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초기화

전체 인물 2390명

후세인 쿨미예 아프라

Xuseen Kulmiye Afrax

소말리아 혁명평의회의 지도부

1991년 정권 붕괴 뒤, 그는 다른 하위예 장교들과 함께 모가디슈에서 체포되지도 추방되지도 않았다.

소말리아의 경찰 간부 출신 정치가로 1969년 쿠데타 이후 바레 정권에 참여했다. 1970년 내무장관이 되었고 1971년부터 최고혁명평의회 부의장 중 한 명을 맡았다. 군·경 출신 지도부가 국가 행정을 장악한 구조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상세 이력 보기
  • 1945이탈리아 식민지 경찰에 입대
  • 1950–1954모가디슈 경찰학교 교관·통역, 로마 장교학교 수료
  • 1960아덴 압둘라 오스만 대통령의 부관
  • 1970내무장관 (1974년까지)
  • 1971최고혁명평의회 부의장
  • 1976부통령, 혁명사회당 정치국 위원
  • 1987부총리 겸 국가계획장관
  • 1989국민의회 의장 (1991년까지)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레쿤코프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Рекунков

브레즈네프부터 고르바초프까지 소련 검찰을 이끈 법률가, 사하로프에게 추방령을 전달한 검찰총장

1980년 1월 22일, 레쿤코프는 사하로프 앞에서 최고회의 칙령을 낭독했다: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와 모든 국가 훈장을 박탈하며, 폐쇄도시 고리키로 추방한다.

돈 강 유역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중상을 입은 후 검찰에 투신했다. 로스토프 지역 검사를 거쳐 1976년 소련 검찰 제1부총장, 1981년 루덴코의 후임으로 검찰총장이 되었다. 안드로포프 시기에는 '우즈베크 면화 사건'과 통상부 비리 수사를 진두지휘하며 대규모 반부패 캠페인을 주도했고, 1980년에는 사하로프에게 국가 훈장 박탈과 고리키 추방을 직접 통고했다. 퇴임 후에는 정치적 탄압 피해자 재활 부서에서 일하며 소련 검찰 제도의 복잡한 유산을 몸소 구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5–1946로스토프주 베르흐네돈스코이 지구 검사 보좌관
  • 1947–1952로스토프주 콘스탄티놉스키·아조프 지구 검사
  • 1960–1966브랸스크주 검사
  • 1966–1971보로네시주 검사
  • 1971–1976러시아 SFSR 검찰 제1부검사장
  • 1976–1981소련 검찰 제1부총장
  • 1981–1988소련 검찰총장
  • 1981–1989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79–1989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 1992–1994러시아 연방 검찰청 정치탄압 피해자 재활부 검사

또흐우

Tố Hữu
문학·예술 소속 미확정 베트남 베트남 1920–2002 ○ 실각 1986 · 자연사

혁명을 노래한 시인이자 문예·선전의 경계를 정한 당의 사상 지도자

1985년 화폐 개혁 실패 뒤 민중은 "시인이 경제를 맡고, 장군이 피임 링을 놓는다"고 조롱했다.

식민지 감옥에서 혁명시를 쓰기 시작해 두 차례 항전 내내 민족의 투쟁을 서정으로 노래한, 베트남 혁명시의 기수였다. 1968년부터 중앙선전·문화 부문을 총괄하며 문학이 정치의 도구여야 한다고 보아 작가·지식인에 대한 강경한 통제를 주도했고, 그 이름은 인문·가이팜 사건의 상징이 되었다. 1976년 제4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 뽑혀 통일 뒤 남부의 언론·문화 기관을 단일 국가로 합치는 작업을 감독했고, 부총리까지 올랐으나 1985년 화폐 개혁의 실패 책임으로 실각해 다시 시의 세계로 돌아갔다.

상세 이력 보기
  • 1938인도차이나 공산당 입당
  • 1945투아티엔후에 기폭위원회 위원장
  • 1948베트남 문예협회 부총서기
  • 1954선전부 차관
  • 1968–1982중앙 선전·문화위원회 위원장
  • 1976정치국 후보위원 · 중앙 통일위원회 위원장
  • 1980–1986부총리(각료회의 제1부주석)

너지 벌라주

Nagy Balázs
문학·예술 헝가리 헝가리인 1920–2003 ○ 자연사

노동자평의회를 기록한 망명 역사가

너지가 기록한 10월 31일 결의문에서 노동자평의회는 첫 조항으로 '공장은 노동자의 재산이다'라고 선언했다.

