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7월 8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그로즈넨스키 라보치」의 부고는 그가 '잠깐의 병을 앓다 심장파열로 사망'했다고 알렸다.
우크라이나 체카 방첩부에서 니콜라예프-주리드, 다긴 등과 함께 복무를 시작해 1923년 예브도키모프를 따라 북캅카스로 옮겨 간 '북캅카스파' 체키스트다. 1936년 여름 카루츠키의 후임으로 서시베리아 변경주 NKVD 국장이 되었고, 몇 달 뒤 모스크바 중앙 기구로 불려 올라가 국가보안총국 비밀정치부장과 방첩부장을 거쳐 내무 부인민위원까지 올랐다. 1937년 7월 2일 수훈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나 며칠 뒤 권총 자살했으며, 나우모프는 이를 경력이 상승하던 때에 일어난 죽음으로 특기한다.
1938년 10월 체포된 뒤 그는 독일·폴란드·프랑스를 위해 간첩 활동을 했다고 「자백」했다. 2년 동안 그가 남들에게서 받아 내던 바로 그런 종류의 자백이었다.
코노토프의 우크라이나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키예프에서 김나지움을 마치고 법학부를 다니다 제정군 하급 장교로 복무했고, 1918년 적군에 들어갔다. 1919년부터 체카 군 방첩에서 일했으며 예브도키모프 아래에서 우크라이나와 북캅카스 보안기관을 거쳐 올라왔다. 1936년 말 모스크바로 옮겨 NKVD 작전부장이 되었고, 1937년부터 적군 탄압의 주무 부서인 특수부(제5부)와 방첩부를 차례로 이끌며 폴란드·독일·라트비아·조선인 민족 작전을 감독했다. 1938년 10월 체포되어 1940년 2월 예조프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됐다. 2013년 러시아 대법원은 그를 복권 대상이 아니라고 판정했다.
파리 몽마르트르 대로 근처에서 생선가게 주인으로 위장해 소련의 유럽 불법 첩보망을 지휘하던 시절, 그의 가게는 백군 망명자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침투 작전의 거점이었다.
1936년부터 소련 대외정보국(INO NKVD) 부국장, 1938년 2월부터 6월까지 국장 대행을 지냈다. 4개 국어에 능통한 체카 출신으로, 대숙청 시기 NKVD의 가장 중대한 해외 공작들(파리에서 백군 장군 예브게니 밀레르 납치, 스위스에서 망명자 이그나티 레이스 암살, 로테르담에서 OUN 지도자 예브헨 코노발레츠 제거)을 직접 지휘했다. 생선가게 주인으로 위장해 파리 불법 거점을 운영했으며, NKVD 특수목적학교에서 후대 정보장교들을 양성했다.
예조프에게 라트비아인 500명 체포를 청했다가 "말도 안 돼, 1,500~2,000명은 체포하라, 그들은 모두 민족주의자다"라는 답을 받았다.
모스크바 노동자 출신으로, 적군 복무와 국가계획위원회 당비서를 거쳐 1927년 OGPU에 입문했다. 1937년 스몰렌스크 UNKVD 국장으로서 '라트비아 민족중심' 사건을 조작해 예조프에게 보고했고, 예조프의 "라트비아인 1,500~2,000명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받아내 라트비아 작전 전역을 촉발시켰다. 1938년 벨라루스 내무인민위원으로서 독일·폴란드·라트비아·리투아니아계 주민을 겨냥한 대량 체포와 즉결처형 체계를 도입해 수개월 만에 수천 명을 사살했으며, 1938년 12월 베리야의 NKVD 숙청으로 체포돼 1940년 1월 총살되고 복권되지 않았다.
1940년 7월, 리치코프는 검찰총장 판크라티예프와 함께 명령을 내렸다: 점심시간 후 20분 이상 지각하거나 종료 20분 전에 무단 퇴근한 노동자는 '무단결근'으로 형사 입건하고 최대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
우랄 공장 노동자 출신으로 정규 고등교육 없이 법무인민위원까지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대법원 군사합의부 위원으로 모스크바 쇼 재판에 참여했고 동부 지역의 '반혁명' 재판을 주재했다. 1938년 1월 법무인민위원이 되어 대숙청 말기, 전시 사법 행정, 전후 독일 전범 공개 재판까지 10년간 소련 사법을 총괄했다. 1940년 20분 이상 지각을 형사 처벌하는 노동 규율 명령을 공동 서명했다. 1948년 당 인사 부서와의 갈등으로 해임되었으나 군 검찰 부직을 거쳐 1955년 은퇴했다.
