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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라코시 마차시

Rákosi Mátyás

헝가리 스탈린화의 설계자, '살라미 전술'로 일당독재를 구축

1940년 10월 30일 석방되어 11월 6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라코시는 다음 날 붉은광장 열병식에서 레닌 묘단 위 스탈린 곁에 섰다.

헝가리 공산당 서기장(1945–1948)과 노동자당(MDP) 서기장·제1서기(1948–1956)로 1948년부터 1956년까지 헝가리를 지배했다. 1925년 체포되어 1926년 8.5년형과 1935년 종신형을 받고 15년 넘게 복역한 뒤 1940년 11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1945년 귀국 뒤 '살라미 전술'로 민주 정당들을 해체하고 사회민주당을 강제 합병해 일당 지배를 세웠으며, 대량 투옥과 강제노동수용소, 라이크 재판의 책임을 졌다. 1953년 총리직을 너지 임레에게 넘긴 뒤에도 개혁을 방해하다 1956년 7월 18일 해임되었고, 1962년 제명 뒤 크라스노다르·토크마크·아르자마스를 거쳐 1971년 2월 5일 고리키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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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통상 인민위원, 적위대·적군 지휘
  • 1921–1924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
  • 1925–1940호르티 정권 아래 투옥 (8.5년형 이후 종신형, 1940년 석방)
  • 1940–1945모스크바에서 헝가리 공산당 해외국 지도
  • 1945–1948헝가리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 1948–1956헝가리 노동자당(MDP) 중앙위원회 제1서기 (1953년까지 서기장)
  • 1952–1953헝가리 인민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56–1971소련 강제 망명 (키르기스스탄, 아르자마스, 고리키)

키스 로드니 파크

Keith Rodney Park
군사·지휘 영국 국가기관 영국 뉴질랜드계 1892–1975 ○ 자연사

영국 본토 항공전의 방공 지휘관

레이더와 보고 체계가 알려 준 표적에 맞춰 11그룹 전투기를 즉시 출격시켜 남동부 방어를 유지했다.

뉴질랜드 출신의 영국 공군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의 포병과 전투기 조종 경험을 방공 지휘로 발전시킨 인물이다. 1940년 11그룹을 지휘하며 런던과 잉글랜드 남동부의 전투기 방어를 운용했고, 레이더·보고 체계와 신속한 소규모 출격을 결합해 독일 공군의 공세에 대응했다. 그의 판단은 비행장 피해와 조종사 소모가 누적되는 조건에서 전투기 전력을 보존하면서도 남부 방공망을 유지해야 한다는 긴장 속에서 이루어졌다. 전후에는 몰타와 극동에서도 공중작전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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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6뉴질랜드 원정군 포병 장교로 갈리폴리와 서부전선에 복무
  • 1916–1918왕립비행군단과 왕립공군에서 전투기 조종사, 48비행대대 지휘
  • 1938–1940전투기지휘부 선임 항공참모장교
  • 1940.04–1940.11제11그룹 항공장교 지휘관, 영국 본토 항공전의 남동부 방공 운용
  • 1940–1941훈련지휘부에서 전투기 조종사와 부대 훈련 담당
  • 1941–1942이집트 항공장교 지휘관
  • 1942–1945몰타 방공과 지중해·중동 및 인도 공중작전 지휘
  • 1946영국 공군 퇴역, 공군 원수 계급

프란시스코 프랑코

Francisco Franco

군부 반란을 승리로 이끌고 36년간 스페인을 지배한 총통

1939년 4월 1일의 마지막 전황 보고, 그가 직접 서명했다. 「오늘, 붉은 군대가 포로가 되고 무장이 해제됨으로써 국민군은 최후의 군사 목표에 도달했다. 전쟁은 끝났다.」 그리고 36년의 독재가 시작됐다.