너지 벌라주는 헝가리의 혁명적 사회주의자이자 망명 저술가로, 1956년 혁명에서 노동자평의회가 국가기구와 당 관료제 바깥에서 독자적인 정치·경제 조직을 세운 과정을 기록했다. 그는 11월 4일 이후 부다페스트 중앙노동자평의회의 결성과 파업, 정부와의 협상을 다룬 당사자 기록을 남겼으며, 이 연구는 1961년 브뤼셀에서 프랑스어로 출판되었다. 그의 저술은 노동계급의 자기조직이 혁명의 패배 속에서도 대안적 정치 형태로 작동한 방식과 그 한계를 함께 보여 준다.

상세 이력 보기
  • 1956부다페스트 노동자평의회 운동 참여
  • 1956.11부다페스트 중앙노동자평의회 형성과 저항 기록
  • 1961브뤼셀에서 「부다페스트 중앙노동자평의회의 형성」 프랑스어판 출판
  • 1964「International Socialism」에 부다페스트 중앙노동자평의회 기록 게재
  • 2003사망

니콜라이 그리고리예비치 예고리체프

Николай Григорьевич Егорычев

모스크바 당 보스에서 브레즈네프에게 도전했다가 외교관으로 밀려난 인물

1967년 6월 전원회의 연단에서 브레즈네프의 면전에 '수도의 방공은 충분히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 그 순간, 모스크바 시당위원장으로서의 정치 경력은 끝났다.

니콜라이 예고리체프는 1962년부터 1967년까지 모스크바 시당위원회 제1서기를 지낸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이다. 그의 재임기 모스크바에서는 대규모 주택 건설로 300만 명 이상이 새 보금자리를 얻었고, 그의 주도로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의 무명용사 묘가 조성되었으며 트리움프 개선문이 복원되었다. 1967년 6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모스크바 방공 체계의 취약성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며 브레즈네프 지도부를 정면으로 비판했고, '콤소몰 그룹'(셸레핀 파벌)의 일원으로 간주되던 그 발언 직후 해임되었다. 이후 덴마크 대사(1970~1984)와 아프가니스탄 대사(1988)를 지내며 소련군 철수 시기 외교 업무를 수행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4–1956모스크바 바우만 구당위원회 서기
  • 1956–1960모스크바 바우만 구당위원회 제1서기
  • 1960–1961CPSU 중앙위원회 감찰관
  • 1961–1962모스크바 시당위원회 제2서기
  • 1962–1967모스크바 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70–1984주덴마크 소련 대사
  • 1988주아프가니스탄 소련 대사

카롤 요제프 보이티와

Karol Józef Wojtyła
정부·행정 소속 미확정 폴란드 폴란드인 1920–2005 ○ 자연사

철의 장막 뒤에서 온 세계적 교황

“폴란드의 얼굴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바르샤바에서 성령에게 호소했다.

카롤 요제프 보이티와는 폴란드의 사제이자 철학자였으며, 1978년 요한 바오로 2세로 선출되어 가톨릭교회를 이끌었다. 나치 점령과 국가사회주의 체제를 겪은 경험은 인간의 존엄, 종교의 자유, 민족적 기억을 강조하는 그의 목회와 정치적 언어를 형성했다. 1979년 폴란드 방문에서 약 1,100만 명이 그를 만났고, 그의 존재는 정권 아래 흩어져 있던 사회가 자신을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하도록 도왔다. 그는 연대가 결성될 조건을 만든 여러 요인 가운데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그 운동의 노동자 조직과 정치적 행위자들을 대신한 사람은 아니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6크라쿠프 대교구 사제 서품
  • 1958크라쿠프 보좌주교
  • 1964크라쿠프 대주교
  • 1967추기경
  • 1978제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1979첫 폴란드 사목 방문
  • 1980연대 운동의 출범을 지켜봄
  • 2005선종

야드가르 사디코브나 나스리디노바

Ядгар Садыковна Насриддинова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즈베키스탄 1920–2006 ↓ 퇴임 1974

우즈베크 SSR 출신 민족소비에트 의장

크림 타타르인 인권운동가들을 만난 자리에서, 그녀는 우즈베키스탄에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크림 반도 귀환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우즈베크 공화국 지도부에서 올라와 민족소비에트 의장을 지냈다. 브레즈네프 시대 중앙과 공화국 엘리트의 연결을 보여준다.