1937년 4월 30일, 피린이 연출한 모스크바-볼가 운하 개통 축제 — 깃발과 오케스트라, 죄수들이 그린 지도자 초상화로 빛났다. 한 달 뒤인 5월 28일 체포, 그해 8월 총살.
적군 정보장교 출신의 굴라크 수용소장. 1932년 백해-발트 운하 수용소 부소장을 거쳐 드미트라크(Dmitlag)를 이끌며 모스크바-볼가 운하 건설을 총괄했다. 죄수 노동을 '개조'라는 이름의 선전으로 포장해 캠프를 전시장으로 만들었고, 1934년 막심 고리키, 아베르바흐와 함께 찬양 문집 『벨로모르』를 공동 편집했다. 생산성이 낮은 죄수의 배급을 깎는 한편 '개조'를 설파한 모순적 인물. 야고다 측근으로 1937년 체포되어 총살됐다.
1939년 심문에서 프리놉스키는 이렇게 진술했다. "기회를 잡아 자콥스키가 슬루츠키의 얼굴에 클로로포름 마스크를 씌웠다. 그는 이삼 분 만에 잠들었고, 옆방에서 기다리던 알료힌이 오른팔 근육에 독을 주사했다. 슬루츠키는 즉시 사망했다. 몇 분 뒤 나는 위생과 당직 의사를 불렀고, 의사는 슬루츠키의 급사를 확인했다." 예조프의 지시는 그를 체포하지 말고 "소리 없이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대외정보국장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해외의 비합법 요원들에게 닿으면 그들이 귀국을 거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숙청이 제 요원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설계된 살해였다.
1935~1938년 소비에트 대외정보국장. 야고다 시대 국가보안총국 부서장 중 마지막 생존자로, 케임브리지 첩보망이 형성되던 시기 해외공작을 지휘했다. 1938년 2월 예조프 지시로 독살되었다.
옴스크주에 승인된 1급 한도는 1,000명이었다. 1937년 8월 15일 고르바치는 한도 증액을 청하는 암호전보를 예조프에게 보냈다. '8월 13일 현재 옴스크주에서 1급으로 5,444명이 체포되었고...'
예브도키모프가 1934년 국가정치국 안의 '자기 사람'으로 꼽은 북캅카스파 체키스트로, 오르조니키제 변경주 NKVD 부국장을 지냈다. 1937년 옴스크주 NKVD 국장으로서 상한 증액 암호전보를 예조프에게 보내 한도를 9천 명 늘렸고, 이어 미로노프의 뒤를 이어 서시베리아(노보시비르스크주) NKVD를 맡아 숙청과 대량작전을 함께 밀어붙인 지도자로 꼽힌다. 류시코프 망명 뒤인 1938년 여름 하바롭스크 변경주 NKVD 국장으로 파견되었으나 그해 11월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됐다.
1938년 12월 24일 저녁, 말렌코프는 베르만에게 '스탈린 동지께서 독일 간첩의 형제를 정부에 더 둘 수 없다'고 통보했다. 체카 요원들이 옛 상관을 '까마귀' 호송차에 태웠다.
1918년 스무 살에 체카에 들어가 시베리아·중앙아시아에서 부랴트-몽골 내무인민위원과 우즈베크 GPU 의장을 지냈다. 1932년부터 1937년까지 굴라크를 이끌며 초기 수장 중 최장수로 남았고, 수용소 체계를 교정노동 실험에서 소비에트 경제의 핵심 도구로 확장했다. 백해-발트 운하와 모스크바-볼가 운하를 죄수 노동으로 건설했으며, 강제노동을 '개조'(perekovka)라는 교리로 정당화했다. 1937년 체신인민위원으로 전출된 뒤 1938년 12월 말렌코프 집무실에서 체포돼 1939년 3월 총살됐다. 1957년 복권.
해군인민위원 시절 함대에 무지했던 프리놉스키는 회의마다 엉뚱한 훈수를 두며 "내 말이 맞지?"라고 확인받곤 했는데, 한 회의에서 이반 이바노비치 그렌이 일어나 "아닙니다, 인민위원 동지.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셨고 말씀은 틀렸습니다"라고 답했다.