모로코 식민지 전쟁에서 경력을 쌓아 서른셋에 유럽 최연소 장군이 된 직업군인. 1934년 아프리카군을 동원해 아스투리아스 광부 봉기를 진압하면서 우파에게 「질서의 회복자」로 각인됐고, 1936년 7월 군부 반란에 합류해 카나리아 제도에서 모로코로 날아가 독일·이탈리아 수송기의 힘을 빌려 아프리카군을 본토로 실어 날랐다. 그해 10월 반란 진영의 총사령관 겸 국가수반이 되었고, 1937년 통합령으로 팔랑헤와 카를로스파를 하나의 「국민운동」으로 묶어 개인 지배를 굳혔다. 1939년 승리 뒤에는 정치책임법을 앞세운 대규모 처형과 투옥이 이어져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2차대전에서는 비교전을 표방하면서 동부전선에 청색사단을 보냈고, 1953년 미국과의 마드리드 협정과 정교협약으로 전후의 고립에서 벗어났다. 1959년 안정화 계획 이후의 고도성장은 체제를 지탱한 또 하나의 기둥이었으며, 1969년 후안 카를로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뒤 1975년 사망과 함께 체제도 해체 과정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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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갈리시아 페롤의 해군 집안에서 출생
  • 1907–1910톨레도 보병사관학교 수학
  • 1912–1926모로코 식민지 전쟁 참전, 스페인 외인부대 부사령관을 거쳐 서른셋에 준장
  • 1928–1931사라고사 육군사관학교 교장, 제2공화국 수립과 함께 해임
  • 1934.10아프리카군을 동원해 아스투리아스 광부 봉기를 진압
  • 1935–1936참모총장에 올랐다가 인민전선 정부에서 카나리아 제도로 좌천
  • 1936.07.18–19군부 반란에 합류, 전세기 드래건래피드로 모로코로 이동해 아프리카군 공수를 조직
  • 1936.10.01부르고스에서 반란 진영의 총사령관 겸 국가수반으로 선포됨
  • 1937.04.19통합령으로 팔랑헤와 카를로스파를 단일 「국민운동」으로 통합
  • 1939.04.01전쟁 종료 선포, 정치책임법에 따른 대규모 처형·투옥 개시
  • 1940–1943앙다예에서 히틀러와 회담하고 비교전을 표방하면서 동부전선에 청색사단 파병
  • 1953–1955미국과 마드리드 협정, 교황청과 정교협약 체결; 1955년 유엔 가입으로 고립 탈출
  • 1959안정화 계획으로 자립경제 노선을 접고 고도성장기에 진입
  • 1969–1973후안 카를로스를 후계자로 지명, 1973년 총리 카레로 블랑코가 ETA에 암살됨
  • 1975.11.20마드리드에서 사망, 전몰자의 계곡에 안장됐다가 2019년 이장

하일레 셀라시에 1세

ቀዳማዊ ኃይለ ሥላሴ
정부·행정 에티오피아 국가기관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 1892–1975 ✕ 폐위 후 데르그에 피살

근대화와 반파시즘의 상징이었지만 토지의 질서는 건드리지 않은 마지막 황제

그는 1936년 국제연맹 연단에서 '신과 역사는 여러분의 심판을 기억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솔로몬 왕조의 후예인 하일레 셀라시에 1세는 에티오피아를 근대화하고 국제연맹 연설로 반파시즘의 상징이 된 20세기의 군주였다. 섭정 시절부터 개혁을 이끌어 1931년 헌법과 노예제 폐지를 단행했고, 이탈리아로부터의 망명을 거쳐 1941년 영국군과 함께 귀환해 제정을 회복했다. 그러나 북부의 리스트·구울트 토지와 남부의 토지수여제를 그대로 둔 채 귀족·교회와 타협한 근대화는 농민의 소작 굴레를 풀지 못했고, 1972년 웰로 기근으로 민심이 이탈했다. 1974년 9월 데르그에 폐위된 그는 이듬해 3월 자신의 토지제도를 폐지한 국유화가 내려진 직후인 8월, 군부의 명령으로 목졸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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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섭정 겸 황태자, 사실상의 실권자
  • 1917레울-라스(공작) 서임
  • 1928네구스(왕) 즉위
  • 1930황제(만민의 왕) 대관
  • 1936–1941이탈리아 점령기에 영국으로 망명
  • 1941귀환, 제정 복원
  • 1963아프리카통일기구(OAU) 창설 주재, 초대 의장
  • 19749월 데르그에 폐위

콘스탄틴 알렉산드로비치 페딘

Константи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Федин
이념·선전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2–1977 ○ 자연사

세라피온 형제단에서 출발해 18년간 소비에트 문학의 최고 문지기가 된 소설가

20년간 친구이자 이웃이었던 페딘이 처음으로 친구가 아니라 '관리'로서 찾아왔을 때, 파스테르나크는 충격을 받았다 — 그날 페딘은 그에게 노벨상 거부를 요구하러 왔던 것이다.

『도시와 해』(1924), 『형제들』(1928)로 혁명기 지식인의 운명을 형식적 실험과 함께 그려낸 초기 소비에트 문학의 대표적 소설가였다. 1940년대에는 스탈린상 수상작인 3부작 『첫 기쁨』·『이상한 여름』·『모닥불』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전을 구축했다. 1959년 작가동맹 제1서기가 된 이후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기를 관통하며 파스테르나크의 노벨상 거부 설득, 솔제니친의 『암병동』 출판 저지 등 당의 문학 정책을 집행하는 최고 행정가로 군림했다. 젊은 날 '세라피온 형제단'에서 예술의 자유를 주창했던 작가가 소비에트 문학 제도의 수문장이 된 궤적은 해빙기 문화 정치의 모순을 응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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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노비 사티리콘』에 첫 풍자 소품 발표
  • 1914–1918독일에서 민간인 억류자로 1차대전 기간 체류
  • 1919–1921적군 복무, 입당 후 전업 작가를 위해 탈당
  • 1924『도시와 해』 발표 — 초기 소비에트 문학의 기념비적 장편
  • 1934소비에트 작가동맹 이사로 선출
  • 1949『첫 기쁨』과 『이상한 여름』으로 스탈린상 1등급 수상
  • 1959–1971소비에트 작가동맹 제1서기
  • 1971–1977소비에트 작가동맹 이사회 의장

