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초기화

전체 인물 2390명

디노 그란디

Dino Grandi

무솔리니를 무너뜨린 파시스트 정권의 실력자

1943년 7월 25일 새벽, 그란디 결의안은 19 대 8로 통과되어 무솔리니의 권력 기반을 무너뜨렸다.

디노 그란디는 이탈리아 파시스트 운동의 지도자이자 외교관으로, 정권의 핵심에서 권력을 행사했다. 그는 외무장관과 런던 대사를 지내며 전쟁 확대에 신중한 외교 노선을 추구했지만 파시스트 국가의 제도와 정책을 집행한 책임도 지녔다. 1943년 7월 시칠리아 침공 뒤 파시스트 대평의회에서 국왕에게 헌정상 군 통수권을 돌려주자는 결의안을 작성하고 표결을 조직해 베니토 무솔리니의 축출을 이끌었다. 이후 망명했고, 이탈리아 사회공화국 법정에서 궐석 사형을 선고받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15–1919제1차 세계대전 참전, 법학·경제학 공부와 변호사 개업
  • 1920–1922볼로냐 파시스트 전투단 지도자, 국가파시스트당 지도부
  • 1924–1929내무·외무 차관
  • 1929–1932이탈리아 외무장관
  • 1932–1939영국 주재 이탈리아 대사
  • 1939–1943법무장관, 파시스·코포라치오니 회의 의장
  • 1943파시스트 대평의회 결의안 작성과 표결 조직, 무솔리니 축출
  • 1944이탈리아 사회공화국 재판에서 궐석 사형 선고

돌로레스 이바루리

Dolores Ibárruri
정치·당 지도 스페인 공산당 스페인 스페인 1895–1989 ○ 자연사

“그들은 통과하지 못하리라!”: 파시스트 군대의 마드리드 진입을 저지한 반파시즘의 목소리

“침략의 파시즘이 스페인에서 저지르는 범죄를 계속 방치한다면, 파시즘은 유럽의 다른 민족들에게도 밀어닥칠 것입니다. 스페인 인민은 무릎 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기를 택합니다.” — 파리 지지집회 연설, 1936년 9월 3일

스페인공산당(PCE)의 상징적 지도자로, 내전 중 "¡No pasarán!"을 외쳐 반파시즘 투쟁의 얼굴이 되었다. 망명 중 프랑코 독재에 저항했으며,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공개 반대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7스페인 사회노동당(PSOE) 입당
  • 1918『엘 미네로 비스카이노』에 첫 기사 게재, 필명 '파시오나리아' 사용 시작
  • 1922통일 스페인공산당(PCE) 창립 참여
  • 1930PCE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
  • 1933반파시스트 여성연합 창설 의장
  • 1935코민테른 제7차 대회 — 집행위원회 후보위원 선출
  • 1936.2아스투리아스 지역구 코르테스 의원 당선
  • 1936.7라디오 연설 “¡No pasarán!” — 파시스트 군대의 마드리드 진입 저지 호소
  • 1937코르테스 부의장 선출
  • 1939–1942소련 망명 — 코민테른 활동 지속
  • 1941–1963단파방송 '독립 스페인 라디오'(라디오 피레나이카) 지휘
  • 1942–1960스페인공산당(PCE) 서기장
  • 1945국제민주여성연맹(WIDF) 공동 창립, 부의장
  • 1960–1989PCE 의장
  • 1968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개입 공개 반대
  • 1977프랑코 사후 귀국 — 41년 만에 다시 코르테스 의원 당선

존 J. 매클로이

John Jay McCloy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95–1989 ○ 자연사

전후 미국 국제질서를 설계한 실무가

흐루쇼프는 미국의 군비 증강이 전쟁 위협이라고 경고했다.

존 J. 매클로이는 법률가 출신의 미국 외교·안보 관료이자 금융가로, 전쟁 수행과 전후 국제질서 구축을 잇는 통로였다. 그는 일본계 미국인 강제수용과 독일 전범 사면·감형 같은 결정에 관여하며 미국 권력의 폭넓은 책임과 그 모순을 드러냈다. 1961년 존 F. 케네디의 군비축소 고문으로서 소련과 시험금지 및 군비축소를 협상했고, 7월 모스크바 회담에서 베를린 위기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을 직접 다뤘다.

