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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나즘 히크메트

Nâzım Hikmet
문학·예술 소속 미확정 튀르키예 튀르키예 1902–1963 ○ 자연사

28년형을 시로 살아낸 터키 혁명시인, 모더니즘과 공산주의를 결합한 20세기 문학의 거인

“내 나라의 푸른 하늘 아래 평범한 마을 공동묘지의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 묻어다오” — 모스크바 유언, 1963년

오스만 살로니카 출신의 나즘 히크메트는 1921년 소련에서 마야콥스키레닌을 만나 평생의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터키로 돌아와 자유시를 도입하며 문학 혁신을 일으켰다. 《835행》에서 16,000행 대서사시 《내 조국의 인간 풍경》에 이르기까지, 민중의 삶과 독립전쟁을 노래한 방대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군사법정의 28년형으로 12년간 수감되었고 피카소·사르트르·로브슨의 국제 석방운동을 촉발했다. 1951년 소련 탈출 후 13년간 세계평화운동과 반식민주의에 헌신했으며, 시는 50여 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유네스코는 2002년을 '나즘 히크메트의 해'로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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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첫 시 〈조국의 비명(Feryad-ı Vatan)〉 발표
  • 1918이스탄불 해군사관학교 졸업, 해군 장교 복무
  • 1921터키 독립전쟁 참가 위해 아나톨리아로 이동, 무스타파 케말과 만남
  • 1922–1924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 볼셰비키당 입당
  • 1924–1925터키 귀환, 잡지 《아이든르크(Aydınlık)》 편집 — 불법 터키공산당 기관지
  • 1929첫 자유시집 《835행》 출간 — 터키 시의 혁명
  • 1933–1935《밤에 온 전보》로 첫 투옥, 부르사 교도소에서 《셰이흐 베드레딘 서사시》 집필
  • 1938–1950군사반란 선동 혐의로 28년형 선고, 4개 도시 교도소에서 12년 복역
  • 1939–1960옥중에서 대서사시 《내 조국의 인간 풍경》 16,000행 집필
  • 1950국제 석방운동과 단식투쟁 끝에 사면 — 국제평화상 수상
  • 1951–1963소련 망명 — 세계평화평의회 상임위원, 반식민주의·반전 활동
  • 1963.6.3모스크바 페레델키노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

주마바이 샤야흐메토비치 샤야흐메토프

Жумабай Шаяхметович Шаяхмет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카자흐스탄 1902–1966 ↓ 실각 1954

카자흐 SSR 출신 민족소비에트 의장

1946년 여름 투시노 항공 퍼레이드에서 스탈린이 참석자들에게 "동지들, 이것이 주마바이 샤야흐메토프 — 카자흐스탄 최초의 민족 서기다"라고 소개하며 그를 "동방의 독수리"라 불렀다.

카자흐 당 지도부에서 올라와 민족소비에트 의장을 맡았다. 스탈린 말기와 흐루쇼프 초의 공화국 대표제 라인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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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s카자흐 공화국 NKVD와 당 행정에서 성장
  • 1946–1954카자흐 공산당 제1서기, 스탈린 말기 공화국 지도자
  • 1950–1954민족소비에트 의장, 카자흐 대표로 공식 연방 라인에 진입
  • 1954처녀지 개간과 흐루쇼프 노선 속에서 실각
  • 1966중앙권력 복귀 없이 사망

마르키안 미하일로비치 포포프

Маркиан Михайлович Поп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2–1969 ○ 가스 사고사

가장 재능 있던 전선군 사령관, 그러나 원수는 아니었다

1941년 8월 29일, 스탈린은 몰로토프에게 타전했다. 「누군가 이 구역에서 일부러 독일군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 아닌가? 포포프라는 자는 도대체 어떤 놈인가?」 황제의 의심은 3년 뒤 강등으로 이어졌다.

돈 강 유역 출신으로 1920년 붉은군대에 자원했다. 독소전 초기 북부전선군과 레닌그라드 전선군을 지휘해 독일군 진격을 저지했고, 스탈린그라드에서는 부사령관으로 포위 작전을 입안했다. 1943년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으로 오룔과 브랸스크를 해방해 육군대장이 되었으나, 이듬해 발트에서의 부진과 정치위원 불가닌과의 충돌로 상장으로 강등되었다. 1956년부터 지상군 주참모장을 지냈고 1965년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바실렙스키골로바노프가 최고의 재능이라 평가했지만 끝내 원수가 되지 못한 대표적 장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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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41제1독립적기군 사령관(극동)
  • 1941.1–6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 1941.6–9북부전선군·레닌그라드 전선군 사령관
  • 1941.12–42.6제61군 사령관(모스크바 반격)
  • 1942.10–12스탈린그라드 전선군 부사령관, 제5충격군 사령관
  • 1943.6–10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 — 오룔·브랸스크 해방, 육군대장 진급
  • 1943.10–44.4제2발트 전선군 사령관 — 작전 부진으로 상장 강등
  • 1944–45레닌그라드 전선군 참모장
  • 1955–62지상군 전투훈련총국장, 이후 주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그리고리 테오필로비치 카라나제

