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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 알렉세예비치 밀류틴

Дмитрий Алексеевич Милютин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16–1912 ○ 자연사

20년간 전쟁장관으로 러시아 군대를 근대 상비군으로 탈바꿈시킨 대개혁의 군사 설계자

1877년 9월 13일, 플레브나 세 차례 공격 실패 후 대공과 차르가 철수를 결정하자 군사회의에서 단독으로 포위 지속을 주장했다. 그의 설득으로 전선은 유지되었고, 두 달 후 플레브나는 함락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치하에서 20년간(1861–1881) 전쟁장관을 지내며 러시아 제국군의 근본적 재편을 주도했다. 1874년 전군 징병제를 도입해 25년 귀족 중심 징집을 전 계급 6년 복무로 대체했고, 15개 군관구 체제·사관학교 근대화·병사 기초교육으로 군대를 근대 상비군으로 전환시켰다. 형 니콜라이 밀류틴과 함께 대개혁 시대 자유주의 관료의 전형이었으나, 체르케스인 강제이주를 '적대적 요소를 제거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 옹호한 어두운 유산도 남겼다. 말년에는 러시아 제국 최후의 야전원수(1898)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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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6–1845근위대 장교, 캅카스 전쟁 참전, 중상
  • 1845–1856육군대학 교수, 『1799년 전쟁사』(5권)로 데미도프상
  • 1856–1860캅카스군 주임참모, 샤밀 체포 작전 수행
  • 1861–1881전쟁장관: 전군 징병제, 군관구제, 사관학교 근대화, 병사 기초교육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플레브나 포위 지속 주장, 승리 견인
  • 1878백작 수여, 전후 부패 조사 위원회 설치
  • 1881–1912알렉산드르 3세 즉위 후 사임, 시메이즈에서 회고록 집필
  • 1898제국 최후의 야전원수 진급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2세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II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18–1881 ✕ 암살

농노해방과 대개혁으로 구체제를 위로부터 현대화하려 했던 차르, 혁명가들의 표적이 되다

1856년 모스크바 귀족들에게 한 연설: "현행 농노 소유 질서는 그대로 유지될 수 없습니다. 아래로부터 저절로 폐지되기를 기다리느니, 위로부터 폐지하는 편이 낫습니다."

1855년 크림전쟁의 패배 속에 즉위한 알렉산드르 2세는 '아래로부터 폐지되기를 기다리느니 위로부터 폐지하는 편이 낫다'며 1861년 농노제를 폐지하고, 젬스트보 자치·사법 개혁·병역 개혁을 차례로 단행했다. '해방자 차르'로 불렸으나, 개혁은 급진파에게는 불충분했고 보수파에게는 지나쳤으며, 1866년 암살 미수 이후 반동으로 기울었다. 1881년 3월 13일, 로리스멜리코프 헌법 초안에 서명한 바로 그날, 인민의 의지 당원이 던진 폭탄에 치명상을 입고 겨울궁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은 대개혁 시대의 종말이자 알렉산드르 3세의 반동으로 이어졌으며, 혁명적 테러를 러시아 정치의 결정적 방법으로 확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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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5아버지 니콜라이 1세 즉위로 황태자(체사레비치)가 되다
  • 1855차르 즉위; 크림전쟁 패배 속에 즉위
  • 1856파리 조약으로 크림전쟁 종결; 대관식에서 정치범 사면
  • 1861농노해방령 — 2,300만 농노 해방
  • 1863–64폴란드 봉기 진압; 핀란드 의회 재소집
  • 1864젬스트보(지방자치) 개혁, 사법 개혁
  • 1874전계급 징병제 도입 — 군제 개혁
  • 1877–78러시아-튀르크 전쟁; 불가리아 해방
  • 1880로리스멜리코프에게 헌법 초안 위임
  • 1881.3.13인민의 의지(나로드나야 볼랴) 소속 이그나치 그리네비츠키의 폭탄에 치명상, 겨울궁전에서 사망
학술·연구 독일 독일 1818–1883 ○ 자연사

『자본론』의 저자, 제1인터내셔널을 이끈 사람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 — 『고타강령 비판』(1875)

트리어의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나 『라인신문』 편집장으로 출발했다. 1845년 프로이센 국적을 버린 뒤 죽을 때까지 무국적자였고, 1849년부터는 런던 망명자였다. 엥겔스와 40년을 함께 일하며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을 썼고 제1인터내셔널을 이끌었다. 만년의 『고타강령 비판』(1875)은 독일 노동자 정당의 통합강령에 들어앉은 라살레주의를 조목조목 해부한 문서로, 국가를 사회주의의 도구로 보는 발상에 대한 그의 마지막 답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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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2–1843『라인신문』 편집장 — 프로이센 검열로 폐간
  • 1844파리에서 엥겔스와 만나 평생의 공동작업을 시작
  • 1845프로이센 국적 포기 — 이후 죽을 때까지 무국적자
  • 1848『공산당 선언』 발표, 『신라인신문』 편집장
  • 1849–1883런던 망명 — 대영박물관 열람실에서 『자본론』을 쓰다
  • 1864–1872국제노동자협회 창립선언문 집필, 총평의회 지도
  • 1867『자본론』 제1권 출간
  • 1871『프랑스 내전』 — 파리 코뮌을 노동계급 정부의 형태로 옹호
  • 1875『고타강령 비판』 집필 — 브라케에게 보내 지도부에만 회람
  • 1883런던에서 사망, 하이게이트 묘지에 묻히다

미하일 니키포로비치 카트코프

Михаил Никифорович Катков
문학·예술 소속 미확정 러시아 러시아 1818–1887 ○ 자연사

『러시아 통보』와 『모스크바 소식』으로 여론과 조정을 움직인 '러시아의 천둥소리'

스스로를 방어할 수도 통치할 수도 없는 약한 국가는 불쌍히 여겨지지 않고 경멸당하고 끝장난다.