상세 이력 보기
  • 1917–1919미 육군 포병 장교, 프랑스 전선 복무
  • 1921–1940뉴욕 변호사, 월스트리트 법률가
  • 1941–1945전쟁부 차관보, 전시 동원·정보·안보 정책 담당
  • 1947–1949세계은행 제2대 총재
  • 1949–1952미국 독일 고등판무관
  • 1953–1960체이스맨해튼은행 회장
  • 1953–1970외교협회 이사회 의장
  • 1961케네디 대통령 군비축소 고문

세묜 그리고리예비치 로샬

Семён Григорьевич Рошаль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러시아 러시아 1896–1917 ✕ 살해

크론시타트 수병을 혁명으로 이끈 21세의 인민위원

10월혁명 당일 크레스티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케렌스키-크라스노프 군대를 저지하는 수병·병사 혼성부대 정치위원으로 전장에 투입되었다.

크론시타트 볼셰비키를 이끈 젊은 혁명가로, 발트함대 수병을 혁명 편으로 돌려세웠다. 10월혁명 당일 감옥에서 풀려나 케렌스키 반격 저지에 투입되었고, 연말 루마니아 전선에서 백색장교단에 피살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2–191410번 김나지움 혁명 서클 활동, 전교생 조직 회의 참가로 퇴학
  • 1914볼셰비키 입당, 나르바 구역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 조직
  • 1915북부전선 징집, 전선 선전 활동으로 체포되어 크레스티 수감
  • 1917.3–1917.7크론시타트 볼셰비키 시당위원장 겸 소비에트 집행위원 — 발트함대 수병 조직
  • 1917.7–1917.107월 사건 후 체포, 트로츠키·라스콜니코프 등과 함께 크레스티 재수감
  • 1917.1010월혁명 당일 석방, 케렌스키-크라스노프 반격 저지 혼성부대 정치위원, 스타프카 점령 참여
  • 1917.12레닌 파견으로 루마니아 전선 인민위원회 대표 — 체포, 비밀장교단에 의해 살해

레프 세묘노비치 비고츠키

Лев Семёнович Выготский
학술·연구 소련 벨라루스 1896–1934 ○ 결핵

문화역사심리학의 창시자, 근위발달영역 개념을 정립한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자

마지막 말: "나는 준비됐다" — 젊은 시절 햄릿 에세이에 쓴 구절: "결심이 아니라 준비 — 그것이 햄릿의 상태다."

사회문화적 상호작용으로 고등정신기능이 형성된다는 문화역사이론을 정립한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자다. 『사고와 언어』를 남기고 37세에 결핵으로 사망했으나, 세계 발달심리학과 교육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상세 이력 보기
  • 1917모스크바대학 법학부 및 샤냡스키대학 역사철학부 졸업
  • 1919–1924고멜에서 교사·연극 평론가·출판 편집자로 활동하며 심리학 연구 시작
  • 1924모스크바 실험심리학연구소 연구원, 루리야·레온티예프와 '비고츠키 서클' 형성
  • 1925–1926『예술심리학』으로 학위 취득, 결핵 악화로 장기 입원
  • 1927–1931결함학연구소 과학지도자, 제2모스크바대학·공산주의교육아카데미 교수
  • 1932–1934『사고와 언어』 집필, 근위발달영역 개념 제안, 하리코프에서 의학 공부
  • 1934전연방실험의학연구소 심리학 부문 초청받았으나 6월 11일 결핵으로 사망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Buenaventura Durruti

바르셀로나에서 반란군을 꺾고 자기 이름의 종대를 이끈 아나키스트 금속노동자

1936년 바르셀로나에서 캐나다 기자 피에르 반 파선에게 한 말로 전해진다. 「우리는 폐허가 조금도 두렵지 않다. 우리는 이 땅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자기 세계를 부수고 물러갈지 몰라도,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이 가슴속에 품고 있다.」 널리 인용되지만 이 인터뷰의 정확한 문구를 두고는 논쟁이 있다.

레온의 철도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금속공. 1917년 총파업으로 해고된 뒤 프랑스로 달아나 아나키즘을 받아들였고, 로스 솔리다리오스와 로스 에란테스에서 은행 「수용」과 국왕 암살 시도를 거치며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감옥을 전전했다. 1936년 7월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을 이끌고 아타라사나스 병영을 함락시켜 카탈루냐에서 군부 반란을 무너뜨렸고, 이 전투에서 오랜 동지 프란시스코 아스카소를 잃었다. 곧 6천 명 규모의 두루티 종대를 꾸려 아라곤 전선으로 나가면서 해방 지역에서 토지와 공장의 집단화를 밀어붙였다. 11월 마드리드 방어에 합류했다가 19일 카사데캄포 전선에서 총상을 입고 이튿날 숨졌으며, 총알의 출처를 두고는 적의 사격, 아군의 오발, 그의 자동소총 오작동이라는 설이 지금도 갈린다. 바르셀로나 장례 행렬에는 수십만 명이 모였다.