Григорий Теофилович Каранадзе

숙청을 넘기고 살아남은 그루지야 내무장관

1952년 4월 베리야를 겨냥한 '밍그렐리아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스탈린 사후 베리야의 손으로 풀려났다. 이듬해 베리야가 실각하자 측근들은 대부분 총살당했지만, 카라나제는 해임에 그치고 1970년 자연사했다.

베리야의 그루지야 출신 측근으로, 크림·다게스탄 내무인민위원을 거쳐 그루지야 내무장관(1943~1952)을 지냈다. 밍그렐리아 사건으로 체포됐다가 스탈린 사후 복권되었고, 베리야 측근 중 유일하게 처형을 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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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937트빌리시·시그나기 지구당 제1서기
  • 1938–1941크림 자치공화국 내무인민위원
  • 1942–1943다게스탄 자치공화국 내무인민위원
  • 1943–1952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이어 장관
  • 1952–1953‘밍그렐리아 사건’으로 체포, 이후 복권
  • 1953그루지야 내무 부장관
  • 1957–1970그루지야 각료회의 국가산림위원회 부의장

니콜라이 일리치 카모프

Николай Ильич Камов

동축반전로터를 고집한 소련 해군 항공의 설계자

카모프와 스크르진스키는 자신들이 만든 새로운 비행 기계를 가리키는 말로 "베르탈료트(вертолёт)"를 제안했다. 회전익기를 뜻하는 이 러시아어 단어는 그들의 설계와 함께 탄생했다.

소련의 항공기 설계자로, 동축반전로터 헬리콥터의 선구자이자 카모프 설계국(OKB Kamov)의 창립자. 1929년 니콜라이 스크르진스키와 함께 소련 최초의 오토자이로 KASKR-1을 제작했고, 1940년 헬리콥터 전문 설계국을 맡아 Ka-8, Ka-15, Ka-25 함상헬기, Ka-27, Ka-50 "블랙샤크" 공격헬기 등 Ka 계열기를 개발하여 소련 해군 항공대의 중추를 구축했다. 단일로터 방식이 지배하던 시대에 기술적으로 더 까다로운 동축반전로터를 고집했고, 그 선택은 소형·고기동 기체로 결실을 맺었다. 1972년 사회주의노동영웅 및 소련 국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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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톰스크 공과대학 기계공학과 졸업, 최연소 졸업생·기술자로 기록
  • 1924–27도브롤료트에서 융커스 Ju-13 역설계 및 날개 개량
  • 1927–29그리고로비치 설계국, 이어 리샤르 설계국에서 해상항공기 설계
  • 1929스크르진스키와 소련 최초 오토자이로 KASKR-1 제작
  • 1931–39TsAGI 오토자이로 설계반장, A-7 정찰·포병교정 오토자이로 개발
  • 1940–73헬리콥터 설계국(OKB Kamov) 수석설계자 겸 국장
  • 1948–68Ka-8, Ka-10, Ka-15, Ka-18, Ka-25 함상헬기, Ka-22 винтокрыл, Ka-26
  • 1972사회주의노동영웅, 소련 국가상 수상

스타니스와프 길랴로비치 포프와프스키

Станислав Гилярович Поплавский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연방 폴란드인 1902–1973 ○ 사망

포즈난 봉기를 진압한 폴란드계 소비에트 장군

1956년 6월 28일 오후 2시 포즈난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보안국 청사 앞 상황을 장악하라고 명령했다.

우크라이나 포돌리아의 폴란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열여덟 살까지 글을 몰랐던 그는 붉은군대에 징집된 뒤 소비에트 장군으로 성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폴란드 제1군을 지휘해 베를린 공방전을 치르고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도 폴란드군 최고 지휘부에 남아 소련의 감독 역할을 맡았으며, 1956년 6월 국방차관으로서 포즈난 봉기 진압 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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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붉은군대 징집, 병사로 복무
  • 1935–1938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 1944–1945폴란드 제1군 사령관, 베를린 공방전
  • 1945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
  • 1949–1956폴란드 국방성 차관
  • 1956포즈난 6월 봉기 진압 지휘
  • 1956–1963소련 국방성 복귀, 육군대장으로 퇴역

