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제5~7장)
인물블라디미르 레닌, 안톤 판네쿠크, 로만 말리놉스키, 미하일 로댠코, 카를 레기엔, 아서 헨더슨, 레옹 주오, 세르게이 주바토프, 이반 바부시킨, 아마데오 보르디가, 자친토 메노티 세라티, 필리포 투라티,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 프리드리히 엥겔스, 카를 마르크스, 요제프 디츠겐, 니콜라이 유데니치, 안톤 데니킨, 알렉산드르 콜차크,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실비아 팽크허스트 용어좌익 공산주의, 평의회 공산주의, 코민테른, 제2인터내셔널, 제헌의회, 독일 공산당 (KPD), 독일 독립사회민주당 (USPD),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건코민테른의 창설 학습사회주의의 분기 · 17장 공산주의자는 노동조합과 의회를 떠나야 할까?
V. 독일의 「좌익」 공산주의: 지도자, 당, 계급, 대중
이제 우리가 이야기해야 할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좌익」이 아니라, 내가 잘못 알고 있지 않다면, 「원칙적 반대파」라고 부른다[가]. 그러나 그들이 「좌익 소아병」의 징후에 꼭 들어맞는다는 것은 앞으로의 서술에서 드러날 것이다.
이 반대파의 관점에 선 소책자 『독일 공산당(스파르타쿠스단)의 분열』은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지역 그룹」이 펴낸 것인데, 이 반대파 견해의 핵심을 매우 선명하고 정확하고 명료하고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다. 독자가 그 핵심을 알기에는 몇 대목의 인용으로 충분할 것이다.
“공산당은 가장 단호한 계급투쟁의 당이다…”
“…정치적으로 이 과도기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과도기)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시기이다…”
“…문제가 생긴다. 누가 독재의 담당자여야 하는가, 공산당인가 프롤레타리아 계급인가?.. 원칙적으로 공산당의 독재를 추구해야 하는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를 추구해야 하는가?..”
(인용문의 강조는 모두 원문의 것이다.)
이어서 소책자의 필자는 독일 공산당 「중앙」이 독일 독립사회민주당과의 연립을 꾀하고 있으며, 의회제를 포함한 “모든 정치적 수단을 원칙적으로 인정하는 문제”를 이 「중앙」이 내놓은 것은 독립파와 연립하려는 진짜 주된 의도를 가리기 위해서일 뿐이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소책자는 이렇게 이어진다.
“반대파는 다른 길을 택했다. 반대파는 공산당의 지배와 당의 독재 문제는 전술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견이다. 어쨌든 공산당의 지배는 모든 당 지배의 마지막 형태이다. 원칙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를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당의 모든 조치, 조직, 투쟁 형태, 전략과 전술은 이것에 맞추어져야 한다. 따라서 다른 당과의 모든 타협, 역사적·정치적으로 낡은 의회제 투쟁 형태로의 모든 복귀, 모든 기회주의적 책략과 협조 정책을 아주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특유한 프롤레타리아적 혁명 투쟁 방법을 힘주어 강조해야 한다. 그리고 공산당의 지도 아래 혁명 투쟁에 나서야 할 가장 넓은 프롤레타리아 계층과 집단을 끌어들이려면, 가장 넓은 기반과 가장 넓은 틀을 지닌 새로운 조직 형태를 만들어야 한다. 모든 혁명적 분자가 모이는 이 자리가 공장 조직을 기반으로 세워진 노동자 연합이다. ‘노동조합에서 나오라!’는 구호를 따른 모든 노동자가 여기에 모여야 한다. 여기서 싸우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장 넓은 전투 대열로 형성된다. 가입에는 계급투쟁, 소비에트 체제, 독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밖의 모든 것, 곧 싸우는 대중의 정치 교육과 투쟁 속의 정치적 방향 제시는 노동자 연합 바깥에 서 있는 공산당의 과제이다…”
“…그러므로 이제 두 공산당이 서로 맞서 있다.
하나는 지도자의 당으로, 혁명 투쟁을 위로부터 조직하고 지휘하려 하며, 타협과 의회제를 받아들여 자신들이 연립정부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그 연립정부의 손에 독재가 있게 하려 한다.
다른 하나는 대중의 당으로, 혁명 투쟁이 아래로부터 솟구치기를 기다리며, 이 투쟁에 대해서는 목표에 곧바로 이르는 단 하나의 방법만을 알고 쓰고, 모든 의회적·기회주의적 방법을 거부한다. 이 유일한 방법은 부르주아지를 무조건 타도하고, 그 뒤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를 세우는 방법이다…”
“…저쪽은 지도자의 독재, 이쪽은 대중의 독재! 이것이 우리의 구호다.”
이것이 독일 공산당 안의 반대파 견해를 특징짓는 가장 본질적인 명제들이다.
1903년부터 볼셰비즘의 발전을 의식적으로 겪었거나 가까이에서 지켜본 볼셰비키라면 누구나 이 논의를 읽자마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무슨 낡고 오래 익숙한 잡동사니인가! 이 무슨 ‘좌익’ 유치함인가!”
그러나 위의 논의를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자.
“당의 독재냐 계급의 독재냐? 지도자의 독재(당)냐 대중의 독재(당)냐?”라는 문제 설정 하나만으로도 사고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져나올 길 없이 뒤엉켜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무언가 아주 특별한 것을 지어내려고 애쓰다가, 지나치게 머리를 굴린 나머지 우스꽝스러워진다. 누구나 알다시피 대중은 계급으로 나뉜다. 대중과 계급을 맞세울 수 있는 것은 사회적 생산 체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나뉘지 않은 대다수 일반을, 사회적 생산 체계에서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는 범주들과 맞세울 때뿐이다. 계급은 보통,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적어도 오늘날의 문명국에서는 정당이 이끈다. 정당은 일반적으로 가장 권위 있고 영향력 있고 경험 많은 사람들, 가장 책임 있는 자리에 선출되어 지도자라고 불리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다소간 안정된 집단이 운영한다. 이것은 모두 기초다. 모두 단순하고 명백하다. 그런데 왜 이 대신에 무슨 횡설수설이, 무슨 새로운 볼라퓌크[나]가 필요해졌는가? 한편으로는 당이 합법과 비합법 상태를 빠르게 오가면서 지도자, 당, 계급 사이의 보통의, 정상적인, 단순한 관계가 흐트러지는 어려운 처지에 빠져 사람들이 혼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독일에서는 다른 유럽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합법성에, 정기 당대회를 통한 「지도자」의 자유롭고 정규적인 선출에, 의회 선거와 집회와 언론과 노동조합 및 기타 단체의 분위기 등으로 당의 계급 구성을 편리하게 점검하는 일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혁명의 격렬한 진행과 내전의 전개 때문에 이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합법과 비합법을 빠르게 오가고 둘을 결합하며 「지도자 그룹」을 골라내거나 만들거나 지키는 「불편하고」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넘어가야 했을 때, 사람들은 당황하여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지어내기 시작했다. 아마도 특별히 특권적이고 특별히 안정된 합법 상태의 전통과 조건을 지닌 작은 나라에 태어나는 불행을 겪어 합법과 비합법 상태의 교체를 전혀 보지 못한 네덜란드 공산당의 몇몇 당원들[다]이 스스로 혼란에 빠지고 당황하여 이 터무니없는 발상에 힘을 보탰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과 「지도자」에 관한, 요즘 「유행하는」 낱말을 생각 없이 맥락 없이 쓰는 것이 눈에 띈다. 사람들은 「지도자」에 대한 공격과 「지도자」를 「대중」에 맞세우는 말을 많이 듣고 단단히 외웠지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 보고 스스로 사태를 밝혀 보지는 못했다.