상세 이력 보기
  • 1940s–1950s우즈베크 공화국 콤소몰·당·국가 행정에서 성장
  • 1959–1970우즈베크 SSR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
  • 1970–1974민족소비에트 의장, 중앙의 공화국 대표제에서 높은 지위에 오름
  • 1974우즈베크 지도부 교체와 정치적 압박 속에서 퇴임
  • 이후공식 정치의 중심에서 멀어짐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메샤체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Месяцев

조작된 의사 사건을 밝혀낸 관료

1953년 재검토반의 결론은 명확했다. “의사 사건은 조작되었고, 의사들은 무죄이므로 석방해야 한다.”

니콜라이 메샤체프는 전후 소련의 콤소몰·국가기관·방송을 거친 관료로, 정치적 명령과 사실 조사 사이의 긴장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1953년 말렌코프의 지시로 의사 사건과 아바쿠모프 사건을 재검토했고, 의사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신속히 판정하는 데 관여했다. 그는 훗날 스탈린도 생전에 재검토를 지시했다고 회고했지만, 이 주장은 다른 사료와 함께 검토해야 하는 논쟁적 증언으로 남아 있다. 이후 국가 텔레비전·라디오 위원회를 이끌며 오스탄키노 방송센터 건설과 다중 프로그램 방송 확대를 추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1–1945해군 인민위원부·내무인민위원부 특별부·스메르시 수사관
  • 1946–1952전연방 레닌주의 청년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 간부
  • 1953국가보안기관 특별중요사건 수사부, 의사 사건 재검토
  • 1955–1959콤소몰 중앙위원회 선전·선동 담당 서기
  • 1962–1964중국 주재 소련대사관 공사참사관, 공산당 관계 부서 부부장
  • 1964–1970소련 국가텔레비전·라디오방송위원회 위원장
  • 1970–1972오스트레일리아 주재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72–1988사회과학정보연구원 선임연구원·역사학부장

이스라엘 게츨러

ישראל גצלר
학술·연구 독일·이스라엘 폴란드 1920–2012 ○ 자연사

크론시타트 봉기를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최후'로 해석한 역사가

어느 날 오전 11시에 논쟁을 중단해야 했는데, 그가 다섯 시간 뒤 돌아와서는 연결하는 말 한마디 없이 바로 '일곱째로, 레닌은…' 하고 중단된 지점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베를린의 폴란드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나치 시절 시베리아 금광촌을 거쳐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했고, 1971년 이후 히브리대학 교수로 러시아 혁명사를 연구했다. 마르토프 평전(1967)으로 멘셰비키 지도부의 전략적 선택을 조명했으며, 『크론시타트 1917-1921』(1983)에서는 페트로파블롭스크호와 세바스토폴호 승무원의 93.9%가 1917년 이전 입대자임을 함대 명부로 입증해 봉기 참여자들이 '농민 복장의 백위파'가 아니라 혁명의 구주역들이었음을 실증했다. 소련사에서 개인과 집단의 선택이 결정적이었다고 보았으며, 이스라엘에서는 정착촌 반대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8나치에 의해 가족과 함께 폴란드로 추방
  • 1941소련 당국에 의해 시베리아 금광촌으로 이주
  • ~1945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
  • ~1950s애들레이드 대학에서 역사학 학위 취득, 이후 교수 임용
  • ~1960s스탠퍼드대학 후버연구소에서 기록연구
  • 1967『마르토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의 정치적 평전』 출간
  • 1971히브리대학 교수 취임
  • 1983『크론시타트 1917-1921: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운명』 출간
  • 2002『니콜라이 수하노프: 러시아 혁명의 기록자』 출간

보골류브 코초비치

Bogoljub Kočović
학술·연구 유고슬라비아 세르비아·프랑스계 1920–2013 ○ 자연사

전쟁 희생자 수를 다시 계산한 독립 통계학자

1985년 그는 전쟁 손실을 실제 손실과 인구학적 손실로 나누어 제시했다.