미하일 카트코프는 제정 러시아 후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보수 언론인으로, 문예지 『루스키 베스트니크』와 일간지 『모스콥스키예 베도모스티』를 편집했다. 『루스키 베스트니크』에는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의 주요 장편들이 연재되어 러시아 소설 황금기의 산실이 되었다. 1863년 폴란드 봉기 이후 친영 자유주의에서 급진적 러시아 민족주의로 선회하여 정부를 우파에서 압박했다. 포베도노스체프와 함께 알렉산드르 3세 반동적 반개혁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포베도노스체프의 말처럼 '카트코프의 참여 없이 중요한 조치가 취해지는 부처는 없을'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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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8모스크바 대학 철학부 졸업
  • 1840–1841베를린 대학 수학, 셸링 철학 강의 수강
  • 1845–1850모스크바 대학 철학과 조교수
  • 1851–1855『모스콥스키예 베도모스티』 초대 편집자
  • 1856–1887『루스키 베스트니크』 편집자 겸 발행인
  • 1863–1887『모스콥스키예 베도모스티』 편집자 겸 임차인
  • 1868차레비치 니콜라이 기념 리체움 공동 설립
  • 1882추밀원 의원

프리드리히 엥겔스

Friedrich Engels
학술·연구 독일 독일 1820–1895 ○ 자연사

마르크스의 공동저자이자 후원자,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저자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멸한다.」 — 『공상에서 과학으로』(1880)

바르멘의 방적공장주 집안에서 태어나 맨체스터의 가업을 관리하며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1845)를 썼다. 1848년 혁명과 바덴 봉기를 거친 뒤 20년을 상사에 매여 런던의 마르크스 가족을 부양했다. 뒤링을 반박한 『반뒤링론』(1878)에서 세 개 장을 뽑아 만든 소책자가 『공상에서 과학으로』(1880)이고, 이 책은 곧 열 개 언어로 번역되어 마르크스주의 입문서가 되었다. 마르크스 사후에는 『자본론』 2·3권을 편집했고, 1891년 15년간 묻혀 있던 『고타강령 비판』을 당 지도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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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2–1844맨체스터 에르멘 운트 엥겔스 상사 근무 —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의 현장
  • 1844파리에서 마르크스와 만나 평생의 공동작업을 시작
  • 1848『공산당 선언』 공동 집필, 『신라인신문』 편집진
  • 1849바덴-팔츠 봉기에 부관으로 참전
  • 1850–1870맨체스터 상사로 복귀 — 20년간 마르크스 가족을 부양
  • 1878『반뒤링론』 출간 — 각주에서 비스마르크식 국유화를 '사이비 사회주의'라 부르다
  • 1880라파르그의 요청으로 세 개 장을 발췌해 『공상에서 과학으로』를 프랑스어로 발표
  • 1883–1894마르크스 사후 『자본론』 제2권과 제3권 편집
  • 1891『고타강령 비판』을 『신시대』에 발표 — 당의 반대를 서문으로 정면 돌파
  • 1895런던에서 사망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네크라소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Некрасов
문학·예술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21–1878 ○ 장암

농민의 고통을 노래하고 《동시대인》을 혁명적 문학의 중심으로 만든 시인·출판인

"그대는 시인이 아닐지 몰라도, 시민이어야만 한다." — 네크라소프가 시 「시인과 시민」에서 선언한, 러시아 문학의 사회적 사명을 규정한 한 구절.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중심을 이룬 시인이자 출판인으로, 푸시킨이 창간한 《동시대인》을 인수해 벨린스키·체르니솁스키·도브롤류보프의 비평과 톨스토이·도스토옙스키·투르게네프의 소설이 교차하는 당대 최고의 문예지로 키웠다. 농노제 아래 신음하는 농민을 그들의 언어로 노래한 그의 시는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의 정경이 되었고, 대표작 『누가 러시아에서 행복하게 사는가』는 러시아 농촌의 모순을 전면적으로 파헤친 서사시로 남았다. 1878년 장례식에 4천 명이 운집해 정치 집회로 변모했으며, 도스토옙스키가 '푸시킨 이후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 추도하자 젊은 혁명가들은 '아니, 더 위대하다!'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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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9–1841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철학부 청강생
  • 1840첫 시집 『꿈과 소리』 출간
  • 1840–1846《조국의 수기》 및 여러 잡지에 기고, 희곡·보드빌 집필
  • 1845–1846알마나크 『페테르부르크 생리학』·『페테르부르크 선집』 편집·출판 — 도스토옙스키 데뷔작 수록
  • 1847–1866《동시대인》(Sovremennik) 발행인 겸 편집자
  • 1856대표 시집 『N. 네크라소프 시선』 출간 — 즉시 매진, 전국적 명성
  • 1868–1878《조국의 수기》(Otechestvennye Zapiski) 발행인 겸 편집자
  • 1873–1876대표작 『누가 러시아에서 행복하게 사는가』 집필

니콜라이 야코블레비치 다닐렙스키

Николай Яковлевич Данилевский
학술·연구 러시아 러시아 1822–1885 ○ 심부전

문화-역사적 유형론으로 러시아 문명의 독자성을 논증한 범슬라브주의 철학자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와 유럽』을 '모든 러시아인의 책상 위 필독서'라 불렀다.

