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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이온 안토네스쿠

Ion Antonescu

루마니아를 추축국의 대소 전쟁에 몰아넣고 트란스니스트리아의 학살을 명령한 「지도자」, 1946년 질라바에서 처형되다

1944년 8월 23일 오후, 왕궁에 불려온 안토네스쿠가 국왕의 즉각 휴전 요구를 거부하자 미하이는 미리 정한 신호로 경비병을 불러 그를 체포했다. 그날 밤 국왕의 라디오 연설이 휴전을 알렸고, 루마니아군은 독일군에게 총구를 돌렸다.

피테슈티의 군인 집안에서 태어난 기병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모로 머러셰슈티 방어전 계획에 참여했고 파리·런던 주재 군사 담당관과 1933~34년 참모총장을 지냈다. 1937~38년 고가 정부의 국방장관을 맡았으나 카롤 2세와 대립해 1940년 비스트리차 수도원에 연금되었다. 1940년 여름 베사라비아·북트란실바니아 상실로 왕정이 흔들리자 9월 4일 전권을 가진 총리가 되어 이틀 뒤 카롤 2세를 퇴위시키고 스스로 「지도자」를 칭했으며, 철위단과 함께 국민군단국가를 세웠다가 1941년 1월 군단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1940년 11월 삼국동맹에 가입하고 1941년 6월 독일과 함께 소련을 침공해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를 되찾고 드네스트르 너머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점령했다. 이아시 포그롬과 오데사 학살, 트란스니스트리아로의 강제 이송으로 루마니아 관할에서 28만에서 38만에 이르는 유대인과 1만 명이 넘는 로마인이 죽었다고 2004년 비젤 위원회는 결론지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두 개 군을 잃은 뒤 강화의 길을 찾았으나 1944년 8월 23일 미하이 국왕에게 체포되어 소련으로 넘겨졌고, 1946년 5월 부쿠레슈티 인민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6월 1일 질라바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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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8제1차 세계대전 참모 장교
  • 1933–1934참모총장
  • 1937–1938국방장관
  • 1940전권 총리, 카롤 2세 퇴위, 「지도자」 칭호
  • 1940–1941국민군단국가, 군단 반란 진압
  • 1941소련 침공, 트란스니스트리아 점령
  • 19448월 23일 체포, 소련 이송
  • 1946인민법정 사형 선고, 질라바 처형

게오르기 미하일로프 디미트로프

Георги Михайлов Димитров
외교·국제활동 코민테른 불가리아 (1934–1945 소련 시민권 겸유) 불가리아 1882–1949 ○ 자연사, 사망 경위 일부 미확인

라이프치히 재판의 피고에서 코민테른 서기장으로

“나는 피고인 공산주의자로서, 내 정치적 명예와 혁명가로서의 명예, 그리고 내 공산주의 이념과 이상을 변호한다.” 1933년 라이프치히 법정에서 한 이 말은 내 전 생애의 내용과 의미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인쇄공·노동운동가로 출발해 1923년 봉기를 이끌었고, 1933년 라이프치히 재판에서 나치에 맞선 법정 변론으로 국제적 상징이 되었다. 제7차 세계대회 직후인 1935년 코민테른 서기장에 올랐고 1943년 코민테른 해산 뒤에는 소련공산당 중앙위 국제정보부를 이끌었다. 대숙청 시기에는 폴란드 공산당 지도부 숙청과 불가리아의 옛 동료 탄압에 관여했으며 일부 구제에도 나섰다. 1945년 불가리아로 돌아와 이듬해 총리가 되었고, 유고슬라비아와의 연방 구상은 스탈린-티토 결별로 무산되었다. 1949년 모스크바 근교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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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943서기장

우메즈 요시지로

梅津美治郎
군사·지휘 일본 국가기관 일본 일본 1882–1949 ○ 옥사

제국군의 명령과 항복 사이에 선 참모총장

1945년 9월 2일, 그는 대본영을 대표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요시지로 우메즈는 일본 제국 육군의 고위 지휘관으로, 중국과 만주 점령지에서 군사 통치와 일본의 대륙 정책을 수행했다. 그는 1944년 육군참모총장이 되어 전쟁 지속을 주장했지만, 군부 내 쿠데타 시도에는 가담하지 않고 천황의 항복 명령을 관철했다. 1945년 9월 2일에는 일본 제국 대본영을 대표해 항복문서에 서명했으며,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침략전쟁 수행 책임으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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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육군 소위, 보병 제1연대
  • 1919–1921스위스 주재 무관
  • 1934–1935지나 주둔군 사령관
  • 1939–1944관동군 사령관·총사령관
  • 1944–1945일본 육군참모총장
  • 1945대본영 대표로 항복문서 서명
  • 1948–1949극동국제군사재판 종신형, 복역 중 사망