보골류브 코초비치는 사라예보 출신의 세르비아계 법률가이자 통계학자로, 전후 유고슬라비아의 인구와 전쟁 손실을 분석했다. 그는 1985년 저서에서 1921년·1931년·1948년 인구조사를 비교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실제 손실을 약 101만 4천 명, 인구학적 손실을 약 198만 5천 명으로 추산했다. 그의 연구는 국가가 제시한 170만 6천 명이라는 수치와 구별되는 독립적 추계로, 전쟁 희생자 수를 둘러싼 역사논쟁의 핵심 자료가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7–1952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 연구 조교
  • 1949파리에서 법학 박사 취득
  • 1956시카고 루스벨트대학교 경제학 석사 취득
  • 1963–1984파리에서 미국 기업의 행정·재무 책임자로 활동
  • 1985『유고슬라비아 제2차 세계대전 희생자』 출간
  • 1997『과학, 민족주의와 선전』 출간
  • 2005『신화의 장례』 출간

클라우디오 파보네

Claudio Pavone
학술·연구 이탈리아 이탈리아인 1920–2016 ○ 자연사

저항의 도덕과 전쟁의 복합성을 해명한 역사가

『내전』에서 그는 저항을 애국전쟁이면서 내전이고 계급전쟁인 투쟁으로 분석했다.

클라우디오 파보네는 이탈리아의 역사가이자 기록관리자로, 파시즘과 저항, 국가기구의 연속성을 연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레지스탕스에 참여한 경험은 그의 역사 인식과 연구 주제에 깊이 반영되었다. 대표작 『내전』은 1943~1945년의 투쟁을 애국전쟁, 이탈리아인 사이의 내전, 계급전쟁이 겹친 과정으로 분석해 저항의 정치적 선택과 도덕적 긴장을 학술 논쟁의 중심에 놓았다. 그는 국가중앙기록보존소의 정비와 이탈리아 국가기록보존소 안내서 편찬에도 기여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3로마대학교 법학 졸업, 레지스탕스 참여
  • 1943–1944PSIUP 소속으로 활동, 체포되어 수감
  • 1949국가기록보존소 공무원
  • 1975–1991피사대학교 현대사 교수
  • 1991『내전』 출간
  • 1994–1995이탈리아 해방운동사 연구소 부소장
  • 1995–1999현대사 연구 이탈리아학회 회장
  • 1993–2016『Parolechiave』 편집 책임

이반 라브렌티예비치 우스티노프

Иван Лаврентьевич Устинов

브레즈네프 시기 군 방첩의 수장

1941년 포위 중 탈출을 이끌며: "동무들, 나는 군 방첩 요원이다! 내가 돌파를 조직할 것이다. 겁먹고 항복하려는 자는 조국이 내게 준 권한으로 사살하겠다."

소련의 군사방첩 지도자. 의료 교육을 받고 1939년 붉은군대에 입대했으며, 독소전 발발 직전 국가보안기관에 배속되어 전선에서 NKVD 특별부서와 스메르시에서 복무했다. 전후에는 주로 소련군 주독 집단군(GSFG)과 극동군관구에서 군 방첩 요원으로 경력을 쌓았고, 1970년 KGB 제3국장에 올라 소련 전군의 특별부서(오소비스트)를 총괄했다. 1973년 게오르기 치네프 KGB 부의장과의 갈등으로 해임된 뒤 다시 GSFG 특별부서장으로 복귀했으며, 1981년 이후 국가계획위원회 안보 고문을 지냈다. 퇴역 후 군 방첩사에 관한 회고록을 저술했고 100세까지 생존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8–1939북우랄 NKVD 교정노동수용소 의료진
  • 1941–1945NKVD 특별부서 · SMERSH 작전요원 (서부·발트·벨로루시 전선)
  • 1951–1957주독 소련군 MGB/MVD/KGB 방첩부서 요직
  • 1958–1963KGB 제6근위전차군 특별부서장
  • 1963–1968극동군관구 KGB 특별부서 부국장 → 국장
  • 1968–1970KGB 제3국 부국장
  • 1970–1973KGB 제3국장 (군 방첩 총괄)
  • 1973–1981주독 소련군 KGB 특별부서장
  • 1981–1991국가계획위원회 안보 고문 (KGB 예비역)

예고르 쿠즈미치 리가초프

Егор Кузьмич Лигачёв

페레스트로이카 안의 보수적 제2서기

1990년 2월 6일 전원회의에서 사퇴 압박을 받은 리가초프는 '지독하게도 일하고 싶다!'고 외쳤다. 그러나 그가 며칠 후 정치국에서 밀려난 것은 아니다. 서기직과 정치국 자리를 잃은 것은 1990년 7월 제28차 당대회에서였다.