러시아 문명주의 역사철학의 창시자. 주저 『러시아와 유럽』(1869)에서 세계사를 문화-역사적 유형의 순환으로 파악하고 슬라브 유형을 독자 문명으로 정립했다. 젊은 시절 페트라솁스키 서클에서 푸리에 사상을 연구하다 체포·구금되었으나 보수로 전향, 범슬라브주의를 체계화하여 포베도노스체프·카트코프와 함께 구체제 이데올로기 지형을 형성했다. 도스토옙스키가 '모든 러시아인의 필독서'라 칭했고 슈펭글러·토인비의 문명론을 선취한 이 저작은 러시아 보수사상사의 핵심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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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6–1843차르스코예 셀로 리체움 졸업
  • 1843–1849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자연과학 자유청강; 페트라솁스키 서클에서 푸리에 사상 강의
  • 1849체포·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100일 구금 후 볼로그다 유배
  • 1852–1881어업·해양 원정 지휘(볼가·카스피·백해·아조프·북극해); 러시아 어업법 체계화; 콘스탄티노프 메달(1866)
  • 1869『러시아와 유럽』 출간 — 문화-역사적 유형론으로 국제적 명성
  • 1879–1885니키츠키 식물원장(1879–1880); 『다위니즘』(1885) 출간; 티플리스에서 사망

표트르 라브로비치 라브로프

Пётр Лаврович Лавров
학술·연구 러시아 러시아 1823–1900 ○ 자연사

『역사적 편지』로 인텔리겐치아의 '민중에 대한 빚'을 선언한 나로드니키 철학의 기초적 이론가

『러시아 혁명 청년에게』(1874): "러시아 사회의 재건은 인민을 위해서뿐 아니라 인민을 통해서 달성되어야 한다. 대중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며, 우리 사상의 승리는 준비와 현 시점에서 가능한 것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러시아 나로드니키 운동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가. 포병장교이자 수학 교수로 출발하여 1860년대 혁명운동에 투신, 카라코조프 사건으로 유형된 볼로그다에서 『역사적 편지』(1868–69)를 집필했다. 이 저작은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개인'이 민중에 대한 지적 빚을 갚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1870년대 '민중 속으로' 운동의 사상적 도화선이 되었다. 망명 후 제1인터내셔널에 가입하고 파리코뮌을 목격했으며, 제네바에서 『브페료트!』지를 발행하여 바쿠닌의 급진적 봉기론 및 트카초프의 음모적 전위당론과 논쟁하며 점진적 선전·교육 노선을 체계화했다. 후기에는 인민의지파와 협력하고 제2인터내셔널에서 활동했으며, '의식적 역사적 연대' 개념을 중심으로 한 사회학 이론을 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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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7–1842페테르부르크 포병학교 수석 입학·졸업, 수학 재능으로 오스트로그라츠키의 최우수 제자로 꼽힘
  • 1844–1866미하일롭스크 포병아카데미 수학 교수 — 1858년 대령 진급, 『실천철학 제문제 연구』(1860) 출간
  • 1862–1866첫 번째 '토지와 자유' 참여, 체르니솁스키와 교류, 학생운동 지원 — 카라코조프 사건 후 체포
  • 1867–1870볼로그다 유형 — 가명 '미르토프'로 『역사적 편지』(1868–69) 집필, 로파틴 도움으로 파리 탈출
  • 1870–1872파리 망명 — 제1인터내셔널 가입, 파리코뮌 목격, 런던에서 마르크스·엥겔스와 회견
  • 1873–1877제네바·런던에서 『브페료트!』 잡지·신문 발행 — '라브리즘'(선전 중심 점진주의) 체계화, 바쿠닌·트카초프와 논쟁
  • 1883–1886인민의지파와 협력, 티호미로프와 『인민의지 회보』 공동 편집
  • 1889–1900제2인터내셔널에서 흐느착당 대표, 파리 사회주의 살롱 주재, 『사상사 주요 계기들』 저술 — 몽파르나스 묘지 안장

미하일 타리엘로비치 로리스-멜리코프

Михаил Тариелович Лорис-Меликов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아르메니아 1824–1888 ○ 개혁안 폐기 후 은퇴

"마음의 독재"라 불린 아르메니아 출신의 개혁적 내무장관

1881년 3월 13일 아침, 알렉산드르 2세는 로리스-멜리코프의 개혁안에 서명하며 말했다: "나는 승인했다. 그러나 이것이 헌법을 향한 첫걸음임을 스스로 숨기지 않는다." 몇 시간 후 차르는 암살당했다.

