 1935–1936벨로루시 NKVD 특별부 부부장
  • 1937.01국가보안총국(GUGB) 특별부 부부장
  • 1937‘군사파시스트 음모’ 사건 주임 심문관
  • 1937.09국가보안소장
  • 1938.09하바롭스크에서 체포
  • 1940.01군사합의회의 사형 선고, 총살

리하르트 구스타보비치 조르게

Рихард Густавович Зорге

도쿄에서 전쟁의 시간표를 훔친 스파이

세계대전은 내 생애에 가장 깊은 영향을 끼쳤다. 다른 어떤 요인보다 오로지 이 전쟁 때문에 나는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 1927년 자서전에서

독일 특파원으로 위장해 도쿄에서 활약한 소련 정보원. 바르바로사 작전을 경고하고 일본의 남방 진출을 확인, 시베리아 사단의 모스크바 투입을 이끌어냈다. 1944년 처형, 1964년 소련영웅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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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29코민테른·적군 정보부 요원
  • 1930–33상하이 정보망
  • 1933–41도쿄, 독일 대사관의 신임을 얻은 특파원
  • 1941.5–6바르바로사 경고 타전, 묵살
  • 1941.9「일본은 북진하지 않는다」, 시베리아 사단 이동의 근거
  • 1941.10/1944.11체포, 도쿄에서 처형

브세볼로드 니콜라예비치 메르쿨로프

Всеволод Николаевич Меркулов

카틴 명령에 첫 번째로 이름을 올린 NKGB 수장, 필명으로 희곡을 쓴 사람

1953년 7월 21일 증인 신문에서 그는 베리야가 남의 저작에 자기 서명을 올린 일을 두고 “표절도 아니고 그 이상이다”라고 말했다. 문학적 명예에 선을 그은 그 손은 폴란드인 이만여 명의 사형 명단에는 선을 긋지 않았다.

베리야 측근 가운데 가장 교육받은 사람이자 십 년간 그의 실무를 대신한 손이었다. 1921년 9월 그루지야 체카에 들어가 1923년 베리야에게 발탁되었고, 1938년 12월 NKVD의 이인자가 되었다. 1940년 3월 정치국이 폴란드인 포로 21,857명을 심리도 기소도 없이 처결할 트로이카를 지정했을 때 결정문 첫머리에 적힌 이름이 그였다. 1943년 독일이 카틴 무덤을 발견하자 이를 독일 소행으로 돌릴 부르덴코 위원회의 예비조사를 지휘했다. 집행한 자가 부인까지 조직한 셈이다. 두 차례 국가보안인민위원을 지냈고, 브세볼로드 로크라는 필명으로 희곡을 썼다. 1953년 12월 23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날 총살됐으며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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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31그루지야 체카·GPU 경제부와 정보국
  • 1931–1934자캅카스 지방위원회 제1서기(베리야)의 보좌관
  • 1934–1937자캅카스 지방위원회 소비에트무역부장, 이어 특별부장
  • 1937–1938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산업수송부장
  • 1938NKVD 국가보안총국 부국장
  • 1938–1941내무 제1부인민위원 겸 국가보안총국장
  • 1941국가보안인민위원(NKGB 1차)
  • 1941–1943내무 제1부인민위원
  • 1943–1946국가보안인민위원, 1946년부터 국가보안장관(MGB)
  • 1947–1950대외 소비에트재산총국장
  • 1950–1953국가통제장관
  • 1953체포, 재판과 처형

바실리 미하일로비치 블로힌

Василий Михайлович Блохин

세 명의 수장을 거쳐 이십칠 년을 집행한 사형집행인

1940년 4월, 블로힌은 가죽 앞치마와 어깨까지 오는 장갑을 갖추고 칼리닌 NKVD 지하실에서 28일 밤 동안 폴란드 포로 약 7천 명을 3분에 한 명꼴로 직접 사살했다.

NKVD 사령부장으로 27년간 루뱐카의 사형을 집행한 소련의 사형집행인. 야고다·예조프·베리야를 거치며 대숙청 희생자를 처형했고, 1940년 카틴 학살 시 칼리닌 처형팀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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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53NKVD·MGB 행정경제국 사령부장, 사실상의 사형집행 책임자
  • 1937–1938대숙청기 처형 집행과 감독
  • 1940칼리닌 처형팀 지휘(카틴 작전)
  • 1953–1954퇴역, 이어 계급 박탈

이오나 티모페예비치 니키첸코

Иона Тимофеевич Никитченко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의 소련 측 판사, 대숙청 사형 선고자

뉘른베르크 재판을 앞두고 니키첸코가 말했다. "만약 판사가 공정해야 한다면, 그것은 불필요한 지연만 초래할 뿐입니다."