예조프의 제1부인민위원이자 국가보안총국(GUGB)장으로서 대숙청의 대량 작전 실무를 총괄한 체키스트다. 1937년 모스크바 재판과 소련 내 대량 정치 탄압의 조직에 관여했고, 몽골에서 벌어진 대규모 탄압의 조직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했다. 예조프 몰락과 함께 1938년 9월 해군인민위원으로 전출됐다가 1939년 4월 6일 체포됐고, 1940년 2월 4일 소련 대법원 군사재판부의 사형 선고에 따라 처형됐다. 이후 복권되지 않았다.
판결문은 그가 노보시비르스크 NKVD에서 ‘근거 없는 체포’와 수사자료 조작을 허용했다고 기록했다.
이반 말체프는 노동자 출신으로 혁명과 내전을 거쳐 국가보안기관의 지역 지휘관이 된 소련 관료였다. 그는 우랄과 시베리아, 북캅카스의 조직을 거치며 VChK·OGPU·NKVD가 지방 행정과 정치적 통제를 결합하는 과정을 대표했다. 1938년 노보시비르스크주 NKVD를 이끈 그는 특별 트로이카에 참여해 대테러의 집행 구조에 책임을 졌으며, 이후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복권되지 않았다.
1938년 봄 그의 사건을 정리한 결정문은 이렇게 썼다. '모든 범죄 행위는 내무인민위원부 국 기구에 침투하여, 국장 불라흐의 정치적 근시안과 무사안일 덕분에 튼튼한 둥지를 틀은 계급적 적들의 소행임이 밝혀졌다.'
북캅카스에서 잔뼈가 굵은 '북캅카스파' 체키스트로, 다긴이 고리키주로 옮겨 가자 오르조니키제 변경주 NKVD 제3부장에서 국장으로 올라섰다. 1937년 쿨라크 작전에서 예정된 기한보다 앞서 7월 29일에 작전을 개시해 프리놉스키의 격렬한 반응을 불렀고, 평균을 웃도는 숫자를 제안하며 상한을 훨씬 초과해 체포를 밀어붙였다. 지역 체키스트의 자의에 대한 불만이 모스크바에 닿으면서 1938년 3월 해임되고 4월 말 체포되었으며, 1940년 총살됐다.
1941년 6월 22일 새벽 4시 베를린에서 리벤트로프가 데카노조프에게 독일의 대소 선전포고를 전달했고, 통역 에리히 좀머에 따르면 그는 침착하게 '히틀러와 스탈린이 직접 만났더라면 인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1898년 6월 바쿠에서 태어나 1953년 12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처형되었으며, 공식 전기는 그를 그루지야인으로 적는다. 1938년 12월부터 1939년 5월까지 NKVD 국가보안총국 부국장으로 대외정보부와 방첩부를 함께 맡아 대숙청 후반기 숙정을 집행했다. 1940년 리투아니아 전권대표로 파견되어 펄레츠키스를 총리로 세우고 7월 14일 인민세이마스 선거를 조직하는 등 한 달여 만에 병합을 완수했다. 전후 외무 차관과 재산총국 부국장 등 한직을 거쳐 1953년 4월 그루지야 내무장관이 되었으나 6월 30일 체포되어 12월 23일 베리야 일당으로 총살되었다.
1975년 방광암으로 사망해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라는 추도사를 받으며 국장으로 묻혔으나, 사인방 재판 직전인 1980년 10월 사후 제명되고 바바오산에서 유해가 옮겨졌다.
산둥의 지주 집안 출신으로 상하이 지하활동을 거쳐 1933년 모스크바에서 왕밍의 오른팔로 소련 숙청을 배웠다. 1937년 옌안에 돌아와 마오 편에 서서 사회부장으로 정풍운동의 「구조 운동」을 지휘해 수천 명을 특무로 몰았다. 건국 후 한동안 물러났다가 1960년대 중소 논쟁과 문화대혁명에서 중앙문혁소조 고문으로 복귀해 류사오치·허룽 등 원로들에 대한 조사와 박해를 주도했다. 1975년 암으로 사망했고 1980년 당적을 박탈당했다.