아르메니아 귀족 출신으로 캅카스 전쟁과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기병 장군이었으나, 그의 역사적 무게는 군사적 공적보다 정치 개혁에 있다. 1880년 겨울궁전 폭파 사건 이후 전제적 권한을 위임받아 '마음의 독재'로 불린 온건 노선을 펼쳤으며, 혁명 탄압과 동시에 검열 완화·지방 자치·선거 대표제 도입을 골자로 한 개혁안을 추진했다.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1881년 3월 13일 아침, 차르는 로리스-멜리코프의 선거 자문위원회 구상을 승인했으나, 알렉산드르 3세가 즉위 후 콘스탄틴 포베도노스체프의 조언으로 개혁안을 폐기하고 전제정치를 선언했다. 러시아 최초의 헌정 실험을 설계했으나 반동에 좌절된 그는 개혁과 전제의 분기점에서 상실된 개혁의 순간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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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7캅카스로 전속, 체첸·다게스탄 전투 참전
  • 1853–1856크림 전쟁 참전, 바얀두르·바슈카드클라르 전투
  • 1855카르스 지역 사령관
  • 1863–1875테레크주 총독 겸 테레크 카자크군 아타만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캅카스 전선 사령관, 아르다한·카르스 점령
  • 1879하리코프 임시 총독
  • 1880최고행정위원회 위원장
  • 1880–1881내무장관

페르디난트 라살레

Ferdinand Lassalle
학술·연구 독일 독일 1825–1864 ✕ 결투 중 총상

독일 최초의 노동자 정당 ADAV의 창립자

「철과 같은, 잔혹한 법칙(das eiserne und grausame Gesetz)」 — 임금을 생존 수준에 묶어 둔다며 라살레가 임금철칙에 붙인 이름(1863)

브레슬라우의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변호사이자 선동가. 1863년 5월 라이프치히에서 전독일노동자협회(ADAV)를 세워 5년 임기의 회장이 되었고, 보통선거권으로 국가를 움직여 국가 보조 생산협동조합을 세우면 사회주의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비스마르크와 비밀리에 만나 노동자와 프로이센 왕정의 동맹을 타진해 마르크스의 깊은 의심을 샀다. 1864년 결혼 문제로 벌인 결투에서 총상을 입고 사흘 뒤 제네바 근교에서 죽었다. 그가 남긴 강령은 11년 뒤 고타 통합강령의 뼈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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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8–1849라인란트에서 혁명 선동, 무력 저항 선동 혐의로 6개월 금고
  • 1862「노동자 강령」 강연 — 노동자 계급을 독자적 정치 세력으로 호명
  • 1863.5라이프치히에서 전독일노동자협회(ADAV) 창립, 5년 임기 회장 취임
  • 1863비스마르크와 비밀 회동·서신 — 노동자와 프로이센 왕정의 동맹을 타진
  • 1864.8제네바 근교 결투에서 총상, 사흘 뒤 사망

미하일 예브그라포비치 살티코프-셰드린

Михаил Евграфович Салтыков-Щедрин
문학·예술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26–1889 ○ 뇌졸중

전제정치와 농노제를 신랄하게 풍자한 19세기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풍자작가

1885~1886년 병든 셰드린을 찾아온 학생 대표단 중에는 레닌의 형 알렉산드르와 누이 안나가 있었으며, 안나 울리야노바-옐리자로바는 그를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라고 불렀다.

19세기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풍자작가인 미하일 살티코프-셰드린은 『한 도시의 역사』(1870)와 『골로블료프 가문』(1880)을 통해 전제정치·관료제·농노제의 부패를 신랄하게 파헤쳤다. 귀족 출신이었으나 프랑스 유토피아 사회주의에 공감해 페트라솁스키 서클에 가담, 1848년 유배된 후 7년간 지방 관료로 일하며 러시아의 모순을 목격했고, 네크라소프 사후 《조국의 수기》 편집장으로 급진 저널리즘을 이끌었다. 레닌은 그를 '혁명적 청년들이 가장 사랑한 작가'라 불렀고, 지노비예프는 '그의 작품은 당시 어떤 혁명가 조직보다도 진정으로 차르 체제의 기초를 훼손했다'고 평가했으며, 마르크스도 그의 작품을 정치적 관심으로 정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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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4–1848군부성 문서국 관리
  • 1848–1855뱟카 유배, 지방 관료
  • 1858–1860랴잔 부지사
  • 1860–1862트베리 부지사
  • 1863–1864《동시대인》 기고
  • 1864–1868펜자·툴라·랴잔 재무국장
  • 1868–1884《조국의 수기》 편집장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Wilhelm Liebknecht
학술·연구 독일 독일 1826–1900 ○ 자연사

아이제나흐파 창립자, 고타 통합강령의 기초자

「국가사회주의와 가장 앞장서 싸워 온 것이 우리 독일 사회주의자들이며, 국가사회주의가 실은 국가자본주의임을 누구보다 분명히 보인 사람이 나다.」 — '우리의 최근 대회'(1896)