이반 블라디미로비치 튤레네프

Иван Владимирович Тюлене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2–1978 ○ 자연사

캅카스의 문을 걸어잠근 기병 장군, 세 전쟁의 증인

1942년 여름, 독일 산악병들이 엘브루스 산에 나치 깃발을 꽂았다. 튤레네프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미리 구축해 둔 테레크-그로즈니 방어선은 버텼고, 독일군은 석유에 닿지 못했다.

심비르스크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차대전에서 4개 등급의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모두 받은 완전 기사가 되었다. 내전에서는 부됸니의 제1기병군에서 정보과장과 기병여단장으로 싸웠고, 1940년 주코프·메레츠코프와 함께 소련 최초의 세 육군대장 중 한 명으로 진급했다. 1941년 남부전선을 지휘했으나 참패 속에 중상을 입었고, 1942년 2월 자캅카스 전선군 사령관에 부임하여 테레크 강과 그로즈니 방어선을 구축했다. 1942~43년 비터를 위한 캅카스 전투에서 독일군의 바쿠 유전 돌파를 저지한 것이 그의 가장 결정적인 군사적 공헌이었다. 전후에는 군관구 사령관과 기병 감찰감을 지냈고, 회고록 『세 전쟁을 넘어』를 남겼으며 1978년 사망 직전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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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4등급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 완전 기사
  • 1917치스토폴 사관학교 졸업, 10월 혁명 후 적위대 합류
  • 1919–1920제1기병군 정보과장, 기병여단장으로 내전 참전
  • 1938–1940자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1940년 육군대장 진급
  • 1941.06–08남부전선 사령관 — 몰도바·우만 후퇴, 드네프르에서 중상
  • 1942–1945자캅카스 전선군 사령관 — 캅카스 방어전 지휘
  • 1947–1958육군 기병 감찰감, 군관구 사령관, 전투훈련총국 근무
  • 1958–1978국방성 감찰총감 그룹. 1978년 소비에트연방영웅 수여

에드워드 맬러리 알몬드

Edward Mallory Almond
군사·지휘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92–1979 ○ 자연사

공세적 지휘와 인종주의가 얽힌 미군 장성

“중국인 세탁부대 따위가 우리를 막게 두지 마라.”

에드워드 알몬드는 두 차례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친 미국 육군 장성으로, 공격적 지휘관이라는 명성과 인종주의적 편견이 함께 남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흑인 병사들로 구성된 제92보병사단을 지휘했으며, 사단의 전투 성과를 병사들의 인종적 능력 탓으로 돌려 군의 흑인 전투부대 운용에 반대했다. 한국전쟁에서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참모총장으로서 인천상륙 뒤 창설된 X군단을 지휘했고, 인천과 서울 탈환에 기여했다. 그러나 동북부 진격에서 병력을 넓게 분산하고 중국군의 규모를 과소평가해 X군단의 위기를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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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버지니아 군사학교 졸업
  • 1918제4사단 제12기관총대대 지휘, 프랑스 전선 참전
  • 1942–1945제92보병사단 사단장, 이탈리아 전선 지휘
  • 1946–1949도쿄 극동사령부 인사참모, 이어 맥아더의 참모총장
  • 1950–1951X군단 사령관, 인천상륙과 동북부 작전 지휘
  • 1951–1953육군전쟁대학 교장, 1953년 퇴역

요시프 브로즈 티토

Josip Broz Tito

비동맹을 선택한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 지도자

1948년 코민포름 결별로 티토의 유고슬라비아는 소련 진영에서 축출되었으나, 이는 소련의 지도력에 도전한 사회주의 국가가 독자 노선을 걸을 수 있음을 보여 주었고, 그 충돌은 이데올로기 분쟁인 동시에 발칸을 둘러싼 지정학적 투쟁이기도 했다.