상세 이력 보기
  • 1896레온의 철도 노동자 집안에서 여덟 남매 중 둘째로 출생
  • 1913–1917금속노조(UGT) 가입, 1917년 총파업 참여로 북부철도에서 해고되고 프랑스로 도피
  • 1918–1919망명지에서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고 귀국해 CNT 가입
  • 1920–1922로스 후스티시에로스 결성, 알폰소 13세 암살 계획이 발각되어 사라고사로 피신
  • 1922–1923아스카소·가르시아 올리베르와 로스 솔리다리오스 조직, 히혼 스페인은행 「수용」
  • 1924–1926쿠바·멕시코·칠레·아르헨티나를 도는 「수용」 원정, 파리에서 체포되어 라상테 감옥 수감
  • 1927–1931석방 후 벨기에 체류, 이베리아아나키스트연맹(FAI) 활동; 제2공화국 선포와 함께 바르셀로나 귀환
  • 1931–1936친화그룹 「노소트로스」 결성, 잦은 체포와 유형 속에 CNT 좌파의 얼굴이 됨
  • 1936.07.19–20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을 이끌고 아타라사나스 병영 함락, 동지 프란시스코 아스카소 전사
  • 1936.07–11두루티 종대를 편성해 아라곤 전선으로, 해방 지역의 토지·공장 집단화 추진
  • 1936.11.14종대 일부를 이끌고 마드리드 방어전에 합류
  • 1936.11.19–20카사데캄포 전선에서 총상을 입고 이튿날 사망, 총알의 출처는 지금도 논쟁
  • 1936.11.22바르셀로나 장례, 수십만 명이 운구를 따름

이에로님 페트로비치 우보레비치

Иероним Петрович Уборевич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리투아니아 1896–1937 ✕ 처형

23세에 육군을 지휘한 천재 지휘관, 붉은 군대 기계화의 설계자

주코프 원수의 평가: "그는 작전술을 완벽히 체득한 진정한 소련 군사령관이었다. 완전한 의미에서 군인이었다."

리투아니아 농민 가정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포병장교로 참전했다. 23세에 14군 사령관이 되어 남북전쟁에서 데니킨군을 격파하고 하리코프·오데사를 점령했으며, 극동공화국 총사령관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해방했다. 독일 연수에서 기계화전 교리를 흡수하여 투하쳅스키·야키르와 함께 붉은 군대의 기술 현대화를 주도했고, 벨라루스 군관구에서 1936년 대규모 기동훈련을 지휘했다. 1937년 「투하체프스키 사건」으로 체포되어 하루 만에 총살되었고 1957년 복권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6–17제국군 포병 장교, 중위 계급
  • 1918–1918소총사단장, 북부전선
  • 1919–2014군 사령관 — 데니킨군 격파, 하리코프·오데사 점령
  • 1921–22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블라디보스토크 입성
  • 1925–28북캅카스·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29–31적군 무장부장, 부국방인민위원
  • 1931–37벨라루스 군관구 사령관, 1936년 기동훈련 지휘
  • 1935제1급 군사령관 칭호 수여

이오나 에마누일로비치 야키르

Иона Эммануилович Якир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몰도바 1896–1937 ✕ 처형

키예프 군관구를 개혁의 실험실로 바꾼 내전 영웅

체포 후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과 당신에 대한 사랑의 말과 함께 죽을 것'이라고 썼다. 스탈린은 여백에 '악당이자 매춘부'라고 적었고, 보로실로프는 '완벽히 정확한 정의'라고 덧붙였다.

키시뇨프 유대인 약사 가정에서 태어나, 차르 시대 입학 제한으로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다.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 내전 중 오데사에서 지토미르까지 적진 400km를 돌파한 전설적 남부집단군 사령관이었다. 이후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으로 기계화·공수 실험과 종심작전 교리 발전을 주도한 군사 개혁의 핵심 인물로, 1935년 콤안다름 1계급이 되었다. 1937년 투하쳅스키 사건으로 총살, 1957년 복권.

상세 이력 보기
  • 1917–1918베사라비아 소비에트 집행위원, 루마니아군에 맞서 붉은 부대 지휘
  • 1918–1919제8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남부전선에서 크라스노프 코사크군과 교전
  • 1919제45소총사단장·남부집단군 사령관 — 오데사→지토미르 400km 적후 탈출
  • 1921–1924크림군 사령관,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우크라이나·크림군 부사령관
  • 1924–1925군사교육기관 총국장, 『보옌니 베스트니크』 편집장
  • 1925–1935우크라이나 군관구 사령관 — 기계화·공수 실험, 독일 참모 교육 이수
  • 1935–1937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국방 군사평의회 위원, 콤안다름 1계급
  • 1937/19575월 체포, 6월 12일 총살, 1957년 사후 복권

게오르기 이바노비치 블라고느라보프

Георгий Иванович Благонравов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의 볼셰비키 군사위원

1917년 10월 25일,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위원 블라고느라보프는 겨울궁전 포격을 지휘했다. 요새의 전시용 대포는 사격이 불가능해, 병사들이 무기고에서 3인치 야포를 손으로 끌어내 급히 배치했다.