도고 시게노리

東郷茂徳

전쟁을 막지 못한 종전 외교가

1945년 7월, 그는 포츠담 선언을 평화의 기초로 삼되 소련과 먼저 교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고 시게노리는 일본 제국의 직업 외교관으로, 태평양전쟁의 개전과 종결 때 외상을 맡았다. 그는 전쟁을 피하려는 대미 협상에 참여했지만 개전을 막지 못했고, 전쟁 뒤에는 그 외교적 책임을 두고 재판을 받았다. 1945년에는 소련을 중재자로 삼아 조건부 종전을 모색하는 한편 포츠담 선언 수락을 주장했으며, 이 선택은 종전을 앞당기려는 현실 감각과 소련의 의도를 오판한 한계를 함께 드러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은 그에게 금고 20년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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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외무성 입성, 외교관 및 영사관 시험 합격
  • 1933–1935외무성 구미국장
  • 1937–1938주독일 대사
  • 1938–1940주ソ 대사, 국경·중립 협상 담당
  • 1941–1942도조 내각 외무대신 겸 척무대신
  • 1945스즈키 내각 외무대신 겸 대동아대신, 포츠담 선언 수락 추진
  • 1948극동국제군사재판, 금고 20년 선고

페트레 두미트레스쿠

Petre Dumitrescu

동부전선의 루마니아군 지휘관

스탈린그라드 북서쪽 측면이 무너지기 전, 두미트레스쿠는 독일군에 지원을 요청했다.

페트레 두미트레스쿠는 루마니아 왕국의 직업군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동부전선에서 루마니아 제3군을 지휘했다. 그는 독일군과 함께 소련을 상대로 부코비나와 우크라이나, 크림, 캅카스 작전에 참여하며 루마니아군의 전쟁 수행을 이끌었다. 1942년 스탈린그라드 북서쪽에서 제3군의 취약한 측면이 소련군의 천왕성 작전에 노출되자 지원을 요청했지만, 군대는 큰 손실을 입고 후퇴했다. 전후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1946년 증거 부족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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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3포병·공병학교 수학, 소위 임관
  • 1911–1913육군참모대학 수학
  • 1930–1932프랑스 주재 군사 attaché
  • 1935–1937육군참모본부 부참모장
  • 1940–1941루마니아 제1군 사령관
  • 1941–1944루마니아 제3군 사령관
  • 1942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제3군 지휘
  • 1944전역, 전쟁범죄 혐의로 조사됨

야코프 자하로비치 수리츠

Яков Захарович Суриц

멘셰비키에서 소련 최장수 대사로: 아프가니스탄에서 브라질까지, 6개국을 횡단한 혁명 외교관

1940년 《타임》지는 이렇게 평했다: "1919년 이래 뚱뚱하고 수염 난 야코프 수리츠는 아프가니스탄, 터키, 독일과 국제연맹 논쟁에서 빛나는 기록을 쌓은 소련 최고의 외교관이었다."

멘셰비키에서 볼셰비키로 전향한 소련 외교관. 1918년 외무인민위원부에 합류한 후 덴마크·아프가니스탄·노르웨이·터키·독일·프랑스·브라질 등 7개국에서 소련을 대표했다. 특히 1923년부터 11년간 터키 대사로 재임하며 아타튀르크와 긴밀히 협력, 소련-터키 우호중립조약(1925)을 체결했고 앙카라에 최초의 대사관을 건립했다. 1934년 베를린 주재 대사로 부임해 나치 집권 초기 독소 경제 관계를 관리했으며, 1937년 파리로 자리를 옮겨 단치히 위기와 겨울전쟁을 거치며 소련의 국제연맹 외교를 이끌었다. 그의 경력은 혁명기 소비에트 외교가 당파적 아마추어에서 전문 외교기구로 변모하는 전 과정을 관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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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유대인 노동총동맹(분트) 가입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가입, 멘셰비키 분파
  • 1907–1910혁명 활동으로 체포, 토볼스크현 유배
  • 1910–1917독일 망명, 하이델베르크·베를린 대학에서 철학·법학 수학
  • 1917러시아 귀국, RSDLP(b)에 합류
  • 1918–1919덴마크 주재 소련 외교사절단 부대표
  • 1919–1921아프가니스탄 주재 소련 전권대표, 소련-아프간 조약 기초
  • 1920–1922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투르키스탄 위원회 위원, 중앙아시아 외무인민위원부 전권위원
  • 1922–1923노르웨이 주재 소련 외교대표
  • 1923–1934터키 주재 소련 전권대표; 소련-터키 우호중립조약 체결 (1925), 앙카라 대사관 건립 (1926)
  • 1934불가리아와의 외교관계 수립 교섭 주도
  • 1934–1937독일 주재 소련 전권대표, 초기 나치 시대 독소 경제 관계 관리
  • 1937–1940프랑스 주재 소련 전권대표 겸 국제연맹 소련 대표단원
  • 1940프랑스 정부에 의해 페르소나 논 그라타 선언
  • 1940–1945외무인민위원부 고문, 대사급 외교관
  • 1946–1947브라질 주재 초대 소련 전권대사
  • 1948은퇴

보리스 드미트리예비치 그레코프

Борис Дмитриевич Греков

키예프 루스 봉건제론을 정립한 소비에트 중세사의 창시자

1939년, 그레코프는 키예프 루스를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 세 민족의 공동 요람"으로 규정하며 소비에트 중세사학의 근간을 세웠다.