1965년부터 1983년까지 톰스크주 제1서기로 17년간 재임하며 석유·가스 채굴을 키우고 스트레제보이와 케드로비 신도시를 세웠다. 1979년 오비강이 콜파셰보 야르에서 대숙청 희생자 집단매장지를 드러내자 주 당국은 유골과 흔적을 없애려 했고, 그는 관여를 부인했다. 1983년 4월 안드로포프의 발탁으로 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이 되었고, 그해 12월 서기, 1985년 4월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다. 1985~1988년 사실상 제2인자로서 개혁 초기를 뒷받침하고 반알코올 캠페인을 이끌었으며, 훗날 그 전략이 잘못이었다고 인정했다. 1990년 7월 중앙위 서기직과 정치국 자리를 잃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83–85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
  • 1985–90제2서기, 페레스트로이카 내부 보수파
  • 1990제28차 당대회에서 실각

조지 프랫 슐츠

George Shultz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20–2021 ○ 자연사

레이건 곁에서 고르바초프와의 대화를 밀어붙여 냉전 종식을 이끈 국무장관

슐츠는 레이건 부부와의 저녁 식사에서 소련 지도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듣고 깨달았다. '이 사람은 공산당 지도자와 대화를 해본 적이 없고, 몹시 하고 싶어 하는구나.'

조지 슐츠는 노동·예산·재무·국무의 4개 부처 장관을 모두 지낸 두 미국인 중 하나로, 레이건 행정부에서 6년 반 동안 국무장관을 맡아 대소 외교의 방향을 다시 썼다. 국방장관 와인버거와 CIA 국장 케이시가 협상을 반대하는 가운데서도 슐츠는 레이건이 고르바초프와 직접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제네바(1985)와 레이캬비크(1986) 정상회담의 외교적 토대를 놓았다. 그 결과 1987년 INF 조약으로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 전체가 폐기되었고, 슐츠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 동유럽에 대한 지배를 포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냉전의 종식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의 회고록 『격랑과 승리』는 1980년대 외교사의 핵심 사료로 남아 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0뉴욕시 출생, 뉴저지주 엥글우드에서 성장
  • 1942–1945해병대 장교, 앙가우르 전투 참전
  • 1969–1974노동장관 → OMB 국장 → 재무장관, 브레턴우즈 체제 종료
  • 1974–1982벡텔 사장, 중동 건설 사업 확장
  • 1982–1989국무장관, 제네바·레이캬비크 정상회담, INF 조약
  • 1989–2021스탠퍼드 후버연구소 선임연구원, 핵군축 및 탄소세 운동
  • 1993회고록 『격랑과 승리』(Turmoil and Triumph) 출간

게일 할보르센

Gail Halvorsen
군사·지휘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계 1920–2022 ○ 자연사

선의의 행동을 국제적 상징으로 만든 공군 조종사

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비행기를 알리는 방법을 묻자 날개를 흔들겠다고 약속했다.

게일 할보르센은 미국 공군 조종사로, 1948년 베를린 공수작전에 참여해 서베를린의 생존을 뒷받침한 수송 임무를 수행했다. 템펠호프 공항 철책가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껌을 건넨 뒤 손수건 낙하산으로 사탕을 떨어뜨린 일은 Operation Little Vittles로 확대되어 공수작전의 물자 수송에 인간적 얼굴을 더했다. 이 자발적 행동은 미군의 규정과 냉전 선전의 경계에 놓였지만, 베를린 주민과 미국 어린이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며 서방의 정치적 호소력을 키웠다. 그는 이후에도 공군의 항공·우주 개발과 베를린 템펠호프 지휘를 맡았고 1974년 대령으로 퇴역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2미 육군항공대 입대, 조종사 훈련
  • 1948–1949베를린 공수작전 C-54 조종사, Operation Little Vittles 창시
  • 1952–1957라이트 항공개발센터 항공화물기 연구개발 담당
  • 1958–1962공군 체계사령부 우주체계 부문 근무
  • 1965–1969공군 본부 우주·기술국, 유인 재사용 우주선 계획 담당
  • 1970–1972베를린 템펠호프 공항 제7350 공군기지단 지휘관
  • 1974미 공군 대령으로 퇴역