크로아티아계 아버지 프라뇨 브로즈와 슬로베니아계 어머니 마리야 사이에서 쿠므로베츠에서 태어났고, 스스로는 아버지와 이웃들처럼 크로아티아인으로 정체화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병사로 복무하다 부상당해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었고, 1920년 옴스크에서 공산당에 입당한 뒤 1939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다. 1941년 파르티잔 총사령관이 되어 제2차 세계대전 내내 민족해방투쟁을 지도했고, 전후에는 1980년 사망할 때까지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이끌었다. 1948년 코민포름 결별 이후 스탈린주의자로 지목된 수만 명이 골리 오토크 같은 강제노동수용소에 수용되어 수백 명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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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과 민족해방투쟁 지도
  • 1945–1980유고슬라비아 연방 지도자
  • 1948스탈린·코민포름과 결별

E. H. 카

E. H. Carr
학술·연구 영국 영국 1892–1982 ○ 자연사

14권 『소비에트 러시아사』의 저자, 네프의 "시장과 계획의 잠재적 양립불가능성"을 진단한 역사가

'신경제정책의 원리와 계획의 원리 사이에는 잠재적 양립불가능성이 있었다.' 『계획경제의 기초』(1969)에서.

영국 외교관 출신 역사가로, 14권의 『소비에트 러시아사』(1950–1978)를 집필해 초기 소비에트 권력의 정치·경제·사회를 총체적으로 기록했다. 국제정치학에서는 『20년의 위기』(1939)로 현실주의의 기초를 놓았고, 『역사란 무엇인가』(1961)에서 역사 서술을 사실 축적이 아닌 해석의 과정으로 재정의했다. 네프에 관해 '신경제정책의 원리와 계획의 원리 사이에는 잠재적 양립불가능성이 있었다'고 진단했으며, 이는 네프의 생존 가능성을 둘러싼 4대 역사학적 입장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말년까지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로 소비에트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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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36영국 외무부 외교관, 파리 강화회의(1919) 및 리가 대사관(1925~1929) 근무
  • 1936–1947애버리스트위스 우드로 윌슨 국제정치학 교수
  • 1941–1946『타임스』 부편집장
  • 1950–197814권 『소비에트 러시아사』 간행
  • 1953–1955옥스퍼드 베일리얼 칼리지 정치학 펠로
  • 1955–1982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 펠로

아서 해리스

Arthur Travers Harris
군사·지휘 영국 국가기관 영국 영국계 1892–1984 ○ 자연사

전략폭격을 총력전의 중심에 둔 공군 지휘관

쾰른에 대한 1,000기 폭격 직후 뉴스릴 연설에서 그는 '그들은 바람을 뿌렸으니, 이제 회오리바람을 거두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아서 해리스는 제2차 세계대전기 영국 공군 폭격기 사령부를 이끈 공군 지휘관으로, 독일 도시를 겨냥한 지역 폭격을 전쟁 수행의 핵심 수단으로 밀어붙였다. 그는 대규모 폭격의 작전적 효율성을 높였지만 민간인 사망과 도시 파괴를 낳은 전략의 책임도 함께 짊어졌다. 노르망디 상륙을 앞두고는 독일 산업에 대한 압박을 약화시킨다며 수송계획으로의 전환에 반대했으나, 1944년 3월 프랑스 철도 중심지에 대한 초기 공격을 명령해 계획을 실행했다. 이 긴장은 전략폭격의 독자성을 지키려는 공군 지휘와 지상군 지원이라는 연합군의 공동 목표가 충돌한 사례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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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8왕립비행군단 조종사 및 편대 지휘관
  • 1918–1920왕립공군 창설과 함께 RAF 복무
  • 1925–1927제58비행대대 지휘관
  • 1937–1939제4폭격단 및 중동 RAF 부대 지휘
  • 1939–1941제5폭격단 사령관, 공군참모차장
  • 1942–1945RAF 폭격기 사령부 총사령관
  • 1953남로디지아 출신 인사로 남작 작위 수여

류보청

刘伯承
군사·지휘 중국 중국 1892–1986 ○ 자연사

「외눈의 용」, 덩샤오핑과 짝을 이룬 홍군 총참모장이자 회하이 전역의 지휘관

1916년 펑두 전투에서 오른눈을 잃고 「외눈의 용」이라 불렸으며, 인민해방군 창건자의 한 사람이자 1948년 11월 회하이 전역을 지휘한 전략가였다.

쓰촨의 군인으로 1916년 전투에서 오른눈을 잃었고 1926년 입당해 난창 봉기에 참여했다. 소련 프룬제 군사아카데미에서 배운 뒤 홍군 총참모장으로 대장정을 이끌었고, 항일전쟁기 129사단장으로 정치위원 덩샤오핑과 「류덩」 부대를 이루었다. 국공내전에서 1947년 다볘산 진격과 1948~1949년 회하이 전역을 지휘해 승리의 결정적 국면을 만들었다. 건국 후 원수가 되어 난징 군사학원을 세웠으며 1958년 「교조주의」 비판을 받고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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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7홍군 총참모장
  • 1937–1945팔로군 129사단장
  • 1955중화인민공화국 원수

노사카 산조

野坂参三
정치·당 지도 일본 공산당 일본 일본 1892–1993 ○ 자연사

일본공산당을 세 번이나 창설한 국제적 공산주의자

1946년 1월 도쿄 당사에 도착한 노사카를 맞으려 기모노와 양장 차림의 젊은 여성들이 마치 스타를 기다리는 팬처럼 모여들었다고 한 신문이 전했다.