차르 군대 장교 출신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10월 혁명 당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위원으로서 요새 포대의 겨울궁전 포격을 지휘하고 임시정부 각료들을 트루베츠코이 능보에 구금했다. 이후 체카·OGPU 수송국장으로 철도 보안과 도로 건설을 감독했으며, 1936년 국가보안 1급 위원이 되었다. 대숙청 속에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당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7.3RSDLP(b) 입당, 예고리옙스크 소비에트 의장
  • 1917.10–12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위원·사령관
  • 1918.6–7동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1–1931체카·GPU·OGPU 수송국장
  • 1929–1932교통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35–1936중앙 고속도로·자동차수송국장 (구쇼스도르)
  • 1936–1937NKVD 고속도로건설총국장, 국가보안 1급 위원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스테츠키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Стецкий

부하린파 '적색 교수'에서 스탈린 편으로 전향한 선전 책임자

1934년 8월 제1차 소비에트 작가대회 연설: "문학에서 자유로운 창조적 경쟁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노선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의 노선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다." 대회는 8월 17일~9월 1일 열렸다.

스몰렌스크주 보로프시나 마을 출신으로 1915년 페트로그라드 공업대학 재학 중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21~1923년 적색교수양성소에서 수학하며 부하린의 '적색 교수' 그룹에 속했다. 1925년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주필, 1926~1930년 중앙위 북서부국과 레닌그라드주 당위원회 선전부를 맡았고, 1928년 강제 곡물 수매에 반대했다가 스탈린 편으로 돌아섰다. 1930년부터 중앙위 문화선전부를 이끌며 1933년 작가동맹 조직위를 실질적으로 운영했고, 1934년 8월 제1차 소비에트 작가대회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공식 노선으로 선언했으며 1935년 당 선전선동부장을 맡았다. 1938년 4월 체포되어 8월 1일 총살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5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페트로그라드 공업대학 재학
  • 1917당 선동원, 10월 봉기와 케렌스키-크라스노프 반란 진압 참가
  • 1918–1920적군에서 군사정치 및 참모 업무
  • 1921–1923적색교수양성소 수학, 부하린파 '적색 교수' 그룹
  • 1925『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초대 주필
  • 1930–1935중앙위 문화선전부장, 작가동맹 조직위 실질적 운영
  • 1934–1938중앙위 조직국 위원, 잡지 『볼셰비키』 주필
  • 1935–1938중앙위 당 선전선동부장, 대숙청기 선전 캠페인 조직
  • 1930–1935중앙위 문화선전부장, 1934년 문화·레닌주의선전부로 개편
  • 1937소련 최고소비에트 제1기 대의원

야코프 아르카디예비치 야코블레프

Яков Аркадьевич Яковлев

집단화 행정을 맡은 농업인민위원

1929년 12월, 야코블레프는 전체 농지의 '최소 3분의 1'을 1930년 봄까지 집단화하자고 제안했다. 스탈린은 지나치게 신중하다며 기각했고, 야코블레프는 그대로 물러서 상향된 강행 일정을 충실히 집행했다.

본명 예프스타인. 1913년 볼셰비키 입당, 혁명 후 우크라이나에서 당 활동을 이끌었다. 1923년부터 『농민신문』 편집장을 맡아 농촌 문제 전문가로 부상했고, 1929년 초대 소련 농업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정치국 집단화 위원회를 주도했다. 1930년 1월 5일 포고령을 기초해 주요 곡창지대의 강제 집단화 일정과 '부농 계급 청산' 정책을 설계했으며, 트로핌 리센코를 발탁해 소련 생물학의 반과학적 전환에도 관여했다. 대숙청 중 체포되어 1938년 처형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9–1934농업인민위원 · 집단화 행정

이즈라일 모이세예비치 레플렙스키

Израиль Моисеевич Леплевский

우크라이나 대량작전을 정점으로 끌어올린 자

GB 소령 우샤코프의 증언에 따르면, 레플렙스키는 자신의 상관인 예조프마저 두려워할 정도로 무자비한 인물이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출신의 체키스트. 벨로루시 NKVD를 거쳐 우크라이나 NKVD 수장으로 대숙청 대량작전을 주도했으며, 예조프의 측근으로서 가장 먼저 숙청된 이들 중 하나다.