세르게이 알렉세예비치 레베데프

Сергей Алексеевич Лебеде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02–1974 ○ 자연사

MESM·BESM의 창설자, 소련 컴퓨터 산업의 아버지

1970년대 초 IBM 호환 노선이 소련 컴퓨터 산업을 장악해가자, 이미 병상에 있던 레베데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들의 길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소련 컴퓨터 공학의 창시자. 1951년 키예프 외곽 폐허 수도원에서 유럽 대륙 최초의 저장프로그램 전자계산기 MESM을 완성했고 1953년 BESM-1을 가동했다. 이후 20년간 ITMiVT 소장으로 BESM-6 등 15종의 컴퓨터를 개발했으며, 그의 기계들은 핵무기 계산과 우주비행 궤도 산출, 최초의 작전용 탄도미사일 요격 시스템을 떠받쳤다. 1953년 과학아카데미 최초의 '계산장치' 전공 정회원, 사회주의 노동영웅(1956), 레닌·스탈린·국가상을 받았다. IBM 호환 노선에 맞서 독자 병렬 아키텍처를 고수했고 제자들은 엘브루스 슈퍼컴퓨터로 계승했다. 사후 IEEE 컴퓨터 파이어니어 상(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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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46전연방 전기공학연구소(AEI) 연구원·자동화부장, 모스크바전력공학대학 교수
  • 1946–1950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전력공학연구소장 → 전기공학연구소장
  • 1948–1951MESM(소형 전자계산기) 개발 총괄 — 소련 및 유럽대륙 최초의 저장프로그램 전자계산기 완성
  • 1950–1953정밀기계·컴퓨터공학 연구소(ITMiVT) 연구실장, BESM-1 개발 완료
  • 1953–1973ITMiVT 소장 — BESM-2, M-20, BESM-6 등 15종 컴퓨터 개발 지휘
  • 1953–197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계산장치 전공)

필리프 예고로비치 미헤예프

Филипп Егорович Михеев
학술·연구 소련 러시아인 1902–1975 ○ 옥고 후 재활

숙청에 휩쓸린 당 조직의 실무 책임자

“진심으로 뉘우치니 죄를 씻을 기회를 달라”고 그는 최후진술에서 말했다.

필리프 미헤예프는 전쟁과 전후를 거쳐 레닌그라드 시·주 당위원회의 관리국장으로 조직의 운영을 떠받친 소련 공산당 실무 간부였다.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체포되어 1950년 10년형을 선고받았고, 1954년 불법 수사가 확인되며 복권과 함께 당적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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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트베리현 체르노야로보 마을에서 출생
  • 1923프스코프 소비에트당 학교에서 수학
  • 1924–1926붉은군대 복무
  • 1926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6–1940데츠코셀스키 지구당위원회 부서기 및 제1서기
  • 1940–1949레닌그라드 시·주 당위원회 관리국장
  • 1941–1944레닌그라드 방어에 참여
  • 1950–1954레닌그라드 사건으로 10년형, 1954년 재활

미하일 알렉세예비치 멘시코프

Михаил Алексеевич Меньшиков

스탈린에게 바나나 때문에 해임되고 흐루쇼프 아래 냉전 대사로 복귀한 무역·외교 관료

스탈린이 휴양지 식탁에 오른 썩은 바나나를 보고 격노하자, 모든 책임은 대외무역부 장관인 멘시코프에게 돌아갔다. 하루 전 '엄중 경고'를 받은 바로 다음 날, 그는 '직무를 감당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전격 해임되었다.

소련의 무역 관료이자 외교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회계 강습을 거친 뒤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했고, 모스크바 플레하노프 국민경제연구소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런던의 소련 무역 협동조합 아르코스(ARCOS) 책임자를 거쳐 1949년 소련 대외무역부 장관에 올랐으나, 1951년 멕시코산 바나나 품질 문제로 스탈린의 노여움을 사 해임되었다. 스탈린 사후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주인도 대사(1953~1957), 주미 대사(1958~1962)를 역임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 직전까지 워싱턴에서 미소 관계를 관리했다. 이후 러시아공화국(RSFSR) 외무장관으로 6년간 재직하며 소련 외교의 연방 차원과 공화국 차원을 모두 경험한 드문 이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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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붉은 군대 복무
  • 1921탐보프 농민봉기 진압 참여
  • 1930–1936아르코스(ARCOS) 런던 지부 책임자
  • 1943–1946유엔구제부흥기구(UNRRA) 부국장 (미국)
  • 1946–1949소련 대외무역부 차관
  • 1949–1951소련 대외무역부 장관
  • 1953–1957주인도 소련 대사
  • 1957주네팔 소련 대사 (겸임)
  • 1958–1962주미 소련 대사
  • 1962–1968러시아공화국(RSFSR) 외무장관

스테판 솔로모노비치 마물로프

Степан Соломонович Мамулов

NKVD 서기국을 쥔 문서의 관문

1938년 12월 베리야의 부름으로 트빌리시에서 모스크바로 올라왔다. 한 달 뒤 NKVD 서기국 제1부국장에 임명되어, 14년간 비밀경찰의 모든 문서가 그의 책상을 통과했다.