「지도자」와 「대중」의 괴리는 제국주의 전쟁 말기와 그 뒤에 모든 나라에서 특히 뚜렷하고 날카롭게 드러났다. 이 현상의 근본 원인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52~1892년에 영국을 예로 들어 여러 차례 설명했다. 영국의 독점적 지위는 반쯤 소시민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노동 귀족」을 「대중」에게서 떼어 냈다. 이 노동 귀족의 지도자들은 늘 부르주아지 편으로 넘어갔고, 직접 또는 간접으로 부르주아지에게 먹여 살려졌다. 마르크스는 그들을 공공연히 배신자로 낙인찍어 이 무리의 영예로운 증오를 샀다. 최신(20세기) 제국주의는 몇몇 선진국에 독점적 특권의 지위를 만들어 주었고, 이를 토대로 제2인터내셔널 어디서나 자기 직업과 노동 귀족이라는 자기 계층의 이익을 지키는 배신자 지도자, 기회주의자, 사회배외주의자의 유형이 나타났다. 기회주의 정당들은 「대중」, 곧 근로자의 가장 넓은 층, 그 다수, 가장 낮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이 악과 싸우지 않고는, 기회주의적이고 사회주의를 배신한 지도자들을 폭로하고 망신 주고 쫓아내지 않고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불가능하다. 제3인터내셔널이 바로 이 정책을 펴 왔다.
그렇다고 해서 대중의 독재를 지도자의 독재와 일반적으로 맞세우는 데까지 이르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터무니없음이고 어리석음이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실제로는 단순한 일에 대해 모든 문명인과 같은 상식적 견해를 지닌 옛 지도자 대신에 (「지도자 타도」라는 구호를 내걸고) 터무니없는 헛소리와 뒤죽박죽을 말하는 새 지도자를 내세운다는 점이다. 독일의 라우펜베르크, 볼프하임, 호르너, 카를 슈뢰더, 프리드리히 벤델, 카를 에를러[1]가 그런 사람들이다. 이 마지막 사람이 문제를 「심화」하여 정당 일반이 필요 없고 「부르주아적」이라고 선언하려는 시도는 이미 터무니없음의 헤라클레스의 기둥이어서 그저 두 손을 들 수밖에 없다. 참으로 그렇다. 작은 잘못도 고집하고, 깊이 있게 정당화하고, 「끝까지 밀고 나가면」 언제나 엄청나게 큰 잘못이 될 수 있다.
당파성과 당 규율의 부정, 이것이 반대파에게서 나온 결론이다. 그리고 이것은 부르주아지를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를 완전히 무장 해제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바로 소부르주아적 산만함, 불안정, 끈기 없음, 단결하지 못함, 질서 있게 행동하지 못함과 같은 것이며, 이것을 너그럽게 봐주면 어떤 프롤레타리아 혁명 운동도 반드시 망하게 된다. 공산주의의 관점에서 당파성을 부정하는 것은 (독일에서) 자본주의 붕괴의 전야에서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도 중간 단계도 아닌 높은 단계로 뛰어오르는 것이다. 우리 러시아는 (부르주아지를 타도한 지 3년째에)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곧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로 넘어가는 첫걸음을 겪고 있다. 계급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쟁취한 뒤에도 어디서나 여러 해 동안 남아 있었고 남아 있을 것이다. 농민이 없는(그래도 작은 소유자들은 있다!) 영국에서라면 아마 그 기간이 더 짧을지도 모른다. 계급을 없앤다는 것은 지주와 자본가를 쫓아내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비교적 쉽게 해냈다. 그것은 소상품 생산자를 없애는 것이기도 한데, 그들은 쫓아낼 수 없고 억누를 수 없으며, 그들과는 함께 지내야 한다. 그들은 아주 길고 느리고 신중한 조직 사업으로만 개조하고 재교육할 수 있다(그리고 해야 한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사방에서 소부르주아적 자연발생성으로 둘러싸고, 그것을 스며들게 하고, 그것으로 타락시키며, 프롤레타리아트 안에서 소부르주아적 무기력, 분산, 개인주의, 열광에서 낙담으로의 동요를 끊임없이 되살린다. 이에 맞서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자 역할(이것이 그 주된 역할이다)을 올바르게, 성공적으로, 승리를 거두며 수행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정당 안에 가장 엄격한 중앙집권과 규율이 필요하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낡은 사회의 세력과 전통에 맞선 끈질긴 투쟁, 피를 흘리는 투쟁이자 피를 흘리지 않는 투쟁, 폭력적 투쟁이자 평화적 투쟁, 군사적 투쟁이자 경제적 투쟁, 교육적 투쟁이자 행정적 투쟁이다. 수백만, 수천만 사람들의 습관의 힘은 가장 무서운 힘이다. 투쟁 속에서 단련된 강철 같은 당 없이는, 그 계급 안의 정직한 모든 사람의 신뢰를 받는 당 없이는, 대중의 분위기를 살피고 그것에 영향을 줄 줄 아는 당 없이는 이런 투쟁을 성공적으로 해 나갈 수 없다. 거대하게 집중된 부르주아지를 이기는 것은 수백만, 수백만의 작은 소유자들을 「이기는」 것보다 천 배나 쉽다. 그런데 그들은 일상적이고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고 붙잡을 수 없는, 해체하는 활동으로 부르주아지에게 필요한 바로 그 결과, 부르주아지를 복구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프롤레타리아트 당의 강철 같은 규율을 조금이라도 약하게 하는 사람은 (특히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시기에) 사실상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 부르주아지를 돕는 것이다.
지도자, 당, 계급, 대중의 문제와 나란히 「반동적」 노동조합의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 당의 경험에 근거하여 몇 가지 맺음말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리 당에서는 「지도자의 독재」에 대한 공격이 언제나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첫 공격은 1895년, 아직 형식상 당이 없었지만 페테르부르크에서 중앙 그룹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지구 그룹들의 지도를 떠맡아야 했을 때였다. 우리 당 제9차 대회(1920년 4월)에서도 「지도자의 독재」, 「과두정」 따위에 반대하는 작은 반대파가 있었다. 그러니 독일인들의 「좌익 공산주의」라는 「소아병」에는 놀랄 것도, 새로운 것도, 무서운 것도 없다. 이 병은 위험 없이 지나가고, 앓고 나면 몸이 오히려 더 튼튼해진다. 다른 한편으로, 합법 활동과 비합법 활동의 빠른 교체는 바로 참모부를, 바로 지도자를 특별히 「숨기고」 특별히 비밀로 지켜야 할 필요와 결부되어 우리에게 때로 매우 위험한 현상을 낳았다. 가장 나빴던 것은 1912년에 밀정 말리놉스키가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 들어온 일이었다. 그는 가장 훌륭하고 헌신적인 동지 수십, 수십 명을 넘겨 징역을 살게 했고 그 가운데 많은 사람의 죽음을 앞당겼다. 그가 더 큰 해를 끼치지 못한 것은 우리가 합법 활동과 비합법 활동의 관계를 올바르게 세워 두었기 때문이다. 말리놉스키는 우리의 신뢰를 얻기 위해 당 중앙위원이자 두마 의원으로서 합법 일간지를 내는 일을 도와야 했다. 이 신문들은 차리즘 아래에서도 멘셰비키의 기회주의와 싸우고 적절히 위장된 형태로 볼셰비즘의 기초를 선전할 줄 알았다. 말리놉스키는 한 손으로는 볼셰비즘의 가장 훌륭한 활동가 수십, 수십 명을 징역과 죽음으로 보내면서, 다른 손으로는 합법 언론을 통해 수만, 수만 명의 새 볼셰비키를 기르는 일을 도와야 했다. 반동적 노동조합에서 혁명 활동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과제 앞에 선 독일(그리고 영국과 미국, 프랑스와 이탈리아) 동지들은 이 사실을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좋을 것이다[2].
많은 나라에서, 가장 선진적인 나라들을 포함하여, 부르주아지는 지금 틀림없이 공산당에 밀정을 보내고 있고 앞으로도 보낼 것이다. 이 위험과 싸우는 수단의 하나는 비합법 활동과 합법 활동을 능숙하게 결합하는 것이다.