기센에서 태어나 1848년 봉기에 가담했다가 스위스를 거쳐 런던으로 망명해 12년간 마르크스·엥겔스의 가까운 동지로 지냈다. 1869년 베벨과 함께 아이제나흐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SDAP)을 세웠고, 보불전쟁 전쟁공채에 반대하다 체포되어 1872년 라이프치히 반역죄 재판에서 요새금고형을 받았다. 1875년 고타 통합대회를 성사시킨 주역이자 통합강령의 기초자였으며, 마르크스가 조목조목 해부한 문서가 바로 그것이다. 1890년부터 죽을 때까지 당 기관지 『전진』을 편집했다.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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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8–1849바덴 봉기 참가, 패배 후 스위스로 망명
  • 1850–1862런던 망명 — 마르크스·엥겔스와 교유하며 공산주의자동맹에 가담
  • 1869베벨과 아이제나흐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SDAP) 창립
  • 1870–1872전쟁공채 반대로 체포, 라이프치히 반역죄 재판에서 2년 요새금고형
  • 1875고타 통합대회 주도 — 통합강령을 기초해 라살레파와 합당
  • 1878–1890사회주의자탄압법 아래 제국의회 의원으로 당을 지키다
  • 1890–1900당 기관지 『전진(Vorwärts)』 편집장
  • 1900샤를로텐부르크에서 사망

콘스탄틴 페트로비치 포베도노스체프

Константин Петрович Победоносцев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27–1907 ○ 자연사

전제정치를 신앙으로 삼은 '대심문관'

니콜라이 2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현 체제의 연장은 나라를 얼어붙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봄기운이 조금만 스며들어도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다."

알렉산드르 3세 시대 제정 러시아의 최고 보수 이데올로그이자 1880~1905년 성무원 검사장. 1881년 4월 '전제정치 불가침 선언'을 기초해 로리스-멜리코프의 입헌 개혁안을 폐기시켰고, 교구학교 확대·검열 강화·비정교도 탄압의 반동적 반개혁을 주도했다. 3권의 『민법 강의』를 집필한 법학자이며, 『러시아 정치가의 성찰』에서 의회제를 '우리 시대의 위대한 거짓말'로 규정했다.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 두 차르의 스승이었고, 1901년 톨스토이 파문도 그의 재임 중 단행되었다. 1905년 10월 선언 후 물러났지만 그가 평생 지킨 전제 권력은 혁명 세대가 타도할 구체제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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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6제국 법률학교 졸업, 원로원 근무
  • 1860–1865모스크바 대학 민법 교수
  • 1861황태자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법률 교사
  • 1865미래의 알렉산드르 3세 법률 교사
  • 1868–1880『민법 강의』 3권 출간, 민법학 박사
  • 1872국가평의회 의원
  • 1880–1905성무원 검사장, 러시아 정교회 실질적 수장
  • 1881.4'전제정치 불가침 선언' 기초, 개혁안 폐기
  • 1884교구학교 개혁 (273개 → 1902년 43,696개)
  • 1896『모스크바 선집』, 의회제·민주주의 비판
  • 1901암살 미수 생존, 재임 중 톨스토이 파문 단행
  • 1905.1010월 선언 후 사임, 국가평의회·원로원직만 유지

니콜라이 가브릴로비치 체르니솁스키

Николай Гаврилович Чернышевский
학술·연구 러시아 러시아 1828–1889 ○ 뇌출혈

『무엇을 할 것인가?』를 써서 레닌 세대를 만든 혁명적 민주주의자

마르크스는 『자본론』 제2판 후기에서 체르니솁스키를 '위대한 러시아 학자이자 비평가'라고 불렀고, 엥겔스는 그와 도브롤류보프를 '사회주의적 레싱들'이라 칭했다.

러시아 혁명적 민주주의 사상가로, 『소브레멘니크』를 이끌며 유물론 미학과 농업사회주의를 정립했다.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독방에서 쓴 『무엇을 할 것인가?』(1863)는 두 세대 혁명가들의 지침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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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53『오체체스트벤니예 자피스키』 등에 첫 글 게재
  • 1855–1862『소브레멘니크』 실질적 편집장 — 혁명적 민주주의 기관지로 전환
  • 1855석사논문 『예술의 현실에 대한 미학적 관계』 — 유물론적 미학 선언
  • 1860『철학에서의 인류학적 원리』 — 포이어바흐적 유물론의 전개
  • 1862–1864체포·수감 —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독방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집필
  • 1864민사처형 후 7년 카토르가형, 평생 시베리아 유형 선고
  • 1864–1883카다야·알렉산드롭스키 자보트 카토르가, 빌류이스크 유형 — 『프롤로그』 집필
  • 1883–1889아스트라한 귀환 허가, 사라토프 이주 — 만년 저술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문학·예술 러시아 러시아 1828–1910 ○ 폐렴