소비에트 중세사학의 창시자. ≪키예프 루스≫(1939)에서 키예프 루스를 봉건 국가로 규정하고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의 공동 요람으로 정립했다. 1936년부터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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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7바르샤바대학에서 페트루셰프스키 사사 후 모스크바대학으로 편입, 류뱝스키 지도 아래 졸업
  • 1910–1916페테르부르크 김나지움 교사, 셰레메테프 가문 도서관장; 플라토노프 지도로 석사논문 방어(1914) 후 페트로그라드대학 사강사
  • 1916–1921페름대학 러시아사 강좌 개설 및 초대 주임(1916–1918); 내전기 타브리다대학 교수 겸 타브리다 학술기록위원회 부위원장
  • 1930'아카데미 사건'으로 체포, 약 한 달 구금 후 톰신스키의 신원보증으로 석방
  • 1934–1939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1934), 정회원(1935); ≪키예프 루스≫(1939) 출간 — 봉건제론 정립
  • 1936–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 소장; 역사·철학부 아카데미 서기(1946–1953) 겸임
  • 1943–1952스탈린상 3회(1943, 1948, 1952), 레닌훈장 2회(1944, 1952); 물질문화사연구소장(1943–1947)·슬라브학연구소장(1947–1951) 겸임
  • 1947–1953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1947–1950) 및 소련 최고소비에트(1950–1953) 대의원; 1953년 9월 모스크바에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

알렉산드르 안토노비치 트로야놉스키

Александр Антонович Трояновский

차르의 포병 장교에서 스탈린의 첫 주미 대사로: 혁명과 외교를 오간 러시아 귀족

백악관 리셉션에서 루스벨트가 말했다. "트로야놉스키 씨가 달을 보고 태양이라고 하면, 신사 여러분, 저는 개인적으로 그 말을 믿겠습니다."

알렉산드르 트로야놉스키는 1933년 미국과의 외교 관계 수립 후 초대 주미 소련 전권대표(대사)로 부임하여 루스벨트 행정부와의 협력 기반을 닦은 소련 외교관이다. 세습 귀족 출신이자 차르 포병 장교였던 그는 1904년 볼셰비키에 가담했다가 1914년 멘셰비키로 전향, 1918년 멘셰비키 중앙위원과 제헌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1923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후 스탈린의 대외무역·외교 라인에 편입되었다. 주일 전권대표(1927~1933)를 거쳐 워싱턴에 부임한 그는 1935년 미소 무역 협정 체결을 주도했고, 스탈린에게 나치 독일에 맞선 대미 협력의 필요성을 누차 건의했다. 그의 아들 올레크 트로야놉스키 또한 유엔 주재 소련 대사를 지낸 외교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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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RSDLP(볼셰비키 분파) 입당, 키예프 군사조직 활동
  • 1909–1910예니세이현 유형, 탈출 후 망명
  • 1914–1917멘셰비키 방위파, 망명 중 레닌·스탈린과 협력
  • 1918멘셰비키 중앙위원, 제헌의회 의원
  • 1918–1921붉은 군대 복무, 교관
  • 1923RKP(b) 입당
  • 1924–1927RSFSR 국가무역청(Gostorg) 청장, 대외무역인민위원부 간부
  • 1927–1933주일 소련 전권대표
  • 1933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 1933–1938주미 소련 전권대표 — 초대 대사
  • 1939–1955고등외교학교 교수, 소비에트정보국 활동

실비아 팽크허스트

Sylvia Pankhurst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영국 영국 1882–1960 ○ 자연사

어머니의 WSPU를 떠나 이스트엔드 노동자 여성과 함께한 좌익 공산주의자

「볼셰비키는 공산주의를 저버리기 시작했다」 — 1922년 레닌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그녀는 이렇게 경고했다. 『워커스 드레드노트』를 당에 넘기기를 거부하고 CPGB에서 축출된 그녀는, 당 규율보다 자유로운 논쟁을 선택했다.

영국 참정권 운동가이자 좌익 공산주의자, 반식민 운동가. 어머니 에멀린의 WSPU와 결별하고 이스트엔드의 노동계급 여성 조직화에 헌신했으며, 레닌과 논쟁하며 평의회 공산주의로 전환한 뒤 생애 말년을 에티오피아의 반파시스트 독립 연대에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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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2맨체스터에서 에멀린·리처드 팽크허스트의 딸로 출생
  • 1903–1914WSPU 전임 활동가 — 로고·현수막 디자인, '블랙 프라이데이'(1910) 목격, 여성참정권 운동 전국 조직
  • 1914–1918이스트엔드참정권연맹(ELFS) 설립, 『우먼스 드레드노트』 창간 — 전쟁 반대·징병 거부, 임대료 파업·공동급식 조직
  • 1918–1920노동자사회주의연맹(WSF) 창설, 『워커스 드레드노트』 발행 — 코민테른 제2차 대회 참석, 레닌과 직접 논쟁
  • 1921–1924CPGB에서 축출, 「레닌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발표 — 평의회 공산주의로 전환, 공산노동자당(CWP) 결성
  • 1935–1956『뉴 타임스 앤드 에티오피아 뉴스』 창간·편집 — 이탈리아 파시스트 침공 반대, 범아프리카·반식민지 여론 형성
  • 1956–1960에티오피아로 이주 —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고문, 최초의 교육병원 기금 모금, 『에티오피아: 문화사』 저술
  • 1960아디스아바바에서 78세로 사망 — 에티오피아 국장, 성 삼위일체 대성당 애국자 묘역 안장