소련 최고재판소 부의장(1938–1949)이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 소련 측 판사(1945–1946)로, 스탈린 시대 사법 살육의 핵심 집행자였다. 1916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내전기 군사법정에서 경력을 시작했고, 1930년대에는 울리히 휘하의 군사합의부 부의장으로서 지노비예프·카메네프를 사형에 처한 재판을 비롯한 모스크바 쇼 재판을 주재했다. 런던 헌장의 세 명의 주요 기초자 중 한 명으로 국제군사재판의 법적 틀을 설계했으며, 뉘른베르크에서 샤흐트·폰 파펜·프리체의 무죄 판결에 유일한 반대의견을 제출했다. 1940년 당 통제위원회로부터 극동 지역 '컨베이어식' 재판의 절차적 위반으로 엄중 경고를 받았고, 1951년 퇴직 후 196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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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RSDLP(볼셰비키) 입당
  • 1917–1918노보체르카스크 적위대 분대장 대리
  • 1918–1920제4군 및 투르케스탄 전선 정치부 근무
  • 1920–1924세미레치예 군집단·투르케스탄 전선 군사법정 부의장 및 의장
  • 1924–1926모스크바 군관구 군사법정 합의부 위원
  • 1926–1935모스크바 군관구 군사법정 의장
  • 1935–1938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 부의장
  • 1938–1949소련 최고재판소 부의장
  • 1943법무 소장 진급
  • 1945런던 회의 소련 대표 — 국제군사재판 헌장 기초
  • 1945–1946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 소련 측 판사
  • 1949–1951소련 법무부 수상운수선박법정 관리국장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오를로프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Орлов

스페인 공화국의 금을 모스크바로 실어 보내고 POUM을 부순 NKVD 총고문, 그리고 스탈린에게서 달아난 망명자

1938년 7월, 안트베르펜에 정박한 소련 선박으로 오라는 전보를 받은 오를로프는 아내와 딸을 데리고 캐나다행 배에 올랐다. 그리고 예조프와 스탈린 앞으로 편지를 남겼다. 자신과 모스크바에 있는 노모를 건드리지 않는 한, 자신이 아는 것은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15년 동안 침묵했다.

본명 레이바 라자레비치 펠트빈. 내전기 적군과 국경경비대를 거쳐 1926년부터 대외정보부(INO)에서 파리·베를린·빈·런던의 비합법 거점을 맡았고, 1936년 9월 스페인 공화국 내무부 파견 연락관으로 마드리드에 도착해 이듬해 스페인 NKVD 총책임자가 되었다. 카르타헤나에서 공화국 금 준비 510톤을 소련으로 실어 보낸 작전과, POUM을 반역 조직으로 몰아 서기장 안드레우 닌을 납치·살해한 작전이 그의 이름에 남았다. 1938년 7월 소환 명령이 곧 처형을 뜻한다고 판단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달아났고, 스탈린이 죽은 뒤인 1953년 『스탈린 범죄의 비사』를 펴내 대숙청에 대한 내부자의 증언을 남겼다. 다만 자신을 장성급으로 소개하고 케임브리지 조직 포섭을 자기 공으로 돌린 진술들은 문서고가 열린 뒤 상당 부분 과장으로 평가되며, 그의 실제 계급은 국가보안소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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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보브루이스크의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레이바 라자레비치 펠트빈으로 출생
  • 1916–1921모스크바 대학 법학 중퇴 후 제정 육군 징집, 이어 적군과 내전기 정보·유격 임무
  • 1921–1924법학 복귀, 크릴렌코 아래 최고혁명재판소 근무
  • 1924.05국가정치보안부(OGPU) 입직
  • 1926–1930대외정보부(INO) 파리·베를린 파견, 통상대표부 위장 근무
  • 1933–1935빈·코펜하겐·런던 비합법 거점 지휘 (영국에서는 윌리엄 골딘 명의)
  • 1936.09스페인 공화국 내무부 파견 NKVD 연락관으로 마드리드 부임
  • 1936.10카르타헤나에서 공화국 금 준비의 소련 이송 작전 수행, 레닌 훈장 수훈
  • 1937스페인 NKVD 총책임자: POUM 탄압과 안드레우 닌 납치·살해 지휘, 유격전 훈련학교 운영
  • 1938.07소환 명령을 거부하고 가족과 함께 캐나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
  • 1938–1953알렉산더 버그라는 이름으로 미국에서 잠적 생활
  • 1953『스탈린 범죄의 비사』 출간, 《라이프》에 연재
  • 1955–1957미국 상원 국내안보소위원회에서 두 차례 증언
  • 1963『방첩·유격전 편람』 출간, 미시간 대학 법학대학원 연구원
  • 1973.03.25클리블랜드에서 사망

게오르기 이바노비치 블라고느라보프

Георгий Иванович Благонравов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의 볼셰비키 군사위원

1917년 10월 25일,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위원 블라고느라보프는 겨울궁전 포격을 지휘했다. 요새의 전시용 대포는 사격이 불가능해, 병사들이 무기고에서 3인치 야포를 손으로 끌어내 급히 배치했다.