『전쟁과 평화』의 작가이자 기독교 아나키즘으로 국가와 교회에 맞선 백작

“그런데 농민들은…… 농민들은 어떻게 죽지?” — 아스타포보 역에서 숨을 거두며, 1910년 11월 20일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급진적 도덕 사상가.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로 세계 리얼리즘 문학의 정점을 찍었고, 1870년대 말 영적 위기 끝에 기독교 아나키즘으로 전회하여 국가·교회·사유재산·조직적 폭력을 전면 거부했다. 『내 안의 하느님 나라』(1894)에 정리된 비폭력 저항 사상은 마하트마 간디와 이후 시민권 운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1901년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당했으며, 1910년 재산과 귀족적 삶을 버리고 비밀리에 가출했다가 아스타포보 간이역에서 폐렴으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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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4–1847카잔대학에서 동양어·법학 수학, 학위 없이 중퇴
  • 1852–1856『유년시절』로 데뷔, 크림전쟁 포병장교로 참전하여 『세바스토폴 이야기』 발표
  • 1862–1869소피야 안드레예브나와 결혼,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전쟁과 평화』 집필 완성
  • 1873–1878『안나 카레니나』 발표
  • 1879–1882영적 위기와 회심 — 『참회』 집필, 정교회 교리·국가·사유재산에 대한 근본적 비판 시작
  • 1884–1899『내 안의 하느님 나라』『부활』 등 발표, 기독교 아나키스트·평화주의자로 국제적 명성
  • 1901–1910정교회 파문, 간디와 서신 교환, 1910년 10월 야스나야 폴랴나를 떠나 아스타포보에서 사망

니콜라이 표도로비치 표도로프

Николай Фёдорович Фёдоров
학술·연구 러시아 러시아 1829–1903 ○ 병사

죽은 자의 부활을 과학의 공동 과업으로 제시한 러시아 코스미즘의 창시자

톨스토이가 "나는 이 도서관에서 책 몇십 권만 남기고 다 버리겠소"라고 하자, 표도로프는 "나는 바보를 많이 봤지만 이런 바보는 처음이오"라고 응수했다.

러시아 코스미즘 창시자. 과학으로 죽음을 극복하고 모든 선조를 부활시키자는 '공동 과업'을 주창했다. 치올콥스키를 가르쳤고, 도스토옙스키·톨스토이에게 '모스크바의 소크라테스'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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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9–1851오데사 리슐리외 리체움 수학 — 숙부 사망으로 중퇴
  • 1854–1868리페츠크·보롭스크·보고로츠크·우글리치 등지의 군(郡) 학교에서 역사·지리 교사
  • 1869–1874체르트코프 도서관 보조 사서 — 치올콥스키와 만나 지도
  • 1874–1899루먄체프 박물관 사서 — 최초의 체계적 도서 목록 편성, 일요일 토론 클럽 운영
  • 1880s–1890s톨스토이·도스토옙스키·솔로비요프와 교류하며 「공동 과업」 구상 전파
  • 1903모스크바 빈민 숙소에서 폐렴으로 사망, 제자들이 유고를 모아 『공동 과업의 철학』 출간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도브롤류보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Добролюбов
학술·연구 러시아 러시아 1836–1861 ○ 결핵

25세 요절로 러시아 혁명 세대 전체의 스승이 된 문학비평가

엥겔스는 1884년에 이렇게 썼다: '나는 체르니솁스키와 도브롤류보프라는 두 사회주의적 레싱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러시아 혁명적 민주주의 비평가. 체르니솁스키와 『소브레멘니크』에서 문학비평을 사회변혁의 도구로 만들었다. 엥겔스가 '사회주의적 레싱'이라 부른 그는 25세 요절 후에도 혁명 세대의 스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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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53페테르부르크 중앙교육학원 입학 — 지하 민주주의 서클 조직
  • 1854–1855부모 사망 후 급진적 반군주제·반농노제 시와 수기신문 『슬루히』 발행
  • 1856체르니솁스키·네크라소프와 만남 — 『상트페테르부르크 통보』에 첫 기사 게재
  • 1857–1861『소브레멘니크』 비평·서지부장 — 풍자란 「스비스토크」 주재
  • 1859「오블로모프주의란 무엇인가?」 — 곤차로프 소설을 사회비판의 도구로 전환
  • 1860「한 줄기 빛」·「진정한 날」 — 혁명적 민주주의 비평의 정점
  • 1860–1861결핵 치료차 유럽 체류 — 이탈리아 통일운동 취재, 귀국 후 사망

이반 로그기노비치 고레미킨

Иван Логгинович Горемыкин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39–1917 ✕ 살해

무위(無爲)로 전제를 지켰다 믿은 제국 최후의 수석대신

"폐하께서는 제 관 주위에 이미 촛불이 켜졌고, 의식을 완료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저 자신뿐임을 보지 못하십니다." — 1914년 재소환된 74세 총리가 자신의 노쇠함에 대해 남긴 말.

제정 러시아 최후의 제1급 추밀고문이자 두 차례 총리를 지낸 평생 관료. 1906년 제1두마를 해산시키고, 1914년 74세에 다시 소환되어 전시 내각을 이끌었으나 무능과 두마 적대, 라스푸틴 일파에 대한 굴종으로 체제 붕괴의 상징이 되었다. 반의회적 전제 고수를 '신이 기름 부은 자'에 대한 충성이라 여겼고, 이 완고함이 바로 입헌 실험을 좌초시킨 능동적 요인이었다. 혁명 후 소치의 별장에서 강도에게 가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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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0제국 법률학교 졸업, 원로원에서 변호사로 관직 시작
  • 1866–1869폴란드 입헌왕국 프워츠크·키엘체 부지사
  • 1891법무차관
  • 1895–1899내무장관 — 농민·젬스트보 문제에 보수적 접근, 1899년 축출
  • 1906.4–7각료회의 의장(총리) — 제1두마와의 대립 끝에 두마 해산, 스톨리핀에게 교체
  • 1914.1–1916.1각료회의 의장(총리) — 전시 내각, 두마·진보블록과 적대, 라스푸틴 측근으로 전락
  • 1916제1급 추밀고문(제국 최후의 수훈자), 해임
  • 1917.12소치 별장에서 강도에게 가족과 함께 살해됨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피사레프