바실리 이오시포비치 스탈린

Василий Иосифович Сталин
문학·예술 소련 그루지야 1921–1962 ○ 알코올 중독

공군 중장이자 소련 아이스하키의 창시자, 지도자의 아들

1953년 3월 아버지의 장례식에 술에 취해 나타난 바실리는 '그들이 아버지를 독살했다'고 외쳤다.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그는 체포되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차남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전투기 조종사로서 27회의 전투 출격을 수행하고 공군 중장까지 올랐다. 1948년 모스크바 군관구 공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1952년까지 재임했으며, 24세에 소련군 최연소 소장이 되는 등 급속한 승진은 부계의 후원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순한 '지도자의 아들'을 넘어, 소련 아이스하키 연맹 초대 회장으로서 VVS 모스크바 팀을 창단하고 아나톨리 타라소프를 초대 감독으로 영입하는 등 소련 하키의 제도적 기반을 다진 스포츠 행정가이기도 했다. 1953년 아버지의 사망 직후 반소비에트 선동 혐의로 체포되어 8년형을 선고받았으며, 블라디미르 중앙교도소에서 가명으로 복역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0카친 군사항공학교 졸업, 공군 소위 임관
  • 1941–1942제16전투항공연대에서 복무, 전투 출격 수행
  • 1943제32근위전투항공연대 연대장
  • 1944–1945제3근위전투항공사단 · 제286전투항공사단 사단장
  • 1946항공 소장 진급, 제1근위전투항공군단장
  • 1948–1952모스크바 군관구 공군 사령관, 항공 중장 진급(1949)
  • 1953체포, 반소비에트 선동 혐의로 8년형 선고
  • 1960–1962석방 후 재수감, 카잔으로 유배,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

테파리 벤티

ተፈሪ በንቲ
정부·행정 에티오피아 국가기관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 1921–1977 ✕ 군부 숙청으로 피살

데르그의 초기 의장

1975년 7월 그는 '구체제를 거부한 모든 세력'의 '밑으로부터' 세워지는 통일전선을 제안했고, 멩기스투 진영은 이 전략을 반대했다.

1974년 말 에티오피아 데르그 의장이 된 군인이다. 토지와 주요 산업의 국유화가 진행된 시기에 국가원수를 맡았으나 군부 내부 권력투쟁을 통제하지 못했다. 1977년 2월 살해됐고 멩기스투가 지도부의 우위를 굳혔다.

상세 이력 보기
  • 1941에티오피아 육군 입대
  • 1967워싱턴 주재 무관
  • 1974제4사단 준장
  • 1974–1977데르그(PMAC) 의장 겸 국가원수

바딤 스테파노비치 티쿠노프

Вадим Степанович Тикунов

흐루쇼프기 RSFSR 경찰을 이끈 셸레핀계 내무장관

「나는 곧바로 알아챘다 — 더 가까운 사람을 찾고 있다는 걸. 물론 그랬다. 개인적으로 충성하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1966년 연방 MOOP 수장 자리에서 밀려난 뒤.

바딤 티쿠노프는 셸레핀의 콤소몰 인맥을 타고 KGB 부의장(1959~1961)을 거쳐 러시아공화국 내무장관(1961~1966)을 지낸 소비에트 국가보안·내무 관료다. 흐루쇼프가 연방 MVD를 폐지한 공백기 속에서, 그는 RSFSR 치안 체계를 실질적으로 이끌며 경찰의 날 제정, 무임승차권, 그리고 소련 경찰 사상 처음으로 고무곤봉·수갑·최루가스 도입을 관철했다. 1966년 브레즈네프가 연방 MOOP을 부활시키며 측근 니콜라이 셸로코프를 수장으로 앉히자 밀려났고, 이후 상부볼타·카메룬 대사로 좌천되었으며 재임 중 야운데에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2–1947콤소몰 악퇴빈스크 지역위원회 서기 → 에스토니아 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
  • 1947–1952블라디미르주 콤소몰 제1서기 → 블라디미르 시·주 당위원회 서기
  • 1952–1959CPSU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 국가보안 담당 섹터장 → 부부장
  • 1959–1961소련 KGB 부의장
  • 1961–1966RSFSR 내무장관 (1962년부터 공공질서수호장관)
  • 1967–1969CPSU 중앙위원회 해외여행위원회 위원
  • 1969–1974주 루마니아 소련대사관 참사관
  • 1974–1978주 상부볼타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78–1980주 카메룬 소련 특명전권대사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이노젬체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Иноземцев
학술·연구 소련 러시아 1921–1982 ○ 자연사

브레즈네프 데탕트의 지적 설계자

「전쟁은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지난 6년의 군대 생활에서 겪은 모든 것은 흥미롭고 창조적이며 아름다운 삶을 위한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 전후 출간된 『전선 일기』에서.