VI. 혁명가는 반동적 노동조합에서 일해야 하는가?
독일의 「좌익」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무조건 부정이라는 것을 이미 결론 난 일로 여긴다. 그들은 「반동적」, 「반혁명적」 노동조합에 대한 웅변과 분노의 외침만으로 (이것이 K. 호르너에게서 특히 「묵직하고」 특히 어리석게 나타난다) 혁명가와 공산주의자가 황색의, 사회배외주의적인, 협조주의적인, 레기엔파의, 반혁명적인 노동조합에서 일하는 것이 필요 없을 뿐 아니라 허용될 수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독일 「좌익」이 이 전술의 혁명성을 아무리 확신하더라도, 실제로 그것은 근본부터 잘못되었고 공허한 문구 말고는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나는 우리의 경험에서 시작하겠다. 볼셰비즘의 역사와 현재 전술에서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고 일반적으로 의의가 있으며 일반적으로 지켜야 할 것을 서유럽에 적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 글의 전체 구상에 맞추어서다.
지도자, 당, 계급, 대중의 상호 관계, 그리고 그와 함께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그 당이 노동조합과 맺는 관계는 지금 우리나라에서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독재는 소비에트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가 수행하며, 프롤레타리아트를 이끄는 것은 볼셰비키 공산당이다. 지난 당대회(1920년 4월)의 자료에 따르면 당원은 61만 1천 명이다. 당원 수는 10월 혁명 전에도 후에도 크게 오르내렸고, 1918년과 1919년에도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 우리는 당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집권당에는 반드시 출세주의자와 협잡꾼이 달라붙으려 하는데, 그들은 총살당해 마땅할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당의 문을 넓게 연 것은 (노동자와 농민에게만) 유데니치가 페테르부르크에서 몇 베르스타 앞에 있고 데니킨이 오룔(모스크바에서 약 350베르스타)에 있던 때(1919년 겨울), 곧 소비에트 공화국이 절망적이고 치명적인 위험에 처해 있어서 모험주의자, 출세주의자, 협잡꾼, 그리고 대체로 지조 없는 사람들이 공산주의자에 합류해 봐야 유리한 출세를 기대할 수 없었던(오히려 교수대와 고문을 각오해야 했던) 때였다. 해마다 대회를 여는(지난 대회는 당원 1천 명당 대의원 1명) 당을 이끄는 것은 대회에서 선출된 19명의 중앙위원회이며, 모스크바의 일상 업무는 그보다 더 좁은 합의체, 곧 이른바 「조직국」과 「정치국」이 맡아야 한다. 이 두 국은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각각 중앙위원 5명으로 선출된다. 그러니 그야말로 진짜 「과두정」이 되는 셈이다. 우리 공화국에서는 어떤 국가 기관도 당 중앙위원회의 지도적 지시 없이 중요한 정치 문제나 조직 문제를 하나도 결정하지 않는다.
당은 그 활동에서 노동조합에 직접 기대고 있다. 지난 대회(1920년 4월)의 자료에 따르면 노동조합원은 지금 400만 명이 넘으며, 노동조합은 형식상 당에 속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대다수 조합의 지도 기관 모두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물론 전러시아 노동조합의 중앙, 곧 전러시아 노동조합 중앙평의회가 공산주의자로 이루어져 있고 당의 모든 지령을 수행한다. 대체로 보아, 형식상 공산주의적이지 않은, 유연하고 비교적 넓으며 매우 강력한 프롤레타리아 기구가 생겨났고, 당은 이 기구를 통해 계급, 대중과 긴밀히 연결되며, 당의 지도 아래 이 기구를 통해 계급의 독재가 실현된다. 노동조합과의 가장 긴밀한 연결 없이, 그들의 열렬한 지지 없이, 경제 건설뿐 아니라 군사 건설에서도 그들의 가장 헌신적인 노력 없이는, 우리는 물론 2년 반은커녕 2개월 반도 나라를 다스리고 독재를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가장 긴밀한 연결이 실제로는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활동을 뜻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선전과 선동, 노동조합의 지도적 활동가뿐 아니라 영향력 있는 활동가 일반과 제때에 자주 갖는 협의, 멘셰비키와의 단호한 투쟁이 그것이다. 멘셰비키는 아직도 아주 적긴 하지만 일정한 수의 지지자를 두고 있으며, 그들에게 온갖 반혁명적 술책을 가르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사상적 옹호와 노동조합의 「독립」(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인가, 프롤레타리아 국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다!) 선전에서부터 프롤레타리아 규율의 사보타주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우리는 노동조합을 통한 「대중」과의 연결이 충분하지 않다고 본다. 혁명 과정에서 실천이 만들어 냈고 우리가 전력을 다해 지원하고 발전시키고 넓히려 하는 기관이 있는데, 바로 비당원 노동자·농민 협의회다. 대중의 분위기를 살피고, 대중에게 다가가고, 그 요구에 답하고, 그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일꾼을 국가 직책에 발탁하는 등을 위해서다. 국가통제 인민위원부를 「노농 감독부」로 개편하는 최근 법령의 하나는 이런 비당원 협의회에 갖가지 감사 등을 맡을 국가통제 위원을 뽑을 권한을 주었다.
그다음으로, 물론 당의 모든 활동은 직업 구별 없이 근로 대중을 모으는 소비에트를 통해 이루어진다. 군(郡) 소비에트 대회는 부르주아 세계의 가장 훌륭한 민주공화국들도 아직 보지 못한 민주적 기관이며, 이 대회들을 통해(당은 이를 되도록 주의 깊게 살피려 한다), 그리고 의식 있는 노동자들을 농촌의 온갖 직책에 끊임없이 파견함으로써 농민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적 역할,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부유하고 부르주아적이며 착취하고 투기하는 농민층과의 체계적 투쟁 등이 실현된다.
이것이 독재 수행의 실천이라는 관점에서 「위로부터」 본 프롤레타리아 국가 권력의 전반적 기구다. 이 기구를 잘 알고, 이 기구가 25년 동안 작은 비합법 지하 서클에서 자라나는 것을 지켜본 러시아 볼셰비키에게는 「위로부터」냐 「아래로부터」냐, 지도자의 독재냐 대중의 독재냐 따위의 이야기가 모두 우스운 유치한 헛소리로, 사람에게 왼발이 더 쓸모 있느냐 오른손이 더 쓸모 있느냐를 다투는 것 같은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까닭을 독자는 이해하리라고 기대한다.
공산주의자는 반동적 노동조합에서 일할 수 없고 일해서도 안 되며, 이 일을 거부해도 되고, 노동조합에서 나와 아주 새롭고 아주 깨끗하며 매우 사랑스러운 (그리고 아마 대부분 매우 젊은) 공산주의자들이 생각해 낸 「노동자 연합」을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는 따위의, 독일 좌익의 진지하고 아주 학구적이며 몹시 혁명적인 이야기도 우리에게는 똑같이 우스운 유치한 헛소리로 보일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에 한편으로는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노동자들 사이의 낡은 직업적·수공업적 차이를,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조합을 유산으로 남길 수밖에 없다. 노동조합은 아주 천천히, 여러 해, 여러 해에 걸쳐서만 더 넓고 덜 직능적인 산업별 조합(직능, 수공업, 직업만이 아니라 산업 전체를 아우르는 조합)으로 발전할 수 있고 발전할 것이며, 그다음에 이 산업별 조합을 통해 사람들 사이의 분업을 없애고 전면적으로 발달하고 전면적으로 훈련된 사람들, 무엇이든 할 줄 아는 사람들을 기르고 가르치고 준비시키는 데로 나아갈 것이다. 공산주의는 그리로 가고 있고 가야 하며 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랜 세월을 거친 뒤에야 가능하다. 충분히 발전하고 충분히 굳건해지고 형성되고 충분히 펼쳐지고 성숙한 공산주의의 이 미래의 결과를 오늘 실천에서 앞당기려는 것은 네 살배기 아이에게 고등수학을 가르치려는 것과 같다.