Дмитрий Иванович Писарев
문학·예술 소속 미확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40–1868 ✕ 익사

부숴야 할 것은 부숴야 한다고 선언한 러시아 허무주의의 기수

「우리 진영의 최후통첩은 이것이다: 부술 수 있는 것은 부숴야 한다. 타격을 견디는 것은 살아남을 자격이 있고, 산산조각 나는 것은 쓰레기다. 어쨌든 좌우로 내리쳐라, 거기서 해는 나오지 않는다.」 — 『19세기 스콜라철학』(1861)

러시아 허무주의(nihilism)의 중심 이론가이자 1860년대 혁명적 민주주의 문학비평의 가장 날카로운 목소리. 체르니솁스키·도브롤류보프와 함께 60년대 급진 지식인을 대표했으며, 『러시아어』(Русское слово)의 주필로서 미학과 관념론 철학을 공격하고 자연과학에 기초한 '현실주의'를 주창했다. 1862년 반정부 선언문 필화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수감되어 4년 반 동안 주요 저작 대부분을 감옥에서 집필했고, 석방 2년 뒤 27세에 발트해에서 익사했다. '합리적 이기주의'와 '사고하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개념으로 나로드니키 세대를 예비했으며, 도스토옙스키의 라스콜니코프, 파블로프의 과학관, 레닌의 지적 형성에 결정적 흔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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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58–1861여성잡지 『라스베트』(Рассвет) 서평 기고
  • 1860–1862『러시아어』(Русское слово) 비평가·사실상의 주필
  • 1862–1866반정부 선언문 필화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옥중 집필
  • 1866–1868『델로』(Дело)·『조국의 수기』(Отечественные записки) 기고

아우구스트 베벨

August Bebel

40년간 독일 노동운동을 이끈 SPD 공동 창립자, '그림자 황제'

「파리에서의 투쟁은 작은 전초전에 불과하다. 유럽의 본안은 아직 앞에 있으며, 수십 년 안에 '궁전에 전쟁을, 오두막에 평화를'은 전 유럽의 구호가 될 것이다.」 — 제국의회, 1871년 5월 25일

목수 도제 출신으로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1869년 사회민주노동자당을 창립하고 1875년 고타 통합대회로 독일 사민당(SPD)을 세계 최대 사회주의 정당으로 키웠다. 반사회주의법(1878–1890) 아래 취리히에서 불법 기관지를 발행하며 당을 지하에서 이끌었고, 1891년 에르푸르트 강령 채택을 주도해 유럽 사민주의의 기준을 세웠으며,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논쟁에서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했다. 《여성과 사회주의》(1879)는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의 고전으로 50여 판을 거듭했고, 1913년 사망 시 장례식은 제2인터내셔널의 국제적 집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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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6–1867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작센인민당 공동 창립, 라이프치히 노동자교육협회에서 활동
  • 1867북독일연방 제국의회 의원으로 첫 당선 — 이후 1913년까지 의원직 유지
  • 1869리프크네히트와 아이제나흐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SDAP) 창립
  • 1870–1872보불전쟁 전쟁공채 반대, 파리코뮌 옹호 연설로 반역죄 유죄 — 2년 요새금고형
  • 1875고타 통합대회 주도 — 라살레파와 합당해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SAPD) 출범
  • 1878–1890사회주의자탄압법 아래 취리히에서 『사회민주주의자』 발행, 지하 조직 지휘
  • 1891에르푸르트 강령 채택 주도 — 유럽 사민주의의 마르크스주의적 기준 확립
  • 1899–1906수정주의 논쟁에서 베른슈타인에 맞서 정통 마르크스주의 방어, 정치적 총파업 논쟁 중재

니콜라이 콘스탄티노비치 미하일롭스키

Никола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Михайловский
학술·연구 러시아 러시아 1842–1904 ○ 자연사

나로드니키 지식인의 '사상의 지배자', 주관적 사회학과 영웅-군중론의 창시자

그는 '사실의 진리(правда-истина)'와 '정의의 진리(правда-справедливость)'를 구별하며 이렇게 썼다: '이론적 하늘의 진리가, 실천적 대지의 정의와 분리되는 것—나는 언제나 여기에 상처받았다.'