상세 이력 보기
  • 1934–1936벨로루시 내무인민위원
  • 1936–1937국가보안총국 특별부장
  • 1937–1938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 1938NKVD 제6부장, 이어 제3관리국장(수송·통신)
  • 1938체포와 처형

파이줄라 구바이둘라예비치 호자예프

Файзулла Губайдуллаевич Ходжае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즈베키스탄 1896–1938 ✕ 처형

부하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자디드 개혁운동에서 소비에트 우즈베키스탄의 초대 총리가 된 중앙아시아 혁명가

러시아 외교관 알렉산드르 바르민의 회고: 「'우즈베크의 레닌'이라 불린 호자예프는 왜소하고 마른 체구였으나 엄청난 에너지로 가득했다. 말라리아로 얼굴이 푸르스름해질 때도 있었지만, 엄청난 업무 속에서도 즐겁게 웃을 줄 알았다. 그는 자기 민족을 알았고 뛰어난 연설가였으며 깊이 사랑받았다.」

부하라의 부유한 상인 가문 출신으로, 11세에 모스크바로 유학하여 전통사회와 근대 유럽의 간극을 체험했다. 1916년 범튀르크주의 자디드 운동에 합류, 청년 부하라당을 창당했고 1918년 토후 전복 시도 실패 후 사형 선고를 받고 타슈켄트로 도피했다. 1920년 부하라 인민소비에트공화국 인민나지르회의 의장이 되었고, 1924년 우즈베크 SSR 수립과 함께 초대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중앙아시아의 국가 획정과 소비에트 연방 편입을 이끌었다. 1930년대 스탈린의 목화 단작 정책에 반대하다 몰락, 1937년 체포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 선고 후 총살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6자디드 운동 참여, 청년 부하라당 창당, 비밀 중앙위원
  • 1918부하라 토후 전복 시도 실패, 타슈켄트 도피, 궐석 사형
  • 1919–1920타슈켄트에서 혁명적 청년 부하라인 사무국 조직, 『우치쿤』 편집
  • 1920–1924부하라 인민소비에트공화국 인민나지르회의 의장
  • 1924–1937우즈베크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초대)
  • 1925–1937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우즈베크 SSR 대표 의장
  • 1937–1938전직 해임·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사형, 3월 15일 총살

바실리 표도로비치 데멘티예프

Василий Фёдорович Дементьев

체첸에서 연해주까지 옮겨 다닌 '북캅카스파' 체키스트

1917년 12월 기마 유격대원으로서 그는 러시아 육군 마지막 총사령관 두호닌 장군의 거처 점거에 가담했고, 두호닌은 얼마 뒤 병사들에게 살해됐다.

예브도키모프가 1934년 국가정치국 안의 '자기 사람'으로 거명한 '북캅카스파' 체키스트로, 1936년 여름부터 체첸(체첸-인구시)의 NKVD를 맡았다. 쿨라크 작전에서 평균을 웃도는 숫자를 제안한 지역 책임자 가운데 하나로 나우모프의 명단에 오르내린다. 극동 개편 뒤인 1938년 8월 국가보안소령으로 연해주 NKVD 국장이 되었으나, 예조프 몰락과 함께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상세 이력 보기
  • 1920–1936북캅카스 체카·OGPU 요원
  • 1936–1938체첸-인구시 NKVD 책임자
  • 1938연해주 NKVD 국장 (국가보안소령)

보리스 이그나티예비치 아르바토프

Борис Игнатьевич Арватов
학술·연구 소련 리투아니아 1896–1940 ✕ 자살

아방가르드의 생쥐스트, 생산예술의 이론가

「예술 밖으로 뛰어내려야 비로소 예술을 이해할 수 있다」 — 나탄 알트만에 관한 책(1924)의 마지막 주석에서, 아르바토프는 형식 분석에서 사회적 사실로의 자신의 방법론적 도약을 이 한 문장으로 정식화했다.

프롤레트쿨트 이론가이자 ЛЕФ 공동 창립자. 예술을 산업과 융합하는 '생산예술'을 주창하며 구성주의 미학의 기초를 놓았다. 전시 뇌진탕 후유증으로 1920년대 말 창작을 중단했고 1940년 자살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2바르샤바에서 문학 활동 시작
  • 1917사회혁명당원, 툴라 현 위원회 부의장, 제1차 소비에트 대회 및 제헌의회 대의원
  • 1919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폴란드 전선에서 정치위원으로 복무
  • 1920–1923프롤레트쿨트 이론가, ИНХУК 연구원, ЛЕФ 공동 창립과 잡지 활동
  • 1923–1926『예술과 계급』(1923), 『예술과 생산』(1926) 출간; 형식-사회학적 방법 정식화와 생산예술론 전개
  • 1927–1930『사회학적 시학』(1928), 『선동 및 생산 예술에 관하여』(1930) 출간; 뇌진탕 후유증 악화로 활동 위축
  • 1940오랜 투병 끝에 모스크바에서 자살

세묜 보리소비치 주콥스키

Семён Борисович Жуковский

무역 관리에서 부인민위원이 된 이례

1923년 당내 토론에서 트로츠키 측 결의안에 투표했다. 15년 후 스탈린은 이를 기억했고, 1938년 10월 3일 카자흐스탄 리데르 광산 책임자로 좌천되었으나 부임도 못 가고 19일 만에 체포되었다.