차르 군대 장교 출신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10월 혁명 당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위원으로서 요새 포대의 겨울궁전 포격을 지휘하고 임시정부 각료들을 트루베츠코이 능보에 구금했다. 이후 체카·OGPU 수송국장으로 철도 보안과 도로 건설을 감독했으며, 1936년 국가보안 1급 위원이 되었다. 대숙청 속에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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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3RSDLP(b) 입당, 예고리옙스크 소비에트 의장
  • 1917.10–12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위원·사령관
  • 1918.6–7동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1–1931체카·GPU·OGPU 수송국장
  • 1929–1932교통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35–1936중앙 고속도로·자동차수송국장 (구쇼스도르)
  • 1936–1937NKVD 고속도로건설총국장, 국가보안 1급 위원

이즈라일 모이세예비치 레플렙스키

Израиль Моисеевич Леплевский

우크라이나 대량작전을 정점으로 끌어올린 자

GB 소령 우샤코프의 증언에 따르면, 레플렙스키는 자신의 상관인 예조프마저 두려워할 정도로 무자비한 인물이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출신의 체키스트. 벨로루시 NKVD를 거쳐 우크라이나 NKVD 수장으로 대숙청 대량작전을 주도했으며, 예조프의 측근으로서 가장 먼저 숙청된 이들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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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36벨로루시 내무인민위원
  • 1936–1937국가보안총국 특별부장
  • 1937–1938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 1938NKVD 제6부장, 이어 제3관리국장(수송·통신)
  • 1938체포와 처형

바실리 표도로비치 데멘티예프

Василий Фёдорович Дементьев

체첸에서 연해주까지 옮겨 다닌 '북캅카스파' 체키스트

1917년 12월 기마 유격대원으로서 그는 러시아 육군 마지막 총사령관 두호닌 장군의 거처 점거에 가담했고, 두호닌은 얼마 뒤 병사들에게 살해됐다.

예브도키모프가 1934년 국가정치국 안의 '자기 사람'으로 거명한 '북캅카스파' 체키스트로, 1936년 여름부터 체첸(체첸-인구시)의 NKVD를 맡았다. 쿨라크 작전에서 평균을 웃도는 숫자를 제안한 지역 책임자 가운데 하나로 나우모프의 명단에 오르내린다. 극동 개편 뒤인 1938년 8월 국가보안소령으로 연해주 NKVD 국장이 되었으나, 예조프 몰락과 함께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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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36북캅카스 체카·OGPU 요원
  • 1936–1938체첸-인구시 NKVD 책임자
  • 1938연해주 NKVD 국장 (국가보안소령)

세묜 보리소비치 주콥스키

Семён Борисович Жуковский

무역 관리에서 부인민위원이 된 이례

1923년 당내 토론에서 트로츠키 측 결의안에 투표했다. 15년 후 스탈린은 이를 기억했고, 1938년 10월 3일 카자흐스탄 리데르 광산 책임자로 좌천되었으나 부임도 못 가고 19일 만에 체포되었다.

예조프의 NKVD 부인민위원이 된 이례적 무역 관료. 키예프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독일 주재 무역대표를 거쳐 1936년 예조프에게 발탁돼 NKVD 행정·보급을 총괄했다. 1938년 숙청으로 체포·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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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6베를린 주재 무역대표부 부대표, 대외무역인민위원부 수입국장
  • 1936–1937NKVD 행정경제국장
  • 1937국가보안총국 제3부 부부장, 제12부장
  • 1938내무부인민위원
  • 1938–1940체포, 재판과 처형

볼데마르 아우구스토비치 울메르

Вольдемар Августович Ульмер

대숙청 작전명령마다 「확인함」 서명을 남긴 국가보안총국 작전서기

1943년 수용소 업무평가서는 그를 모범적인 행정십장으로 적고 수감 기간 3년 단축을 청원했다.