두샨 시모비치

Душан Симовић

쿠데타와 패전 사이에 선 군인 총리

1918년 11월 자그레브에서 시모비치는 '압도적 다수가 유고슬라비아 연대의 사상에 사로잡혔다'고 보고했고, 이탈리아의 류블랴나 점거 시도를 세르비아군이 먼저 입성하게 함으로써 저지했다.

두샨 시모비치는 왕국 유고슬라비아의 공군 장군 출신으로, 1941년 3월 27일 쿠데타를 이끌어 삼국동맹 가입에 반대하는 군중의 환호 속에 총리가 된 군인 정치가였다. 그러나 집권 뒤에도 독일의 침공을 막으려 삼국동맹을 공식 폐기하지 못했고, 침공으로 런던 망명정부를 이끌다 1942년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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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베오그라드 육군사관학교 졸업, 포병 소위
  • 1912–1918발칸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살로니카 전선 제7보병연대 지휘
  • 1918자그레브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 국민평의회 주재 세르비아 정부·최고사령부 대표
  • 1936–1938유고슬라비아 왕립 공군 사령관
  • 1938–1940유고슬라비아 왕립군 총참모장, 독일 침공 저항 주장 뒤 사임
  • 1941.3–1942.13월 27일 쿠데타 뒤 유고슬라비아 왕국 총리 겸 총참모장
  • 1941–1942런던 유고슬라비아 망명정부 수반
  • 1945–1946베오그라드 귀환, 미하일로비치 재판 증인

소피야 시기즈문도브나 제르진스카야

Софья Сигизмундовна Дзержинская

독자적 혁명 경로를 걸은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자

1911년 6월 바르샤바 파비아크 감옥에서 아들 얀을 낳고, 생후 8개월 동안 감방에서 함께 살았다.

바르샤바의 폴란드계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04년 SDKPiL에 투신해 로자 룩셈부르크레오 요기헤스와 함께 폴란드 혁명운동의 핵심 간부로 활동했다. 반복된 체포와 시베리아 유형에도 지하신문 발행과 크라쿠프 망명 조직을 계속했고, 1918년 베른 소비에트 외교 사절단을 거쳐 모스크바에 정착했다. 1939~1943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폴란드 문제를 맡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점령 폴란드 대상 공산주의 방송 라디오 코시치우슈코를 지휘했으며, 3차례 레닌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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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SDKPiL 입당, 바르샤바에서 지하 혁명운동 시작
  • 1906–1911반복 체포·투옥; SDKPiL 제6차 대회 대표 (1908);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결혼 (1910); 파비아크 감옥에서 아들 얀 출산
  • 1912시베리아 유형 탈출; 크라쿠프에서 SDKPiL 해외분과 사무국 서기
  • 1918–1919베른 소비에트 외교 사절단 근무
  • 1922–1928로자 룩셈부르크 학교·서방 민족소수자 공산대학 교원; 전연방공산당 중앙위 폴란드국 선전선동부 책임비서
  • 1929–1937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 연구원 겸 책임편집자
  • 1939–1943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폴란드 문제 담당
  • 1941–1946라디오 코시치우슈코 책임자; 1946년 은퇴; 회고록 『대투쟁의 시절』 출간 (1964)

휴 다우딩

Hugh Dowding
군사·지휘 영국 국가기관 영국 영국인 1882–1970 ○ 자연사

레이더 방공체계의 설계자

“시카고의 갱스터들이 차에 방탄유리를 달 수 있다면, 우리 조종사들도 같은 것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영국 공군 장교 휴 다우딩은 전투기 중심의 방공을 일찍 중시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영국 전투기지휘부에서 레이더, 관측망, 습격 plotting, 무선통제를 하나의 체계로 묶어 소수의 전투기로 독일 공군의 공격에 대응했다. 1940년 영국 전투에서 예비 전력과 조종사를 보존한 신중한 운용은 방어의 지속성을 높였지만, 전후에는 대형 편대 전술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 지휘권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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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영국 육군 왕립수비포병대 장교
  • 1914왕립비행단 조종사 및 비행지휘관
  • 1915왕립비행단 제16비행대 지휘관
  • 1929영국 방공 전투지역 사령관
  • 1930공군위원회 보급·연구 담당 공군위원
  • 1936영국 공군 전투기지휘부 사령관
  • 1940영국 전투 방어 지휘
  • 1943남작 서임

사토 나오타케

佐藤尚武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를 통보받은 마지막 주소 대사

과거의 타성으로 저항을 이어가고 있는 현실을 속히 끝내고, 국가 멸망의 한 걸음 앞에서 그것을 멈추게 해야 한다.