소련의 국제관계학자이자 역사가. 1966년부터 1982년 사망할 때까지 소련 최고의 외교정책 싱크탱크인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 소장을 지냈다. 그의 연구소는 소련의 군축 협상 입장을 뒷받침하는 비밀 분석, 서방 경제에 대한 예측, 그리고 '선진사회주의' 외교정책의 이론적 토대를 생산했다. 1981년부터 CPSU 중앙위원회 정위원으로서 데탕트 시기 소련 외교정책의 실질적 방향을 결정하는 데 직접 관여했으며, 서방과의 건설적 관계의 필요성을 당 지도부에 일관되게 주장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2–1957『꼬무니스트』 국제부 컨설턴트
  • 1957–1959IMEMO 국제관계 부문장
  • 1959–1961IMEMO 부소장
  • 1961–1966『쁘라우다』 부주필
  • 1966–1982IMEMO 소장
  • 1971–1981CPSU 중앙위 후보위원
  • 1981–1982CPSU 중앙위원
  • 1975–1982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

안드레이 드미트리예비치 사하로프

Андрей Дмитриевич Сахар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1–1989 → 유형 1980

수소폭탄을 만들고, 체제에 등을 돌린 물리학자

1986년 12월 15일 고리키의 아파트에 전화가 놓였고, 다음 날 고르바초프가 직접 전화했다. "모스크바로 돌아오십시오." 사하로프는 감사 인사와 동시에 정치범 석방을 꺼냈다. 7년 가까운 유형이 끝났지만 그는 양심의 의제를 내려놓지 않았다.

소련 수소폭탄의 아버지이자, 그 특권을 내려놓은 양심. 결정적 이탈은 1967년 7월 21일 미사일방어 배치에 반대한 비밀 서한과, 1968년 5월 완성되어 지하 출판으로 유통된 「진보, 평화공존, 지적 자유에 관한 성찰」을 거치며 이루어졌고, 그 후 무기 연구에서 배제되었다. 그해 8월 체코슬로바키아 진입도 비판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비판하다 1980년 고리키로 유형당했다. 1986년 고르바초프의 전화 한 통으로 돌아와, 인민대의원 자격으로 연단에서 싸우다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8–53수소폭탄 개발 참여, 1953년 실험 성공
  • 195332세에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61대기권 실험 반대를 흐루쇼프에게 직접 진언
  • 1968『진보, 평화공존, 지적 자유』 지하 유통
  • 1975노벨평화상(출국 불허, 아내가 대리 수상)
  • 1980–86고리키 유형
  • 1989인민대의원, 12월 사망

프라하의 봄을 끝장내기 위해 소련에 개입을 요청한 초청장에 서명한 KSČ 강경파

1968년 8월 21일 아침, 두브체크는 '인드라 동지가 이끄는 노동자·농민 정부의 이름으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인드라의 내각은 단 하루도 현실이 되지 못했고, 그가 서명한 초청장은 1990년대에야 공개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네오스탈린주의 정치인.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보수파 핵심으로, 바르샤바조약군 개입을 요청한 '초청 편지'에 서명한 5인 중 하나였으며 침공 직후 소련의 후원 아래 '노동자·농민 정부' 수반으로 내정되었다. 후사크 체제에서도 정치국원과 연방의회 의장으로서 '정상화' 숙청을 추진했고, 1989년 벨벳 혁명으로 축출되어 이듬해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7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입당
  • 1945–56즐린(고트발도프) 지역당 서기
  • 1960–62KSČ 중앙위 계획부장
  • 1962–63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 1963–68체코슬로바키아 교통장관
  • 1968.8'초청 편지' 서명, '노동자·농민 정부' 수반 내정
  • 1968–71KSČ 중앙위 서기
  • 1971–89KSČ 정치국원, 연방의회 의장

알렉산드르 두브체크

Alexander Dubček

인간의 얼굴을 꿈꾸다 산림청으로 보내진 사람

1968년 8월 21일 새벽, 소련군 장교들이 두브체크의 사무실로 들이닥쳐 전화선을 끊고 수갑을 채웠다. 한 장교가 말했다: '필요하다면 체코인 백만 명을 죽여서라도 반혁명을 끝장낼 것이다.'