“오늘 침묵하는 자는 스탈린의 공범이 된다.” — 1937년 7월 17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결별서
본명 나탄 마르코비치 포레츠키. 오스트리아-헝가리령 갈리치아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1919년 폴란드 공산주의 운동에 합류했고, 이후 ‘루트비히’와 ‘이그나티 레이스’라는 이름으로 서유럽에서 소련 군사정보·국가보안기관의 불법공작망을 운영했다. 1928년 적기훈장을 받았으나 모스크바 재판과 대숙청을 겪으며 스탈린 체제와 결별했다. 1937년 7월 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공개서한에서 훈장을 반납하고 제4인터내셔널 지지를 선언했다. 같은 해 9월 4일 로잔 근교에서 오랜 지인 게르트루트 실트바흐에게 유인된 뒤, 세르게이 시피겔글라스가 지휘한 NKVD 암살조의 총격으로 살해되었다.
1936년 12월, 슬루츠키가 그에게 임박한 모스크바와 베를린의 협정에 대해 알렸다. '이번에는 상황이 심각합니다. 아마도 히틀러와의 협정 체결까지 남은 시간은 서너 달뿐일 것...' 크리비츠키의 회고는 나우모프가 1936~1937년의 물밑 정치를 재구성하는 주요 사료다.
갈리치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본명이 자무엘 긴즈베르크인 소련 군사정보 요원으로, 1930년대에 헤이그를 거점으로 서유럽 비합법 정보망을 이끌었다. 1936년 12월 해외정보부장 슬루츠키에게서 모스크바와 베를린의 물밑 접촉을 들었고, 1937년 여름 파리에서 시피겔글라스와 투하쳅스키 사건의 본질을 논한 끝에, 동료 이그나츠 라이스가 암살되자 그해 가을 망명했다. 1939년 회고록 '나는 스탈린의 요원이었다'를 펴내고 미 의회에서 증언했으며, 1941년 2월 워싱턴의 호텔에서 총상 사체로 발견되었다. 자살로 판정되었으나 논란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1938년 4월 핀란드 측에 독일이 핀란드를 거쳐 레닌그라드를 공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보리스 아르카디예비치 리브킨은 야르체프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소련의 정보관이자 외교관이었다. 1938년 그는 핀란드에 대한 독일의 위협을 막는다는 명분 아래 비밀 협상을 시작했지만, 영토 교환 요구는 합의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 실패한 접촉은 협상과 안보 불신이 얽힌 채 겨울전쟁으로 향하던 소련·핀란드 관계의 첫 단계였다.
폭발 직전 '아무것도 안 될 거야, 이고르'라던 베리야는, 섬광이 솟아오르자 쿠르차토프와 하리톤을 달려가 껴안고서도, 곧 의심에 사로잡혀 비키니 실험 관측자에게 '혹시 쿠르차토프가 우릴 속이려는 게 아닌가?'라고 물었다.
스탈린의 비밀경찰 총수이자 원폭 계획의 감독자. 그루지야 메르헤울리에서 가난한 농민 가정에 태어나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캅카스 지역 보안기관을 거쳐 1938년 11월 NKVD 내무인민위원이 된 뒤 대숙청의 대량 탄압을 축소했다. 1940년 트로츠키 암살을 감독하고, 같은 해 3월 5일 정치국 결정에 따라 폴란드 장교·지식인 2만여 명의 카틴 학살을 집행했다. 1944년에는 체첸·잉구시인 등 민족 강제이주를 직접 지휘했고, 1945년부터 특별위원회 의장으로 원폭 계획을 총괄해 1949년 첫 핵실험을 성공시켰다. 스탈린 사후 1953년 제1부총리 겸 내무장관으로 사면·복권 등 개혁을 밀어붙였으나 6월 26일 체포되었고, 12월 23일 사형 선고와 처형을 당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21–31캅카스 체카·GPU
1931–38그루지야 당 제1서기
1938–45내무인민위원, 예조프 숙청 마무리와 굴라크 관리, 1944년 민족 강제이주 집행
1941년 10월, 밀시테인은 베리야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전쟁 발발 이후 특별부가 지연·탈주 군인 65만 7천여 명을 억류했고 그중 1만 201명을 총살했으며 "3,321명은 부대 앞에서 총살"되었다고 적었다.
베리야의 측근으로 그루지야에서 당 경력을 쌓은 뒤, 1939년 NKVD 수송총국장에 올라 스탈린 시대 강제이주의 철도 기구를 운영했다. 그의 총국은 폴란드인, 카라차이인, 칼미크인, 체첸인, 잉구시인 등 전체 민족 집단의 추방 열차를 편성하고 움직였다. 이 공로로 전투공로훈장인 수보로프 훈장 2급을 받았으나 소비에트 국가는 1962년 이를 취소했다. 1953년 베리야의 체포 직후 함께 체포되어 별도 재판으로 1955년 총살됐다.