일본의 외교관이자 정치가. 벨기에·프랑스·이탈리아 대사를 거쳐 1937년 외무대신이 되었으나 평화협조 노선을 고수하여 군부와 충돌, 석 달 만에 사임했다. 1942년 주소 대사로 부임해 종전 시까지 모스크바에 주재하며, 소련의 중재는 불가능하고 조속한 무조건 항복만이 나라를 구할 길이라고 도쿄에 거듭 경고했다. 1945년 8월 8일 크렘린에서 몰로토프로부터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를 통보받았다. 전후 참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1949년부터 1953년까지 참의원 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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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외무성 입성
  • 1917–1919하얼빈 총영사
  • 1927–1930국제연맹 일본 대표
  • 1930–1937주벨기에·프랑스 대사
  • 1937.03–06외무대신
  • 1942–1945주소련 대사
  • 1945–1946소련에 억류
  • 1949–1953참의원 의장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82–1972 ○ 자연사

루스벨트의 '보조 대통령'이자 포츠담 배상안을 설계한 국무장관

번스의 국무장관 취임 선서 직후, 트루먼이 말했다. "지미, 성경에 입 맞춰." 번스가 그러고 나서 성경을 트루먼에게 건네며 말했다. "대통령님도 입 맞추시죠." 트루먼이 그렇게 하자 자리 전체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제임스 F. 번스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의 민주당 정치인으로, 뉴딜 입법을 주도한 상원의원, 전시 동원을 총괄하며 '보조 대통령'으로 불린 루스벨트의 오른팔, 그리고 트루먼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포츠담 회담에서 독일 배상의 틀을 설계한 인물이다. 포츠담에서 번스는 각 점령국이 자국 점령지역에서 배상을 취하되 소련에는 서방 지역 산업설비의 15%를 식량·원자재와 교환하고 10%를 무상 제공하는 절충안을 몰로토프와 협상해 타결시켰다. 루스벨트의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뒤 트루먼과의 관계도 점차 냉각되었으나, 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로 당선되어 인종 분리 교육 체제를 고수하며 '분리하되 평등하게' 노선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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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25사우스캐롤라이나주 하원의원
  • 1931–1941사우스캐롤라이나주 상원의원
  • 1941–1942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 1942–1943경제안정국 국장
  • 1943–1945전시동원국 국장
  • 1945–1947미국 국무장관
  • 1951–1955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윌리엄 시즈

William Seeds

협상의 한복판에서 소련을 오판한 영국 외교관

시즈는 몰로토프를 두고 “농민 유형의 어리석은 교활함”이 있다고 평가했다.

윌리엄 시즈는 영국 외교관으로, 여러 유럽·아메리카 공관을 거쳐 1939년 모스크바 대사로 부임했다. 그는 영불소 상호원조 조약을 만들려는 협상에서 영국을 대표했지만, 서방의 지연과 소련의 안보 요구가 충돌하는 과정을 냉정하게 읽어 내지는 못했다. 리트비노프의 교체 뒤 몰로토프를 경멸적으로 평가한 그의 보고는 협상 실패를 바라본 당대 영국 외교의 시야와 한계를 함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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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07워싱턴 주재 영국 외교공관
  • 1908–1910베이징 주재 영국 공사관
  • 1913–1919리스본 총영사관 대리공사·총영사
  • 1928–1930라인란트 영국 고등판무관
  • 1930–1935브라질 주재 영국 대사
  • 1939–1940소련 주재 영국 대사, 모스크바 삼국동맹 협상 대표
  • 1973런던에서 사망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시미트

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Шмит
산업·생산 운영 소속 미확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83–1907 ✕ 옥중 의문사

프레스냐 봉기의 심장이 된 가구공장의 젊은 상속인

체포된 시미트는 세묘놉스키 연대 진영으로 끌려가 벽 앞에 총살 위협을 받았고, 며칠 밤잠 못 이루는 심문 끝에 마침내 자백했다.