프라하의 봄을 이끈 슬로바키아 개혁공산주의자. 소련에서 소년기를 보내고 1968년 검열 폐지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추진했으나,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후 실각해 산림청 직원으로 15년을 보냈다. 1989년 하벨과 함께 발코니에 다시 섰다.

상세 이력 보기
  • 1925–38소련 이주 노동자 가정에서 성장
  • 1944슬로바키아 민족봉기 참가
  • 1963–68슬로바키아 당 제1서기
  • 1968.1체코슬로바키아 당 제1서기: 프라하의 봄
  • 1968.8모스크바로 연행, 의정서 서명 강요
  • 1969–70해임, 터키 대사를 거쳐 산림청으로
  • 1989.12연방의회 의장으로 복귀

올드르지흐 체르니크

Oldřich Černík

프라하의 봄을 이끈 광부 출신 기술관료 총리

1968년 7월, 「2000개의 말」 선언을 둘러싼 논란 속에서 체르니크는 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선언은 결코 반혁명의 표현이 아니라 당의 한 분파의 의견일 뿐이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공산주의 총리(1968~1970). 광산 노동자 출신 기술관료로, 연료·에너지 장관과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을 거쳐 1968년 4월 행동강령을 채택한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총리로 임명되었다. 두브체크와 함께 프라하의 봄을 이끌었고, 8월 침공 후 소련에 연행되어 모스크바 의정서에 서명했다. 귀국 후 개혁 지속을 약속했으나, 후사크 체제 아래 1970년 해임·제명되고 20년간 연구소 부소장으로 밀려났다.

상세 이력 보기
  • 1921오스트라바 광산 노동자 가정에서 출생, 선반공으로 일함
  • 1945~49KSČ 입당, 오스트라바 고등광산학교 졸업
  • 1956~60KSČ 중앙위원회 서기
  • 1960~63연료·에너지 장관
  • 1963~68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 1968.4~70.1체코슬로바키아 총리: 행동강령, 프라하의 봄, 모스크바 의정서
  • 1970~71해임, KSČ 제명
  • 1970~89프라하 연구소 경제 부소장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비노그라도프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Виноградов

1973년 전쟁과 이란 혁명을 내부에서 목격한 소련 중동 외교관

1979년 6월, 호메이니는 비노그라도프를 불러 직접 경고했다. "우리는 당신들이 아프가니스탄 무슬림들에게 가하는 일을 보고 있다. 소련은 이슬람에 적대적이다."

무역 외교에서 출발해 브레즈네프 시대 소련 중동 외교의 핵심 현장을 두루 거친 외교관이다. 주일 대사와 외무차관을 지낸 뒤, 1970년 이집트 대사로 부임하여 나세르 말기부터 사다트의 서방 전환기까지 카이로에 주재했고, 1973년 10월 전쟁 당시 소련의 대응을 현장에서 조율했다. 1977년 이란 대사로 테헤란에 도착한 지 2년 만에 팔레비 왕조의 붕괴와 이슬람 혁명을 목격했으며, 호메이니와의 긴장된 대면을 통해 혁명 정권과 소련의 복잡한 관계를 관리했다. 이후 러시아공화국 외무장관으로 8년간 재임하며 소련 외교의 제도적 연속성을 유지했고, 퇴임 후에도 중동 평화정착을 위한 비공식 채널을 이끌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9–1943붉은 군대 복무
  • 1948–1950주영 소련 무역대표부 부장
  • 1950–1952주영 소련 무역대표부 부대표
  • 1952–1956대외무역부 대서방무역국 부국장
  • 1956–1962대외무역부 대서방무역국장
  • 1962–1967주일 소련 대사
  • 1967–1970소련 외무차관
  • 1970–1974주이집트 소련 대사
  • 1974–1977소련 외무부 특명대사
  • 1977–1982주이란 소련 대사
  • 1982–1990러시아공화국 외무장관
  • 1990–1997모스크바국제관계대학 강의, 중동평화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