나로드니키 이론가이자 문예비평가. 사회학의 '주관적 방법'과 영웅-군중론을 정립하고, 자유롭게 선택된 이상이 역사를 바꾼다고 주장했다. 톨스토이·도스토옙스키 평론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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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52–56코스트로마 김나지움 수학
  • 1856–62페테르부르크 광산기술대학, 학생 소요로 퇴학
  • 1860잡지 《라스베트》에서 문필 활동 시작
  • 1868–84《오테체스트벤니예 자피스키》 필자, 네크라소프 사후 공동 편집인
  • 1879나로드나야 볼랴와 접촉, 기관지에 기고
  • 1882, 1891혁명적 연계로 페테르부르크에서 추방
  • 1892–1904《루스코예 보가츠트보》 공동 편집인 (코롤렌코와 함께)
  • 1890s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논쟁

폴 라파르그

Paul Lafargue
학술·연구 프랑스 쿠바 1842–1911 ✕ 자살

『게으를 권리』를 쓴 마르크스의 사위, 프랑스 최초의 사회주의 국회의원

「건강한 육체와 정신으로, 나는 무자비한 노년이 내게서 모든 즐거움을 하나씩 빼앗아 가기 전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 유서, 1911년 11월 25일

쿠바 출생의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쥘 게드와 프랑스 노동자당(POF)을 창당했으며, 경제결정론을 역사적 방법론으로 체계화했다. 말년에는 장 조레스의 개혁주의에 맞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수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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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4–1865파리에서 의학 공부, 프루동주의 무정부주의자로 제1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 가입
  • 1866–1868런던으로 이주, 마르크스 가문과 교류; 제1인터내셔널 총평의회 위원, 스페인 담당 서기
  • 1868카를 마르크스의 둘째 딸 라우라 마르크스와 결혼
  • 1871–1872파리코뮌 탄압 후 스페인 마드리드로 망명, 『라 에만시파시온』으로 마르크스주의 선전, 아나키스트와 투쟁
  • 1880쥘 게드와 프랑스 노동자당(POF) 공동 창당; 『게으를 권리』 초고를 『레갈리테』에 연재
  • 1882–1891파리로 귀환, POF 이론가로 활동; 파업·선거 투쟁 주도하며 수차례 투옥
  • 1891릴 선거구에서 프랑스 최초의 사회주의 하원의원 당선 — 수감 중 선거운동
  • 1890s–1905조레스의 개혁주의와 논쟁하며 정통 마르크스주의 수호; 『경제결정론』, 『소유의 기원』 등 주요 저작 출간
  • 1908–1911툴루즈 통일대회 참석 후 정계 은퇴; 회고록 『카를 마르크스에 대한 나의 추억』 집필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폿킨

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Кропоткин
학술·연구 소속 미확정 소련 러시아 1842–1921 ○ 병사

류리크 가문의 공작: 아나코공산주의 창시자이자 『상호부조』의 지리학자

1917년 케렌스키가 장관직을 제안하자 "구두닦이가 더 정직하고 유용한 직업"이라 답했다 — 에마 골드만 증언

류리크 공작 가문의 지리학자이자 아나코공산주의 창시자. 차르 감옥을 탈옥해 41년 유럽 망명 중 『빵의 쟁취』와 『상호부조』를 저술했다. 1917년 귀국 후 볼셰비키의 적색 테러를 공개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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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57–1862파제스키 군단 수석 졸업 — 황제의 시종(侍從) 카메르파주로 근무
  • 1862–1867동시베리아 코사크 장교 겸 지리탐사 대원 — 파톰·비팀 고원 발견, 러시아지리학회 금메달 수상
  • 1867–1874페테르부르크 대학 수학, 러시아지리학회 물리지리부 서기 — 빙하기 이론, 프란츠요제프 란드 예측
  • 1872–1874유라 연맹 가입, 아나키스트 전향 — 차이콥스키 서클 노동자 선전, 「인민 속으로」 운동 주도
  • 1874–1876체포 —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서 빙하기 연구, 니콜라옙스크 군병원 탈옥
  • 1876–1917서유럽 망명 — 『르 레볼테』 창간, 리옹 공정으로 3년 수감, 『빵의 쟁취』·『상호부조』·『한 혁명가의 회상』 집필
  • 1917–1921러시아 귀국 — 케렌스키 입각 거부, 볼셰비키 적색 테러 비판, 드미트로프에서 『윤리학』 집필 중 폐렴 사망

표트르 니키티치 트카초프

Пётр Никитич Ткачёв
학술·연구 러시아 러시아 1844–1886 ○ 병사

혁명적 전위당 독재를 최초로 체계화한 러시아 자코뱅파 나로드니키 이론가

레닌의 비서 본치-브루예비치의 회고에 따르면, 레닌은 바쿠닌·라브로프·트카초프를 거론하며 "그들 중 우리 볼셰비키에게 가장 잘 맞은 것은 바로 트카초프였다"고 말했다.

러시아 자코뱅파 나로드니키 이론가. 바쿠닌·라브로프와 결별하고 비밀결사의 권력 장악과 혁명적 소수독재를 주창했다. 제네바에서 『나바트』를 발행했고, 전위당 개념은 레닌의 당 조직론에 결정적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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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1–1862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부 입학, 학생 소요 참여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 1862–1869『루스코예 슬로보』 · 『델로』 기고 — 급진 문학 비평, 경제 통계, 마르크스 소개
  • 1868–1869네차예프와 함께 페테르부르크 학생 소요의 급진 소수파 지도
  • 1869–1873체포·재판 — 1년 4개월형 후 시브초보 유형, 1873년 12월 해외 탈출
  • 1875–1881제네바에서 기관지 『나바트』(Набат) 발행 — 러시아 블랑키즘의 강령 완성
  • 1877K. M. 투르스키와 「인민해방협회」 창설 (러시아 내 활동은 미미)
  • 1882–1886정신 질환 발병 — 파리 정신병원 입원, 41세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