1951년 밍그렐리아 사건으로 체포된 라파바는 자신이 10년간 지휘했던 내부감옥에 갇혀 160일간 잠을 빼앗겼고, 얼음처럼 찬 독방에 수갑을 찬 채 벌거벗겨진 채 버려졌다 — 그가 수하들에게 지시했던 바로 그 고문 수법이었다.
밍그렐리아 출신으로 1920년대 체카에 들어가 1938년부터 10년간 그루지야 NKVD와 국가보안부를 이끌며 대숙청 시기 공화국 보안기구의 핵심 책임자로 활약했다. 베리야의 측근으로서 전간기 그루지야 공안 체제를 구축했으나, 1951년 스탈린의 '밍그렐리아 사건'에 연루됐다가 스탈린 사후 풀려났고, 베리야 몰락 직후인 1953년 7월 재체포되어 1955년 공개 재판 끝에 총살됐다.
1940년 8월 20일 코요아칸에서 메르카데르가 트로츠키를 공격한 동안 에이팅곤과 카리다드 메르카데르는 각각 다른 차에서 대기했고, 메르카데르가 붙잡리자 달아났다.
벨라루스 슈클로프 출신 유대인으로, 어린 시절 포그롬을 겪었고 1917년 사회혁명당에 가담했다가 내전 중 볼셰비키로 전향해 고멜 체카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OGPU 외국부 요원으로 중국·터키·서유럽에서 암약했고, 에스파냐 내전기 오를로프의 부관으로 공화국 금 보유분을 소련으로 반출했다. 1940년 수도플라토프와 함께 트로츠키 암살 작전을 설계했으며, 독소전쟁 중에는 제4국 부책임자로서 적 후방의 전략적 기만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종전 후 원자력 첩보 부서를 총괄했으나 1951년 '시온주의 음모'로 체포되어 12년간 복역했고, 1964년 석방되어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다 1981년 모스크바에서 자연사했으며 1992년 사후 복권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1917–1919사회혁명당 입당; 모길료프 노동자·협동조합 활동; 1919년 RKP(b) 입당
1920–1924고멜 체카 — 비밀작전부장 대리, 사빈코프 토벌 중 부상; 군사아카데미 동양부 졸업
1925–1930OGPU 외국부 — 중국·터키 암약; 하얼빈 소련 총영사관 부영사
1930–1936OGPU 특수작전국 — 세레브랸스키 보좌; INO 불법작전부 책임자
1936–1939에스파냐 내전 — NKVD 부주재관 (Kotov 장군); 공화국 금 보유분 소련 반출
「제국 대사를 쏜 사내가 군중 속에서 내게 다가와 내 손을 잡고 시에 대한 감사를 전했다」 — 니콜라이 구밀료프, 「나의 독자들」
오데사 출신 유대인 혁명가. 좌파 사회혁명당원으로 1918년 체카 소속일 당시 독일 대사 미르바흐 암살을 주도해 좌파 SR 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사면 후 OGPU 해외첩보부(INO) 초기 비밀공작원으로 페르시아·팔레스타인·몽골·중동에서 불법 체류하며 소련 정보망을 구축했다. 모스크바 문학계에서 마야콥스키·예세닌 등과 교류한 논란적 인물로, 1929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트로츠키를 은밀히 만나 서신을 국내 반대파에 전달하려다 체포되어 OGPU에 의해 처형되었다.
1943년 10월 포젠에서 그는 친위대 장교들에게, 시체 백 구에서 천 구를 견디며 '품위 있는 자'로 남은 것이 '기록되지도, 기록될 수도 없는 영광의 장'이라고 말했다.
하인리히 히믈러는 나치 독일의 친위대와 경찰 체계를 확장해 인종주의적 지배와 대량학살을 관료적으로 조직한 핵심 지도자였다. 그는 강제수용소와 절멸정책, 점령지의 학살 부대를 통솔하며 유대인과 여러 집단에 대한 집단살해를 실행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때에는 도시를 파괴하고 주민을 살해·추방하는 독일의 보복 작전을 승인하고 지시했다. 전쟁 말기 서방과의 독자적인 협상을 시도하다 히틀러에게 해임됐고, 영국군에 체포된 뒤 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