일본공산당 창립(1922년)에 참여하고 영국공산당 창립대회(1920년)에도 런던 대표로 출석한 국제 공산주의자로, 코민테른 집행위원으로 미국·중국에서 대일 첩보망을 운영했다. 1940~1945년 옌안에서 일본인민해방연맹을 이끌며 일본군 포로를 공산군 전향 병력으로 재편했고, 전후 일본공산당을 '사랑받는 당'으로 포장해 평화적 혁명 노선으로 35석의 의석을 얻어냈다. 1958년부터 24년간 당 의장을 지내며 안보투쟁과 중·소 분열 속 당의 독자 노선을 유지했으나, 1992년 스탈린 시대 동료 밀고 사실이 폭로되어 자신이 창립한 당에서 제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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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유아이카이(우애회) 입회, 기관지 『노동 및 산업』 편집
  • 1920영국공산당(CPGB) 창립 참여, 런던 대표
  • 1922일본공산당(JCP) 창립 참여, 『무산자신문』 편집
  • 1931–1940코민테른 집행위원, 소련·미국·중국에서 대일 정보활동
  • 1940–1945옌안에서 일본인민해방연맹 지도, 일본군 포로 전향사업 총괄
  • 1946–1950중의원 의원 당선, JCP 중앙위원
  • 1955–1958일본공산당 제1서기
  • 1958–1982일본공산당 중앙위원회 의장

티모페이 이바노비치 키르피치니코프

Тимофей Иванович Кирпичников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인 1892–1917/1918 ✕ 처형

제정군의 명령을 거부한 병사 지도자

“노동자들에게 발포하겠는가? 나는 가지 않겠다.”

티모페이 키르피치니코프는 제정 러시아군의 하급지휘자였지만, 전선의 경험과 병사들 사이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명령의 정당성을 스스로 판단했다. 1917년 2월 26일 시위 진압 뒤 부하들에게 노동자에게 발포하지 말자고 설득하고, 다음 날 볼린스키 연대의 봉기를 이끌어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의 연쇄적인 가담을 촉발했다. 그는 임시정부에게 혁명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받았으나, 10월 이후에는 볼셰비키에 맞섰고 백군 내부의 처형으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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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6제1차 세계대전 참전, 오스트리아 전선에서 복무하고 부상
  • 1916–1917페트로그라드 주둔 예비부대, 볼린스키 연대 훈련대 선임 하사관
  • 1917.02.27볼린스키 연대 훈련대의 명령 불복종과 페트로그라드 수비대 봉기 주도
  • 1917.04임시정부에 의해 혁명의 영웅으로 선전되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 선출
  • 1917.04–05임시정부 지지 병사 시위 조직, подпрапорщик 및 прапорщик으로 승진
  • 1917.10–1918볼셰비키에 맞서 남부로 이동, 백군 진영에서 처형됨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스코블린

Николай Владимирович Скоблин
보안·정보·치안 소속 미확정 러시아 러시아인 1893–1937/1938? ✕ 실종, 사망 경위 불명

백군 장군이 된 비밀 협력자

1937년 밀러를 만나게 한 뒤, 스코블린은 파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니콜라이 스코블린은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에서 싸운 백군 장교로, 코르닐로프 타격사단을 이끈 젊은 소장으로 명성을 얻었다. 망명 뒤 그는 러시아 전군사연합의 핵심 인물이 되었지만, 소련 정보기관의 협력자로 포섭되어 백계 러시아인 망명 공동체 내부에서 활동했다. 그는 투하쳅스키 사건을 둘러싼 독일 측 문서와 정보가 스탈린의 숙청을 촉발했는지, 아니면 스탈린의 주도 아래 조작·활용되었는지를 둘러싼 논쟁의 중심에 있다. 1937년 예브게니 밀러 납치에 관여한 뒤 사라졌으며, 그의 최후는 확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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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군 장교
  • 1917–1918코르닐로프 타격부대 대대장
  • 1918–1920코르닐로프 타격연대·사단 지휘관, 백군 소장
  • 1920–1929갈리폴리·불가리아 망명, 코르닐로프 연대 지휘
  • 1929–1937파리 러시아 전군사연합 코르닐로프 연대장
  • 1935–1937ROVS 내부선 방첩 책임자
  • 1937밀러 납치 작전 협력 뒤 실종
군사·지휘 몽골 국가기관 몽골 몽골 1893–1923 독살설 · 병사설, 미확정

1921년 몽골 인민혁명의 군사 지도자, 사후에 '혁명의 아버지'로 정전화됐다

1921년 2월 인민유격대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3월 캬흐타를 점령하고 7월 6일 후레에 입성했으며, 7월 11일 새 정부에서 군사부 장관이 됐다. 이 임명을 1922년 7월로 적는 몽골어권 기록도 있다.