베리야 측근 당 관료. NKVD 서기국장으로 문서 흐름 전체를 통제했고, 내무 부장관으로 수용소 체계를 관장했다. 베리야 숙청 후 별도 재판으로 15년형을 살고 1968년 석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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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38압하지야·그루지야·카자흐스탄 당 사업, 트빌리시 시당 서기
  • 1939–1946NKVD·MVD 서기국장
  • 1946–1953내무 부장관(수용소·보급 관장)
  • 1953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장
  • 1953–1968체포, 십오 년형 복역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고레미킨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Горемыкин

탄약에서 우주까지: 흐린 이름 뒤에 숨은 로켓부처의 첫 장관

1955년 4월, 의도적으로 모호한 이름으로 로켓·우주 개발을 감추기 위한 일반기계공작부가 창설되자, 고레미킨이 초대 장관에 올랐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바우만 모스크바국립공과대학을 졸업한 소련의 공업 관리자이자 국가 지도자이다. 방위공장 기술직에서 출발하여 독소전쟁 발발 직전 탄약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전쟁 첫해의 군수 생산을 지휘했고, 종전 후에는 농업기계공작부 장관을 지냈다. 1955년 소련 최초의 일반기계공작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일반기계'라는 의도적으로 모호한 명칭은 이 부처의 실제 임무인 탄도미사일과 우주로켓 개발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1951년 '금속 잔여분 은폐'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당에서 제명되었으나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복직했으며, 만년에는 공작기계 분야 과학기술 자문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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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0보리소글렙스크 철도공장 견습 기계공, 당학교·노동자대학 수학
  • 1931바우만 MVTU 졸업, 모스기프로마시 기술자·부소장
  • 1936–1938제92공장(고리키) 주임기술자, 제8공장(모스크바) 기술부장
  • 1939–1940군비담당 부인민위원
  • 1941–1942탄약인민위원 — 전쟁 1년차 군수 지휘
  • 1946–1951농업기계공작부 장관 (1951년 체포·제명, 1953년 복권)
  • 1955–1957초대 일반기계공작부 장관 — 로켓·우주산업의 비밀 행정 수장

알렉산드르 로마노비치 루리야

Александр Романович Лурия
학술·연구 소련 러시아 1902–1977 ○ 심근경색

신경심리학의 창시자, 비고츠키의 문화역사이론을 임상신경과학과 연결한 '낭만적 과학'의 실천자

그는 과학자를 '고전파'와 '낭만파'로 나누었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지만, 생명의 나무는 푸르다" — 살아있는 현실의 풍요를 보존하는 것이 진정한 과학이다.

비고츠키와 문화역사심리학을 창립하고, 뇌 손상 병사 치료로 신경심리학의 토대를 세웠다. 독특한 기억력을 지닌 인물들의 사례를 과학과 문학으로 엮어낸 '낭만적 과학'의 실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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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카잔대학 졸업, 카잔 정신분석학회 설립
  • 1924–1934모스크바 실험심리학연구소 연구원, 비고츠키·레온티예프와 '트로이카' 형성
  • 1931–1934하리코프 우크라이나 정신신경학아카데미 심리학 부문장, 중앙아시아 비교문화 원정
  • 1937제1모스크바의대 졸업, 교육학 박사 — 『인간 갈등의 본성』
  • 1941–1944키세가치 신경외과 후송병원장, 뇌 손상 병사 치료 및 재활 체계 구축
  • 1945–1966모스크바대학 교수, 부르덴코 신경외과연구소 연구원
  • 1966–1977모스크바대학 심리학부 신경·병리심리학 주임교수
  • 1967–1977소비에트 교육학아카데미 정회원,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 외국인 회원

미하일 파블로비치 시레이데르

Михаил Павлович Шрейдер

대숙청기 NKVD의 내부 증언자

1938년 초 노보시비르스크에 밀리치야 국장으로 부임하자마자, 형사 요원들을 대규모 작전의 체포와 호송에 동원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주 NKVD 국장 고르바치와 한 달 내내 충돌한 끝에 그는 전출되었고, 넉 달 뒤에는 그 자신이 체포되었다.