우리는 공상적인 인간 재료나 우리가 특별히 만든 인간 재료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유산으로 남긴 인간 재료로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시작할 수 있다(그리고 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어렵다」,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이 과제에 대한 다른 모든 접근은 너무나 진지하지 못해서 이야기할 가치도 없다.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발전 초기에 노동계급의 거대한 진보였다. 노동자들의 흩어짐과 무력함에서 계급적 결합의 시작으로 나아가는 이행이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 계급 결합의 더 높은 형태, 곧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 정당(이 당은 지도자를 계급 및 대중과 하나로, 떼어 낼 수 없는 무엇으로 묶을 줄 알게 될 때까지는 그 이름에 걸맞지 않을 것이다)이 자라나기 시작하자, 노동조합은 어느 정도 반동적 특징을, 어느 정도의 직능적 편협함, 어느 정도의 비정치성 경향, 어느 정도의 경직성 등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계 어디서도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은 노동조합을 통하지 않고는, 노동조합과 노동계급 정당의 상호 작용을 통하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루어질 수도 없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권력 쟁취는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거대한 전진이며, 당은 노동조합을 예전 방식만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더욱 많이 교육하고 지도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노동조합이 꼭 필요한 「공산주의의 학교」로,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독재를 실현하기 위한 예비 학교로, 나라의 경제 전체의 관리를 노동자 계급(개별 직업이 아니라)의 손으로, 그다음에는 모든 근로자의 손으로 점차 넘기기 위한 노동자들의 꼭 필요한 결합으로 남아 있고 오랫동안 남아 있으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위에서 말한 뜻에서의 노동조합의 어느 정도의 「반동성」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아래에서 피할 수 없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기본 조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반동성」을 두려워하고 그것 없이 지내려고 하고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것은 가장 큰 어리석음이다. 그것은 노동계급과 농민 가운데 가장 뒤떨어진 계층과 대중을 가르치고 깨우치고 교육하여 새로운 삶으로 끌어들이는 데 있는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역할을 두려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직업적으로 편협한 노동자가 한 사람도 남지 않을 때까지, 직능적·노동조합주의적 편견을 지니지 않은 노동자만 남을 때까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현을 미루는 것은 더욱 깊은 잘못일 것이다. 정치가의 기술(그리고 공산주의자가 자기 과제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바로 프롤레타리아 전위가 권력을 성공적으로 장악할 수 있는 조건과 시기, 곧 전위가 그때와 그 뒤에 노동계급과 비프롤레타리아 근로 대중의 충분히 넓은 층에게서 충분한 지지를 얻을 수 있고, 그 뒤에 점점 더 넓은 근로 대중을 교육하고 가르치고 끌어들이며 자신의 지배를 유지하고 강화하고 넓힐 수 있는 조건과 시기를 정확히 헤아리는 데 있다.
또 있다. 러시아보다 선진적인 나라들에서는 노동조합의 어느 정도의 반동성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강하게 나타났고, 틀림없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의 멘셰비키는 바로 직능적 편협함, 직업적 이기주의, 기회주의 덕분에 노동조합 안에 발판을 가졌다(일부는 아주 적은 몇몇 노동조합에서 지금도 가지고 있다). 서방에서는 그곳의 멘셰비키가 노동조합에 훨씬 굳게 「자리 잡았고」, 우리나라보다 훨씬 강한 직업주의적이고 편협하며 이기적이고 무정하며 탐욕스럽고 소시민적인, 제국주의적 성향을 띠고 제국주의에 매수되고 제국주의에 타락한 「노동 귀족」 층이 형성되었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서유럽에서 곰퍼스, 주오 씨, 헨더슨, 메르하임, 레기엔 일당과 싸우는 것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완전히 동질적인 유형인 우리 멘셰비키와 싸우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이 투쟁은 가차 없이 벌여야 하며, 우리가 해낸 것처럼 교정할 수 없는 기회주의와 사회배외주의의 지도자들을 모두 철저히 망신 주고 노동조합에서 쫓아낼 때까지 반드시 밀고 나가야 한다. 이 투쟁이 일정한 정도에 이르기 전에는 정치권력을 쟁취할 수 없다(그리고 정치권력을 잡으려고 시도해서도 안 된다). 게다가 나라마다, 조건마다 이 「일정한 정도」는 같지 않으며, 이를 올바르게 헤아릴 수 있는 것은 각 나라의 사려 깊고 경험 많고 박식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 지도자들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투쟁의 성공을 재는 척도의 하나가 1917년 11월, 곧 1917년 10월 25일 프롤레타리아 혁명 며칠 뒤에 치러진 제헌의회 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멘셰비키는 70만 표, 자캅카지예를 더하면 140만 표를 얻어 볼셰비키가 얻은 900만 표에 비해 완패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7~8호에 실린 나의 글 「제헌의회 선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보라[라].)
그러나 우리가 「노동 귀족」과 싸우는 것은 노동자 대중의 이름으로, 그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우리가 기회주의적이고 사회배외주의적인 지도자들과 싸우는 것은 노동계급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이 가장 기초적이고 가장 자명한 진리를 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어리석은 짓을 독일의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하고 있다. 그들은 노동조합 상층부의 반동성과 반혁명성에서… 노동조합 탈퇴라는 결론을 끌어낸다!! 노동조합 안의 활동을 거부하자는 결론을!! 새로운, 지어낸 노동자 조직 형태를 만들자는 결론을!! 이것은 공산주의자가 부르주아지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봉사와 맞먹는, 용서할 수 없는 어리석음이다. 우리 멘셰비키는 모든 기회주의적이고 사회배외주의적이며 카우츠키주의적인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운동 안의 부르주아지의 첩자」(우리가 언제나 멘셰비키를 두고 말했듯이), 또는 미국의 대니얼 드 리언 추종자들의 훌륭하고 아주 정확한 표현대로 「자본가 계급의 노동 부관」(labor lieutenants of the capitalist class)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반동적 노동조합 안에서 일하지 않는다는 것은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거나 뒤떨어진 노동자 대중을 반동적 지도자, 부르주아지의 첩자, 노동 귀족, 또는 「부르주아화한 노동자」(영국 노동자에 관한 1858년 엥겔스의 마르크스 앞 편지 참조[마])의 영향 아래 내버려 두는 것이다.
공산주의자가 반동적 노동조합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터무니없는 「이론」이야말로 이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대중」에 대한 영향력 문제를 얼마나 경솔하게 대하는지, 「대중」에 대한 외침을 얼마나 남용하는지를 가장 뚜렷이 보여 준다. 「대중」을 도울 줄 알고 「대중」의 호감과 공감과 지지를 얻으려면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지도자들」(그들은 기회주의자이자 사회배외주의자로서 대부분 직접 또는 간접으로 부르주아지 및 경찰과 연결되어 있다)의 트집, 발 걸기, 모욕,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반드시 대중이 있는 곳에서 일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대중이나 반(半)프롤레타리아 대중이 있는 곳이라면 어떤 기관, 협회, 조합에서든, 그것이 아무리 반동적이라 해도 바로 거기서 체계적으로, 끈질기게, 꾸준히, 참을성 있게 선전하고 선동하기 위해 온갖 희생을 치르고 가장 큰 장애를 이겨 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노동조합과 노동자 협동조합(협동조합은 적어도 때로는)이 바로 대중이 있는 조직이다. 스웨덴 신문 『폴케츠 다그블라드 폴리티켄』(1920년 3월 10일)의 자료에 따르면, 영국의 노동조합원 수는 1917년 말부터 1918년 말까지 550만 명에서 660만 명으로, 곧 19퍼센트 늘었다. 1919년 말에는 75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한다. 프랑스와 독일에 관한 같은 자료는 지금 내 손에 없지만, 이 나라들에서도 노동조합원 수가 크게 늘었음을 보여 주는 사실들은 전혀 논란의 여지가 없고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사실들은 다른 수많은 징후로도 확인되는 것, 곧 바로 프롤레타리아 대중 속에서, 「밑바닥」에서, 뒤떨어진 사람들 사이에서 의식과 조직을 향한 열망이 자라고 있음을 더없이 분명하게 말해 준다. 영국, 프랑스, 독일의 수백만 노동자가 완전한 무조직에서 가장 기초적이고 가장 낮으며 가장 단순하고 (아직도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편견에 흠뻑 젖어 있는 사람들이) 가장 접근하기 쉬운 조직 형태, 곧 노동조합으로 처음으로 넘어가고 있다. 그런데 혁명적이지만 분별없는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곁에 서서 「대중」, 「대중」을 외치며 노동조합 안에서 일하기를 거부한다!! 노동조합의 「반동성」을 핑계로 거부한다!! 그리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편견에 물들지 않고 직능적이고 편협한 직업주의의 죄를 짓지 않은 새롭고 깨끗한 「노동자 연합」을 지어내는데, 그것은 넓은 조직이 될 것이라고 하며(될 것이라고!), 거기 가입하는 데는 오직(오직!) 「소비에트 체제와 독재의 인정」만 필요하다는 것이다(위의 인용을 보라)!!