몽골의 혁명가이자 몽골인민당 창립 성원이며, 1921년 혁명에서 인민유격대를 이끌어 후레(오늘날 울란바타르)에 입성했다. 가난한 아랫(평민) 출신으로 활자공과 역참 마부로 일했고, 1919년 후레의 반중국 지하조직에 참여했다. 1920년 소련 방문에 나섰고 1921년 캬흐타에서 총사령관으로 확정됐으며, 같은 해 7월 군사부 장관이 됐고 11월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만났다. 사인은 확정되지 않았고, 사후 신격화 경위도 주요 논쟁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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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0후레의 지하 반중국 조직에 참여
  • 1920–1921몽골인민당 대원으로 소련 방문
  • 1921인민유격대 총사령관, 캬흐타 점령과 후레 입성
  • 1921–1923군사부 장관 겸 총사령관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마야콥스키

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Маяковский
문학·예술 소련 그루지야 1893–1930 ✕ 자살

혁명의 확성기이자 풍자자

1930년 1월 21일, 레닌 추도식이 열린 볼쇼이 극장에서 마야콥스키는 장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의 3부를 낭독했다. 정부 관람석에 앉은 스탈린은 시인을 향해 뜨겁게 박수를 보냈다. 석 달 뒤 마야콥스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러시아 미래주의의 가장 큰 목소리였던 그는 혁명 뒤 ROSTA 포스터와 장시로 새 체제의 언어를 빚었다. 관료주의를 겨눈 후기 풍자는 문단과 국가의 냉대를 받았고 1930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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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5러시아 미래주의 운동과 『바지를 입은 구름』
  • 1917–1921혁명시와 ROSTA 창문 선전포스터 제작
  • 1923LEF 창간과 전위예술 활동
  • 1924장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발표
  • 1925–1926멕시코·쿠바·미국 여행과 미국시 연작
  • 1929–1930희곡 『빈대』·『목욕탕』과 자살

아구스틴 파라분도 마르티

Agustín Farabundo Martí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엘살바도르 엘살바도르 1893–1932 ✕ 처형

중미 공산주의의 아버지, 산디노의 대령, 라 마탄사의 순교자

미군기가 산디노 진영을 폭격하는 가운데, 마르티는 타자기를 밀치며 말했다. "역사가 펜으로 쓰이지 못할 때는 총으로 쓰여야 한다." 그리고 소총을 들고 미군기를 향해 사격했다.

엘살바도르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가로, 중미 공산주의 운동의 선구자이다. 1930년 엘살바도르 공산당(PCS)을 공동 창건하고 1932년 대공황으로 몰락한 농민·원주민의 무장봉기를 이끌었으나 마르티네스 군부의 라 마탄사 학살로 진압·총살당했으며, 사후 그 이름은 FMLN에 계승되어 중미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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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멜렌데스 독재 반대 학생시위 주도, 체포 후 과테말라로 망명
  • 1925중미공산당 공동 창립 (과테말라시티)
  • 1925–1928국제적색원조(SRI) 엘살바도르 대표, 지역노동연합(FRTS) 조직
  • 1928–1929산디노의 비서 겸 EDSN 대령, 니카라과 주둔 미군에 맞서 게릴라전
  • 1930엘살바도르 공산당(PCS) 공동 창립
  • 1931–1932PCS 임시 총비서; 마르티네스 쿠데타 후 농민·원주민 무장봉기 지도

미콜라 흐리호로비치 흐빌로비

Микола Григорович Хвильовий
문학·예술 소련 우크라이나 1893–1933 ✕ 자살

근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산문의 창시자

1933년 5월 13일, 동료 작가들을 자택으로 불러 모은 뒤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에 이렇게 썼다: '얄로비의 체포는 한 세대 전체의 처형이다... 나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공산주의 만세, 공산당 만세.'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산문의 기초를 놓은 작가. 바플리테를 이끌며 '모스크바로부터 멀리!'를 외치며 문학의 자율성을 주장했고, 스탈린의 개입으로 '흐빌로비즘' 탄압을 받았다. 대표작 「나」, 『멧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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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9볼셰비키 지하운동 참여, 적군 합류
  • 1919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21하르키우로 이주, 문학 활동 시작
  • 1922–1923『푸른 에튀드』, 「나(로맨티시즘)」 발표
  • 1925–1928바플리테(VAPLITE) 주도, 『체르보니 실랴흐』 편집
  • 1926팸플릿 선언으로 '흐빌로비즘' 공세 촉발
  • 1927『멧도요』(발트슈네피) 출간
  • 1930프롤리트프론트 조직, 곧 해체

네스토르 아폴로노비치 라코바

Нестор Аполлонович Лакоба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그루지야 1893–1936 ✕ 독살

스탈린의 절친에서 베리야의 첫 희생자로: 압하지야의 붉은 군주

스탈린이 라코바에게 했다는 말 — '나는 코바, 너는 라코바.' 1936년 12월 27일 밤, 베리야의 저택에서 저녁 식사 후 극심한 구토와 함께 의식을 잃었다. 운전기사는 그가 마지막으로 '베리야가 나를 죽였다'고 속삭였다고 증언한다.