예조프의 NKVD 부인민위원이 된 이례적 무역 관료. 키예프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독일 주재 무역대표를 거쳐 1936년 예조프에게 발탁돼 NKVD 행정·보급을 총괄했다. 1938년 숙청으로 체포·처형됐다.

상세 이력 보기
  • 1932–1936베를린 주재 무역대표부 부대표, 대외무역인민위원부 수입국장
  • 1936–1937NKVD 행정경제국장
  • 1937국가보안총국 제3부 부부장, 제12부장
  • 1938내무부인민위원
  • 1938–1940체포, 재판과 처형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젤렌초프

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Зеленц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6–1941 ✕ 전사

돌파를 시도했지만 상부 명령에 묶인 사단 지휘관

보급로가 끊긴 뒤에도 철수 허가를 받지 못한 그는 사단 일부를 이끌고 얼어붙은 키안타야르비호를 건넜다.

안드레이 젤렌초프는 제정 러시아군 장교 출신으로 붉은 군대에 합류해 내전과 군 조직 개편을 거친 직업군인이었다. 겨울전쟁에서 제163소총사단을 이끌고 수오무살미를 점령했지만, 보급로가 끊기며 사단이 소련군 최초의 포위망에 갇혔다. 그는 철수를 요청했으나 허가받지 못했고, 결국 사단 일부를 이끌고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 국경으로 빠져나왔다. 이후 제88소총사단을 지휘했으며 1941년 카렐리야 전선에서 전사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5–1917제정 러시아군 보병 장교와 항공 관측장교
  • 1918–1921붉은 군대 입대, 내전기 군사위원·후방 지휘관
  • 1921–1933소총연대 지휘와 군사교육·참모 보직
  • 1936–1939제5독립중전차여단 참모장, 제3소총군단 기갑부대 책임자
  • 1939–1940제163소총사단장, 수오무살미 전투에서 포위와 철수 지휘
  • 1940–1941소장 진급, 제88소총사단장과 아르한겔스크 군관구 임시 지휘
  • 1941카렐리야 전선에서 제88사단 지휘 중 전사

볼데마르 아우구스토비치 울메르

Вольдемар Августович Ульмер

대숙청 작전명령마다 「확인함」 서명을 남긴 국가보안총국 작전서기

1943년 수용소 업무평가서는 그를 모범적인 행정십장으로 적고 수감 기간 3년 단축을 청원했다.

국경수비대 출신의 NKVD 여단장으로 1937년 4월부터 1938년 9월까지 국가보안총국 작전서기를 맡아 제00447호를 비롯한 예조프의 대숙청 작전명령 사본에 인증 서명을 했다. 프리놉스키의 심복으로 베리야 아래에서 한 달 비서실장을 지낸 뒤 1939년 체포되어 15년형을 받고 1945년 크라스노야르스크의 수용소에서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6준사관 학교 졸업, 이듬해부터 남서전선에서 중대장으로 복무
  • 1919–1922적군 보구차르 연대·여단에서 부관과 참모장
  • 1924–1925체카-OGPU 국경부대 지휘관·교관
  • 1928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후 국경수비 고등학교 교관
  • 1934국경·내무 병력 총국(GUPVO) 작전부장
  • 1937–1938국가보안총국(GUGB) 작전서기, 예조프의 대숙청 작전명령 인증
  • 1938–1939베리야 비서실장, 뒤이어 GUPVV 부국장 대행

표도르 이바노비치 트루힌

Фёдор Иванович Трухи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896–1946 ✕ 처형

전선 참모에서 반소 무장조직 지도자로 전향한 장군

1941년 가을, 포로가 된 그는 독일 당국에 적군 후방의 '철도·창고 등'을 타격하여 보급과 지휘를 마비시킬 부대의 창설을 제안했다.