「좌익」 혁명가들이 혁명에 끼치는 해로서 이보다 더 큰 분별없음, 이보다 더 큰 해는 상상할 수도 없다! 만일 우리가 지금 러시아에서, 러시아와 협상국 부르주아지에게 2년 반 동안 전례 없는 승리를 거둔 뒤에, 노동조합 가입 조건으로 「독재의 인정」을 내건다면 우리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이고, 대중에 대한 우리의 영향력을 망치는 것이며, 멘셰비키를 돕는 것이다. 공산주의자의 과제는 모두 뒤떨어진 사람들을 설득할 줄 알고 그들 사이에서 일할 줄 아는 것이지, 지어낸 유치한 「좌익」 구호로 그들과 담을 쌓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곰퍼스, 헨더슨, 주오, 레기엔 씨들이 독일의 「원칙적」 반대파(하느님, 이런 「원칙성」에서 우리를 지켜 주소서!)나 미국 「세계산업노동자」의 일부 혁명가들처럼 반동적 노동조합에서 나오고 그 안의 활동을 거부하라고 설교하는 「좌익」 혁명가들에게 몹시 고마워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기회주의의 「지도자」 씨들이 공산주의자들을 노동조합에 들이지 않고, 온갖 방법으로 그곳에서 밀어내고, 노동조합 안의 활동을 되도록 불쾌하게 만들고, 모욕하고 괴롭히고 박해하기 위해 부르주아 외교의 온갖 술수와 부르주아 정부, 성직자, 경찰, 법원의 도움에 기대리라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모든 것에 맞설 줄 알아야 하고, 어떤 희생이라도 각오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온갖 책략, 계략, 비합법적 수단, 침묵, 진실의 은폐까지도 써서라도 노동조합에 파고들고, 거기 남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안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해야 한다. 1905년 이전 차리즘 아래서 우리에게는 어떤 「합법적 가능성」도 없었다. 그러나 비밀경찰 주바토프가 혁명가를 낚아 그들과 싸우기 위해 흑백인조적 노동자 집회와 노동자 협회를 만들었을 때, 우리는 이 집회와 협회에 우리 당원들을 보냈고(나는 그 가운데 페테르부르크의 뛰어난 노동자로 1906년 차르 장군들에게 총살된 바부시킨 동지를 개인적으로 기억한다), 그들은 대중과 연결을 맺고 솜씨 있게 선동을 벌여 노동자들을 주바토프파의 영향에서 떼어 냈다[3]. 물론 합법주의적, 입헌주의적,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편견이 특히 뿌리 깊게 배어 있는 서유럽에서는 이런 일을 하기가 더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할 수 있고 해야 하며, 체계적으로 해 나가야 한다.
내 개인적 견해로는, 제3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는 반동적 노동조합 불참 정책 일반을(그런 불참이 얼마나 분별없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대의에 얼마나 극도로 해로운지를 자세히 논증하여) 그리고 특히 이 잘못된 정책을 직접이든 간접이든, 공공연히든 은밀히든, 전부든 일부든 지지해 온 네덜란드 공산당 몇몇 당원들의 행동 노선을 직접 규탄하고,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다음 대회에 규탄하도록 제안해야 한다. 제3인터내셔널은 제2인터내셔널의 전술과 결별해야 하며, 아픈 문제를 피하거나 흐리지 말고 정면으로 제기해야 한다. 「독립파」(독일 독립사회민주당)에게 모든 진실을 면전에서 말했듯이, 「좌익」 공산주의자에게도 모든 진실을 면전에서 말해야 한다.
VII. 부르주아 의회에 참여해야 하는가?
독일의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더없이 경멸하며, 그리고 더없이 경솔하게, 이 물음에 부정으로 답한다. 그들의 논거는? 위의 인용문에서 우리는 이것을 보았다.
“…역사적·정치적으로 낡은 의회제 투쟁 형태로의 모든 복귀를 아주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이것은 우스울 만큼 거창하게 말한 것이고 명백히 틀렸다. 의회제로의 「복귀」라니! 혹시 독일에 이미 소비에트 공화국이 있는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복귀」를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은 공허한 문구가 아닌가?
의회제는 「역사적으로 낡았다」. 이것은 선전의 의미에서는 옳다. 그러나 거기서 실천적 극복까지는 아직 아주 멀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자본주의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역사적으로 낡았다」고 선언할 수 있었고, 그럴 충분한 권리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토대 위에서 아주 오래, 아주 끈질기게 싸워야 할 필요를 조금도 없애지 않는다. 의회제는 세계사적 의미에서 「역사적으로 낡았다」. 곧 부르주아 의회제의 시대는 끝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세계사의 척도는 수십 년 단위로 셈한다. 10~20년 이르거나 늦는 것은 세계사적 척도에서 보면 아무래도 좋은 일이며, 세계사의 관점에서 보면 대략적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사소한 일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실천적 정치의 문제에서 세계사적 척도를 끌어대는 것은 가장 터무니없는 이론적 잘못이다.
의회제가 「정치적으로 낡았다」고? 이것은 다른 문제다. 만일 이것이 옳다면 「좌익」의 입장은 탄탄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진지한 분석으로 증명해야 하는데, 「좌익」은 그 분석에 손을 대지도 못한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암스테르담 임시사무국 회보』 제1호(“Bulletin of the Provisional Bureau in Amsterdam of the Communist International”, 1920년 2월)에 실리고 네덜란드 좌익적인, 또는 좌익 네덜란드적인 경향을 분명히 드러내는 「의회제에 관한 테제」[바]에서도 분석은, 보게 되겠지만, 형편없다.
첫째. 알다시피 독일 「좌익」은 이미 1919년 1월에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 같은 뛰어난 정치 지도자들의 의견에 반하여 의회제가 「정치적으로 낡았다」고 여겼다. 「좌익」이 틀렸다는 것은 알려진 일이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의회제가 「정치적으로 낡았다」는 명제는 곧바로 뿌리째 무너진다. 그때의 의심할 여지 없는 잘못이 왜 이제는 잘못이 아니게 되었는지 증명할 의무는 「좌익」에게 있다. 그들은 그림자만큼의 증명도 내놓지 않으며, 내놓을 수도 없다. 정당이 자기 잘못을 대하는 태도는 그 당이 진지한지, 그리고 자기 계급과 근로 대중에 대한 의무를 실제로 수행하는지를 가늠하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확실한 기준의 하나다. 잘못을 공공연히 인정하고, 그 원인을 밝히고, 그것을 낳은 상황을 분석하고, 잘못을 고칠 방법을 주의 깊게 논의하는 것, 이것이 진지한 당의 표지이고, 이것이 당이 자기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며, 이것이 계급을, 그다음에는 대중을 교육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 의무를 수행하지 않고, 자신의 명백한 잘못을 연구하는 데 아주 큰 주의와 꼼꼼함과 신중함을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독일의(그리고 네덜란드의) 「좌익」은 바로 자신들이 계급의 당이 아니라 서클이며, 대중의 당이 아니라 지식인과 지식인 근성의 가장 나쁜 측면을 되풀이하는 소수 노동자의 그룹임을 증명한다.