압하지야 볼셰비키 지도자로, 1922년부터 1936년까지 압하지야를 통치하며 농업과 흑해 휴양지 개발을 추진했다. 스탈린의 절친이었으나 베리야에게 독살되었고,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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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티플리스 신학교에서 혁명 선동으로 제적, 바투미에서 RSDLP(b) 입당
  • 1917–18압하지야 농민 무장대 '키아라즈' 조직, 수후미 군사혁명위 부의장
  • 1920–21바투미 지하 볼셰비키 조직 지도, RSFSR-터키 모스크바 조약 협상 참여
  • 1922–30압하지야 SSR 인민위원평의회 의장
  • 1930–36압하지야 ASSR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보리스 미하일로비치 게센

Борис Михайлович Гессе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3–1936 ✕ 처형

뉴턴 역학의 사회경제적 뿌리를 밝힌 마르크스주의 과학사학자, MSU 물리학부 초대 학장

1931년 런던, 게센은 연단에서 포프의 시를 인용했다. '신이 말하길 뉴턴이 있으라 하시니 모든 것이 빛이 되었다.' 이어 그는 《프린키피아》가 신의 계시가 아니라 17세기 상업·산업·전쟁의 기술적 요구가 낳은 산물이라고 선언했고, 강당은 술렁였다.

소비에트 물리학자·과학사학자. 1931년 런던에서 뉴턴 역학이 17세기 기술·경제적 요구의 산물임을 논증, 과학사회학 외재주의 전통을 열었다. MSU 물리학부 초대 학장으로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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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7에든버러대·페트로그라드대에서 물리학 수학, 폴리테크닉에서 경제학 병행
  • 1919–1921적군 복무, 혁명군사평의회 정치총국 근무
  • 1921–1924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교원
  • 1924–1928붉은 교수직 연구소 수학, 졸업 후 강의
  • 1928《상대성이론의 기본 이념》 출간
  • 1931런던 국제과학사회의에서 「뉴턴 역학의 사회경제적 뿌리」 발표
  • 1931–1934MSU 물리학 교수, 물리학부 초대 학장, NIIF 소장
  • 1933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 1935–1936FIAN 부소장, 《우스페히 피지체스키흐 나우크》·대소비에트백과사전 편집위원

멘델 마르코비치 하타예비치

Мендель Маркович Хатаевич

곡물 징발이 씨 뿌릴 사람마저 없앨 것이라고 몰로토프에게 경고한 당 서기, 4년 뒤 총살되다

"곧 씨 뿌리고 수확할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1932년 11월, 하타예비치가 몰로토프에게. 당일 답신: "진정한 볼셰비키는 국가의 필요를 먼저 놓아야 합니다."

멘델 하타예비치는 1893년 고멜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치과기공사로 일하다 191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32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로서 11월 몰로토프에게 "콜호스의 최소한의 필요를 고려하지 않으면 곧 씨 뿌리고 수확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서한으로 경고했으나, 몰로토프는 "진정한 볼셰비키는 국가의 필요를 먼저 놓아야 한다"고 답했다. 1933년부터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주당 제1서기로 좌천된 뒤에는 오히려 대기근의 집행자가 되어 기아와 식인 보도를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1937년 대숙청 와중 체포되어 반혁명 테러조직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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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7고멜에서 지하 볼셰비키 활동, 여러 차례 체포, 예니세이현 유형, 1917년 3월 사면
  • 1917–1921고멜·사마라 당 간부; 체코군에 포로로 잡혀 고문으로 오른손 마비; 서부전선 제21소총사단 정치위원
  • 1921–1925고멜현당 책임비서(1921–23), 오데사현당 책임비서(1923–24),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조직배치부 부장(1924–25)
  • 1925–1928타타르 주당 책임비서
  • 1928–1932중부볼가 변경당 제1서기: 대규모 집단화 추진, 쿨라크 대량 체포·추방 지휘
  • 1932.10–1933.01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 곡물 몰수 지령 공동 서명; 11월 몰로토프에 기근 경고 서한
  • 1933–1937.03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주당 제1서기; 기아와 식인 사례를 스탈린에게 보고하고도 1934년 당대회에서 집단화의 승리를 찬양
  • 1937.03–10재차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 9월 체포, 10월 27일 사형선고, 10월 30일 총살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투하쳅스키