모스크바 가구공장을 물려받은 청년 사업가로, 1905년 혁명에 투신해 공장을 노동자 전투대의 무기고·병원·시체안치소로 바꾸고 프레스냐 무장봉기의 물적 거점을 제공했다. 9시간 노동제와 임금 인상을 도입했으며, RSDRP에 무장 자금 2만 루블을 쾌척했다. 12월 봉기 진압 뒤 체포되어 고문 끝에 부티르카 감옥에서 의문사했으며, 유산 약 28만 루블은 볼셰비키의 핵심 재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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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부친 사망, 가구공장 상속
  • 190421세로 공장 경영권 인수
  • 19059시간 노동제·임금 인상 도입, RSDRP에 무장 자금 2만 루블 기부, 공장을 혁명 거점으로 전환
  • 1905.12프레스냐 무장봉기: 공장이 무기고·병원·시체안치소로 기능, 세묘놉스키 연대 포격으로 파괴됨
  • 1905.12.18체포되어 고문과 협박 받음
  • 1907.02.13부티르카 감옥에서 의문사

프로시 페르체비치 프로샨

Прош Перчевич Прошьян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러시아 아르메니아 1883–1918 ○ 발진티푸스

소비에트 최초 연정의 좌파 에스에르 인민위원, 당의 '핵심 축'

'프로샨은 1918년 7월까지 소비에트 권력을 강화하는 데, 1918년 7월 이후 그것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 — 레닌, 〈프로샨 동지를 기리며〉, 1918년 12월

좌파 사회혁명당의 핵심 지도자이자 소비에트 최초 연립정부의 우편전신인민위원으로, 레닌·트로츠키·스탈린과 함께 인민위원회 임시집행위원회 위원(1918년 2월)을 지냈다. 인민위원 재임(1917.12–1918.3) 중 우편전신 공무원들의 사보타주를 종식시키고 통신 업무를 정상화했으며, 최고군사회의 정치위원과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을 겸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에 항의해 사임한 후 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봉기의 지도부로 활동했고, 지하 잠복 중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마리야 스피리도노바는 그를 '좌파 사회혁명당의 내적 건설자, 기본 동력, 핵심 축'이라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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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오데사 대학에서 에스에르당 입당, 학생 조직가로 활동
  • 1905오데사 교도소 정치범 탈옥 기도로 체포, 6년 카토르가 선고
  • 1910–1913유형지 탈출 후 체포되어 3년 추가 카토르가; 시베리아 유형 중 해외 탈출
  • 19172월 혁명 후 귀국; 헬싱포르스에서 좌파 에스에르 지도자, 《사회주의-혁명가》 편집장;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선출
  • 1917.12우편전신인민위원 취임
  • 1918.2–3인민위원회 임시집행위원회 위원; 최고군사회의 정치위원
  • 1918.3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항의해 인민위원직 사임
  • 1918.7좌파 사회혁명당 봉기 지도부 참여; 진압 후 지하 잠복, 궐석 3년형 선고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자고르스키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Загорский
학술·연구 소비에트 러시아 러시아 1883–1919 ✕ 폭탄 테러 사망

모스크바 당을 이끌고 초기 소비에트 외교를 개척한 혁명 조직가

폭탄이 떨어지자 그는 "진정하십시오, 별일 아닙니다. 곧 무슨 일인지 확인하겠습니다"라고 외치며 폭발물 쪽으로 달려갔다.

볼셰비키 조직가로, 소비에트 러시아 최초의 해외 외교 사절단인 독일 전권대표부 초대 서기를 지냈고, 1918년 7월부터 모스크바 당위원회 서기로 내전기 수도의 당을 이끌며 도시방어를 지휘했다. 1919년 9월 무정부주의자들의 폭탄 테러로 현장에서 순직했으며,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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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RSDLP(볼셰비키) 입당
  • 1902체포되어 시베리아 유형
  • 1904제네바로 탈출, 레닌과 접촉
  • 1905모스크바 12월 무장봉기 참가
  • 1918독일 주재 RSFSR 전권대표부 초대 서기
  • 1918–1919모스크바 시당위원회 서기
  • 1919제르진스키와 도시방어위원회 공동 지휘

블라디미르 오스카로비치 카펠

Владимир Оскарович Каппель
군사·지휘 러시아 백색운동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스웨덴계) 1883–1920 ○ 동상 · 폐렴

백군 최고의 '병사들의 장군', 얼음 행군을 이끌다 사라진 카잔의 정복자

“병사들에게 전하라, 내가 그들을 사랑했으며 그들 가운데서 죽는 것이 그 증거라고.”

스웨덴계 러시아 귀족 가문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모 장교로 복무하며 브루실로프 공세 계획에 참여했다. 1918년 볼셰비키에 맞서 코무치 인민군 소규모 의용대를 이끌고 기동전으로 카잔을 점령, 적군의 동부전선을 붕괴 직전까지 몰아넣으며 '작은 나폴레옹'이라 불렸다. 콜차크 휘하에서 동부전선 총사령관이 된 후, 붕괴하는 전선을 수습하며 바이칼까지 대시베리아 빙상 행군을 이끌었고, 도중 동상과 폐렴으로 사망했으나 그의 관은 부하들의 손에 끝까지 운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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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니콜라옙스크 기병학교 졸업, 제54용기병연대 코르네트
  • 1913니콜라옙스크 참모아카데미 1등 졸업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모 장교, 브루실로프 공세 계획 참여, 중령
  • 1918.6코무치 인민군 제1의용대 지휘관
  • 1918.7–8시즈란·심비르스크·카잔 점령, 대령 진급
  • 1918.11소장 진급
  • 1919제1볼가군단장 → 볼가집단사령관 → 제3군사령관 (콜차크군)
  • 1919.12–1920.1동부전선 총사령관, 대시베리아 빙상 행군 지휘

표도르 안드레예비치 세르게예프

Фёдор Андреевич Сергеев
정부·행정 러시아 러시아 1883–1921 ✕ 사고사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의 창설자이자 수반, 스탈린의 절친

1902년 3월, 모스크바. 19세의 표도르는 '신체의 불가침,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라 적힌 손수 만든 붉은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학생 시위의 신호였다. 체포, 투옥, 퇴학 — 그렇게 '아르툠'이 탄생했다.