트루힌은 러시아 제국군 장교 출신으로 적군에서 경력을 쌓아 군사교육과 참모 업무를 맡은 장군이었다.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 때 발트 군관구와 북서전선의 작전 지휘 체계에서 복무했으나, 전선 후퇴 중 포로가 되었다. 그는 포로 상태에서 독일 당국과 협력하고 블라소프의 러시아 해방군 및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 군사조직의 참모장으로 활동했다. 전쟁 뒤 소련에 넘겨져 반역죄로 처형되었으며, 그의 이력은 전문 군사 관료의 지식이 독일 점령전과 반소 무장 프로젝트에 전용된 사례를 보여준다.

상세 이력 보기
  • 1916–1917러시아 제국군 장교,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18–1921적군 중대·대대·연대 지휘관, 내전에 참전
  • 1922–1925적군 군사아카데미 수학
  • 1932–1936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관 및 전투훈련 방법론 학과장
  • 1937–1940총참모부 군사아카데미 고급 교관, 소장 진급
  • 1940–1941적군 전투훈련국 부국장, 발트 군관구 작전부장 겸 참모차장
  • 1941.06북서전선 참모차장, 리투아니아에서 포로가 됨
  • 1943–1945다벤도르프 러시아 해방군 학교장,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 군사조직 참모장

야코프 니콜라예비치 페도렌코

Яков Николаевич Федоренко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6–1947 ○ 자연사

전쟁 내내 붉은 군대 기갑부대를 지휘한 초대 기갑군 원수

1917년 10월 오데사에서, 페도렌코가 이끄는 수병 부대가 오데사 군관구 사령부를 점령하고 도시에 소비에트 권력을 세웠다.

야코프 페도렌코는 소련의 군사 지휘관으로, 1940년부터 1947년까지 붉은 군대의 주자동차장갑전차총국(GABTU)을 이끌며 대조국전쟁 전 기간 동안 소련 기갑·기계화 부대의 건설과 전투 운용을 총괄했다. 1941년 7월 국방 인민위원으로 임명되어 전차 생산과 보급을 직접 조율했으며,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 전투에서 최고사령부 스타프카 대표로 파견되었다. 전쟁 중 149차례 스탈린의 집무실로 불려간 최고 지휘부의 핵심 군사 고문으로, 1944년 2월 로트미스트로프와 함께 소련 최초의 기갑군 원수가 되었다. 흑해 함대 수병으로 10월 혁명에 참가했고 내전 시기 장갑열차를 지휘했으며, 1947년 사망하여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5–1917흑해 함대 수병, 기뢰소해정 선상위원회 위원장
  • 1917–1918적위대 오데사 수병 부대 지휘관
  • 1918–1920붉은 군대 장갑열차 지휘관·군정위원, 내전 참전
  • 1937–1940키예프 특별군관구 자동차장갑전차부대장
  • 1940–1942붉은 군대 주자동차장갑전차총국(GABTU) 국장
  • 1941–1943소련 국방 인민위원
  • 1942–1947붉은 군대 기갑·기계화 부대 사령관
  • 1946–1947소련 육군 기갑·기계화 부대 사령관, 최고회의 대의원

안드레이 알렉산드로비치 즈다노프

Андр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Жданов
이념·선전 소련 공산당·볼셰비키 소련 러시아 1896–1948 ○ 자연사(사인 논쟁)

스탈린주의 문화정책에 이름을 남긴 이념 관리자

1947년 9월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세계 정치 세력이 '제국주의·반민주 진영'과 '반제국주의·민주 진영'으로 나뉘었다고 선언하며 냉전기 소련의 공식 세계관을 정식화했다.

스탈린의 최측근으로 1934년 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에 올랐고, 대숙청 시기 정치국원으로 176건의 사형 명단을 직접 승인했다. 1989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 결정은 그를 1930~40년대 대량 탄압의 조직자 중 한 사람으로 규정했다. 전후 당내 2인자로 부상하여 1946년부터 문학·음악·철학을 강타한 즈다노프시나를 주도했고, 1947년 코민포름 창설을 조직하며 '두 진영' 세계관을 정식화했다. 1948년 6월 스탈린의 신임을 잃었고 8월 31일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0s니즈니노브고로드 당 조직에서 성장, 스탈린파 지방 간부로 부상
  • 1934–1945키로프 피살 뒤 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 도시와 당 조직 장악 (1945년 1월 쿠즈네초프에게 이양)
  • 1941–1944레닌그라드 포위전 시기 도시 방어와 정치동원 책임자
  • 1946–1948중앙위 서기, 문학·음악·철학 캠페인을 주도
  • 1947코민포름 창설과 두 진영 노선 제시
  • 1948사망 뒤에도 「즈다노프주의」가 전후 문화통제의 이름으로 남음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체르니셰프

Василий Васильевич Чернышёв

예조프의 부관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굴라그를 관리한 내무인민위원부 차관

베리야가 예조프를 대체하며 예조프 측근들을 차례로 체포할 때, 체르니셰프만은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굴라그 국장을 겸임하라는 임무를 받고 2년간 수용소 체제 전체를 지휘했다.