1919년부터 체카에서 일한 고참 요원으로, 1935년부터 이바노보주 밀리치야(경찰) 국장을 지냈고 1938년 2월 카자흐 SSR 내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겸 밀리치야 총국장이 되었다. 그 직전 노보시비르스크 밀리치야 국장으로 부임했을 때는 밀리치야 인력을 대규모 작전의 체포 업무에 동원하라는 주 NKVD 국장 고르바치의 요구를 거부해 한 달 만에 자리에서 밀려났다. 1938년 6월 알마아타에서 체포되어 여러 나라의 간첩이라는 자백을 강요당했으나 아홉 달 넘게 버텼고, 고문 끝에는 자신이 만주국 황제 푸이의 사생아라는 식의 일부러 터무니없는 진술서를 써서 수사의 조작성을 기록에 남겼다. 1940년 10년형을 선고받고 수용소에 갇혔다가 1942년 풀려나 사병으로 참전했으며, 1950년대 중반 복권되었다. 만년에 쓴 회고록 「NKVD 내부에서: 체키스트의 수기」(1995년 사후 출간)는 지휘부급 생존자가 대숙청기 NKVD 내부를 증언한 보기 드문 기록으로, 역사가들이 널리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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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체카(전러시아 비상위원회) 입부, 서부전선 사단 특별부 정찰 요원
  • 1922모스크바 주 GPU 비밀정치부 근무, 불라노프의 보좌관
  • 1925–1927외무인민위원부 암호부와 소프키노에서 근무
  • 1930–1931중앙아시아·레닌그라드 군관구 OGPU 전권대표부 근무
  • 1931–1933히비노고르스크 GPU 국장, 이후 타타르 자치공화국 OGPU 근무·카잔 형사수사
  • 1935–1938.1이바노보주 밀리치야 수사부서 책임자, 밀리치야 관리국장(내무인민위원부 부국장 겸임)
  • 1938.2–6카자흐 SSR 내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겸 밀리치야 총국장(알마아타); 6월 체포

바실리 미하일로비치 안드리아노프

Василий Михайлович Андрианов

전시 스베르들롭스크를 이끌고 숙청된 레닌그라드를 재건한 스탈린 시대의 지역 당 보스

1942년,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원회는 「베르흐-이세츠키 제철소에서 전채요리와 술이 곁들여진 야회를 개최한 건에 대하여」라는 결의를 채택했다. 공장 간부들의 연회를 규탄한 이 결의는 안드리아노프의 강경한 통치 스타일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바실리 안드리아노프는 스탈린 시대 후기 소련의 주요 지역당 지도자로,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원회 제1서기(1939~1946)와 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1949~1953)를 지냈다. 전시 스베르들롭스크에서 신타길 제철소와 스레드네우랄스크 제련소 건설을 진두지휘하고 방산 생산을 총괄하여 네 개의 레닌 훈장을 받았다.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 후 말렌코프의 추천으로 레닌그라드에 파견되어 대규모 당·국가 기구 개편을 주도했고, 1952년 10월 스탈린에 의해 당 중앙위원회 간부회(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스탈린 사후인 1953년 3월 간부회에서 제외되고 곧 레닌그라드 당직에서도 해임되었으며, 국가통제부 차관을 거쳐 1956년 연금 생활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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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5붉은군대 복무
  • 1926볼셰비키당 입당
  • 1937–1938코브로프 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38스탈린그라드 주당위원회 제2서기
  • 1939–1946스베르들롭스크 주·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46–1952당 중앙위원회 조직국 위원
  • 1949–1953레닌그라드 주·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52–1953당 중앙위원회 간부회 위원
  • 1953–1956소련 국가통제부 차관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먀시셰프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Мясищев

투폴레프가 거절한 대륙간 제트폭격기를 1년 10개월 만에 현실로 만든 설계자

스탈린이 대륙간 제트폭격기를 원했을 때 투폴레프는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먀시셰프가 22개월 만에 M-4를 띄웠다. 투폴레프가 후일 인정했다: "먀시셰프가 아니었으면 우리에겐 그런 폭격기가 없었을 것이다."