1901년 입당한 구볼셰비키로, 돈바스 광부·철도 노동자에서 출발해 오스트레일리아 이민 노동자 조직을 거쳐 1918년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을 직접 수립하고 이끌었다. 스탈린·키로프와 절친했으며, 내전기 우크라이나에서 중앙군사혁명위원회와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모스크바 당 책임서기를 역임했다. 독일 점령군과 데니킨 백군에 맞서 소비에트 권력을 수호했으며, 1921년 아에로바곤 탈선 사고로 38세에 사망했다. 갓난아들은 스탈린이 입양해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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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2RSDLP 입당, 모스크바 기술학교 학생 시위 주도 후 퇴학·투옥
  • 1903–1905돈바스·하리코프 지하 혁명 활동, 12월 하리코프 무장봉기 지도
  • 1906–1910IV 대회 대표, 페름·모스크바 당 활동, 종신 시베리아 유형 선고, 탈출
  • 1911–1917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에서 러시아 노동자 조직, 총파업 주도, '에코 오스트레일리아' 발행
  • 1917–1918VI 대회 중앙위원 선출,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인민위원회 의장
  • 1918–1919전우크라이나 중앙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1920바시키르 전권위원, '검은 독수리' 봉기 진압, 모스크바 당위원회 책임서기
  • 1920–1921전러시아 광산노동자조합 중앙위원회 의장, 국제광산노동자조합 조직

아돌프 아브라모비치 이오페

Адольф Абрамович Иоффе

브레스트-리톱스크 소비에트 대표단장, 트로츠키의 가장 오랜 동지

유서에서 자신의 죽음을 '싸우는 자의 항의'로, 트로츠키·지노비예프 제명을 '테르미도르의 시작'으로 규정했다. 유서 본문은 11월 15일 밤에서 16일 사이에 쓰고 16일자로 남겼으며, 사망일은 사료에 따라 16일과 17일로 갈린다.

트로츠키의 가장 오랜 동지이자 볼셰비키 외교관. 심페로폴의 유대계 상인 가문에서 태어나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1912년 오데사에서 체포되어 10개월 수감 뒤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가 1917년 2월혁명으로 풀려났다. 10월 봉기를 군사혁명위원회에서 준비했고 트로츠키의 증언에 따르면 그 의장으로 봉기를 이끌었다. 브레스트-리톱스크 소비에트 대표단을 이끌었고, 주독 전권대표로 베를린에 대사관을 세웠다가 1918년 11월 추방되었다(독일 혁명 준비 혐의와 실제 준비 활동이 함께 기록된다). 1922–23년 주중 대표로서 1923년 쑨원과 공동선언을 발표했고 이후 좌익반대파에 섰다. 1927년 해외 치료가 거부되자 자살로 항의했고, 사후 가족도 탄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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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07멘셰비키로 혁명운동 시작, 베를린·취리히에서 의학·법학 수학
  • 1908–1912빈에서 트로츠키와 《프라우다》 발행, 아들러에게 정신분석 수학
  • 1912–1917오데사에서 체포·10개월 수감 후 시베리아로 유형, 1917년 2월혁명으로 풀려나다
  • 1917.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1917.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 합류, 중앙위원 후보·서기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10월 봉기 지휘
  • 1917.11–1918.1브레스트-리톱스크 평화협상 소비에트 대표단 의장
  • 1918.4–11주독 RSFSR 전권대표, 추가조약 체결; 독일 혁명 준비 혐의와 실제 준비 활동이 함께 기록된 가운데 11월 추방
  • 1922–1923주중 소비에트 대표, 쑨원-이오페 선언으로 국공합작의 길을 열다
  • 1924–1925주오스트리아 소비에트 전권대표
  • 1925–1927트로츠키의 양보위원회 부위원장, 좌익반대파 활동
  • 1919–1920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 국고통제 인민위원·노동국방위원회 위원
  • 1920–1921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와 강화조약, 폴란드와 리가 조약 체결
  • 1922제노바 회의 소비에트 대표단 일원
  • 1923–1927좌익반대파 활동, 양보위원회 부위원장, 모스크바 대학 소비에트 법학부 교수(1927)