둘째. 앞에서 자세히 인용한 프랑크푸르트 「좌익」 그룹의 같은 소책자에서 우리는 이런 대목을 읽는다.
“…아직 중앙당의 정책을 따르는 수백만 노동자는” (가톨릭 「중앙당」) “반혁명적이다. 농촌 프롤레타리아는 반혁명 군대의 군단을 내놓고 있다.” (위 소책자 3쪽)
보아하니 이것은 지나치게 거칠고 과장된 말이다. 그러나 여기 서술된 기본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없으며, 「좌익」이 이것을 인정한다는 사실이 그들의 잘못을 특히 뚜렷이 보여 준다. 「수백만」, 「군단」의 프롤레타리아가 아직도 의회제 일반을 지지할 뿐 아니라 곧바로 「반혁명적」이라면, 어떻게 「의회제가 정치적으로 낡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독일에서 의회제가 아직 정치적으로 낡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독일의 「좌익」이 자신들의 바람, 자신들의 사상적·정치적 태도를 객관적 현실로 착각했음은 분명하다. 이것은 혁명가에게 가장 위험한 잘못이다. 러시아에서는 차리즘의 유난히 야만적이고 사나운 억압이 특히 오랫동안, 특히 다양한 형태로 온갖 경향의 혁명가들, 놀라운 헌신과 열정과 영웅심과 의지력을 지닌 혁명가들을 낳았다. 그런 러시아에서 우리는 혁명가들의 이 잘못을 특히 가까이에서 보았고, 특히 주의 깊게 연구했으며, 특히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이 잘못이 특히 분명히 보인다. 독일의 공산주의자에게 의회제는 물론 「정치적으로 낡았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우리에게 낡은 것을 계급에게 낡은 것, 대중에게 낡은 것으로 착각하지 않는 데 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좌익」이 추론할 줄 모르고, 계급의 당, 대중의 당으로 처신할 줄 모른다는 것을 다시 본다. 여러분은 대중의 수준으로, 계급의 뒤떨어진 층의 수준으로 내려가서는 안 된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여러분은 그들에게 쓰라린 진실을 말해야 한다. 여러분은 그들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이고 의회주의적인 편견을 편견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여러분은 바로 계급 전체(그 공산주의 전위만이 아니라)의, 바로 근로 대중 전체(그 선진적인 사람들만이 아니라)의 의식과 준비의 실제 상태를 냉정하게 살펴야 한다.
「수백만」과 「군단」은 아니더라도 그저 꽤 큰 소수의 공업 노동자라도 가톨릭 신부를 따르고, 농업 노동자의 꽤 큰 소수가 지주와 쿨라크(Grossbauern)를 따른다면, 거기서 이미 독일에서 의회제가 아직 정치적으로 낡지 않았다는 것, 의회 선거와 의회 연단에서의 투쟁에 참여하는 것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에게 바로 자기 계급의 뒤떨어진 층을 교육하기 위해서, 바로 발전하지 못하고 억눌리고 무지한 농촌 대중을 일깨우고 깨우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의심할 여지 없이 나온다. 여러분이 부르주아 의회와 그 밖의 어떤 유형이든 반동적 기관을 해산할 힘이 없는 동안에는, 바로 거기에 아직 신부와 시골구석의 고립에 속은 노동자들이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그저 말만 많은 사람이 될 위험이 있다.
셋째.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우리 볼셰비키에 대해 좋은 말을 아주 많이 한다. 때로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우리를 덜 칭찬하고, 볼셰비키 전술을 더 깊이 파고들고, 더 잘 알려고 해 주었으면! 우리는 1917년 9~11월에 러시아의 부르주아 의회인 제헌의회 선거에 참여했다. 우리 전술은 옳았는가, 틀렸는가? 틀렸다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하고 증명해야 한다. 그것은 국제 공산주의가 올바른 전술을 세우는 데 필요하다. 옳았다면 거기서 일정한 결론을 끌어내야 한다. 물론 러시아의 조건을 서유럽의 조건과 똑같이 놓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러나 「의회제는 정치적으로 낡았다」는 개념이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문제에 관해서는 우리 경험을 반드시 정확히 헤아려야 한다. 구체적 경험을 헤아리지 않으면 이런 개념은 너무나 쉽게 공허한 문구로 변하기 때문이다. 우리 러시아 볼셰비키는 1917년 9~11월에 러시아에서 의회제가 정치적으로 낡았다고 여길 권리를 어떤 서방 공산주의자보다 더 많이 갖고 있지 않았던가? 물론 갖고 있었다. 문제는 부르주아 의회가 오래전부터 있었느냐 최근에 생겼느냐가 아니라, 넓은 근로 대중이 소비에트 체제를 받아들이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의회를 해산할(또는 해산을 용인할) 준비가 (사상적으로, 정치적으로, 실천적으로) 얼마나 되어 있느냐에 있기 때문이다. 1917년 9~11월 러시아에서 도시 노동계급과 병사와 농민이 여러 특수한 조건 덕분에 소비에트 체제를 받아들이고 가장 민주적인 부르주아 의회를 해산할 준비가 드물게 잘 되어 있었다는 것은 전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충분히 확립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도 볼셰비키는 제헌의회를 보이콧하지 않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쟁취하기 전에도 그 뒤에도 선거에 참여했다. 이 선거가 아주 귀중한(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매우 유익한) 정치적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감히 바라건대, 러시아 제헌의회 선거 자료를 자세히 분석한 위의 글에서 내가 증명했다[라].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전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소비에트 공화국이 승리하기 몇 주 전에도, 그리고 그런 승리 뒤에도 부르주아 민주주의 의회에 참여하는 것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해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의회가 왜 해산되어 마땅한지를 뒤떨어진 대중에게 증명하기 쉽게 하고, 그 해산의 성공을 쉽게 하며, 부르주아 의회제의 「정치적 낡음」을 쉽게 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 경험을 무시하면서 동시에 자기 전술을 국제적으로(좁게 또는 일면적으로 민족적인 전술이 아니라 바로 국제적인 전술로서) 세워야 하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속한다고 내세우는 것은 가장 깊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며, 말로는 국제주의를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바로 국제주의에서 물러서는 것이다.
이제 의회 불참을 옹호하는 「네덜란드 좌익」의 논거를 살펴보자. 위에서 말한 「네덜란드」 테제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제4테제를 (영어에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 생산 체제가 무너지고 사회가 혁명 상태에 있을 때, 의회 활동은 대중 자신의 행동에 비해 점차 의의를 잃는다. 이런 조건에서 의회가 반혁명의 중심이자 기관이 되고, 다른 한편 노동계급이 소비에트라는 형태로 자기 권력의 도구를 세울 때에는, 의회 활동에 대한 어떤 형태의 참여도 모두 포기하는 것이 필요해질 수도 있다.”