Михаил Николаевич Тухачевский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3–1937 ✕ 처형

「붉은 나폴레옹」: 자신이 만든 군대의 손에 죽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데 필요한 것은 오직 용기와 자신감뿐이다. 나는 서른에 장군이 되거나, 그때까지 살아 있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1914년 근위 소위 시절의 서약.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투하쳅스키는 1893년 2월 4일(16일) 스몰렌스크현 알렉산드롭스코예에서 몰락한 귀족 아버지와 농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근위 제1사단 소속으로 부상당하고 다섯 차례 훈장을 받았으나 1915년 2월 포로가 되었고, 탈출 끝에 1917년 귀국해 1918년 3월 적군에 들어갔다. 내전에서 제1군과 콜차크에 맞선 제5군을 지휘했고, 1921년에는 크론시타트 반란과 탐보프 농민 봉기 진압을 지휘하며 포병·항공기와 함께 화학무기 사용을 명령했다. 1925~1928년 참모총장과 1935년 최초의 소련원수 다섯 명 중 한 사람을 지냈으나, 1937년 6월 11일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그날 밤 총살되어 1957년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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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2025세에 제1군 사령관, 폴란드 전쟁 서부전선 사령관
  • 1921크론시타트·탐보프 진압 지휘
  • 1925–28참모총장
  • 1931–37군 현대화: 기계화군단, 공수부대, 종심작전 교리
  • 1935초대 원수 5인 중 하나
  • 1937/1957비밀 재판 후 처형, 1957년 복권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폴론스키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Полонский

볼셰비키 조직부장에서 숙청된 노동조합 간부

1933년 1월 중앙위 조직부장에 임명되어 당 전 간부 배치를 관장했으나, 불과 4년 뒤 자신이 구축한 기구의 수사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1893년 6월 17일(구력 5일) 토볼스크에서 유대계 가정의 소상인 신분으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루벤 게르셰비치 폴론스키다. 선원과 미숙련 노동자, 페테르부르크 전기기사로 일하다 1913년 페테르부르크 금속노조 중앙이사회 위원이 되었고, 1914년 체포되어 1915년 토볼스크 현으로 행정 유배되었다. 1917년 3월부터 모스크바 금속노조 중앙이사회 서기로 10월 무장투쟁에 참가했고, 내전기에는 서부·남부 전선 사단 군정위원과 남동철도 군정위원을 지냈다. 1920~1924년 광부노조 중앙위 서기, 1930~1933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1935~1937년 전연방 중앙노동조합평의회 서기를 지냈으며 193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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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볼셰비키 입당
  • 1913페테르부르크 금속노조 중앙이사회 위원
  • 1917모스크바 금속노조 중앙이사회 서기 · 10월 봉기 참가
  • 1918–1920사단 군정위원 · 남동철도 군정위원 · VTsSPS 남부국 의장
  • 1925–1928로고시스코-시모놉스키 구당위 서기 · 모스크바 당위 제2서기
  • 1930–1933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자카프카스 변경위 서기
  • 1933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부장
  • 1933–1935교통인민위원부 정치총국장 · 부인민위원
  • 1935–1937전연방 중앙노동조합평의회(VTsSPS) 서기
  • 1937체신 부인민위원 · 체포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시르초프

Сергей Иванович Сырц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3–1937 ✕ 처형

시베리아에서 스탈린에게 반기를 든 러시아 총리

1930년 11월, 스탈린의 갑작스러운 전화에 "소 생산성 문제입니다, 스탈린 동지"라고 답한 시르초프는 곧바로 정치국에서 강제 집단화를 공개 비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대에서 볼셰비키가 되어 내전기 돈 지역 소비에트 권력 수립에 참여했다. 1926–1929년 시베리아 당 제1서기로 네프적 협동조합 노선을 추진했고, 1929년 러시아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과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강제 집단화의 참상을 목격하고 1930년 로미나제와 함께 반대파를 조직, 스탈린의 권력 집중을 비판했다가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1937년 대숙청 중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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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 입당, 지하 선전 활동
  • 1917.10–1918로스토프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돈 소비에트공화국 부의장
  • 1918–1919제12군 정치위원, 돈 지역 탈코사크화 참여
  • 1921–1923중앙위원회 등록배치부장 — 노멘클라투라 제도 구축
  • 1924–1926중앙위원회 선동선전부장, 《공산주의 혁명》 편집자
  • 1926–1929시베리아 당 제1서기 — 네프적 협동조합 노선, 곡물 위기 때 스탈린과 갈등
  • 1929–1930러시아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정치국 후보위원
  • 1930로미나제와 반대파 조직 — 「무언가 해야 한다」, 스탈린 비판으로 전직 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