소련 중폭격기 설계의 독보적 인물로, M-4(몰로트)를 통해 세계 최초로 실전 배치된 대륙간 터보제트 전략폭격기를 현실화했다. 투폴레프 설계국에서 TB-1, TB-3, ANT-20 개발에 참여했고, 1938년 체포되어 NKVD의 TsKB-29에서 페틀랴코프와 함께 Pe-2를 설계했다. 1951년 스탈린의 직속 지시로 OKB-23을 재건해 불과 22개월 만에 M-4를 띄웠고, 이후 초음속 전략폭격기 M-50과 세계 기록 19개를 수립한 3M을 개발했다. 1960년부터 7년간 TsAGI를 이끌며 소련 항공우주의 기초연구를 총괄했고, 사후에도 그의 설계국이 VM-T 아틀란트로 부란 우주왕복선 수송을 담당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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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34투폴레프 설계국(AGOS TsAGI) — TB-1, TB-3, ANT-20 날개 설계
  • 1934–37TsAGI 실험기 여단(KB-6) 책임자, ANT-41 어뢰폭격기
  • 1937–38제84공장 수석설계사 — DC-3을 Li-2로 개량, 약 14,000대 생산
  • 1938–40체포, NKVD TsKB-29에서 페틀랴코프 휘하 Pe-2 설계
  • 1940–43석방 후 자체 OKB — DVB-102, 소련 최초 여압식 객실 폭격기
  • 1943–46제22공장 수석설계사 — Pe-2 개량형(Pe-2I 등), DIS, DB-108
  • 1946–51MAI 항공기설계학과장·학장; OKB 해산 (낮은 생산성 이유)
  • 1951–60OKB-23 수석·총설계사 — M-4(1953), 3M(1956), M-50(1959); 세계기록 19건
  • 1960–67TsAGI 소장 — 초음속·가변익·수직이착륙 기초연구 총괄
  • 1967–78EMZ(먀시셰프 실험기계제작공장) 총설계사 — M-17, M-18, M-20, VM-T 아틀란트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수슬로프

Михаил Андреевич Суслов

크렘린의 회색 추기경

수슬로프가 출장을 가면 키릴렌코가 서기국을 대신 주재했다. 돌아오자마자 수슬로프는 자신의 부재 중 내려진 결정을 모조리 뒤집었다.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

사라토프현 샤호프스코예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난 러시아·소비에트의 당·국가 인물로, 스탈린 시대부터 두각을 나타내 1921년 입당했다. 1947년 5월부터 죽는 날까지 중앙위 서기를 지냈고 1949~1950년에는 프라우다 편집장을 맡았으며, 1965년부터는 서기장 브레즈네프 아래 제2서기로 당의 이인자였다. 이념·선전·문화·검열·교육을 관장하며 '회색 추기경'으로 불렸고, 1956년 헝가리,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1979년 아프가니스탄 개입 결정에 참여했다. 1982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해 크렘린 벽 묘역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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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s–1930s당 학교와 경제 행정에서 성장, 북캅카스·스타브로폴 당직 수행
  • 1944–1946리투아니아 당국에서 전후 소비에트화와 반민족주의 통제에 관여
  • 1947–1982중앙위 서기, 이념·선전·정통 노선의 장기 관리자
  • 1956스탈린 비판 이후에도 당 정통성과 통제 언어를 재정리
  • 1964–1982브레즈네프 체제의 보수적 이념 심판관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베네딕토프

Ива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енедиктов

스탈린 말기와 전후 농업행정의 장기 관료

정치국에서 나는 스탈린 시절 버릇대로 '지도자' 귀에 거슬려도 내 생각을 말했다. 흐루쇼프는 처음엔 조용히 듣더니, 점차 냉담해졌고 마침내 노골적 적의로 돌아섰다.

1938년부터 20년 넘게 소련 농업을 지휘하며 전시 식량 공급과 전후 복구를 관리했다. 1939년 전연방농업전시회를 조직해 집단농업의 성과를 선전했고, 1953년 말 흐루쇼프의 처녀지 개간 정책의 토대가 된 보고서를 직접 작성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급진적 개혁(옥수수 강제 재배, 개인 텃밭 철폐, 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 지방 이전)에 공개 반대하며 밀려났고, 이후 인도·유고슬라비아 대사로 12년간 외교관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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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55농업인민위원 · 농업장관

판텔레이몬 콘드라티예비치 포노마렌코

Пантелеймон Кондратьевич Пономаренко

스탈린이 신임한 유격대 총사령관, 후계 문턱에서 밀려나다

1941년 12월, 스탈린은 포노마렌코를 불러들여 여러 시간 면담한 끝에 전 유격대를 총괄할 중앙본부 설립안을 직접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독일군 후방을 향한 '철도전쟁'의 씨앗이 그날 뿌려졌다.