첫 문장은 명백히 틀렸다. 대중의 행동, 예컨대 큰 파업은 혁명기나 혁명적 상황에서만이 아니라 언제나 의회 활동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명백히 근거 없고 역사적·정치적으로 틀린 논거는 필자들이 합법 투쟁과 비합법 투쟁의 결합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관한 전 유럽의 경험(1848년과 1870년 혁명 전의 프랑스, 1878~1890년의 독일 등)도 러시아의 경험(위를 보라)도 전혀 헤아리지 않는다는 것을 특히 뚜렷이 보여 줄 뿐이다. 이 문제는 일반적으로도 아주 큰 의의를 지니지만, 특히 모든 문명국과 선진국에서 이런 결합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에게 점점 더 의무가 되는, 일부는 이미 의무가 된 때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내전이 자라나고 다가오고 있고, 공화국 정부와 부르주아 정부 일반이 온갖 합법성 위반도 서슴지 않으며 공산주의자를 미친 듯이 박해하고 있기 때문이다(미국의 예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가장 중요한 문제를 네덜란드인들과 좌익 일반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둘째 문장은 우선 역사적으로 틀렸다. 우리 볼셰비키는 가장 반혁명적인 의회에도 참여했고, 경험은 그런 참여가 바로 러시아의 제1차 부르주아 혁명(1905년) 뒤에 제2차 부르주아 혁명(1917년 2월)과 그다음 사회주의 혁명(1917년 10월)을 준비하는 데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에게 유익했을 뿐 아니라 꼭 필요했음을 보여 주었다. 다음으로 이 문장은 놀라울 만큼 비논리적이다. 의회가 반혁명의 기관이자 「중심」이 되고(실제로 의회는 「중심」이었던 적도 없고 될 수도 없지만, 이것은 지나가며 하는 말이다) 노동자들이 소비에트라는 형태로 자기 권력의 도구를 만든다는 데서 나오는 것은, 노동자들이 소비에트와 의회의 투쟁을 위해, 소비에트에 의한 의회 해산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것, 사상적으로, 정치적으로, 기술적으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반혁명 의회 안에 소비에트 반대파가 있으면 그런 해산이 어려워진다거나 쉬워지지 않는다는 결론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데니킨, 콜차크와의 승리의 투쟁 동안 그들 쪽에 소비에트적, 프롤레타리아적 반대파가 있는 것이 우리 승리에 아무래도 좋은 일이라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다. 우리는 1918년 1월 5일 우리가 제헌의회를 해산한 일이, 해산되는 반혁명 제헌의회 안에 일관된 볼셰비키 반대파와 일관되지 못한 좌익 사회혁명당 반대파라는 소비에트 반대파가 있었기 때문에 어려워진 것이 아니라 쉬워졌음을 잘 안다. 테제의 필자들은 완전히 혼란에 빠져서, 혁명 동안 반동 의회 바깥의 대중 행동과 이 의회 안에서 혁명에 공감하는(더 좋게는 혁명을 직접 지지하는) 반대파의 결합이 얼마나 특히 유익한지를 보여 주는 여러, 아니 모든 혁명의 경험을 잊었다. 네덜란드인들과 「좌익」 일반은 여기서 진짜 혁명에 참여해 본 적이 없거나, 혁명의 역사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거나, 어떤 반동적 기관에 대한 주관적 「부정」을 여러 객관적 요인의 합친 힘에 의한 그 기관의 실제 파괴로 순진하게 착각하는 혁명의 교조주의자들처럼 추론한다. 새로운 정치적(정치적인 것만이 아니다) 사상을 신용 떨어뜨리고 해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것을 옹호한다는 이름으로 그것을 터무니없는 데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다. 어떤 진리라도 「지나치게」 만들면(아버지 디츠겐이 말했듯이), 과장하면, 실제 적용 범위 밖으로 넓히면 터무니없게 만들 수 있고, 그런 조건에서는 심지어 반드시 터무니없는 것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와 독일의 좌익은 소비에트 권력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의회보다 우월하다는 새로운 진리에 바로 이런 곰의 봉사를 하고 있다. 물론 예전처럼 일반적으로 부르주아 의회 참여의 거부는 어떤 조건에서도 허용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옳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보이콧이 유익한 조건을 정식화하려고 할 수 없다. 이 글의 과제는 훨씬 소박하여, 국제 공산주의 전술의 몇몇 당면 문제와 관련하여 러시아의 경험을 헤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경험은 볼셰비키의 보이콧 적용 가운데 성공적이고 올바른 것 하나(1905년)와 잘못된 것 하나(1906년)를 보여 주었다. 첫 경우를 분석해 보면, 우리는 반동 권력이 반동 의회를 소집하지 못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때는 의회 밖의(특히 파업의) 대중 혁명 행동이 유례없이 빠르게 자라나고 있었고,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어느 층도 반동 권력을 지지할 수 없었으며,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파업 투쟁과 농업 운동으로 넓고 뒤떨어진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 경험이 오늘의 유럽 조건에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또한 위에서 말한 논거에 근거하여, 네덜란드인들과 「좌익」이 조건부로라도 의회 참여 거부를 옹호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고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의에 해롭다는 것도 아주 분명하다.
서유럽과 미국에서 의회는 노동계급의 선진적 혁명가들에게 특히 미움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전쟁 동안과 그 뒤에 의회에서 사회주의 및 사회민주주의 의원의 거대한 다수가 보인 행태보다 더 비열하고 더 천하고 더 배신적인 것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두가 인정하는 악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풀 때 이런 기분에 굴복하는 것은 분별없을 뿐 아니라 그야말로 범죄적일 것이다. 서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혁명적 기분은 지금, 말하자면 너무 오래, 헛되이, 조바심 내며 기다려 온 「새로운 것」 또는 「드문 것」이며, 아마 그래서 그토록 쉽게 기분에 굴복하는 것일 터이다. 물론 대중 속의 혁명적 기분 없이는, 그런 기분이 자라기에 유리한 조건 없이는 혁명 전술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러시아인은 너무나 길고 고되고 피어린 경험을 통해 혁명적 기분 하나만으로는 혁명 전술을 세울 수 없다는 진리를 확신하게 되었다. 전술은 주어진 국가의(그리고 그 주변 국가들의, 세계적 규모에서는 모든 국가의) 모든 계급 세력을 냉정하고 엄밀하게 객관적으로 헤아리는 데, 그리고 혁명 운동의 경험을 헤아리는 데 기초해야 한다. 의회 기회주의에 대한 욕설만으로, 의회 참여의 부정만으로 자신의 「혁명성」을 드러내기는 아주 쉽다. 그러나 바로 너무 쉽기 때문에 그것은 어렵고 가장 어려운 과제의 해결이 아니다. 유럽의 의회에서 진정 혁명적인 의회 분파를 만드는 것은 러시아에서보다 훨씬 어렵다. 물론이다. 그러나 이것은 1917년이라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으로 극히 독특한 상황에서 러시아가 사회주의 혁명을 시작하기는 쉬웠지만, 그것을 계속하고 끝까지 이끌어 가기는 러시아가 유럽 나라들보다 더 어려우리라는 일반적 진리의 한 특수한 표현일 뿐이다. 나는 이미 1918년 초에 이 사정을 지적해야 했고, 그 뒤 2년의 경험이 이 생각이 옳았음을 충분히 확인해 주었다. 다음과 같은 특수한 조건들, 곧 1) 소비에트 혁명을, 그 혁명 덕분에, 노동자와 농민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지치게 한 제국주의 전쟁의 종결과 결합할 수 있었던 것, 2) 소비에트라는 적에 맞서 하나로 뭉칠 수 없었던 세계적으로 강력한 두 제국주의 약탈자 그룹의 사투를 일정 기간 이용할 수 있었던 것, 3) 부분적으로는 나라의 거대한 크기와 나쁜 교통 덕분에 비교적 긴 내전을 견뎌 낼 수 있었던 것, 4) 농민 속에 아주 깊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운동이 있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이 농민의 당(대다수가 볼셰비즘에 극히 적대적이었던 사회혁명당)에서 혁명적 요구를 가져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권력 쟁취 덕분에 곧바로 실현할 수 있었던 것, 이런 특수한 조건들은 지금 서유럽에는 없으며, 이런 조건이나 비슷한 조건이 되풀이되기도 그리 쉽지 않다. 다른 여러 이유와 더불어 바로 이 때문에 서유럽이 사회주의 혁명을 시작하기는 우리보다 어렵다. 반동 의회를 혁명적 목적에 이용하는 어려운 일을 「뛰어넘어」 이 어려움을 「피해 가려는」 것은 순전한 유치함이다. 여러분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런데 반동 의회 안에 확신에 차고 헌신적이고 영웅적인 공산주의자들로 좋은 의회 분파를 만드는 어려움을 두려워한다! 이것이 유치함이 아니고 무엇인가? 독일의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스웨덴의 Z. 회글룬드가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지지 없이도 반동 의회를 진정 혁명적으로 이용하는 본보기를 보여 줄 수 있었다면, 빠르게 자라는 대중적 혁명 정당이 전후 대중의 환멸과 분노 속에서 가장 나쁜 의회에서 공산주의 분파를 벼려 낼 힘이 없다는 말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 서유럽의 뒤떨어진 노동자 대중과, 더욱이 소농 대중이 러시아보다 훨씬 강하게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이고 의회주의적인 편견에 젖어 있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는 부르주아 의회 같은 기관의 안에서만 이 편견을 폭로하고 흩뜨리고 극복하는 길고 끈질기며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 투쟁을 할 수 있다(그리고 해야 한다).