1937년부터 1952년 사망까지 15년간 내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을 지낸 국가보안 간부로, 예조프 휘하의 부인민위원 가운데 유일하게 숙청을 피한 인물이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굴라그 국장을 겸임하며 수용소 체제를 총괄했고, 전시에는 발트 3국 강제이주 작전의 실무를 지휘했다. 전후에는 원자력 프로젝트 건설을 감독하며 굴라그 노동력을 핵시설 공사에 동원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5–1917러시아 제국군 소위,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17–1920랴잔 시소비에트 부의장, 특수목적부대 조직
  • 1920–1927체카·OGPU 부대 지휘관, 투르키스탄 전선
  • 1927–1937극동 OGPU·NKVD 국경군 사령관
  • 1937–1939NKVD 부인민위원 겸 노동자농민민병대 총국장
  • 1939–1941NKVD 부인민위원 겸 굴라그 국장
  • 1941–1952NKVD·MVD 부인민위원/부장관, 원자력 건설 감독

클레멘트 고트발트

Klement Gottwald

1948년 2월 쿠데타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인민민주주의 체제로 전환시킨 공산당 지도자

우리는 체코슬로바키아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이며 우리 최고 사령부는 바로 모스크바다. 우리는 러시아 볼셰비키에게서 당신들의 목을 비트는 법을 배우러 모스크바에 간다. 그 웃음보는 찢어 놓겠다! 1929년 12월 21일 체코슬로바키아 국회 첫 연설에서

모라비아의 가난한 농가 출신으로 1921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창립에 참여했고, 1929년 제5차 대회에서 서기장이 되어 사망까지 당을 이끌었다. 코민테른 서기(1935–1943)를 지내며 인민전선 노선을 추진했고, 1945년 5월 프라하로 돌아와 부총리와 민족전선 의장을 맡았다. 1946년 총선에서 KSČ가 38%를 얻은 뒤 총리가 되었고, 1948년 2월 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해 그해 6월 14일 체코슬로바키아 최초의 공산당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대통령으로서 산업 국유화와 농업 집단화를 밀어붙이며 밀라다 호라코바(1950년 처형), 루돌프 슬란스키와 블라도 클레멘티스(1952년 처형) 등의 재판을 만들었고, 1953년 3월 14일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1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창립 참여
  • 1929–1945KSČ 중앙위원회 서기장
  • 1935–1943코민테른 서기
  • 1938–1945모스크바 망명,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 저항 지도
  • 1945–1946체코슬로바키아 부총리
  • 1946–1948체코슬로바키아 총리
  • 1948–1953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지가 아르카디예비치 베르토프

Дзига Аркадьевич Вертов
문학·예술 소련 폴란드 1896–1954 ○ 위암

〈키노-아이〉의 창시자: 카메라가 인간의 눈보다 더 완전한 진실을 포착한다고 믿은 다큐멘터리 혁명가

“나는 노동계급의 종이다. 강제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자발적으로 내 모든 힘을 남김없이 이 계급에 바친다.” — 지가 베르토프

소련 다큐멘터리의 창시자이자 키노-아이 이론가.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는 《사이트 앤드 사운드》 선정 역대 최고 다큐멘터리로, 이중 노출·분할 화면 등 현대 영화 문법의 원형을 제시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8모스크바 영화위원회 뉴스릴 편집자로 활동 시작 — 키노네델랴 연감 제작
  • 1919데뷔작 〈혁명의 기념일〉 — 혁명 뉴스릴을 장편 다큐멘터리로 편집
  • 1922–1924키노-프라우다 뉴스릴 연작 제작, '키노키' 그룹 결성, 키노-아이 선언 발표
  • 1924–1926〈키노-아이〉·〈소비에트 장난감〉·〈세계의 6분의 1〉 발표 — 실험적 다큐멘터리 언어 확립
  • 1929〈카메라를 든 사나이〉 발표 — 무대·자막 없는 '영화적 글쓰기'의 극한 실험, 역대 최고 다큐멘터리로 평가
  • 1930–1934소련 최초 사운드 다큐 〈돈바스의 교향곡〉, 〈레닌에 관한 세 편의 노래〉로 《프라우다》 극찬
  • 1935적성훈장 수훈 — 소련 영화 발전의 특별 공로 인정
  • 1937–1954〈자장가〉 상영 5일 만에 검열 철회, 이후 모든 장편 기획 거부 — CSDF에서 《오늘의 뉴스》 55편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