스탈린이 신임한 유격대 지휘관으로 '철도전쟁'을 기획해 독일군 후방을 마비시켰다. 1952년 간부국에 올라 후계자로 거론됐으나, 스탈린 사후 실권을 잃고 외교관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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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7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 1939년 서부 벨라루스 병합 관리
  • 1942–1944중앙유격대본부장, '철도전쟁'·'콘체르트' 작전 기획·지휘
  • 1944–1948벨라루스 인민위원회의·각료회의 의장
  • 1948–1953중앙위 서기, 조달장관, 당 간부국원 — 스탈린 말기 급부상
  • 1953–1954소련 초대 문화장관
  • 1954–1955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
  • 1955–1962폴란드·인도·네팔·네덜란드 주재 대사
  • 1965–1978중앙위 부설 사회과학연구소 교수

키릴 세묘노비치 모스칼렌코

Кирилл Семёнович Москаленко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02–1985 ○ 자연사

베리야 체포를 주도하고 부하를 '인민의 적'이라 부른 원수

베리야는 1953년 6월 26일 크렘린의 각료회의와 당 간부회의 합동 회의에서 체포되었다. 흐루쇼프의 회고록은 모스칼렌코가 장교들을 이끌었다고 전하나, 다른 사료는 말렌코프의 책상 버튼 신호로 주코프의 무장 장교들이 들어왔다고 전한다.

그리시노의 우크라이나인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20년 8월 적군에 입대해 제1기병군에서 복무했다. 1941년 5월 제1대전차여단을 시작으로 제15소총군단과 제6기병군단, 이어 제38·제1전차·제1근위·제40군을 차례로 지휘했으며, 드네프르 도하로 1943년 10월 소련 영웅 칭호를 받고 같은 달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제38군을 이끌었다. 1953년 6월 자신이 모은 군인 그룹을 이끌어 베리야 체포를 수행했고, 루덴코와 함께 수사에 참여했으며 12월 특별재판부의 일원이었다. 1955년 소련 원수가 되었고 1960년부터 1962년 4월까지 전략로켓군 총사령관을 지냈다. 1978년 두 번째 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흐루쇼프는 그를 '제3의 모스칼렌코, 기회주의자'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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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22적군 제1기병군 복무, 내전 종군
  • 1939–41핀란드 전쟁, 이후 제1대전차여단장
  • 1942–43제1전차군·제1근위군·제40군 사령관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
  • 1943드네프르 강 도하로 소련 영웅 칭호
  • 1943–45제38군 사령관, 키예프·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해방
  • 1953베리야 체포 주도,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55/1960–62소련 원수, 전략로켓군 총사령관
  • 1978두 번째 소련 영웅 칭호

발레리안 알렉산드로비치 조린

Валериа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Зорин

유엔 안보리에서 쿠바 미사일을 부인한 소련의 냉전 외교관

스티븐슨: "쿠바 미사일을 부인합니까, 예스 오어 노?" 조린: "나는 미국 법정에 서 있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답을 듣게 될 것입니다." 직후 스티븐슨의 보좌관들이 미사일 기지 항공사진을 안보리 회의장으로 들여왔다.

소련의 냉전 외교관으로, 25년간 외무차관을 지내며 체코슬로바키아·서독·프랑스 대사와 유엔 상임대표를 역임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유엔 안보리에서 애들레이 스티븐슨의 추궁에 답변을 거부한 장면으로 냉전 외교사의 상징적 순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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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32콤소몰·피오네르 운동 조직가, 모스크바 당위원회
  • 1941–1945외무인민위원부 근무
  • 1945–1947주체코슬로바키아 소련 대사
  • 1947–1965소련 외무차관 (세 차례 재임)
  • 1949–1952소련 대외정보위원회 위원장
  • 1952–1953, 1960–1963유엔 주재 소련 상임대표
  • 1955–1956주서독 초대 소련 대사
  • 1965–1971주프랑스 소련 대사
  • 1971–1986소련 외무부 특명전권대사

빅토르 게오르기예비치 바카예프

Виктор Георгиевич Бакаев

소련 상선대를 세계적 해운 강국으로 키운 16년 장관

1962년 가을, 바카예프는 '아나디리' 작전의 해상 수송을 진두지휘했다. 쿠바로 향하는 소련 상선들은 미사일과 부대를 은닉한 채 대서양을 횡단했고, 그는 이를 '소련 해운 역사상 가장 복잡한 수송 임무'라고 불렀다.

브랸스크의 노동자 가문에서 태어나 12세에 항만 공장 견습공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1919년 16세로 적군에 입대해 내전에 참가했다. 모스크바 교통기술자대학을 졸업한 뒤 항만 건설과 해상 운송 조직화에 평생을 바쳤으며, 대조국전쟁 중에는 무르만스크 항에서 연합국 군수물자 하역을 총괄하는 국방위원회 전권대표로 활약했다. 1954년 해운부 장관에 오른 뒤 16년간 소련 상선대를 이끌며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기 소련이 세계 최대 상선단 중 하나를 보유한 해운 강국으로 부상하는 토대를 닦았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작전명 '아나디리'의 해상 수송을 조직한 핵심 실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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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5베르댠스크 항만 공장 견습공
  • 1919–1920적군 복무, 러시아 내전 참전
  • 1922–1929모스크바 교통기술자대학 수운학부 수학
  • 1929–1937중앙해운관리국 기사 → 항만중앙관리국장
  • 1937–1942군사수송아카데미·레닌그라드 수운대학 교원
  • 1943–1945국방위원회 전권대표, 무르만스크 항 연합군 화물 하역 총괄
  • 1945–1952해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해운부 차관
  • 1952–1953해운부 제1차관
  • 1953–1954해운·하운부 제1차관 → 각료회의 운수·통신국 부의장
  • 1954–1970소련 해운부 장관
  • 1970–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자연과학·기술사 연구소 연구원