독일의 「좌익」은 자기 당의 나쁜 「지도자」를 탓하며 절망에 빠지고, 「지도자」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부정」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지도자」를 지하에 숨겨야 하는 일이 잦은 조건에서 훌륭하고 믿을 만하고 시험을 거친 권위 있는 「지도자」를 길러 내는 것은 특히 어려운 일이며, 합법 활동과 비합법 활동을 결합하지 않고는, 그리고 무엇보다 의회 무대에서도 「지도자」를 시험하지 않고는 이 어려움을 성공적으로 이겨 낼 수 없다. 비판은, 그것도 가장 날카롭고 가차 없고 타협 없는 비판은 의회제나 의회 활동이 아니라, 의회 선거와 의회 연단을 혁명적으로, 공산주의적으로 이용할 줄 모르는 지도자들, 그리고 더욱이 이용하려 하지 않는 지도자들을 겨누어야 한다. 이런 비판만이, 물론 쓸모없는 지도자를 쫓아내고 쓸모 있는 지도자로 바꾸는 일과 결합되어, 유익하고 결실 있는 혁명 활동이 될 것이다. 그것은 「지도자」가 노동계급과 근로 대중에게 걸맞은 사람이 되도록, 그리고 대중이 정치 상황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그 상황에서 나오는 흔히 아주 복잡하고 뒤얽힌 과제를 이해하도록 「지도자」와 대중을 함께 교육한다[4].
주석
- [레닌 주] 『공산주의 노동자 신문』(함부르크, 1920년 2월 7일 자 제32호, 카를 에를러의 글 「당의 해체」).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없애지 않고는 부르주아 국가를 부술 수 없고, 정당을 부수지 않고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없앨 수 없다.” 로망스 나라들의 생디칼리스트와 아나키스트 가운데 가장 혼란한 머리들은 「만족」을 얻을 수 있겠다.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로 여기는 듯한 묵직한 독일인들이(K. 에를러와 K. 호르너는 이 신문에 실린 글에서 자신들이 묵직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여긴다는 것을 특히 묵직하게 증명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기초도 이해하지 못한 채 믿을 수 없는 헛소리를 특히 우스꽝스럽게 늘어놓는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데까지 이르고 있으니 말이다. 마르크스주의를 인정한다고 해서 잘못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인들은 이것을 특히 잘 안다. 우리나라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특히 자주 「유행」이었기 때문이다. ↩
- [레닌 주] 말리놉스키는 독일에서 포로로 있었다. 그가 볼셰비키 정권 아래의 러시아로 돌아오자 곧바로 재판에 넘겨져 우리 노동자들에게 총살되었다. 멘셰비키는 밀정이 우리 당 중앙위원회에 있었다는 우리의 잘못을 특히 악착같이 공격했다. 그러나 우리가 케렌스키 정부 아래에서 두마 의장 로댠코의 체포와 재판을 요구했을 때, 로댠코가 전쟁 전에 이미 말리놉스키가 밀정이라는 것을 알고도 두마의 트루도비키와 노동자 의원들에게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케렌스키와 함께 정부에 참여하던 멘셰비키도 사회혁명당도 우리 요구를 지지하지 않았고, 로댠코는 자유로이 남아 있다가 자유로이 데니킨에게로 갔다. ↩
- [레닌 주] 곰퍼스, 헨더슨, 주오, 레기엔 같은 자들은 유럽식 옷차림과 광택, 문명화되고 세련되고 민주적으로 다듬어진 수법으로 비열한 정책을 펴는 것만 다를 뿐, 우리의 주바토프와 다를 바 없는 주바토프들이다. ↩
- [레닌 주] 나는 이탈리아의 「좌익」 공산주의를 알 기회가 너무 적었다. 보르디가 동지와 그의 「보이콧파 공산주의자」(Comunista astensionista) 분파가 의회 불참을 옹호하는 것은 틀림없이 옳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점에서는, 그의 신문 『소비에트』(Il Soviet, 1920년 1월 18일과 2월 1일 자 제3호와 제4호) 두 호, 세라티 동지의 훌륭한 잡지 『코무니스모』(Comunismo, 1919년 10월 1일~11월 30일 자 제1~4호) 네 권, 그리고 내가 볼 수 있었던 이탈리아 부르주아 신문 몇 호로 판단할 수 있는 한, 그가 옳은 것 같다. 곧 보르디가 동지와 그의 분파가 소비에트 권력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인정한 당에 남아 의회 의원으로 있으면서 낡고 해로운 기회주의 정책을 계속하는 투라티와 그 동조자들을 공격하는 것은 옳다. 물론 이를 참고 있는 세라티 동지와 이탈리아 사회당 전체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며, 그 잘못은 헝가리의 투라티 씨들이 당과 소비에트 권력을 안에서 사보타주한 헝가리에서와 같은 깊은 해와 위험을 불러올 수 있다. 기회주의적 의회 의원들에 대한 이런 잘못되고 일관되지 못하거나 줏대 없는 태도는 한편으로 「좌익」 공산주의를 낳고, 다른 한편으로 어느 정도 그 존재를 정당화한다. 세라티 동지가 의원 투라티를 「일관되지 못하다」고 비난하는 것은(『코무니스모』 제3호) 분명히 옳지 않다. 일관되지 못한 것은 바로 투라티 일당 같은 기회주의 의원들을 참고 있는 이탈리아 사회당이기 때문이다. ↩
- [옮긴이] 독일 공산당 안에서 의회 참여와 기존 노동조합 활동을 거부하던 반대파를 말한다. 1919년 10월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제2차 당대회가 이들을 당에서 몰아냈고, 반대파는 1920년 4월 독일 공산주의 노동자당(KAPD)을 세웠다. 아래에 인용되는 프랑크푸르트 그룹의 소책자와 함부르크의 라우펜베르크·볼프하임이 이 흐름에 속한다. ↩
- [옮긴이] 볼라퓌크(Volapük)는 1879년에 만들어진 인공 국제어다. 여기서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
- [옮긴이] 1920년 초판에는 「네덜란드 트리뷴파」라고 되어 있다. 헤르만 호르터와 안톤 판네쿠크가 이 네덜란드 좌익의 대표적 이론가였다. 호르터는 이 책에 답해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썼다. ↩
- [옮긴이] 레닌이 1919년 12월에 쓴 글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제7~8호(1919)에 실렸다. 제헌의회 선거 결과를 지역과 계급별로 분석하여 볼셰비키가 도시와 군대에서 이긴 까닭을 설명한다. ↩
- [옮긴이] 엥겔스가 1858년 10월 7일 마르크스에게 보낸 편지. 엥겔스는 여기서 영국 프롤레타리아트가 점점 더 부르주아화하고 있으며, 전 세계를 착취하는 나라에서는 이것이 어느 정도 당연하다고 썼다. ↩
- [옮긴이] 코민테른이 1919년 말 서유럽 연락을 위해 암스테르담에 둔 임시사무국. 세바스티안 뤼트허르스, 헤르만 호르터, 헨리에터 롤란트 홀스트, 안톤 판네쿠크 등 네덜란드 좌익이 주도했으며, 1920년 2월 회의에서 노동조합과 의회 문제에 관해 좌익적 테제를 냈다. 호르터는 『공개편지』에서 이 위원회 다수의 입장을 독일 공산주의 노동자당과 같은 편에 놓는다. 사무국은 1920년 5월 집행위원회 결정으로 해산되었다. ↩