국경수비대 출신의 NKVD 여단장으로 1937년 4월부터 1938년 9월까지 국가보안총국 작전서기를 맡아 제00447호를 비롯한 예조프의 대숙청 작전명령 사본에 인증 서명을 했다. 프리놉스키의 심복으로 베리야 아래에서 한 달 비서실장을 지낸 뒤 1939년 체포되어 15년형을 받고 1945년 크라스노야르스크의 수용소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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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준사관 학교 졸업, 이듬해부터 남서전선에서 중대장으로 복무
  • 1919–1922적군 보구차르 연대·여단에서 부관과 참모장
  • 1924–1925체카-OGPU 국경부대 지휘관·교관
  • 1928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후 국경수비 고등학교 교관
  • 1934국경·내무 병력 총국(GUPVO) 작전부장
  • 1937–1938국가보안총국(GUGB) 작전서기, 예조프의 대숙청 작전명령 인증
  • 1938–1939베리야 비서실장, 뒤이어 GUPVV 부국장 대행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체르니셰프

Василий Васильевич Чернышёв

예조프의 부관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굴라그를 관리한 내무인민위원부 차관

베리야가 예조프를 대체하며 예조프 측근들을 차례로 체포할 때, 체르니셰프만은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굴라그 국장을 겸임하라는 임무를 받고 2년간 수용소 체제 전체를 지휘했다.

1937년부터 1952년 사망까지 15년간 내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을 지낸 국가보안 간부로, 예조프 휘하의 부인민위원 가운데 유일하게 숙청을 피한 인물이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굴라그 국장을 겸임하며 수용소 체제를 총괄했고, 전시에는 발트 3국 강제이주 작전의 실무를 지휘했다. 전후에는 원자력 프로젝트 건설을 감독하며 굴라그 노동력을 핵시설 공사에 동원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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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러시아 제국군 소위,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17–1920랴잔 시소비에트 부의장, 특수목적부대 조직
  • 1920–1927체카·OGPU 부대 지휘관, 투르키스탄 전선
  • 1927–1937극동 OGPU·NKVD 국경군 사령관
  • 1937–1939NKVD 부인민위원 겸 노동자농민민병대 총국장
  • 1939–1941NKVD 부인민위원 겸 굴라그 국장
  • 1941–1952NKVD·MVD 부인민위원/부장관, 원자력 건설 감독

니콜라이 시도로비치 블라시크

Николай Сидорович Власик

25년간 스탈린의 그림자였던 경호 책임자

체포된 블라시크는 "나를 체포했다면, 곧 스탈린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한 달 반 뒤 스탈린은 죽었다.

벨라루스 농민 출신으로, 1931년부터 1952년까지 25년간 스탈린의 개인 경호를 책임지며 소련 지도자의 신변 안전과 모든 별장·관저를 총괄했다.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사후 스탈린의 자녀들을 사실상 양육했고, 경호 업무를 넘어 스탈린 가문의 집사 구실까지 했다. 중장까지 진급하고 레닌 훈장 3개와 쿠투조프 1급 훈장을 받았으나, 1952년 말 의사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실각했다. 1955년 유죄 판결로 계급과 훈장을 박탈당했으며, 사후 2000년이 되어서야 러시아 대법원에 의해 무죄가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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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러시아 제국군 하사관,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 수훈
  • 1917–1919모스크바 경찰, 이후 체카로 전속
  • 1926–1931OGPU 작전국 선임전권대표
  • 1931–1952스탈린 개인 경호 책임자
  • 1938–1942NKVD 국가보안총국(GUGB) 제1국장
  • 1943NKGB 제6총국장
  • 1946–1952MGB 경호총국(GUO) 국장
  • 1952바제노프 강제노동수용소 부소장으로 좌천

게오르기 안드레예비치 몰차노프

Георгий Андреевич Молчанов

야고다의 비밀정치국장

1937년 2-3월 중앙위 전원회의. 스탈린이 예조프의 보고 도중 물었다: "몰차노프는 어떻게 됐나? 체포됐나, 안 됐나?" 예조프가 답했다: "체포했습니다, 스탈린 동지, 앉아 있습니다."

야고다의 측근으로 OGPU·NKVD 비밀정치국장을 맡아 반대파 탄압을 총괄했다. 류틴 그룹 체포와 키로프 암살 후 대량 체포를 지휘했다. 야고다 실각 후 벨로루시 NKVD로 밀려났다가 1937년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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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1그로즈니 체카 의장
  • 1925–1931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도 GPU 책임자
  • 1931–1936OGPU·NKVD 비밀정치국장
  • 1936–1937벨로루시 내무인민위원
  • 1937체포와 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