파울 레비

Paul Levi
정치·당 지도 독일 공산당 독일 독일 1883–1930 ○ 폐렴 중 추락사

룩셈부르크의 변호사에서 KPD 지도자로, '반푸치즘'으로 코민테른 좌경모험주의를 비판하다

1921년 3월 행동 직후,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이 팸플릿을 구상할 때 독일공산당은 50만 당원이었다. 8일 후 내가 이 글을 쓸 때, 그 당은 근본에서 동요했고 그 존립 자체가 의문에 처했다. 바쿠닌적 광기에 희생된 전사자들은 말한다: 다시는 결코!」

로자 룩셈부르크의 변호사에서 독일공산당(KPD) 의장이 된 사회주의자. 1921년 3월 행동을 '바쿠닌주의적 푸치즘'으로 규정한 《우리의 길》로 축출된 후 USPD를 거쳐 SPD 좌파 지도자가 되었고, 트로츠키는 그를 '독일에서 유일하게 잃을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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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SPD 입당, 프랑크푸르트에서 변호사 개업
  • 1913로자 룩셈부르크의 변호인으로 반군 선동 재판 변론
  • 1915–1918스파르타쿠스단 창립 참여, 침머발트 좌파·『Spartakusbriefe』 편집
  • 1918.12KPD 창립대회에서 '국민의회' 의제 발제
  • 1919.03–1921.02KPD 의장 —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요기헤스 사후 당 재건
  • 1920USPD 좌파 통합으로 KPD 대중정당화, '공개서한' 전술 주도
  • 19213월 행동을 비판한 『우리의 길: 반푸치즘』으로 KPD 제명
  • 1922USPD 거쳐 SPD 합류, 룩셈부르크의 『러시아 혁명』 유고 출간
  • 1924–1930제국의회 SPD 의원, 리프크네히트·룩셈부르크 살해 진상규명·반나치 투쟁

그리고리 예브세예비치 지노비예프

Григорий Евсеевич Зиновьев
외교·국제활동 코민테른 소련 우크라이나 1883–1936 ✕ 총살 처형

10월에 반대했고, 스탈린을 변호했고, 스탈린에게 죽었다

1924년 5월, 레닌의 유언이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 낭독되었다. 카메네프가 문서를 읽었고, 지노비예프는 스탈린을 옹호하는 연설에 나서 그를 서기장으로 재선출하자는 동의를 거수로 통과시켰다. 트로츠키의 소수만 반대했고, 유언은 대회에 보고되지 않았다.

레닌의 오랜 망명 동지이자 코민테른 초대 집행위원회 의장으로,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초기 얼굴이었다. 본명은 옵세이-게르숀 라도미슬스키로, 옐리자베트그라드(오늘날 우크라이나 크로피브니츠키)의 유대인 낙농가에서 태어났다. 1917년 10월 무장봉기에는 카메네프와 함께 공개 반대했으나,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서 북부의 당 조직을 장악했고 1921년 3월 정치국 정회원이 되었다. 레닌 사후 스탈린·카메네프와 3두체제를 이루어 트로츠키를 고립시켰고, 1925년 12월 신반대파로 패배한 뒤 1926년 레닌그라드 소비에트와 코민테른 의장직에서 밀려났다. 1936년 8월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총살되었고, 1988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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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7망명기 레닌의 최측근
  • 1917.10카메네프와 봉기 반대, 계획 누설 파동
  • 1919–26코민테른 초대 의장
  • 1923–25트로이카, 트로츠키 견제
  • 1926–27통합반대파, 출당과 굴복 반복
  • 1936제1차 모스크바 재판, 처형

레프 보리소비치 카메네프

Лев Борисович Каменев
외교·국제활동 코민테른 소련 러시아(유대계 아버지·러시아계 어머니) 1883–1936 ✕ 처형

당의 공인된 신중파: 경고는 그보다 오래 살았다

1917년 10월 18일, 카메네프는 무장봉기가 혁명에 파멸적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레닌은 제명을 요구했으나, 10월 20일 중앙위원회는 사퇴를 받아들였다. 10월 25일 그는 국가원수가 되었으나 11월 4일 연립정부 문제로 사퇴했다.

레닌이 1902년 파리에서 만나 30년 넘게 함께한 가장 오랜 동지다. 1901년 당에 들어가 시베리아 유형과 망명을 거쳤고, 1914년에는 프라우다와 두마 볼셰비키 의원단을 지도했다. 10월 봉기에 반대했으나 혁명 후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1918~1926)을 지냈고 레닌 병중에는 정치국을 주재했다. 1922년 스탈린을 서기장으로 추천했고 스탈린·지노비예프와 3두체제를 이루었지만 1925년 「우리는 지도자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공개 맞서 실각했다. 이후 푸시킨 하우스와 아카데미아 출판사를 이끌며 문학 연구에 전념했고, 1936년 8월 첫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1988년 복권되었으나 당적은 회복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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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두마 볼셰비키 의원단 재판, 시베리아 유형
  • 1917프라우다 편집, 4월 테제와 10월 봉기에 반대
  • 1918–26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
  • 1922–24레닌 병중 정치국 주재, 트로이카
  • 1936지노비예프와 나란히 재판, 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