바실 파블로비치 므자바나제

Васил Павлович Мжаванадзе

19년 집권한 그루지야의 보스, 그림자 경제의 대부

1965년 6월, 스탈린 격하가 지나쳤다고 판단한 므자바나제는 스탈린의 고향 고리에 있는 박물관을 다시 열게 하고 스탈린의 말을 인용했다: "우리 당은 검증된 사람에게만 문이 열리는 요새다."

1902년 9월 7일(구력)/9월 20일(신력) 쿠타이시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15년부터 공장에서 일했고, 1924년 붉은 군대에 들어가 1927년 당에 입당했다. 1937년 레닌그라드 군사정치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군사정치위원으로 복무했고, 대조국전쟁 중에는 제42군·제2충격군·제21군 군사평의회 위원을 지냈다. 1953년 9월 20일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로 선출되어 19년간 공화국을 이끌었고, 1957년부터 1972년까지 소련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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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24공장 노동자
  • 1924–37붉은 군대 복무, 1927년 입당
  • 1937–41군사정치위원, 소련-핀란드 전쟁 참전
  • 1941–45대조국전쟁: 레닌그라드 전선·여러 야전군 군사평의회 위원
  • 1945–53키예프·프리카르파티예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
  • 1953–72그루지야 당 중앙위 제1서기
  • 1957–72CPSU 정치국(상임위) 후보위원
  • 1972.9부패 혐의로 해임, 연금 생활

뱅상 앙리 바디

Vincent Badie
정부·행정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902–1989 ○ 자연사

공화국을 지키려 한 급진사회주의자

“공화국 만세, 그래도!”

뱅상 바디는 변호사 출신의 프랑스 급진사회주의 정치인으로, 지방 행정과 의회에서 활동하며 참전군인과 공화국의 권리를 옹호했다. 1940년 7월 그는 헌법 개정 자체에는 열려 있었지만 페탱에게 권력을 넘겨 공화국을 없애는 데는 반대했고, 이를 밝힌 27인 동의안의 발의를 시도한 뒤 전권 부여에 반대표를 던졌다. 비시 당국의 시장직 정지 뒤 레지스탕스에 참여했으며 체포되어 다하우로 deport되었다. 전후에는 다시 의원과 참전군인 담당 장관을 지냈지만 식민 지배와 프랑스의 해외 주둔을 옹호하는 한계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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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몽펠리에 변호사단 변호사
  • 1931–1938에로주 몽펠리에·지냐크 선거구 도의원
  • 1936–1942에로주 하원의원
  • 1938–1941, 1944–1971폴랑 시장
  • 1945임시 자문회의 의원
  • 1946–1958제4공화국 국민의회 의원
  • 1955–1956, 1958참전군인·전쟁 피해자 담당 장관
  • 1957–1958급진사회주의 의원단 의장

존 알렉산더 매콘

John Alexander McCone

쿠바에 소련 미사일이 올 것이라 홀로 경고한 CIA 국장

기습 공격은 미국에 '진주만 오명'을 남길 것이라고 경고하며, 공습 전 카스트로와 흐루쇼프에게 24시간의 사전 경고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사업가이자 공화당원으로, 피그만 침공 실패 후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CIA 국장에 임명되었다. 1962년 여름과 가을,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반입할 것이라고 거듭 경고했으나 정보기관 내부에서 기각당했고, 9월 20일 신혼여행 중 보낸 전문에서 '상상력 있는 분석'을 촉구한 끝에 10월 14일 U-2 정찰기를 명령해 미사일 기지를 발견했다. 케네디 암살 후 존슨 행정부에서도 재임했으나 베트남 확전을 둘러싼 불화로 1965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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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Consolidated Steel Corporation 수석부사장
  • 1937Bechtel-McCone 공동 창업
  • 1941–1945California Shipbuilding Corporation 사장
  • 1950–1951미국 공군 차관
  • 1958–1961미국 원자력위원회 위원장
  • 1961–1965제6대 CIA 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